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04
2월17일[연중 제6주간 금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UeNznb4a5c (장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여러모로 미성숙했던 젊은 수도자 시절, 틈만 나면 제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입만 열면 공동체가 이게 대체 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교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두드러진 속성 하나는 ‘죄인들의 모임’이란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면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오늘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이고, 오늘 비록 우리가 이토록 형편없지만,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천천히 성화와 완성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의 미성숙 앞에, 때로 생기는 스캔들 앞에, 이기심 앞에, 세속성 앞에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제성 많은 우리를 늘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복음 정신을 더욱 철저히 실천하면 할수록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도 많아집니다. 고통도 커집니다. 때로 다 벗어놓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복음서를 펼치십시오. 복음서를 읽고 또 읽으십시오. 복음서는 갖가지 고통과 상처, 십자가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다양한 치료제, 다양한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해줍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은 복음서는 갖은 의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꼭 껴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용, 자아 포기가 신앙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
세상 많은 사람이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저주합니다. 십자가만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보내주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2uzbviFfoc
++++++++++++++++++
<자녀는 언제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게 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만이 결국엔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그 말씀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예는 ‘순교’라 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배척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신일덕 기장이 조종하는 사이판행 대한항공 725편 비행기에는 신혼부부 61쌍을 비롯한 16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이렇게 종교적으로 안내방송을 하였습니다. 출발하는 김포공항은 하늘이 높고 푸른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여 주었습니다.
“일생에 처음 가는 신혼여행이 알찬 여행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비행이 되셨으면 합니다. 부디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철저한 불교 신자였던 부기장은 이런 기장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기내 방송을 마치고 비행기를 무리 없이 조종해 가고 있었습니다. 비행 도중 하와이 관제탑에서 사이판 기상이 너무 나빠 천둥이 치고 장대비가 내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열대성 기후는 예측하기 어려워 날씨가 변덕스럽지만, 염려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착륙 15분 전에 문제가 생겼다. 그는 기관사로부터 다급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기장님, 하이드롤릭이 새고 있습니다.”
하이드롤릭이란 비행기가 바퀴를 올리고 내리는 장치에 사용되는 유압입니다. 이것이 빠져나가면 바퀴를 자동으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보고받자마자 조처하였지만 내부 압력이 워낙 강하여 즉시 관이 파열되어 유압이 모두 새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수동으로 조작할 수밖에 없는데 몇 번을 시도해도 수동 장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괌 관제소에서는 착륙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이상히 여겨 연락이 왔습니다.
“KE5725, 여기는 괌 컨트롤. 무슨 일인가?”
“괌 컨트롤. 여기는 KE5725. 랜딩기어 하이드롤릭이 모두 샜다.”
괌 관제소에서는 “자갈밭으로 된 보조 활주로에 동체 착륙하라”라는 긴급 지시를 내렸습니다. 연료는 얼마 남지 않았고, 비는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신 기장은 조종관을 부기장에게 맡기고 기관사와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비행기에 벼락이 내리꽂히며 전기가 나가 비행기 안은 암흑으로 가득 찼습니다. 탑승객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기장의 조롱 섞인 말에도 기장은 일어서서 기도하였습니다. 피를 말리는 기도는 울부짖음이었고 절규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울부짖으며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늘로 신 기장의 몸이 붕 뜨는 듯하며 황홀한 환상 속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 41,10)
그 사이 객실 사무장은 비상 착륙을 대비해 비상 착륙 시 행동 요령을 승객들에게 교육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신 기장은 용기를 내어 기관사에게 한 번 더 수동 착륙 장치를 돌려보라고 지시했습니다. 기관사는 포기한 듯 핸들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노력해도 돌아가지 않던 핸들이 돌아가고 바퀴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조정실에서 신 기장은 소리쳤습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신 기장은 다시 한번 마이크를 잡고 승객들에게 이렇게 방송했습니다.
“승객 여러분, 저는 기장입니다. 모든 바퀴가 정상적으로 내려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비행기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그는 모든 승객에게 감격에 떨며 이렇게 방송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큰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드립니다.”
