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물 이종률
영원한 인간사랑 ・ 4시간 전
한국의 인물 이종률
2024.07.03. 02:03조회 20
반제·반봉건·반매판 민족혁명 주창 이종률(1905~89)
“잠시도 조국의 통일을 잊으신 적이 없던 선생님이 분단의 아픔을 뒤로한 채 가신 지도 벌써 두해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80평생은 오직 민족해방과 조국 통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민족해방을 위해서라면, 통일을 위해서라면, 독립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아무리 무서운 고문도 다 감수해내셨습니다. 멀리는 3·1독립항쟁에서부터 가깝게는 4·19반독재 민주화항쟁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선생님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지난 12일 오후 7시 부산일보사 강당에서는 많은 민족민주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고 민족사인(民族史人) 산수 이종률(李鍾律) 선생 2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지난 60년 광범위한 남북협상통일운동을 위한‘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결성에 평생을 오직 반제·반봉건·반매판이라는‘민족3반’의 민족혁명을 위해 대쪽같은 일생을 살다간 민족혁명론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과 그 앞잡이 말고는 모두 우리편이라는 신념으로 좌·우익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민족혁명’을 추구한 그를 가리켜‘민족사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종률은 우리나라와 같은 후진성 식민지국가에서는 계급혁명론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엄격히 분석하여 내포시킨 민족혁명론이 필요하다고 역설, 민족주의자들과 진보적 공산주의자들까지도 모두 포용할 수 있는‘사상적 깊이와 넓이’를 갖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905년 경북 영일군 북면 동대산 마을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이종률은 18살이 되던 해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배재학당 2학년에 편입한다.
평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의 이종률은 조국의 비참한 식민지 상황을 깨닫고 험난한 항일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1926년 일제 식민통치에 맞선 6·10민족항쟁에 배재학당의 핵심인물로 참가한 뒤 일본으로 피신해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1928년‘우리말연구회 사건’으로 퇴학을 당한다.
여성동지 ‘민주환관’ 호칭
와세다대학 시절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세력들이 연합한 민족협동전선투쟁조직인‘재일본조선인 단체협의회’부인부장을 맡은 이종률은 매주 한번씩 부인문제강좌를 열고“여성해방은 조국해방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며 여성들의 항일운동정신을 고취하는 데 열중한다.
이종률은 유고집인 <민족혁명론>(1989)에 자신이 부인부장을 맡게 된 배경을 조선인단체협의회 의장 조헌영으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조헌영이 이종률을 불러 “부인부 성원인 여성들은 대개 입이 싸고, 또 나이가 20살 이상 30살 미만들인지라 자칫 잘못하면 그 꽃밭바람에 넘어지기 쉽기 때문에 혁명가적 정조를 지킬 수 있는 자네가 맡아야겠네”라며 “이번 임기중에 이성관계의 문제가 없이 잘해 나가면 자네의 결혼은 내가 좋은 자리를 천거하겠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종률은 조헌영의 부탁대로 여성동지들과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묵묵히 강의에만 열중, 여성동지들로부터‘민주환관’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문 형사들 혀 내둘러
부인부 활동에 열중하던 이종률은 1928년‘재일본조선학생 스트라이크 옹호동맹’을 만든 뒤 서울로 돌아와 휘문고보 김운선, 보성고보 이태우, 경신고보 유추운, 중앙고보 곽용칠 등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1929년에는 학생운동조직인 성진회에 참여,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다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에 걸려 구속된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노예적 교육의 타도’‘조선인 본위의 조선인 교육’ 등을 주장하는 격문을 만들어 각 학교에 배포하고 동맹휴학을 지도하다 붙잡히게 된 것이다.
광주경찰서로 연행된 이종률은 일본 경찰고등계 형사인 가쓰미와 고고로이시 등 2명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지만 끝내 동료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아 오히려 고문하던 고등계 형사들이 지쳐 고문을 중단하게 됐다고 한다. 이종률은 당시의 고문상황을 유고집 <민족혁명론>에서 생생히 다루고 있다. 얼마나 고문에 잘 견디었으면 하루는 전남도경 형사부장인 진용섭이 찾아와 “이종률, 너는 어떻게 그리도 고문을 잘 견디느냐? 내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왔다”며 혀를 내둘렀다는 것이다. 진용섭은 이어 일제 형사들이 이종률의 대답을 듣기보다도 아프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고문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종률은 당시 자신이 고문에 굴복하지 않은 것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국사를 위하는 자는 불로 살을 지져도 동료의 이름을 팔아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미망인 민숙례(72)씨는 전했다.
