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00
2월13일[연중 제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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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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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Keu5NmkTHM (김민휘 요한 세례자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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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적인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다 경이로움의 대상이요, 매 순간이 기적의 연속입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너무나 안쓰러웠던 투병 생활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한 형제의 간절한 바람이 아직도 제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그 간절한 바람이란 것이 제게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분에게는 그렇게 간절했나 봅니다.
“칼칼한 육개장 한 사발에 공깃밥을 말아 훌훌 먹어 봤으면... 시원한 물 한 컵 벌컥벌컥 들이 마셔 봤으면... 평소 그리 좋아했던 옥수수 한 자루 파도소리 철렁이는 바닷가에서 낚싯대 한번 드리워 봤으면...”
따지고 보니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극히 작고 평범한 일상의 일들이 어떤 분들에게는 엄청난 기적이요 표징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주변을 곰곰이 살펴보면 일상의 모든 흐름들이 표징입니다.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눈을 부릅뜨고 기적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회심하면, 우리가 제대로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주변의 모든 것이 다 경이로움의 대상이요, 매 순간이 기적의 연속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변화되지 않고 회심하지 않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십니다. 탄식은 어떤 때 나오는 것입니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때, 정말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 때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종착지가 바로 코앞인데, 구원이 바로 눈앞인데, 영원한 생명이 이렇게 자기들 가까이 있고, 금방 손에 넣을 수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발로 차버리는 바리사이들 앞에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터져 나온 탄식이었습니다.
그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준 기적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간 예수님의 손으로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빠져나간 악령들, 죽음에서 되살아난 사람들...그 모든 하늘의 표징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확인했던 바리사이들이었건만,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메시아의 능력을 자신들의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승복하여 예수님께 돌아서기 위해서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저 호기심에, 그저 장난삼아, 애초부터 신앙의 눈이 아니라 적개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눈으로 예수님에게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모습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감과 실망감을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극에 달한 바리사이들의 불신과 적대감, 꽉 막힘 앞에서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는 가슴 아프셨겠지만 그들에게서 기대와 희망을 접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십니다. 영혼의 눈이 먼 그들이었기에, 바로 자기들 눈앞에 다가온 구원을 놓치는 일생일대의 과오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내면에 그 옛날 바리사이들의 그 완고함과 옹졸함, 적대감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실망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가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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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앙에서는 좋은 의도가 전부다>
왕이 한 죄수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신하 두 사람이 죄인을 감옥으로 호송했습니다. 절망감에 빠진 죄수는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이 못 된 왕아! 지옥 불구덩이에 빠져 평생 허우적거려라.” 이때 한 신하가 그의 말을 막았습니다. “여보시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죄수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소.”
신하들이 돌아오자 왕이 물었습니다. “그래 죄인이 잘못을 뉘우치던가?” 그때 죄수의 말을 가로막던 착한 심성의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예. 게다가 자신에게 사형을 내린 폐하를 용서해 달라고 신께 기도했습니다.”
신하의 말에 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 죄수를 살려주라고 명령을 내리려 했습니다. 그때 다른 신하가 말했습니다. “폐하. 아닙니다. 그 죄수는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폐하를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 신하를 나무랐습니다.
“네가 한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걸 안다. 그러나 나는 저 사람의 말이 더 마음에 드는구나.” “폐하, 어째서 진실을 마다하고 거짓말이 마음에 든다 하시는 겁니까?”
왕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사람을 살리고 싶은 좋은 의도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네 말에는 악의가 있구나.” 왕은 결국 죄수의 목숨을 살려 주었습니다.
물론 좋은 의도가 있다고 해서 거짓말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누군가를 판단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진실과 거짓보다는 사람 마음 안의 의도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했더라도 나쁜 결과가 나올 수 있고, 나쁜 의도로 했다고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판단할 때는 외적인 결과보다는 그 사람 안에 좋은 의도가 있는지, 나쁜 의도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그러면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임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그러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실천을 안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좋은 의도만 있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 표징이 부족한 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표징 자체이십니다.
