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장. 혈풍천하(血風天下) 백방생은 이미 이 증평이라는 처녀의 성품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매 우 성실하고 신의가 있는 편이어서 쉽게 약속을 저버릴 사람은 아니었 다. 게다가 그녀는 백방생을 호위해 주는 일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 지 않았던가? 갑자기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백방생은 말했다. "낭자는 이미 나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었으니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오. 헌데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증평은 그 말에 일순 눈자위가 붉어 지며 처연한 기색이 되었다. "실은, 철혈부(鐵血府)의 놈들이 갑자기 대거 공격해 들어와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우리 왕옥파(王屋派)에 변괴가 생겼어요. 저는 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마도 그녀는 간밤에 연락을 받아 마악 어디를 다녀온 모양이었고, 또 한 지금도 매우 바쁜 모양이었다. 이 철혈부의 일은 황진의와도 어느 정 도 관계가 있다. 백방생은 문득 황진의를 상기해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말릴 수가 없구려. 부디 돌아가서 일을 잘 처리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겠소." 증평은 다소 주저주저 하다가 말했다. "저는 사실 능력이 없어서 공자님을 도와드릴 수는 없었어요. 그러니, 앞으로 황낭자에게 부탁을 해서 그녀의 호위를 받는다면 보다 안전해지 게 되실 거예요." 백방생은 그 말을 듣자 내심 가볍게 탄식했다. (저 낭자는 자신의 일이 바쁜데도 나의 일을 신경써 주고 있구나. 어째 서 나는 그처럼 마음착한 여자들만 만나게 되는 것일까?) 증평은 말을 끝내자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듯 하다가 이내 다시 방문을 열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이어 세수를 하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정말로 그 증낭자의 말처럼 내가 그 황낭자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일 까?) 세수를 마치고 나서 옆방으로 건너가니 마침 황진의는 단정하게 차려 입고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간밤에 잘 잤소?" 백방생이 짐짓 유쾌한 듯한 표정으로 인사하자 황진의는 음식을 들다 가 말고 미소하며 대꾸했다. "몸의 상태가 제법 좋아 보이는 군요. 부작용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 예요." 백방생은 황진의의 맞은 편에 앉았다. "좀 들어도 되겠소?" 황진의는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늘 따라 유난히 표정이 맑아 보였다. "드세요. 그렇지 않아도 백공자를 부르러 갈까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어 요." 음식들은 비록 최고급품들은 아니었지만 양이 많았고 그리고 제법 맛도 훌륭했다. 백방생은 주저없이 몇 조각의 음식들을 집어 먹다가 말했다. "헌데, 밖의 소식은 들었소? 철혈부에서 대거 이쪽으로 침공해 들어 왔 다고 하던데?" 황진의는 이내 그의 말뜻을 짐작하고 웃으며 말했다. "정의맹이 창단되면 불리할 테니 그들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 한 일이겠지요. 증낭자는 그 일로 왕옥파로 돌아갔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소. 그녀는 조금전에 다시 나를 찾아 왔었는데, 나더러 당신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더군요." 황진의는 미소하며 말했다. "그녀는 실로 당신에게 애틋한 정(情)을 가지고 있군요. 당신은 그런 것 을 모른척 하면 안 될 거예요. 그나저나, 앞으로는 어떻게 하기로 했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해볼 생각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나를 당신의 호위무사로 고용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거예요. 나 는 따로 해야할 일들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요. 다만 지금은 별 로 큰 일이 없으니 조금이나마 당신의 일을 돕도록 하죠." 백방생은 말했다. "당신은 정의맹의 창단식에 가볼 생각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비록 그 일 자체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러나 그곳에는 무림 정파(正 派)의 많은 인물들이 모였을 테니 일단 가서 안계라도 넓히는 것이 좋 겠군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실은 같은 생각이오. 헌데 낭자는 만일 철혈부의 인물들을 만나 게 되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황진의는 그 말에 안색이 다소 달라졌다. 그녀는 다소 정색을 하고서 말 했다. "내가 비록 용사형을 그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철혈부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예요. 