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장. 현현대법(玄玄大法)과 불가사의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우선 안전을 위해서 내가 쓰던 예금장부의 비밀번호를 말해 주겠소. 하지만 일단은 한가지의 조건을 들어줘야 하오." 석채릉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다시 재촉했다. "무슨 조건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지금 매우 고통스럽고 그야말로 혼절하기 일보직전이오. 이런 상 황에서는 말할 수가 없소. 내가 애써 모은 재산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석채릉은 아미를 찌푸렸다. "그럼 네게 의원이라도 불러달라는 말이냐?"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호강까지는 필요 없소. 나는 그저 낭자가 차 한잔만 끓여다 주 면 되오." 석채릉은 싸늘하게 조소했다. "너는 그야말로 이런 상황에서도 근사한 취미를 가졌구나?"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온갖 고난에 시달렸기에 늦게나마 그런 생활을 해보 고자 하는 것이오. 게다가 낭자의 차 한잔을 마시게 되면 그것은 실로 천 금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석채릉은 그를 보며 말했다. "너는 설마하니 그 사이에 달아나려는 것은 아니겠지?" 백방생은 말했다. "설령 내가 몸이 온전하다고 해도 지금은 달아날 수가 없을 것이오." 석채릉은 다시 그에게 보검을 바싹 들이댔다. "내가 먼저 너의 그것을 잘라내기 전에 말하는 것이 어떠냐?" 백방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낭자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오. 다만, 낭자 가 그 내 부탁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나는 필시 한가지 보답을 할 것이 오." 석채릉은 말했다. "너는 무슨 보답을 한다는 것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우선 쓰던 것이 아닌 백만냥이 들어있는 예금장부의 비밀번호를 말해주겠소. 그러면 낭자는 남은 예금장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될 것 이고 나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석채릉은 문득 구미가 당기는 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너는 아직도 돈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물론이오. 돈이라는것은, 즉 사람이 숨을 붙이고 살아있는 동안은 언 제나 필요한 것이 아니겠소?" 석채릉은 잠시 그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보검을 거두어 허리에 차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백방생은 그녀가 나가는 즉시 약병에서 두 알의 속명신단을 꺼내어 입속에 넣고 삼켰다. 사실 그가 차를 마시고 싶 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럴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두알의 속명신단 은 이내 그의 몸속에서 녹아서 그의 치명적인 내상을 치료하기 시작했 다. 그것은 비로소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어 공력을 끌어올려 안색을 창백하게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석채릉은 이윽고 잠시 후에 차 한잔을 들고 들어왔다. 그것은 물론 그 녀가 새로 끓인 것이 아니라 그저 있던 것을 벽난로에 한번 데운 것에 불과했다. "고맙소." 백방생은 겨우 몸을 일으켜서 마치 그것을 보약이나 되는 것처럼 천천 히 불어가며 마셨다. 이윽고 그가 빈 찻잔을 돌려주자 석채릉은 말했다. "이젠 약속을 지킬 때가 아니냐?" 백방생은 그녀에게 비밀번호를 말해준 뒤에 이어 말했다.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는 그 작은 예금장부는 돌려주시오." 석채릉은 냉소하며 말했다. "내가 너의 말을 믿을 줄로 아느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내가 가짜 비밀번호를 말했다는 것이오?" 석채릉은 말했다. "내가 금방 가서 확인해 보면 그 진위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니 너는 여기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도록 해라!" 말을 마치자 석채릉은 정말로 그 두개의 예금장부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백방생은 그것을 바라보며 문득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이미 석채릉이 몸소 그 예금장부의 비밀번호를 확인하러 갈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작은 쪽이었다면 수하를 보냈었겠지만, 그러나 많은 액수 쪽이었기에 그녀는 감히 수하에게 그것을 맡기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으로 볼때 백방생은 그녀에게 있어서 독안에 든 쥐의 형상 이 아니겠는가" 석채릉이 사라지고 나자 과연 두 명의 백의노인이 백방생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음산한 표정으로 백방생을 주시하더니 이어 백방생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들의 무공은 초절정의 단계로서 백방생보다도 한 단계가 높았다. 