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상권
1. 집중품(集衆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병사왕의 나라에 있는 도량(道場)의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그곳에서 거듭 유행하시다가 다시 앉으셨다.
옛날에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빛[光影]이 매우 밝았는데, 이제 다시 마흔두 가지 빛을 놓으시니, 온갖 빛마다 모두 백만 아승기 공덕이 있었다. 그 빛이 영락(瓔珞)이 되어 부처님의 몸을 훌륭하게 장엄[嚴好]하고 법계에 가득하였는데 깊고 고요하기가 허공과 같았다. 마음을 오로지 한곳에 집중하여 고요히 비추면서 상주(常住)의 성품을 즐기고 교화를 다하며 신비로운 신통을 체득하여, 커다란 작용이 비교할 바가 없었다.
진리의 왕[法王]이시고 진리의 주인[法主]이신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의 부모가 되셨다.
자연의 백천 송이 보배 연꽃으로 꾸며진 사자좌가 있었으니, 옛날의 모든 부처님이 앉으신 자리도 모두 그러하였다.
도덕(道德), 위의(威儀), 상호가 하나같았고, 몸과 뜻이 청정하여 복행(福行)이 널리 갖추어졌다.
광명이 지나는 곳에는 금강보장(金剛寶藏)으로부터 변화를 나타냄에 다함이 없었고, 사람들의 세상[刹土]을 두루 비춤에 과거ㆍ미래ㆍ현재에 걸쳐 걸림이 없었다. 교화가 일체에 두루 미치어, 제도하는 교화 방편[度法]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삼세에 모두 평등하였고, 원만히 빛나서 오롯이 도달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들과 같았다.
그때 큰 모임 가운데 있는 보살들은 모두 다 일생보처(一生補處)로서 온갖 신통을 미묘하게 통달하여 시방세계에 두루 하였고, 다함이 없는 법신으로 중생들을 이끌어 이롭게 하였다.
부처님의 법장(法藏)을 열어서 불성의 묘과(妙果)와 적멸한 무위의[寂滅無爲] 중요한 가르침을 사람들의 근본으로 들어가게 하였고 숙명지(宿命智)로써 가르치고 교화하여 무제(無際)에 들어가게 하였고, 안팎의 요체(要諦)를 풀어냄에 있어서 처음과 끝이 다름이 없었다.
모든 부처님의 국토는 평등하여 분별하는 바가 없고, 큰 자비의 말씀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찬양하는 것을 이루 다할 수 없었다.
육도(六道)의 일을 모두 꿰뚫어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교화하는 곳에 이르면 모두 찬탄하며 말하였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이 큰 뜻을 세운 것을 생각하여 주시고, 또한 저희들에게 모든 부처님 세계에 있는 좋거나 나쁘거나 수승한 국토를 나타내어 주소서. 부처님께서 노니시는 곳마다 교화를 일으키시며, 빛나는 신통력으로써 저희들을 가르치고 일깨우시며 저희들의 뜻을 열어 보여 주소서. 저희들을 위해 부처님의 본업영락(本業瓔珞)인 십 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 회향[十向]ㆍ십지(十地)ㆍ무구지(無垢地)ㆍ묘각지(妙覺地)를 말씀해 주소서.
맹세코 저희들이 번뇌의 죄과와 모든 의심[疑妄]을 끊겠습니다.
저희들을 위하여 부처님의 국토, 부처님의 몸, 부처님의 신통력, 부처님의 선정(禪定), 헤아릴 수 없는 신통 변화, 네 가지 평등[四等], 두려움 없음[無所畏], 허물없는 세 가지 업, 열여덟 가지 함께 하지 않는 법[三ㆍ六의 不共], 일체의 공덕, 위없는 도법 등의 온갖 일을 펴시어 가르침을 나타내시고, 시방 일체의 국토에 들어가게 하소서.”
동쪽으로 가면 허물없는 향림찰(香林刹)이 있으니, 부처님을 입정진(入精進)이라 이름하고 보살을 경수(敬首)라고 이름 한다.
남쪽으로 가면 다함 없는 낙림찰(樂林刹)이 있으니, 부처님을 불사락(不捨樂)이라 이름하고 보살을 각수(覺首)라고 이름 한다.
서쪽으로 가면 다함 없는 화림찰(花林刹)이 있으니, 부처님을 습정진(習精進)이라 이름하고 보살을 보수(寶首)라고 이름 한다.
북쪽으로 가면 다함 없는 도림찰(道林刹)이 있으니, 부처님을 행정진(行精進)이라 이름하고 보살을 혜수(慧首)라고 이름 한다.
동북쪽에 다함 없는 청련찰(靑蓮刹)이 있으니 부처님을 비정진(悲精進)이라 이름하고 보살을 덕수(德首)라고 이름 한다.
동남쪽에 다함 없는 금림찰(金林刹)이 있으니, 부처님을 진정진(盡精進)이라 이름하고 보살을 목수(目首)라고 이름 한다.
서남쪽에 다함 없는 보림찰(寶林刹)이 있으니, 부처님을 상정진(上精進)이라 이름하고 보살을 명수(明首)라고 이름 한다.
서북쪽에 다함 없는 금강찰(金剛刹)이 있으니, 부처님을 일승도(一乘度)라 이름하고 보살을 법수(法首)라고 이름 한다.
하방에 다함 없는 수정찰(水精刹)이 있으니, 부처님을 대정진(大精進)이라 이름하고 보살을 지수(智首)라고 이름 한다.
상방에 다함 없는 욕림찰(欲林刹)이 있으니, 부처님을 지정진(至精進)이라 이름하고 보살을 현수(賢首)라고 이름 한다.
이와 같이 일체 진리의 빛이 흘러 들어와서 두루 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시방의 모든 보살들은 모두 그 나라의 제일가는 으뜸이라 칭찬하시니, 각각 헤아릴 수 없는 상인(上人)과 함께 이 큰 모임에 들어와서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천 가지 보배로 꾸며진 연꽃의 자리에 앉았다.
그때 저 국토의 대중 가운데 첫 번째 보살을 이름 하여 경수(敬首)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힘으로 찬탄하여 말하였다.
“상쾌한 이 모임에 모여서 그 머무는 바를 보니 부처님의 국토가 청정하여 법복(法服)에 이르기까지 여래의 덕식(德式)이 있고, 미묘한 선행을 수행하여 마흔두 가지 현성의 인(因)으로 경법을 연설하며, 부처님의 신통 변화를 얻어서 국토의 맑고 흐림에 따라 사람을 제도하는 일이 다함이 없으시고, 진리의 길로 교화함을 분류하여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으십니다. 이와 같이 타방의 불국토도 또한 영락본업(瓔珞本業)을 설하심에 둘도 없고 다름도 없나이다. 개시하는 바의 도법은 지금 석가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바와 다름이 없으시나이다.”
이때 경수(敬首) 보살은 시방의 국토에 들어가서 모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큰 사자후(師子吼)를 외치며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무량대보장해(無量大寶藏海)인 금강영락법문(金剛瓔珞法門)을 여쭈었다.
그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나무 아래에 이르러 시방 법계의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인연의 나타남을 살펴보시고 큰 광명을 놓아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비추시니, 위로 사공(四空)에 이르기까지 일시에 내려와서 법회 가운데 드셨다.
십팔천(十八天)ㆍ육천(六天)ㆍ사천(四天) 등이 모두 모여 오니, 헤아릴 수 없는 국토였다.
그 하나의 국토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수미산(須彌山)에 일월이 둘러싸고 사천하를 비춘다. 동쪽은 불우체(弗于逮), 남쪽은 염부제(閻浮提), 서쪽은
구야니(拘耶尼), 북쪽은 울단월(鬱單越)이다. 큰 바다의 철위산이 국토를 둘러싸고 위에 이십팔천(二十八天)이 있다.
이러한 것을 하나의 소국(小國)이라고 한다. 시방에 두루 가득한 것을 합하면 백억의 국토가 있다.
그때 부처님의 광명이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났다.
나아가 사천왕(四天王)ㆍ도리천(忉利天)ㆍ염천(焰天)ㆍ도술천(兜術天)ㆍ불교락천(不憍樂天)ㆍ화응성천(化應聲天)ㆍ범천(梵天)ㆍ범중천(梵衆天)ㆍ
범보천(梵輔天)ㆍ대범천(大梵天)ㆍ수행천(水行天)ㆍ수미천(水微天)ㆍ수무량천(水無量天)ㆍ수음천(水音天)ㆍ약정천(約淨天)ㆍ무상천(無相天)ㆍ변정천(遍淨天)ㆍ정광명천(淨光明天)ㆍ수묘천(守妙天)ㆍ미묘천(微妙天)ㆍ극묘천(極妙天)ㆍ복과 천(福果天)ㆍ과승천(果勝天)ㆍ대정천(大靜天)ㆍ공주천(空住天)ㆍ식주천(識住天)ㆍ무소유주천(無所有住天)ㆍ비상비무상주천(非想非無想住天) 등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모든 하늘에는 모두 큰 연못이 있고 물속에는 연꽃이 있었다. 그러므로 수천(水天)이라고 이름 하였다.
사비색(四非色)의 중생은 모두 화생(化生)한다. 아래로도 오륜제(五輪際)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하나의 불찰(佛刹)이라 하고 대인법계(大忍法界)라고
이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은 백억 분으로 나뉘어져 모두 그 가운데 두루 가득하여 그 국토를 위해 현성본업영락(賢聖本業瓔珞)의 행을 설하신다.
그때 모든 천인 대중들이 저 소국(小國)의 부처님과 보살을 우러러보는 것이 마치 가까이에서 서로 보는 것과 같았으며 모두 와서 이 금강적멸도량수회(金剛寂滅道場樹會)에 모였다.
2. 현성명자품(賢聖名字品)
그 때 다른 곳에 있던 경수보살도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게 되었다. 또 용왕ㆍ사자왕ㆍ이 십팔천왕의 대중이 있었는데 모두 뛰어난 근기로 수행하는
이들로서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았기 때문에 조그마한 의문을 일으켜 부처님께 여쭈었다.
“큰 스승이시여, 본래 무엇을 수행하여 부처님의 성스러운 도를 이루고 신ㆍ구ㆍ의의 청정함이 금강과 같아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까?
일체 중생은 그 힘의 끄트머리도 얻지 못합니다.
안으로 성품이 밝게 비치고 항상 머물러 소멸되지 않으며, 모든 보살 중 가장 뛰어난 분보다 뛰어나십니다.
빼어나게 단정하시어 색상이 견줄 데 없으시고 지극히 원만하시고 자연스러우시어 무위청정(無爲淸淨) 하시나이다.
두 가지 영원한 몸으로 사람들을 제도하시는 일이 한량이 없습니다.
육도(六道) 가운데 출현하시어 항상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의 공경하는 바가 되시며, 어리석음의 어둠[闇昧]을 제거하심이 촛불과 같으시고, 천지를 두루 밝히시는 것이 일월과 같으시며, 천인을 건네는 것이 뱃사공[船師]과 같으시어 삼계를 바로 지나 묘각존(妙覺尊)이 되셨나이다.
이러한 길을 이루고자 한다면 마땅히 어떻게 수행하여야 합니까? 일체 현성의 이름은 어떤 것입니까?”
그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금강과 같은 말씀으로 경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불자여, 주의해서 듣고 똑똑히 들어라.
그리고 이것을 잘 생각하고 기억하여서 여법하게 수행하라.
내가 먼저 천상의 사람 중에서 널리 모든 보살의 무량한 행원(行願)을 열었느니라.
이 법은 또 이 시방 삼세에 모든 부처님께서 명쾌하게 설명하시는 결정요의(決定了義)의 영락으로써 부처가 행하시는 길이니라.
지금 마땅히 이 대중 십사나 유타(十四那由他) 모든 사람들의 근기를 위하여 영락의 본업을 열리라.
너는 마음으로 뜻하고 서원하는 바가 높고 원대하며 대비(大悲)의 교화가 극진하며 자비가 시방의 일체중생에게 두루 미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여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야, 이 길을 성취하려고 하면 마땅히 먼저 세 가지 업을 바르게 하고 삼보의 가르침을 배우고 인과를 믿고 지향해야 하느니라.
그러면 곧 묻고자 하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보살이 되면 멀지 않아 부처의 경지를 획득할 것이니, 반드시 밝게 마흔두 분 성현의 명문결정요의(名門決定了義)의 진리를 받아들여 배우라.
그러면 시방 삼세의 일체 제불이 다 함께 설하시는 일은 하나로써 둘이 없도다.
불자여, 이른바 유가도(留伽度:진(秦)나라 말로는 발심주(發心住)라고 한다)ㆍ유체가도(留諦伽度:진나라 말로는 치지주(治地住)라고 한다)ㆍ유라가(留羅伽:진나라 말로는 수행주(修行住)라고 한다)ㆍ유마아(留摩阿:진나라 말로는 생 귀주(生貴住)라고 한다)ㆍ안 파사(安婆沙:진나라 말로는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라고 한다)ㆍ비발치(毘跋致:진나라 말로는 정심주(正心住)라고 한다)ㆍ아비발치(阿毘跋致:진나라 말로는 불퇴주(不退住)라고 한다)ㆍ필차가(必叉伽:진나라 말로는 동진주(童眞住)라고 한다)ㆍ필아라(必阿羅:진나라 말로는 법왕자주(法王子住)라고 한다)ㆍ유지가(留止迦:진나라 말로는 관정주(灌頂住)라고 한다)
도가아(度伽阿:진나라 말로는 환희행(歡喜行)이라고 한다)ㆍ
도안이(度安爾:진나라 말로는 요익행(饒益行)이라고 한다)ㆍ
도지라(度只羅:진나라 말로는 무진한행(無瞋恨行)이라고 한다)ㆍ
도화차(度和差:진나라 말로는 무진행(無盡行)이라고 한다)ㆍ
도리타(度利他:진나라 말로는 이치란행(離癡亂行)이라고 한다)ㆍ
도생파제(度生婆諦:진나라 말로는 선현행(善現行)이라고 한다)ㆍ
도사필(度沙必:진나라 말로는 무차행(無箚行)이라고 한다)ㆍ
도아하(度阿訶:진나라 말로는 존중행(尊重行)이라고 한다)ㆍ
도불하(度佛何:진나라 말로는 선법행(善法行)이라고 한다)ㆍ
도차일파(度叉一婆:진나라 말로는 진실행(眞實行)이라고 한다)
나제류사(羅諦流沙:진나라 말로는 구호일체중생회향(救護一切衆生廻向)이라고 한다)ㆍ
나담사(羅曇沙:진나라 말로는 부괴회향(不壞迴向)이라고 한다)ㆍ
필백가(必白伽:진나라 말로는 등일체불회향(等一切佛廻向)이라고 한다)ㆍ
법필타(法必他:진나라 말로는 지 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이라고 한다)ㆍ
불도타(佛度他:진나라 말로는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이라고 한다)ㆍ
나차필(羅叉必:진나라 말로는 수순평등선근회향(隨順平等善根廻向)이라고 한다)ㆍ
사라차가(師羅叉伽:진나라 말로는 수순등관일체중생회향(隨順等觀一切衆生廻向)이라고 한다)ㆍ
파가제(波訶諦:진나라 말로는 여상회향(如相廻向)이라고 한다)ㆍ
파라제 불타(波羅提弗陀:진나라 말로는 무박해탈회향(無縛解脫廻向)이라고 한다)ㆍ
달마변가(達摩邊伽:진나라 말로는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이라고 한다)
구마라가(鳩摩羅伽:진나라 말로는 역유환희지(逆流歡喜地)라고 한다)ㆍ
수아가일파(須阿伽一波:진나라 말로는 도유리가 굳이(道琉璃離垢地)라고 한다)ㆍ
수나가(須那迦:진나라 말로는 유조명지(流照明地)라고 한다)ㆍ
수다원(須陀洹:진나라 말로는 관명염지(觀明炎地)라고 한다)ㆍ
사다함(斯陀含:진나라 말로는 도장난승지(度障難勝地)라고 한다)ㆍ
아나함(阿那含:진나라 말로는 박유현전지(薄流現前地)라고 한다)ㆍ
아라한(阿羅漢:진나라 말로는 과삼유원행지(過三有遠行地)라고 한다)ㆍ
아니라한(阿尼羅漢:진나라 말로는 변화생불동지(變化生不動地)라고 한다)ㆍ
아나하(阿那訶:진나라 말로는 혜광묘선지(慧光妙善地)라고 한다)ㆍ
아가라 불(阿訶羅弗:진나라 말로는 명행족법운지(明行足法雲地)라고 한다)ㆍ
마하일화사(摩訶一和沙:진나라 말로는 무상무 구지(無相無垢地)라고 한다)ㆍ
사가바가바불타(娑伽婆伽婆佛陀:진나라 말로는 묘각자무상지(妙覺者無上地)라고 한다) 이니라.
불자여, 이렇기 때문에 명문(名門)의 일체 공덕행을 섭수해야 하느니라.
부처님과 보살이 이 명문에 들지 않음이 없다.
모든 신통ㆍ모든 인과(因果)ㆍ모든 경계도 이 명문에 드느니라.
불자여, 이 명문은 시방 제불이 설하신 길과 같아서 더함도 없고 줄어듦도 없는 결정된 사자후의 말씀이니, 마땅히 서원으로써 스스로 서원하고 수지하고 독송하고 뜻과 의미를 잘 해석할지니라.