철혈부는 당금의 막강한 사마외도(邪魔外 道)의 단체로서 나의 용사형과 같게 생각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곧 유사시에는 철혈부를 타도하겠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 다. 백방생은 그 엄정한 듯한 기색을 보자 문득 다시 진소유의 그 냉엄 한 기질을 떠올렸다. (아, 나는 그녀에게 아직 정의맹의 창단식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군. 그 녀가 앞으로 어떻게 할 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백방생이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황진의가 다시 말했다. "당신도 지금 즉시 복우산(伏牛山)으로 갈 건가요?" 복우산에서 오는 길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백방생은 전에 그쪽 에서 온 적이 있다.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기야 하겠지만 지금 즉시는 아니오. 나는 우선 들러야할 곳이 한 군 데 있구려." 황진의는 굳이 그에게 어디로 들르려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는 대 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복우산까지는 오백리도 넘어요. 만일 당신이 오늘 가려고 한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군요!"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바로 맞추었소. 낭자가 나를 거기까지 호위해준다면 내 원하는 대로 드리겠소." 황진의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내가 무슨 돈독이 오른 수전노로 보이는 모양이군요. 나는 이미 어젯밤 에 충분한 돈을 벌었으니 그런 일쯤은 공짜로 해 드릴 수가 있죠." 백방생은 내심 생각하며 눈살을 은근히 찌푸렸다. (그렇다면 곤란한데! 그녀가 저렇게돈에 관심이 없어서야 앞으로 내가 어떻게 호위로 부려먹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황진의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일단 그곳에 도착한 뒤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황진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욕심이 많군요. 무림의 일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하기가 어려 운 것이죠.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결정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렇겠구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백방생은 황진의와 함께 일찌감치 짐을 꾸려서 밖으로 나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길거리는 매우 썰렁하고 음산한 분위기였다. 백방생은 곧장 진소유의 장원으로 향했다. (왜 또 왔냐고 그러면 갑자기 돌려줄 물건이 생겨서 그랬다고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은근히 앞으로의 계획도 탐지해 보고.......) 백방생은 길을 가면서 내내 황진의에게 구입한 그 속명신단의 약병을 어루만졌다. 무릇 무림인에게 있어서 훌륭한 내상약(內傷藥)은 몹시 필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소유는 단신으로 그 험한 무림계에 뛰어 들었으니 필시 그 내상약이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백방생은 자 신이 어렵게 구입한 속명신단을 아예 병째로 진소유에게 건네줄 결심 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저택에 이르렀을 때 백방생은 문득 실망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집을 지키는 하인들의 말로는 진소유는 이미 간밤에 사람 들과 함께 저택을 떠나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중에 다시 돌아오기야 하겠지만 백방생은 조급한 심정에 그렇게 여유를 가지 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정의맹의 창단식으로 간것이 아닐까?) 진소유는 계속 강호인들과 교류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히려 과거보다도 지금이 더 적극적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정의맹의 창단식에 갔다 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일 것이다. (물고기는 그 먹이 때문에 죽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애쓰다가 무너지는 것이다. 진낭자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일부러 그런 험난한 여정을 자초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그녀가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일단 상황이 그렇게 되었으니 백방생은 우선 복우산으로 향하는 수밖 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백방생은 황진의와 잠시 상의한 후에 곧장 복우 산의 정의맹의 창단식이 열리는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백방생의 공력이라면 경신술을 사용한다고 해도 말보다 빠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진의의 무공은 과연 대단했다. 