백방생의 상태가 온전하다고 해도 그 중의 한사람의 감시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두 사람이 모두가 엄중 하게 감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석채릉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백방생에 대해서는 안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실 그것이 바로 실 수였을 줄이야" 갑자기 멀쩡히 있던 두 명의 백의 노인이 졸기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은 무공이 가히 초인적인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로서 결코 이와 같은 시기에 졸리가 없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마치 어떤 사고를 확실히 보여주 기라도 하듯이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 리고 느닷없이 그 옆에 한 사람이 흡사 귀신처럼 나타났다. 그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점장이 노인이었는데 용모도 또한 기이했다. 검은 색의 피부와 눈, 그리고 머리카락도 아주 시커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백방생 이 만일 그와 같은 광경을 보았다면 필시 언젠가 본 노인들과 비슷하다 고 생각을 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백방생도 이순간 곯 아 떨어져 있었다. 마치 갑자기 이 방안의 움직임이 모두 정지된 것 같 았다. 그 사이로 흑의노인이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대체 언제 이 방안 에 들어온 것이었을까" 흑의노인은 정작 두 명의 백의노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유독 백방생에게만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침상의 앞에 이르러 잠시 백방생 의 몸속을 주시하던 그는 갑자기 두눈에서 기이한 현광(玄光)을 발산 했다. 그리고 흡사 지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음산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눈을 떠라!" 백방생은 조금 전까지 깊은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일단 그 기이한 광채에 닿자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떴고 즉시 무표정하 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백방생이오." 흑의노인은 싸늘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나는 너의 주인이다. 그러니 모두 솔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알겠느 냐?" 백방생은 흡사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말했다. "알겠소, 당신은 나의 주인이오." 흑의노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너는 아까 그 계집애에게 비밀번호를 말해 주었는데, 그것은 진짜냐 가 짜냐?" 백방생은 주저없이 말했다. "당연히 가짜요. 내가 만일 진짜를 말한다면 그녀는 당장 나를 죽일 것 이 아니겠소?" 흑의노인은 득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랬었군"하지만 나는 한번 더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너는 정 말로 황금충(黃金蟲)의 재산을 취득했느냐?" 백방생은 멍하니 흑의노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실은 아니오. 그건... 나의 연극이오." 흑의노인은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연극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세외오세에게 복수를 하려고 본래 마음 먹었었소. 하지만 워낙 에 힘이 없으니 일단은 그런 점을 과장시켜서 좀더 상황에 유리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오." "지금 그 계집애처럼 말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소." 흑의노인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그럼 지금 네가 사용하고 있는 돈은 모두 어디서 난 것이냐?"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사실 나의 돌아가신 조부께서 젊은 시절에 남모르게 모아 두었 던 재산을 뒤늦게 내가 찾아낸 것이오. 나의 조부는 사실 남들이 생각하 는 것보다도 훨씬 부자였소." 흑의노인은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네게는 더이상의 돈은 없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멍청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사실 그게 모두 전부요." 흑의노인은 잠시 백방생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나와의 대화내용을 모조리 잊도록 해라. 이것은 거역 할 수가 없는 주인의 명령이니 결코 반항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만 자도록 해라!" 백방생은 그 말에 정말로 눈을 감더니 다시 깊이 잠을 자기 시작했다. 