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철도의 가능성
총 연장 8만5155㎞, 연간 이용객 13억명
崔然惠 한국철도대 총장
⊙ 1956년 대전 출생.
⊙ 서울대 독문과 졸업. 독일 만하임대 경영학 박사.
⊙ 한국철도대 교수, 철도청 차장,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역임.
⊙ 저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잊혀진 대륙의 길을 찾아서> <철도경영론> 등.
러시아에서 철도는 단순한 교통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철도 연장이 8만5155km로 세계 2위의 철도대국(1위는 미국)인 러시아는 세계에서 철도의 위상이 가장 높은 나라다. 러시아에서 열리는 철도 행사에 참가하면, 저녁 메인 뉴스에 행사내용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철도공사 사장에게 행사 관련 축사를 보내는 모습 등이 방송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러시아의 도시마다 호화롭게 건축된 철도역들은 러시아 문화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 모스크바에는 장거리 철도역만 9개가 있는데, 제각기 독특한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다.
‘스탈린이 모스크바 시민들의 교회를 빼앗은 대신 지하철을 선물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스크바 지하철 驛舍(역사)들은 외국인 관광코스에 포함될 만큼 유명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노선을 따라 만날 수 있는 하늘색·민트색·노란색·분홍색 등 갖가지 파스텔톤 색깔로 단장된 역사들도 러시아 고유의 건축미를 자랑하면서 철도가 생활 속의 문화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러시아에서 철도가 사랑받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舊(구)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수송효율성이 높은 철도교통을 선호한 것도 사실이지만, 국토면적이 큰 러시아나 중국에서는 장거리 수송에 적합한 철도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극한적인 기후환경도 한몫을 한다. 여름에는 30∼40℃까지 올라가고, 겨울에는 영하 40∼50℃를 넘나드는 기온과 빙하로 인한 홍수 등 자연재해 때문에 매년 凍破(동파)되는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관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1990년 한·러 국교 개설 무렵 鄭周永(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시베리아 도로 건설 타당성을 조사한 후, “몇 십 년 후에나 다시 검토해 보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수요 측면이나 기후조건 등이 도로건설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개의 대륙에 걸친 광대한 국토와 낮은 인구밀도, 150여 개의 多(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러시아에서 철도는 전통적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통합의 상징이자, 통합의 실질적 수단으로 작동해 왔다.
소련 해체 후에는 러시아 국민, 나아가 CIS(독립국가연합: 구 소련을 구성했던 국가들의 협의체) 구성원들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철도의 위상은 더욱 격상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분리된 CIS 국가들을 세계에서 유일한 1520㎜ 광궤시스템으로 통합하고 있는 철도야말로 러시아인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광대한 제국 소비에트’에 대한 영원한 鄕愁(향수)를 달래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철도의 얼굴,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블라디보스토크역 구내에 있는 시베리아횡단철도 종착표지판. 탑에 시베리아 철도의 총길이 ‘9288’이 새겨져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노선으로, 러시아 국토를 횡단하며 유럽과 아시아 두 개의 대륙을 이어준다. TSR은 러시아 철도의 특징과 장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시베리아 철도의 총 연장은 9288㎞로 서울~부산 거리의 20배가 넘으며, 지구 둘레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열차에서 내리지 않고 줄곧 달려도 6박7일, 탑승시간만 156시간에 달한다. 달리는 동안 7번이나 시간대가 바뀌는데,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 간에는 11시간의 時差(시차)가 있다.
TSR을 따라 100여 개의 크고 작은 도시가 흩어져 있다. TSR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이루는 우랄산맥을 횡단하며 아무르·레나·예니세이·오브·볼가강 등 16개의 강을 가로지른다.
TSR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1891년 시작된 건설공사는 1차로 1901년 완공됐다. 이 노선은 지형과 기후여건상 공사가 어려웠던 바이칼호수는 열차페리로 대신하고, 극동노선 대신 淸(청)나라로부터 租借權(조차권)을 강탈한 만주지역에 건설한 東淸(동청)철도를 통해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했다. 당시 연간 러시아 철광석 생산량의 3분의 1이 철도건설에 투입됐다.
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 중 극동지역에 대한 군수물자 보급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자, 전쟁의 와중에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투입하여 바이칼 노선을 건설했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후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한 일본에 동청철도를 빼앗길 것을 염려해 극동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아무르철도를 건설했다. 이로써 1916년 현재와 비슷한 TSR 노선이 완공됐다.
당초 계획된 1년 반의 건설공기를 맞추기 위해 全(전) 구간을 6개 工區(공구)로 나누어 동시에 착공했지만, 25년이 걸린 것이다. 당초 계획이 엉터리였던 탓도 있지만, 그만큼 TSR 건설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 凍土(동토), 그리고 바이칼호수 등과 싸워야 했다.
