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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묵상글 ( 연중 제13주일. -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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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연중 제1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라!
제 생각에 연중 제13주일의 주제는 ‘받아들임’입니다.
그리고 이 받아들임은 억지로 받아들임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요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고 물론 단 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쓴데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달게 받아들인다고 할 때 제일 많이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쓴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쓴소리를 해도 그것을 달게 받아들인다고 자주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쓴소리를 왜 달게 받아들입니까?
그것이 진정 우리에게 약이기 때문입니다.
약을 먹어야 우리의 몸의 병이 낫는데
미성숙한 어린애는 쓰다고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의정 곧 약에 단 것을 바릅니다.
그러니까 성숙한 어른이라면 쓴소리를 당의정처럼 달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입에 쓸지라도 몸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시는 것은 쓴소리뿐이 아닙니다.
죽음과 고통,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실패와 같은 것들도 달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런 것들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관건은 어떻게 그것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인데
사랑 특히 하느님 사랑으로 달게 받아들일 수 있고
사랑의 수난이야말로 당의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때문에 예언자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별개로 생각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이고,
예수님과 예언자나 가난한 이들을 별개가 아니라 동일시하는 것이며,
예수님 사랑으로 제자들과 예언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하나의 약속을 하십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는 것처럼
이들을 예수님으로 받아들이면 상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도 사도들처럼 나의 제자들이라면
뭐든지 달게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라!
죽음을 달게 받아들여 생명을 얻고,
십자가를 기꺼이 짐으로써 영생을 얻고,
주님 사랑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상을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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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연중 제1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받는 상급은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 신앙인들의 작음의 삶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신앙에 대한 지식이 쌓을수록 더 많이 실행하여야 하고 또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실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말씀이 존재 깊이 스며 있는 사람은 거룩한 지식을 헛되이 쓰지 않고 구체적으로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작음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홀로 있든지 함께 있든지 침묵안에서 작음 안에 담겨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그 침묵안에서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대처할 힘을 얻습니다. 사소한 일에 자신이 넘어지는 나약함을 깨닫게 되어 더 이상 우리의 작은 이기적 자아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자신보다 더 위대한 하느님의 힘에 의존하는 겸손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작은 은혜로 생각되는 것을 소중하게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큰 것으로 생각하고, 소홀히 여길 만한 것이라도 특별한 은혜로 생각할 때 우리의 신앙은 성장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느님이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매순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작음의 영성을 몸소 보여 주신 성 프란치스코는 어떤 크고 작은 결정을 하기 전이나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하느님의 손에 당신의 뜻대로 자기의 걸음을 인도하실 수 있도록 먼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항구히 마음에 간직하고 어디를 가든지 항상 자신안에다 은둔소를 만들도 다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영은 어떤 선을 행하실 때 그의 육신은 거짓 때문에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천한 자로 여기고 다른 모든 사람보다도 더 작은 자로 여김으로써 작음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게 해 줍니다.
이 작음의 영성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처럼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 쉬운 일 보다 고된 일을, 위로되는 일보다 위로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찾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작음의 영성의 근본 배경에는 소화 데레사 성녀의 일생이 증명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선행의 업적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반복되는 작은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합니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작은 가치들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중한 가치들을 깨닫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몬카다(Moncada)의 성체기적
스페인 - 1392년
그리고 나서 그 신부는 성령이 충만한 성탄절을 알리는 천사들의 송가를 불렀다. 주님께 영광을, 천상의 주님께 영광을, 그리고 선량한 마음을 가진 지상의 인간들에게 평화를 !
그 때 신부는 자신의 불안한 영혼에 평화가 깃들도록 아기예수에게 기도드렸다.
그 영광이, 기쁘고 즐겁게 이 넓은 성당에 울려 퍼졌다.
성당안 뒷편에서는 지친 백발의 노인과 가난한 노파가 조용히 세파에 시달려 주름살 많은 그들의 이마를 들어올렸다. 젊은이들은 희망에 가득차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은총이 가득찬 천사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 아이들처럼 선량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또한 성탄절의 기쁨을 가장 많이 누리고 있었다.