그는 이 놀라운 은혜를 승객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내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의 눈물은 비행기가 착륙해 계류장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기장의 얼굴을 보고 내리려는 승객들을 하나하나 다 인사하며 내려주고는 조종실로 갔습니다.
불교 신자였던 부기장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고 신 가장은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힘들게 들어온 대한항공에 사표를 내고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대한항공 수석기장으로 30년을 근무한 그의 한결같은 기내 인사에서도 그가 믿음의 사람임을 짐작게 하고 있습니다. “이 비행기는 하느님이 동승하고 계십니다. 편안한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신 기장이 월남전에서 비행기 조종할 때도 그랬습니다. 미군을 태우고 폭격을 나갔다가 밑에서 쏘는 포에 맞아 비행기 동체에 불이 붙었습니다. 미군들은 뛰어내릴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기장은 조종관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미군들은 이제 기장이 두려움에 미쳤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듯하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신 기장은 불이 타는 비행기를 몰고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불이 다 꺼져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때 미군 39명이 신 기장이 양쪽 가슴에 넣고 다니는 작은 성경을 사 달라고 하였고 39명 모두 한 명도 전사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가 다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1만 명을 전도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합니다.
신 기장은 가슴에 항상 성경을 넣고 다닙니다.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주일간 구금당하고 입국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은 박해가 따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죽는 법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믿지 않는 이를 싫어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를 비웃습니다. 하지만 보란 듯이 기도한다면 많은 이를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우리는 지나친 개신교의 전도 덕분으로 조용히 전도하는 게 좋다는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러나게 성호를 긋고 사람들을 함께 기도하자고 이끌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언제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일까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아는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피해서 그렇습니다. 부모가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낄 때, 그래서 부모가 옆에 있어도 외면할 때 그것이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느님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러면 하느님도 나를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대놓고 기도하는 좋은 예가 김연아 선수에게 세례를 주게 되는 계기를 만든 하늘 병원의 ‘조성연 요셉’ 원장입니다. 그분은 아침부터 다른 일을 제쳐놓고 믿는 직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며 시작합니다. 그때는 기도가 아니면 누구도 원장실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성호경을 긋고 하는 기도의 힘을 보여 줍시다. 우리가 기도하면 세상에서는 박해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보고 박해하여도 상관없이 대놓고 기도하는 것, 이것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목숨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 기도의 힘을 보여 줍시다. 하느님 아버지를 ‘능력’ 없는 분으로 만들지 맙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미운오리 새끼’라는 동화를 읽었습니다. 오리 새끼들 중에 유난히 키도 크고, 털의 색이 다른 새끼가 있었습니다. 물 위에 비친 모습이 다른 새끼들과는 달랐습니다. 엄마 오리는 다른 새끼들과는 다르지만 똑같은 정성으로 키웠습니다. 어느 겨울 미운오리 새끼는 호수로 날아온 백조를 보았습니다. 미운오리 새끼는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백조들과 함께 힘찬 날개 짓으로 하늘을 날아올랐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도 읽었습니다. 실력은 있지만 타고난 성격 때문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선수들이 함께 모여 지옥 훈련을 하였습니다. 모난 성격들이 다듬어지고 외인구단은 뛰어난 성적을 올린다는 만화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미래에 대한 이상을 가진 사람은 ‘미운오리 새끼’ 취급을 받곤 합니다. 거짓과 욕망으로 출세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에 나눔과 겸손으로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사람은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 기획팀’이 발족하였습니다. 보스턴, 탬파, 버지니아, 토론토에 사는 분들이 열정과 신념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상과 열정으로 신앙의 차원을 높여보려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을 개설하였습니다. 좋은 강사를 섭외하고, 홍보하고, 강의를 개설하였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하는 이분들에게 지도 사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으니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유리처럼 반사하는 성격이 아니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성격인 저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줌으로 하는 신앙 강좌 기획팀’이 발족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뉴욕에서 모여 단합대회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숙소를 구하고, 함께 미사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획팀은 다른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피정의 집을 선택하였습니다. 미사를 하고, 신앙체험을 나누고, 신앙기획팀이 나갈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는 ‘미운오리 새끼’처럼 보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벨탑’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우화가 생각납니다. 많은 애벌레들이 아무런 이상도 없이, 목적도 없이 다른 애벌레들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앞서가는 애벌레는 끌어 내렸습니다. 따라오는 애벌레는 떨어트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강한 애벌레들만이 앞으로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허무였습니다. 그 끝은 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 출세,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신기루를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를 보았습니다. 