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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부장의 “소리마루 제2차 소리기행에 참여해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말과 회장님의 “이른 시간에 나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1박 2일동안 많이 보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시기 바란다.”는 인사말을 끝으로 차에서 놀고 갈 사람은 놀고 잠이 부족한 사람은 자고 가자고 하였는데, 조금 있으니 “남도 소리문화 유적 답사”라는 책을 만들어 오신 일청 조동준 고문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자칭 여행가이드란 칭호를 사용하며 마이크를 잡고 여행코스 설명을 해 주셨다. 1박 2일 여행일정은 순천을 지나 낙안읍성을 들러 보성녹차밭으로 강산제 정응민선생 생가로 강진 고려청자도요지로, 김영랑 생가를 들러 1박(하룻밤 묶고)을 하고 다산 정양용선생 유배지와 해남 대흥사를 들러 고산 윤선도유적지 녹우당을 방문하고 일정이 끝난다고 하면서 낙안읍성에 송순섭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였다.
보성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녹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우전차(곡우 10일전 채취)가 제일 비싸고 해풍을 맞아야 녹차 맛이 좋다고 했고, 강산제 정응민 선생 생가를 방문 한다고 하면서 박유전 선생으로부터 소리를 하사 받았다는 설명과 성창순 선생님이 정응민 선생 생가 복원을 위하여 300평 땅을 사서 기증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강진에 대한 설명으로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님이 여행의 1번지로 강진을 꼽는다는 말씀과 함께 김영랑 생가 이야기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생활부터 가족의 수난사 정약용 선생님의 모친이 공재 윤두서 선생님 손녀딸 이었다는 이야기, 이승훈이 여동생 남편이고, 황사연(조카사위)이 큰형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다산 선생님의 저서로 목민심서(목민관으로의 자세), 경세유포(경제제도 개혁), 흠흠심서(억울한 일로 인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서는 안됨) 대표적 책 3권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이야기 내용이 길어서 생략 함 천주교 박해부터 영ㆍ정조시대, 사도세자 이야기, 순조 등극 노론득세 등등)
해남 고산 윤선도 유적지 녹우당을 설명하면서 고산 선생은 남인 출신이고 노계 박인로,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이렇게 3인이 조선시대 3대 시가인이란 설명과 임진왜란 이야기와 홍도야우지마라 노래가사의 유래 내용을 이야기 하고 직접 노래까지 불러 주셨다.
2. 순천 갈대밭 옆을 지나
일청 조동준 고문님으로부터 자세한 역사 공부를 듣고 판소리보존회 박안순 회장님의 리더로 소리를 지르면 놀다보니 어느덧 버스는 순천만 갈대숲 옆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선생님 북 장단에 흥이 안 났던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 쓸어졌던 한판이었다. 얼마를 날고, 뛰고, 놀았는지 모른다. 점심을 먹고 낙안읍성을 가자고 하여 순천과 벌교의 경계에 있는 제석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3. 낙안읍성 도착
조동준 고문님의 노력으로 송순섭 선생님과 낙안읍성장님이 소리마루 가족을 낙안읍성 입구까지 와서 맞이해 주셨고, 낙안읍성에 대한 설명을 가이드(안내원)의 해설이 아닌 성장님이 직접 해주셨는데 낙안읍성은 국가지정(성곽, 중요민속가옥 9채), 도지정문화재(객사 1동, 노거수=나무 14주), 도문화재(임경업장군 비각 1동)로 지정이 되어있고 일제에 의하여 낙안군이 폐지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4. 오태석명창(가야금병창) 생가 방문
송순섭 선생님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성장님이 빠뜨린 고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오태석명창 생가 방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읍성 견학이 시작 되었다. 오태석명창(1895.7.29)은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태어나 판소리, 고수,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대명인인 오수관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5. 국창송만갑 생가 방문
국창 송만갑 선생님은 동편제 판소리 거장으로 순천군 낙안면에서 태어나 박만순 선생께 소리를 전수 받았다는 이야기와 가왕 송흥록, 동생 송광록, 송광록의 아들 송우룡, 송우룡의 아들 송만갑으로 계승되었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송광록의 소리를 아들 송우룡이 다 받지를 못하여 박만순에게 전달을 했고 송만갑 선생은 박만순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송순섭 선생님은 적벽가 한 대목으로 낙안읍성을 방문한 소리마루 가족들을 섭섭하지 않게 해 주셨고 서울 한옥마을에서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많이 찾아 달라는 당부의 말씀도 하셨다.
