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 속 게으름의 미학
메주 고 제 웅
장마철을 지나 찜통 같은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33˚C가 이틀 이상 지속하면 ‘폭염주의보’가 발령되고, 이보다 2도 상승하면 ‘폭염 경보’로 바뀐다.”고 한다. 부산은 연일 24˚C∼32˚C 이다. 아직은 폭염과 열대야를 살짝 비켜선 날씨다. 하지만 날씨 탓인지 입에는 물이나 음료수도 차갑고 시원한 것만 당긴다. 찬 것을 먹고 마셔 뱃속이 탈이 났는지 더부룩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이틀 지나자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아랫배에 싸한 통증이 시시때때로 일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며 ‘온열 병’이란 단어가 내 삶의 도량을 덮기 시작했다.
“지구의 평균 온도는 15°C다. 15°C보다 낮으면 춥다고 느끼고, 15°C~23°C까지는 활동하기 좋은 온도로 느낀다. 의학적으로 최적의 수면 온도는 섭씨 18~20°C 이다.” 일차적으로 수면을 설치게 하는 한계가 23°C고, 열대야로써 잠들기가 어려운 온도는 25°C부터다. 기상청은 7월 20일부터는 열대야 폭염이 올 것을 예고하고 있다. 열대야, 폭염 경보도 발령되기 전에 이미 장(腸)이 탈이 나 있는데,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걱정이다. 정로환 서너 알을 복용하며 나만의 명심보감을 되뇌었다. 야! 이 녀석아! ‘가장 춥고 가장 더울 때를 조심하라.’ 내가 나만의 명심보감을 정해놓고 때때로 비춰보는 이유는 참으로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런 때 병을 얻기 쉽기 때문이다. 큰 병을 얻고 이삼일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면 이 또한 괜찮은 죽음이리라. 하지만 자리보전은 상상만으로도 괴로운 일이다.
게으름이 득이 될 때가 있다. 찜통처럼 푹푹 찌는 여름날과 칼날 같은 동장군 앞에서는 게으름이 미학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몸소 체험했기에 하는 얘기이다. 몇 년 전 어느 겨울의 일이었다. 하루는 바둑을 한 수 하고 화엄사(부산 동구 구봉중길 48-10)를 향해 오르막길을 재촉하며 바삐 오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가 빠개질 것같이 아팠다. 숨도 헉헉, 목젖까지 차올라 당장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불현듯 이러다가 내가 뒤로 넘어져서 뇌진탕을 일으키거나 중풍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서둘러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서서히 통증이 사라졌다.
“걸음이 급하고 빨랐던 탓이다”
심장은 피를 품어주는 펌프다. 심장이 박동하면서 품어준 피가 동맥을 타고 장기, 근육, 신경, 뇌, 뼈, 뼈마디, 모세관, 낱낱 세포에 이르기까지 몸 구석구석을 적시고 윤활 시킨다. 그리고 “피가 정맥을 따라 허파 및 신체의 말초 모세관으로부터 심장으로 되돌아오고” 있지 아니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너무 빨랐던 탓에 뇌혈관에 혈액이 미처 원활히 공급되지 않은 탓이었던 것은 아닌지! 이제는 육신이 노화되었다. 심장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평범한 이치를 무시하고 의기만 앞서 빠르게 걸었던 것이 뇌의 통증을 유발한 것이리라. 물론 심장은 적신호를 켜고 위험하다는 것을 이미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무지함이 화를 불렀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오르막길은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걷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럴 때 이따금 노후 된 내 혈액(피) 펌프가 안녕한지 묻고 싶어 가슴에 손을 얹는 버릇이 생겼다.