일체 중생이 한 가지로 나의 법에 들어와 나와 함께 부처와 같아지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받아들여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경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불자여, 내가 지금 요약하여 명문 가운데에서 일현명문(一賢名門)을 말하리니, 이른바 초발심주(初發心住) 이니라. 아직 초발심주에 오르기 전에 십 순명자(十順名字) 보살이 있는데 항상 십심(十心)을 행하느니라. 이른바, 신심(信心)ㆍ염심(念心)ㆍ정진심(精進心)ㆍ혜심(慧心)ㆍ정심(定心)ㆍ불퇴심(不退心)ㆍ회향심(廻向心)ㆍ호심(護心)ㆍ계심(戒心)ㆍ원심(願心) 이니라.
불자야, 이 마음을 수행하는 데 혹은 일 겁(一劫)ㆍ가 겁(二劫)ㆍ삼 겁(三劫)을 거쳐야 곧 초발심주의 지위[初住位] 안에 들 수가 있느니라.
이 지위 가운데 머물러 백법명문(百法明門)을 더 수행해야 하는데, 이른바 십신심(十信心)의 마음이니라.
이 마음에도 각각 열이 있기 때문에 백법명문을 수행하는 것이니라.
그러니 마땅히 헤아릴 수 없는 유행(有行)과 무행(無行)의 큰 서원을 일으켜, 습종성(習種性) 안에 들어감을 증득해 널리 모든 서원을 행해야 하느니라.
현인(賢人)에 안주하기 위한 발원을 해
광대한 서원을 일으켜
금생에 부처에 이르는
일체 원에 들어가더라도
내 서원 가운데에 있어
성취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
스스로 부처 증득하는 일을 가지고
자기 서원의 근본으로 하리라.
내 이제 보시를 행하며
마땅히 원하나니, 중생이
탐욕의 뜻을 버리고
공도위(空道位)에 들어가 지이다.
항상 법계(法戒)를 실행하면서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행을 섭수하여 깨뜨리지 않고
바른 해탈을 얻어지이다.
여섯 가지 인[六忍]을 항상 받들면서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다툼이 없는 마음[無諍心]을 얻어
적멸한 법인(法忍)에 머물지이다.
커다란 정진의 힘을 일으키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항상 머문 바 없음 [不住]을 행하여
자각과(自覺果)에 들어가 지이다.
고요한 선정심(禪定心)에 머물면서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신통을 구족 하여
유위(無爲)에 스스로 안주하기를.
바른 법의 지혜[正法智]를 수행하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지혜 바다의 흐름에 들어가
보살 위로 이어지이다.
무상원(無相願)을 행하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일체 원이 원만하여
부처의 바다에 흘러들지이다.
커다란 지혜의 방편을 쓰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진리의 강[法河]에 거침이 없고
이제(二諦)의 가장자리에 다다를지이다.
큰 위신력으로 신통을 일으키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의
변화가 나에게 있어서
두려움 없음 [無所畏]을 얻게 하 여지이다.
변제지(邊際智)를 원만하게 하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금강지(金剛智)를 성취하여
보리도량의 극과(極果)에 올라 지이다.
무구지(無垢地)에 들어가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불도(佛道)의 나무 아래에 앉아서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지이다.
나 이제 이미 깨닫고 나서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상속하는 가법[相續假]을 이해하고
단견에 떨어지는 마음을 멸할지이다.
법화(法化)를 오롯이 반조[覺照]하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모든 법이 인연으로 이루어짐을 깨달아
상견을 헤아리는 마음을 없앨지이다.
아(我)의 체를 충분히 알아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상대법(相待法)을 깨달아
아를 헤아리는 마음을 없애 지이다.
인연 없는 대비심을 일으키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거짓 인연 생겨남 [假因生]을 이해해
견도심(見盜心)을 없애 지이다.
제일멸도(第一滅度)를 깨달으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진실한 법의 인연[實法緣]을 깨닫고
계도심(戒盜心)을 없애 지이다.
십력(十力)의 과를 증득해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이제(二諦)를 깨달아 밝히고
사견심(邪見心)을 없애 지이다.
금강의 힘으로써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십 이연(十二緣)을 깨닫고
의견심(疑見心)을 없애 지이다.
홀로 방정함 없이 비추오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법의 무상(無常)을 알아
간탐심(慳貪心)을 없애 지이다.
오안(五眼)과 삼달(三達)을 증득해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삼명의 깨달음을 닦고
어리석은 어둠의 마음을 없애 지이다.
무엇에도 걸림 없이 화합하며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삼보를 이어 잘 이해하고
성내어 다투는 마음을 없애 지이다.
대명혜(大明慧)를 증득해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일체공(一切空)에 들어가
무명(無明)의 창고[藏]를 없애 지이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을 갖추어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온갖 상호가 단엄하고 좋아서
의보(依報)의 과를 없애 지이다.
응신(應身)의 용(用)을 얻어서
마땅히 원하오니, 중생이
대법선(大法船)에 올라타고
불법의 바다에 들어가 지이다.
나의 인과(因果)의 원을
이미 다 구족 하게 되면
일체 행원이
그 속에 섭수되어 존재하나니
이 스물네 가지 원이
헤아릴 수 없는 행을 모두 섭수하여
믿음과 서원의 첫 관문이 되는지라
마침내 큰 지혜의 근본이 되느니라.
이제 모든 부처님 앞에서
이러한 큰 서원을 얻음에
서원이 지금 이미 원만하여졌음이라.
나머지 행[餘行]을 닦아 나아가면
그중에 얻는바 공덕으로
백천 겁토록 행하리니
나도 원을 곧 버리고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세계에 들어가리라.
일체 온갖 보살이
만약 이 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살바야(薩婆若)의 바다에
들어감을 얻지 않음이 없으리라.
불자여, 이 지위에 머물러 큰 서원을 이미 일으켰으면 다른 일체 범부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느니라.
십신(十信)을 행하는 자는 이제 또 무량공덕을 수행하나니, 이른바 십바라밀(十波羅蜜)ㆍ삼공(三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이니라. 유공(有空)ㆍ무공(無空)의 공관(空觀)을 성취하면 곧 아인(我人)ㆍ주자(主者)ㆍ중생을 없애고, 마침내 모든 견해를 버리고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얻고 삼계의 계박(繫縛)과 무명을 점점 깨뜨리게 되느니라.
모든 업보의 습기를 단절하기 때문에, 두텁게 모든 선법과 팔만 사천의 반야바라밀을 모으고 일체의 온갖 법문을 내 마음속에 섭수하여 생각 생각에 마음을 떠나지 않느니라.
불자여, 열 가지 불가회계(不可悔戒)가 있나니, 마땅히 받아서 마땅히 지녀야 하느니라.
첫째는 사람과 나아가 이십팔천(二十八天)과 모든 불보살을 죽이지 않는다.
둘째는 풀잎 한 포기라도 훔치지 아니한다.
셋째는 비인(非人)과도 음행 하지 않는다.
넷째는 비인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섯째는 출가 보살과 재가 보살의 죄과를 말하지 않는다.
여섯째는 술을 팔지 않는다.
일곱째는 스스로를 찬탄하면서 남을 헐뜯지 않는다.
여덟째는 인색하거나 탐내지 않는다.
아홉째는 비인에게도 성내지 않는다.
열째는 삼보를 비방하지 않는다.
만약 십계를 깨뜨리게 되면 잘못을 참회할 수 없는 바라이(波羅夷) 죄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바라이죄를 범하면 십 겁 중에 있어 하루에 팔만 사천 가지의 죄를 받으며 팔만 사천의 생이 다하도록 이러한 고통스러운 과보를 받아야 하므로 이 계를 깨뜨리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불자여, 발심주(發心住)를 잃어버리게 되면 나아가 이주(二住)ㆍ삼주(三住)ㆍ십지(十地)의 일체 모든 것을 잃게 되느니라.
따라서 이 계는 이 모든 불(佛)과 보살에게 있어 수행의 근본이 되느니라.
만약 모든 불과 보살이 이 십계 법문에 의하지 아니하고 성현의 과외를 얻는다고 한다면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이것이 초발심주의 모습이고 습종성(習種性) 가운데 제일가는 사람이니라.
이와 같이 아래 아홉 사람의 법행(法行)도 점점 증장되어 넓어지면 나아가 구주(九住)ㆍ십행(十行)ㆍ십향(十向)ㆍ십지(十地)의 무구지(無垢地)도 또한 점점 불가사의한 행이 증장되어 넓어지느니라.
불자여, 내 이제 요약하여 설명하였으나, 그것은 한 방울의 바닷물과도 같으니라.”
3. 현성학관 품(賢聖學觀品)
이때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말하였다.
“어떤 것이 보살이 이름[名字]의 이치와 모습[義相]을 배우고 관하는 것입니까?
마음으로 행하는 법[心所行法]은 또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그대가 묻는 바는 시방의 불국토 가운데 일체 부처님이 다 도량에 앉으셨을 때 질문한 것과 같구나.
모두 다 이름을 경수(敬首)라고 하며 묻는 바가 다름이 없나니, 주의해서 듣고 똑똑히 들어라.
바르게 관하고 사념하여 법답게 수행하라. 불자여, 일체 제불이 다 육명염(六明焰)과 삼삼매문(三三昧門)을 설하시듯 나도 또 이와 같이 설하느니라.
육종성(六種性)은 모든 보살의 공덕 영락으로써 보살의 두 가지 법신(法身)을 장엄하고 호지하느니라.
보살이 집착하는 바는 백만 아승기의 공덕행을 영락으로 삼느니라.
만약 일체 보살의 영락공덕문에 들어가지 않고 정위(正位)에 드는 것을 얻는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불자여, 성품은 이른바 습종성(習種性)ㆍ성종성(性種性)ㆍ도종성(道種性)ㆍ성종성(聖種性)ㆍ등각성(等覺性)ㆍ묘각성(妙覺性)이니라. 또는 육견(六堅)이라고도 하나니, 견신(堅信)ㆍ견법(堅法)ㆍ견수(堅修)ㆍ견덕(堅德)ㆍ견정(堅頂)ㆍ견각(堅覺)이니라. 다시 육인(六忍)이라고 이름 하나니, 신인(信忍)ㆍ법인(法忍)ㆍ수인(修忍)ㆍ정인(正忍)ㆍ무구인(無垢忍)ㆍ일체지인(一切智忍)이니라. 다시 육혜(六慧)라고도 이름 하나니,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ㆍ무상혜(無相慧)ㆍ조적혜(照寂慧)ㆍ적조혜(寂照慧)이니라. 다시 육정(六定)이라고도 이름 하나니, 습상정(習相定)ㆍ성정(性定)ㆍ도혜정(道慧定)ㆍ도종혜정(道種慧定)ㆍ대혜정(大慧定)ㆍ정관정(正觀定)이니라. 다시 육관(六觀)이라고도 이름 하나니, 주관(住觀)ㆍ행관(行觀)ㆍ향관(向觀)ㆍ지관(地觀)ㆍ무상관(無相觀)ㆍ일체종지관(一切種智觀)이니라.
불자여, 모든 보살과 부처로서 이 여섯 가지 명관(明觀)과 결정요의실상(決定了義實相)의 법문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느니라.
불자여, 그대가 앞에서 말한 명자(名字)란, 이른바 동보영락(銅寶瓔珞) 보살의 이름이니라.
이른바 습종성(習種性) 가운데 열 사람이 있나니, 그 이름은 발심주(發心住) 보살ㆍ치지(治地) 보살ㆍ수행(修行) 보상ㆍ생귀(生貴) 보살ㆍ방편구족(方便具足) 보살ㆍ정심(正心) 보살ㆍ불퇴(不退) 보살ㆍ동진(童眞) 보살ㆍ법왕자(法王子) 보살ㆍ관정(灌頂) 보살이니라.
불자여, 은보영락(銀寶瓔珞) 보살의 이름에는 성종성(性種性) 가운데 열 사람이 있나니, 그 이름은 환희(歡喜) 보살ㆍ요익(饒益) 보살ㆍ무진한(無瞋恨) 보살ㆍ무진(無盡) 보살ㆍ이치란(離癡亂) 보살ㆍ선현(善現) 보살ㆍ무착(無箚) 보살ㆍ존중(尊重) 보살ㆍ선법(善法) 보살ㆍ진실(眞實) 보살이니라.
불자여, 금보영락(金寶瓔珞) 보살의 이름에는 도종성(道種性) 가운데 열 사람이 있나니, 그 이름은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 보살ㆍ불괴(不壞) 보살ㆍ등일체불(等一切佛) 보살ㆍ지 일체처(至一切處) 보살ㆍ무진공덕장(無盡功德藏) 보살ㆍ평등선근(平等善根) 보살ㆍ순관중생(順觀衆生) 보살ㆍ여상(如相) 보살ㆍ무박해탈(無縛解脫) 보살ㆍ법계무량(法界無量) 보살이니라.
불자여, 유리보영락(琉璃寶瓔珞) 보살의 이름에는 성종성(聖種性) 가운데 열 사람이 있나니, 그 이름은 환희(歡喜) 보살ㆍ이구(離垢) 보살ㆍ명혜(明慧) 보살ㆍ염광(焰光) 보살ㆍ난승(難勝) 보살ㆍ현전(現前) 보살ㆍ원행(遠行) 보살ㆍ부동(不動) 보살ㆍ혜광(慧光) 보살ㆍ법운(法雲) 보살이니라.
불자여, 이와 같은 백만 아승기의 공덕영락은 보살의 두 가지 법신(法身)을 장엄하고 호지하느니라. 이 마흔 명을 이름 하여 학행(學行)이라고 하며, 법의 흐름 속에 들어가서 스스로 흘러가느니라.
불자여, 마님보영락(摩尼寶瓔珞) 보살의 이름에는 등각성(等覺性) 가운데 한 사람이 있나니, 그 이름은 금강혜당(金剛慧幢) 보살이니라. 정적정(頂寂定)에 머물러 대원력으로써 목숨이 백 겁을 머무는 동안 천(千) 삼매를 다 닦아 마치고 금강삼매에 들어가 일체 법성이 이제일제(二諦一諦)의 일합상(一合相)에 계합하느니라. 또 목숨이 천 겁을 머무는 동안 부처님의 위의 를 배우고 상왕(象王)과 같이 바라보고 사자와 같이 걸으며, 다시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신통으로 교화하는 법[神通化導法]을 수행하느니라.
이런 까닭에 일체 불법이 다 현재에 드러나고 부처님의 행처(行處)에 들어가며, 부처님의 도량에 앉아서 삼마(三魔)를 뛰어 건너느니라. 다시 목숨이 만 겁을 머무는 동안 성불(成佛)을 화현하고 대적정(大寂定)에 들어가 한 가지로 제불의 이제(二諦)의 경계 밖에 비유비무(非有非無)와 무심무색(無心無色)과 인과이습(因果二習)을 깨달아 남음이 없으나, 예전의 부처님과 동등한 것을 나타내어 다만 응신(應身)의 이름이 있느니라.
모든 색심(色心)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하고 옛 모든 부처님이 한가지로 하는 것을 나타내어 항상 중도를 행하며, 크게 무위(無爲)를 즐기면서 또한 생멸하는 것과는 다르니라. 또한 실로 부처가 아니면서도 부처의 신통을 나타내어 항상 본래의 경지에 머무느니라.
불자여, 수정영락(水精瓔珞)은 안팎이 철저하고 밝아 미묘한 깨달음이 상주하며 맑고 깊기 때문에 일체지지(一切智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항상 중도에 처하여 일체법 위에 사마(四魔)를 뛰어넘으며, 유(有)가 아니고 무가 아니며 일체 상(相)이 끊어져 돈연(頓然) 히 대각(大覺)을 요해하여 교화를 다하고 신통을 체증하여 이신(二身)이 항상 머무르므로 인연 있는 이들을 교화하느니라.
그러므로 불자여, 내 이제 간략히 현성의 이름을 설하리니, 너희들이 수지하고 현행하여 사람을 잘 교화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그대가 먼저 말하기를 ‘어떤 것이 마음으로 행해야 할 법입니까?’라고 한 것은, 이른바 십심(十心)이니라.
첫째는 발심주(發心住), 둘째는 치지심주(治地心住), 셋째는 수행심주(修行心住), 넷째는 생귀심주(生貴心住), 다섯째는 방편심주(方便心住), 여섯째는 정심주(正心住), 일곱째는 불퇴심주(不退心住), 여덟째는 동진심주(童眞心住), 아홉째는 법왕 자심 주(法王子心住), 열째는 관정심주(灌頂心住)이니라.
다시 다음에 곧 십 관심(十觀心)에서 관해야 할 법이란, 첫째는 두텁게 일체 선근을 모으는 것이니, 이른바 사홍서원(四弘誓願)이니라.
아직 고제(苦諦)를 건너지 못한 자는 고제를 건너게 하고, 아직 집제(集諦)를 이해하지 못한 자는 집세를 이해하게 하고, 아직 도제(道諦)에 안심하지 못한 자에게는 도제에 편안케 하고, 아직 열반을 얻지 못한 자에게는 열반을 얻게 하느니라.