그녀의 무공은 이미 백 방생이 알고 있는대로 최상승(最上乘)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백방생 의 손을 잡은 채 그저 가볍게 달리는듯 한데도 한걸음에 무려 십여 장씩 나아갔으며, 백방생은 마치 천리마를 탄 것처럼 안정된 속도감을 느꼈다. 기실 그 두사람의 속력은 천리마보다도 훨씬 빠른 것이었다. 드넓은 평원 가운데에서 아득히 먼 곳이었던 전면의 광경이 갑자기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들고, 두 사람은 마치 갈대잎을 밟으며 구름을 타듯 이 나아가기를 한참, 이윽고 하늘에 태양이 눈부시게 솟아올라 사방은 온통 황금색의 갈대들의 물결을이루고 있었다. 이런 곳은 개간하지 못한 황무지들로, 이렇게 갈대잎으로 가득 뒤덮인 평원들이 간혹 끝없이 계속 되었다. 백방생은 가능하면 황진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스스로 알고 있는 경신술의 구결을 떠올렸으나, 이내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그만 그것을 멈추었다. 그것을 알고 황진의가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과거 당신은 무공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나요?" 백방생은 내심 생각했다.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뿐이었겠소?) 과거 백방생은 지금은 천상오룡인 달마오수조차 대단치 않게 보였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능력이 당시에 이미 그들을 능가한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지금은 왠지 그 일이 마치 멀고 먼 전생(前 生)의 일처럼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달마오수가 그 일곱명의 천재들 가운데의 다섯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또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째서 어떤 예언가들에 의해서도 조금도 거 론되지 않았던 것일까?) 황진의는 백방생이 묵묵한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당신은 체내의 백맥(百脈)들을 모두 복구시키고 싶은가요?" 그것은 실로 백방생의 귀가 번쩍 뜨이게 하는 말이었다. (백맥이 모두 복구되면 나는 그것을 모조리 타통시켜서 원래의 공력을 모두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백방생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가능하기나 하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세찬 파공음이 울리고 있었으나 그 녀의 음성은 백방생의 귓속에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물론이예요.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나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죠." 백방생은 물었다. "또 누가 필요하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어떤 물건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것들은 우리 성 수곡에 가야만 비로소 구할 수가 있는데, 만일 당신에게 시간이 있다면 정의맹의 총단에 가본 다음에는 바로 몸을 치료하러 가 보는 것이 어 떤가요?" 그것은 사실 백방생에게 어떤 강한 희망을 가지게 하는 놀라운 말이었 다. 만일 공력만 회복한다면 백방생으로서는 일약 무림의 고수(高手)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긴, 어차피 황금충(黃金蟲)의 보물을 가지러 가려고 했던 것이니, 망 해사를 거쳐서 따라가 보면 되겠군.) 백방생은 지금 돈을 물처럼 쓰고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망해사의 그 보물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힘을 강화시키기로 작정했 다. 따라서 그러기 위해서는 황금충의 보물을 찾아서 사용하는 것이 필 수적인 것인 것이다. 백방생은 마침 은근히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황 진의의 얘기를 듣자 은근히 마음이 기뻤다. 철혈부의 세력권내인 강남땅 으로 혼자 가야한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이었다. 백방 생은 즉시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때 갑자기 전면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이 다!" 황진의도 백방생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전에 나온 소리는 누군가가 커다랗게 진기(眞氣) 를 실어서 소리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멀리까지 생생하게 들 린 것이었다. 황진의가 신법을 재촉하자 두사람의 신형은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전면으로 짓쳐나갔다. 작은 분지. 