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월 15일 평안도 평양부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 유년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자립하면서
미시간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식품사업가가 되었으며,
귀국한 후 제약업을 선택하고
1926년 서울에서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직접 차를 몰고 홍보와 보급에 나서는 등
식민지 조선의 전국 각처에 의약품과 생활용품 등을 공급하는 데 헌신했다.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시행하고 후생복지시설을 세우는 등
회사의 임직원에게도 복지를 챙겨주었다.
또한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힘써 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냅코 작전에 직접 참여하는 등
재미한인사회에서 여러 활동을 했다.
일찍이 식민지 시기에 만주, 중국, 대만, 일본 등 해외 시장까지 진출했으며
광복 후에도 계속 기업을 운영하면서 윤리 경영과 모범 납세, 국익 우선, 정경유착 사절을 원칙으로 삼았고,
전쟁을 거친 기업을 재건하는 수고를 겪기도 했다.
이후 이승만, 박정희 시기 정치자금 미납에 대한 보복조치로 세무 조사를 받았으나
탈세 내역이 발견되지 않아서 박정희로부터는 되려 훈장을 받기도 했다.
산업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하거나 보건장학회,
연세대학교를 비롯한 각종 공익재단에 여러 차례 기부를 하는 등 사회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그리고 말년에 회사 경영권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일임했으며,
1971년 세상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사회와 교육에 기증했다.
이 때문에 일제 및 독재정권과의 결탁, 정경유착, 가족 경영, 노동자 탄압, 탈세, 부정 축재 등의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대다수의 대한민국 기업인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위인(偉人)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20]
미시간 대학교 경영학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영학 석사, 스탠포드 로스쿨 법학 박사라는
화려한 학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말년에 연세대학교에서도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가장 자주 불리는 호칭이 '유일한 박사'이다.
1895년 1월 15일 평안도 평양부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 1861~1934. 8. 28.)과 충주 김씨(忠州 金氏) 김확실(金確實, 1873. 5. 22.~1958. 10. 4.)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유일형(柳一馨)이었다.
독실한 크리스토교 신자이자
당시 평양부에서 재봉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던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회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4년 당시 9살에 불과한 장남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 유일한의 아버지는 미국의 수도가 어디인지 몰라,
그냥 그 나라 땅의 중앙이겠거니 하면
서 유일한을 미국 대륙의 정중앙으로 보내게 된다.
큰 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유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 준 미국 돈(달러)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크리스토교 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
1909년 그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한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는 재미교포들의 항일집회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항일경력 때문에 고향에 사업차 잠시 입국했을 때 일본제국 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이름을 바꾼 계기도 비범한데,
중학교 시절 미국에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보급소 직원이 이름 일형이 어려워 제멋대로 '일한'이라고 불렀다.
그는 당황했지만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한(韓)'자를 떠올리고 아예 유일한으로 개명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승낙을 구하였고,
이 요청을 받은 아버지는 일형의 동생들의 돌림자까지 '한' 자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그 시기 이후에 태어난 동생들은 처음부터 돌림자가 '한'이 되었다.
2.2. 대학 시절
고교 미식축구부 시절 사진. 가운데의 인물이 유일한. |
유일한은 고교시절 미식축구부에 활동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
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에는 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 입학하였다.
대학생 시절, 학비가 부족한 유일한 박사는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전기 변전소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 의회에 참여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 때 유일한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다만 이승만이나 서재필 등이 미국에 의존하는 듯한 태도를 많이 보이자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2.3. 청년 사업가
대학교를 졸업한 유일한은 재미(在美) 중국인 및 중국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유일한은 시내 대로변의 유명한 가게의 쇼윈도에 트럭을 들이받아 일부러 교통사고를 냈다.
트럭에 실린 숙주나물이 담긴 병들이 도로변에 죄다 쏟아져 깨졌는데,
이 사건이 숙주나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했다.
이후 1925년에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전문의 호미리와 결혼해 1녀 1남을 얻었다.