불자여, 둘째는 무량한 선행(善行)을 수습하는 것이니, 이른바 사념처관(四念處觀)으로서 신념처(身念處)ㆍ수념처(受念處)ㆍ심념처(心念處)ㆍ법념처(法念處)이니라. 만약 네 가지가 다 공이면 사도(四倒)가 곧 파괴되지 않음이 없느니라.
임시[假]로 일체법이라고 이름 짓기 때문에 다 환화(幻化)와 같은 것이니라. 오음(五陰)의 색(色)ㆍ식(識)ㆍ수(受)ㆍ상(想)ㆍ행(行)과 육 대(六大)의 식(識)과 공(空), 사대(四大)와 일체법은 모두 자상(自相)도 없고 타상(他相)도 없나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셋째는 불도(佛道)의 법을 잘 익힌다는 것이니, 이른바 십 일체입(十一切入)을 관하는 것이니라. 사대(四大)와 사색(四色)과 공처(空處)와 식처(識處)는 다 보배의 모습[寶相]과 같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넷째는 모든 부처님 앞에서 법을 받아 또한 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팔 승 처(八勝處)이니라.
내실(內實)인 오음 가운데 세밀한 모습[廣相]과 간략한 모습[略相]의 두 가지 승차와 외가(外假)인 중생법 가운데의 세밀한 모습과 간략한 모습의 두 가지 승처와 사대법(四大法)의 세밀함과 간략함과 네 가지 승철이니, 이와 같이 일체법은 공(空)이고 무상(無相)이라고 관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다섯째는 모든 청백(淸白)의 법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팔대인각(八大人覺)이니라. 소욕(少欲)ㆍ지족(知足)ㆍ적정(寂靜)ㆍ정진(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ㆍ정혜(正慧)ㆍ부쟁론(不諍論)이니, 일체법에 수순 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여섯째는 모든 부처님을 위하여 보호하는 것이니, 이른바 팔해탈관(八解脫觀)이다.
문혜(聞慧)는 내가(內假)와 외가(外假)의 이 두 가지 모습이 불가득이기 때문에 첫 번째의 해탈이니라.
사혜(思慧)는 내오법(內五法)과 외일체법(外一切法)이 불가득이기 때문에 두 번째 해탈이니라.
수혜(修慧)는 육관(六觀)이 구족하고 색계의 오음이 공한 것은 세 번째 해탈이니라. 사공(四空)의 오음 및 멸정관(滅定觀)이 다 불가득인 것은 다섯 번째 해탈이니, 상(相)이 같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일곱째는 정법(正法)을 넓히는 것이니, 이른바 육화경(六和敬)이니라. 삼업(三業)과 동등한 계율과 동등한 견해와 동등한 수행으로써 동등하게 이 법에 들어가 화합하나니, 필경공(畢竟空)인 까닭이며, 불퇴 위(不退位)에 머무는 까닭이니라.
불자여, 여덟째는 대법(大法)을 믿고 기뻐하는 것이니, 이른바 삼공(三空)이니라. 일체의 인(因)이 공이므로 무작(無作)이며, 일체의 과(果)가 공이므로 무상(無相)이며, 인공(因空)과 과공(果空)도 또한 공이므로 공공(空空)이니, 이와 같은 법이 허공과 같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아홉째는 마음이 사 등법(四等法)에 머무는 것이니, 이른바 중생을 교화하여 사제법(四諦法)을 가르치되, 삼계는 즐거움이 아님을 고(苦)라고 하느니라. 무명의 습인(習因)으로 생을 받는 것이 끝이 없으나, 삼공의 도품(道品)은 무위적멸(無爲寂滅)이니라. 사제(四諦)는 두 가지가 없으니, 일합상(一合相)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열째는 기꺼이 부처님의 공덕을 구하는 것이니, 이른바 육념(六念)이니라. 불ㆍ법ㆍ승(僧)ㆍ계(戒)ㆍ사(捨)ㆍ천(天)이며, 일체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얻어서 생각 생각마다 불환삼매(不幻三昧)에 드나니 항상 익혀 온 바가 현전(現前)함을 닦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나는 먼저 도리천에서 십관(十觀)의 이름을 설하였는데, 처음 십 주(十住)는 범부의 행이니라. 만약 일체 보살로서 이 문으로부터 들어와 살바야해(薩婆若海)에 향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불자여, 십행심(十行心)이란, 첫째는 환희 심행(歡喜心行), 둘째는 요익심행(饒益心行), 셋째는 무진한심행(無瞋恨心行), 넷째는 무진심행(無盡心行), 다섯째는 이 치란 심행(離癡亂心行), 여섯째는 선현 심행(善現心行), 일곱째는 무착심행(無箚心行), 여덟째는 존중심행(尊重心行), 아홉째는 선법 심행(善法心行), 열째는 진실심행(眞實心行)이니라.
다시 다음에 곧 십 관심(十觀心)에서 관하는 바의 법이란, 첫째는 스스로 일체종지를 얻고자 하는 까닭이니, 이른바 사정법(四正法)이니라. 선법(善法)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방편으로 생겨나게 하고, 선법이 이미 생겨난 것은 방편으로 더욱 증장시켜 넓혀가고, 악법(惡法)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방편으로 생겨나지 않게 하고, 악법이 생겨난 것은 방편으로 단절하게 하나니, 보살이 그때 불과(佛果)를 구하기 위해서이니라.
불자여, 둘째는 자신이 몸소 증득하여 큰 힘이 있기 때문이니, 이른바 사여 의족(四如意足)이니라.
염(念)은 경계를 지키는 것이고, 정진은 빨리 달려 구하는 것이며, 정(定)은 포섭하여 단속하는 것이고, 혜(慧)는 경계를 비추는 것이니, 법의 무생(無生)과 자제한 법을 얻기 위한 까닭이니라.
불자여, 셋째는 무외구족(無畏具足)을 원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오근(五根)이니라. 이것은 신(信)ㆍ염(念)ㆍ정진(精進)ㆍ정(定)ㆍ혜(慧)가 모두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넷째는 삼보가 구 족 한 것을 얻기 위한 까닭이니, 이른바 오분법신(五分法身)이니라.
계(戒)는 모습이 아님을 없애고, 정(定)은 마음이 어지러워짐을 없애며, 혜(慧)는 생각[想]이 텅 빈 것을 깨닫게 하고, 해탈은 번뇌가 없으며, 일체중생이 얽매임이 없는 것을 지견(知見)이라 하나니, 이것은 해탈지견(解脫知見)인 까닭이며, 제법이 허공과 같아 둘이 없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다섯째는 일체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이니, 이른바 팔정도(八正道) 니라.
스승을 따라서 지혜가 생기게 함을 정지견(正知見)이라 하고, 법을 얻어 사(思)가 생기게 하는 것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하며, 책려하여 싫증내거나 게을리하지 않음을 정정진(正精進)이라 하고, 출가하여 도를 받고 삼도(三道)의 분(分)을 얻음을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이라고 하며, 법성(法性)의 공에 들어감을 정정(正定)ㆍ정혜(正慧)라고 하나니, 남이 없고 둘이 없는 [無生無二] 데서 일합상을 관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여섯째는 대자비를 얻기 위한 까닭이니, 이른바 칠관(七觀)이니라. 택법(澤法)ㆍ염법(念法)ㆍ정진법(精進法)ㆍ호법(護法)ㆍ희법(喜法)ㆍ정법(定法)ㆍ혜법(慧法)이니, 이것을 관문(觀門)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상(相)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일곱째는 네 가지 두려움 없음 [無畏]을 얻기 위한 까닭이니, 이른바 오선근(五善根)이니라.
정관(正觀)ㆍ난관(煖觀)ㆍ정관(頂觀)ㆍ인관(忍觀)ㆍ삼계공제일관(三界空第一觀)이니, 능히 십지(十地)의 무상대명혜(無相大明慧)를 나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성인의 태(胎)가 아직 변하지 않은 까닭이며, 제일공(第一空)은 평등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여덟째는 일체 불국토 안에 들어가 실행하기 위한 까닭이니, 이른바 사화법(四化法)으로서 법변(法辯)ㆍ호변(護辯)ㆍ어변(語辯)ㆍ요설변(樂說辯)이다.
이 네 가지는 지혜의 자성이라고도 하니, 일체법의 남이 없음 [無生]을 비추고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가 실행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아홉째는 한 생각 가운데 일체법을 비추기 위한 까닭이니, 이른바 삼세의 십 이인연이니라. 과거의 두 가지는 무명(無明)과 제행(諸行)이며, 현재는 식(識)ㆍ명색(名色)ㆍ육처(六處)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이고, 미래는 생(生)ㆍ멸(滅)이니, 모두 거짓으로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성품은 진실로 불가득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열째는 자재로이 대법륜(大法輪)을 굴리기 위한 까닭이니, 이른바 보살의 삼보(三寶)이니라. 보살이 이때에 제일의(第一義)의 중도(中道)에서 지혜를 깨달음의 보배[覺寶]라고 하고, 일체법이 남이 없이 [無生] 동(動)하므로 그 작용[用]을 가지고 법보(法寶)라고 하며, 항상 육도(六道)에 행하여 육도 중생과 화합하므로 승보(僧寶)라고 하나니, 일체중생의 흐름을 전환하여 불혜(佛慧)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내가 염천(焰天)에서 제천(諸天)을 위하여 범부의 십행(十行)을 설하였으나, 이제 이 대중 가운데서 다시 요약하여 법의 요점을 설하나니, 너희들은 수지 하라. 일체불이 설하신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불자여, 십 회 향심(十廻向心)이란, 첫째는 구호일체중생이상회향심(救護一切衆生離相廻向心), 둘째는 불괴회향심(不壞廻向心), 셋째는 등일체불회향심(等一切佛廻向心), 넷째는 지 일체처회향심(至一切處廻向心), 다섯째는 무진공덕장회향심(無盡功德藏廻向心), 여섯째는 수순평등선근회향심(隨順平等善根廻向心), 일곱째는 수순등관일체중생회향심(隨順等觀一切衆生廻向心), 여덟째는 여상회향심(如相廻向心), 아홉째는 무박해탈회향심(無縛解脫廻向心), 열째는 법계무량회향심(法界無量廻向心)이니라.
다시 다음에 십관(十觀)으로 마음에 관하는 법이란, 첫째는 이제정직(二諦正直)이니, 이른바 제일의제(第一義諦)를 학습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일체 법상(法相)은 여여(如如)하여 불가득 하다고 관하는 까닭에 자ㆍ비ㆍ희ㆍ사로써 육천인(六天人)을 가르쳐 삭발하고 삼보의 옷을 입게 하면, 출가 보살은 일체 승(僧)과 같아지느니라.
그것은 불법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며, 제일 청정한 까닭이니라.
불자여, 둘째는 심오한 제일의의 지혜이니, 이른바 오신통(五神通)이니라. 이것은 지혜의 자성이 차별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니, 천(天)은 신비로운 마음[神心]을 일컫는 것이기에 여기에서 천신통(天身通)이 있게 되는 것이니라. 천안(天眼)으로는 삼세에 있는 일체법을 보고, 미세한 색(色) 등을 보느니라. 천이(天耳)는 시방의 소리 등을 들을 수 있으며, 천 타 심지(天他心智)는 일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으며, 천 숙명지(天宿命智)는 삼세 육도(六道)의 명분(命分)을 알 수 있나니, 남이 없는 지혜[無生智]로써 일체법을 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셋째는 순지(淳至)이니, 이른바 무생혜(無生慧) 가운데에서 사 불 괴정(四不壞淨)이니라.
불ㆍ법ㆍ승ㆍ계(佛法僧戒) 중에서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넷째는 불력(佛力)과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것이니, 이른바 삼상(三相)이니라.
제법은 본래 없는 것이지만 가상으로 생(生)이라 이름하고, 이미 있다가 다시없음을 가상하여 멸(滅)이라 이름하며, 공하지 않고 법이 있음을 가상으로 주(住)라고 이름 하느니라.
이와 같이 일체는 공하여 둘이 아님을 통달하는 것을 세간의 진리(世諦)로 모양이 공하다고 하나니, 일제상(一諦相)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다섯째는 능히 중생을 헤아리는 힘이니, 이른바 5음(陰)이니라.
색은 공과 다르나 색이 모여서 대(大)가 되며, 색은 나누어지므로 색상공(色相空)이며 찰나찰나심(刹那刹那心)을 이루기 때문에 심상공(心相空)이니라.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은 모이는 일 없고 흩어지는 일도 없나니, 일상무상(一相無相)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여섯째는 부처님의 교화력이니, 이른바 부처님의 십이입(十二入)이니라.
바깥의 육경(六境)과 안의 육 근(六根)에 이르는 것을 식(識)이 들어가는 곳[所入處]이라 하므로 입(入)이라고 하느니라.
그 혜관(慧觀)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나니, 일체법은 자(自)가 없고 타(他)가 없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일곱째는 무애지(無礙智)를 지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니, 이른바 십팔계(十八界)이니라.
육경과 육 근과 육식이 일합상이니, 일체법도 또한 일합상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여덟째는 자연지(自然智)에 수순 하는 것이니, 이른바 인과(因果)이니라.
선악을 인(因)이라고 하고 고락을 과(果)라고 하며, 말미암는 [由] 곳을 인이라고 하고 일어나게 되는 [起] 것을 과라고 하느니라.
말미암음과 일어남이 상대(相待)하고 통하여 인과(因果)라고 하기 때문에 인과의 둘은 공이며 생도 없고 별도 없나니, 일합상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아홉째는 능히 불법승을 받기 때문이니, 이른바 이제(二諦)가 공하기 때문이니라.
인연이 모이는 연고로 유(有)라 하고, 이 유는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인연이 흩어지는 것이므로 이것을 무(無)라고 하며, 이 무도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유도 없고 무도 없나니, 반야와 해탈의 두 가지 모습이 없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열째는 자재혜(自在慧)로서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니, 이른바 중도제일의 제(中道第一義諦)이니라.
반야 가운데 처하여 일체법이 또한 둘이 없다고 관하여 달통하는 것이니라.
이 관혜(觀慧)가 전변 하여 성지(聖地)에 들어가기 때문에 상사제일의 제관(相似第一義諦觀)이라고 하지만, 역시 참다운 중도제일의 제관(中道第一義諦觀)은 아니다. 그 정관(正觀)이란 초지(初地) 이상에 삼관(三觀)의 마음이 있어서 일체지에 들어가느니라.
삼관이란 가명(假名)에서 공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제관(二諦觀)이고, 공에서 가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평등관이니라.
이 두 가지 관은 방편도이니, 이 두 가지 공관에 의하여 중도제일의 제관에 들어갈 수가 있느니라.
이제(二諦)를 함께 비추어 온갖 마음이 적멸하며, 나아가 초지법류(初地法流)의 물속에 들어감을 마하살성종성(摩訶薩聖種性)이라 하나니, 무상법(無相法) 가운데 중도이면서 또한 둘이 아님 [不二]을 행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이 삼십 심(三十心)으로써 일승(一乘)의 믿음에 들어가느니라.
일승의 인법(因法)은 근행(近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널리 대심(大心)을 행하는 일을 삼 아승기겁 동안 복도인(伏道忍)을 행하여야 비로소
충족시킬 수 있느니라.
불자여, 혹은 물러가고 혹은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십 주(十住) 이전의 일체 범부법 속에서 삼보리심(三菩提心)을 일으키면 항하사(恒河沙)와 같은 수의 중생이 불법을 배우고 실행하게 되는 것을 말하느니라.
신상심(信想心) 속에서 행하는 자는 이것이 퇴분(退分)의 선근(善根)이니, 모든 선남자는 혹은 일 겁ㆍ가 겁 나아가 십 겁 동안에 십신(十信)을 수행하여 십 주(十住)에 들어감을 얻느니라.
이 사람이 그때 처음 일주(一住)부터 제육주(第六住) 중에 이르러 만약 여섯 번째의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 정관(正觀)이 나타나고 또한 모든 불보살과 선지식을 만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제칠 주(第七住)에 나아가 태어나게 되어 항상 불퇴전에 머무느니라.
이 칠주 이전을 이름 하여 퇴분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만약 퇴전치 않는 자는 여섯 번째 반야에 들어가 공을 수행함에 아(我)와 인(人)과 머무르는 자[主者]가 없고, 마침내 가서는 무생(無生)이므로 반드시 정위(定位)에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만약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는 이는 만약 일 겁ㆍ가 겁 나아가 십 겁 동안에 보리심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이 나의 처음 모임의 대중 가운데 있던 팔만 사람이 물러나는 것과 같으니라. 정목천자(淨目天子)ㆍ법재왕자(法才王子)ㆍ사리불(舍利弗) 등과 같이 제 칠 주(住)에 들어가려고 원하지만 그 속에서 나쁜 인연을 만나기 때문에 물러나게 되어 범부불선(凡夫不善)의 악도 가운데 들어가므로 습종성(習種性)의 사람이라고 이름 하지 않느니라.
물러나 외도에 들어가게 되면 일 겁 혹은 십 겁 나아가 천 겁에 이르기까지 아주 큰 삿된 견해와 오역죄를 지어서 악을 짓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것을 퇴상(退相)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내가 먼저 제사천(第四天:두율천(兜率天)) 가운데에서 널리 이 범부의 십 회 향법(十廻向法)을 열어 펼쳤으나, 지금 이 나무 아래에서는 대략 법의 요점만을 설하리니, 너희 모든 사람들은 능히 스스로 수행하여 받아 행할지니라.
