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수스 여행3 - 타르수스 거리에서 슐레이만 동상을 보고 바울의 우물을 찾아가다!
5월 22일 터키 동남부 가지안텝 Gaziantep 에서 버스를 타고 아다나 Adana 를 거쳐
13시에 타르수스 Tarsus 에 도착해 시내로 들어가서는 엘리프 하툰 코냐지
Elif Hatun Konige 라는 옛 저택을 개조한 고풍스러운 앤티크 호텔 에 체크인을 합니다.
호텔은 오래된 옛 주택 으로 상당한 지위의 관리가 살았던 모양이니 오래된
나무 계단 에다가 문고리 하나에도 청동과 황동 구리 로
되어있는데다가 가구들도 고풍스럽고 마당에 탁자들 인테리어 도 볼만합니다.
그러고는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호텔을 나오는데 집 주변 골목 에
낡은 옛날 차 를 버려두었으니..... 그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그러고는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로 나가니 현대식 건물들이 보이는데 거기 로타리
가 있고 철퇴를 든 장군 의 모습이 보이는데 셀주크 전사 일까 싶어
다가가서는 이름을 읽어보니 쿠탈미쉬 슐레이만 샤 Kutalmisoglu Suleyman Sah 라?
투르크족 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던 BC 220년경 흉노 를 먼 조상으로 하고 서기 552년
돌궐 족장인 이리가한을 시조 로 보는데 서진하면서 페르시아, 아랍, 유럽인과 혼혈
되었으니 우랄 알타이어족으로 주어-목적어-동사 순이며 c= j, I= 으, v= w 로 발음됩니다.
돌궐족 은 중앙아시아에서 셀주크 투르크 가 되는데 이란으로 남하해 손자 토그릴 베그 는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술탄 에 오른후 아들 알프 아르슬란 이 소아시아 를 침입해
1071년의 말라즈기르트 전투 에서 비잔틴을 격파 하고 아나톨리아를 점령한 다음해 죽습니다.
이후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는 아르슬란의 사촌 으로 쿠탈미쉬의 아들인 슐레이만 샤
가 차지하는데..... 1075년 이즈니크(니케아) 를 점령하고는 수도 로 삼은
2년 후인 1077년 대셀주크 로 부터 분리 독립해 "터키에 룸 술탄국" 을 세웁니다.
1078년 이라크와 이란 을 통치하던 대 셀주크조 술탄 알프 아르슬란의 아들 말리크샤 는
소아시아의 술레이만샤를 복속 시키기 위해 아나톨리아에 파병해 전투 를 치릅니다.
1082년에 술레이만 샤 는 아르메니아 공국 말라티아를 점령하고 아다나 와 타르수스 를
차지했으며 1084년에는 안타키아 를 얻자 위협을 느낀 모술 영주 무슬림이 그에게
반격했으나 승리한 술레이만샤 는 계속 남진해 시리아의 알레포 를 공략하기에 이르릅니다.
이때 대셀주크조의 술탄 말리크샤 의 동생인 다마스커스 영주 투투쉬 는 술레이만 샤 를
공격하니 1086년 6월의 알레포 전투에서 "슐레이만 샤는 전사" 하였으며 포로가 된
아들 클르츠 아르슬란 은 압송되었으나 석방되어 터키 셀주크인 룸 술탄국 을 재건합니다.
몇년전 5월 10일 아흐메트 다부토울루 터키 총리 가 터키 본토에서 200m 떨어진 시리아
알레포주 에 있는 터키 영토 에슈메 의 “슐레이만 샤 묘역”을 전격 방문했는데
오스만 투르크 제국 을 건국한 오스만의 조상 슐레이만 샤 무덤 경비병을 시찰했다네요?
그에 앞서 2,015년 2월 터키군 수백명은 월경 진입작전을 펼쳐 시리아 영내 37km 에 있는
“슐레이만 샤 묘역 The Tomb of Suleyman Shah”을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고 합니다.
터키 는 시리아 알레포주 북부를 장악한 이슬람국가(IS) 에 의한 슐레이만 샤 무덤
훼손 을 우려해 700명의 특수 부대원과 탱크 39대 를 포함한
전투차량 100대를 동원해 슐레이만 샤 묘역을 터키 국경으로 옮겼던 것이지요?