성스러운 미사는 계속되었다.
성령께서 제단 주위로 수천의 천사를 불러 모았다. 두려운 경외심으로 긴장된 사제는 성찬의 전례 말씀을 하시고 함께 흠숭을 드리게 하기 위하여 그 성스러운 하얀 성체를 높이 들어 올렸다.
고요한 정적이 희생제물이 되는 이 장소에 감돌았다. 모두들 무릎을 꿇고 흠숭하는 마음이 깃든 시선으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바라보았다.
그 때 갑자기 기쁨에 넘친 탄성의 목소리가 성당 안에 울려퍼졌다. “엄마, 저기 귀여운 아기좀 봐요! 저기, 엄마, 저기 말이예요! "
하지만 그 어머니는 신비스러운 천상의 빵인 거룩한 성체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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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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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연중 제1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오늘은 연중 제13 주일입니다. 7월의 첫 주일, 우리는 한 해의 중간에 이르러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마음을 새겨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파견한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숙소를 제공하고 대접한 수넴 여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자비를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혔으니, 그분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는 특히,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들에게는 상이 베풀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0,40)
이 말씀은 당신께서 제자들을 단순히 당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당신의 이름으로’ 파견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 안에는 아버지께서 계셔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과 같이, 당신이 파견한 제자들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당신의 제자를 제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제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핍박을 당하면서도 섬기는 “작은이들”인 파견 받은 이들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에게는 “상”이 베풀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저희 삶을 돌아보게 하며, 새롭게 살기를 요청합니다. 곧 나는 파견 받은 제자로서 작은이로 살아가고 있는지, 곧 섬기는 이가 아니라 섬김 받기를 좋아하지는 않는지, 또 핍박당하고 거부되는 것을 못 견뎌하고, 오히려 상대를 윽박지르고 짓누르지는 않는지,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받아들여 대접해주는 신자들의 선의를 마치 정당한 권리인 양 당연히 여기거나 또는 기대하고 즐기고 있지는 않는지, 진정 나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인지를 드려다 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는 당신의 제자 혹은 파견 받은 이가 지녀야 할 태도와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로서 합당하지 못한 태도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부모나 자녀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은 가족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혈연의 자연적 인간적인 사랑(φιλεω)보다 신적인 사랑(αγαπαω)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의 제자는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앞세워 ‘먼저’ 사랑하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으로 그들이 겪게 될 시련과 치욕을 지는 일입니다. 곧 당시의 십자가는 죄수 중에도 노예죄수나 반란죄를 지은 이의 처형도구였듯이, 대단히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까지도 지고 따르는 일입니다. 자신을 훼손하고 손해 보면서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 합당한 태도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삶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 안에서의 생명의 상실은 오히려 더 귀한 생명의 얻음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잃는다면, 결국 자기의 영혼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해줍니다. 곧 나는 대체, 무엇을 앞세워 살아가고 있는지, 대체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 하느님인지 나 자신인지, 또 제 십자가는 기꺼이 지는지 아니면 피하고 있는지, 누구를 따르는지 내 자신인지 주님인지, 또 누구의 뜻을 따르고 실현하고자 하는지, 나의 뜻인지 주님의 뜻인지, 또 내 목숨을 내어놓는지 아니면 나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고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 온갖 안전과 보호 장치를 꾸미고 있는지, 진정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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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연중 제1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드시 걸맞은 상을 받을 것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러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자녀로 뽑아주심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우리의 목자 교황님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도시에 공부하는 스님과 술 파는 여인이 나란히 이웃에 살았답니다. 스님은 열심히 공부했고 여인은 열심히 술을 팔았습니다. 여러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지옥에 떨어졌고 여인은 천상 극락에 들어갔습니다. 마음속으로 진정 부러워했던 것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열심히 공부하고 예불을 드리면서도 ‘아! 부럽다. 맛있는 술에다가 어여쁜 여자, 춤추고 노래하고 얼마나 신날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아 부럽다 부러워! 새벽마다 예불을 드리고 꽃을 바치며 경전을 읽고.. 얼마나 행복할까?’ 하며 늘 거룩함을 갈망했습니다.