미국 철도 회사 고위 임원으로서 중국인 사회에서도 이름 높았던 거부의 딸 호미리는
코넬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다. 한편 독립운동을 하며 자산을 모두 쓴
서재필에게 유일한이 찾아와 함께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조선에 있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 애비슨의 귀국 권유로 연희전문학교 상과(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자리에 유일한을, 유일한의 처 호미리에게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해 귀국하기로 한다.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이렇게 청년 사업가로서 바쁜 중에도 1922년에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포드 로스쿨(Stanford Law School)에서 국제법을 공부했다.
1926년에 귀국[30]하여 경성부 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 경영 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일 때문이었다.
부모는 장남 유일한이 보내준 돈으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빈곤과 기아로 인한 질병에 허덕이며 민중작가 최서해의 소설인 《탈출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아들을 유학보냈으나 식품회사 경영을 하던 아들에게 실망해
"내가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너를 미국에 보낸 줄 아느냐? 큰 공부를 했으면 큰일을 하거라."라고 훈계를 했다고 한다.
몸소 민족의 현실을 체험한 그는 고민 끝에 1927년 조국에서의 삶을 위해 돌아왔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왔을 당시 짐더미들을 정리했는데 정리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놀랐다고 한다.
짐들이 전부 약품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약이 매우 귀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중국계 미국인이었던 처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소아들을 치료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당시에는 약이 매우 귀했고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연이어 일으키면서 돈,
약품, 금속을 비롯한 모든 물건들은 물론 인력까지 공출해서 뺏어간데다가 식민지라 다른나라와 무역도 못하게 했다.
조선인들이 대표 정해서 사정사정하고 시위도 벌여 봤는데도
전쟁에 본토 경제력까지 짜내며 집중한 일본이 식민지에 줄리도 없었고 설령 준 경우에도 조악한 품질로,
그것도 배급제로 아주 조금 친일파에게만 나눠준 정도였다.
유한양행은 다행스럽게도 보유한 약이 많아서 일본의 눈을 피해 보급할 수 있었다.
그의 경영 철학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1928년 7월 9일에 유한양행 최초의 신문광고를 냈다.
당시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은 서로 비방하거나 효과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만병통치약' 등으로 얼버무렸다.
약장수가 신문에 진출한 격. 그러나 유일한은 제품의 이름과 용도를 밝히는 것은 물론,
의학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을 증명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링크. 위 광고는 석간 3면에 있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 경영을 실천하고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했으며,
훗날 유한양행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고 유일한 본인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렇게 꾸준한 납세를 고집했던 이유는 라초이사를 경영하던 시절, 자신과 거래하던 녹두 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한다.
1939년 유한양행은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다.
2.5. 독립운동, 군인으로의 삶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1909년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고,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독립운동결의문 기초작성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41년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2년 CIA의 전신인 OSS(미육군 전략처)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하고,
군사 훈련도 받았다.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버지니아에서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인 IPR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전후 일본 처리 문제의 논의에 가담했다.
그리고 미국 워싱턴 OSS의 냅코 작전[33]에 1조 조장으로 참가한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 당시 유일한의 나이는 무려 50살이었다. 학생 시절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듯 하다.
당시 OSS 훈련책임자가 유일한을 평가한 자료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즉, 자신의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려 했다.
판본에서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일본이 질것이다라고 예상했고
이에 따라 대안을 강구했지만 뾰족한수가 없어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2.6. 광복 이후의 삶
광복 후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을 가서 비어있던[34] 유한양행은 물론 온 국토가 쑥밭이 되자,
이를 재건할 인력을 키우기 위해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를,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철저히 법인세를 냈던 유한양행은 196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다.