6. 보성 녹차밭을 지나
낙안읍성에서 송순섭 선생님과 낙안읍성장님의 배웅으로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보성으로 향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낙안읍성에서의 지체시간이 많아 녹차밭은 길가 휴게소에서 눈요기만 하고 보성군 회천면에 있는 정응민 선생의 생가로 향했다.
7. 정응민 선생 생가 방문
서편제 소리는 박유전 선생 ⇒ 정재근 선생 ⇒ 정응민 선생으로 전승되었고, 이 유파를 강산제라고 하는데, 또 다른 강산제는 모흥갑의 소리를 강산제라고도 하여 두가지로 쓰인다고 한다. 박유전제의 강산제 속에 또 두가의의 의미가 들어 있는데 하나는 박유전의 호에서 따왔다는 설(박유전의 호가 강산) 이는 곧 흥선대원군이 “너야말로 천하제일의 강산이다.”라고 하여 호를 강산이라 정한데서 비롯된 설과 또 다른 하나는 박유전이 만년에 전남 보성군 강산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강산제락고 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정응민 선생의 생가와 보성소리 기념비, 정응민 선생 묘소, 정응민 선생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회천면 거주 주민이 우리에게 설명하는 사진 이다.
7. 강진 김영랑 생가 방문
날이 차차 어두워 질무렵 보성을 떠나 강진으로 향했다. 원래는 강진 고려청자도요지를 먼저 방문하고 김영랑 생가를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시간이 부족하여 김영랑 생가부터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조동준 고문님의 사전 조치로 강진군 위생관리팀에 팀장으로 재직중인 이용국 팀장님의 안내를 받으며 김영랑 시인의 생각를 방문하였다.
8. 1박 강진 프린스모텔
숨가프게 돌아다닌 하루 일정을 마치고 우리들이 하루 쉬어갈 숙소인 프린스모텔에 여장을 풀어놓고 나와 강진 명동식당에서 한정식으로 저녁밥을 먹었는데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녀서인지 밥맛이 꿀맛이었다. 몇 번을 추가로 시켜 먹었는데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안에서 테이블별로 1명씩 선택하여 노래 시합이 있었는데 대단한 경연장이었다. 꼴등한 테이블이 식대를 치룬다는 말에 열기는 더해 갔는데 정말 재밌었다. 하마터면 주최측의 농간에 넘어갈뻔도 했는데 다행히도 잘 넘겼다
각 테이블의 대표 주자들
2차, 3차 장소에서 강진 사람들이 아마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9. 강진 고려청자도요지
프린스모텔에서 1박을 하고 천년의 신비를 생산해 냈던 고려청자도요지를 찾았다. 강진 청자박물관에서 15억원이 호가하는 실물 고려청자를 보고 왔으니 내 속은 당분간 먹질 않아도 배가 부를 것이다.
10.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호가 다산 초당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다산 선생이 18년 강진 유배생활 중에 10년을 보냈던 곳으로 후학을 가르치며 600여권의 책을 저술한 곳이라고도 한다. 다산초당에는 완당 김정희 선생이 집자하여 만든 “다산초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곳이기도 하고, 동암, 서암, 천일각 등의 건물이 있고,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은 다산사경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11. 사의재(四宜齋)
다산 선생의 강진 유배 18년은 동문매반가 4년, 보은산방 2년, 이학래가 2년, 다산초당 10년으로 1801년 11월 22일 유배당시 처음 거처하는 강진읍 동성리 동문 밖 주막이었으며, 이 주막의 뒷방을 빌려 생각, 용모, 언어(말), 동작(행동) 등 『네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사의재”라고 부른다.
사의재의 향토 문화재 해설사 “이을미 선생님” 설명
동문주막의 주모가 하루는 정약용 선생을 찾아와서 자식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공으로 태어나는데 아버지의 공과 어머니의 공중에서 누구의 공이 더 큰가 질문을 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다산 선생님은 풀과 나무를 토양(흙)과 종자에 비유하면서 종자의 비중이 더 크다고 설명을 했는데 주모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버지는 나를 낳고 어머니는 나를 기르셨다. 토양(흙)은 어머니(모)이고 종자는 아버지(부)인데 아무리 좋은 종자를 뿌려도 토양(흙=어머니)이 좋지 않으면 풀과 나무는 빈약하게 자랄 수밖에 없다면서 자식에게 있어서는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가 훨씬 공이 크다고 하여 다산선생의 생각을 바꾸게 했다는 설명을 해 주었다.