불자여, 십지(十地)의 마음이란, 첫째 사무량심(四無量心), 둘째 십 선심(十善心), 셋째 명광심(明光心), 넷째 염혜심(焰慧心), 다섯째 대승심(大勝心), 여섯째 현전심(現前心), 일곱째 무생심(無生心), 여덟째 부사의심(不思議心), 아홉째 혜광심(慧光心), 열째 수위심(受位心)이니라.
다시 다음에 십관(十觀)의 마음을 관하는 법이란, 첫째는 환희지(歡喜地)에서 중도제일의 제(中道第一義諦)의 지혜에 머무나니, 이른바 스무 가지의 환희심과 십 무진(十無盡)의 서원을 가지고 법신(法身)으로 나 투어 시방세계의 불국토에 들어가 오신통(五神通)을 짓고 여환삼매(如幻三昧)에 들어가 불화(佛化)의 무량공덕을 지어 나타내면서도 삼계 범부의 시과(時果)를 받지 않느니라. 항상 일승 위(一乘位)와 일심의 네 가지 진리[四諦]인 집(集)ㆍ고(苦)ㆍ도(道)ㆍ멸(滅)에 들어가 두 가지 법신으로 변화하여 바뀌는 것을 받아들여 수행하고 삼관(三觀)이 현전케 하고, 항상 그 마음을 닦아 백법명문(百法明門)에 들어가느니라. 이른바 십신(十信)의 일신(一信)에 열 가지가 있기 때문에 백법명문이며, 열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필경에는 번뇌를 받지 않는다. 마음 마음마다 적멸하여 법류(法流)의 물속에서 자연히 살바야해(薩婆若海)로 흘러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둘째는 금강해장법보(金剛海藏法寶)이니, 이른바 스스로 십선(十善)을 행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십선을 행하게 하며, 십선을 행하는 자를 찬탄하고 십 선법을 찬탄하고 일천 개의 불국토를 나타내어 일체중생을 교화하나니, 무상(無相)함을 달관하여 모두 성취했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셋째는 여환삼매에 드는 것이니, 이른바 십이 문선(十二門禪)이니라. 처음에는 각(覺)ㆍ관(觀)ㆍ희(喜)ㆍ낙(樂)ㆍ일심(一心)의 오지(五支)를 인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묵연심(默然心)을 정체(定體)로 하느니라. 희(喜)ㆍ낙(樂)ㆍ기(倚)ㆍ일심(一心)의 사지(四支)를 인이라 하고 다섯 번째의 묵연심을 정체(定體)로 하느니라. 낙(樂)ㆍ호(護)ㆍ염(念)ㆍ지(智)ㆍ일심(一心)의 오지를 인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묵연심을 정체로 하느니라.
불고(不苦)ㆍ불락(不樂)ㆍ호념(護念)ㆍ일심(一心)의 사지를 인하는데, 이 인(因)은 방편이라 이름하고 다섯 번째의 묵연심을 정체로 하느니라.
선(禪)은 지림(支林)이라 하고, 정(定)은 검섭(撿攝)이라 하는데, 겁을 지나도 흩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름 하여 정이라고 하느니라.
사공정(四空定)과 함께 오지(五支)가 있는데, 체와 용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니, 방편도(方便道)도 마찬가지이니라.
지(支)라고 하는 것은, 상(想)ㆍ호(護)ㆍ정(正)ㆍ관(觀)ㆍ일심(一心)의 오지(五支)를 인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묵연심을 정체로 하느니라.
정(定)에서 사무량심을 내는 것을 사무량정(四無量定)이라고 하느니라.
성인은 범부의 법과 같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자제력으로써 다시 이 법을 지나 무량정에 들어가나니, 백천불토에서 일체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넷째는 널리 법보장(法寶藏)을 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신수심법(身受心法)과 정진(正進)과 여의족(如意足)ㆍ근(根)ㆍ역(力)ㆍ팔정도(八正道)ㆍ칠각지(七覺支)이니, 이것이 보살의 대행(大行)이니라.
억(億)의 법신을 나타내어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다섯째는 법계지관(法界智觀)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른바 십육제(十六諦)이니라.
그것은 유제(有諦)ㆍ무제(無諦)ㆍ중도제일의 제(中道第一義諦)ㆍ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ㆍ상제(相諦)ㆍ차별제(差別諦)ㆍ시성제(視成諦)ㆍ설제(說諦)ㆍ사제(事諦)ㆍ생기제(生起諦)ㆍ진무생제(盡無生諦)ㆍ입도제(入道諦)ㆍ여래지제(如來智諦)이니라.
오명론(五明論:內明ㆍ因明ㆍ聲明ㆍ醫方明ㆍ工巧明)과 일체법이 모두 일념의 마음속에 있어서 일시에 행하나니, 무량신(無量身)이 일체 불토를 나투어 부처님의 법화(法化)를 받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여섯째는 유법(有法)의 인연에 도달하기 때문에 지혜를 일으키나니, 이른바 열 가지의 십 이인연이니라.
열 가지로 비추어 보면, 첫째는 아견(我見)의 십이인연, 둘째는 심위(心爲)의 십이인연, 셋째는 무명의 십이인연, 넷째는 상연유(相緣由)의 십이인연, 다섯째는 조성(助成)의 십이인연, 여섯째는 삼업의 십이인연, 일곱째는 삼세의 십이인연, 여덟째는 삼고(三苦)의 십이인연, 아홉째는 성공(性空)의 십이인연, 열째는 박생(縛生)의 십이인연이니라.
역(逆)과 순(順)으로 관하기 때문이며, 무량신을 나투어 일체불토에 들어가 일체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일곱째는 과보를 다하는 무장무애지(無障無礙智)이니, 이른바 삼공(三空)의 지혜로써 삼계의 이습(二習)을 관하고 색심(色心)의 과보를 멸하여 남음이 없느니라. 일체행의 공덕(功德)ㆍ공용(功用)ㆍ조작(造作)이 이미 끝나고, 일체의 변통(變通)과 소위소작(所爲所作)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어서 [不一不二] 수행을 만족하여 계발하지 않음이 없고, 일체 공덕행의 공용을 개발하여 나아가 상지(上地)의 일체 공덕행까지 이미 다 닦고, 공용을 개발하여 또 일체 행의 근본을 모두 다 구족 하느니라.
십도(十度)를 근본으로 삼나니, 그것은 시(施)ㆍ계(戒)ㆍ인(忍)ㆍ진(進)ㆍ정(定)ㆍ혜(慧)ㆍ원(願)ㆍ방편(方便)ㆍ통력(通力)ㆍ무상혜(無相慧)이니라.
십 도행법(十度行法)의 공용이 이미 끝나고 함이 없고 지음이 없는 [無爲無作] 법류(法流)의 물속에서 마음 마음이 적멸하나니, 자연히 살바야해(薩婆若海)에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여덟째는 부사의무공용관(不思議無功用觀)이니, 이른바 무상(無相)의 대혜(大慧)와 방편의 대용(大用)이니라.
색습(色習)이 없고 무명도 또한 다하여 백만 겁의 일 [事]과 무량한 불토의 일이 이미 일념의 마음에서 일시에 행해지느니라.
부처님과 같은 모습이나, 일체중생의 형상을 나타내고 일념의 마음속에서 일시에 다 행하나니, 공용이 없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아홉째는 법제지(法際智)에 들어가나니, 이른바 사십변재(四十辯才)로 일체 공덕의 행을 다 성취하고 심습(心習)이 이미 멸하고 무명도 또한 없어지느니라. 일체 불장(佛藏)과 일체 변통장(變通藏)은 일심 속에서 이미 일시에 행해지면서 무량대천 세계 가운데서 부처 모양을 짓고 중생의 모양을 짓나니, 무량 중생을 교화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열째는 무애지관(無碍智觀)이니, 이른바 무량한 법의 비[法雲雨]를 뿌려서 일체중생에 미치고, 이습(二習)의 무명이 이미 다 멸하여 대직위(大職位)를 받느니라. 신통 변화가 무량함은 갖추어 말할 수 없이 부처님과 같이 나타내니, 무상(無相)의 용(用)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이와 같이 일체 현인이 함께 이 문에 들어와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불자여, 내가 먼저 제 육천(第六天)에서 십자를 설하고 천인을 교화하였는데, 지금은 그것을 요약하여 펴나니 너희들은 받아 행하여야 하느니라.
불자여, 제 사십일지(第四十一地)의 마음을 입법계심(入法界心)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심소행의 법이란, 이른바 용복정(勇伏定)으로 법광삼매(法光三昧)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이 정(定) 중에 들어가 열 가지 법을 수행하나니,
첫째는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 변화를 배우고,
둘째는 보살의 권속을 모으고,
셋째는 거듭하여 앞서 행한 법문을 닦고,
넷째는 일체 불국토를 돌아서 일체불을 찾아뵙고,
다섯째는 무명(無明)의 부모와 헤어지고,
여섯째는 거듭해서 현문(玄門)에 들어가고,
일곱째는 부처님과 같이 동일하게 일체 형상을 나타내고,
여덟째는 두 가지 법신을 갖추고,
아홉째는 이습(二習)이 있지 않고,
열째는 중도제일의 제의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무구(無垢)의 보살이 발심주(發心住)에서 와서 이 일지(一地)에 이르면 무량겁을 거쳐 사십 심(四十心)의 무량한 공덕 법문을 닦느니라.
또 희지(喜地)에서 두 가지 법신의 무량한 공덕을 수행하고 백천 겁을 거쳐 법장(法藏)이 비로소 만족하게 되고, 상진삼매(相盡三昧)에 들어가 일체지위(一切智位)를 성취하나니, 항상 부처님과 같은 행을 행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내가 먼저 제삼선(第三禪)에서 팔선(八禪)의 무리를 모아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의 불화삼매정(佛華三昧定)에 들어가는 것을 설함에 백만억의 게송이 있었느니라. 이제 요약하여 한 게송으로 이치를 설하여 중생의 마음을 여나니, 너희들은 받아 지닐지니라.
불자여, 제사십이지(第四十二地)를 적멸심묘각지(寂滅心妙覺地)라고 이름하느니라. 항상 한 모양에 머물러 제일무극(第一無極)이며, 담담하기가 허공과 같으니라. 일체종지로써 존재가 생겨남이 없는 진리의 처음과 끝을 널리 비치는데, 오직 부처님만이 중생의 근본과 유시유종(有始有終)을 궁구하여 다하셨느니라. 부처님은 또 일체 번뇌와 일체중생의 과보를 다 비추어 보시고 부처님은 또 일심념(一心念)으로써 헤아리고 근원을 다하시며, 모든 불국토와 모든 불의 인과와 모든 보살의 신통 변화까지도 또한 한 생각, 한 순간에 다 알고 불가사의한 이제(二諦)의 밖에 머물러 홀로 존재하시며 둘이 없느니라.
불자여, 내가 먼저 이 나무 아래서 법계해(法界海)를 설할 때 팔만의 무구보살이 있었는데 현신(現身)으로 부처를 얻은 까닭에 이제 이 대중을 위하여 요약하여 불과(佛果)의 행처(行處)를 펴나니, 너희들은 마땅히 정수리로 받들어 받을지니라.”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초지(初地)에서 끝의 일지(一地)에 이르기까지에 있어 과보와 신통 변화에 두 가지 법신이 있나이다. 하나는 법성신(法性身)이고, 둘째는 응화법신(應化法身)이 온데 어떤 색상(色相)을 하고 있으며 어떤 심상(心相)을 하고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출세간의 과(果)란, 초지에서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각각 두 가지 법신이 있느니라.
제일의제의 법류(法流)의 물속에서 진실된 성품[實性:眞實法性]을 따라 생기는 지혜이기 때문에 진실 된 지혜를 법신이라고 하는데 법은 자체(自體)라 이름하고 집장(集藏)을 신(身)이라 이름 하느니라.
일체중생의 선근은 이 실지법신(實智法身)에 감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신을 능히 나투어 무량한 법신에 응하느니라.
이른바 일체계국토신(一切界國土身)ㆍ일체중생신(一切衆生身)ㆍ일체불신(一切佛身)ㆍ일체보살신(一切菩薩身)이 모두 다 불가사의신(不可思議身)을 나투나니, 국토도 모두 그와 같으니라.
불자여, 국토[土]는 일체 현성이 머무는 바의 처소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일체중생과 현성은 스스로 제각기 과보의 국토가 있느니라.
만약 범부 중생이 오음(五陰) 중에 머무는 것을 정보(正報)의 국토라 하고, 산림 대지를 공유함을 의보(依報)의 국토라 하느니라.
초지의 성인도 또한 두 국토가 있나니, 첫째는 실지토(實智土)인데 전지(前智)와 후지(後智)에 머무는 것을 국토라고 하느니라.
둘째는 변화의 청정함과 더러움이니, 겁의 수량을 거쳐서 응현하는 국토이니라. 나아가 무구지(無垢地)의 국토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일체 중생과 나아가 무구지까지는 모두 청정한 국토가 아니며, 과보에 머물기 때문에 오직 부처만이 중도제일법성의 국토에 계시게 되느니라.
이런 까닭에 내가 옛날에 보광당(普光堂) 위에서 널리 일체중생을 위하여 청정한 국토[淨土]의 문을 설하였느니라.
불자여, 초지에 일념무상(一念無相)의 법신지신(法身智身)은 백만 아승기 공덕의 법을 성취하고 이제(二諦)를 다 비추고 마음 마음마다 적멸하는 법류의 물속에 흐르느니라. 범부의 심식(心識)으로서는 두 가지 법신을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어떻게 이지(二地)ㆍ삼지(三地) 나아가 묘각지(妙覺地)까지를 헤아릴 수 있겠느냐? 다만 응화(應化)하는 도(道) 가운데에서 취함으로써 초지에 백 신(百身)ㆍ천 신ㆍ만 신 나아가 무량신(無量身)까지가 있어 계박(繫縛)이 있고, 해탈이 있는 것이니라. 그 법신은 마음 마음마다 적멸하는 법류(法流)의 물속에 처하며 위로 일체 불법과 일체 과보를 구할 수 있음을 보지 않고, 아래로 무명(無明)의 모든 견해를 끊어야 하고 중생을 교화해야 함을 보지 않느니라.
다만 세간 적 진리[世諦]의 응화법 중에서는 부처를 구해야 하고, 모든 견해를 끊어야 하며 중생을 교화해야 함을 보느니라.
불자여, 또 세 가지 견고한 법을 수행하여 성인의 위에 들어감을 증득해야 하느니라.
다만 법류의 물속에서 마음 마음마다 적멸하면 자연히 묘각(妙覺)의 큰 바다에 흘러드느니라.
불자여, 나아가 삼현 십지(三賢十地)까지의 이름도 또한 무명무상(無名無相)이니, 다만 응화(凝化)이기 때문이니라.
옛 부처님의 도법(道法)에 십자의 이름이 있나니, 불자여, 그대가 마땅히 수지해야 하느니라. 일체 불법은 평등하여 다름이 없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세간의 과보란 이른바 십 주의 동보영락동륜왕(銅寶瓔珞銅輪王)은 백 명의 복자(福子)를 권속으로 하고, 불국토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학행(學行)을 본받아 이 천하(二天下)를 교화하느니라. 은보영락은 륜왕(銀寶瓔珞銀輪王)은 오백 명의 복자(福子)를 권속으로 하고 두 불국토 중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교행(敎行)을 받아 삼천하(三天下)를 교화하느니라. 금강보영락금륜왕(金剛寶瓔珞金輪王)은 천 명의 복자를 권속으로 하여 시방 불국토 속에 들어가 일체중생을 교화하며 사천하(四天下)에 머무느니라.
환희지의 백보영락칠보상륜(百寶瓔珞七寶相輪)의 사천왕은 만 명의 아들을 권속으로 하고 백법신(百法身)으로써 백 불국토 속에 들어가 시방 천하를 교화하느니라. 천보영락팔만상륜(千寶瓔珞八萬相輪)의 도리왕(忉利王)은 이만 명의 아들을 권속으로 하느니라.
만보영락구보상륜(萬寶瓔珞九寶相輪)의 염천왕(焰天王)의 권속도 또한 그와 같아서 수를 말할 수 없느니라.
억보영락십보상륜(億寶瓔珞十寶相輪)의 도솔타천왕(兜率陀天王)의 권속도 또 그러하여 수를 말할 수 없느니라.
천광보영락십일보상륜(天光寶瓔珞十一寶相輪)의 화락천왕(化樂天王)의 권속도 또한 그러하며, 마니보광영락십이보상륜(摩尼寶光瓔珞十二寶相輪)의 타화천왕(他化天王)의 권속도 또한 그러하며, 천색용보광혜영락십삼보상륜(千色龍寶光慧瓔珞十三寶相輪)의 범천왕(梵天王)의 권속도 또한 그러하며, 범사자보광영락대응보상륜(梵師子寶光瓔珞大應寶相輪)의 광음천왕(光音天王)의 권속도 또한 그러하며, 불가사의보광영락백운광보상륜(不可思議寶光瓔珞白雲光寶相輪)의 정천왕(淨天王)의 권속도 또한 그러하며, 백만신통보광영락무외주보상륜(百萬神通寶光瓔珞無畏珠寶相輪)의 정거천왕(淨居天王)의 권속도 또한 그러하며, 천만천 색 보광영락각덕보광상륜(千萬天色寶光瓔珞覺德寶光相輪)의 삼계왕(三界王)은 일체 보살을 권속으로 하며, 무량공덕장보광영락천복 상륜(無量功德藏寶光瓔珞千福相輪)의 법계왕(法界王)은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을 권속으로 하느니라.