이 때의 에피소드가 실로 전설적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정부패 단속을 위한 시범케이스로 어느 기업을 때려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권 생각만 그럴 뿐 현실은 그것을 이용한 기업인들과 정치인끼리 정치자금을 대가로 서로 봐주는 상황이었다. 대표적으로 현대그룹. 정주영은 철저히 비위를 맞춰주면서 정부의 대규모 토건 정책을 수주받아 대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유일한은 청렴정직한 성격상 당연히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다. 이런 행동은 결국 권력자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엔 없었고 유한양행은 세무조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후 국세청으로부터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
처음엔 예고하고, 다음엔 불시에 조사하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유한양행을 조사했으나,
당시 세무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톨 안 나는 사람이 진짜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술 더 떠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 자진해서 내는 이 회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김만태 당시 유한양행 세무감찰팀장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증언한 바에 의하면 '20일 정도 조사를 하니까, 무슨 한국에 이런 업체가 있나 싶은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튼 정치자금을 거절한 일종의 괘씸죄로 시범케이스로 걸려 국세청으로부터 수개월 간 세무조사를 받은 셈이니 이건 박정희 정권이 명백히 잘못한 것이다.
유한양행이 박정희 정권에서 요구한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리 탈세와 탈루 등 조세포탈 혐의를 낙인찍어 수개월간의 세무조사를 벌였음에도 단 하나의 혐의점도 찾지 못하자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을 명분으로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여 국가에 이바지한 기업에 누명을 씌워 피해를 입혔다는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고, 게다가 제조한 약품들도 관련 당국에 갖고 가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해 보니, 약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제조 과정에서 재료의 손실이 생길 것을 대비해 원 재료를 손실분만큼 더 넣어 정량을 딱 맞춰 제조하고 있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1968년 유한양행에 동탑 산업 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계몽사 위인전(어린이 그림 전기) 유일한 편에는 박정희 정부 당시 조사원이 엄격하고 공정한 세무조사를 했다고 하여
해외 여행 포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쓰여 있으며,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도 비슷한 언급(다만 여기서는 1계급 특진)이 된 걸 보면 사실로 추정된다.
유일한의 남동생인 유특한도 본인이 따로 차린 회사 유유제약에서 형처럼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고 한다.
참고로 세무조사는 일제 말기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유한양행을 적산으로 간주해 세금 압박을 가했으나
광복까지 버텨냈다.
대한민국 정부 성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의 후원자가 박용만이었고,
유일한 자신이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좋지 않게 봤으니
이승만이 음해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일한의 은행 예금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유일한이 이승만의 외교론을 좋지 않게 본 것과는 별개로 유일한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했으며 그의 외교론이 독립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 내 한인들과 독립운동가에게 적지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유일한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미국 우선주의 외교정책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면서도 지나친 미국 우선주의를 경계한 것인데 이승만이 유일한을 정적으로 간주해서 지나치게 적대적으로 나갔다는 평이다.
1969년 노환으로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 경영인(CEO)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했다.
당시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1971년 3월 11일 오전 11시 40분경 세브란스병원에서 손녀 유일링의 학비 1만 달러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하고 묘소 주위의 5천 평은 학생들이 놀도록 유한동산으로 가꾸며 아들은 자립하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노환으로 사망했고 유한공고에 안장되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서거 소식 기사. 중앙일보에 의하면 1968년 4월에 민간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컴퓨터(IBM1401)를 도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기업을 경영했던 시절 지인들이 정치에 뛰어드는게 어떻겠냐?며 유일한을 찾아왔는데
그당시에는 잘 나가는 기업인들이 정치에 뛰어들기도 해서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유일한은 정치참여를 거절했고 국가,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죽기 전에도 유한재단을 통해 유한공고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연세대학교 의료원 세브란스병원에도 주식 12,000주를 기부했다.
기부조건으로 주식을 의학과 연구 교육을 위한 활동에만 쓰라고 못박았다.
이는 세브란스병원이 현재의 대형병원으로 발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유일한과 호미리 부부는 유한양행을 세우기 전에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올리버 R. 에이비슨 박사에게 각각 연전 상과 교수와 세브란스 소아과 과장을 제의받았던 인연이 있었다.
이 경영권 인계에도 일화가 있는데, 1969년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이
한국으로 와 유한양행 부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유일한은 처음부터 아들이 회사에 취임하는 것을 탐탁잖게 여겼는데, 임원진들이 유일한에게 록펠러, 포드 등 해외기업의 2세 경영권 인계사례를 그에게 여러차례 보여준 끝에 결국 유일선의 부사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호사 출신의 유일선을 처음부터 좋지 않게 본 유일한은 결국 의견 차이가 벌어졌다.
