사진은 역사를 말한다.
전북의 자화상 2
김재규 보안사령관1970년 11월 촬영
고 소병민 중령 동상 제막식이 열린 1970년 11월 30일.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기편으로 전주에 왔다.
김재규 사령관은 전북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소 중령은 전북 출신으로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무장 간첩을 사살하고 교전을 벌이다
전사한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치하했다.
화마에 사라진 금산사 보물 대적광전1986년 12월 촬영
금산사 대적광전이 6일 0시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국가 보물 47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과 보살 상좌,
오백나한 불상과 탱화 등이 있었다. 450년이나 된 목조건물인 대적광전은
뼈대만 앙상히 남은 시꺼먼 숯덩이로 변해 버렸다
영부인의 포근한 미소1967년 3월 촬영
육영수 여사는 1967년 3월 전라북도에 방문한 적이 있다.
15일 군산에 도착한 육영수 여사는 파월장병 가족을 위문하고
경성 고무공장과 이리 한성직물공장을 방문해
종업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윤보선 대통령 후보의 고함1967년 4월 촬영
1967년 5월 3일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신민당 후보와의 2파전이었다. 이날 윤보선 후보는 전주
공설운동장 유세 현장에서 현 정권의 부정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소값 파동 농민들 울상1968년 9월 촬영
1968년 여름, 소값이 폭락하자 농민들이 소를 내다 팔아 임실군도
속수무책이 됐다. 9월 1일 임실 우시장에서는 송아지(4개월)가
2만원선이었고, 암소(6~7년생)는 6~7만원, 황소(5년생) 역시
5~6만원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이날 우시장엔 소 300여 두,
송아지 100여 두 이상이 쏟아져나와 소값은 갈수록 하락할 전망이다
통근열차와 곡예사 1966년 9월 촬영
이리역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7시50분이면 전주에 도착하는
순천행 통근열차는 매일같이 콩나물시루가 됐다.
좌석은 100개로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때 통근 학생은 하루에만 1000여명. 일반 승객도
1000여명에 달해 기차는 늘 북적댔다.
학부모들은 자식들이 기차에 곡예사처럼 매달려 타고 다니는
걸 보며 불안에 떨었다.
박정희 대통령 고창 가뭄지구 시찰1968년 8월 촬영
가뭄이 심했던 고창군 상하면 용정부락에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장경순
국회부의장, 이환의 전북도지사 등이 현장을 방문해 채봉채 고창군수로부터
피해 상황을 보고 받았다.
박 대통령은 이 지역을 직접 돌아보고 항구적인 대책을 지시,
관정(管井·둥그렇게 판 우물)을 파서라도 피해를 줄이고 정부는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질서한 간판 숲1966년 9월 촬영
익산(이리) 시내 중앙로에 무질서하게 세워진 간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보기에도 문제지만, 이곳을 통과하는
각종 차량들과 행인들에게도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
시 당국은 도시계획법 위반을 적용, 무질서한 간판과 돌츌뮬을
철거해 깨끗하고 쾌적한 도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백건우·윤정희 부부의 전주 나들이1977년 10월 촬영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영화배우 윤정희씨.
이들 부부가 나란히 전주를 방문했다. 1977년 10월 5일
전북일보가 주최하는 백건우씨의 독주회가 전주삼남극장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이날 백건우씨는 쇼팽의 '24개의 전주곡', 리스트의
'바흐 동기에 의한 변주곡', 리스트의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왈츠' 등 10곡을 연주했다.
우공의 시위1985년 촬영
완주군 농민회 고산지부 축산 농가 500여 명은 소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전경들은 최류탄을 쏘면서 데모를 진압하려 했으나,
소를 앞세운 농민들은 전경들에게 돌진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무장 탈영병 진다방 인질극1973년 5월 촬영
1973년 5월 11일 새벽 6시30분경 무장탈영한 병사가 전주 서노송동
결혼회관 지하에 있는 진다방에 침입했다. 부대를 탈영한 뒤 전주까지
오는 동안 2명을 죽이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힌 그는 진다방에서 군경과
4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이다 주방장과 손님 5명을 사살하고 말았다.
"살기 싫다. 어머니가 보고싶다"는 그의 말에 따라 탈영병의 어머니가
인질극 현장까지 들어가 설득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새마음갖기국민운동 명예총재 박근혜1977년 4월 촬영
'새마음갖기 시민궐기대회 및 구국여성 봉사단 전북지부 결단대회'가
열린 1977년 4월 28일. 새마음갖기 국민운동 명예총재였던
박근혜 의원이 대회가 열린 전주실내체육관을 찾았다.
이 때 박근혜 의원의 나이는 스물다섯. 어린 나이였지만
명예총재를 맡고 있던 박근혜 의원은 "여러분의 꾸준한 노력이
화목한 가정과 명랑한 사회를 이루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의
장래를 밝게 해준다"며 격려사를 했다.
덕진연못과 빨래터1967년 5월 촬영
덕진연못은 7월이면 연꽃이 만발해 연못 전체가 꽃내음으로 가득 찼다.
덕진연못이 공원으로 잘 조성되면서 지금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연화교가 밤에는 휘황찬란한 경관조명이 불야성을 이룬다.
낮에는 음악분수가, 야간에는 영상음악분수쇼가 시민들에게 인기다
추억속으로 사라진 옛 전주우체국1969년 5월 촬영
1979년 12월12일 전주 우체국은 전주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인
옛 공보관 사거리에 옛 청사를 헐고 현 청사를 준공했다.
당시 전북일보사가 주최한 세계 최고의 동방 서커스단이 내한
공연한다는 아치가 이채롭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전주 우체국
건물은 사진으로만 추억 속에 남아 있다.