불자여, 이것은 상영락상륜(上瓔珞相輪)이니, 일체불 및 보살은 움직이나 머무나 함께 노닐어 항상 그 몸을 따르고 또 일체중생을 교화하느니라.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과보의 이름과 숫자의 법이 있느니라.
불자여, 삼현(三賢)의 보살은 삼계의 번뇌와 추업도를 조복하고 또한 추한 상속과(相續果)도 일으키지 않느니라.
이 견도(見道)의 희인(喜忍)에서는 삼도(三道)의 업도를 조복 하고, 이인(離忍)은 인도(人道)의 업도를 조복하고, 명인(明忍)은 육천(六天)의 업도를 조복하고, 염인(焰忍)은 모든 견해의 업도를 조복하고, 승인(勝忍)은 의견(疑見)의 업도를 조복하고, 현인(現忍)은 인(因)의 업도를 조복하고, 무생인(無生忍)은 과(果)의 업도를 조복하고, 부동인(不動忍)은 색인(色因)의 업도를 조복하고, 광인(光忍)은 심인(心因)의 업도를 조복하고, 적멸인(寂滅忍)은 심색이습(心色二習)의 업도를 조복하고, 무구인(無垢忍)은 습과도(習果道)를 조복 하느니라.
습은 앞에서 이미 없앴지만 과(果)는 없어지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불자여, 삼현을 이름 하여 복단(伏斷)이라고 하나니, 희인 이상은 조복 하기도 하고 끊어 없애기도 하느니라.
일체 번뇌는 각인(覺忍:묘각(妙覺), 즉 佛의 자리)이 나타날 때 법계에 있는 일체 무명이 순식간에 끊어져 나머지가 없느니라.
불자여, 무명(無明)이란 일체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느니라. 법계에서 미혹되어 삼계의 업과를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나는 무명장(無明藏)으로부터 열세 가지의 번뇌를 일으킨다고 말하느니라. 이른바 사견(邪見)ㆍ아견(我見)ㆍ상견(常見)ㆍ단견(斷見)ㆍ계도견(戒盜見)ㆍ과도견(果盜見)ㆍ의견(疑見)의 칠견(七見)이니, 일체처를 보고 구하기 때문에 견이라 하느니라. 이 견으로부터 다시 여섯 가지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탐(貪)ㆍ애(愛)ㆍ진(瞋)ㆍ치(癡)ㆍ욕(欲)ㆍ만(慢)이며, 법계 가운데에서 모든 때에 일어나느니라.
불자여, 일체 번뇌는 이 열세 가지를 근본으로 하고 있고, 무명도 이 열세 가지를 근본으로 하느니라.
이로써 법계 속에서 구별하여 삼계의 과보를 삼느니라.
불자여, 견해[見]와 집착[箚]의 두 가지 업은 법계 중에서 일체 색욕심(色欲心)에 미혹되어 일어난 과보이므로 나누어 욕계(欲界)의 과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견해와 집착의 두 가지 업이 법계 중에서 일체 핵심에 미혹하여 색심(色心)에서 일어나는 과보를 나누어 색계(色界)의 과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견해와 집착의 두 가지 업이 법계 중에서 일체 정심(定心)에 미혹하여 정심이 일어나는 과보를 나누어 무색계(無色界)의 과보라고 하느니라.
따라서 일법계 중에서 삼계의 과보가 있나니, 일체 유위법(有爲法)과 혹은 범부와 성인과 혹은 견해와 집착과 혹은 인과법(因果法)이 모두 이 법계(法界)를 벗어나지 않으며, 다만 부처님 한 사람만이 법계 밖에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다음에 또다시 와서 법계장(法界藏) 속에 들어가 무명 중생을 위하여 일체 선악도의 과보에 대한 차별이 무량함을 나타내느니라.
불자여, 앞에 삼현(三賢)에서는 삼계 무명을 조복 하면서 또한 추업을 사용하느니라.
왜냐 하면 수생(受生)할 때 선(善)을 인연으로 삼고 자식에 대한 사랑을 윤업으로 삼아 미래과(未來果)를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작용[用]이 끊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애욕이 끊어진 것은 아니니라.
또 십일 인(十一人:십지(十地)와 등각(等覺))도 또한 법계 중에 삼계의 업과를 조복 하기 때문에 초지(初地)에서 칠지(七地)에 이르러서는 삼계의 업과를 다 조복 하여 남음이 없나니, 팔지(八地)에서는 곧 이것이 다하기 때문이니라.
이 이상은 부처가 되는 것을 나타내되, 왕궁에 태어나서 출가하여 득도하며 법륜을 굴리고 면도하며 또 일체 불계(佛界)를 나투느니라.
그러므로 애욕의 종자로 인한 삼계의 과보가 없게 되는데 오직 무명의 습기만 남아 있을 뿐이나, 대원력을 가진 연고로 변화하여 태어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내가 옛날에 천상에서 생(生)ㆍ불생(不生)의 뜻과 업생(業生)ㆍ변생(變生)을 설하였느니라.
불자여, 성위(聖位)에 두 가지 업이 있으니, 첫째는 혜업(慧業)이니 무상무생(無相無生)의 지혜이니라. 마음 마음마다의 법성(法性)을 연하여 생기지만 비추는 일도 없나니, 이것을 혜업(慧業)이라 이름 하느니라.
둘째는 공덕업(功德業)이니, 실지(實智)의 유제(有諦) 중에서 나오지만 무위무루(無爲無漏)이니라. 백만 아승기 공덕을 모으기 때문에 이름 하여 공덕업이라고 하느니라. 초성(初聖)으로부터 그 이상까지를 나타내 수생(受生) 하지만, 변이(變易) 하기 때문에 지난 것을 마치면 새것을 짓지 않으며, 원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목숨이 백 겁, 천 겁 동안 머물며 변화하여 일체를 생(生)하느니라.
보살영락본업경 하권
4. 석의 품(釋義品)
부처님께서 경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앞에서 뜻[義]과 모습[相]이 무엇이냐고 말한 것은, 이른바 십 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 회향(十廻向)ㆍ십지(十地)ㆍ무구지(無垢地)ㆍ묘각지(妙覺地)의 뜻과 모습이니 이제 마땅히 설하리라.
불자여, 이 금강해장영락경(金剛海藏瓔珞經) 중에서 현성(賢聖)의 모습과 뜻을 해석하리라.
뜻은 체(體)로부터 나오는데 체는 보살의 체와 이이며 이것을 공덕이라 이름 하느니라.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일체 보살로 체와 의를 삼기 때문에 체의(體義)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발심주(發心住)란 이 사람이 처음엔 완전히 속박된 범부 상태로부터 아직 삼보와 성인(聖人)을 알지 못하고, 아직 좋고 나쁜 인(因)과 과(果)도 알지 못하며, 일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느니라. 불자여, 알지 못하는 범부의 처음 경지로부터 불보살의 교법을 만나 그 속에서 일념의 믿음을 일으켜 문득 보리심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그때 주전(住前)으로써 신상(信想) 보살 또는 가명(假名) 보살 또는 명자(名字) 보살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그 사람은 간략히 십심(十心)을 행하나니, 이른바 신심(信心)ㆍ진심(進心)ㆍ염심(念心)ㆍ혜심(慧心)ㆍ정심(定心)ㆍ계심(戒心)ㆍ회향심(廻向心)ㆍ호법심(護法心)ㆍ사심(捨心)ㆍ원심(願心)이니라.
다시 십심(十心)을 행하나니, 이른바 십 선법(十善法)ㆍ오계(五戒)ㆍ팔계(八戒)ㆍ십계(十戒)ㆍ육바라밀계(六波羅蜜戒)이니라. 이 사람이 다시 십선(十善)을 행하면서 일 겁(劫)ㆍ가 겁ㆍ삼 겁 동안에 십신(十信)을 닦으면 육천(六天)의 과보를 얻느니라. 십선에 삼품(三品)이 있나니, 상품(上品)은 철륜왕(鐵輪王)으로서 일체를 교화하고, 중품은 속산왕(粟散王)이요, 하품은 인중왕(人中王)이니 일체 번뇌를 구족 하면서 한량없는 선업을 지어 모으며, 물러가기도 하고 나아가기도 하지만 만약 선지식을 만나서 불법을 배우되 혹은 일 겁ㆍ가 겁 동안 하게 되면 바야흐로 발심주의 지위에 들어가느니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항상 삼계에 빠져나올 수 없나니, 퇴분(退分)에 머무는 선근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으니라.
불자여, 발심주란 이것이 뛰어난 진분선근(進分善根)의 사람이니라. 만약 일 겁ㆍ가 겁ㆍ일 항(一恒)ㆍ가 항ㆍ삼 항의 부처님 처소에서 십신심(十信心)을 행하고 삼보를 믿으며, 항상 팔만 사천의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일체의 행과 일체의 법문을 다 익히고 받아들여 행하고, 항상 신심을 일으켜 사견(邪見)과 십중(十重)과 오역(五逆)과 팔도(八倒)를 짓지 않으면, 난처(難處)에 태어나지 않고 항상 불법을 만나 문혜(聞慧)를 많이 넓히고 방편을 많이 구하며 비로소 공계(空界)에 들어가 공성(空性)의 지위에 머물게 되므로 이름 하여 주(住)라고 하느니라. 공(空)의 이치에 대해 지혜의 마음으로써 옛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일체 공덕을 배우되 스스로의 마음으로 짓지 않고 또한 일체 공덕을 생하지 않기 때문에 지(智)라고 할 수 없고 다만 주(住)라고 할 수 있느니라.
불자여, 치지주(治地住)란 항상 공(空)의 마음을 따라 팔만 사천의 법문을 청정케 해 깨끗하므로 치지주라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일체 행을 장양(長養) 하기 때문에 수행주(修行住)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부처님 가문에 태어나게 되면 종성(種性)이 청정하기 때문에 생 귀주(生貴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무량한 선근을 많이 배우기 때문에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여섯 번째 반야를 성취하기 때문에 정심주(正心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무생필경공계(無生畢竟空界)에 들어가 마음 마음마다 항상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행하기 때문에 불퇴주(不退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발심해서부터 전도된 생각을 내지 않고 삿된 마군의 마음을 일으켜 보리심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동진주(童眞住)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불 와(佛王)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가운데에서 깨달음[解]을 내고 마땅히 불위(佛位)를 이어야 하기 때문에 법왕자주(法王子住)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위의 아홉 가지에서 공을 관하고 무생심(無生心)에 최상을 얻기 때문에 관정주(灌頂住)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불자여, 관정심(灌頂心)에서 더욱 나아가 오음의 법성공위(法性空位)에 들어가 다시 팔만 사천의 반야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십행(十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여기에서 비로소 법공(法空)에 들어가 외도의 삿된 논리에 전도되지 않고 정위(正位)에 들어가므로 환희행(歡喜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항상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모든 중생을 법으로써 이익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요익행(饒益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법의 실성(實性)으로 법인심(法忍心)을 얻어서 아(我)가 없고 아소(我所)가 없으므로 무진한행(無瞋恨行)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항상 공덕에 머물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무진행(無盡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목숨을 마칠 때에 무명(無明)의 귀신에게 어지럽히거나 혼탁하게 되지 않으며 바른 생각[正念]을 잃어버리지 않으므로 이치란행(離癡亂行)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태어날 때마다 항상 불국토 가운데에 태어나므로 선현행(善現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아(我)에 있어 아가 없고 [無我] 나아가 일체법이 공하므로 무착행(無箚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삼세의 불법 중에서 항상 공경하여 수순 하므로 존중행(尊重行)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법을 설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변화시키면 사물의 법도가 되므로 선법행(善法行)이라 하느니라. 불자여, 이제(二諦)는 같은 것[如]도 아니고 상(相)이 아니고 비상(非相)도 아니므로 진실행(眞實行)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불자여, 진실한 마음에서 중생공(衆生空:인공(人空))과 무아공(無我空:법공(法空))에 들어가지만 이공(二空)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느니라. 일관상(一觀相) 일합상(一合相)으로써 백만억의 반야바라밀의 공관을 학습하므로 앞뒤의 온갖 마음을 회향시켜 바꿔놓고, 관(觀)이 오로지 밝고 밝아 적멸하며 상지명관법(上智明觀法)을 장양 하므로 인을 돌려서 과로 향하게 하느니라. 또 무량한 마음을 버리지도 않고 받지도 않나니 십 회 향법(十廻向法)이 이와 같으니라. 불자여, 항상 무상심(無相心) 가운데서 육도(六道)를 행하여 과보에 들어가되 받음이 없이 [不受] 온갖 받음을 받아 회향시켜 바꿔놓고 전변 하여 교화시키기 때문에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일체법을 관하더라도 다만 수(受)가 있고 다만 용(用)이 있고 다만 이름[名]만 있어서 생각 생각에 머물지 않으므로 불괴회향(不壞廻向)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삼세제불의 법을 모든 때에 언제나 행하므로 등일체불회향(等一切佛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대원력으로써 일체 불국토에 들어가서 일체불을 공양하므로 지 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상주(常住)하는 삼보로써 앞의 사람에게 수여하기 때문에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상선(相善)과 무루선(無漏善)을 학습하여 행하되 둘이 아니므로 수순평등선근회향(隨順平等善根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선악의 부모에는 둘이 없어 일상일합상(一相一合相) 임을 관하기 때문에 수순등관일체중생회향(隨順等觀一切衆生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항상 유(有)와 무(無)의 이제(二諦)가 일체법과 일합상임을 비추므로 여상회향(如相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제법이 둘이 아니며, 반야는 무생(無生)이며, 이제가 평등하여 과거(過去) 일합상이며, 현재(現在) 일합상이며 미래(未來) 일합상이므로 무박해탈회향(無縛解脫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일체법은 제일의 제 중 도무상(第一義諦中道無相)이어서 일체법이 모두 한결같이 비추는 상(相) 임을 깨닫기 때문에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이 서른 가지 마음의 뜻과 해석이 무량무변하나니, 일체 범부의 지혜로는 능히 헤아릴 수 없으며, 오직 시방의 제불(諸佛)과 일체 보살만이 그 길에서 노니시느니라.
불자여, 그대는 앞에서 어떤 것을 지(地)라고 이름 하느냐고 물었느니라. 불자여, 지(地)는 지닌다 [持]고 이름 하나니 일체 백만 아승기 공덕을 지니느니라. 또는 생(生)이라고 이름 하나니, 일체 인과를 이루기 때문에 지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범부의 행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문에 태어나서 보살 위(菩薩位)를 잇고 성중(聖衆) 속에 들어감에 사마(四魔)가 무너뜨리지 못하고, 유ㆍ무의 양 끝을 평등하게 서로 비추고 큰 믿음이 비로소 만족하며, 무생중도제일의 제관(無生中道第一義諦觀)을 배워 익히느니라. 그 위로이지(二地)ㆍ삼지 나아가 십 일지에 이르러 밝게 법문을 관하고 마음 마음마다 적멸하는 법류(法流)의 물속에서 일상(一相) 무상(無相)의 이신(二身)이 거스름이 없어 불토(佛土)에 동등하게 통하므로 환희지(歡喜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정무상선(正無相善)으로써 중생공(衆生空)에 들어가 만불(萬佛)의 세계에 여섯 가지로 신통 변화를 나타내고, 공으로써 무위(無爲)와 동등하므로 이구지(離垢地)라 하느니라.
불자여, 광혜신인(光慧信忍)하여 옛 부처님의 도(道)를 수습하나니, 이른바 십이부경(十二部經)이니라. 수다라(修多羅)ㆍ기야(祇夜)ㆍ비가라나(毘伽羅那)ㆍ가타(伽陀)ㆍ우다나(憂陀那)ㆍ니다나(尼陀那)ㆍ아바다나(阿波陀那)ㆍ이제목다가(伊帝目多伽)ㆍ사타가(闍陀伽)ㆍ비불략(毘佛略)ㆍ아부타달마(阿浮陀達摩)ㆍ우바제사(憂波提舍) 등 이러한 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신통 변화의 광명이 빛나므로 명지(明地)라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크게 무생(無生)에 수순하여 인(忍)을 일으키고, 일체법과 이제(二諦)의 상을 관하여 위로 부처님의 공덕을 관하고 아래로 육도 중생을 관하여 대자(大慈) 관법으로 법을 설하여 기쁨을 주고, 대비(大悲)의 관법으로써 삼고(三苦)의 중생을 구제하고, 대희(大喜)의 관법으로써 전인(前人)이 기쁨 얻는 것을 기뻐하고, 대사(大捨)의 관법으로써 일체중생을 모두 평등에 들어가게 하는 일곱 가지 관법에 들어가므로 염지(焰地)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수순하고 인내하며 도를 닦으면 삼계의 무명(無明)ㆍ의(疑)ㆍ견(見) 등의 일체가 모두 공 아님이 없기에 팔변(八辯)의 공덕과 오명론(五明論)에 들어가느니라. 이른바 팔변이란 사변(四辯)과 인(因)ㆍ과(果)ㆍ내도(內道)ㆍ외도변(外道辯)이며, 오명론(五明論)이란 내(內)ㆍ외(外:工巧明)ㆍ방도(方道:醫明)ㆍ인과(因果:因明)ㆍ귀사(鬼師:聲明)이니 이 모두를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난승지(難勝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위로 제법에 수순하여 과거의 일체법과 일합상이며, 현재의 일체법과 일합상이며, 미래의 일체법과 일합상이어서 법계 인연의 적멸이 둘이 아님을 관하기 때문에 현전지(現前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무생인(無生忍)의 제법관(諸法觀)은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번뇌가 없는 것도 아니며, 일생(一生)ㆍ일멸(一滅)ㆍ일과(一果)와 삼계 최후의 일신(一身)이라도 한 번 들고 한 번 나옴 [一入一出]에 무량 공덕을 모으고, 항상 상지(上地)를 향하면서도 생각 생각이 적멸하기 때문에 원행지(遠行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무생관(無生觀)으로써 삼계의 과보를 버리고 변화된 과가 작용하는 가운데 인무상(忍無相)의 지혜에 들어가며, 유에서 나와 무에 들어가 무상(無相)을 화현(化現)하고 스스로의 몸에서 당과(當果)를 보느니라. 이때 모든 부처님께서 이마를 만지며 설법해 주시면 몸과 마음이 따로 행해져서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부동지(不動地)라 하느니라.