사무엘 상권 16장에 다윗에게 기름 붓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코린 4,3).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4). 하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새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항상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어중간, 양다리 걸치기는 없어야 합니다. 주 하느님 앞에서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출가와 가출이 다르다는 것을 아시죠? 출가는 세속의 집을 떠나 구도의 길을 걷는 것이고 가출은 집이 싫어서 그냥 나와 방황하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출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제시하고 걸으신 길을 함께 살아갑니다. 출가란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을 길에 나와 있으나 집을 떠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집을 떠났으나 길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 하늘의 상을 받겠습니까? 술 파는 여인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집착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그것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먼저 사랑하는 것이, 부모, 자녀, 형제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은 새로운 양식으로 자기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고,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자기 소신, 주관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도구 삼아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나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그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냥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늘의 상을 받게 됩니다. 완전한 헌신, 순종이 신적인 사랑의 힘으로 충만한 새로운 마음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사랑의 진가는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사랑에는 생가지도 못한 보답이 옵니다. 지금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하며 사랑하는 그 자체가 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길, 구원을 위해 선택하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이 길을 따라가지 않을 때 잘못을 저지르고, 세속적으로 변합니다. 많은 이들이 특히 성직자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명예, 사치, 세속의 길을 찾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지만, 그저 허울뿐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길,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시며 출세의 도구로 그리스도교를 이용하지 않는 은총을 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헛된 명예 따위를 위하여, 재물을 위하여, 자기만족을 위하여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람이 적잖은 세상입니다. 이러한 혼돈의 세상에서 우리는 천주교 신자의 자부심과 복음 정신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자기 포기와 희생, 헌신의 정신이 우리 교회는 물론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좋은 소식, 맑고 밝은 소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어둠을 탓하기에 앞서 하나의 빛을 밝혀야 할 소명이 있음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을 향하여 있고 그분이 원하는 곳으로 발길을 재촉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생전에 두 번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중의 하나입니다.
93세로 2021년에 돌아가셨는데 2005년 교포사목할 때의 편지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출가시켰고, 아들은 주님 안에서 어머니를 늘 사랑했습니다.
“부족한 어미가 신부님께 드림.
고향을 떠난 지도 두 달이 넘는군요. 낯선 곳에서 사귀느라 맘고생이 크지요?
모든 고난 참아 받고 건강 조심하세요. 건강이 첫째인지 누구보다 잘 알지요.
조석 굶지 마세요.
이 못난 어미한테 태어나서 공부할 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돈 한 푼 제대로 주지 못하고 살아온 어느 날 신학교 간다고 할 때,
반대를 하였더니,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신부가 되어서,
머나먼 외국을 간다고 하니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신부님은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쇠털같이 많은 고난을 참고 살아왔지요.
그러나 앞날을 기대하고 사는 게 인생입니다. 몸조심하세요.
훌륭한 신부님 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신부님 생각하면 한없이 기쁩니다.
여기 생각하지 말고 몸 건강 챙기세요.
신부님은 나한테 너무 신경 쓰십니다.
나한테는 다른 아들딸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부님 건강을 조심하세요.
늙은이 글씨 말도 안 되니 잘 읽어보세요. 이만 줄입니다.
마지막 날 신부일 수 있게 지향 두어 기도하고 영성체 했네요.”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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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연중 제1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오면서 버스와 가이드가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그리스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가이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터키와 그리스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습니까?” 주변의 경치도, 분위기도 비슷했기 때문에 가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국경이라고 하지만 다리만 하나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가이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주변의 경치와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가이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종교’였습니다. 터키에서는 ‘성당’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슬람이 국교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믿는 종교는 이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는 97%의 국민이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스에서 ‘당신이 그리스 정교회 신자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당신은 그리스 사람입니까?’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성지순례를 온 우리들에게 터키에서 그리스로 온 것은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포근하지 않느냐는 의미였습니다.
