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평강으로 견고하게
고린도전서 1:3-9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교회력이 다시 시작하는 대림절 첫째 주일이다. 대림(待臨)절은 기다릴 대(待), 임할 임(臨), 곧 기다림의 절기이다.
대림절에는 사순절처럼 보라색을 사용한다. 대림절을 ‘겨울철의 사순절’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경건의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대림절 시즌에 유리창이나 현관에 촛불이나 등을 밝힌다. 머물 곳이 없어 헤매던 마리아와 요셉을 향해 ‘우리 집에 빈방이 있어요’라는 의미이다.
대림절 등불은 세상을 향해 ‘여기 당신을 위해 빈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다.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듯 이웃과 세상의 아픔, 불행, 슬픔, 눈물, 외로움에 대해 깨어있으려는 마음이다.
우리는 기다림 초를 밝힌다. 오늘 밤, 가능하면 온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점화식을 하라. 하나만 켠다. 그리고 토요일 저녁까지는 밤마다 그 초 하나만 계속 켜는 것이다.
‘기다림초’는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등불이다.
‘기다림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는 불기둥이다.
‘기다림초’는 가정마다 위로와 평화의 빛이 될 것이다.
교회력은 때와 절기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달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을 알지 못한다. 다만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려는 노력을 한다.
1)
세상에 불안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불안은 공기와 같아서 잠궈도 잠궈도 잠굴 수 없이 스며든다. 어떤 경우는 일어나지도 일에 대해 미리 염려하기도 한다. 건강 염려증 같은 것이다. 발전하면 피해망상증이 된다.
사람들은 견고한 삶을 원한다. ‘하나님이 너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는 음성을 듣기 원한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교회를 향해 문안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
‘은혜와 평강’은 성경에서 가장 흔하지만, 소중한 인사말이다. 영어로 말하면 아주 쉽다. “Grace and Peace to you!”
최고의 인사는 주님의 평화를 비는 인사이다.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은혜와 평강은 오직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3) 온다.
그러기에 샬롬(평안, 평강, 평화)을 비는 모든 인사말의 주어는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이다. 본문에서 계속 이어지는 바울의 말을 들어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4).
사람이 줄 수 있는 은혜와 평강에는 한계가 있다. 보장성이 없다. 립 서비스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은 개런티가 보장된다. 샬롬의 복은 영적이며, 심리적이며, 또한 물질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가치와 다르다.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값으로 계산이 불가능한 것을 댓가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샬롬은 내적인 평안, 육적인 평강, 관계적인 평화를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입장에서 일방적이며, 우리에게 어떤 지불을 요구하지 않는다.
은혜와 평강이 내 삶과 연결되면 인생의 ‘부요’(롬 10:12)함이 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에 파이프를 연결해야 한다. 그런 인생이 복되다.
내 인생의 견고함은 바로 흔들리는 세상에 기초하지 않는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나를 견고하게 한다.
날마다 은혜를 구하라. 날마다 주님의 평화를 빌어라. 서로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라. 은혜를 사모하고, 평강을 기원하라. 그리하여 나를 흔들고, 불안하게 하는 염려를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맡기고, 의지하라.
2)
고린도전서와 후서, 이 두 편의 편지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날 법한 다양한 불안과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공동체 안의 경쟁적 파벌이나,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나, 여성들에 대한 금기나, 방언을 하는 일에 대한 경계나, 심지어 부부 사이의 생활들을 포함해 다양하고 세세한 문제들에 대해 그 처방과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신생 고린도교회를 흔들고 있었다. 바울 역시 그 자신이 당사자가 되어 고린도교회와 갈등도 있었다. 비난을 듣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고, 잠시 절연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였다.
그러기에 바울의 인사는 구체적이다. 가장 일상적이면서, 가장 특별하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시작하나, 점점 하나님과 사귐의 관계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더불어 누리는 친교이다. 그 내용은 우리를 자녀 삼으신 일이고, 그리스도의 공동상속자로 삼으신 일이다. 미쁘다는 표현은 ‘신실하다’라는 말이다.
바울의 편지 서문 3-9절을 보면 이 짧은 내용 중에 예수 이름이 5차례 언급된다. 흔히 관상기도에서 주로 사용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주님과 같은 거룩한 단어가 모두 20차례 등장한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사례가 아주 드믈다.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대표언어가 되었다.
대림절의 상징들을 보라. 사실 기다림 초는 밝고, 따스하고, 짐짓 아름답지만 얼마나 연약한가? 바람 앞에서 등불만도 못하다. 그 작은 불꽃은 언제나 흔들리고, 보잘것없다. 그런데 이 촛불이 기다림의 표식이다. 이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는 상징이다. 놀랍지 않은가?