불자여, 다시 위와 같은 관으로써 불화(佛化)를 온갖 빛으로 드러내고 무생인(無生忍)의 도에 들어가 일체 불신(佛身)을 나 투기 때문에 묘혜지(妙慧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보살이 이 때 중도제일의 제와 대적인하품(大寂忍下品) 속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행처(行處)를 행하고 천보상(千寶相)의 연꽃 위에 앉아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부처님께서 행하신 교화의 공덕을 배우고, 두 가지 습기를 끊고 조복 하여 큰 믿음을 성취하느니라. 진제(眞際)와 한 가지로 법계에 평등하고 이제(二諦) 일상(一相)의 일체 공덕을 갖추고 중생의 근(根)에 들어가 무량한 영락의 공덕을 일시에 평등하게 일체 형상을 나 투기 때문에 법운지(法雲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보살이 그때 대적문중품인관(大寂門中品忍觀)에 머물러 공행(功行)이 만족하고, 큰 산의 누대[大山臺]에 올라 백천 삼매에 들어가 부처님의 의용(儀用)을 모으지만, 다만 누적된 과[累果]의 무상한 생멸만은 있느니라. 온갖 마음의 무위행이 십자를 지나고, 요해(了解)하는 것이 부처님과 마찬가지라 부처의 자리에 앉느니라. 그 지혜는 두 가지의 상(常)ㆍ무상(無常)과 일체의 법의 경계를 보나니,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부처님과 같이 됨을 이름 하여 부처님을 배운다고 하느니라. 하지(下地)의 일체의 보살은 이 보살에 대해 따로 알 수가 없나니, 부처에 있어서는 보살이라고 이름하고, 하지의 보살에게 있어서는 부처라고 이름 하느니라. 왜냐 하면 이 보살이 대변력(大變力)으로써 목숨이 백 겁, 만 겁을 머무는 동안에 부처님의 교화를 지어 나타내되, 한 번 태어나고, 도를 얻고, 법륜을 전하고, 무여멸도(無餘滅度)에 들어가고, 팔법륜(八法輪)을 설하는 것이 부처를 닮았으되 부처가 아니며, 모든 것이 부처와 같기 때문에 나아가고 멈추는 위의 가 일체법과 같으니라. 이 백천 삼매 중에 머물러 이와 같이 부처의 행을 하기 때문에 금강삼매에 들어가며, 일상무상(一相無相)하고 적멸무위(寂滅無爲)가 되기 때문에 무구지(無垢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묘관상인(妙觀上忍)은 매우 적정하고 무상(無相)인데 다만 일체중생의 연으로 선법(善法)을 생하기 때문에 또한 스스로 일체 공덕을 가지기 때문에 불장(佛藏)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또한 일체법을 고요히 비추되[寂照] 부처로부터 이하의 일체 보살은 조적(照寂)하나니, 이런 까닭에 불자여, 내가 옛날에 제사선(第四禪) 중에서 팔억의 범천왕을 위하여 여래는 무심무색(無心無色)으로서 또한 일체법을 적조(寂照)한다고 설하였느니라.
불자여, 내 이제 간략히 뜻을 설하고 이 대중을 위하여 선법행(善法行)을 여노라.”
5. 불모품(佛母品)
이때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와 보살, 둘은 최초에 비추는 지혜가 무엇으로부터 생깁니까? 적조(寂照)와 조적(照寂)의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 이제(二諦)의 법성(法性)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유(有)입니까, 무(無)입니까? 제일의제는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유제(有諦)ㆍ무제(無諦)ㆍ중도제일의 제(中道第一義諦)란 이것이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어머니이니라. 나아가 일체법도 또한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어머니이니라. 그 까닭은 모든 불보살은 법에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이제(二諦)에서 세제(世諦)는 유(有)이므로 불공(不空)이며, 무제(無諦)는 공(空)이므로 불유(不有)이니라. 이제는 항상 그러하기 때문에 불일(不一)이며, 성스럽게 비추면 공이므로 불이(不二)이며, 부처가 있거나 부처가 없어도 법계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이며, 제일(第一)은 둘이 아니므로 불유이며, 부처가 없음과 부처가 있음이 법계의 두 가지 모습이므로 불일이며, 제법은 항상 청정하므로 불이이며, 제불은 도리어 범부를 위하여 존재하므로 불공이며, 무가 없기 때문에 불유이며, 공은 실재하기 때문에 불일이며, 본제(本際)가 불생(不生)이기 때문에 불이이며, 제법의 모습은 거짓 이름[假名]에 불과해 파괴되지 않으므로 불공이며, 제법은 곧 제법이 아니므로 불유이며, 법이 법이 아니므로 불이이며, 비법이 아니므로 불일이니라.
불자여, 이제(二諦)의 뜻은 하나가 아니면서 또한 둘도 아니며, 항상 하지도 않고 또한 단멸하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아니고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은 곧 성스러운 지혜란 둘이 없다는 것이니, 둘이 없기 때문에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어머니가 되느니라.
불자여, 시방의 무극찰토(無極刹土)에 있는 모든 부처님께서도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나니, 내 이제 이 대중을 위하여 간략히 명월영락경(明月瓔珞經) 가운데 이제(二諦)의 중요한 뜻을 설하리라.”
그때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모든 불보살의 대방 편과 평등한 지혜로써 모든 법계를 비추는 것은 돈등각(頓等覺)입니까? 점점각(漸漸覺)입니까? 무명장(無明藏)과 마음은 하나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겁량(劫量)의 멀고 가까움은 다시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그대는 과거 칠 불(七佛)의 법 중에서 이미 하나하나 물었기 때문에, 이제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다만 이 대중 십사억 사람을 위하여 이들이 이 법 중에서 다시금 결정요의(決定了義)를 습득하기를 원하는 까닭에 이와 같이 물었느니라.
불자여, 내가 이제 십사억 대중을 위하여 금강의 입으로써 결정요의를 설하리라. 불자여, 나의 옛날 모임 중에 일억 팔천의 무구(無垢) 대사가 있었느니라. 앉은자리에서 곧 법성의 근원을 통달하고 당장에 둘이 없는 일체법의 일합상(一合相)을 깨닫고, 법회에서 나와서 각각 시방세계에 앉아 보살영락대장(菩薩瓔珞大藏)을 설하였느니라. 그때에 앉아 있던 대중 일억 팔천은 세존을 뵈었는데 돈각여래(頓覺如來)라고 이름 했느니라.
각각 백보(百寶)로 장엄한 사자후(獅子吼)의 자리에 앉으시니, 그 때 무량한 대중들도 또한 한 자리에 앉아서 등각여래(等覺如來)께서 영락법장(瓔珞法藏)을 설하심을 들었느니라. 따라서 점각(漸覺)의 세존은 없고 다만 돈각여래만이 있나니, 삼세의 제불이 설하시는 바와 다름이 없이 지금 나도 또한 그와 같이 설하느니라.
불자여, 그대가 앞에서 ‘무명과 마음이 하나인가?’라고 말한 그것은 그렇지 않느니라. 만약 명료히 이해하는 것과 무명의 모든 견해가 하나의 모습[一相]이라면 마땅히 얽매임이나 풀려남이 없고, 범부와 부처가 둘이 아니리라. 왜냐 하면 번뇌가 동일한 체상(體相)이기 때문이며, 한 마음에서 공동으로 생하고 멸하는 것은 동시로서 별개가 아니고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만약 얽매임과 풀려남이 하나의 모습이라면 사대(四大)가 하나일 것이고, 육미(六味)가 마땅히 다르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나 크기가 다르고 맛이 다르기 때문에 얽매임과 풀려남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니라.
불자여, 일체 보살이 범부일 때에 일체의 번뇌를 갖고 있었으나, 끊을 때는 거친 부분이 먼저 없어지고 미세한 부분이 뒤에 없어지느니라. 만약 일심과 번뇌가 하나라면 응당 밝고 어두움에 둘이 있을 수 없나니, 불자여, 다시 가까운 것으로써 먼 것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범부의 착한 마음속에도 오히려 불선(不善)이 없거늘, 하물며 무상(無相)한 마음 가운데 무명이 있겠느냐?
불자여, 또한 선악이 일심이라고 하는 이것은 병사왕(沙王)의 나라에 있던 외도(外道) 안 타사(安陀師)의 게송에서 ‘밝음과 어둠은 하나의 모습이며, 선과 악이 일심이다’라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일뿐이니라.
불자여, 내 법의 바른 뜻은 ‘선악을 동일하게 행하면 속박이 있고 해탈이 있으며, 범부가 있고 부처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느니라. 억 겁 동안에 상속하고 동일하게 행하더라도 선악이 동일한 마음이 될 수 없나니, 옛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무상(無相)의 지화(智火)가 무명의 어둠을 소멸한다’고 하셨느니라. 또한 선악의 둘은 별개인데 동일한 과보를 말하는 것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이니라. 일체의 선은 불과(佛果)를 받고, 무명은 유휘 생멸의 과를 받나니, 그러므로 선과(善果)는 선인(善因)에서 생기고 악과(惡果)는 악인(惡因)에서 생기므로, 선은 생멸의 과를 받지 않고 오직 항상 부처님의 과를 받는다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만약 범부와 성인의 일체 선(善)은 모두 무루(無漏)라고 이름 한다면 누과(漏果)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등지게 하기 위한 것이니라. 원인[因]을 연하여 유위의 과보를 일으키는 것이지 무루가 되는 것이 아니니라. 인(因)이란 무명과 업의 과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삼수 삼고(三受三苦)라 하나니, 고고(苦苦)ㆍ행고(行苦)ㆍ괴고(壞苦)와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사수(捨受)이니라. 두 가지 수는 선의 원인을 조건으로 하는 과이고, 고수는 악의 원인을 조건으로 하는 과이니 일체개고(一切皆苦)이며, 무명을 근본으로 하느니라.
불자여, 그대가 앞에서 ‘일체 보살이 도를 행하는 겁 수에 멀고 가까움’이라고 말한 것은, 비유하면 일 리(里)ㆍ가 리 나아가 십 리까지의 돌에 방광(方廣)도 또한 그러하니라. 범천(梵天)의 옷의 무게가 삼 수(銖)인데 인간계의 일월의 햇수로 삼 년에 한 번씩 스쳐서 이 돌이 곧 다 없어지는 것을 일 소겁(小劫)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또는 일 리, 이 리 나아가 사십 리까지도 소겁이라 하느니라. 팔십 리의 돌에 방광도 또한 그와 같은데 범천의 옷의 무게가 삼 수인 것을 가지고 곧 범천계의 백보광명주(百寶光明珠)를 일월의 햇수로 하여 삼 년에 한 번 스치는데 이 돌이 곧 없어지는 것을 중겁(中劫)이라 하느니라. 또 팔백 리의 돌에 방광도 또한 그와 같은데, 정거천(淨居天)의 옷의 무게가 삼 수인 것을 가지고 곧 정거천의 천보광명(千寶光明)의 거울을 일월의 햇수로 하여 삼 년에 한 번 스쳐서 이 돌이 곧 없어지는 것을 일대아승기겁(一大阿僧祇劫)이라 하느니라.
불자여, 겁 수(數)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일 리, 이 리 나아가 십 리까지의 돌이 다함을 일 리 겁(劫), 이 리 겁이라 하고, 오십 리의 돌이 다함을 오십 리 겁이라 하고, 백 리의 돌이 다함을 백 리 겁이라 하느니라. 천 리의 돌이 다함을 천 리 겁이라 하고, 만 리의 돌이 다함을 이름 하여 만 리 겁이라 하느니라.
불자여, 일체 현성이 이 수량에 들어가 일체 법문을 닦고 시간이 오래고 가까움에 따라 불과(佛果)를 얻고 그 수가 백 겁이 되면 곧 등각(等覺)을 얻느니라. 만약 일체중생이 이 수에 들어간다면 불과를 얻는 것이 멀지 않을 것이며, 만약 들어가지 않은 이는 보살이라 이름 하지 않느니라.
불자여, 법문이란 이른바 십신심(十信心)이니, 이것이 일체 행의 근본이니라. 그러므로 십신심 중에 하나의 신심에 십품(十品)의 신심이 있으면 백법명문(百法明門)이 되며, 또 이 백법명심(百法明心) 중에서 일심에 백심이 있으므로 헌법 명문이 되고, 또 천법 명심 중에서 일심에 천심이 있으므로 만법 명문이 되나니, 이와 같이 늘여 나가다 보면 무량한 명(明)에 이르며, 더욱 전전하여 상상(上上)의 법에 승진(勝進)하므로 명명법문(明明法門)이 되느니라. 백만 아승기 공덕과 일체 행은 다 이 명문(明門)에 들어가느니라.”
6. 인과품(因果品)
경수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현성의 정법(正法)은 이미 충분히 설하여졌습니다. 그렇지만 인과의 두 가지 모습은 마땅히 어떠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시는 인(因)은 이른바 십 반야바라밀이니 이것이 백만 아승기 공덕의 근본이니라. 부처님과 보살이 또한 그중에 포함되어 내재해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십법(十法)을 금강지혜해장(金剛智慧海藏)이라고 하나니 일체광명공덕(一切光明功德)의 행을 출생하느니라.
불자여, 십 반야바라밀이란 보시를 행하는 것에 따라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재물이고, 둘째는 법이고, 셋째는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보시하는 것이니라.
계(戒)에는 세 가지 연이 있나니, 하나는 자성계(自性戒)이고, 둘째는 수선법계(受善法戒)이고, 셋째는 이익중생계(利益衆生戒)이니라.
인(忍)에도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고행을 참고, 둘째는 외악(外惡)을 참고, 셋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참는 것이니라.
정진(精進)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큰 서원의 마음을 일으키고, 둘째는 방편으로 나아가며, 셋째는 중생을 권고하여 교화시키는 것이니라.
선정(禪定)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 선정은 어지러운 모습을 일으키지 않으며, 둘째 선정은 모든 공덕을 낳으며, 셋째 선정은 중생을 이롭게 하느니라.
지혜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유제(有諦)를 비추고, 둘째는 무제(無諦)를 비추고, 셋째는 중도제일의 제(中道第一義諦)를 비추느니라.
서원[願]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자행(自行)의 서원이고, 둘째는 신통의 서원이고, 셋째는 바깥을 교화하는 서원이니라.
방편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향과(向果)에 나아가고, 둘째는 유무를 교회(巧會)하며, 셋째는 일체법을 버리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것이니라.
신통력(神通力)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보통(報通)이고, 둘째는 수정통(修定通)이고, 셋째는 변화통(變化通)이니라. 무구혜(無垢慧)에 세 가지 연이 있나니, 첫째는 무상지(無相智)이고, 둘째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이고, 셋째는 변화지(變化智)이니라.
불자여, 십지(十智)에서 일체의 공덕행을 낳느니라. 일곱 가지 재물[七財]은 신(信)ㆍ시(施)ㆍ계(戒)ㆍ문(聞)ㆍ혜(慧)ㆍ참(慚)ㆍ괴(愧)인데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잘 쓰면 성불할 수 있기 때문에 재물이라고 하느니라.
사섭(四攝)은 이익(利益)ㆍ유어(濡語)ㆍ시법(施法)ㆍ동사(同事)를 말하며, 사 무애변(四無碍辯)은 법변(法辯)ㆍ의변(義辯)ㆍ어변(語辯)ㆍ요설변(樂說辯)인데 이 네 가지 변재의 법 가운데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기 때문에 무애(無礙)라고 이름 하느니라. 걸림이 없는 지혜[無礙智]에서 지혜를 내기 때문에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으며,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으며,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 의지하고 아는 것[識]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이름 하는 것이니라.