이병철 삼성회장 전주제지 1호기 준공식 참석1968년 9월 촬영
1968년 삼성물산 이병철 회장이 전주제지 생산기계 1호기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주에 왔다. 이병철 회장은 기념사에서 "도민들의
뜨거운 성원 덕분에 전주제지 1호기를 준공할 수 있었다"며
전북 경제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행사가 끝난 뒤
이회장은 박용상 사장과 함께 전주제지 공장을 시찰했다.
세계 이목 집중시킨 중공어뢰정1985년 3월 촬영
1985년 오전 11시경 서해에서 표류 중이던 중공해군 어뢰정
(40t급 P6) 한 척이 우리 어선에 구조, 예인돼 부안 하왕등도에 정박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서해 소흑산도 근해에서 조업을 마치고 귀항 중이던
우리 어선 제6어청호가 중공군 어뢰정이 구조를 요청해 예인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중공어뢰정 사건 경위를 "어뢰정에 타고 있던 승무원 2명이
상관에 불마을 품고 6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처벌이 두려워 공해상을 전전하다
연료가 떨어져 표류하던 중 우리 어선이 구조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서원(書院) 너머… 속칭 '산너머'로 불려1974년 3월 촬영
지금도 전주 중화산동에는 서원비가 있다. 서원비에는 화산서원과
희현당, 그리고 황학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연유로 '화산을
넘어 서원이 있다'고 해 '화산 서원 너머'를 '선너머'로 부르게 됐다.
선너머는 젊은 사람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조상의 지혜 '물레'1974년 10월 촬영
옛날 서민들에게 여름옷으로 삼베만큼 좋은 게 없었다.
삼베는 '숭숭' 크게 뚫린 구멍으로 바람이 잘 통해, 삼베옷 하나면
무더운 여름철 지내는 데는 그만이었다.
삼(대마)나무는 여름에 수확해 큰 가마솥에 삶아 껍질을 벗겨
말린 후, 가늘게 여러 가닥으로 쪼개졌다.
아낙네들은 쪼개진 가닥을 무릎 위에 놓고 서로 이어
손으로 비벼 긴 실을 만들어 삼베를 짰다
전주의 상징, 전주부성 풍남문1966년 10월 촬영
전주부성 풍남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으로, 성벽이 헐린 후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주 4대문 중 하나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에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현재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에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전주천을 시민봉사대 정화사업1975년 4월16일 촬영
전주천을 공원처럼 말끔히 가꾸기 위해 1만8000여 명의 시민들이
도시 새마을 완장을 두르고 전주천 정화사업에 나섰다.
시민들은 아침 일찍 전주시 교동 한벽당 ~ 서신교 일대(4km)에
나와 잡초 제거와 오물 수거, 유수로·폐수로 바로 잡기 등에
참여했다. 주민들과 남부시장 상인들, 시청직원들 등은 하루종일
각 동별로 지정된 장소에서 전주천을 자기 집 손질하듯 말끔히
단장하는 협동심을 발휘했다.
보리타작과 보릿고개1965년 6월 촬영
정겨운 이 사진은 춘궁기를 이겨내고 수확한 보리를 타작하는
농민들의 모습이다.
다시 못 볼 구 전주역사(驛舍)1982년 7월 촬영
1927년 5월 27일 준공된 전주역은 한식 건물로 반세기동안 전주 명물로
자리잡았다. 이후 54년 동안 전주역은 수많은 승객들의 희노애락을 실어날랐다.
나중에 전주역은 보존과 철거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도시개발저해라는
공익 우선의 사고방식에 밀려 철거가 결정됐다.
대입체력장 팔굽혀 매달리기1981년 9월 촬영
1981년 9월, 1982학년도 대학 입시를 위한 체력검사가 도내 곳곳에서 열렸다.
이 때 체력장은 대학 입학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신에 반영되는 것으로,
자기 능력껏 점수를 딸 수 있는 절대평가였기 때문에 수험생들은 한 점이라도
더 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수검종목은 남학생은 100m 달리기와 제자리
멀리뛰기, 던지기, 턱걸이였으며, 여학생은 팔굽혀매달리기와 윗몸 일으키기
등 5개 종목이었다. 만점은 20점. 도 교육청은 정상적인 체육수업을 받은
학생이면 거의 만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대입체력장은 등록만 하면 15점,
결시를 하더라도 수험현장에 나오기만 해도 16점은 딸 수 있었다.
농촌 새마을운동1974년 6월 촬영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온 동네 사람들이 새벽부터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삽과 괭이를 들고 공통 일터로 나가고 있다.
시민들은 작목반을 조직, 농촌지도원과 비지땀을 흘리며 새기술을 익혔다.
근면·자조·협동을 내건 새마을 운동은 국가 성장에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지 40여 년이 지난 현재도 저개발 국가에서는
우리나라에 와서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배워가고 있다.
평화선(線) 사수 한일협상반대 전북대생 데모1965년 4월 촬영
전북대 법대, 문리대, 상대, 농대 등 4개 학과 500여명이
'어민들은 통곡한다 사수하자 평화선'이라고 쓴 플랜카드를 들고
한일 협상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출동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경찰은 곤봉과 최류탄으로 학생들을 해산하려 했으나
잠종장(지금 전북대 정문 부근) 철길까지 밀린 학생들은 철길서 격렬한
데모를 벌였다. 사진은 학교 옆 철길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 학생들.
6.25당시 전주교도소서 학살당한 115기 무연고 묘지1975년 6월 촬영
6·25가 발발하면서 1950년 9월 24~25일, 북괴보위부 사람들이
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300여 명의 수감자를 곡갱이와 몽둥이로
처참히 학살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이때 희생된 인사 가운데 정진희
유준상(입법의원), 정우상(변호사), 조은(경찰) 등이 희생됐다.
그 때 찾아가지 못했던 시신 115기는 교도소 앞 산에 합동 매장됐다가
1972년 교도소가 평화동으로 이전되기 전 효자동 공원묘지로 이장됐다.