성탄의 메시지가 모두 그렇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이나, 궁궐 비사나, 왕자와 공주들 이야기가 아니다. 화려하고, 강하고, 권력자 가운데 임하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별들만 반짝이는 들판과 짐승의 구유와 가난한 목자들, 그 흔들리고 불안한 세상 가운데 구세주가 찾아오셨음을 알려 준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본질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위로가 있다.
여기에 든든한 희망의 근거가 있다. 여기에 뭇 백성을 사랑하시고 연약하고 가난한 나를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
이미 시편의 메시지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을 담고 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
우리의 외침에 귀 기울이소서. 깨어진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소서. 가난한 우리를 구하소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소서. 복음서는 바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기록이다. 절절한 간구에 대한 확신의 후렴구를 반복한다.
바울 역시 이러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 그들의 불안한 상황과 존재 속에서, 갈등과 연약함 속에서 고백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7).
사실 우리는 순간순간 종말의 때를 산다. 개인 차원에서 사람은 누구나 구체적인 종말과 가까이에 머물러 있다. 누군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신만만할 수 있는가. 이를 의식하고, 나를 깨어있게 하는 것은 기다림의 마음이다. 신앙적 용어로 각성 또는 회개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신앙이란 우리 마음의 창을 계속 닦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예수의 이름으로 견고하게 설 것을 간구한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8).
예수의 이름이 우리를 구원한다. 예수의 이름 위에 여러분의 삶을 든든히 세우라. 만세 반석이신 그 이름이 우리를 은혜와 평강으로 보장한다. 그의 십자가가 내 연약함을 일으켜 세우신다.
3)
현재 가장 흔들리는 곳은 가자지구이다. 크리스마스의 고향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서안에 위치한다. 해마다 성탄 전야가 되면 베들레헴으로 순례객이 몰려들었다. 누구나 별빛 같고 꿈결 같은 크리스마스 여행을 꿈꿨다. 그러나 더는 아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은 로마가 지배하던 그 압제의 시대와 다르지 않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면서 2천 년 이상 팔레스타인에 살아온 사람들은 일상적인 재앙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은 1950년 3월 ‘부재자 재산법’을 만들어 아랍인의 토지 몰수를 정당화하였고, 그해 7월에는 ‘귀환법’을 만들어 타지역에 살던 이스라엘인의 정착을 제도화하였다.
‘나크바’(대재앙)라고 부르는 그날 이후 ‘피난민’이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시 베들레헴과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 1,210만 명 중 790만 명은 난민으로 분류된다. 무려 65%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서안(약 300만)과 가자지구(약 230만) 그리고,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등 주변 아랍국 난민촌에서 힘겨운 삶을 산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거의 절반은 국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터가 된 가자지구는 세계 최대의 난민촌이다. 사방 6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초대형 감옥과 다름없다.
색동교회는 대림절 기간 입례송(入禮頌)으로 팔레스타인 찬송가 ‘평화의 하나님’을 부른다.
“야-랍-바 쌀-라-미 암-테르 알-레이-나 쌀-람 (오! 평화의 하나님, 내리는 비처럼 우리에게 평화를 내려 주소서)
야-랍-바 쌀-라-미 임 라 쿠-루-바-나 쌀-람 (오! 평화의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평화로 채워주소서)”
오늘 결단 예배 때 부를 ‘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감싸여’는 본회퍼 목사가 지은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예전에 색동교회를 방문한 김현신 님이 이 곡이 나루 자장가라면서 한글 악보를 챙겨갔다.
얼마나 평안한 노래인가?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살던 때는 암흑의 시대였다. 그는 히틀러 암살 음모혐의를 받고 나치 감옥에 투옥되었던 1943년 말경,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감옥에서 독방 생활은 대림절에 관한 많은 것을 나에게 되새겨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고 희망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우리가 하는 일은 거의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문이 닫혀있고 이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내 인생의 문은 오직 밖에서만 문을 열어 줄 수 있다. 이러한 본회퍼 목사의 고백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다.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믿음의 눈을 간직한 희망의 사람이었다.
대림절에 깨어있는 삶은 내 안의 등불만 밝히지 않는다. 나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상황에도 열려있는 것이다. 이웃의 아픔, 불행, 슬픔, 눈물, 외로움에 대해 깨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지혜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은혜와 평강으로 함께 하시길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색동교회와 세상의 교회들을 견고하게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불안한 삶의 터전 위에, 흔들리는 세상 위에 견고하게 함께 하시길 소망한다.
대림절을 하루 앞둔 어제 헤른후트 로중에 담긴 기도문의 내용이다.
“주님, 우리의 고난은 주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항상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주님이시며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면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아르노 뫼츠).
그렇다. 내 고난은, 우리의 아픔은 바로 주님의 시간이다. 임마누엘,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그 은혜와 평강으로 견고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