흑의노인은 그러한 백방생의 전신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갸웃거 리며 중얼거렸다. "나의 이 현현대법(玄玄大法)은 여태 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 녀석의 모든 것은 별 볼일이 없다는 말인가?" 흑의노인은 천천히 방안을 거닐면서 다시 말했다. "보아하니 그 의선(醫仙)과 화선(花仙)이 정말로 다녀간 모양이군. 사 선과 마선이 파괴시킨 몸을 다시 정상으로 만들어 놨어. 하지만 그것은 곧 그들이 포기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흐흐흐, 과연 천선(天仙)의 안목 은 예리하군. 그는 그 두명의 반대자를 처단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굴 복시키니 포용력이 있다고도 할 수가 있겠군. 이제 천하는 곧 그의 것 이 되겠지." 흑의노인은 마악 떠나려다가 백방생을 바라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음, 저 군살들은 대체 무엇일까"그렇군. 녀석이 미련하게도 대환단을 서른 여섯알이나 복용했다고 하던데, 그 약력(藥力)이 체내에 녹아 들어 가 잠재되어 그런 모습이 되어 버렸군. 하지만, 그가 설령 무형검의 경 지에 오르고 그 모든 약력을 흡수하여 공력으로 만든다고 해도 별 것은 아니다. 흐흐흐...게다가 녀석은 요절할 상(相)이니 잠시 후면 그 계 집아이에게 온갖 고난을 당하다가 죽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흑의노인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그의 부탁은 들어 주었군. 천선은 이런 일에는 공연히 민감 하단 말이야?" 말이 끝나는 순간 흑의노인은 갑자기 신형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아득 하게 사라져 버렸다. 노인이 사라져 버리자 이윽고 잠을 자던 세 사람도 서서히 의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깨어난 사람은 백방생이었 는데, 그는 깨어나자 마자 즉시 약병의 뚜껑을 열어서 다섯알이 남아있 는 대라금단을 모조리 복용해 버렸다. 그리고 그가 다시 약병을 잘 갈 무리 하고 나자 이윽고 백의노인들이 정신을 차렸다. 백의노인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백방생의 모습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소리치며 그의 옆으로 달려갔다. "네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백방생은 마악 금단들을 복용한 후이라 그 엄청난 약기운에 의해 얼 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몹시 고통스런 표정으로 전신을 비틀고 손발을 휘저었다. 그것을 보자 백의노인들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들을 지었다. 설마하니 영약을 복용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가 혹시 주화입마를 당하여 발작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 었다. "혹시 누군가가 왔다간 것이 아닐까?" 그때, 이윽고 방문이 열리면서 석채릉이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녀는 몹 시 화가 나 있었다. 즉 금포에 들러보니 그 비밀번호는 맞지 않는 것이었 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최소한 백방생의 몸에 죽지 않을 정도 의 상처를 내 주려고 했다. 그런 다음에 다시 흥정을 하려고 했다. 그 런데 문득 상황이 이상한 것을 보고 그녀는 멈칫하며 백의노인들에게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백의노인들은 감히 자신들이 졸았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별 일이 아닙니다." 만일 백의노인들이 좀 더 세심하게 살폈다면 백방생의 몸이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었다. 백방생의 몸은 완전히 피칠을 한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그의 전신이 한꺼번 에 터져나가려는 것 같았다. 석채릉은 약간 화가 나서 말했다. "별 일이 아니라니"당신들이 혹시 그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요?" 백의노인들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어 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변명 하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들의 눈앞에 하나의 붉은 인영(人影) 이 환상처럼 날아들었다. 그 인영은 놀랍게도 침상에 누워있던 백방생 이었다. 전신에 진기가 가득 차게 됨에 따라서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육 신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으며 의복들이 찢겨져 나가고 시뻘건 알몸 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 두 명의 노인들은 갑자기 눈앞에 적이 날아드는 것을 느꼈으나 다음 순간 에는 어이없게도 전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빠, 빠르다!) 그 두명의 노인이 그렇게 되었으니 그보다 무공이 약한 석채릉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녀는 미처 무엇인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한순간 에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이어 곧장 침실을 나가서 거실을 지나 다른 방안으로 들어갔 다. 