표징 자체이신 분에게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아이를 다 키워놓았더니 아이가 “당신이 내 엄마라는 것을 증명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켜 우리 양식이 되게 해 주신 생명의 양식 앞에서 “당신이 아버지인 것을 증명해 보시오!”라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들을 떠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들은 좋은 의도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에게는 어떠한 표징도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을 때, 어머니에게 “당신이 저의 어머니임을 증명해보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더 세세히 뜯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저에게 하시는 모든 행위가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하시는 행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가 표징을 요구하지 않고 어머니를 잘 관찰했던 것은 어쩌면 제가 좋은 자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좋은 의도만 있으면 하느님은 그 의도를 채워줄 모든 은혜를 이미 다 주고 계셨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의도가 있습니까? 그러면 더이상 다른 표징은 요구할 필요도 없게 많은 표징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운전할 때 목적지가 분명하면 그 목적지를 표시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를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수많은 표징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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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후배 신부님들과 텍사스 끝자락에 있는 ‘엘파소’엘 다녀왔습니다. 뉴욕에서 직접 가는 비행기가 없어서 시카고에서 경유하였습니다. 엘파소에는 제가 30일 피정을 지도했던 신부님이 교포사목으로 왔습니다. 환영과 격려의 차원으로 방문했습니다. 이제 미국에 온지 1달이 조금 넘은 신부님은 멀리서 온 신부님들을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방을 정하면 제게 제일 좋은 방을 정해 주었습니다. 선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해 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막 1달이 지났는데 후배 신부님은 마치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같이 간 신부님들은 모두 덕담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건강이 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지내라고 해 주었습니다. 겨울에 온 신부님은 이제 엘파소의 모래폭풍과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 낼 것입니다.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을 지닌 신부님은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건강하고 기쁘게 잘 지낼 수 있으리라 믿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평소에는 일찍 잠자리로 들어가지만 이렇게 후배 신부님들을 만날 때면 좀 더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북미주에서 사목하는 서울대교구 사제들의 모임이 1년에 한 번 있습니다. 그 모임을 주관하는 대표 신부님도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들은 명목상의 대표신부님도 필요하지만 실질적으로 북미주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을 도와주는 대표신부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막 교포사목으로 미국에 온 신부님을 방문하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격려 해 주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이 휴가를 가면 대신 미사를 봉헌해 줄 수 있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시골의 작은 도시에 있는 신부님들과 규모가 작은 성당의 신부님들의 고충도 들어주고, 함께 해 주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는 지구장 제도처럼 북미주에도 지구장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신문사에 있기에 어차피 신문홍보를 다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과 열정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동생 아담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하느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와 함께 살던 원주민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와 함께 살았던 생명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동생을 죽였으면서도 발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하느님께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어쩌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생명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무고한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카인처럼 적반하장으로 대답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그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까?”
오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 기껏 구해 주었더니 마치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처럼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이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이 표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표징입니다. 이미 표징은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 주신 ‘표징’에 감사드리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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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1-13: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즉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참된 메시아로서 그것을 말씀과 행적으로 드러내셨다. 바리사이들은 그것의 사실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 하셨다.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요구한 메시아적 징표란, 참으로 깜짝 놀랄만한 일로서, 요르단강물을 갈라놓고 그곳을 지나다니는 길을 낸다든지, 말 한 마디로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린다든지 하는 무력적이고 파괴적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 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어떤 곳을 꼭 찾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 꼭 배워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배운다면, 아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귀의 수준은 높아질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상생활을 통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자 되도록, 그렇게 변화되는 기적을 늘 청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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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분증>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1-13)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시험하려고’라는 말은, 시비를 걸었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을 뜻합니다.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한 일은, 신원 증명서, 또는 신분증 같은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 “무슨 권한으로 그것을 요구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느님이신 분’께 신원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고, ‘하느님이신 분’ 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당신의 신원을 증명해 보일 의무도 없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라는 말씀은, “왜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는 특정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표징을 보여 주기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말씀인데,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믿게 만들기 위한 표징을 보여 주지는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미 충분히 표징을 보여 주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예수님의 신원을 증명하는 표징입니다.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들,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들, 마귀를 쫓아내신 일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이 표징이 됩니다.>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았지만, 처음부터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느님의 일’로(‘메시아의 일’로) 안 믿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한 대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셨더라도, 그들은 속임수라고 생각하면서 안 믿었을 것입니다. <신분증이나 어떤 증명서를 보여 주어도 위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안 믿으면, 신분증도 증명서도 다 소용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떠나신 것에 대해서, 바리사이들 쪽에서는 자기들이 이긴 것으로, 즉 표징을 보여 주지 못해서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물러난 일로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들이 버림받은 일입니다. 믿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버림받는 쪽을 선택한 일.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믿은 일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박해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그는 의심하지 않았고, 무슨 표징 같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곧바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사도 9,3-6)
이 이야기에 대해서 “초자연적인 현상에 압도당해서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박해자 사울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어떤 환청을 들은 것인지 의심할 수도 있었고, 또 자기가 적대시하고 박해하는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아인지부터 확인하고 싶어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서 ‘그냥’ 바로 믿었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믿음이란, 그렇게 ‘그냥’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바오로 사도의 회개를 믿은 일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해자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도가 되었다는 것을 다른 사도들은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사도 9,26-27)
바르나바의 소개와 보증이 있긴 했지만, 사도들이 바오로 사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했고(사도 9,20), ‘예수님의 이름으로’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는 바로 그가 한 ‘일’과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세례 증명서’가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하는 ‘일’과 ‘신앙인다운 삶’입니다. 그 ‘일’과 ‘삶’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나의 신앙’을 증명하고 증언하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향해서는 ‘신앙생활로써’ 순종하는 일이 됩니다.