순례 중에 터키가 이슬람 국가라서 크게 힘들거나 어색한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순례버스를 타고 이동했고, 가능하면 성당을 찾아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대 사회의 유적지를 보면서 세상은 돌고 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대 신전의 주춧돌은 초대 교회의 주춧돌이 되기도 했고, 초대 교회의 주춧돌은 이슬람 사원의 주춧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터키에서 머무는 동안 이슬람의 율법과 전통을 강요받았다면 불편함이 있었겠지만 그런 것들도 없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신앙을 지키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20년이 넘게 성전을 지키면서 순례자를 맞이하는 수녀님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석”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보석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석은 제도와 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보석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순례자들을 위해서 성당을 지키고 있었던 수녀님의 환한 미소가 ‘보석’이었습니다.
축구에서 중요한 3가지 요소가 있다면 '체력, 기술, 조직력’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하면 90분간의 경기를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체력이 좋아도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선수들의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축구는 체력만으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다음은 조직력입니다. 개인의 기량이 뛰어난 것도 필요하지만 선수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서 팀을 이루어야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슬람이든, 가톨릭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한 것보다 더 큰일을 하실 수 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들에 피었다가 지는 꽃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종교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가을이면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 3가지를 말한다면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 악, 죽음’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나를 구원하시고, 나는 그분을 따를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에 머물고, 교회에서 교리를 배우며,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죽어서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을 알지만 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알던 사람도 성경책을 몇 번 읽었고, 종교서적을 연구했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서 행복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고 하여도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선포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이고 악의 세력과 끊임없이 영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며 삶속에서 증거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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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연중 제1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삶의 길
-주님 사랑,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 형제 사랑-
어제의 세 가지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 수련자 수업시간에 수련수사는 마침 저에게 한가지 말씀을 드리겠다며 많이 눈치를 보며 주저하길래 걱정하지 말고 이야기해달 했고 내심 긴장했습니다. 무슨 스캔들이나 악습같은 것은 아닌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것은 알아 개선해야하기에 꼭 듣고 싶었습니다.
“수사님에게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가끔 어쩌다가 체취, 땀냄새, 노인냄새가 난다합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이야기 해줬고 저도 올해 들어와 가끔 느낍니다. 집무실에 방향제를 비치해야겠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약간 충격이었습니다. 매일 속옷을 갈아입고 기상하면 샤워에 하루를 끝내면서 샤워를 하는데 무슨 냄새가 날까, 사실 속옷도 삶지 않고 오래 입다보면 아무리 빨아도 냄새가 나긴하는데 알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안도했습니다. 악습이나 악행의 죄가 아녔기 때문입니다.
이건 생리적 문제라 죄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각별히 삼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맙다고 격려하는 말을 했고 사람의 향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평생 하느님을 사랑하며 매일 미사에 강론, 끊임없는 기도로 내 마음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것이라 자부하며 새삼 인품의 향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어제 15년만에 갑작스럽게 찾은 수녀님의 면담고백성사시 수녀님의 수도원 방문소감입니다. “수도원 입구에 들어와 수도원길을 걷는 동안 예전과는 달리 답답한 느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활짝 펼쳐진 불암산과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이젠 나무에 가려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15년전이면 그때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없을 때입니다. 가로수길이 하늘길이라 하며 걸을 때 마다 감동했지 산과 하늘을 가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듣고 나서 후에 걸어보니 하늘도 산도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었습니다. 새삼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주님을 가리는 삶은 아닌지 참으로 작고 투명하고 겸손하여 배경인 주님을 잘 드러내는 삶인지 반성했습니다.