그 방은 넓은 서재였는데 워낙에 공간이 넓어서 비어 있는 공간이 많았다. 백방생은 알몸인 채로 되는 대로 서둘러서 그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사실 지금은 아주 위험한 시기였다. 그는 이미 속명신단 두알로 진기가 촉발된 마당에서 무려 다섯알이나 되는 대라금단을 복 용했다. 하지만 기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육갑자나 되는 공력이 이미 잠재하고 있던 백방생의 체내에 대환단의 약력을 격발시키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힘에 의해 백방생의 몸은 크게 부풀어 올 랐다. 그런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황에서 무공을 펼친다는 것은 절 대로 무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백방생은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서 무공을 펼쳐서 그 세 사람을 완전히 혼절시켜 놓았고 이어 서재에 도달 한 것이었다. 지금 무리하게 운기한 탓에 그의 정신은 거의 아득해져 가 는 상황이었다. 만일 그가 일찍이 소림사의 후원 조사동의 동굴에서 죽음과 싸우며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을 대성(大成)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 위기를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치 이제까지 그 자신의 진면목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한탄해 오기라 도 한 듯이, 백방생의 몸과 마음은 일제히 그 깨달음속으로 녹아 들어갔 다. 그것은 일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의 신형은 이내 허공으로 석 자나 올라가서 계속해서 무수히 격렬한 변화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쉴새없이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 으며 백방생의 알몸은 끊임없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수십가지의 색 깔의 빛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으며 또한 수십번이나 전신의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이어 마지막으로 황금(黃金)빛으로 모든 빛들이 녹아들 었을 때 문득 주위가 조용해졌다. 갑자기 모든 변화가 끝나고 그의 몸이 휘황한 노을빛의 서광(瑞光)속에 자리한 것처럼 보였다. 이미 전신의 세맥들과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 孔)이 완전히 개통(開通)되고, 또한 무학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 에 도달한 것이다. 비록 위험한 시기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는 결국 성공 했다.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그 깨달음을 실제로 몸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문득 그 노을빛 서광도 사라지고 서서히 지면에 내려앉자, 백방생의 입가에는 다소 만족한 듯한 미소가 걸렸다. 석채릉은 한참만에야 눈을 떠 보고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거실의 태사의 위에 앉아 있었는데 맞은편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얼핏 낯익으면서도 왠지 낯설어 보였다. 백방생(白方 生). 이 사람은 갑자기 너무나도 변했다. 우선 이전에 아주 뚱뚱하고 볼 품이 없던 그의 체구가 그야말로 헌칠하고 늘씬하게 변했고, 이어 피부 에서도 백옥(白玉)과도 같은 투명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석채릉은 백방생이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었던가 하고 생각해 보고는 스스로 왠지 안색이 붉어졌다. 그녀는 따라서이사람은 백방생이 아니라고 생각했 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그 사람은 정말로 백방생 그 사람이 었다. "그새 잘 잤소?" 왠지 고요해 보이는 시선으로 그렇게 묻는 백방생을 바라보며 석채릉 은 암암리에 안색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그 백방생인가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왜"아닌 것 같소?" 석채릉은 뒤를 돌아 보았다. 그 두 명의 백의노인은 그녀의 뒤에 그저 뻣뻣하게 서있었는데 아마도 혈도(穴道)가 제압당한 것 같았다. 석채릉 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석 채릉은 자신의 몸은 혈도가 제압되어 있지도 않고 또한 당한 흔적도 없는 것을 알고 말했다.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변했죠?" 백방생은 말했다. "나는 사실 이전에는 다소 병이 들어 있었는데 이제 다 나은 것이 오." 석채릉은 말했다. "당신, 내 손에서 그 예금장부와 인장들을 가져갔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들은 본래 나의 것이 아니었소"그러니 내가 갖는 것이 정당한 일 일텐데?" 석채릉은 그가 아까 비밀번호를 거짓으로 말했던 것을 상기하며 화 가 나서 말했다. "당신은 감히,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이미 한번 후회할 짓을 했으니 다시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소. 