나비는 측은한 눈빛으로 애벌레에게 그 길로 가지 말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의 눈빛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줄무늬 애벌레는 나비의 말을 듣고 욕망이라는 ‘탑’을 오르기를 포기하였습니다. 누에가 된 애벌레는 시간이 지나면서 ‘노란나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나비와 함께 하늘을 날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라가야 할 탑은 욕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탑은 증오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겸손의 누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누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가는 사람을 끌어 내리는 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밀쳐내는 탑을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동료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지 않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는 샘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체험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변에 미운오리 새끼가 있다면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꿈과 이상을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공포의 외인구단이 있다면 그들의 꿈과 이상을 격려하면 좋겠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이 있다면 그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누에가 되지 않는 애벌레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34-9,1: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제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같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된 꾸중을 들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많은 사람의 배척을 받고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가 주님으로 모시고 내 입으로 부르는 주님이 진정 나에게는 누구이며, 내가 그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을 기대하며 그분을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활 태도가 바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가야하고, 또 그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도 항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34절)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뜻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갈 수 있는 자기 자아이다. 이악한 자아를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좋은 것까지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의 길은 이제 우리가 더욱 당신을 닮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절)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이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창조될 때 입은 하느님의 모습을, 즉 그리스도 아드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죽었을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삶이 될 것이다. 아마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우리를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버릴 수 있고, 끊을 수 있고, 죽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을 닮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그렇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항상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구든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ㄴ)
예수님은 우리를 고생시키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참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그 해방과 자유와 안식은 온갖 고생, 걱정,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참 평화와 행복과 기쁨만 누리는 삶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은 “누구든지, 내가 주는 참되고 영원한 해방, 자유, 안식, 평화, 기쁨을 얻기를 바란다면”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감수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 십자가’라는 말은,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십자가’라는 것을, 즉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지는 십자가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려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고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고 과정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십자가 너머에 있는 안식과 평화와 기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십자가’라는 말에서 고통, 고난, 죽음, 슬픔만 연상할 때가 많은데,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얻는 것들을 생각하면,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고, 고통과 고난이 아니라 평화와 안식이고, 슬픔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십자가의 무게와 크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는 각자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십자가를 주시고,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고 갈 수 없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혹시라도 정말로 힘들어서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함께 지고 가시거나 대신 지고 가시고, 나를 사랑하는 이웃들도 함께 지고 갈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도 중요한 믿음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버리라는 뜻입니다. 특히 자기 안에서 생기는 헛된 욕심과 욕망들을 버려야 하고, 몸의 편안함만을 찾게 만드는 유혹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 유혹들은 밖에서도 오지만 내 안에서 더 많이 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이 말씀은, “현세의 생에 대해서만 집착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은 그 생명을 얻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그것만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이 얻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끝낼 것인가, 즉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영원’을 향해서 나아갈 것인가, 즉 ‘영원불멸’의 존재가 될 것인가는 각자 스스로 선택할 일입니다.