반대로, 내가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나는 아무에게도 나의 신앙과 신앙생활을 입증하지 못하게 되고,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을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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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는 두 형제가 주님께 각자의 소출을 바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카인의 곡식과 달리 아벨의 봉헌물에 눈을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궁금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차별을 말합니다. 카인이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듯이 보이는 하느님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가장 잦은 시도는 히브리서의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아벨이 카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바쳤다는 것입니다.(히브 11,4 참조) 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짚으며 하느님의 행위에 반영하였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축업을, 가나안 민족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우월을 강조하고자 카인(농업)보다 아벨(목축)의 봉헌을 하느님께서 선호하셨을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봉헌물이 카인의 것보다 낫지 않았는데도 받으셨다면 주님은 불의한 분이 되시는 것은 아닐까요?
하와는 첫 아기를 낳고 “내가 주님과 함께 한 사람을 얻었다.”(창세 4,1의 직역)라며 카인이라고 부르며 무척 소중히 여긴 듯합니다. 반면에 아벨에 대하여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은 듯합니다. 아벨은 부모의 아들로 제시되기보다는 카인의 동생으로 덧붙여진 사람으로 소개됩니다.(창세 4,2 참조) 이렇게 우리 앞에 대조되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열망이 반영된, 하느님과 함께 얻은 카인과 그와 비교할 바 못되는 아벨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와의 두 가지 불의를 봅니다. 카인에게 쏟은 과도한 애정과 아벨에게 보인 무관심 또는 무정입니다. 어머니에게 지대한 관심과 소유의 열망을 받고 있는 카인과 달리 아무런 관심도 애정도 받지 못하는 아벨의 선물을 하느님께서 받아 주심은, 어쩌면 차별당한 불의한 아들 아벨에게 하느님 편에서 베푸실 수 있는 보상이 아닐까요? 아벨이 여전히 하느님 앞에 또 사람들 앞에 존재함을 인정하시는 하느님의 행위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아벨의 선물을 받으시자 이제껏 연기처럼 존재하던 아벨이 드러나게 되고 카인은 그의 옆에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의 첫 형제는 형제애를 이루는 데 실패합니다. 사실 성경은 단 한 번도 카인을 아벨의 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아벨의 경우는 카인의 동생이라고 일곱 번이나 말합니다.(4,2.8.9.10.11 참조) 우리는 주님 앞에서 형제애를 이루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소유와 질투의 욕망으로 형제를 잃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살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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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성태 마태오 신부님]
<예수님의 징표는?>
독일의 한 남작이 자신의 거대한 집에 있는 양쪽 굴뚝에 여러 갈래의 철사줄을 연결하면서 어떤 철사줄은 강하게, 어떤 철사줄은 약하게 연결시켜 그 줄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일컬어 거대한 바람 하프라고 불렀습니다.
이 거대한 바람 하프는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는데, 어떤 소리는 솔솔부는 봄바람소리요, 어떤 소리는 시원한 여름 바람소리요, 또 어떤 소리는 한겨울의 강풍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바람 하프가 내는 소리 중에서 가장 우렁차고 아름다운 것은 남작의 집 골짜기를 가득 메우는 한 겨울의 강풍소리였습니다. 한겨울의 강풍이 휘몰아칠 때 여러 갈래의 철사줄은 참으로 우렁차고 힘있게 소리를 냈습니다.