유일한의 회고에 의하면, 유일선은 부사장 취임 후 오직 기업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기업인으로써 전혀 틀린 자세는 아니지만, 평생 기업은 수단일 뿐
진정한 목적은 공공의 이익, 국민의 건강, 나라를 위해 때로는 모험을, 때로는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아온 유일한의 입장에서 아들 유일선의 이러한 의견은 그의 신념과 충돌이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회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해고했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일가 친척들을 모조리 유한양행에서 해고하거나 사직시키고 보유한 주식도 처분해서
유한양행 경영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유한양행에서 근무했던 연만희[와 대화에서
유일한은 연만희에게 "내가 살아 있을 때 다 정리하고 나가야 (유한양행이) 영원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죽은 뒤 자손들 중에 정말 능력이 있어서 제 실력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라면 그것에는 아무 말 할 생각 없다고.
이 유한양행의 전문경영인 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 전문경영인 임명도 관례에 따라 모두 내부승진으로 행하고 있다.
그래서 역대 유한양행의 CEO들은 모두 경력이 유한양행 평사원부터 시작했다.
2020년 기준 CEO인 이정희 대표도 1978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인물이다.
정관에 의해서도 6년 이상은 있을 수 없는데다 유한양행 사원으로서 시작이 자리에 오른 뒤 6년 내에는 퇴사해야하기 때문에 퇴사하여 이후 2021년에는 조욱제 대표가 취임하였다.
현재 조욱제 대표도 1987년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지금의 총괄관리 본부장, 부사장을 거쳐 지금의 대표로 취임한 사람이다.
1946년경 유일한의 가족들. 좌측부터 유일한, 딸 유재라, 아들 유일선, 부인 호미리. |
중고등학교 일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유일한이 손녀 유일링의 등록금 1만 달러만 제외하고[53] 자기 재산을 기부해서 나온 액수는 토탈 407억 원이다. 대기업 회장 재산이 뭐가 이리 적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1971년 기준 407억 원이다.[54] 2021년 기준 7,900억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시간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407억 원이면 돈 걱정이 없는 수준이고 8천 억이면 평생 놀고먹으며 지내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이다. 로또 1등 당첨금이 약 30억 원 대인데, 사실 이것만으로도 집을 사는데 쓰거나 큰 지출이 있지 않은 이상 어지간하면 돈이 부족할 일은 없다. 당장 100억만 있어도 1년에 1억씩 쓰면 100년이 걸리는데 8,000억 원이라는 돈은 말 그대로 3대가 평생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먹어도 남는 돈이다. 이를 다 사회에 헌납한 셈.지식채널 e. 참고로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10원, 라면은 20원, 짜장면 60원, 커피 60원, 담배는 60~100원, 쌀 40kg가 2,880원(한 가마에 8,000원)인 시대였다. 라면은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면, 분식집에서 30원, 슈퍼에서 개당 18~20원이었다.참고자료 # 이런 생필품 물가로만 따져 본다면 100배 정도의 상승이 있었으니 현재 가치 4조가 넘는 금액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더 감동적인 건 유일링의 아버지인 유일선은 이 재산마저 거부하려고 했다. 유일선이 "아버님께서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고 유언하셨는데 만약 제가 손녀의 학자금 명목이라는 이유로 1만 달러를 받으면 세상이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렇게 받은 딸의 등록금도 그나마 반만 쓰고 남은 돈 전부를 사회에 환원했다. 유족들은 유일한의 결정을 전혀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정도를 가족 몫으로 주겠다고 한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또한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내에 있는 묘지 주변의 땅을 상속하긴 했는데, 이는 땅을 '유한동산', 즉 공원으로 만들어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유재라 본인도 1991년 미국에서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유한재단 측에 기부했다. 유재라의 묘소도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손녀 일링 유는 미국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한양행에서 무급으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유한양행을 경영 중이던 일제강점기 때 당시 영업 담당을 맡고 있던 전항섭이라는 사람이 만주 시장 조사 후 만주에서 헤로인, 모르핀, 아편이나 암페타민 계열의 마약류의 거래가 많은 것을 보고 유일한 박사에게 유한양행도 마약중독자가 많으니 마약류를 섞어서 많이 판매할 것을 제안하자 그는 국민들에게 어쩌자고 무서운약을 먹이려 하냐고 큰소리치며 단번에 거절했고, 전항섭은 그 즉시 해고당할 뻔 했다가 자기 발언에 대해 사죄한 뒤 간신히 영업 담당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유한양행이 주식회사로 전환되자 전무로 승진하였다. 이 일화 내용이 진짜가 맞다면, 전항섭은 하워드 고와 헤럴드 고의 외조부이자
전인범의 조부인 사람이다. 헌데, 유일한 평전(조성기 저)에서는 다른 인물이 그러한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것으로 나와 있다. 그만큼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대단했다.