이종률은 1932년 봄, 지금의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 서점에서 우연히 구한 경성제국대학 경제학부 교수 미야케 시카노쓰케가 쓴 <조선사회경제사연구>를 읽고 미야케 교수의 문하에 들어가 많은 사상적 교훈을 받게 된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미야케 교수가 하루는 이종률을 직접 불러“극동에서의 혁명은 계급혁명이 아니라 민족혁명이다”라는 내용이 적힌, 1920년 7월 모스크바의 제2차 국제공산당대회에서 레닌이 한 정치보고연설문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종률은 1936년‘형평사운동’ 배후지도혐의로 치안유지법에 걸려 다시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풀려나 약 3년 동안 서울에서 무산자 자녀들의 배움터인‘고학당’에 나가 강의하는 한편 월간지 <이렇다>를 주관하여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제의 경제수탈정책을 면밀히 분석·비판하는 등 항일투쟁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주적 통일정권 수립 역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경기도 가평 산골에서 숯을 구우며 피신해 있던 이종률은 1945년 8·15 직후 백남운 교수 등과 조선학술원을 창립한 뒤 조선민족문화연구소에서 근로대중과 일반시민을 대상을 정치학과 노동문제를 강의하기 시작한다.
그뒤 이종률은 1946년 심산 김창숙, 도봉 박진, 소암 문한영 등과 함께 민족자주의 전위당적 성격을 띤 ‘민족건양회’를 창립하기도 한다.
당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한‘한국임시민주정권 수립을 위한 결정서’문제로 좌·우익에서 삼상결정 지지시위와 반대시위가 잇따라 일어나던 상황이었다. 민족건양회는 이승만 게열의 방침과 박헌영 계열의 방침을 모두 부인하고 민족혁명 자주세력의 강화로 외세를 몰아내 우선 통일정권을 수립한 뒤 그 다음의 체제는 역사의 순리대로 전진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민족건양회는 천도교 민족혁명파 세력들과 제휴하여 1961년 1월 25일‘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라는 6·25 이후 최초의 광범위한 남·북 협상통일운동조직을 탄생시킨다. 민자통은 다음과 같은 4대원칙을 채택했다.
1. 민자통의 통일은 공산주의 세력확대를 위한 통일이 아님은 물론이요 민족 1 공산 1, 즉 민·공 1 대 1의 제휴통일도 아닌, 어디까지나 민족혁명적 민족통일이다. 그래서 민족사적 역사의 대도와 동포애적 또는 인간애적 정으로‘남북과 관민’이 적극적으로 ,허심탄회하게 여기에 협력하기를 요한다.
2. 민자통의 조직은 민족혁명론 방향의 정당·사회단체와 특수 개인으로 한다.
3. 민자통은 통일달성 과정에서, 또 통일달성 마당에서 동포 자기끼리의 범행을 일체 잊어버린다.
4. 민자통은 통일의 달성과 동시에‘민주화복·홍익인간’사업을 행하는 애국자에 대해서 일체 그 전력을 묻지 않고 서로 협력한다.
민자통 간부는 중앙위원회 수석의장 심산 김창숙, 수석부의장 안경근, 중앙위원회 의장 노정일,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박래원, 중앙협의회 사무총장 박진, 조직위원장 문한영 등이었으며 이종률은 민자통 통일방안심의위원회 정치분과위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 8월 15일 천도교 대강당에서‘고려민족당’이란 정당을 창립하기로 하는 등 본격적으로 민족혁명을 수행할 정당의 창립을 눈앞에 두었던 ‘민자통’은 1961년 5·16쿠데타와 함께 간부들이 대부분 구속되면서 좌절됐다.
5·16 뒤 10년형 선고받아
이종률은 이른바 ‘민족자주통일방안심위원회사건’과 관련해 군사혁명특별재판소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10년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반공을 제1의 국시’로 내세운 5·16군사쿠데타 세력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혁신계나 학생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면서 민자통과 <민족일보>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이종률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8·15 직후부터 이종률을‘동지이자 스승’으로 모시며 함께 활동해온 문한영(72)씨는“이종률 선생은 특별한 직책을 맡고 있지 않아 처음‘민자통 사건’에는 빠졌으나 뒤늦게 민자통의 사상이론을 제공했다는 것을 안 쿠데타 세력이‘민족자주통일방안심의위원회사건’으로 얽어매 구속했다”고 말했다.
