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물 안석주
영원한 인간사랑 ・ 19시간 전
한국의 인물 안석주
2024.07.03. 02:00조회 18
<우리의 소원>을 작사한 저항적 시사만평, 안석주(1901~1950)
만평의 네모칸 맨 위쪽에는‘6월’이라는 글자가, 맨 아래쪽에는‘언론집회압박탄핵회’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그 사이 공간에 연단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청중을 향해“지금 이 뒤를 보면 알리라”고 외치는 연사가 그려져 있다. 연사 뒤쪽에는 연사의 행동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며 칼을 뽑아들 듯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본순사가 보인다.
이 만평은 안석주(安碩柱)가 1924년 <개벽> 12월호에 기고한 ‘갑자년 중 24대 사건’이라는 제목의 만평 연작 중 하나로, 같은 해 6월 20일 비타협적 민족주의 지식인들과 사상·언론단체 31개가 연합하여 천도교당에서 가진 언론집회 압박탄핵민중대회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일제의 탄압을 있는 그대로 폭로한 이 직설적이 만평에서 보듯 안석주는 당시 반제·반봉건적인 시사만화로 조선 민중의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주었던 탁월한 시사만화가였다.
‘우리의 소원“ 가사 지어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오늘날 그리 널리 기억되고 있지 않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쉽게 잊혀지는 대중적 매체인 시사만화의 작가인 탓도 있지만, 워낙 여러 예술방면에 재주가 뛰어나 이것저것 다양하게 건드리다 보니 어느 한 분야에서도 집중적인 관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화 외에 삽화·시·소설·연극·영화·문학비평·미술비평·영화비평 등 그가 정열적으로 손대지 않은 예술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안석주가 요즘 북한 동포들도 즐겨 부르는 노래 <우리의 소원>을 작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가 그리 낯선 사람만은 아니라는 인식이 금방 들 것이다.
미술 평론가 최열씨는 안석주에 대해 “김동성 이래 전문작가로 만화사에 정치적 비평만화의 전통을 올곧게 수립한 업적을 남겼다”며 “영화인으로 변신하기 전까지 일제와 매판적 친일세력에 타협하지 않고 당시 민족적 현실을 지식인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표현해 나간 탁월한 작가이자 문예운동가”라고 평한다. 이렇게 민족적 시각에서 저항적인 작품을 남겼지만 30년대 중반 이후 영화판에 뛰어들면서 그는 일제 식민지 통치에 타협적인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안석주는 1901년 4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석영(夕影)으로 교동보통학교와 휘문고보를 졸업했으며 고보 졸업 직후인 1920년 일본 도쿄의 혼고양화연구소로 미술유학을 떠났다.
이미 고보 재학시절 그림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안석주는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19년 강진구·장발·이승만 등과 고려화회를 조직, 국내 최초로 서양미술을 공부한 고희동 등 몇몇 미술인들을 초빙해 유화와 수채화·만화 등을 배웠다. 이렇게 다져진 기초를 바탕으로 혼고양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배우는 데 전념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학생활중 건강이 나빠진 그는 1921년 갑자기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예술동맹서 활동
그렇지만 이때의 귀국은 그에게 우리나라 미술사상 새 기록 하나를 세울 기회를 주었다. 나도향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환희>의 삽화를 맡아 우리나라 신문소설 삽화계의 선구가 된 것이다.
글재주도 있던 안석주는 이 무렵 주변의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백조>의 동인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는 자연히 <백조>의 표지와 속지 삽화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안석주는 <백조>뿐 아니라 토월회의 회원으로 가입, 연극에도 관심을 쏟았다. 연기도 했지만 무대장치 작업은 당연히 그를 비롯한 미술인들에게 떨어지는 몫이었다. 조각가 김복진도 그와 함께 무대장치 작업을 했는데, 안석주는 이때부터 한동안 김복진의 정신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듯한 흔적을 보였다.
김복진은 한국 최초의 서구적 조각가로서 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조선프롤레타라아예술동맹(이하 프로예맹)의 강령을 초안하는 등 프로예맹의 실질적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조선청년총동맹과 ML당(제3차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운동가이기도 했다. 1928년 김복진이 피검되기까지 안석주는 토월회 탈퇴와 토월미술연구회 조직, 파스큘라 참가, 조선만화가구락부 조직, 프로예맹 참가, 미술단체 창광회 조직 등 크고 작은 조직활동에서 김복진과 공동보조를 취했다. 안석주의 신랄한 정치풍자만화가 잇따라 발표되던 때도 이 시기이다.
억압·수탈 만화로 폭로
1924년 벽초 홍명희와 김복진 등의 도움으로 다시 도쿄로 건너가 못다 한 미술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안석주가 25년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하게 된 것도 이런 정치풍자만화를 지속적으로 그릴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동아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며 학예부장을 지내던 그는 같은 해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겼고 28년에는 다시 <조선일보>로 갔다.