슐레이만 샤 의 새 묘역은 원래 시리아 영토 이나 국제법과 1921년 케말 파샤의 터키
와 시리아를 위임 통치하던 프랑스가 체결한 “앙카라 조약”에 따라
터키의 영토 로 인정받지만 시리아 사나 통신은 "노골적인 침략" 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지난번 묘역은 IS 가 점령한 지역으로 터키군 묘역 수비병
40명은 포위되어 교통이 두절된자라 IS 측으로부터 음식물과 식수 를 보급 받았답니다?
이는 터키가 자국내 소수민족 으로 독립을 위해 코바니에서 무장투쟁 중인 쿠르드족 의
군대인 YPG 군대를 IS 가 격파해 주기를 내심 바라니.... "적의 적은 친구" 라!
터키 셀주크의 슐레이만 샤 가 1083년 남진해 당시 아르메니아국 영토이던 타르수스 를
점령하고 남진해 시리아 알레포에서 전사 했으니 동상이 이 도시에 서 있는 것인데,
술레이만 샤의 무덤 이 오스만의 조상이 아닌 조부로 언론에 나오니 조금은 혼란스럽네요?
그러고는 물어물어 성 바울의 집 을 찾아가는데 성 바울 광장 St. Pauls Meydani
을 지나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하여 걸으니 옛 유적지 가 나와 여기가 아닌가
싶어 철조망 안으로 들여다 보았으나 여긴 그냥 오래된 로마 유적지 인가 보네요?
좀 더 걸어 거의 다왔지 싶은데 표지판이며 바울의 우물이 보이지 않기에 열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에게 물으니 자기를 따라 오라며 앞장 을
서는데 골목길을 들어가서 좌회전 을 하니 바로 거기에 바울의 생가 가 나옵니다.
아이가 뭔가 바래는 눈빛 인데 푼돈에 워낙 민감한 마눌이 옆에서 지켜보기로 모른체 하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집터 Antik Sehir 와 예의 그 유명한 오래된 "옛 우물" 을 봅니다.
Antik Sehir 는 옛날 집터 라는 뜻이니 사도 바울의(St. Paul)의 집 이란 의미
이고 여기에 우물 St Paul Kuyusu. 는 바울의 집에서 사용했다는
수천년간 마르지 않은 35m 우물 로 집에는 바울의 초상화 가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바울의 전도여행" 덕분이니 그는 여기 타르수스(다소) 에서
태어난 유대인 으로 안티오키아(안디옥)에 포교 근거지 를 정하고 터키와
그리스 지방 포교 에 종사하다가 서기 67년에 로마에서 네로 황제에게 죽었습니다.
바울 은 말하기를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이다."
"나는 유대인 으로 길리기아 다소(타르수스) 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 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 을 받았다."
"오늘 너희 모든 사람 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 로 삼으셨다.“
소설가 유현종 씨는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의
일대기 를 담은 소설 "사도 바울" 을 출간했는데 최인호 씨가
"형은 바울 얘기를 써 봐라" 라고 해서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후배인 최인호 가 자신은 예수의 얘기 를 쓰겠다고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루지 못했지만…”이라고 옛 일을 되돌아 보네요?
"사도 바울" 은 회심과 선교, 순교 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하는 과정 을
따라간 작품인데 유 씨는 “바울이 시력이 나빠 고통받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에게 짐이 됐던 건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스데반’이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기독교를 전파하던 스데반 은 산헤드린 재판정에 세워져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는데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사울이 회개하고 ‘바울’로 이름을 고치는게 스데반의 죽음을 본
뒤 이니“바울은 '스데반’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다가 스데반처럼 죽은 것”이라...
작가는 “신학자 바울, 사도 바울, 전도자 바울 보다 ‘인간 바울’ 의 모습이 크게
다가왔다”고 창작의 소감을 밝혔는데, 최인호를 대신해 예수의 삶을 소설화 할
의향은 없느냐는 질문에 “언젠가는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네요?
이런저런 옛일을 회상 하고 밖으로 나오니 조금전의 소년 이 우릴 기다린듯
서 있는데... 그 눈빛 이 애수 를 뛴듯 하면서도 너무나도
강열해 차마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데 자기는 "쿠르드인" 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