부안 위도 첫 고등공민학교1965년 2월 촬영
위도 고등공민학교가 1951년 3월 부안군 위도면 진리부락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뜻있는 주민들이 의기투합해 마을회관으로 사용됐던
집을 학교로 세운 것이다. 당시 위도에는 중학교가 없어 육지로 유학을 가지
못한 학생들이 이곳에서 중학교 과정을 익혔다.
내년 풍년을 기약하면서1967년 10월 촬영
1967년 당시 도내 쌀 생산량은 340만석으로 전년도와 비교해
80만석이 감소돼 식량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농림부 발표에 따르면
농민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은 4.1홉, 비농민은 3.5홉으로 평균 3.5홉이었다.
결국 도민들의 식량은 90만석이 모자라 잡곡 30%를 섞어 먹어야 부족한
양이 채워졌다. 사진은 한 농부가 내년을 기약하면서 쟁기로
논을 갈고 있는 모습이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 시국토론회1987년 6월 촬영
전북대를 비롯해 원광대, 우석대, 군산대, 한일신학교, 예수병원간호전문대생
2000여 명이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깃발을 올리자'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뿌리면서 밤늦게까지 시위했다. 시위대는 전주·익산·군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전북본부의 국민평화대행진을 끝낸 뒤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민주 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주 관통로에서는 학생들이
모여 밤늦게까지 횃불을 밝히면서 토론회를 벌였다.
사진 속 마이크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이광철 전 국회의원이다.
전주 관문 호남 제일문1977년 9월 촬영
전주 진입로에 세워진 호남 제일문 현판 제막식이 1977년 9월15일 열렸다.
새로운 명소로 등장했던 호남 제일문은 지붕을 제외하고 모두 최신 공법으로 세워졌다.
건물 면적은 92m(28평)으로 길이가 18m, 너비 6m, 높이 10m50cm로
조선문루(朝鮮門樓)의 8작 지붕이었다. 그러나 전주시에서 1993년 9월 기존의
호남제일문을 철거하고 1994년 8월13일 8작지붕을 겹쳐 전통 한옥지붕으로
만들었다. 길이 43m, 폭 3.5m, 높이 12.4m에 이르는 육교까지 만들어 전주에
관문으로 현재까지 이르고
한 때 학원으로 사용됐던 전주 객사1968년 2월 촬영
전주 객사의 새 이름은 풍패지관(豊沛之館)이다.
이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전주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내삼문, 중삼문, 외삼문이 있었다.
실제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객사는 조정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 묵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했던 곳이다.
바다에서 딸을 잃은 엄마의 통곡1972년 3월 촬영
부안군 행안면에서 백합 양식장으로 가던 전마선(2t급)이 급류에 뒤집히면서
16명이 사망하고, 4명이 구조되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경찰당국은 정원 2배가 넘는 20명을 태우고 조개를 캐러 개화도 1호 방조제
배수갑문을 지나가던 중 급류에 밀려 배가 중심을 잃고
전복해 벌어진 사고라고 발혔다.
이날 사망자 가족과 친지들의 통곡과 비통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특히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병원비라도 벌기 위해 처음으로
양식장에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장양(16·전주 숭실고등공민학교)의
사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새학기에 입고 갈 장양의 교복을 들고 나와 말없이
떠 있는 사고배를 바라보면서 통곡을 하고 있다.
하늘에서 바라본 45년 전 덕진공원1965년 6월 촬영
이 사진은 1965년 6월 단오날 인파로 덕진연못을 꽉 채운 모습을 항공에서
촬영한 것이다. 45년 전 허허벌판이었던 덕진연못을 촬영한 사진.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 60대 이상 어른들에게는
'그 때 그 시절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당시 전주역에서 동산촌을 잇는
철길(중앙으로 가로지르는 선)은 덕진연못(지금 연지문)을 통과했다.
손 흔들어주기 운동1966년 6월 촬영
^*&*^
[출처] 사진은 역사를 말한다.전북의 자화상 2|작성자 청봉 산인 이범구
사진은 역사를 말한다.
전북의 자화상 2
김재규 보안사령관1970년 11월 촬영
고 소병민 중령 동상 제막식이 열린 1970년 11월 30일.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기편으로 전주에 왔다.
김재규 사령관은 전북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소 중령은 전북 출신으로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무장 간첩을 사살하고 교전을 벌이다
전사한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치하했다.
화마에 사라진 금산사 보물 대적광전1986년 12월 촬영
금산사 대적광전이 6일 0시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국가 보물 47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과 보살 상좌,
오백나한 불상과 탱화 등이 있었다. 450년이나 된 목조건물인 대적광전은
뼈대만 앙상히 남은 시꺼먼 숯덩이로 변해 버렸다
영부인의 포근한 미소1967년 3월 촬영
육영수 여사는 1967년 3월 전라북도에 방문한 적이 있다.
15일 군산에 도착한 육영수 여사는 파월장병 가족을 위문하고
경성 고무공장과 이리 한성직물공장을 방문해
종업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윤보선 대통령 후보의 고함1967년 4월 촬영
1967년 5월 3일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신민당 후보와의 2파전이었다. 이날 윤보선 후보는 전주
공설운동장 유세 현장에서 현 정권의 부정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소값 파동 농민들 울상1968년 9월 촬영
1968년 여름, 소값이 폭락하자 농민들이 소를 내다 팔아 임실군도
속수무책이 됐다. 9월 1일 임실 우시장에서는 송아지(4개월)가
2만원선이었고, 암소(6~7년생)는 6~7만원, 황소(5년생) 역시
5~6만원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이날 우시장엔 소 300여 두,
송아지 100여 두 이상이 쏟아져나와 소값은 갈수록 하락할 전망이다
통근열차와 곡예사 1966년 9월 촬영
이리역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7시50분이면 전주에 도착하는
순천행 통근열차는 매일같이 콩나물시루가 됐다.
좌석은 100개로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때 통근 학생은 하루에만 1000여명. 일반 승객도
1000여명에 달해 기차는 늘 북적댔다.