드넓은 평원의 한쪽에 이루어진 이 작은 분지에는 갈대잎은 없었고 주위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자라나 있어서 마치 인위적인 장소를 보는듯 했다. 황진의는 이내 그 앞에 이르러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고 가볍게 백방생과 함께 한 나무의 가지많은 부위에 몸을 숨겼다. 강호상에서 오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두 가지 비결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아주 노련한 노강호(老江湖)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강 호상의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기실 제아무리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강호의 모든 일에 나서다 보면 오래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 이다. 황진의는 이미 다가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고 필시 이곳 에서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장내에 도착하자 즉시 신형을 솟구쳐서 마른 나뭇가지의 사이에 몸을 숨긴 것 이었다. 단풍잎이 거의 떨어진 나뭇가지는 몸을 숨기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지 만, 그러나 장내의 상황은 워낙에 격렬하여 그들에게 주의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엉겁결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이렇 게 느닷없이 피비린내 나는 사건과 부딪치게 될 줄은 몰랐다. 분지의 중앙에는 지금 이삼백 명의 청의인(靑衣人)들이 온갖 병장기들 을 난무하며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중 더러는 복면을 하기도 했 는데 그들의 목표는 바로 중앙이었다. 중앙에는 지금 십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서서 그들과 마주 격돌하고 있었는데 사태가 몹 시 험악해 보였다. 수백명의 청의인들은 험악하게 공격해 들어가고 있 었고 중앙의 사람들은 모두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흡사 두 개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면 부딪치면서 소음을 내듯이 그들 사이에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튀기고 살갗이 찢어졌다. 비명소리 와 함께 시체들은 갈수록 늘어갔다. 청의인들은 모두가 살기를 띠고서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 다. 그러나 피해를 보고 있는 쪽은 오히려 그들 쪽이었다. 비명을 지르 고 시체가 늘어가고 있는 쪽은 청의인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광기(狂氣)에 젖어서 죽음도 불사하 고 있는 것이라는 말인가? 백방생은 문득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마치 합창하듯 울려퍼지는 가운데 매우 눈에 익은 금광(金光)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백방생은 그것을 보 자 일순 가슴이 크게 뜨끔해 졌다. 그것은 어린시절에 무슨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당황한 심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신도(神刀)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니 그것은 모두 기우였다. 지금 그 한명의 대머리 노인(老人)의 손에 들린 채 금광을 발하고 있는 것은 백방생이 수작을 부 렸던 그 칼은 아니었다. 빛깔은 흡사 했으나 그 모양은 단창(短槍)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쪽에서 자연 사상자가 가장 많이 늘어났다. 그 대머리 노인이 검은 창을 슬쩍 움직이자 이내 그곳에서 금빛의 광망(光 芒)이 흡사 화살처럼 쏟아져 나와 청의인들을 일거에 도륙시키는 것이었 다. 청의인들은 이에 자연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 기는 아직 살벌하고 험악하기만 했다. 그것은 바로 지금 그들의 뒤에 서있는 일단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일견 하기로 여자들과 라마승들로 가지각색인 그들의 숫자는 십여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네 명의 복면인들의 눈빛이 가장 사나와 보였다. 네 명의 복 면인들 가운데 두 명의 청의복면인들은 지금 청의인들을 소리치며 지휘 하고 있었고, 다른 두 명의 복면인들은 한 명의 노라마와 함께 서 있었 는데, 그 중의 하나는 여자로 보였다. 청의인들이 악착같이 공세를 늦추지 않고, 또한 중앙의 사람들이 초조 해 하는 이유도 바로 그들 때문인 것 같았다. 백방생은 문득 금광을 발하는 그 단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창(槍)은 바로 강호에 나타났다는 도검창곤(刀劒槍棍)의 사대신병 가운데 하나인 신창(神槍)이라는 말인가?) 장내의 상황은 너무나도 참혹스럽고 험악하여 그로 하여금 더이상 마음 편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백방생은 문득 포위망의 중앙을 살펴 보다가 가볍게 놀랐다. 거기에는 뜻밖에도 매우 낯익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증평(曾萍). 