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산방을 찾아서 8
겨울이 오는 길목이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는 낙엽이 거의 졌다. 갈색으로 물든 메타스퀘어도 시나브로 떨어지는 즈음이다. 십일월 마지막 날은 토요일이었다. 경주 산내에서 주말 농장을 가꾸는 친구와 오래 전 약속이 있어 비워두었다. 이번에는 경주터미널이 아닌 언양터미널에서 친구와 접선했다. 나는 이른 아침 창원에서 친구는 울산에서 출발해 언양에서 만났다.
친구는 울산을 떠나오면서 자기 집 이웃에 사는 또 다른 친구와 동행했다. 이 친구는 대학 동기생으로 그동안 서로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동행한 친구는 석남사에서 멀지 않은 산골 벽촌 분교에 근무하는 교사다. 평균치보다 뒤늦게 내년이면 교감 자격연수를 받는다고 했다. 지난 여름방학 때 함양 휴천 계곡에서 하룻밤 같이 보내면서 밀려둔 안부를 나눈 적 있는 사이다.
친구는 언양에서 석남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석남사 못 미쳐 오른쪽으로 꺾으면 운문사를 향하는 길과 경주 산내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우리는 문복산을 비켜 산내 방향으로 고개를 넘어 내려가니 면소재지가 나오고 당고개 근처 골짜기 친구 텃밭으로 들어갔다. 친구는 지난주까지 그곳에서 직접 가꾼 무와 배추로 처가와 본가의 여러 형제 몫까지 손수 김장을 해주었단다.
친구는 언 땅이 녹은 지난봄부터 지금까지 주말이면 그곳에서 이틀을 보낸다. 산나물과 약초를 심고 표고버섯을 땄다. 경제적 이득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여기시간 취미활동으로 우직하게 흙을 일구고 있다. 나는 올해 여섯 차례 들려 일손을 도와 풀을 베고 땀을 같이 흘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배낭에 뭔가 가득 담아왔다. 곰취와 당귀를 비롯한 토마토와 푸성귀들이었다.
친구는 텃밭 살림집 문에다 ‘지음산방’이라는 옥호를 서각으로 새겨 걸어 두었다. 이제 한 해가 저무는 때다. 그동안 친구는 겨울이면 텃밭 살림집에서 지내기 힘들었다. 깊은 산중이라 몹시 춥고 눈이라도 내리면 빙판길이 녹지 않아 드나들기 불편했다. 수도배관 물을 빼고 내년 봄 해동하면 들어갈 작정을 했다. 올해 텃밭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나하고 하루 함께 하려는 셈이다.
우리는 텃밭 살림집에 여장을 풀어놓고 곡차를 같이 나누면서 잠시 환담을 나누었다. 친구는 요즘 서각에 몰입해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금년 들어 한시 구절 다섯 점을 판목에 새겼고 이중섭 그림도 한 점 새겨 살림집에 걸어두었다. 지금은 천상병 시인의 ‘새’라는 시를 한글로 새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친구는 내가 현판에 새기려고 부탁한 서체와 안료와 방부재를 건네주었다.
산과 인접한 곳에 둘러친 울타리 철사그물을 단단하게 묶었다. 노루와 고라니가 내려와 애써 가꾼 작물을 뜯어먹어 친구는 속상해 했다. 철사그물을 둘러쳐놓아도 산짐승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밭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산중에서 농사를 짓다보면 산짐승과 공생하려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했다. 울타리를 손질하고 점심밥을 지어 먹었다. 친구는 텃밭에 오면서 반찬을 신경 써 장만했다.
점심 식후 표고버섯 참나무의 그늘막을 둘려 쳐주었다. 이후 친구는 지난주까지 김장을 끝내고 남은 배추를 마저 정리했다. 내가 배추를 뽑으면 친구는 소금에 절였다. 올해 배추 시세가 떨어졌다지만 친구 텃밭은 배추애벌레와 노루에게 뜯겨가며 살아남은 소중한 푸성귀였다. 친구는 내가 집으로 가져갈 수 있을 만큼의 배추를 소금에 절여 주었다. 경험에 의한 숙련된 솜씨였다.
절임이 어느 정도 되었을 무렵 나는 배추를 헹구어 물을 뺐다. 산골의 해는 짧아 산그늘이 빨리 내려왔다. 셋을 잔디마당 탁자에서 막걸리를 비우다가 기온이 내려가 살림집 거실로 옮겼다. 친구는 저녁에 안주하려고 과메기와 홍어를 마련해 왔다. 아까 낮에 해둔 밥은 거들떠보지 않고 곡차만 채우고 비우길 반복했다. 우리가 만나면 언제나 그렇듯 날짜변경선을 넘겨 잠에 들었다. 1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