자,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이미 창밖에는 서서히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석채릉은 백방생의 여 유있는 태도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듯이 눈을 크게 떴다. "우리에게 돌아 가라고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소. 이곳에서 정말로 나와 함께 잠을 잘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 소?" 석채릉은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물론 나는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돌아갈 거예요. 헌데 우리를 정말로 보내 주겠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소. 일단 가면 다시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오." 말과 함께 몸을 돌리는 것을 보고 석채릉은 문득 의아해 하며 생각했 다. (만일 내가 가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면 어쩌려고 저렇게 여유만만 하게 나오는 것일까"혹시 그의 무공이 갑자기 증진된 것이 아닐까?) 그녀가 보기에는 백방생의 뒷모습은 무공의 경지에 대해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기이했다. 그녀는 감히 시험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시 생각했다. "좋아. 어쨌든 돌아가서 오라버니와 의논하는 것이 더 낫겠지. 지금 저 들은 혈도가 제압되어 있어 힘도 쓰지 못하는 상태이고!" 석채릉은 아까 어째서 혼절하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다가 문득 말했다. "좋아요. 우리는 일단 이만 돌아가기로하죠. 하지만 뜻을 성취하지 못 한 이상에는 반드시 내일이고 모레고 다시 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거예요. 그때는, 흥! 당신이 감히 나를 건드린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어 요!" 말과 함께 석채릉은 거실의 아래쪽으로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 뒤 를 백의노인들이 간신히 뒤따라서 사라져 버렸다. 백방생은 그렇게 서서 석채릉과 백의노인들이 완전히 장원을 떠나고 난 뒤에야 문득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집사, 무슨 일이오?" 오십대초로의 백발노인인 집사가 이윽고 그 두명의 시녀들과 함께 나 타났다. 집사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주인어르신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방생은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집사는 한 장의 금표를 조심스럽게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까 백방생이 두 시녀에게 주었던 그 천냥짜리 금표였다. 백방생은 의아해 하며 말했다. "아니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 집사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사실 그 금표의 진위 여부도 조사를 했었지요. 하지만 이내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희들 은 이미 많은 보수를 받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은 거금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백방생은 그제서야 그들의 의사를 알고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아까 내가 이곳의 상황이 위험해 지자 여러분을 위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진정되었고 또한 여러분이 이토록 진실하 게 나를 대하니, 문득 다시 욕심이 나는군요. 여러분은 모두 다시 이 곳에서 나를 위해 일을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물론 급여는 전과 동일하고 일자리도 동일합니다. 다만 그 금표는 일단 집사께서 맡아 두 셨다가 만일 장원내에 무슨 일이 생기고 내가 그 보상을 해드리지 못하 게 되었을 때 여러분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집사는 그만 그 말에 감격한 듯이 전신을 부르르 떨며 거듭 고개를 조 아렸다. "고맙습니다, 주인어르신! 저희들은 사실 일자리가 목숨만큼이나 소중 한 것입니다. 모두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일하겠다고 하고 있었지요. 주 인어르신께서 게다가 선뜻 이 거금을 맡겨 놓으시니 저희들은 다소 위 험이 있을지라도 안심하고 일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주 인어르신!" 사실 집사 등도 이곳에서 과연 안정되게 계속 일할 수가 있을 지 은근 히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정도의 금액이라면 설령 이곳을 그 만 두더라도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동안 사용하는데 충분하고도 남 음이 있을 것이다. 과연 시녀들도 모두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식탁위에 음식들을 차려놓고 있었다. 