이 일화 말고 하나 더 중요한 일화가 있다. 국민들의 비타민 섭취를 걱정한 그는 당시 비타민 영양제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1961년 동아제약이 박카스를 출시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치자 다른 제약업체도 따라서 드링크제를 만들기 시작했고, 결국 유한양행은 제약업계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 때문에 주주총회에서 유일한 회장에게 "우리 회사도 드링크제를 만들어서 팔아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그에게 의견을 제시했지만, 유일한은 "설탕물 같은 드링크제를 약이라고 속여 팔란 말인가?"라는 말로 주주들의 의견을 기각했다고 한다. 당시 박카스에는 카페인, 타우린, 비타민 성분이 첨가되어 금방 피로가 싹 가시게 하는 기분이 들어 인기를 끌었는데, 유일한은 "이 박카스를 포함한 모든 드링크제는 인체의 전반적인 에너지를 향상시키는 게 아닌, 순간적으로 활력이 솟는 느낌만 주는 제품 같다"라고 생각해서 드링크제 개발을 안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출시된 제품이 지금도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비타민 영양제 삐콤씨다. 그 이후로도 알약, 주사제 형태로만 약품을 개발해 왔다가 1989년에 '맥생', 1992년에 소화제 '생위천', 2013년에 '내일엔'이란 이름으로 드링크 분야에 진출했다(현재는 '내일엔'만 판매 중이다).
여러 위인전을 보면, 유일한은 약품 제조에 필요한 원료들의 품질을 살펴보면서 어떤 것을 이용할지를 정했고, 비타민제에 필요한 원료가 모두 떨어지자 해당 생산라인을 원료 수급이 완료되기 전까지 가동 중단했다고 한다. 원래 생산 라인이라는 게 구조상 생산 도중에 정지를 시키면 무조건 회사에 손해가 나기 마련이고, 그 원료가 떨어져도 해당 약에 미미하게 영향을 주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바로 중단해 버린 것이다. 그만큼 사용자의 보건과 안전을 생각했고, 그렇기에 세무조사 때 검사 당국에서 유한양행의 약들을 샘플로 검사해 보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유한양행 설립 후, 자기 회사의 약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의 약임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자기 돈을 내고 약을 사먹었으며, 약을 사려고 가격을 물어보는 중에 '사장님이라 그냥 가져가셔도 된다'고 말하는 종업원을 혼낸 일화가 있다.
양화대교의 건설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양화대교를 건설하고 다리와 직결하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가격 문제로 토지를 싸게 매입하려는 정부와 비싸게 매각하려는 지주들 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주민들이 담합을 통해 가격을 높게 부르고 있을 때
유한양행도 회사 명의로 도로 건설에 필요한 토지를 일부 소유하고 있었는데,
해당 실무를 보던 직원이 주민들 편에 서서 가격을 높게 올린 것을 안 유일한이
"국민들이 이용해야 할 건설 사업에 훼방을 놔서 되겠냐"며 직원에게 일침을 가했고,
결국 해당 직원은 유일한의 명으로 정부가 제시한 가격에 토지를 매각했다.