“인생을 끝내는 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새로운 인생의 시작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잃는다.’라는 말은, 가지고 있던 것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라, 얻으려고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데도 노력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라는 말씀의 표현만 보고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한 생활’인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신앙생활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생활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라는 말씀은, “내가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르 8,36-37)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린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지옥에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임종을 맞이한 사람 중에는 과거의 삶에 대한 후회 때문에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표현만 보고서 “살아서는 온 세상을 얻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면 정말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두 가지를 모두 얻을 방법은 없습니다. 사는 동안 온 세상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과 미련을 버립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여기서 “부끄럽게 여기다.”라는 말씀은, “관계를 부정하다. 관계를 끊어버린다. 모른다고 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자기 마음대로 막살다가, 심판대에 선 다음에야 비로소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때는 너무 늦을 때가 될 것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도 변함없이 우리를 믿음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이를 위하여 복음서는 매우 강한 대비의 구조를 두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느님의 계획에 반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며 사람들 손에 죽임당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노아가 모든 것이 파괴된 땅에서 이제 막 드러난 마른땅과 마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라는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며 사람의 피가 땅에 흘러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계획에 순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며 하느님 말씀 안에서 모든 순간을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가 말하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과 아벨의 피와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구덩이에 버려진 요셉과 구약의 많은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살아간 의인들의 죽음을 보셨고, 외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히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께 빛을 받아 옳게 시작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만, 어느 순간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의 충동에 따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만 찾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삶을 살아갑시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
=====================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은 바벨탑 이야기는 사람들의 일치와 다양성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의 도시, 하나의 탑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하여 한 가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다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도시, 하나의 탑이 상징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름을 거절하는 것, 일치를 이룬다는 목표 아래 하나의 방식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진정한 배려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삶의 방식이 하느님의 창조 위업의 과정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읽은 창세기의 창조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에서 언제나 피조물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방식을 취하셨습니다.(창세기 1장 참조)
반면에 사람이 추구한 바벨탑 쌓기의 과정은 하느님의 창조 방식을 거슬러 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일에 매우 강한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사도행전에는 바벨탑 이야기의 후속편을 보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 강림의 이야기입니다.(2,1-12 참조) 창세기의 첫 이야기들(카인, 홍수, 바벨탑)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의 자율성을 존중하시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일치를 바라시고 그들의 다양성을 깨뜨리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것이 더 자라나도록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삼위일체 안의 하느님이십니다. 모두 고유한 자리를 잃지 않으시면서 충만한 일치를 누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믿음의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갑시다.
=====================
[올리베따노(파주)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는 일입니다. 이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이고, 자신이 원해야 하는 것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하는 일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의 첫째는 ‘자신을 버리는 일’이고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고 있는 우리는 지금진정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자신을 버렸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느냐? 보다,무엇을 채웠느냐? 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는 것이요, 똥을 채우고 있으면 똥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일은 결코 스스로가 비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진 분에 의해 비워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받아들여진 분이 중심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비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것, 그것은 바로 자신을 짊어지는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심이 되시어, 우리를 짊어지시는 일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곧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눈앞에 놓고 바라볼 때는 아직 십자가가 아닙니다. 짊어질 때라야 비로소 십자가가 됩니다. 그러나 마지못해 그냥 떠맡아 짊어지는 것은 결코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라야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주님! 오늘도 저희가 당신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게 하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성소는 기쁨입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기쁨을 찾아가는 여정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응답하는 과정입니다. 이 여정이 바로 제자뿐 아니라 군중까지도 행복으로 이끄는 예수님 추종의 길이지요. 오늘의 말씀들은 왜 어떻게 예수님을 추종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줍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8,34)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필요한 조건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단순한 포기 이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연히 존재하는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그나마 자신 좀 더 잘 버리려면, ‘버려야 하는 자신’을 먼저 잘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알지 못하면 무엇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자신의 어둠과 죄악을 알아차리는 순간, 주님 친히 빛을 비추시어 나를 비워주실 것입니다.