1925년 그가 <개벽> 12월호에 기고한 만화‘을축년 중 16대 사건’연작은 한해 전 같은 잡지에 실렸던‘갑자년 중 24대 사건’과 더불어 이 시기 그의 의식을 잘 대변해 주는 작품이다.
백광운이 일본 총독을 저격하는 장면을 그린‘국경에서의 사이토의 저격’과‘3월1일 기념’등 네 작품이 검열에서 삭제돼 빈칸으로 남긴 했지만 ‘레닌씨 사(死)’‘이중교투탄사건’‘노농총동맹시위’‘영국 노동당내각 성립’등 국내외의 주요사건을 현실비판적 시각에서 제작한 ‘갑자년...’ 연작처럼 ‘을축년...’ 연작도 ‘러·일 협약’ 등 국제적 사건과 ‘재령 북율면의 소작쟁의’등 국내사건을 반제·반봉건적 시각에서 날카롭게 풍자한 작품들이다.
‘을축년...’ 연작은 일제와 매판지주에 맞서는 민중의 모습과 일제의 억압적 통치를 폭로하는 작품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특히 돋보이는 수작이다.‘재령 북율면의 소작쟁의’는 지나온 발자국마다 해골과 뼈를 즐비하게 늘어뜨린 괴수의 모습을 한 지주와 이 괴수와 맞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싸우는 말라깽이 소작인의 모습을 통해 이런 주제를 잘 형상화해내고 있다.
작품‘치안유지법’도‘집회엄금’과 ‘언론압박’이라는 돌무더기에 깔린 민중과, 이 민중에게 ‘치안유지법’이라는 몽둥이를 내리치려는 일본 정부의 대립구도를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만화의 바탕에 깔린 이런 정서는 그의 미술관 또는 예술관을 일종의 민중적인 성격의 것으로 드러내 보인다. 1932년 <문예월간> 1월호에 실린‘미술계에 대한 희망’이라는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예술은 몰락되는 그 특수한 계급의 잔재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들, 더구나 세계의 어느 민족에 비하여서든지, 비참한 환경에 처한 우리들이 가져야 할 미술운동에 대한 운동이 일어나고, 그러한 의식을 가진 분자들의 규합에 있어서, 모든 대중의 이익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작품을 내놓아야 하겠다.”
그는 또 <동아일보> 1925년 3월 30일자에 쓴 평문‘제5회 협전을 보고’에서“예술은 현실을 폭로시켜 온 민중을 실재로 인도하는 책임이 있다”며 “에술, 그것은 그 시대인에게 아무런 반향이 없으면 자기 희롱물에 그칠 것이다. 예술, 거기에는 그 시대인의 생활 그것이 간접으로 드러나서 다시 그것에게서 민중이 자기의생활을 엿보아 자기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진보적이었던 그의 예술관은 그러나 30년대 이후 만화와 미술방면 이외의 여러 분야에 정신없이 자신의 재주를 쏟게 된면서 구체적인 실천의 형태를 띠지 못하고 관념으로만 굳어져버려 아쉬움을 준다.
시나리오·소설도 발표
김복진과 함께 활동했고 파스큘라·프로예맹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안석주는 기질상 확고한 좌익이 못됐다. 흔히 말하는 예술가적 자유분방함이 그에겐 더 강했다.
팔봉 김기진은 56년 봄 <서울신문>에 기고한‘안석영의 문학과 생애’라는 글에서 안석주의 사상적 경향성과 관련, 그를“낭만적 인도주의적 사회주의의 동정가”라고 규정했다. 문학평론가 김우종씨는 84년 관동출판사에서 발간한 <안석영 문선>에서“그 (안석주)는 한때 파스큘라에 가담하고 카프(프로예맹)에 소속되었지만 이런 이데올로기에의 접근과 집단적 활동에의 열의는 간접적으로 일제의 억압과 수탈정책에 대한 반항이 동기였다. 그리고 이런 민족적 자각과 자부심과 사명감이 그로 하여금 예술의 각 분야에 뛰어드는 왕성한 활동의 욕망을 촉구한 셈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김복진의 피검시기와 안석주의 작품에서 좌파적 시각이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가 맞물리는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최열씨는 20년대말 이후 언론이 그 성격을 전환하여 막연한 준비론 및 추상적 민족의식 고취 등의 계몽적 태도로 빠져든 것과 안석주가 주로 신문 등의 합법적인 공간을 이용, 작품을 발표했으므로 안석주의 작품소재가 덜 저항적인 것으로 변모하는 것을 상호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연결해 보기도 한다.