백방생은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에 문득 거실에서 조용히 좌선명 상을 했다. 이때는 그의 무공은 운기행공이 전혀 필요없고 그저 좌선명 상만 하면 되는 경지가 되어 있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백방생이 천천히 후원의 연못가를 거닐고 있을 때 문 득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바로 다름아닌 당리(唐莉)였다. 백방생은 뜻밖에도 오랜만에 그녀를대하게 되자 일순 기쁜 마음에 웃으 며 그녀를 맞았다. "아니 이게 얼마 만이오"그래 용케 내가 사는 곳을 알아 내셨소이 다?" 당리는 비록 아름답고 깨끗한 담황색의 의삼을 걸치고 있었으나 안색 은 다소 수척해 보였다. 그녀는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본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요." 백방생은 그녀에게 많은 하고싶은 말이 있는 것을 보고 본채로 그녀를 안내했다. 시녀들은 눈치 빠르게 거실에 차를 내왔고, 두사람은 훈훈한 실내에서 따뜻하고 향긋한 차(茶)를 마시며 마주했다. 백방생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으므로 당리는 이윽고 먼저 말 하기 시작했다. "저는 그동안 멀리 다녀왔어요. 당신이 저때문에 곤란을 겪었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백방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당리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게 어디를 다녀왔냐고 묻지 않으니 다행이로군요. 별로 할 말도 없지만..., 헌데 당신은 그간 살이 좀 빠지고 몸은 오히려 더욱 나아진것 같군요.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당리의 말하는 태도는 그윽하면서도 약간의 풍정이 서려 있었다. 백방 생은 그녀가 이렇게 멋을 아는 여자일 줄은 몰랐기에 다소 뜻밖이었다. 이전에는 매우 강렬하고 냉정하게만 보이더니 이제는 그저 가만히 있기 만 해도 부드러운 정회(情懷)가 우러나는 것 같지 않은가" 백방생은 그녀의 모습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가지의 일이 있었소.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별일이 아니라는 생각 이 드는구려." 당리는 그의 얼굴을 잠시 찬찬히 바라 보았다. 이어 약간 웃으며 말했 다. "나는 처음에 사람을 잘못 찾은 것이 아닌가 했어요. 사별삼일(士別三 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고 하더니, 정말 당신은 보면 볼수록 훨 씬 달라진 것 같군요. 하지만 저는 굳이 당신의 그 얘기를 들으려는 것 은 아니예요." 백방생은 포권하며 말했다. "낭자께선 소생께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시오?" 당리는 약간 웃으며 말했다. "저는 독하게 마음먹고 살아왔지만 그러나 염치없는 계집은 아니예요. 제가 해야할 바는 반드시 하며 살아가려고 하죠. 제가 이번에 이곳에 온 것은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예요." 백방생은 순간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알고보니 당리는 이전에 그와 했 던 일종의 약조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멍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이미 없었던 것이 되고 만 것이 아니오?" 당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비록 변변찮은 계집이지만 그러나 정조가 무엇인지 알고, 그리고 아무렇게나 마음을 바꾸는 사람은 아닙니다. 전날 당신이 나에게 은혜 를 베풀었고 그 때에 이미 저는 당신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리 고 이어 당신이 그 돈을 저에게 그냥 주셨을 때에는 오히려 그러한 결 심이 굳어지게 되었지요. 제가 이번에 멀리 갔다온 것은 바로 그러한 것 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어요." 백방생은 문득 그녀가 자신에게 가겠다며 떠났었다는 얘기를 기억에 떠올렸다. 당리는 지금 조용해보였지만 그러나 그녀의 내심에는 강한 신념과 의지가 고집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 고집을 꺾 는 것은 무리인 것으로 보였다. 백방생은 내심 약간 어리둥절해 졌지만 이내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이 달라지게 되면 떠나겠지?)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이 곳의 안주인이 되겠다는 말이오?" 당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주인이라는 말은 당치 않아요. 그저 저를 첩실 정도로 여기고 버리지 만 않는다면 저는 만족할 거예요. 저는 다시 마음을 바꾸지 않고 한마음 으로 당신을 받들고 섬기도록 하겠어요." 백방생은 미소하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사실 나는 그대의 그러한 마음씨가 너무 나도 고마와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소.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었으 니 나로서도 약간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고..., 일단 그대가 이곳에서 마음대로 지내되 우리 사이의 일은 약간의 유예기간을 갖는 것이 어떻겠소?" 