하나는 ‘탈성장’에 관한 논의입니다. 이번 1년만에 복간되어 도착한 녹색평론을 읽고 많이 불편하고 부끄러웠고 지구와 인류에 대해 비관적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 이상 지속성장은 환상이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라며 절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탈성장이 유일한 해법이며 자본주의를 끝내야 한다는데 이를 어쩐단 말인가! 문제는 나왔습니다만 어떻게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답은 참 힘듭니다만 더 늦지 않게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참 삶의 길을 찾아 사는 것입니다. 이젠 혁명적 사고의 전환, 생활방식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고 과감한 정책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근원적 문제에 대한 해결없이 모든 일들이, 심지어는 강론을 쓰는 일도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대만 생각하고 미래에 대한 생각없이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무수한 쓰레기를 양산하며 먹고 사는 자체가 죄송스럽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참된 삶의 길이 절실합니다. 정말 치열한 가열찬 분투의 노력과 훈련이 절박한 시점입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남는 것은 주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닮아가면서 끊임없는 자아초월로 이기적 탐욕의 무지한 나로부터 부단한 탈출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참으로 우선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눈 밝은 이타적 가족 사랑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에 대한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무사한 아가페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세례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한 삶이니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으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더불어 기억해야할 말이 “아모로 파티(Amor Fati)” 운명애입니다. 참으로 내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며 항구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책임을 다하는 믿음이요 책임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 사랑의 결정적 표지가 내 십자가입니다. 비교불가한 내 고유의 십자가요, 이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면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짐도 사랑의 선물로 바뀔수 있을 것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역설의 진리입니다. 날마다 부단히 주님 때문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 자기를 잃을 때, 비울 때, 버릴 때 비로소 목숨을 얻어 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난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요, 지금 여기서 구체적 이웃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형제 사랑없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이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도 받고, 의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도 받습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사 예언자를 정성껏 한결같이 환대한 수넴의 부유한 여자는 득남할 것일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형제를 환대하는 이들의 환대의 사랑은 그 자체가 축복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제자는 사도들일 수 있고, 하느님 나라의 증인이 되는 모든 제자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또 공동체 안에서 박해 때문에 기장 불우하게 된 이들, 그리고 가장 빈곤하게 된 이들이 될 것입니다. 넓고 깊이 보면 가난한 모든 이들이 주님의 제자이자 형제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제자답게 형제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주님의 가난하고 작은 제자나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두의 중심임을 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제 십자가를 지고 가난한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의 십자가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입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희망,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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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연중 제1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 제자를 제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과 의인이 받을 상과 제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써놓고 보니,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라 생각납니다. 금도끼도 아니요, 은도끼도 아니고 그저 겸손한 땀이 묻어 있는 도끼를 선택한 선한 사람에게 금도끼와 은도끼마저 주어졌던 이야기 말입니다. 금도끼 이야기는 아주 단순합니다. 겸손함이 최고의 보물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사람을, 혹은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 안에 겸손함을 드러내는 행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주님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주님의 손길을 전하기 때문이며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예언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인과 같은 사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여 보세요. 우리가 가진 경험과 고정관념이 우리에게 교만이 되지 않도록 나를 잠재우고 주님의 것을 받아 들여보십시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겸손은 금도끼와 은도끼 혹은 그보다 더 큰 하늘나라의 보화를 우리에게 선물할 것입니다.
꽃멍
언젠가 라디오에서 꽃멍이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불멍도 들어봤고
사람멍도 들어봤는데
꽃멍은 처음 들었습니다.
그저 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이곳 갑곶성지에서 꽃멍을 하려면
일년 여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벌써 기대가 됩니다.
찬찬히 앉아서
천천히 꽃을 바라보는 시간이
벌써 기대가 됩니다.
꽃멍도 꽃멍이지만
이러한 기다림이 더욱 오늘을
즐겁게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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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연중 제1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서울 신학교에 다닐 때, 매년 원로 신부님들이 오셔서 고해성사(총고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러 갔다가 엄청나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성사 볼 준비가 안 되어 있어. 나가!!!”