이 당시 안석주가 발표한 대표적 작품으로는‘만문만화’연작(<신문춘추> 창간호)과‘가상소견’‘봄’‘못된 류행’‘일일일화’‘여성선전시대가 오면’(<조선일보>) 등이 있다. 주로 간접적 표현으로 신식문화라면 무조건 넋을 잃고 방황하는 유한계층과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을 나무라고 비꼬는 스케치 만화들이다. 1933년에는 <삼천리> 12월호에 뛰어난 인물 캐리커처를 남김으로써 전인미답이던 이 분야의 개척자가 되기도 했다.
30년대 들어 다른 예술분야의 활동도 본격화한 안석주는 30년 양화 시나리오 <노래하는 시절>과 단편소설 <그 여자의 딸> <여사무원> 등의 발표를 시작으로 미술평론·소설·시나리오·수필·문학평론 등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내 아버지이지만 어릴 적 기억에도 세상에 저런 천재가 있나 싶었다. 당시 우리 근대 문화·에술의 여명기에 각 방면에 확고한 전문가가 많지 않았던 풍토에서‘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발전시키려 애만 쓰다 돌아가신 것 같다. 한 분야만 팠으면 큰 걸 남기셨을텐데...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
안석주의 둘째딸 희숙(59. 여세대 교수)씨는 자신이 피아노를 전공하게 된 것도 아버지가 바이얼린·기타·만돌린·피아노·하모니커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어 늘상 즐기는 것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운동쪽에는 거의 관계하지 않고 창작활동에 전심전력하던 그는 1932년 마침내 프로예맹에서 제명당했다. 실낱같이 남아 있던 사상의 끈이 끊어진 것이다.
친일영화 <지원병> 제작
1934년 그가 쓴 영화각본 <춘풍>이 박기채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것을 계기로 그는 영화에만 전념하기로 마음먹고 <조선일보>를 나왔다. 35년 프로예맹 해산으로 다소 정신적인 압박감이 줄어서인지 이후 그의 영화작품은 대중적 통속성을 강하게 띠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1938년 조선일보사 주최의‘조선일보 영화제’에서 관중이 뽑은 베스트 10중 <춘풍>과 <심청전>이 무성부문 4위와 발성부문 1위를 한 사실에서 보듯 안석주의 대중적 인기는 나날이 높아갔다.
그런 명망은 일제가 1939년 조선 영화계를 통제하기 위해 조선영화인 협회를 발족시키면서 그를 이 협회의 기능심사위원으로 위촉한 점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기능 심사위원 10명 중 조선사람은 3~4명에 불과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야스다 사카에’로 창씨개명하는 등 초기의 투철한 반제·반봉건적 자세를 상당히 수정, 타협적 자세를 보였다.
이런 뒷걸음질은 41년 징병을 피하던 조선청년이 애인의 간곡한 권유로‘천황의 군대’에 지원한다는 군국주의 어용영화 <지원병>(이 영화는 일본에서 상영되기도 했다)을 만드는 데까지 이른다.
연화평론가 이효인씨는 “당시 기능심사위원회 위원장이 쓴 책에 의하면 안석주가 겁이 많아 대세에 순응했을 뿐 나서서 친일한 것으로 돼 있지는 않다”며“하지만 그가 어떠한 모양으로든 일제에 협조적 자세를 보인 것은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해방뒤 관변단체 가담
이런 처지에서 47년 그의 맏아들 안병원씨가 곡을 붙인 3·1절 기념 어린이 노래극 대본 <우리의 소원은 독립>(후에‘독립’부분이‘통일’로 바뀜)의 집필을 그의 순결한 민족애의 발로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해방 이후 그는 수많은 문화단체의 이합집산 속에서 옛 프로예맹 동료들이 만든 모임에는 일절 명함을 내밀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말년을 대한영화협의회 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문교부 예술위원, 국립극장 위원 등 관변 또는 우익 문화단체의 주요직책을 맡으면서 혼란한 해방공간에서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금 그어 나갔다.
그러나 당시의 화려한 직책과는 달리 정력적인 예술창작활동으로 생활을 돌보지 못해 매서운 가난에 시달렸던 그는 6·25 직전이 s50년 2월 24일 부인 김홍봉씨와 4남 5녀를 뒤로 하고 누추한 이불에 싸여 숨을 거뒀다. 이렇게 병이 도진 데에는 그 한해 전‘여순 반란사건’을 뉴스영화 필름에 담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현지로 내려가 촬영작업을 벌인 질긴 장인 근성 탓도 있었다.
투철한 반제·반봉건적 자세를 견지했던 시사만화가 안석주와 친일영화를 제작하기까지 한 영화감독 안석주 중 어느 것이 그의 본 모습에 가까운 것일까? 어쩌면 극과 극을 달린 그의 이런 행적 때문에 그의 예술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평가가 미뤄져 온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