동문주막의 주모는 다산 선생이 4년 뒷방에서 기거하는 동안에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국밥을 제공 하였는데 다산 선생이 주모를 칭하길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 했다고 한다.
다산 선생은 장남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은 이제 폐족이 되었다. 남들이 1번 책을 읽으면 너는 10번 책을 읽고, 남들이 10번 책을 읽으면 너는 10번의 10번 즉 100번을 읽고 공부를 해야 남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부터 너와 나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 관계라 말하고, 서울로 올라가거든 매일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어머니가 잠자리에 들거든 군불을 지펴드려라. 그러면 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겠지만 따뜻한 방안에서 너의 어머니는 미소를 지을 것이다. 라며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져 버린다고 못들어 가게 말렸다고 하는데 다산 선생은 아들에게 남녀평등교육을 시켰고 눈물을 억지로라도 흐르게 하여 아들이 겸손하게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다산선생을 일표이서라고도 했다는데 일표는 경세유표 이고, 이서는 목민심서, 흠흠신서라고 한다.
12. 해남 고산 윤선도유적지 녹우당
13. 해남 대흥사
14. 서울 도착
출발하여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니라
화일이 커서 못 올리네요.. 4개로 나눴는데도 말입니다.
사진들이랑 함께 봐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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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행문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읽어보니 정말 그때 소리기행이 생생합니다....앞으로 계속 부탁해요
주중엔 바뻐서 손을 못대겠고, 주말에 시간을내어 해남 고산 녹우당과 대흥사(대둔사) 내용을 추가하여 올리겠습니다.
함께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도 아쉽습니다.보나마나 그곳 분위기는 최고 였을리라 짐작 됩니다.^^
강조교님이 오셨으면 아마 다 죽었을 겁니다.
서평제님이 후기를 멋지게 그림을 곁들여 설명했는데 사진이 아직 안보이니 어떡헌담???야~~놀랬네..사의재에 갔을때 씨앗 과 밭에 대한 설명을 이리도 상세하게 써올렸네...결론은 씨앗이 중요하냐???밭이 중요하냐???...누가 암만 그래도 씨가 좋아야 열매도 좋은것이여...ㅎㅎㅎ잘헌다~~
사진찍으랴, 동영상 촬영하랴, 글쓰랴 조금 바뻤습니다. 송순섭 선생님께서 송만갑 선생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정확하게 듣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송우룡 선생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라고 언뜻 말씀하셨던거 같은데 부친 이름을 정확히 못들어 아쉬웠습니다.
우와, 알차게 보내셨군요~~~~~~~~~~~!!!!! 담에 저도 함께해요^^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봐요. 그래도 인터넷 출석은 자주 하셔서 다행이네요.. 언능 바쁜일 처리하시고 소리마루에도 빨리 나오시기 바랍니다.
역시 내 눈은 최고라니까? 이런 멋진 후기 쓸줄 알았슴다.~~~ 수고하셨어요.
어어라님이 쓰셨으면 더 잘쓰셨을텐데 지송합니다. 바뻐서 좋은글이 안되었네요.
재무차장님 s31113@naver.com 이거등요- 송순섭 선생님 파일좀 보내주시면 정말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헤헤. 저 목요일에 무지 오랜만에 뵈었는데 무지무지 반가운거 있죠. 강습 끝나고 바로 레슨 받아서 인사를 제대로 못드렸습니다. ^_^ 헤헤.
메일로 보내드렸는데 받으셨는지요?
우와~~! 대단한 기행 입니다. 이 자료는 소리마루 자료실에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쟈게 바쁘실텐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책으로 내도 될 것 같네요.ㅎㅎ
사진을 볼 수 있도록 정리해서 다시 자료실에 올리겠습니다.
소리기행 후기가 대충 완성 되었습니다. 배상미님께 메일을보내놨으니 포토샵 정리해서 사진까지 함께 보실수 있도록 다시 자료실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지금껏 사진을 볼 수 없으니 우찌 된일이여요???어케 함 해보이소...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