남작은 이 소리를 들으며 ‘인생에 있어서도 강풍이 휘몰아칠 때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베에토벤은 귀머거리가 되었을 때 불후의 명곡을 남겼고, 에디슨은 모든 시험에서 낙방하여 둔재 소리를 들었지만 가장 위대한 발명을 하였고, 헬렌 켈리도 맹인이요 귀머거리였지만 불후의 명작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다가오는데 마음들이 깨끗하지 않는, 예수님을 시험하고픈 마음으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면서 그들에게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그들의 교만한 콧대를 확 꺽었으면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올바른 모습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접근한 그들에게 어떤 기적이 있어도 그들은 쉽게 수긍을 하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기적의 뜻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그들에게는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기적은 어떤 것일까요? 혹 우리는 마치 마슬사가 마술을 부려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만들 듯이 그런 유형들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것들을 쫓아 계속 헤메는 것은 아닌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 기적은 사람과 동떨어진 어떤 것을 찾아서는 안 되리라 여깁니다. 거기에는 환상만 있을 따름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고쳐 주시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소외된 이들을 가까이 불러 주시는 이런 모습이 오늘날 신앙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세라 여깁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아무 어려움 없이 아니 어려움을 피해가면서 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표징이 아니고, 삶에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수록 그것을 이겨나가고자 애쓰는 모습이 이 시대에 진정한 표징이라 생각합니다.
사목 생활을 하다 보면 가정 형편상 여러 모습으로 어려움이 있는데, 그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잘 이겨나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그분들이 바로 이 시대에 참다운 신앙적인 표징을 보여주고 있기에 마음이 기쁩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남보다 있으면서 많은 불만과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오늘 복음의 바라사이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나를 생각해 봅니다. 또한 기도해 봅니다.
나 또한 바라사이 모습은 없는지? 아니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는 이 시대 신앙의 표징을 보여 주며 살아가는 사목자가 되길 은혜를 청해 봅니다. 또한 모든 분이 오늘 하루도 은혜로운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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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표징이 필요해... 왜?>
하느님의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청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머물렀던 인류 중 하늘의 징표를 바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이셨으니 그리 큰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징표는 보여 주시질 않고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탄식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를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며, 가르치고 수호해야 하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징표를 보여달라고 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기적을 일으키시거나 표징으로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분으로 여긴다는 것을 스스로 증언한 셈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삶을 보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고, 그만큼 그들의 삶이 하느님이 입에만 머물 뿐 무미건조한 상태였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눈 앞에 있는 하느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내는 그들이 이럴 지경이니 예수님께서 탄식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의 뜻에 대해 전혀 무지한 이들. 그들의 위치는 그 어느 인간보다 하느님께 가깝다고 여겨졌지만 실상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이라 예상되는 사람에게 믿을 증거로 표징을 요구하고 있으니 하느님 눈에 그들이 어떠했겠습니까? 또 그들에게 맡겨진 민족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예수님은 표징을 거절하십니다. 사실은 당신 스스로가 가장 큰 표징일 수밖에 없는데도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있는 그들에게 어떤 표징도 하느님을 깨닫게 할 수 없음을 아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신 것은 사람다운 삶이었는데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께 나오는 기적을 요구하고 있으니 무엇이 그들을 믿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현상이 우리의 삶 전반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어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삶의 모습에 사람들은 새로운 볼거리, 느낄 거리를 원합니다. 또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신앙적인 지도나 쇄신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표징을 찾아 이리로 저리로 분주히 다닙니다.
그들에게 부여되는 이름은 "열심한 신자"입니다. 그리고 그런 열정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로 바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은 표징을 보여 주신답니다.
하느님이시니 무엇이든 불가능하겠습니까만은 이천 년 전의 예수님은 그런 표징을 거절하셨습니다. 가장 큰 표징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당신의 삶이었기에 그것을 보고도, 곧 착하게 사랑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도 하느님을 못 알아보는 이에게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야기하셨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그러니 우리도 거기에 맞추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그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징표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무조건 타는 흐름은 아닐 것입니다. 시대가 더 기계적으로 돌아갈수록 기적을 요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앙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반대로 더 많아집니다.
