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좋은 느낌을 받은 나는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고 싶었습니다.
아내는 이스라엘 성지를 갔다 온 적이 있지만,
단체로 움직이다보니 '수박 겉핥기 식' 이었다고 했습니다.
2019년 2월, 8박9일 일정으로
아내와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기로 결정하고
몇 달에 걸쳐 사전에 방문할 성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출발 1주일 전
코로나 19로 여행이 전면 중지되는 바람에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만들어 놓은 자료에 방문스케쥴에 없던 지역까지
추가로 자료를 수집하여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성지순례가 무산되었을 때는 실망감이 컸지만,
돌아보니 그것이 은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작년(2023년 12월) 축일에 사위가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오라고
몇년 전부터 적립한 돈을 저에게 보냈습니다.
그런제 요즘 이스라엘이 전쟁 중이라 상황도 좋지 않아
다른데 의미있게 쓰려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나가사끼 성지순례를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신청을 하고 언제나 처럼 사전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시 무산되었습니다.
성지순례 2번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지나고 나면 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아쉬운 마음에 준비한 자료를 함께 공유하면서
나가사끼 랜선 투어를 하고자 합니다.
[Day1]
인천 국제공항 출발 (오전 10시)
후쿠오카 국제공항도착 (오전 12시)
점심 식사후 → 나가사키 이동 (대략 2시간)
▷나가사키 주교좌 성당 - 우라카미성당 (미사봉헌)
▷평화 기념 공원
▷ 여기당
저녁식사 및 호텔 휴식
일본 가톨릭교회는......
1549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의 일본 도착으로 가톨릭 신앙이 전해졌다.
지방 영주의 개종 등에 힘입어 당시 신자수는 30만을 넘어서는 등 교세가 급성장했으나,
1587년 총집권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제추방령을 내리면서부터 시작된 박해는
1614년에 에도막부(江戶幕府)가 금교령(禁敎令)을 선포한 이후 259년간 혹독하게 이어진다.
그렇게 일본교회는 침묵했다.
개화기 이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숨어서 신앙을 이어온 신자들(가쿠레 기리스탄)이 발견됐고,
새롭게 교계제도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교세는 16개 교구 신자 50여만명 정도~
유명, 무명의 순교자를 모두 합치면 4~5만 명의 순교자가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수많은 순교자 중에 1862년에 성인반열에 오른 ‘26 성인 순교자’와
1987년에 시성된 ‘성 토마스와 15 순교자’, 1867년에 복자품에 오른 ‘205 순교 복자’를 모시고 있다.
우라카미 성당 (浦上天主堂)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 있는 기독교(가톨릭) 성당이다.
성당은 이전 이름 우라카미 천주당(浦上天主堂)이라는 이름으로도알려져 있다.
1945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파괴되었으나, 1959년에 재건되었다.
1962년 이후 가톨릭 나가사키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며,
소속 신도수는 약 7천명으로,
건물 및 신도 모두 일본 최대 규모의 가톨릭 교회이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막부)의 금교령은 우라카미 신앙공동체에도 위기를 불러왔다.
우라카미의 신자들은 비밀교회를 만들어 250년간 신앙을 이어왔고
1865년 오우라성당에서 쁘띠쟝 신부를 만난 신자들이 불교와 단절을 공표하자
메이지정권은 1867년 3,394명의 신자들을 전국으로 6년간 유배시켰다.
우라카미 신자들은 이 유배를 '신앙여행'으로 받아들였다.
1873년 금교령 해제 뒤 유배에서 돌아온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에 감사하며
1925년 천신만고 끝에 당시 동양최대 규모의 우라카미 성당을 완공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안타깝게도 1945년 8월 9일 원폭으로 파괴되었고,
이 원폭으로 성모승천대축일을 준비하던 사제 두분과 신자 24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12,000명의 신자중 8,500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를 겪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당은 원폭으로 기둥만 남아있던 성당자리에 1959년 재건한 성당인 것!
長崎平和公園(나가사키평화공원)
1945년 8월 9일에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투하된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와
그 북쪽의 언덕 위를 포함한 지역에 평화를 위해 마련됐다.
북쪽 언덕 위의 평화공원에는 공원을 상징하는 평화기념상이 있는데,
높이 9.7m, 무게 30톤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모습이다.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살짝 감은 눈은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평화공원 입구에는 평화의 비둘기와 학의 날개를 상징하는 분수가 있어
피폭 후 극심한 갈증 속에서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넋을 달랜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모습의 조각상이 당시의 참상과
평화를 기원하는 모습으로 새겨져 전시되고 있다.
여기당(如己堂)
뇨키도(重古道)는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 있는 건물로,
나가이 다카시가 백혈병에서 회복하면서 집필 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약 3년 후인
1948년(쇼와 23년) 3월에 나가사키시 우라카미 시민과
천주교의 협력을 받아 축성되었습니다.
이 다다미 2칸의 방에서 나가이 다카시의 유명한 작품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바오로) (1908~1951)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교수이자 의사였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피폭되었으며 부인을 잃었고
병석에 누워서도 늘 하느님께 기도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책을 집필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했다.
1948년 우라카미의 신자들이 마련해 준 다다미 2장의 작은 집에서
나가이 박사는 두 아이와 함께 살면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며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오직 원폭 피해자 치료에 여생을 바쳤다.
병석에서 붓글로 쓴 '평화'라는 글자 1000장을 국내외로 우송하여
두 번 다시 인류에게 전쟁과 원폭 없는 평화를 지키려 호소했다.
나가이 박사님은 1908년 시마네현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무사집안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나가사키 의대에 진학하여 방사선학을 전공하고
1933년 2월 군대에 입대하여 군의관으로 만주사변에 종군하였다.
가톨릭 집안의 후손인 부인 미도리 여사의 영향으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께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명은 바오로 였다.
제대후, 나가이박사님은 대학병원에서 결핵성 질환 근절을 위해
열악한연구시설로 인해 <만추골추성 백혈병> 걸리게 되였다.
남은 생애는 3년이라는 선고를 받았지만, 연구에 매진하였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도 병원에서
X-RAY 필름을 선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다행해 목숨을 건졌으나 집에 돌아왔을때
사랑하는 아내는 이미 죽었고 두 아이만 살아 있었다.
그후 박사님은 폐허가 된 집터에 신자들이 마련해준
다다미 2장의 작은집 `여기당`에서 누운채 실명에 가까운 눈과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집필 활동에 전념하여 14권의 책을썻다.
<나가사키의 종> <묵주알> < 로사리오의 쇠사슬>등 저술 활동을 통하여
`참된 평화의 길`을 전 세계에 전파하였다.
누워서 지내는 처지였지만 당시 일본 천왕과 헬렌 켈러 등 유명인사들이
그의 조언을 들으러 왔다,
그는 저서를 통해 전쟁과 적이 없는 평화와 사랑을 호소하였고
평화의 수호자로 `평화`란 글자를 친필 붓글로
1,000장을 병석에서 써서 국내외로 우송하여
두 번 다시 인류에게 전쟁과 원폭이 없는 평화를 지키려 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축복 서한을 보냈고,
나가사키시에서는 명예 시민증 1호를 수여하였다.
1951년 5월 10일 사망할 때 4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