이로 인해 다른 지주들도 비슷한 가격에 토지를 매각했다고 한다.
6.2. 기업 경영
유한양행 초창기에 신경 썼던 부분이 약품의 케이스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기차역도 없는 도시와의 왕래가 어려운 지역에서 의약품을 받기를 원하는 곳이 많았고, 이 때문에 선로 옆에서 받을 수 있도록 열차에서 던지더라도 깨지지 않는 병과 케이스를 고안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라초이 식품 회사를 운영했을 때도 숙주나물을 저장할 수 있는 통조림을 고안한 것과 비슷한 케이스. 여러모로 미국에서의 회사 운영 경험이 아이디어가 된 셈이다.
일부 위인전에서 기술한 바로는, 시골의 병원에서 급히 수술을 해야 하는데 혈청이 부족하자 유한양행에 문의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골이 워낙 깡촌이라서 철도역은 있지만 비정차 철도역이라 짐을 내려놓는 게 불가능했는데,
유일한 박사가 혈청을 깨지지 않도록 단단히 포장해서 기관사에게 "XXX역에 환자가 있는데 혈청이 꼭 필요하다. XXX역을 지날 때 던져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실려있다.
근로기준법을 다른 기업인보다 철저히 준수했다고 한다. 직원들에게 주었던 월급의 액수가 상당히 높다. 유일한의 이 의지는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유한양행에 계속 이어져 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한민국의 제약 기업 중 6,330만 원으로 평균 연봉 1위를 기록했다.
6.3. 사회사업
유한양행 홈페이지에 따르면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유한양행 사우공제회, 보건장학회, 유공관리기금 등을 설립하고
1970년에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을 설립하여 생전에 이 기관에 96,282주를 기증했고,
이 밖에 연세대학교 재단에 41,000주를, 세브란스병원에 12,000주를, 자신이 설립한 유한공업고등학교에 40,000주를,
유한양행 사우공제회에 27,218주를, 보건장학회에 17,368주를 기증하였다.
1963년에 다시 연세대학교와 보건장학회에 장학기금으로 17,000주를 기증하고
1965년 유한교육신탁기금 관리위원회를 발족하고 56,000주를 희사하여 교육 및 장학 사업을 확대했다.
1971년 사망할 때에는 140,941주를 다시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했다.
이 기관은 이후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으로 분리되었다.
죽을때까지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한 개인주식은 유한양행 총 주식의 40%에 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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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과 유일한의 인연
펄벅은 1967년 부천시 심곡본동에 소사희망원을 설립해 고아·혼혈아동을 위한 복지사업을 펼쳤다.
소사희망원 자리는 기업인인 유일한(柳一韓, 1895∼1972)이
자신이 소유한 유한양행 소사공장 터(성주산 아래) 3만 3058㎡(약 3만 평)를 기부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면 펄벅과 유일한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펄벅이 처음으로 한국과의 인연을 맺게 된 동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 OSS(전략사무국) 중국 담당으로 들어온 뒤부터였다.
펄벅은 당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차 중국을 자주 드나들던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과 교류하면서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일한은 숙주나물 통조림 제조회사인 라초이 식품회사(1922년 창립)를 운영하며 중국의 녹두장사와 거래를 하던 중이었다.
▲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 유일한 박사, 소사희망원 설립을 위해
유한양행 소사공장 터(성주산 아래) 3만 3058㎡(약 3만 평)을 펄벅에게 기부함
이 때 유일한은 사업이 번창하여 큰돈을 벌었고,
1926년 3월 결혼하였는데 그의 부인은
펄벅과 가까운 사이인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였다.
이런 인연으로 펄벅은 유일한을 만나 자연스럽게 서로 교류의 폭을 넓힐 수 있었고,
삶의 철학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나중에 펄벅이 한국을 배경으로 쓴 자신의 작품 중 하나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유일한과 이름이 같은 '김일한'으로 한 것을 보면 펄벅과 유일한과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4개의 테마 전시공간
기념관은 곳곳에서 펄벅 여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기념관 앞 언덕의 야외공원에는 펄벅의 흉상이 있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가 있다.