학부모들은 자식들이 기차에 곡예사처럼 매달려 타고 다니는
걸 보며 불안에 떨었다.
박정희 대통령 고창 가뭄지구 시찰1968년 8월 촬영
가뭄이 심했던 고창군 상하면 용정부락에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장경순
국회부의장, 이환의 전북도지사 등이 현장을 방문해 채봉채 고창군수로부터
피해 상황을 보고 받았다.
박 대통령은 이 지역을 직접 돌아보고 항구적인 대책을 지시,
관정(管井·둥그렇게 판 우물)을 파서라도 피해를 줄이고 정부는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질서한 간판 숲1966년 9월 촬영
익산(이리) 시내 중앙로에 무질서하게 세워진 간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보기에도 문제지만, 이곳을 통과하는
각종 차량들과 행인들에게도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
시 당국은 도시계획법 위반을 적용, 무질서한 간판과 돌츌뮬을
철거해 깨끗하고 쾌적한 도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백건우·윤정희 부부의 전주 나들이1977년 10월 촬영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영화배우 윤정희씨.
이들 부부가 나란히 전주를 방문했다. 1977년 10월 5일
전북일보가 주최하는 백건우씨의 독주회가 전주삼남극장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이날 백건우씨는 쇼팽의 '24개의 전주곡', 리스트의
'바흐 동기에 의한 변주곡', 리스트의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왈츠' 등 10곡을 연주했다.
우공의 시위1985년 촬영
완주군 농민회 고산지부 축산 농가 500여 명은 소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전경들은 최류탄을 쏘면서 데모를 진압하려 했으나,
소를 앞세운 농민들은 전경들에게 돌진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무장 탈영병 진다방 인질극1973년 5월 촬영
1973년 5월 11일 새벽 6시30분경 무장탈영한 병사가 전주 서노송동
결혼회관 지하에 있는 진다방에 침입했다. 부대를 탈영한 뒤 전주까지
오는 동안 2명을 죽이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힌 그는 진다방에서 군경과
4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이다 주방장과 손님 5명을 사살하고 말았다.
"살기 싫다. 어머니가 보고싶다"는 그의 말에 따라 탈영병의 어머니가
인질극 현장까지 들어가 설득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새마음갖기국민운동 명예총재 박근혜1977년 4월 촬영
'새마음갖기 시민궐기대회 및 구국여성 봉사단 전북지부 결단대회'가
열린 1977년 4월 28일. 새마음갖기 국민운동 명예총재였던
박근혜 의원이 대회가 열린 전주실내체육관을 찾았다.
이 때 박근혜 의원의 나이는 스물다섯. 어린 나이였지만
명예총재를 맡고 있던 박근혜 의원은 "여러분의 꾸준한 노력이
화목한 가정과 명랑한 사회를 이루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의
장래를 밝게 해준다"며 격려사를 했다.
덕진연못과 빨래터1967년 5월 촬영
덕진연못은 7월이면 연꽃이 만발해 연못 전체가 꽃내음으로 가득 찼다.
덕진연못이 공원으로 잘 조성되면서 지금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연화교가 밤에는 휘황찬란한 경관조명이 불야성을 이룬다.
낮에는 음악분수가, 야간에는 영상음악분수쇼가 시민들에게 인기다
추억속으로 사라진 옛 전주우체국1969년 5월 촬영
1979년 12월12일 전주 우체국은 전주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인
옛 공보관 사거리에 옛 청사를 헐고 현 청사를 준공했다.
당시 전북일보사가 주최한 세계 최고의 동방 서커스단이 내한
공연한다는 아치가 이채롭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전주 우체국
건물은 사진으로만 추억 속에 남아 있다.
이병철 삼성회장 전주제지 1호기 준공식 참석1968년 9월 촬영
1968년 삼성물산 이병철 회장이 전주제지 생산기계 1호기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주에 왔다. 이병철 회장은 기념사에서 "도민들의
뜨거운 성원 덕분에 전주제지 1호기를 준공할 수 있었다"며
전북 경제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행사가 끝난 뒤
이회장은 박용상 사장과 함께 전주제지 공장을 시찰했다.
세계 이목 집중시킨 중공어뢰정1985년 3월 촬영
1985년 오전 11시경 서해에서 표류 중이던 중공해군 어뢰정
(40t급 P6) 한 척이 우리 어선에 구조, 예인돼 부안 하왕등도에 정박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서해 소흑산도 근해에서 조업을 마치고 귀항 중이던
우리 어선 제6어청호가 중공군 어뢰정이 구조를 요청해 예인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중공어뢰정 사건 경위를 "어뢰정에 타고 있던 승무원 2명이
상관에 불마을 품고 6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처벌이 두려워 공해상을 전전하다
연료가 떨어져 표류하던 중 우리 어선이 구조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서원(書院) 너머… 속칭 '산너머'로 불려1974년 3월 촬영
지금도 전주 중화산동에는 서원비가 있다. 서원비에는 화산서원과
희현당, 그리고 황학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연유로 '화산을
넘어 서원이 있다'고 해 '화산 서원 너머'를 '선너머'로 부르게 됐다.
선너머는 젊은 사람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조상의 지혜 '물레'1974년 10월 촬영
옛날 서민들에게 여름옷으로 삼베만큼 좋은 게 없었다.
삼베는 '숭숭' 크게 뚫린 구멍으로 바람이 잘 통해, 삼베옷 하나면
무더운 여름철 지내는 데는 그만이었다.
삼(대마)나무는 여름에 수확해 큰 가마솥에 삶아 껍질을 벗겨
말린 후, 가늘게 여러 가닥으로 쪼개졌다.