당리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 때 한 명의 시녀가 다가와서 공손히 물었다. "아침식사는 어디에다 차릴까요, 주인님?" 백방생은 거실에다 차리도록 한 다음에 그 전에 집사에게 오라고 했 다. 집사는 이내 달려왔는데, 백방생은 그에게 당리가 앞으로 이 집에서 함께 살 사람이니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게 하라고 했다. 당리는 무 림세가에서 자라난 사람으로 그렇게 하인들과 대하는 것이 익숙했다.그녀 는 금방 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인사를 나누고 거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백방생과 당리가 마악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다시 한 명의 여자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다름아닌 석채릉이었다. 어제저녁에 그토록 다짐을 하고 돌아갔던 그녀가 오늘은 웬일로 혼자서 장원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백방생은 내심 이거 또 귀찮게됐군, 하고 생각하며 당리에게 석채릉에 관해서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당리는 처 음에는 의아해 했으나 나중에는 매우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백방생은 그 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그녀를 상대할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이윽고 석채릉은 다소 오만한 기색으로 하인들과 함께 삼층의 거실로 올라왔다. 백방생은 하인들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한 다음에 석채릉에게 말했다. "오늘도 또 왔구려. 그래 아침식사는 했소?" 석채릉은 물론 일찍 식사를 하고 왔다. 하지만 지금 백방생이 한 여자 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눈빛을 기이하게 굴리더니 말했다. "호호, 만일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 저에게도 밥을 줄 건가요?" 백방생은 스스럼없는 표정을 보였다. "물론이오. 이쪽의 자리에 와서 앉는 것이 어떻겠소?" 석채릉은 다소 생각해 보는듯 하다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쪽의 자리 에 앉았다. "아니예요. 저는 사실 식사는 이미 하고 왔어요. 그러니 여기에서 두 분이 식사를 하는 모습이나 구경해야 하겠군요?" 백방생은 묵묵했다. 그는 석채릉이 식사를 했다고 하자 다시 권하지 않 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당리도 전혀 입을 열지 않고 게다가 그녀를 별 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석채릉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두분이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은 마치 한폭의 그림과도 같군요"헌데 저 아가씨는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은데 대체 누구인지 소개시켜 주실수가 있나요?" 백방생은 당리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소개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리는 사천당문의 사람이니 석채릉이 감히 그녀를 해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리의 절정경지에도 오르지 못한 무공으로 어떻게 이미 최상승(最上乘)의 경지에 오른 석채 릉의 무 공을 당하겠는가" 백방생은 즉각 석채릉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바로 사천당문의 소낭자인 당리, 당낭자요. 이번에 일이 있어 서 이곳에 온 것인데, 아마 석낭자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석채릉은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보니 당신을 사모하여 오대세가간에 분란을 조성했다는 바로 그 당리, 당낭자로군요"이봐요"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군요. 나에 대 해서는 이미 저 남자에게 들었겠죠?" 백방생은 당리가 혹시 그 얘기를 듣고 화를 낼까봐 우려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당리는 아주 조용하고 침착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돌려 석채릉을 바라본 뒤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여 답례하는 것이었 다. 석채릉은 그것을 보며 입가에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마치 자신이 먹으려던 음식을 남에게 빼앗기게 되어 이글거리는 듯한 맹수의 눈빛 이라고나 할까"그런 점에서 백방생은 석채릉이 마치 암사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석채릉은 다시 백방생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오늘 매우 한가해 보이는군요. 물론 나와 얘기를 나눌 시간도 있으시겠죠?" 백방생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신 뒤에 당리와 함께 차를 따라 서 마시기 시작했다. |
첫댓글 잘 읽고 있습니다.
재미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잼 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