삶에서 호흡과 행보의 조절은 참으로 중요하다. 될 수 있으면 천천히 걷고 여유를 가져야 한다. 여유는 여백으로써 하나의 공간이다. 생명은 공간이 필요하다. 인체의 몸속은 꽉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장기마다 제각기 나름의 공간이 있다. 몸을 이루는 세포마저도 제 나름의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는 마치 산천에 초목이 있어 공기가 싱그럽듯이 몸속 공간은 생기로 넘쳐야 한다. 삶에서 육신과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호흡과 행보의 조절이 아닌가 싶다. 이 때문에 쉬어가는 삶은 더욱 중요하다. 쉰다는 것을 삶의 정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휴식도 삶의 일부다, 중국 송나라 대혜(大慧) 종고선사(宗杲禪師 : 089~1163)는 수행자를 향하여 ‘휴헐거(休歇去)*’하라 하셨다. 선사께서 가신지 어언 860여 년 세월이 흘렀지만 쉬어가라는 뜻의 말씀은 여전히 힐링(healing)으로 세상을 덮고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어떤 표제로 시집을 세상에 내어놓을까 고심하고 또 고심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표제가 없었다. 첫 시집만은 참으로 의의가 깊은 표제로 선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한 표제가 없었다. 그렇게 고심하던 2005년 가을 정읍 내장산에서 아! 이것이라며 무릎을 친 적이 있다. 그 가을은 만추가 될 때까지 가뭄이 극심했었다. 나뭇잎은 단풍이 들다 말고 바스러질 정도로 말라 있었다. 빛깔도 우중충하니 제 색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단비가 소리 없이 내렸다. 나뭇잎이 비에 젖더니 말라가던 잎이 생기를 되찾듯이 활짝 펴지고 곱게 물들었다. 마침내 단풍의 이미지가 형상화되어 표제가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쉬어가는 단풍”
우리 절 화엄사의 신도인 M이라는 보살이 있다. 그녀는 화엄사 신도중에 가장 바쁘게 사는 것 같다. 그렇다고 딱히 하는 일이 있거나 별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보살이다. 하지만 M은 항상 바쁘다. 매주 일요일은 산악회에 나간다. 하지만 등산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산악회 버스를 타고 야외로 나가면 고작해야 쑥, 고사리, 민들레, 씀바귀 등을 뜯어오는 정도다. 그런데 화엄사에 와서도 기도를 열심히 한다거나, 법당청소를 한다거나, 도량에 잡풀을 뽑아 도량을 가꾼다는 신심은 도통 없다. 그런 보살과 화엄사의 인연이 닿은지 벌써 25년째이다. 구병시식(救病施食)*을 하러 왔는데 진정성이 없어 보이기에 거절하고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다시금 구병시식을 빌미로 한사코 밀고 들어왔다. 물론 자신이 25여 년 전에 왔다가 거절당했다는 사실은 숨긴 채 말이다.
보살의 작은 언니가 고추방앗간을 운영한다는 얘기이다. 평소에 그 언니의 일을 돕는다 했다. 고추도 빻고, 기름도 짜고, 자전거로 배달도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언니의 일을 진정으로 돕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화엄사에서 출발해 언니의 고추방앗간으로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얘기가 늘어지면서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팔기 일쑤인 것 같다. 그 때문에 M은 바쁘기 그지없다. 쉴 여가가 없다. 더욱이 M은 가엾기 그지없는 보살이다. 숨겨진 내막을 시시콜콜 알 수 없지만 당신의 아들이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켜버렸었다고 했다. 그렇게 강제 입원된 것을 언니가 조카에게 책임을 지겠다며 사정사정해 퇴원을 시켰나 보다. 그렇다고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M의 정신은 맑음이다.
반야심경 끝에 ‘진실불허(眞實不虛)’라는 구절이 있다. 이 한 구절만 바르게 읽고 깊이 생각한다면 M은 곧바로 해탈의 세계를 걸어갈 보살이다. 그런 보살이 언니의 방앗간과 화엄사를 전전하며 밤에는 화엄사로 잠을 자러 온다. 시도 때도 없이 막무가내로 요사채 방문을 두들겼다. 한두 달은 꾹꾹 참고 견뎌내다가 K 보살이 야심한 밤에는 절간 방문을 두드리지 말라고 이른 것 같다. 이제는 밤에 화엄사 방문을 두들기는 무례한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M은 화엄사로 언니네 방앗간으로 산악회로 여전히 바쁘다. 이 무더운 여름에도 배낭을 멘 채 여전히 바쁘다. ‘저처럼 바쁜 모습이 내 삶의 모습은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되돌아본다.
'보살이여! 부디 ‘쉬어가라!’
쉰다는 것은 삶을 정지시키는 것이 아니다. 무더운 여름밤에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바람을 쐬는 일이다. 또한 은하수의 흐름을 따라 영혼이 쉴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하는 선업(善業)을 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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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헐거(休歇去) : 쉬고 또 쉬어가라.
* 구병시식(救病施食) : 병든사람을위하여귀신에게음식을주고법문을알려주는 퇴마의식.
* 진실불허(眞實不虛) : 진실한 것은 헛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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