아낙네들은 쪼개진 가닥을 무릎 위에 놓고 서로 이어
손으로 비벼 긴 실을 만들어 삼베를 짰다
전주의 상징, 전주부성 풍남문1966년 10월 촬영
전주부성 풍남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으로, 성벽이 헐린 후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주 4대문 중 하나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에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현재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에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전주천을 시민봉사대 정화사업1975년 4월16일 촬영
전주천을 공원처럼 말끔히 가꾸기 위해 1만8000여 명의 시민들이
도시 새마을 완장을 두르고 전주천 정화사업에 나섰다.
시민들은 아침 일찍 전주시 교동 한벽당 ~ 서신교 일대(4km)에
나와 잡초 제거와 오물 수거, 유수로·폐수로 바로 잡기 등에
참여했다. 주민들과 남부시장 상인들, 시청직원들 등은 하루종일
각 동별로 지정된 장소에서 전주천을 자기 집 손질하듯 말끔히
단장하는 협동심을 발휘했다.
보리타작과 보릿고개1965년 6월 촬영
정겨운 이 사진은 춘궁기를 이겨내고 수확한 보리를 타작하는
농민들의 모습이다.
다시 못 볼 구 전주역사(驛舍)1982년 7월 촬영
1927년 5월 27일 준공된 전주역은 한식 건물로 반세기동안 전주 명물로
자리잡았다. 이후 54년 동안 전주역은 수많은 승객들의 희노애락을 실어날랐다.
나중에 전주역은 보존과 철거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도시개발저해라는
공익 우선의 사고방식에 밀려 철거가 결정됐다.
대입체력장 팔굽혀 매달리기1981년 9월 촬영
1981년 9월, 1982학년도 대학 입시를 위한 체력검사가 도내 곳곳에서 열렸다.
이 때 체력장은 대학 입학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신에 반영되는 것으로,
자기 능력껏 점수를 딸 수 있는 절대평가였기 때문에 수험생들은 한 점이라도
더 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수검종목은 남학생은 100m 달리기와 제자리
멀리뛰기, 던지기, 턱걸이였으며, 여학생은 팔굽혀매달리기와 윗몸 일으키기
등 5개 종목이었다. 만점은 20점. 도 교육청은 정상적인 체육수업을 받은
학생이면 거의 만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대입체력장은 등록만 하면 15점,
결시를 하더라도 수험현장에 나오기만 해도 16점은 딸 수 있었다.
농촌 새마을운동1974년 6월 촬영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온 동네 사람들이 새벽부터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삽과 괭이를 들고 공통 일터로 나가고 있다.
시민들은 작목반을 조직, 농촌지도원과 비지땀을 흘리며 새기술을 익혔다.
근면·자조·협동을 내건 새마을 운동은 국가 성장에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지 40여 년이 지난 현재도 저개발 국가에서는
우리나라에 와서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배워가고 있다.
평화선(線) 사수 한일협상반대 전북대생 데모1965년 4월 촬영
전북대 법대, 문리대, 상대, 농대 등 4개 학과 500여명이
'어민들은 통곡한다 사수하자 평화선'이라고 쓴 플랜카드를 들고
한일 협상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출동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경찰은 곤봉과 최류탄으로 학생들을 해산하려 했으나
잠종장(지금 전북대 정문 부근) 철길까지 밀린 학생들은 철길서 격렬한
데모를 벌였다. 사진은 학교 옆 철길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 학생들.
6.25당시 전주교도소서 학살당한 115기 무연고 묘지1975년 6월 촬영
6·25가 발발하면서 1950년 9월 24~25일, 북괴보위부 사람들이
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300여 명의 수감자를 곡갱이와 몽둥이로
처참히 학살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이때 희생된 인사 가운데 정진희
유준상(입법의원), 정우상(변호사), 조은(경찰) 등이 희생됐다.
그 때 찾아가지 못했던 시신 115기는 교도소 앞 산에 합동 매장됐다가
1972년 교도소가 평화동으로 이전되기 전 효자동 공원묘지로 이장됐다.
부안 위도 첫 고등공민학교1965년 2월 촬영
위도 고등공민학교가 1951년 3월 부안군 위도면 진리부락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뜻있는 주민들이 의기투합해 마을회관으로 사용됐던
집을 학교로 세운 것이다. 당시 위도에는 중학교가 없어 육지로 유학을 가지
못한 학생들이 이곳에서 중학교 과정을 익혔다.
내년 풍년을 기약하면서1967년 10월 촬영
1967년 당시 도내 쌀 생산량은 340만석으로 전년도와 비교해
80만석이 감소돼 식량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농림부 발표에 따르면
농민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은 4.1홉, 비농민은 3.5홉으로 평균 3.5홉이었다.
결국 도민들의 식량은 90만석이 모자라 잡곡 30%를 섞어 먹어야 부족한
양이 채워졌다. 사진은 한 농부가 내년을 기약하면서 쟁기로
논을 갈고 있는 모습이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 시국토론회1987년 6월 촬영
전북대를 비롯해 원광대, 우석대, 군산대, 한일신학교, 예수병원간호전문대생
2000여 명이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깃발을 올리자'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뿌리면서 밤늦게까지 시위했다. 시위대는 전주·익산·군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전북본부의 국민평화대행진을 끝낸 뒤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민주 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주 관통로에서는 학생들이
모여 밤늦게까지 횃불을 밝히면서 토론회를 벌였다.
사진 속 마이크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이광철 전 국회의원이다.
전주 관문 호남 제일문1977년 9월 촬영
전주 진입로에 세워진 호남 제일문 현판 제막식이 1977년 9월15일 열렸다.
새로운 명소로 등장했던 호남 제일문은 지붕을 제외하고 모두 최신 공법으로 세워졌다.
건물 면적은 92m(28평)으로 길이가 18m, 너비 6m, 높이 10m50cm로
조선문루(朝鮮門樓)의 8작 지붕이었다. 그러나 전주시에서 1993년 9월 기존의
호남제일문을 철거하고 1994년 8월13일 8작지붕을 겹쳐 전통 한옥지붕으로
만들었다. 길이 43m, 폭 3.5m, 높이 12.4m에 이르는 육교까지 만들어 전주에
관문으로 현재까지 이르고
한 때 학원으로 사용됐던 전주 객사1968년 2월 촬영
전주 객사의 새 이름은 풍패지관(豊沛之館)이다.