지혜에서 십력(十力)ㆍ사무 외(四無畏)ㆍ육통(六通)ㆍ삼명(三明)의 백만억 아승기의 공덕을 내며 순서대로 지혜를 낳느니라. 능히 여덟 가지 세제(世諦)의 일체법을 연하는데, 사제(四諦)와 이제(二諦)와 십 이연(十二緣)의 제법은 인연에 의해 성립된 임시의 법[假法]이므로 아(我)가 없고 법만이 있을 뿐이니라. 상대(相待)하여도 일체상은 공허하고 상속하므로 한결같이 공하다고 이름 하느니라. 그리고 불가득이므로 인이 생기면 그것이 모여서 일어나는 즉, 법은 사실[實]을 인연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이 모여서 유(有)를 생성하여 법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법은 임시로 만들어진 법이며, 수(受)는 기용(起用)이라고도 하고 취법(聚法)이라고도 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여덟 가지 유위법과 일체법은 본지(本智)가 비추는 곳[所照處]이니라.
다시 이 지(智)에서 능히 오 개(五蓋)인 탐(貪)ㆍ진(瞋)ㆍ수(睡)ㆍ도(掉)ㆍ의(疑)와 사식(四食)인 촉(觸)ㆍ식(識)ㆍ사(思)ㆍ단식(段食)과 사생(四生)인 난생ㆍ태생ㆍ습생ㆍ화생과 십악(十惡)ㆍ오역(五逆)ㆍ팔도(八倒)ㆍ삼장(三障)ㆍ팔난(八難)ㆍ십삼 번 뇌(十三煩惱)ㆍ육도(六道)ㆍ삼계(三界)ㆍ육십이 견(六十二見)ㆍ사류(四流)ㆍ사박(四縛)ㆍ사취(四取)ㆍ구번뇌(九煩惱)ㆍ칠 식 주(七識住)ㆍ사결(四結)을 모두 없애는데, 제거되는 모든 것을 다 불선(不善)이라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십지경(十智境)이 없어지게 되는 일체 공덕을 다 불인(佛因)이라고 이름 하나니, 그대는 마땅히 받고 마땅히 행하여야 하느니라.
불자여, 그대가 앞에서 말한 과(果)라고 하는 것은, 오현(五賢)의 보살이 모든 도법을 수행하여 일대과(一大果)를 증득하므로 법성체(法性體)라고도 하느니라. 그 법성체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대(大)도 아니고 소(小)도 아니며, 신(身)도 아니고 심(心)도 아니며, 상(相)도 아니고 삼세(三世)도 아니며, 하늘[天]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 이름[名字]도 아니고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도 아니며, 육도(六道)도 아니고 육식(六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수량(數量)의 법도 아니고 일체의 법상(法相)을 지나며, 복전(福田)도 아니고 귀신(鬼神)도 아니며, 동정(動靜)도 아니고 생멸(生滅)도 아니며, 제일(第一)도 아니고 오색(五色)도 아니며, 육 대(六大)도 아니고 토전(土田)도 아니며, 법계도 아니고 삼계도 아니며, 박해(縛解)도 아니고 명암(明暗)도 아니며, 득법(得法)도 아니어서 적연(寂然)하여 무위(無爲)이니라. 일체 법의 밖이라서 마음으로 헤아릴 길이 없으므로 이곳을 측량하기 어려우니라. 유제(有諦) 중에 있어서는 겁량(劫量)의 행을 수행함에 또한 과보가 있느니라.
불자여, 두 가지 법신이 있나니, 하나는 과극(果極) 법신이고, 다른 하나는 응화(應化) 법신이니라. 그 응화 법신은 그림자가 형상을 따름과 같이 과신(果身)이 항상 하므로 응신도 또한 항상 그러하니라.
불자여, 옛날의 모든 부처님은 두 가지 몸의 길[道]이 하나였느니라. 불자여, 일체 보살에게는 두 가지 몸이 다 무상(無常)한 몸이니라. 불자여, 일체 범부들에게도 또한 두 가지 몸이 있나니, 첫째는 보신(報身)이고, 둘째는 방편신(方便身)이니라. 보신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방편신은 함께 일체중생에게 있는 것이니라. 불자여, 일체 보살과 일체중생에게는 모두 두 가지 몸이 있다고 모든 여래께서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시므로 결정요의(決定了義)라고 이름 하느니라.
불자여, 부처님의 의공덕신(義功德身)은 모든 부처님의 길이 같아서 과법(果法)도 다르지 않나니, 이른바 십 호(十號)이니라.
첫째는 여래(如來), 둘째는 응공(應供), 셋째는 정변지(正遍知), 넷째는 명행족(明行足), 다섯째는 선서(善逝), 여섯째는 세간해(世間解), 일곱째는 무상사(無上士), 여덟째는 조어장부(調御丈夫), 아홉째는 천인사(天人師), 열째는 불타(佛陀)인데 함께 십덕(十德)을 향하므로 일체중생이 공양하는 바가 되느니라.
다시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 있나니, 이른바 몸에 잘못이 없고, 생각에 잘못이 없고, 입에 잘못이 없고, 다른 생각이 없고, 정함 없는 [不定] 마음이 없고, 다 알고서 버리지 않음이 없으며, 심념(心念)이 줄어듦이 없고, 의욕[欲]이 줄어듦이 없고, 정진이 줄어듦이 없고, 지혜가 줄어듦이 없고, 해탈이 줄어듦이 없고, 해탈지견이 줄어듦이 없고, 신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고, 구업이 지혜를 따라 행하고, 의업이 지혜를 따라서 행하고, 지혜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아는 데에 걸림이 없느니라.
다시 십력(十力)이 있나니, 이른바 처비처력(處非處力)ㆍ업력(業力)ㆍ정력(定力)ㆍ근력(根力)ㆍ욕력(欲力)ㆍ성력(性力)ㆍ과력(果力)ㆍ천 안력(天眼力)ㆍ숙명력(宿命力)ㆍ결진력(結盡力)이니라. 그리고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가 있으며, 나는 일체지인(一切智人)이며, 나는 이미 번뇌가 다하여 무루(無漏)이며, 번뇌도(煩惱道)와 번뇌장도(煩惱障道)를 벗어났으며, 천신(天身)ㆍ천안(天眼)ㆍ천이(天耳)ㆍ누진(漏盡)ㆍ숙명(宿命)ㆍ타심(他心)의 여섯 가지 신통력이 있으며, 오안(五眼)ㆍ오분법신(五分法身)ㆍ무죄삼업(無罪三業)ㆍ불보법승(佛寶法僧)ㆍ멸제해탈(滅諦解脫)ㆍ영지일승(靈智一乘)ㆍ금강보장(金剛寶藏)ㆍ법신장(法身藏)ㆍ자성청묘장(自性淸妙藏)ㆍ삼달(三達)ㆍ삼무위(三無爲)ㆍ삼명(三明)ㆍ일제(一諦)ㆍ일도(一道)ㆍ독법(獨法)ㆍ대락무위(大樂無爲)이니라.
불자여, 모든 성과무량공덕장(聖果無量功德藏) 가운데 불가설 불가설(不可說不可說)의 과(果)가 있나니 이 과는 하나의 길[一道]이니라. 불자여, 과의 체성[果體]이 원만하여 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고, 이치가 두루 머물지 않음이 없으며, 중도제일의 제의 청정국토에 있어 다함이 없고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느니라. 일체 법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체(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체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 그것은 일조상(一照相)ㆍ일합상(一合相)ㆍ일체상(一體相)ㆍ일각상(一覺相)이며 밝고 청정하여 둘이 없느니라.
불자여, 이 과(果)는 독법원만(獨法圓滿)하여 항상 머무나니, 일과(一果)의 체상에 헤아릴 수 없는 뜻이 있고, 그 낱낱의 뜻에 헤아릴 수 없는 덕이 있으며, 그 낱낱의 덕에 헤아릴 수 없는 이름이 있느니라. 의과(義果)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멸제(滅諦)의 상ㆍ락ㆍ아ㆍ정과 열여덟 가지 함께 하지 않는 일체 공덕을 모두 의과라고 이름 하기 때문에 과과(果果)라 하기도 하느니라.
불자여, 뜻과 덕과 이름의 세 가지는 모두 교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세 구(句)의 뜻이 있느니라. 만약 현인과 일체중생이 이 세 구를 명료히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은 이미 삼세제불에게 부처님의 직위(職位)를 받은 것이니라.
불자여, 그 과는 말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나, 이름과 형상[名相]의 법 가운데에서 이름과 형상의 법으로 설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일과(一果)를 체(體)라 이름하고 의(義)를 과과(果果)라 이름 하는데, 이 의과(義果)는 원과(圓果)를 출생하므로 과과라 하느니라.
불자여, 내가 이러한 인과를 백천 겁 동안 설한다 하더라도 다할 수 없나니, 너희들 모든 대중은 스스로 잘 수지 할지니라.”
7. 대중수학품(大衆受學品)
이때 경수보살이 모든 부처님께 경례하고 대중의 가르침을 받들고 간략히 요의 칠 회(了義七會)에서 말씀하신 바를 묻고, 삼보장(三寶藏)을 믿고 따르며, 범법이 끊어짐이 없게 하고, 세상의 명리(名利)를 위하지 않고 법이 오래도록 머물게 하려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위에서 이미 인(因)ㆍ과(果)ㆍ현(賢)ㆍ성(聖)의 일체 공덕장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대중에 십사 나유타의 사람이 있사오나, 누가 능히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서도 수학(受學)하고 수도(修道)하되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실행하고 차례로 보살 위에 들어가는 자이겠습니까?”
그때에 석가모니불께서는 정수리의 상투[頂髻]에서 일체 부처님의 광명과 일체 보살의 광명을 놓으시고, 다시 시방으로 각각 백억 불국토에 계신 부처님과 보살들을 모으셨다. 모두 다 모이고 나자 곧 이 대중 속에 있는 문수사리(文殊師利) 보살ㆍ보현(普賢) 보살ㆍ법혜(法慧) 보살ㆍ공덕림(功德林) 보살ㆍ금강당(金剛幢) 보살ㆍ금강장(金剛藏) 보살ㆍ선재동자(善才童子)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 대중 가운데 경수(敬首) 보살이 능히 삼관법계(三觀法界)와 제불의 자성청정도(自性淸淨道)와 일체 보살이 닦는 바의 명관법문(明觀法門)을 묻는 것을 보았느냐? 너희들 일곱 보살은 각각 백만의 대중을 거느리고 마땅히 이 같은 법문을 받아서 관하고 배워야 하느니라.
불자여, 내가 이제 다시 거듭 이 같은 명관법(明觀法)을 설하나니, 이른바 육입차제(六入次第)의 도이니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 모든 도를 닦으며 대중에게 경계하고 타일러 수용케 하고 조복 하여 행하도록 할지니라.
불자여, 만약 일체중생이 처음으로 삼보의 바다로 들어감에는 믿음으로써 근본으로 삼고, 부처님 가문에 머물러 사는 데 있어서는 계(戒)로써 근본을 삼느니라. 불자여, 처음 수행하는 보살은 혹은 믿음이 있는 남자[信男]나 믿음이 있는 여자[信女] 가운데 모든 근이 갖추어지지 않은 황문(黃門)ㆍ음남(婬男)ㆍ음녀(婬女)ㆍ노비(奴婢)ㆍ변화(變化)의 사람이라도 계를 받게 해야 하나니, 모두 마음이 있어서 진리의 길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처음으로 발심 출가하여 보살의 위(位)를 잇기를 원하는 이는 마땅히 먼저 정법계(正法戒)를 받을지니라. 계는 일체행의 공덕장의 근본이며, 바로 불과(佛果)의 길을 향하는 일체행의 근본이니라. 이 계는 능히 모든 대악(大惡), 이른바 일곱 가지 견해와 여섯 가지 집착을 없애서 정법(正法)을 밝히는 거울이니라.
불자여, 이제 모든 보살을 위하여 모든 계의 근본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이른바 삼수문(三受門)이니라. 섭선법계(攝善法戒)는 팔만사천법문이며, 섭중생계(攝衆生戒)는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이니, 이러한 교화가 일체중생에 미치어 모두 안락을 얻게 하느니라. 섭율의계(攝律儀戒)는 십바라이(十波羅夷)이니라.
불자여, 계를 받는 것[受戒]에 세 가지의 믿음이 있나니, 첫째는 모든 불보살이 현재 하시는 앞에서 받으면 진실상품(眞實上品)의 계를 얻으며, 둘째는 모든 불보살이 별도한 후 천 리 안에 먼저 계를 받은 보살이 있으면 법사로 삼아 나의 스승이 되어 주실 것을 청하고서 내가 계를 받기에 앞서 발에 절을 하고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니라. ‘대존자(大尊者)를 청하여 스승으로 모시오니, 저에게 계를 내리소서’라고 하면, 그 제자는 정법계(正法戒)를 얻나니 이것이 중품(中品)의 계이니라. 셋째는 부처님 멸도 후 천 리 안에 법사가 없을 때에는 마땅히 모든 불보살의 형상 앞에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두 다리를 세워 합장(合掌)하며 스스로 서원하여 계를 받을지니,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느니라.
‘저 아무개가 시방의 부처님 및 대지(大地)의 보살들께 아룁니다. 제가 일체 보살의 계를 배우겠습니다’라고 하면, 이것이 하품(下品)의 계이니라. 두 번째와 세 번째도 또한 이와 같이 설하느니라.
불자여, 이 세 가지는 세 종류의 수계를 섭수하나니, 과거불이 이미 설하셨고, 미래불이 마땅히 설할 것이며, 현재불이 지금 설하시느니라. 과거 모든 보살이 이미 배웠고 미래의 모든 보살이 마땅히 배울 것이며, 현재의 모든 보살이 지금 배우나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정법계이니라. 만약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이 이 법계의 문에 들어가지 않고 무상도과(無上道果)와 허공평 등지(虛空平等地)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런 이치는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바로 정계(正戒)를 설하리라. 선남자와 선여인이 마땅히 계를 받으려고 할 때에는 먼저 과거세진과거제(過去世盡過去際)의 모든 부처님께 예경 드리고, 미래세진미래제(未來世盡未來際)의 모든 부처님께 예경 드리고, 현재세진현재제(現在世盡現在際)의 모든 부처님께 예경 할지니라. 이와 같이 세 번 예경 드리되, 법과 승에도 또한 그렇게 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다시 공손히 네 가지 무너지지 않는 믿음[四不壞信]을 받고, 사의법(四依法)에 의지하여 ‘지금으로부터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이 몸으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현성승(賢聖僧)에게 귀의하고 법계(法戒)에 귀의합니다’라고 이와 같이 세 번 말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다음에는 마땅히 삼세의 죄에 대해 잘못을 참회[悔過] 해야 하느니라. ‘만약 현재의 신ㆍ구ㆍ의에 대한 십악죄(十惡罪)는 원하옵건대 끝끝내 미래제가 다하도록 일으키지 않으며, 만약 미래의 신ㆍ구ㆍ의에 대한 십악죄는 끝끝내 미래제가 다하도록 일으키지 않기를 원하오며, 만약 과거의 신ㆍ구ㆍ의에 대한 십악죄는 끝끝내 미래제가 다하도록 다시 일으키지 않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잘못을 참회하여 삼업이 청정하기가 깨끗한 유리(
琉璃)의 안팎이 서로 밝게 비치는 것처럼 되면 곧 십 무진계(十無盡戒)가 주어지나니, 너희들은 잘 들어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일부러 살생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 현성법(四十二賢聖法)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범하지 않고 능히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 계를 받고자 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능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일부러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 현성법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범하지 않고 능히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 계를 받고자 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능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일부러 음행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현성법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범하지 않고 능히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 계를 받고자 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능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일부러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현성법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범하지 않고 능히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 계를 받고자 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능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일부러 술을 팔아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현성법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범하지 않고 능히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 계를 받고자 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능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재가(在家)나 출가(出家) 보살의 허물을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현성법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범하지 않고 능히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 계를 받고자 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능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일부러 인색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현성법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범하지 않고 능히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 계를 받고자 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능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짐짓 화를 내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현성법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범하지 않고 능히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 계를 받고자 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능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자기를 칭찬하면서 남을 헐뜯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현성법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범하지 않고 능히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 계를 받고자 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능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지금의 이 몸으로부터 부처의 몸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미래제가 다하도록 그 중간에 고의로 삼보장(三寶藏)을 비방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범하면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현성법을 잃어버리게 되나니 범하지 않고 능히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 계를 받고자 하는 이가 대답하기를 ‘능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느니라.
불자여, 이 열 가지 무진계(無盡戒)를 다 받으면 그 계를 받은 사람은 사마(四魔)를 다 지나 건너며, 삼계의 고통을 초월하고 세세생생에 이 계를 잃지 않으며, 항상 수행하는 사람을 따라서 나아가 곧 성불(成佛)하게 되리라.
불자여, 만약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일체중생 가운데 이 보살계를 받지 않는 이는 지각이 있는 이라고 하지 않으며, 축생과 다를 바가 없으며,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으며, 항상 삼보(三寶)의 바다를 여의게 되나니 보살이 아니고, 남자가 아니며, 여자가 아니고, 귀신이 아니며 사람이 아니니라. 이름 하여 축생이라고 하고, 사견(邪見)이라고 하고, 외도(外道)라 하나니,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살계에는 미래제가 다하도록 수법(受法)은 있으나 사법(捨法)은 없느니라. 그러니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잃어버리지는 말지니라.
만약 사람이 있어서 와서 받고자 원하면 보살과 법사는 먼저 그를 위하여 해설하고 독송하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열리고 생각으로 이해하여 즐거워하는 마음을 내게 하고 그런 후에 받게 할지니라.