자신을 “죄인들 가운데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으로 인식했던 바오로 사도나, ‘가장 보잘것없는 종’이라 했던 성 프란치스코야말로 자신을 알아차려, 온전히 자신을 버린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하느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지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만을 갈망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바램, 시기와 질투, 미움과 차별, 탐욕과 거짓 등 이기적 자아를 비워낸 사람입니다. 결국 ‘자신을 버리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깨달아 자기중심에서부터 벗어나 예수님께로 향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환란과 시련은 물론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라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요 복음 자체이신 주님과 깊은 유대 안에서, 현세의 소유에 기대지 말고 오직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처지와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과 대인관계, 사건들, 현재 겪고 있는 일들, 내 안의 갈등과 욕구 등 모든 것을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놓는 자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의 이익을 찾지 않고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내놓기보다는 살리려 애쓰기에 십상이지요.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것이 바로 ‘동기’입니다. 버리고 고통을 견디며 삶의 십자가를 질 때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8,35)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서, 마음이 내켜서,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른다면 위선이요, 참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과 행복은 바란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빈 그릇을 준비하고 일부가 아니라 ‘전존재’(목숨)을 내놓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의 어둠을 똑바로 알아보게 하시고, 죽음을 호흡하듯 절박하고 진지하게 매 순간 내 생명을 내놓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사람의 길>
마르코 8,34ㅡ9,1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참사람의 길>
앞섬이 아닌 따름의 길
홀로가 아닌 함께의 길
가짐이 아닌 비움의 길
오름이 아닌 낮춤의 길
누름이 아닌 받듦의 길
받음이 아닌 베풂의 길
밀침이 아닌 품음의 길
없앰이 아닌 이룸의 길
죽임이 아닌 살림의 길
찰나가 아닌 영원의 길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는 사랑의 보증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의 보증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고대 로마인들이 범죄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던 도구였습니다.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형태의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하면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고 난 이후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신성하고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의 용서를 위해 기꺼이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놓으심으로써 인간에게 속죄와 구원을 가져다주셨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었지만(1코린 1,23. 갈라5,11) 하느님께서는 패배처럼 보이는 것에서 승리를, 허약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활기 넘치는 힘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우리를 위한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담을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내려놓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기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우리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크론시타트의 요한 성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성인께서 어느 날 기도하고 있는데 악마가 찾아와서 이렇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이 위선자야! 어떻게 감히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느냐? 내가 너의 생각을 다 읽었다. 너는 더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악마에게 별 상관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종종 “저 같은 사람이 감히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라면서 자격 없음을 들어 이야기하십니다. 겸손해 보이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말씀처럼 그래서 더 기도해야 했습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입으로만 자격 운운하고 있을 뿐, 어떻게든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유혹이 있어도, 또 때로는 온갖 분심으로 가득해도 기도해야 합니다.
동창 신부와 전화 통화할 때면 보통 30분에서 때로는 1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합니다. 특별한 대화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즐겁고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주님과의 대화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벗으로 오신 주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벗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니, 주님과의 대화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에 이분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종 커다란 착각에 빠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마르 15,21 참조)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서 따를 수 있을까요? 주님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서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의 삶을 살면서 주님을 따르고, 또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건강한 사람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 주님 말씀에 따르면 잃어야 할 목숨과 구해야 할 목숨이 있고, 죽어야 할 목숨과 살아야 할 목숨이 있고, 이 세상에서 사는 목숨과 하느님과 함께 사는 목숨이 있는가 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언제 들어도 어렵고 지금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앞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주님을 따라야만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주님을 따르는 데 자기나 자기 목숨이 방해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주님을 따라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께 갈 것이고, 지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가겠지요.
그리고 그래야 우리는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고 잃지 말아야 할 목숨이며, 반대로 사라질 이 세상의 어차피 없어질 목숨은 잃어야 할 목숨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어려운 것이 실은 뜻이 아니라 실천일 것입니다. 저세상에서 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죽는 것, 저세상의 삶을 이미 여기서 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심리학에서 정신 건강을 간단하게 테스트하는 것이 있답니다.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 두 가지 음식이 있고 둘 다 먹어야 하는데 무엇을 먼저 먹느냐에 따라 정신이 건강하고 약한 것이 갈린답니다.
맛없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이 정신이 건강하고 그 반대의 사람은 정신이 약한 사람이라고 한답니다.
정신이 건강하다고나 할까 강하다고나 할까 그런 사람은 현재의 싫은 것이나 고통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곧 미래의 기쁨이나 행복을 위해 견디는 힘이 강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내 알 수 있습니다. 미성숙하고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조그만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나중에 어떻게 되건 당장 좋은 것만 하려고 합니다.