바로 얼마전에 객점에서 작별했던 그녀가 아닌가? 백방생 은 일시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여러번 바라보았다. 틀림없는 증평, 그 녀였다. 그녀는 아까 헤어진 이후 곧장 이쪽으로 달려와서 저런 변을 당 하고 있는 것일까? 증평이 지금 포위망의 중앙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앞에는 한 명의 초로의 노인이 거대한 체구를 하고서 길게 누워 있었다. 증 평은 지금 그 사람의 상처를 간호하고 있었는데 필시 그녀와는 보통의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초로인의 상처가 매우 위중한 지 증평은 오직 그 사람을 간호하는데 전력하며 주위의 상황은 돌아보지도 않고 있었 다. 백방생은 그 주변에 많은 시신들이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들은 매우 낯익어서 혹시 과거 증평의 사형제들이 아니었던가 하 고 생각되었다. 하여튼 상황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누구나 신창의 위력을 두려워 하면 서 계속 그쪽으로 탐욕의 시선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쪽으로 청의인들 의 공세가 더욱 치열해 지는 것도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 신창을 들고 있는 대머리 노인 이외에도 그쪽에서 제법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이 둘이나 더 있었는데, 하나는 아주 나이 많은 노도사(老道 士)였고, 다른 하나는 기이하게도 곱추였다. 하지만 그 곱추는 나이도 아주 많아서 머리카락이 은백색임에도 불구하고 체구가 커서 그 키가 거의 보통사람만 했다. 곱추노인은 커다란 쇠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한번 휘둘러 지면 마치 작은 회오리 폭풍이 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검을 쓰는 그 노도사나 곱추노인 보다도 훨씬 사태가 무시 무시한 쪽은 그 신창을 들고 있는 대머리노인 쪽이었다. 그 대머리 노 인은 키도 그다지 크지 않고 평범한 용모에 딸기코를 하고 있었는데 마 치 창을 움직이는 광경이 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한꺼번에 수십명의 청의인들이 결사적으로 달려들었으나 그 대머리 노인은 다시 그저 가벼운 동작으로 그 청의인들을 일시에 물리쳐 버렸 다. 그의 손에서는 그 신창이 마치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창의 끝에서는 눈부신 금광이 발출되어 흡사 거대한 금창 (金槍)으로 변한 것 같았고, 그 광채에 부딪친 것은 사람이든 병장기든 여지없이 부서져 나가는 것이었다. 백방생도 이미 신검과 신도에서 그러한 것을 경험했으므로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놀라고 있는 것은 어떻게 그와 같은 희세의 신병이기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나타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문득 황진의의 전음이 그의 귓속으로 들려왔다. (지금 저 증낭자를 구해주고 싶은 거죠? 하지만 저들의 무공은 나 보 다도 훨씬 높으니 경거망동하지 말아요.)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황진의를 바라 보았다. 정말로 따뜻한 우정의 기운이 그녀의 눈빛에 흐르는 것 같았다. (과연 남녀사이에 우정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백방생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쨌든 황진의는 그 우의 에 의해 처음부터 그에게 호감을 보였고, 게다가 지금도 이런 수고를 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그녀에게 작은 귓속말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목적은 증낭자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소."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귓속말에 귀가 약간 간지러워 졌는지 그녀 는 가볍게 웃으며 전음으로 말했다. (맞아요. 그들의 목적은 저 여의신창(如意神槍)에 있는거죠.) 백방생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저 창이 바로 그 새로 나타난 사대신병(四大神兵) 중의 하나라는 말이오?" 황진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철혈부에서 대거 저들을 공격하지는 않았었을 거예요." 백방생은 그제서야 청의인들이 바로 철혈부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거의 두 패로 나뉘어져 있었고 또한 각기 한명씩의 청의 복면인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백방생은 혹시 그들이 이 근처에서 유명 하다는 녹림집단인 백룡문(白龍門)과 천하방(天下幇)의 무리들이 아닐 까 하고 추측해 보았다. 백방생은 비록 책자를 읽어서 강호의 지식을 더러 알고 있었으나 정작 사람을 보면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백방생은 빠르게 그 두 편의 사람들의 신분을 헤아려 보았다. 그때, 청의인들이 다시 수십명이나 죽어 나자빠지자 일순 흑의복면인 하나가 음랭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손(孫) 늙은이! 정말 그렇게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다는 말이냐?" 