퀀트는 미니스커트 외에도 여러 디자인을 통해 인기를 얻었다. 그녀의 가장 성공적인 초기 디자인 중의 하나는 스웨터나 드레스에 부착된 화이트 플라스틱 칼라(plastic collar)였다. 또한 퀀트는 교복과 남성복, 특히 니커보커스(knickerbockers), 노퍽 재킷(norfolk jacket) 등 전통적인 컨트리풍 의복과 아동용 언더웨어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남성용 양복감으로 점퍼스커트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힙스터(hipster) 팬츠는 매우 인기를 끌었다. 퀀트는 주로 해러즈 백화점(Harrod’s)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 체크와 헤링본 조직의 소재를 자주 사용하였고 니트웨어 제조업자를 설득해 남성용 카디건을 25cm 더 길게 제작해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다.
한편, 퀀트는 편안한 쇼핑공간을 제공함으로써 패션 리테일링(retailing)에 혁신적 접근을 가져왔다. 상류층 쿠튀리에들의 백화점이나 체인점과 같은 전통적인 패션 매장과는 달리, ‘바자’는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열려 있는 부티크에는 커다란 음악 소리와 와인이 있었고, 무엇보다 매장은 끊임없이 새롭고 입고 싶은 디자인들로 채워졌다. 게다가 가격은 전통적인 패션하우스의 경우에 비해 저렴했지만, 의복의 퀄리티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녀는 제품의 디자인뿐 아니라, 제조, 유통, 홍보의 전 측면에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단지 부티크를 위한 의류만을 개발하다가 재빨리 대량생산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었는데, 이는 기성복 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그녀는 진지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의 패션쇼 대신에, 모델들이 무대에서 뛰거나 무대 아래로 점프하도록 하였고 런던의 관광지에서 촬영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라벨뿐 아니라 동시에 영국도 홍보하였다. 이로부터 퀀트는 패션 리테일링의 발전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퀀트의 여성적 이상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1%2F11%2F9%2F89%2F17.jpg) 미니스커트로 대표된 60년대의 여성적 이상이 진정한 여성해방의 상징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60년대의 이상적인 여성은 사춘기 ‘돌리 버드(dolly bird: 매력적이나 똑똑하지는 못한 젊은 여자)’ 혹은 ‘영계(chick: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모욕적인 말)’의 이미지였다. 이 시기의 여성들은 납작한 가슴과 엉덩이의 여윈 몸에 작은 입술과 천진하게 큰 눈을 가진 아이와 같았고, 의복 또한 파리 쿠튀리에들에게 좌우된 어머니 세대와는 달리 아이처럼 옷을 입고 싶어했다.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60년대의 여성적 이상이 당시의 여성들에게 진정한 해방이었는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미니스커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1960년대 청년문화의 핵심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여성을 성적 매력의 대상물로 전환하였으며, 이러한 태도는 1960년대의 정신성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퀀트는 당시의 여성적 이상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로,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구속적인 부르주아적 유니폼을 입은 어머니들처럼 보이기를 원치 않는 세대들에게 아이 같은 모습과 자유를 주기 위해 활동적인 의복을 창조했다. 퀀트는 또한 어려 보이는 활기찬 분위기의 마네킹으로 위트있게 디스플레이를 하였으며, 그녀의 모델은 샴페인 잔을 들고 시끄러운 재즈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이러한 스타일은 그전에는 어느 누구도 선보인 적이 없는 퀀트의 여성적 이상이었다.
퀀트는 1982년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시절 우리는 사회적 혁명의 한 중심에 놓여 있었다. 갑자기 경기가 호황을 타고 있었으며 우리는 이러한 호황기의 첫 세대로, 젊지만 돈이 있었고 따라서 자신을 위한 문화를 창조할 자유가 있었다… 미니스커트는 그 일부였다. 그것은 매우 활기 넘치고 순수한 분위기였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여성운동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