이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전주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내삼문, 중삼문, 외삼문이 있었다.
실제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객사는 조정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 묵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했던 곳이다.
바다에서 딸을 잃은 엄마의 통곡1972년 3월 촬영
부안군 행안면에서 백합 양식장으로 가던 전마선(2t급)이 급류에 뒤집히면서
16명이 사망하고, 4명이 구조되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경찰당국은 정원 2배가 넘는 20명을 태우고 조개를 캐러 개화도 1호 방조제
배수갑문을 지나가던 중 급류에 밀려 배가 중심을 잃고
전복해 벌어진 사고라고 발혔다.
이날 사망자 가족과 친지들의 통곡과 비통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특히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병원비라도 벌기 위해 처음으로
양식장에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장양(16·전주 숭실고등공민학교)의
사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새학기에 입고 갈 장양의 교복을 들고 나와 말없이
떠 있는 사고배를 바라보면서 통곡을 하고 있다.
하늘에서 바라본 45년 전 덕진공원1965년 6월 촬영
이 사진은 1965년 6월 단오날 인파로 덕진연못을 꽉 채운 모습을 항공에서
촬영한 것이다. 45년 전 허허벌판이었던 덕진연못을 촬영한 사진.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 60대 이상 어른들에게는
'그 때 그 시절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당시 전주역에서 동산촌을 잇는
철길(중앙으로 가로지르는 선)은 덕진연못(지금 연지문)을 통과했다.
손 흔들어주기 운동1966년 6월 촬영
^*&*^
[출처] 사진은 역사를 말한다.전북의 자화상 2|작성자 청봉 산인 이범구
사진은 역사를 말한다.
전북의 자화상 2
김재규 보안사령관1970년 11월 촬영
고 소병민 중령 동상 제막식이 열린 1970년 11월 30일.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기편으로 전주에 왔다.
김재규 사령관은 전북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소 중령은 전북 출신으로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무장 간첩을 사살하고 교전을 벌이다
전사한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치하했다.
화마에 사라진 금산사 보물 대적광전1986년 12월 촬영
금산사 대적광전이 6일 0시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국가 보물 47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과 보살 상좌,
오백나한 불상과 탱화 등이 있었다. 450년이나 된 목조건물인 대적광전은
뼈대만 앙상히 남은 시꺼먼 숯덩이로 변해 버렸다
영부인의 포근한 미소1967년 3월 촬영
육영수 여사는 1967년 3월 전라북도에 방문한 적이 있다.
15일 군산에 도착한 육영수 여사는 파월장병 가족을 위문하고
경성 고무공장과 이리 한성직물공장을 방문해
종업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윤보선 대통령 후보의 고함1967년 4월 촬영
1967년 5월 3일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신민당 후보와의 2파전이었다. 이날 윤보선 후보는 전주
공설운동장 유세 현장에서 현 정권의 부정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소값 파동 농민들 울상1968년 9월 촬영
1968년 여름, 소값이 폭락하자 농민들이 소를 내다 팔아 임실군도
속수무책이 됐다. 9월 1일 임실 우시장에서는 송아지(4개월)가
2만원선이었고, 암소(6~7년생)는 6~7만원, 황소(5년생) 역시
5~6만원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이날 우시장엔 소 300여 두,
송아지 100여 두 이상이 쏟아져나와 소값은 갈수록 하락할 전망이다
통근열차와 곡예사 1966년 9월 촬영
이리역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해 7시50분이면 전주에 도착하는
순천행 통근열차는 매일같이 콩나물시루가 됐다.
좌석은 100개로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때 통근 학생은 하루에만 1000여명. 일반 승객도
1000여명에 달해 기차는 늘 북적댔다.
학부모들은 자식들이 기차에 곡예사처럼 매달려 타고 다니는
걸 보며 불안에 떨었다.
박정희 대통령 고창 가뭄지구 시찰1968년 8월 촬영
가뭄이 심했던 고창군 상하면 용정부락에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장경순
국회부의장, 이환의 전북도지사 등이 현장을 방문해 채봉채 고창군수로부터
피해 상황을 보고 받았다.
박 대통령은 이 지역을 직접 돌아보고 항구적인 대책을 지시,
관정(管井·둥그렇게 판 우물)을 파서라도 피해를 줄이고 정부는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질서한 간판 숲1966년 9월 촬영
익산(이리) 시내 중앙로에 무질서하게 세워진 간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보기에도 문제지만, 이곳을 통과하는
각종 차량들과 행인들에게도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
시 당국은 도시계획법 위반을 적용, 무질서한 간판과 돌츌뮬을
철거해 깨끗하고 쾌적한 도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백건우·윤정희 부부의 전주 나들이1977년 10월 촬영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영화배우 윤정희씨.
이들 부부가 나란히 전주를 방문했다. 1977년 10월 5일
전북일보가 주최하는 백건우씨의 독주회가 전주삼남극장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이날 백건우씨는 쇼팽의 '24개의 전주곡', 리스트의
'바흐 동기에 의한 변주곡', 리스트의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왈츠' 등 10곡을 연주했다.
우공의 시위1985년 촬영
완주군 농민회 고산지부 축산 농가 500여 명은 소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전경들은 최류탄을 쏘면서 데모를 진압하려 했으나,
소를 앞세운 농민들은 전경들에게 돌진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무장 탈영병 진다방 인질극1973년 5월 촬영
1973년 5월 11일 새벽 6시30분경 무장탈영한 병사가 전주 서노송동
결혼회관 지하에 있는 진다방에 침입했다. 부대를 탈영한 뒤 전주까지
오는 동안 2명을 죽이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힌 그는 진다방에서 군경과
4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이다 주방장과 손님 5명을 사살하고 말았다.