어제는 미사 가방, 수도복, 컴퓨터 등이 들어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귀가하는데, 무겁고 힘들어도 그리고 무릎이 안 좋아도, 건강을 위해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인, 힘든 것을 피하지 않고 이겨내는 내가 되기 위해 계단을 걸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젊은이 거의 모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렇게 쉽게 그리고 단숨에 위로 오르던 젊은이들이 인생길에서 수없이 만나는 어려움을 어떻게 맞닥뜨리고 견디어내며, 또 어떻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 노파심에서 염려가 되었습니다.
목표를 아예 또는 이내 포기하지 않을까? 목표를 향해 가되, 가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가 되고, 스트레스가 쌓여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으로 건강을 잃지 않을까?
이런 남 걱정을 하다가 이내 저를 돌아봤습니다. 그들보다 조금 더 정신적으로 강하고 그래서 당장의 고통을 그들보다 조금 더 잘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숙제를 미루고 당장 노는 것을 선택하는 아이처럼, 내가 죽는 것은 뒤로 미루고 당장 즐거운 것만 쫓는 나는 아닌지. 내일과 모레 강론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글피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바벨탑을 허물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무지의 죄입니다. 반복되는 죄입니다. 죄의 악순환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죄의 현실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눈먼 무지의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습니다. 흡사 거대한 괴물처럼 생각되는 바벨탑입니다. 두려움에서 기인한 바벨탑 쌓기입니다.
먼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바, 참 다양하고 깊습니다. 안팎으로, 알게 모르게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 본능상, 자기 보호 본능상 바벨탑을 쌓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바벨탑, 우상의 바벨탑, 교만의 바벨탑, 허영의 바벨탑, 명예의 바벨탑, 탐욕의 바벨탑,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잊으면, 하느님을 잃으면 사람은 누구나 바벨탑을 쌓기 마련입니다. 마음 깊이 내재한 갈망, 불안, 두려움, 공허, 허무, 무의미, 무료함 때문에 바벨탑을 쌓습니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바벨탑의 제국들이 명멸했는지요! 도시마다 높이 솟은 거대한 괴물같은 고층 아파트들이 흡사 바벨탑을 연상케 합니다. 오늘날도 바벨탑 제국들의 역사는, 참으로 위태한 바벨탑의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무지의 바벨탑에 반드시 등장하는 독재자들입니다. 무지의 독재자들이 꿈꾸는 바 무지의 바벨탑, 교만의 바벨탑 쌓기의 제국들입니다.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하니 획일적 집단을 이루기가 너무 좋습니다. 두려움의 본능상 함께 모이는 것은 필연입니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합니다. 그들은 이주해 오다가 마침내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습니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흩어지는 것이 두려워 한데 모여 도시를 건설하고 일치의 중심인 우상같은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의 바벨탑입니다. 내적 공허와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대책이 고작 우상의 바벨탑, 무지의 바벨탑 쌓기입니다. 결국은 자멸에 이를 바벨탑을 쌓는 무지의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단의 개입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심판, 살리는 심판입니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심으로 바벨탑 중심의 눈먼 획일적 무지의 집단을 살리십니다. 그들은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고, 바벨탑 쌓기를 중단하고 온 땅으로 흩어집니다. 우상 중심의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다 보면 지배와 피지배의 상황은 재현되기 마련이며 여기서 노예상태의 사람들 또한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상실이요, 자기를 잃은 익명의 무명의 존재가, 1회용 소모품 인생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그러니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인 하느님 구원 사건의 쾌거가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바, 참 깊고 두렵습니다. 마치 현대의 문명이 바벨탑 쌓기의 멸망으로 치닫는 불길한 예감도 듭니다. 디지털 혁명이 추세라지만, 문명의 대세라지만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인간이 실종되가는, 도태되어 가는, 퇴화되어 가는 추세가 불길하기만 합니다. 도대체 점점 일자리도 사라져가니 약하고 착한 보통 사람들이 살길이 막막해집니다. 자연이나 마을은 사라져가고 도시화와 더불어 무수한 고층의 아파트들에 사람들은 날로 왜소해져가고 죄도, 병도 많은 세상이 되어 갑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쌓기와 도시건설과 참 좋은 대조를 이루는 옛 광야같은 세상을 옥토로 만든, 야만의 유럽을 문명화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이들 수도자들이 먼저 광야에 머물렀을 때 한 일은 바벨탑 쌓기가 아니라 수도원을 세우고 성전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니 오늘 창세기의 바벨탑같은 우상 중심이 아니라 넓은 광야같은 유럽 대륙 곳곳에 하느님 중심의 도시가 형성됩니다.