펄벅기념관의 상설전시실은 4개 주제로 나뉘어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1960년대 세워진 소사희망원의 축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상징공간’,
펄 벅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된 ‘펄 벅의 생애 공간’,
미국 펄벅재단이 기증한 펄 벅의 책과 초상화, 머리핀 등이 전시되어 있는 ‘휴머니스트 펄 벅 공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대지〉를 비롯해 〈살아 있는 갈대〉 등의 작품
영문판과 번역판이 전시되어 있는 ‘문학가로서의 펄 벅 공간’이 주요 전시공간이다.
◎ 상징 공간
‘상징 공간’에서는 1960년대 한국의 혼혈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소사희망원의 축소 모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펄벅 여사는 수백 명의 다문화가정아동들이 참석한 소사희망원의 개원식을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술회했다.
사희망원은 펄벅재단 사무동, 남·여 기숙사를 포함해 총 9개의 건물이 1만평 대지에 세워져 있었으나 1973년 펄벅이 죽은 뒤, 1975년 문을 닫았다. 모형을 통해서 본 옛 소사희망원은 적지 않은 규모였다.
▲ 옛 소사희망원의 모형도
소사 희망원은 일반 학교나 고아원과 달리 적성분석부와 개인지도부, 예능원, 재활부 등 4개부로 나누었고,
일반고아들의 예능교육도 담당했다.
2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에는 당시 150여명의 원생들이 있었으며 휴게실, 오락실 등도 갖추어져 있었고 재활부에서는 다문화가정아동들의 어머니를 위해 양재, 비서학 등 간단한 기능교육도 진행됐다. 학업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아주 뛰어난 학생들은 특별 장학금으로 미국유학의 기회도 주었다.
당시 펄벅 여사는 소사 희망원에 머물면서 그들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기도 하였다. 다문화가정 아동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에게 교육과 직업 훈련을 시켜 이들의 재활과 사회복귀에 도움을 주도록 하였다.
1967년 개원으로보터 1975년 문을 닫을 때까지 소사희망원에는 2,000여 명의 혼혈아가 거쳐 갔다. 그의 중국식 이름은 '싸이전주'('賽珍珠')이다.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스스로 최진주(崔眞珠)라는 한국어 이름을 지어 사용하기도 했다.
▲ 펄벅의
중국식 이름은 '싸이전주'('賽珍珠')
▲ 펄벅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
◎ '펄벅의 생애 공간'
‘펄벅의 생애 공간’에서는 펄벅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하여 펄벅이 일생 동안 이룬 업적을 둘러볼 수 있다.
1892년 6월 26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난 펄벅은 생후 3개월만에 선교사인 부모님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여 성장한다. 선교활동에만 열중한 아버지 때문에 집안일은 어머니가 도맡아야 했지만, 부모의 중국 선교활동은 펄벅이 자신을 중국 사람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중국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였다. 펄벅은 1910년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1914년 랜돌프 매콘 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간다.
▲ 중년에 접어든 펄벅 여사
다시 중국으로 들어온 펄벅은 난징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1917년 뒤에 중국 농업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된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과 결혼하여
그들 사이에는 두 딸을 두었는데 큰 딸은 지적 장애인이었다.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펄벅은 1931년 장편 《대지》(1931년)를 발표하여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명예를 얻고,
그 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4년 이후로 그의 저서들을 출판해 온 J.데이 출판사의 사장 R.J.월시와 재혼,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펄벅은 여류작가일 뿐만 아니라 인종간의 편견해소와 이해증진을 위해 노력한 인권운동가로 변신한다.
스스로를 ‘정신적 혼혈아’라고 말한 펄벅은 평생 동안
전 세계 혼혈어린이들을 위한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하다
1973년 3월 6일 8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아이들 곁을 떠나 생가가 있는 그린힐즈 농장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