이종률은‘민족자주통일방안심의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에 61년‘민족일보 사건’에 연루되어 5년을 구형받았으나 무죄선고로 석방되기도 했다.
이종률이 <민족일보>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사장 조용수씨의 후원자인 이영근씨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종률은 1958년 죽산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구속되자 부산으로 피신해온 이씨의 은신처를 주선하고 일본으로의 밀항자금을 대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종률의 ‘은혜’를 입고 있던 이영근씨는 조용수씨가 찾아와 한국에서의 신문경영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모든 창간 준비업무는 산수에게 맡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종률은 ‘혁신계 신문’의 창간준비를 위해 부산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온 뒤 <민족일보> 초대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나 편집방향을 둘러싸고 마찰이 일자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기 전 사퇴한다.
당시 <민족일보>내부에서는 영세중립화 통일을 내세운 윤길중씨 중심의‘민주사회주의’계열과 민족자주통일노선을 내세운 이종률 중심의‘사회민주주의 ’계열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종률은 5·16 이전에 사표를 낸 것이‘불행 중 다행’으로‘민족일보 사건’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월북 결심 제자 타일러
평생을 항일과 민족통일을 위해 살아온 이종률은 철저한 민족혁명가로서의 기개를 알 수 있게 하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종률이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던 1954년 한 제자가“이북으로 넘어가야겠다”며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이종률은 이 제자에게“이북에선 돈을 들여 남쪽으로 사람을 내려보내고 있는데 왜 월북을 하려 하느냐. 진정한 민족혁명가는 변혁운동이 필요한 현장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타일렀다는 것이다. 월북하려던 이 제자는 그뒤로 부산에 남아 언론계를 거쳐 현재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저명한 민족민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종률이 추구하는 민족혁명론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또다른 일화가 있다. 부산 동래구 명륜동 이종률의 집에 공부하러 왔던 부산대 학생들이 마침 그의 과수원에서 동네어린이들이 과일을 따가는 것을 보고 붙잡아 혼을 낸 적이 있다. 이때 제자들에게 “우리는 과수원을 잘 가꾸기만 하면 되지 과일을 누가 따 먹으면 어떠냐”며 “민족혁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민족혁명을 위해 노력하면 되고 그 이후에 누가 다스리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종률의 제자였던 배다지 부산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은‘당시 이종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들이 큰 감명을 받았다“며 ”산수의 투철한 민족혁명가로서의 자세와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뇌졸중 쓰러져 16년 투병
이종률은 민족혁명가로서뿐 아니라 시에도 재능이 있어 수백편의 시를 남겼으며 국제공용어인‘에스페란토’의 보급에도 적극 나서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민족혁명을 거친 인간혁명의 단계에서는 에스페란토가 공용어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조선에스페란토협회 부회장을 맡는 등 우리나라에서의 에스페란토의 초기 보급에 큰 기여를 했다.
‘민족자주통일방안심의위원회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나 경남 양산의 개운중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사업’을 펼치던 이종률은 1974년 경남 의령 백산 안희제의 사적을 답사하고 같은 마을의 이수병(인혁당 관련으로 사형당함)의 본가를 방문하고 돌아오다 뇌졸증으로 쓰러져 1989년 숨질 때까지 16년간이나 투병생활를 했다.
그는 와병중에도 민족혁명의 전개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며 여러 젊은 학도들을 교육하고 <기미를 알자> 등 왕성한 저작활동을 벌이다 1989년 3월 13일 부산동래구 명륜동 집에서 ‘민족건양사로(民族建揚史路)’‘사책당(史責黨)’이라는 민족혁명의 완성을 촉구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이종률의 유족으로는 미망인 민숙례씨와 아들 우눌·우사 형제, 딸 우창·우인·우주 자매가 있다.
반제·반봉건·반매판의 ‘민족3반’을 통한 민족혁명을 주창했던 이종률이 간지도 벌써 2년이 지났지만, 그가 남긴‘반외세 민족자주화노선’은 날이 갈수록 민족민주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변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배다지씨는 “선생님의 민족혁명론은 반통일적 파쇼세력으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아왔지만 대중 속으로 더욱 확산되어가고 있다. 선생님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속에 사상으로 남아 영원히 숨쉬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