말과 동시에 그는 우수를 가볍게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느닷없 이 그의 품속에서 대여섯 자루의 비수가 날아가더니 안쪽의 대여섯명의 사내들의 목줄기에 틀어 박히는 것이었다. 그 속도는 몹시 빨랐다. 너 무나 빨라서 그 당사자들은 대체 어찌된 셈인지도 모르고 죽어갔는데, 그 놀란 표정들로 보아 실로 가공스러운 솜씨임이 분명했다. 흑의복면인에 의해 자기네편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대여섯명이나 죽어버리자 그 대머리 노인은 크게 화가 난 듯이 마주 보고 소리쳤다. "이 잔인무도한 탈명마군(奪命魔君) 요광(搖光) 요늙은이야! 네놈은 하 늘이 두렵지도 않다는 말이냐?" 갑자기 대여섯명이나 죽어버리는 바람에 대머리의 편은 사람들의 숫 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붉은 옷을 입고 복면을 하고 있는 여자가 이에 차갑게 냉소하며 소리쳤다. "흥, 손늙은이야! 너희 공공문(空空門)이 살인을 하면 정당한 것이고, 우리가 살인을 하면 부당한 것이라는 말이냐?" 백방생은 그제서야 그 대머리에 딸기코를 한 노인이 바로 공공문의 현임문주 대치도인(大痴道人) 손삼통(孫三通)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그 대치도인 손삼통은 나이가 이미 구십을 넘어섰으며 평생 기행(奇 行)을 일삼아 와서 정사중간의 풍진이인으로 꼽히는 중요한 사람들 중 의 하나였다. 그 강호의 괴인이 오늘은 신병이기를 들고서 저렇게 설 쳐대고 있는 것이다. 손삼통은 잠시 입맛이 쓴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돌연 신형을 솟구치 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 너희들이 한번 나를 잡아 보아라!" 이 손삼통은 평생 괴행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경공술(輕空術) 의 달인이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달아나지 않았는 지는 몰라도, 일단 그 렇게 줄행랑을 놓자 이내 그의 신형은 허공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아득 히 사라져 버렸다. 그것 역시 누구도 쉽게 예측못한 느닷없는 괴행이라 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두 명의 복면인과 한 명의 노라마는 그것을 보자 일순 놀라서 다급 히 뒤를 추격했다. "멈춰라!" 사실 갑작스럽기는 해도 손삼통의 그러한 행동은 동료들을 안전하게 해 주는 일이었다. 손삼통이 그렇게 떠나가자 나머지 두 명의 청의복면 인도 급히 청의인들을 인솔하여 그 뒤를 따랐으며, 그리고 라마들과 여 인들 뿐만 아니라 이쪽 편의 노도사와 곱추노인 등도 일행과 함께 빠르 게 그 뒤를 추격하여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느닷없이 이 작은 분지에는 많은 시신들과 함께 몇몇의 사람 들만이 침묵속에 남았다. 백방생은 상황이 갑자기 그렇게 변해버리자 다소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윽고 황진의와 함께 나무에서 내려왔다. 장내의 중앙에는 여전히 증평 이 초로인을 간호하며 앉아 있었고, 그 외에도 두어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중에서 두명의 사내는 백방생도 익히 알고 있는 증평의 사형이라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삼십대 후반으로 다소 준수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그 중년인은 피묻은 장검을 들고 다가와 초로인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아버님!" 알고 보니 증평이 간호하던 그 초로인은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 중년인은 초로인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남아 있는 그 세 명의 사내들도 모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오직 부상이 없는 사람은 증평, 한 사 람 뿐이었다. 그 중년인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자 나머지 두 명의 사내도 뒤를 따라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백방생은 그냥 지나칠 수도 없어서 다소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증평 에게 다가갔다. 증평은 이내 그를 알아보고 안면에 화색을 일으키며 말 했다. "아, 백공자!" 백방생은 왠지 미안한 마음이 일어서 말했다. "증낭자, 혹시 다치지는 않았소?" 증평은 어느새 생기를 되찾은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저의 대사형과 인사를 나누세요. 저 분은 바로 회룡검(廻龍劒) 하(夏) 사형으로......." 백방생은 증평의 손짓을 따라 그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서야 이 중년인이 바로 왕옥파의 소문주인 회룡검 하귀(夏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실은, 지금 바닥에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거구의 초로인 은 바로 왕옥파의 문주인 철배창룡(鐵背蒼龍) 하굉명(夏宏明)이었던 것 이다. 