"살기 싫다. 어머니가 보고싶다"는 그의 말에 따라 탈영병의 어머니가
인질극 현장까지 들어가 설득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새마음갖기국민운동 명예총재 박근혜1977년 4월 촬영
'새마음갖기 시민궐기대회 및 구국여성 봉사단 전북지부 결단대회'가
열린 1977년 4월 28일. 새마음갖기 국민운동 명예총재였던
박근혜 의원이 대회가 열린 전주실내체육관을 찾았다.
이 때 박근혜 의원의 나이는 스물다섯. 어린 나이였지만
명예총재를 맡고 있던 박근혜 의원은 "여러분의 꾸준한 노력이
화목한 가정과 명랑한 사회를 이루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의
장래를 밝게 해준다"며 격려사를 했다.
덕진연못과 빨래터1967년 5월 촬영
덕진연못은 7월이면 연꽃이 만발해 연못 전체가 꽃내음으로 가득 찼다.
덕진연못이 공원으로 잘 조성되면서 지금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연화교가 밤에는 휘황찬란한 경관조명이 불야성을 이룬다.
낮에는 음악분수가, 야간에는 영상음악분수쇼가 시민들에게 인기다
추억속으로 사라진 옛 전주우체국1969년 5월 촬영
1979년 12월12일 전주 우체국은 전주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인
옛 공보관 사거리에 옛 청사를 헐고 현 청사를 준공했다.
당시 전북일보사가 주최한 세계 최고의 동방 서커스단이 내한
공연한다는 아치가 이채롭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전주 우체국
건물은 사진으로만 추억 속에 남아 있다.
이병철 삼성회장 전주제지 1호기 준공식 참석1968년 9월 촬영
1968년 삼성물산 이병철 회장이 전주제지 생산기계 1호기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주에 왔다. 이병철 회장은 기념사에서 "도민들의
뜨거운 성원 덕분에 전주제지 1호기를 준공할 수 있었다"며
전북 경제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행사가 끝난 뒤
이회장은 박용상 사장과 함께 전주제지 공장을 시찰했다.
세계 이목 집중시킨 중공어뢰정1985년 3월 촬영
1985년 오전 11시경 서해에서 표류 중이던 중공해군 어뢰정
(40t급 P6) 한 척이 우리 어선에 구조, 예인돼 부안 하왕등도에 정박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서해 소흑산도 근해에서 조업을 마치고 귀항 중이던
우리 어선 제6어청호가 중공군 어뢰정이 구조를 요청해 예인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중공어뢰정 사건 경위를 "어뢰정에 타고 있던 승무원 2명이
상관에 불마을 품고 6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처벌이 두려워 공해상을 전전하다
연료가 떨어져 표류하던 중 우리 어선이 구조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서원(書院) 너머… 속칭 '산너머'로 불려1974년 3월 촬영
지금도 전주 중화산동에는 서원비가 있다. 서원비에는 화산서원과
희현당, 그리고 황학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연유로 '화산을
넘어 서원이 있다'고 해 '화산 서원 너머'를 '선너머'로 부르게 됐다.
선너머는 젊은 사람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조상의 지혜 '물레'1974년 10월 촬영
옛날 서민들에게 여름옷으로 삼베만큼 좋은 게 없었다.
삼베는 '숭숭' 크게 뚫린 구멍으로 바람이 잘 통해, 삼베옷 하나면
무더운 여름철 지내는 데는 그만이었다.
삼(대마)나무는 여름에 수확해 큰 가마솥에 삶아 껍질을 벗겨
말린 후, 가늘게 여러 가닥으로 쪼개졌다.
아낙네들은 쪼개진 가닥을 무릎 위에 놓고 서로 이어
손으로 비벼 긴 실을 만들어 삼베를 짰다
전주의 상징, 전주부성 풍남문1966년 10월 촬영
전주부성 풍남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으로, 성벽이 헐린 후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주 4대문 중 하나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에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현재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에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전주천을 시민봉사대 정화사업1975년 4월16일 촬영
전주천을 공원처럼 말끔히 가꾸기 위해 1만8000여 명의 시민들이
도시 새마을 완장을 두르고 전주천 정화사업에 나섰다.
시민들은 아침 일찍 전주시 교동 한벽당 ~ 서신교 일대(4km)에
나와 잡초 제거와 오물 수거, 유수로·폐수로 바로 잡기 등에
참여했다. 주민들과 남부시장 상인들, 시청직원들 등은 하루종일
각 동별로 지정된 장소에서 전주천을 자기 집 손질하듯 말끔히
단장하는 협동심을 발휘했다.
보리타작과 보릿고개1965년 6월 촬영
정겨운 이 사진은 춘궁기를 이겨내고 수확한 보리를 타작하는
농민들의 모습이다.
다시 못 볼 구 전주역사(驛舍)1982년 7월 촬영
1927년 5월 27일 준공된 전주역은 한식 건물로 반세기동안 전주 명물로
자리잡았다. 이후 54년 동안 전주역은 수많은 승객들의 희노애락을 실어날랐다.
나중에 전주역은 보존과 철거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도시개발저해라는
공익 우선의 사고방식에 밀려 철거가 결정됐다.
대입체력장 팔굽혀 매달리기1981년 9월 촬영
1981년 9월, 1982학년도 대학 입시를 위한 체력검사가 도내 곳곳에서 열렸다.
이 때 체력장은 대학 입학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신에 반영되는 것으로,
자기 능력껏 점수를 딸 수 있는 절대평가였기 때문에 수험생들은 한 점이라도
더 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수검종목은 남학생은 100m 달리기와 제자리
멀리뛰기, 던지기, 턱걸이였으며, 여학생은 팔굽혀매달리기와 윗몸 일으키기
등 5개 종목이었다. 만점은 20점. 도 교육청은 정상적인 체육수업을 받은
학생이면 거의 만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대입체력장은 등록만 하면 15점,
결시를 하더라도 수험현장에 나오기만 해도 16점은 딸 수 있었다.