수도원 중심의 도시들이 광야의 유럽 곳곳에 생김으로 거친 광야의 유럽은 옥토로 변합니다. 이래서 유럽인들은 성 베네딕도 수도회(시토회, 트라피스트회 포함)가 유럽을 구했다 하여 베네딕도 성인을 유럽의 은인으로, 또 주보 성인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 정주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역시 함께 살지만 공동으로 기도할 때와 식사할 때와 일할 때를 제외하곤 흩어져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 중심의 함께와 홀로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성의 일치를 이루는 유기적 공동체 삶이지, 결코 창세기의 바벨탑 중심의 획일화된, 단일화된 무기적 비인간화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러니 살길의 답은 단 하나, 분명해졌습니다. 무지의 바벨탑을 쌓지 않는 것입니다. 무지의 바벨탑 쌓기를 중단하는 일이요, 우상의 바벨탑을 허무는 일입니다. 바벨탑 우상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예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길이요, 각자 삶의 자리에서 형제들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요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전쟁의 요체입니다.
그러니 바로 창세기 바벨탑에 대한 궁극의 답을 오늘 복음이 줍니다. 예외없이 인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구원의 삶의 길은 이길 하나뿐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수 있겠느냐?”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례여정의 삶을 살 때, 저절로 안주를 위한 바벨탑 쌓기는 중단되고 우상의 바벨탑도 허물어질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을 나눕니다. 늘 나눠도 늘 새로운, 내적 우상의 바벨탑 허물기에 참 좋은 고백기도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
<나의 십자가는?>
오늘 복음(마르8,34-9,1)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에게 먼저,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원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나의 나약함'이라고 묵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생각과 말과 행위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어제로 구약성경 룻기까지 필사를 마쳤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작고 약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구원의 역사가 바로 '구약성경의 내용'입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는 '신약시대인 예수님의 시대로' 이어지고 있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가 바로 '이스라엘의 나약함'이고, 지금 여기에서 드러나는 '순종과 불순종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나약함'입니다.
이 '나약함'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 짊어지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나의 십자가'라고 묵상했습니다.
구원은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이 나약함을 주님 자비의 힘에 내어맡김에서 옵니다. 이것이 우리에 앞서 몸소 당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가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실망하지 맙시다!'
순종과 불순종의 여정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순종에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인내로써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다면.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 36)
봄의 숨결이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거시는
위대한 목숨을
만납니다.
목숨의
살을 먹고
목숨의 피를
마시는
우리의 오늘입니다.
목숨은 그래서
목숨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목숨을 부르시는
목숨의 복음을
듣습니다.
주님의 목숨을
통하여
하늘의 목숨을
봅니다.
버려야
얻게되는
복음의
삶입니다.
버려야
참된 것을
만나게 되는
기쁨입니다.
주님의 목숨이
모순으로
가득찬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모든 것을
내놓아야
모든 것을
얻게되는
영광의
신비입니다.
목숨이 목숨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목숨입니다.
복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목숨입니다.
배신하는
목숨이 아닌
진심을 다해
사랑해야 할
하느님의
목숨입니다.
하느님의 목숨은
사랑의 목숨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사람을 살리는
목숨, 그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의 목숨에서
목숨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간절하게
만납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