다시 법사가 능히 일체 국토 가운데서 한 사람을 교화하고 출가시켜 보살계를 받게 한다면 이 법사의 그 복은 팔만 사천의 탑을 만드는 것보다 뛰어나니라. 하물며 다시 두 사람, 세 사람 나아가 백천 사람에 이르기까지이겠는가? 그 복덕의 과보는 헤아릴 수 없으리라. 그 스승은 부부(夫婦)와 육친(六親)이 서로 스승이 되어 줄 수가 있으며, 그 계를 받는 이는 모든 부처님 국토의 보살의 수 속에 들어가 삼 겁의 생사 고통을 뛰어넘으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받아야 하나니, 있으면서 범하는 것은 없으면서 범하지 않는 것보다 수승하나니, 범하는 일이 있어도 계를 받은 이는 보살이라 이름하고, 범하는 일이 없어도 계를 받지 않은 이는 외도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의 계를 받은 것이 있어도 보살이라 하고, 나아가 둘ㆍ셋ㆍ넷ㆍ열 가지를 구족 하면 계를 받는다고 이름 하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에게는 십중계(十重戒)와 팔만 위의 계(八萬威儀戒)가 있느니라. 십중계는 범하는 일이 있으면 참회할 수가 없으나 거듭 계를 받게 할 수는 있느니라. 팔만 위의 계는 모두 경계(輕戒)라고 하며, 범하는 일이 있으면 상좌 스님 앞에서 잘못을 참회하여 잘못을 소멸시킬 수 있느니라.
모든 보살의 범성계(凡聖戒)는 모두 마음을 체(體)로 하느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다하면 계도 또한 다하고, 마음이 다하지 않으면 계도 다하는 일이 없으므로 육도 중생이 계를 받아 얻을 수 있으며, 다만 법사의 말을 요해할 줄만 알면 계를 잃지 않느니라.
불자여, 삼세의 겁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나도 지금 이 나무 아래에서 십사억 사람을 위하여 주전(住前)의 신상(信想) 보살이 처음 계를 받는 법을 설하리라.
불자여, 이 신상보살은 십천 겁 동안에 십계법(十戒法)을 행하고 마땅히 십 주심(十住心)에 들어가느니라. 그러므로 불자여, 마땅히 먼저 모든 대중을 위하여 보살계를 받게 하고, 그러한 후에 영락경(瓔珞經)을 설하여 함께 보고 함께 실행하게 해야 하느니라.”
이때 대중 가운데 백억 사람이 있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계율을 받아 지녔으니, 그 이름은 범타수왕(梵陀首王)이며 무수한 천자와 함께 십계를 수행하여 만족하고, 초주위(初住位)에 들어갔다.
“불자여, 다시 이 주(住)에서 백법관문(百法觀門)을 수행하나니, 이른바 십신(十信)ㆍ십진(十進)ㆍ십 발취(十發趣)ㆍ십 승(十乘)ㆍ십 금강(十金剛)ㆍ십 수희(十隨喜)ㆍ십계(十戒)ㆍ십원(十願)ㆍ십 호(十護)ㆍ십 회향(十廻向)이니라. 이 백법관으로서 삼계는 공하고 거짓 이름일 뿐이니 모두가 공하기에 일체법은 나[我]와 남[人]이 없고 수(受)가 없고 인(因)이 없어서 모두 정해진 성품이 없다는 것을 관하여 통달하면 곧 열세 가지 결박을 소멸하게 되나니, 이른바 일곱 가지 견해[七見]와 여섯 가지 집착[六箚]이니라. 이것들은 실상(實相)과 같아서 초행위(初行位)에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다시 이 행에서 천 법명문(千法明門)을 관하여 닦게 되나니, 이른바 십신(十信)에서부터 십향(十向)에 이르기까지 전전하여 법에 들어가느니라. 법의 무아(無我)ㆍ법의 집(集)ㆍ법의 기(起)ㆍ법의 도(道)ㆍ법의 멸(滅)에 있어서 모두 법을 받는 사람이란 없나니, 온갖 법은 허공과 같고 환(幻)과 같고 건달바성(乾達婆城)과 같고, 불꽃과 같아서 일체법이 무상(無相)하여 백천 생멸(生滅)이 다 불가득이므로 초회향 위(初廻向位)에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다시 이 향(向)에서 밝고 밝게 서로 비추는 지혜로써 상사평등관(相似平等觀)을 배우느니라. 관(觀)은 무득(無得)이라 이름 하는데 무득은 거짓으로 얻는 것[假得]이니라. 비유하면 연등(然燈)에 심지가 타고 있는 것은 처음의 불꽃이 아니고, 처음의 불꽃이 있는 속에 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처음 불꽃을 떠나서 있는 것도 아니며, 처음 불꽃이 없을 때 그 속에 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다음도 또한 이와 같듯이, 바로 유위(有爲)의 모든 법은 이제(二諦)가 모두 서로 옮기므로 거짓[假]으로 짐짓 탄다 [燒]고 이름 하느니라. 그러므로 알아야 하나니, 처음 불꽃은 지금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 타는 것은 처음이 아니니라. 지금 타는 것이 처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에 바야흐로 있는 것이니라. 처음의 불꽃은 지금이 아닌 까닭에 지금 타는 것은 없느니라. 지금 타는 것이 없다면 지금 타는 것은 거짓으로 타는 것[假燒]이니라.
평등관을 얻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초심(初心)이 있는 가운데 얻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역시 초심이 없는 가운데 얻음이 있는 것도 아니니, 뒤의 마음도 또한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처음 마음은 지금 마음이 아니며, 지금 일어남은 처음 일어남이 아니니라. 지금 일어남은 처음 일어남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바야흐로 있는 것이며, 처음 마음이 지금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얻을 수가 없느니라. 지금 얻을 수 없으므로 지금 얻는다는 것은 거짓으로 얻는 것[假得]이니라. 중도제일의 제(中道第一義諦)의 마음은 생각 생각마다 적멸하여 만법명문(萬法明門)에 드느니라. 십신(十信)에서부터 십향(十向)에 이르기까지 자연히 평등의 도(道)에 흘러들지만, 일상(一相)을 얻는 것은 아니고 진실하게 일조상(一照相)을 관하여 초지(初地)의 도에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다시 이 지(地)에서 바르게 일조지(一照智)를 관하는 가운데 백만 아승기의 공덕문에 들어가느니라. 일상관 중에서 일시에 행하여 나아가 제십지(第十地)에 이르기까지 온갖 마음이 적멸하여 자연히 무구지(無垢地)에 흘러드느니라.
불자여, 다시 이 지에서 일조지로써 일체의 업인업과(業因業果)를 명료히 이해하되 법계를 하나로 관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그것은 지혜로써 일체중생의 식(識)이 처음 일상(一相)을 일으켜 연(緣)에 머무는 것을 아는 것이니라.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따라서 일어남을 선(善)이라 하고 제일의제를 등지고 일어남을 번뇌라고 이름 하느니라.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주지(住地)로 하기 때문에 생득(生得)의 선(善), 생득의 번뇌라고 하고, 이 두 가지 선과 번뇌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후의 일체 선악을 일으키느니라. 일체법의 연(緣)에 따라서 선과 번뇌의 이름이 생기고, 행위함으로써 선을 얻고 행위 함으로써 번뇌를 얻지만 마음은 선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니라. 이 두 가지를 따라 이름을 얻기 때문에 선과 번뇌의 두 가지 마음이 있느니라. 욕계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욕계 주지(欲界住地)라고 이름하고, 색계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색계주지(色界住地)라고 이름 하며, 마음[心]의 번뇌를 일으키므로 무색계 주지(無色界住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이 네 가지 주지(住地)로써 일지(一地)의 번뇌를 일으키므로 처음 일어나는 [始起] 것을 사주지(四住地)라고 하고, 이 사주지 앞에 다시 법이 일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시(無始)의 무명 주지(無明住地)라고 하느니라. 금강지(金剛智)로써 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일상(一相)은 끝이 있음을 아느니라. 그러나 또한 그 최초의 앞에 법이 있는지 법이 없는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지만, 선천적으로 얻는 일주지(一住地)와 행위함으로써 얻는 삼주지(三住地)를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시작을 알고 끝을 알 수가 있느니라. 이 무구(無垢) 보살은 일체지로써 가지런히 자지(自地)를 알고 항상 제일의제 속에 머물면서 자연히 묘각해지(妙覺海地)로 흘러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이 묘각지(妙覺地) 중에 머물러 오직 화(化)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을 나타내자면 헤아릴 수 없는 뜻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이름이 있느니라. 그 가운데 일체(一體)를 출생하면 이른바 묘과(妙果)가 항상 청정하게 머무는 것이 허공과 같아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고 이름으로 들어갈 수 없으나 과분(果分)은 얻을 수 있느니라.
불자여, 나는 보살의 차제에 육 입법문(六入法門)의 무량 공덕을 설하였노라. 이와 같은 육 입법문에는 일체 보살로서 들어가지 않는 이가 없나니,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십사억의 사람이 있음을 보지만 모두 본래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 육입법문에 들어갔느니라.
불자여, 내가 지금 처음으로 득도했을 때에 이 나무 사이에서 십 세 계해(十世界海)의 법문을 설하자 구십억의 사람이 있어서 역시 이 육 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또 보광당(普光堂)에 이르러 십 불국토를 설하자 백만 억의 사람이 있어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또 제석당(帝釋堂)에 이르러 십주(十住)를 설하자 오백만의 사람이 있어서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또 염보당(焰寶堂)에 이르러 십행(十行)을 설하자 천만의 사람이 있어서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다시 제사천법광당(第四天法光堂)에 들어가 십회향(十廻向)을 설하자 십 항하사만큼의 사람이 있어서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또 제육마니당(第六摩尼堂)에 이르러 십지(十地)를 설하자 백만 항하사 만큼의 사람이 있어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또 기원림(祇洹林)에 이르러 입법계품(入法界品)을 설하자 십이 항하사만큼의 사람이 있어서 이 육입명문에 들어갔느니라. 또 이 여덟 번째 회좌(會座)에 이르러서는 시방의 끝없는 대중과 경수보살의 모든 대중을 위하여 육 입명문을 설하였는데 모든 대중이 받아 지니는 것이 하나이어서 둘도 없고 다름도 없었느니라.
8. 집산품(集散品)
부처님께서 경수보살과 이 모임의 십사억 나유타(那由他)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위에서 사십이현성의 인과명관법문(因果明觀法門)을 들었노라. 그러니 일체 대중이 다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지니라.”
이와 같이 세 번 불자에게 “마땅히 받아 지니고, 마땅히 발심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모든 대중 가운데 백천의 천자가 있었는데, 이 법문을 듣고 초주심(初住心)을 일으켜 범부의 법을 버리고 조복하고 인내하는 법을 수행하여 십 주 명관(十住明觀)의 법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다시 만 명의 신심 있는 남녀가 있었는데 모두 청정십행법문(淸淨十行法門)에 들어갔다. 그리고 팔만 대범천왕(大梵天王)이 있었는데 초지(初地)의 명관법(明觀法)을 얻었다. 또 팔부(八部) 아수륜왕(阿須輪王)이 있었는데 각각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십신심(十信心)에 들어가 십 선행(十善行)을 행하였다. 또 팔만의 제십지(第十地)의 사람이 있어 정각(正覺)을 이룸을 나타내었다.
“불자여, 이때 시방무극의 불국토에 있는 일체 대중은 부처님께서 영락 가운데에서 육입(六入)의 법문, 이른바 십 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향(十向)ㆍ십지(十地)ㆍ무구지(無垢地)ㆍ묘각지(妙覺地)를 설하심을 듣고 각각 무상보리심을 일으키고 본래의 국토로 돌아갔느니라. 또 색계ㆍ무색계의 사람이 있었는데 각각 돌아가 신통을 닦았다. 그리고 본래 머무는 곳으로 돌아가 전하여 보살영락법문을 펴며 천인을 교화해 주었다. 다시 육욕천(六欲天)의 사람이 있었는데 본천(本天)으로 돌아가 널리 모든 천인을 위하여 본행을 헤아릴 수 없이 설하였느니라. 그때에 모든 대중들도 각각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그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하여 본래의 국토로 돌아가 보살본행을 설하고 제불본업(諸佛本業)을 받아 지니기를 이미 마쳤느니라.”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ㆍ혜해(慧海)ㆍ금강장(金剛藏)ㆍ도화(道華) 등의 팔천 보살이 모든 시방세계의 여러 불국토 중에서 으뜸가는 제자였으므로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시방의 무명 중생을 위하여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그 의미를 명료히 이해하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공혜도(空慧道)와 입법명문(入法明門)을 열어라.”
이때 오천만 명의 대보살이 있었는데, 모두 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이었다. 그들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 지니되 겁이 지나도록 소멸되지 않았다.
또 헤아릴 수 없는 천녀(天女)가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 지녔다. 이 때 다른 곳의 무극찰(無極刹) 보살과 이 나라의 보살들이 변화 신통으로써 여환삼매(如幻三昧)에 들어가 허공에서 뛸 듯이 춤추며 환희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니, 영락공덕경(瓔珞功德經)을 듣고 수지하여 마음마다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수행하여 온갖 현성문(賢聖門)을 버리지 않았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다시 백만의 변화 신통과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청정신(淸淨身)을 나타내시며 거듭 이 금강장해영락경(金剛藏海瓔珞經)을 부촉하셨다.
“너희들 모든 대중은 이 경법을 받아 지녀야 하느니라. 이 경은 과거 한량없는 백천의 부처님께서 마음속으로 행하신 법이므로 너희들은 받아 지니고 공양해야 하느니라.”
그 때에 일체 대중이 일시에 자리에서 천 가지 광명을 놓아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고 환희하며 보살불가사의영락경(菩薩不可思議瓔珞經)을 받아 지니고 이마로 받들어 공양하며 부처님께 절하고 물러갔다. 또 육욕천자(六欲天子)와 십천(十千)의 국왕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법좌에서 해산하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일시에 눈물을 흘리며 큰소리로 슬피 우니 그 소리가 삼천세계에 가득 찼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울면서 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팔십억의 대보살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사무량심으로써 유(有)와 무(無)는 동등한 것이며 무위(無爲)이고 무상(無相)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받들어 지니고 각각 무진법화삼매(無盡法化三昧)에 들어가 환희하며 물러갔다. 또 십천의 시행현자(始行賢者)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구관정(九觀定)의 사선(四禪)과 사공정(四空定)ㆍ진멸정(盡滅定)ㆍ칠정(七淨)의 십계(十戒)ㆍ심입정(心入定)ㆍ견도(見道)ㆍ도의(度疑)ㆍ정도(正道)ㆍ행지견(行知見)ㆍ행단지견(行斷知見)으로써 법에 들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절하고 물러갔다.
이때 좌중에 팔천 보살이 있어서 각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금강화(金剛華) 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미래세에 경을 설하는 보살이 법륜 아래에서 그 법을 듣는 이가 교화를 받아 받들어 행한다면 법용(法用)을 다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여, 잘 물었도다. 불자여, 먼저 마땅히 법을 듣는 자를 위하여 보살의 법계를 수여(授與)하고 그런 후에 보살의 본행인 육 입법문(六入法門)을 설할지니라. 불자여, 그를 위하여 차례로 사귀법(四歸法)을 수여하여라. 그리고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僧)에 귀의하고, 계(戒)에 귀의하는 사불괴심(四不壞心)을 얻게 한 후에 십계(十戒)를 주어야 하느니라.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음행 하지 않으며, 술을 팔지 않고, 재가와 출가 보살의 허물을 말하지 않으며, 인색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지 않으며, 삼보를 비방하지 않는 이것이 십바라이(十波羅夷)로서 참회할 수 없는 법이니라.
불자여, 십계를 받고 나서 또 듣는 자를 위하여 법사를 공양하고 항상 천상의 헤아릴 수 없는 꽃과 향과 백천 가지 등불과 백천 가지 하늘 옷과 영락, 그리고 백천 가지의 기악과 백 가지 맛의 음식ㆍ집ㆍ경서(經書)와 모든 필수품으로 다 공양해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하느니라.
홍통(弘通)의 법사는, 마땅히 부처님을 공경함과 같이, 부모를 모시는 것과 같이, 사화바라문법(事火婆羅門法)에서 제석(帝釋)을 모시는 것과 같이, 부모와 스승과 스님에게 날마다 세 때에 예경 하고, 법을 위하여 몸을 버리고 목숨을 다하여야 하느니라. 이에 불자여, 이와 같이 법을 구하는 사람에게 곧 보살의 본행(本行)과 백천만 부처님께서 전수하신 영락법문(瓔珞法門)을 설해야 하느니라.”
그때 십억 대중이 찬탄하여 말하였다.
“미래세 중에 법이 없고 삼보가 없고 현인이 없을 때에 겁은 악세(惡世)를 따라서 일어나므로 그 법을 설하거나 그 법을 듣는 것이 매우 드물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각각 슬피 울고 통곡하니 땅이 바다와 파도로 변했고 삼천세계가 뒤집히고 엎어졌으며 스물여덟 가지 별자리와 해와 달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에 대중은 “도리어 신통력을 거두고 모두 다 공경하며 수지하고 독송하며, 문구의 뜻[義句]을 해설하면 십 겁에도 소멸하지 않고 무궁무진하리라”라고 하니, 각각 기뻐하고 받들어 행하며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