농촌 새마을운동1974년 6월 촬영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온 동네 사람들이 새벽부터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삽과 괭이를 들고 공통 일터로 나가고 있다.
시민들은 작목반을 조직, 농촌지도원과 비지땀을 흘리며 새기술을 익혔다.
근면·자조·협동을 내건 새마을 운동은 국가 성장에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지 40여 년이 지난 현재도 저개발 국가에서는
우리나라에 와서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배워가고 있다.
평화선(線) 사수 한일협상반대 전북대생 데모1965년 4월 촬영
전북대 법대, 문리대, 상대, 농대 등 4개 학과 500여명이
'어민들은 통곡한다 사수하자 평화선'이라고 쓴 플랜카드를 들고
한일 협상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출동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경찰은 곤봉과 최류탄으로 학생들을 해산하려 했으나
잠종장(지금 전북대 정문 부근) 철길까지 밀린 학생들은 철길서 격렬한
데모를 벌였다. 사진은 학교 옆 철길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 학생들.
6.25당시 전주교도소서 학살당한 115기 무연고 묘지1975년 6월 촬영
6·25가 발발하면서 1950년 9월 24~25일, 북괴보위부 사람들이
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300여 명의 수감자를 곡갱이와 몽둥이로
처참히 학살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이때 희생된 인사 가운데 정진희
유준상(입법의원), 정우상(변호사), 조은(경찰) 등이 희생됐다.
그 때 찾아가지 못했던 시신 115기는 교도소 앞 산에 합동 매장됐다가
1972년 교도소가 평화동으로 이전되기 전 효자동 공원묘지로 이장됐다.
부안 위도 첫 고등공민학교1965년 2월 촬영
위도 고등공민학교가 1951년 3월 부안군 위도면 진리부락에서
개교식을 가졌다. 뜻있는 주민들이 의기투합해 마을회관으로 사용됐던
집을 학교로 세운 것이다. 당시 위도에는 중학교가 없어 육지로 유학을 가지
못한 학생들이 이곳에서 중학교 과정을 익혔다.
내년 풍년을 기약하면서1967년 10월 촬영
1967년 당시 도내 쌀 생산량은 340만석으로 전년도와 비교해
80만석이 감소돼 식량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농림부 발표에 따르면
농민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은 4.1홉, 비농민은 3.5홉으로 평균 3.5홉이었다.
결국 도민들의 식량은 90만석이 모자라 잡곡 30%를 섞어 먹어야 부족한
양이 채워졌다. 사진은 한 농부가 내년을 기약하면서 쟁기로
논을 갈고 있는 모습이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 시국토론회1987년 6월 촬영
전북대를 비롯해 원광대, 우석대, 군산대, 한일신학교, 예수병원간호전문대생
2000여 명이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깃발을 올리자'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뿌리면서 밤늦게까지 시위했다. 시위대는 전주·익산·군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전북본부의 국민평화대행진을 끝낸 뒤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민주 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주 관통로에서는 학생들이
모여 밤늦게까지 횃불을 밝히면서 토론회를 벌였다.
사진 속 마이크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이광철 전 국회의원이다.
전주 관문 호남 제일문1977년 9월 촬영
전주 진입로에 세워진 호남 제일문 현판 제막식이 1977년 9월15일 열렸다.
새로운 명소로 등장했던 호남 제일문은 지붕을 제외하고 모두 최신 공법으로 세워졌다.
건물 면적은 92m(28평)으로 길이가 18m, 너비 6m, 높이 10m50cm로
조선문루(朝鮮門樓)의 8작 지붕이었다. 그러나 전주시에서 1993년 9월 기존의
호남제일문을 철거하고 1994년 8월13일 8작지붕을 겹쳐 전통 한옥지붕으로
만들었다. 길이 43m, 폭 3.5m, 높이 12.4m에 이르는 육교까지 만들어 전주에
관문으로 현재까지 이르고
한 때 학원으로 사용됐던 전주 객사1968년 2월 촬영
전주 객사의 새 이름은 풍패지관(豊沛之館)이다.
이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전주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내삼문, 중삼문, 외삼문이 있었다.
실제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객사는 조정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 묵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했던 곳이다.
바다에서 딸을 잃은 엄마의 통곡1972년 3월 촬영
부안군 행안면에서 백합 양식장으로 가던 전마선(2t급)이 급류에 뒤집히면서
16명이 사망하고, 4명이 구조되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경찰당국은 정원 2배가 넘는 20명을 태우고 조개를 캐러 개화도 1호 방조제
배수갑문을 지나가던 중 급류에 밀려 배가 중심을 잃고
전복해 벌어진 사고라고 발혔다.
이날 사망자 가족과 친지들의 통곡과 비통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특히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병원비라도 벌기 위해 처음으로
양식장에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장양(16·전주 숭실고등공민학교)의
사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새학기에 입고 갈 장양의 교복을 들고 나와 말없이
떠 있는 사고배를 바라보면서 통곡을 하고 있다.
하늘에서 바라본 45년 전 덕진공원1965년 6월 촬영
이 사진은 1965년 6월 단오날 인파로 덕진연못을 꽉 채운 모습을 항공에서
촬영한 것이다. 45년 전 허허벌판이었던 덕진연못을 촬영한 사진.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 60대 이상 어른들에게는
'그 때 그 시절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당시 전주역에서 동산촌을 잇는
철길(중앙으로 가로지르는 선)은 덕진연못(지금 연지문)을 통과했다.
손 흔들어주기 운동1966년 6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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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진은 역사를 말한다.전북의 자화상 2|작성자 청봉 산인 이범구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행복한 아침이 되세요.
감판숲을 보니 재미있네요. 그것이 우리의 옛날삺이 였으니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