철배창룡 하굉명은 한평생을 한자루의 장검에 의지해 왔고, 또한 그 스스로 창안한 특이한 운신술(運身術)에 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 으로 그는 그러한 별호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무공은 그리 높지 못했으나 의기가 강해서 정사중간이라고 불리우면서도 많은 정파인들 의 칭송을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누워있는 주위의 수십구의 시신들은 대부분이 왕옥 파 제자들의 것이었다. 하굉명은 비록 의기는 높았으나 무공이 부족하 여 그만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 최후를 마치고 만 것이었다. 회룡검 하귀는 마침 오열하고 있다가 백방생 등을 주시하던 참이었다. 그는 증평이 자신을 소개하려고 하자 이내 안면을 크게 일그러 뜨리며 소리쳤다. "증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인데 구태여 서로 아는 척을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말이다!" 증평은 이에 놀라서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대사형을 매우 두 려워 했던 모양이었다. "대사형, 나는 그게 아니라......." 하귀는 차가운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증매, 우리는 이제 거의 문파의 대가 끊기게 되었다. 나는 무능하여 문파의 대를 이을 수도 없을 것이니, 앞으로 너는 우리를 상관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독기어린 음성에 증평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예요.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저는 오직 여기에 남아 있겠어요." 백방생은 그 하귀의 용모가 비록 준수하기는 하나 미간이 좁고 쉽게 발끈하는 것이 성격이 다소 편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부친의 죽음에 너무 상심하여 앞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리라. 사 실 조금전의 싸움에서 그들만이 무고하게 많은 희생을 당했다면 울분 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리라고 생각되었다. 백방생은 구태여 그들 사형제지간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즉시 증평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럼 증낭자, 몸조심하기를 바라며 다음에 뵙도록 하겠소." 증평은 엉거주춤한 태도로 마주 인사했다. "예, 백공자. 그럼......." 백방생은 문득 증평의 시선에 어떤 강한 열망이 스쳐지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다소 멈칫했으나 이내 신형을 돌렸다. 황진의가 증평 을 바라보는듯 하다가 이윽고 백방생의 뒤를 따라왔다. 이 작은 분지위에 햇살은 비치고 있었건만 풍경은 너무나도 참혹하고 황량해 보였다. 그것은 단순히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시체들이 늘어져 있기 때문만도 아닌 것 같았다. 백방생은 계속해서 증평의 그 텅 비어버 린 듯한 간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바로 이러한 곳이 소위 말하는 강호(江湖)가 아닐까? 강호는 무정(無情)하다. 황진의는 이윽고 다시 백방생의 손을 잡고 남쪽으로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황진의는 다소 침울해져 있는 백방생의 옆 모습을 살피며 문 득 입을 열었다. "그 증낭자가 불쌍하지 않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유독 그녀만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증낭자는 어렸을 적부터 천애고아로서 철배창룡 하굉명에 의해 길러 졌어요. 본래부터 마음씨가 착하여 하굉명은 마치 그녀를 딸처럼 생각했 지요. 그래서 오히려 무공전수는 등한시 하게 되어 그녀의 무공은 겨우 이류급의 수준이지요. 하지만 이제 하굉명이 죽고 왕옥파가 쑥밭이 되 었으니 가장 불쌍해질 사람은 바로 증낭자와 같은 경우예요." 백방생은 말했다. "어째서 이번에 왕옥파가 쑥밭이 되었다고 생각하시오?" 황진의는 말했다. "하굉명은 평소에 친구도 많았지만 흔히 너무 잘 나서는 것이 흠이었 어요. 평시라면 몰라도 지금과 같은 혼란기에는 그것이 치명적인 결함이 되었던 거죠. 그는 친구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가 오히려 자신의 초가삼 간만 다 태운 격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의 분수를 잘 알 아야 한다는 거죠."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유독 증낭자만 불쌍해 진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대개 상황이 나빠지면 곤란을 당하는 것은 여자들 쪽이죠. 근본적으로 연약한 여자들은 그런 상황을 이겨낼 힘이 없는 거예요. 게다가 하귀가 증낭자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좋지 못했어요. 아마도 하귀는 증낭자에게 어떤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질투심?) 과연 남자가 여자에게도 질투심을 느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버지라는 대상을 두고. |
첫댓글 재미납니다.
즐감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방생이가 증평이를 데리고 가야겠다.
잼 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