그 징표로 하느님을 설명하면, 그래서 그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또 다른 기적을 보여줄 용기는 준비는 되어 있나요? 무작정 주님 탓으로 또 돌릴 겁니까?
표징을 통한 하느님의 체험은 분명 신앙적으로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초점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의 삶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표징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의 징표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징표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바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삶이 모든 이에게 참 표징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 마저 버리고 떠나 버리실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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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행인지, 모시고 있는 성당에서 난색을 표해서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되고 은총도 그만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쌍꺼풀 하신 분이 인기가 좋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맞은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 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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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8세기 성인인 프랑스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님은 매일 성당을 찾아오는 농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는 특별한 기도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평화로운 모습을 늘 오랫동안 성당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 농부에게 신부님께서 물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기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도대체 성당에 몇 시간씩 앉아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저를 보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행복해하지요.”
신부님께서는 이 대답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대화라고 하면서, 늘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냥 ‘나’만 말하기 바빴습니다. 심지어 그분을 보지도 않고 말이지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껴져서 대화를 그만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대화를 나눠야만 상대와의 사랑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연애 중인 연인은 하루 종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이 있으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과 기쁨을 체험합니다.
참 기도는 나의 일방적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 즉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며 하느님과의 시선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과 사랑의 깊이가 더 생기고 그 안에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앞선 농부처럼 말입니다.
서로 바라봐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는데, 우리는 과연 어디를 보고 있을까요? 혹시 입으로 하느님을 외치면서 다른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하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빵의 기적도 행하시고…. 표징의 숫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것만 바라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기도를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일방적인 말하기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래서 서로 행복한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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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은 잘못이 없으신가?>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오늘 저의 강론은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렵니다. 하느님은 잘못이 없으신가? 인간만 잘못이 있고 하느님은 없으신가? 카인의 죄악에 하느님의 잘못은 없으신가?
저는 오래전부터 하느님의 원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원죄의 원죄가 하느님께 있다고. 인간 원죄의 원죄가 하느님께 있다는 얘기지요.
자식의 모든 죄에 부모의 원죄가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유전자적으로 그런 자식을 낳았고, 그렇게 양육했기에 자식이 그리된 것이 아닙니까?
똑같습니다. 낳은 분은 하느님이나 부모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잘못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잘못에 대해 하느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부터 하느님의 원죄이니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지은 것에 관해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또 사랑하시기에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며, 자유를 주신 이유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다시 말해서 억지로가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그 사랑에 관해서는 감사하지만, 인간의 원죄에 하느님의 원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카인의 죄에 관해서도 하느님의 원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만 굽어보셨습니까? 제물을 안 바쳤다면 모를까 바쳤는데 왜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하느님이 분명 잘못하셨고 카인의 죄에 하느님의 원죄가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는 잘못이 없다면 창세기에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가, 하느님께서 굽어보시지 않은 이유를, 굽어보시지 않은 것이 편애가 아니라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은 겁니다.
사실 창세기뿐 아니라 모든 성경이 하느님의 모든 신비를 친절하게 그리고 다 설명하지 않고, 다 설명해준다 해도 인간이 다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고 신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제물을 하느님께서 맘에 들어 하시느냐 그것을 창세기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쨌거나 인간은 죄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자유의지를 어떻게 쓰든, 그것도 우리 인간의 자유입니다. 죄를 짓는 데 쓸 수도, 사랑을 하는 데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은 할 수 없고 죄만 짓게 만드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억지이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며 죄의 핑계나 탓을 하느님께 돌리는 미성숙이지요.
성숙하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고, 성숙하다면 자유의지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다스린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다스리는 것이고, 성숙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잘 다스려 자유의지를 죄를 짓는 데 쓰지 않고 사랑하는 데 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자유의지를 사랑하는 데 힘을 쓰게 할까요?
자유의지를 사랑하는 데 쓰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사랑을 위해 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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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느님도 편애를 하실까?>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제 아담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고 물으시고, 그제 하느님께 지은 죄에 관해서 얘기하는 창세기는 오늘 인간에게 지은 죄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기회에 여러 번 얘기한 것이지만 사실 원죄는 인간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은 겁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원죄의 탓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근원적으로 하느님께 있습니다.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죄를 지었지만 그런데 그 이유가 하느님의 편애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제임스 딘 주연의 에덴의 동쪽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저도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바로 카인과 아벨의 얘기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이며 에덴의 동쪽이란 제목은 아담이 죄를 짓고 동산 동쪽으로 쫓겨나고 카인도 아벨을 죽이고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게 된 데서 따온 것이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형만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자 비뚤어진 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아버지가 좋아할 일을 하지만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되자 자기 형을 파멸시킴으로써 가족이 결과적으로 다 잘못되게 됩니다.