결국 쫓겨나서 다시 성찰한 뒤에 무서워서 그 신부님이 아닌 다른 신부님께 가서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처음으로 고해소에서 쫓겨난 것이라 많이 당황했었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성사라는 고해성사를 이렇게 공포 분위기로 만드는 신부님이 잘못이고, 신부님께 문제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즉, 부족한 저를 위해 신부님께서 충격 요법을 쓰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올해 초, 우리 성당 난간에 한 아이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난간이 계단 형태로 되어 있어서 사다리 올라가듯이, 난간에 올라가 있던 것이지요. 너무 깜짝 놀라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장 안 내려와!!” 그 아이가 미워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난간 위로 올라가 아래로 떨어질 수 있기에 다급하게 큰소리친 것입니다.
사랑은 부드럽고 달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상대를 위해 큰소리를 내지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이나 시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느님의 일이니 그분 뜻을 100%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역시 사랑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자체이신 분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또 아들이나 딸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우리나라처럼 조상의 핏줄을 귀하게 여기는 유다인에게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자녀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더 대단합니다. 때로는 아픔을 동반하고 상처까지 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까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남겨 놓아야 하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제2독서를 통해,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묻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음을 밝히십니다.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삶,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합당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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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은 도가 높아질수록 편안해지고 권세가 높아질수록 위태로워진다(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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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연중 제13주일. 키엣 대주교님.
그리스도의 제자
주님의 제자란 누구입니까? 우리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제자라면 먼저 주님의 관대한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제자란 스승을 대리하는 사람입니다. 훌륭한 제자란 자신을 보낸 그 분의 모습을 잘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심판과 처벌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을 위해 오셨고 우리의 생명과 풍요로운 삶을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의 것을 취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에 일생 동안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가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과 같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포용과 관대함을 지녀야 합니다.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작은 사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하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작아져야만 합니다. 꼭 필요한 것만 갖는 아주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만과 겉치레를 버리고 주님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언제나 깨어 있는 작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가장 좋은 자리를 다투지 말고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릎을 꿇을 만큼 작아져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고도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해져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향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면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마음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하고 영혼의 중심에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계셔야 합니다. 이것은 가족과의 단절과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 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인류를 위해 당신의 삶을 주셨고 인류구원의 소명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다시 죄를 짓지 않기위해, 자신을 잊기 위해 드러내지 않고 작아지고 겸손한 희생 속에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님 나라를 섬기는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죽음이야말로 하느님의 넘치고 충만한 삶과 새로운 생명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죽을만큼의 고통스런 회개를 경험한 사람만이 새로운 생명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성인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과거의 허물을 벗는 고통을 경험하며 다음과 같은 불멸의 말을 남겼습니다.
“죽는 순간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얻는 순간이다”
이러한 참회의 체험으로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님, 저희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3.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사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말씀의 나눔
1.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작은 사람이 되고 자신을 낮추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사람’을 실천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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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연중 제13주일.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
-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을 향하는 ‘하늘의 시민’(필리 3,20)입니다.
하늘의 시민은 사도 바오로의 권고대로 세상과는 대조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례성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줍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 제2독서)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옛사람에서 새사람에로의 전환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은 동시에 과제도 안겨 줍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사람으로 태어났으니 계속 새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새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은총의 선물인 ‘새로움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밝게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이란 구체적으로 성경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사를 통해 전해지는 그분의 손길에 의탁하고, 그분을 닮도록 부지런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아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고 복음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십니다.(마태 28,19-20)
제자들은 스승의 명에 따라 만방에 가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애지중지하는 가족도 뒤로하고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도 포기할 각오를 하라고 하십니다.(마태 10,37-42 | 복음)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힘들고 험한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제자들을 돕는 이들을 보내주시는데, 그들에게는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엘리사 예언자를 도와주었던 여인이 큰 축복을 받았듯이(제1독서), 예수님의 제자를 예언자로, 의인으로 받아들여 도움을 주는 이들에게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맡겨진 복음 선포의 사명은 교회를 통해 계속됩니다. 사제와 평신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확신 있게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의 힘으로 인간이 거룩하게 되고 현세 질서가 개선되도록 힘을 합쳐야 합니다.
이런 교회의 복음 선포 사명을 선두에서 지휘하는 분이 교황님이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시도록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협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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