인간이란 영원히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고, 사람에 따라 그리고 성장 과정에 따라 연인, 친구, 스승 등 받고 싶은 사랑이 달라지긴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부모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편애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저도 저희 할머니가 저보다 형을 더 사랑하는 것 때문에 할머니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꼈고 나도 같은 사랑을 받고 싶어 했으며 형에 대해서는 형이니까 더 사랑 받아야 한다 생각하고 존경하면서도 나이 차이가 나는 형인데도 사랑을 놓고 경쟁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이 편애하듯 편애하고 차별하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음에도 하느님께서 차별치 않고 편애치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합니다.
인간 사랑에 대한 의심이 하느님 사랑에 대해 의심케 하는 것이고, 인간의 편애와 차별을 하느님께 투사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왜 인간은 느끼지 못하고 인간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걸까요?
인간은 사랑이 성숙하지 못할 때, 그리고 성숙하지 못 할수록 나만 사랑하기를 바라고 나를 더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만 사랑할 때 사랑한다고 느끼고 나를 더 사랑해야만 사랑한다고 느끼며, 그러니 모두를 사랑하면 사랑을 못 느끼고 똑같이 사랑해도 사랑을 못 느낍니다.
나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나의 햇빛이고 나의 감나무에 걸린 달이 나의 달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공동소유는 안 되고 뭐든 내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고 하느님의 사랑도 나만의 사랑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나무인 동산의 선악과나무를 나의 나무로 따먹으려한 인간은 하느님 사랑도 보편적인 사랑으론 만족 못하고 내 사랑이길 바랍니다.
이 소유적 사랑을 넘어서야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고 하느님 사랑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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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안에서 지혜롭고 품위 있는 삶>
-초연과 이탈의 훈련-
오늘 말씀 묵상중 문득 떠오른 한달전(2023,1.12)의 강론에 그 강론을 받은 형제의 댓글 답신입니다. 다음 같은 일부 제 강론 내용입니다.
“우리가 살아야할 자리는 외딴곳, 안식처는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시는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입니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병이 있어도 건강한 척, 외롭고 쓸쓸해도 즐거운 척, 최소한도의 일상생활만 할 수 있으면 이렇게 사는 것은 위선이 아니라 진정 성숙한 믿음이요 살 줄 아는 삶의 지혜입니다.”
이에 대한 그 형제의 다음 답글에 공감했습니다.
“오랜 시간 척하고 살면서 스스로 위선이라 여겼었는데.... 큰 위안이 되네요.”
‘척하며’ 살아가는 자세는 위선은 커녕 참으로 성숙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거리를 두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참으로 지혜롭고 품위있는 자세입니다. 이를 위한 초연과 이탈의 훈련이 필수입니다. 예수님처럼 외딴곳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외딴곳입니다. 얼마전 인용했던 ‘외딴곳’은 제가 요즘 쓴 글중에서 아주 좋아하는 글입니다.
“답은 내 안에 있다
오늘 지금 여기가
내적초월의 자리 외딴곳이다
언제 어디서나
내적깊이와 높이의 본질 추구의
내적초월의 삶을 살자
주님 만나러
외딴곳 찾아 나설 것 없다
언제 어디든
주님과 함께 있으면
초월적 거점의 내적공간이 형성되고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구원의 자리 외딴곳이 된다
참 겸손 은총의 열매다”
바로 이를 위한 묵상기도, 명상기도, 비움기도, 반추기도, 향심기도들입니다. 모두가 다른 기도 명칭이지만 내적 기도 원리나 방법은 똑같습니다. 이런 기도 훈련이 잘 되어 습관화될 때, 초연과 이탈의 삶에 지혜롭고 품위있는 삶입니다. 연중 제6주간 본기도 내용처럼 이런 외딴곳의 훈련이 잘 된 바르고 진실한 사람은 은혜롭게도 주님의 거처가 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저는 제1독서 창세기와 복음을 묵상했습니다.
창세기의 카인의 경솔한 처신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 또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타오르는 질투와 분노로 자기 통제력을 잃은 무지의 사람, 카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면 무조건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며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것이 진정 지혜로운 자세였던 것입니다.
지극한 인내가 태풍을 미풍으로 바꿀수 있으며 경솔한 조건반사적 처신이 유혹에 빠져 미풍을 태풍으로 바꿀수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 형제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를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바야흐로 카인이 질투와 분노의 유혹에 떨어져 아벨을 살인하는 대죄를 짓기 직전입니다. 하느님이 왜 그랬는지 원인을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참으로 카인이 지혜로웠다면 '하느님도 말못할 내적 사정이 있었겠지'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자기의 품위를 지켰을 것입니다.
이랬다면 태풍같은 질투의 분노도 미풍으로 변했을 것이며 하느님도 내심 카인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태는 그 반대로 전개됩니다. 다음 주님의 질책에도 카인은 냉정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카인은 좌우간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옳아도 화를 내면 무조건 집니다. 화만큼 인간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시의적절한 충고이나 분노로 흥분하여 자제력을 잃은 카인의 귀에 들어올리 없습니다. 결과 카인은 아벨을 살인했고, 이어 주님의 추궁에 참 뻔뻔하게 대답하니 완전히 자기 품위를 포기한 작태입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대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데 이어 카인도 동생 아벨을 죽인 대죄로 삶의 자리에서 쫓겨나 세상을 떠돌며 해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작죄作罪의 카인의 후예들인 사람들입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작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듯이, 이런 카인에게도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졸지에 카인과 아벨, 쌍둥이 아들 형제를 잃은 아담, 하와의 슬픔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참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엄중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부부에게 자비를 베풀어 “셋”이라는 아들을 주셨고, 다시 심기일전하여 새롭게 삶을 시작한 부부의 용기있는 삶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카인만 무지한게 아니라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논쟁하는 바리사이들 역시 무지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깨닫습니다. 무지의 질투와 분노로 인생을 망친 카인에 이어 복음의 바리사이들 역시 무지로 인해 예수님을 시험하여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삶자체가 하늘의 표징들로 가득한 삶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의 참 어리석은 소행입니다. 이들이 참으로 지혜롭고 자기 품위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끝까지 인내하며, 열린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삶을 관상했을 것이고, 주님의 은총으로 하늘의 표징들로 가득찬 예수님 삶임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과 지체없이 초연히 이들을 떠나는 예수님의 단호한 분별의 지혜가 참 멋지고 우리에게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카인처럼, 바리사이들 역시 참된 회개가 필요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물론 이들에게는 회개가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뒤늦게라도 이 말씀을 듣고 회개했어야 하는데 이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지극한 인내와 지혜롭고 품위있는 삶이, 또 외딴곳의 영성훈련이, 초연과 이탈, 회심의 훈련이 우리의 영적 삶에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초연과 이탈의 정신으로 지혜롭고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연중 제6주간 본기도가 참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은 하늘 위에, 또 멀리 밖에 있는 분이 아니라, 바르고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안에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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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8,12)
<내가 표징이 되자!>
오늘 복음(마르8,11-13)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을 두고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8,12)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기적), 곧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어떤 증거를 보고,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 로마의 식민통치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이신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들!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안고 있는 크고 작은 바람들이 이루어지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청하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요구(청)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 뜻이 이루어지는 이 요구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문제이고,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음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표징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곧 '지금 여기인 삶의 자리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표징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징이 되려는 노력은 게을리 한 채, 자꾸만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내가 표징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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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참된
표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한 번도
만나 본적이 없는
표징을 만납니다.
신앙의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따름과
투신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느새 우리도
표징이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은 언제나
표징에 집착합니다.
작은 표징의
사랑이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합니다.
표징의 생활인
사랑의 실천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 표징이
오더라도
깊어질 수 없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살아있는 오늘이
가장 뜻깊은
표징의 날입니다.
기적을 멀리서
찾지 않습니다.
표징을 먹고
마시는
우리들의
삶이 기적입니다.
뺄 수도
더 할 수도 없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다른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표징에 감사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사이에
마음이 있고
삶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표징도 있습니다.
뚜렷이 드러나는
사랑의 삶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표징입니다.
표징은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기도와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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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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