1980년대 중반에 황금기 구가
건설비도 계획을 훨씬 초과했다. 3억2500만 루블(약 1억7000만 달러)로 예상됐던 건설비용은 10억 루블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외에도 동청철도 건설비로 4억1000만 루블, 동청철도를 대신하는 극동노선 건설에 5억 루블 이상이 소요됐다.
반면에 수요는 계획 당시 예측치에 턱없이 못 미쳐 초창기 TSR의 운행률은 4%에 불과했다. 이로 인한 재정부담은 결국 帝政(제정) 러시아의 몰락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미국이나 영국·독일 등 서유럽 국가에서는 철도건설이 민간 주도로 추진된 것과 달리, TSR은 전적으로 국가 주도로 유럽에서 들여온 借款(차관)으로 건설됐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은 무엇보다 태평양에 不凍港(부동항)을 개척하고 모피 등 시베리아의 자원을 조달하기 위한 군사적·경제적 이유에서 추진됐다.
TSR의 개통과 함께 지구 최대의 자원 寶庫(보고)인 시베리아도 본격 개발되기 시작했다. 철로를 따라 대도시가 등장했고 대학·도서관·극장 등이 들어서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왔다. 구 소련 체제가 건재하던 1980년대 중반 TSR의 연간 물동량은 16만 TEU에 달하는 등 황금기를 구가했다.
1990년대 초 구 소련 해체 등 정치적 혼란 속에 철도의 관리 체계도 허술해져 마적단의 출몰과 화물이 분실되는 사례가 속출하면서 TSR의 物動量(물동량)은 급격히 감소됐다. 2000년대 들어 많이 회복됐다고는 하지만, 현재 연간 수송량은 10만 TEU로 선로 용량의 50% 수준에 머물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남북철도 연결에 지대한 관심과 열의를 보이는 것은 일본과 한국의 물동량을 유치함으로써 TSR을 활성화시키고, 나아가 시베리아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다.
지구 위에 남아 있는 마지막 모험
필자는 2001년과 2002년 두 번에 걸쳐 TSR 전 구간을 여행했다. 철도 전문가로서 남북철도를 연결하여,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우리나라가 대륙으로 이어지는 그날을 꿈꾸며 중국과 러시아 철도를 열심히 연구하다 보니, 러시아 사람들도 평생 한 번 타기 어렵다는 시베리아 열차를 두 번이나 타게 된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지구 위에 남아 있는 마지막 모험’으로서 여전히 많은 사람의 꿈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우선 半(반)세기 가까운 ‘鐵(철)의 장막’ 시절 동안 접근 자체가 불가했던 만큼 러시아의 문화와 자연은 여전히 異國的(이국적)이고 낯설다.
철도만 하더라도 일단 궤도 사이의 간격이 1435mm인 표준궤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나라와는 달리, 1520mm 廣軌(광궤)라는 것부터 관심을 끈다. 국경역에서 거대한 車體(차체)를 들어 올려 표준궤에서 광궤로 대차 교환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현대사회에서 경험하기 힘든 原始的(원시적) 체취가 남아있는 점도 TSR의 매력이다. 우선 가도 가도 끝이 없을 듯한 대륙을 가로지르다 보면, 미국과 중국을 합한 것보다도 크고, 남북한을 합한 넓이의 100배가 넘는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두 개의 대륙에 걸친 러시아의 넓이가 느껴진다.
러시아 속담에 ‘40도가 안되면 술이 아니고, 영하 40℃가 안되면 추위가 아니며, 400km가 안되면 거리 축에 끼지 못 한다’는 말이 있다. 서울~부산 간 거리가 채 500km도 안되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공간개념이다.
숨결이 곧바로 고드름이 되어 버리는 영하 30℃의 추위, 하루종일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워진 눈 덮인 雪原(설원) 등 상상을 초월하는 겨울도 그렇지만, ‘시베리아는 춥다’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는 짧지만 극도로 화려한 白夜(백야)의 여름도 특별한 경험이다.
또 한 가지 우리에게 시베리아 횡단철도 여행이 특별한 것은 우리 역사와도 교차하는 역사의 길인 동시에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日帝(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선구자들이 이 길을 따라 대륙을 누볐고, 수많은 카레이스키가 시베리아 횡단열차 편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과정에 죽음을 맞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여행은 최소한 1주일 이상을 열차 안에서 지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고생도 하지만 재미있는 경험도 하게 된다.
어느 나라에서든 定時性(정시성)이 생명인 열차 여행의 최우선 수칙은 열차 시각을 엄수하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검표 등 탑승수속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1시간쯤 전에 역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주요 역에서 약 30분씩 정차한다. 이때 열차에서 내려 역주변을 둘러보며 키오스크라 불리는 매점이나 좌판도 구경한다. 특히 열차 시각에 맞춰 동네 아주머니들이 가지고 나온 막 삶은 감자나 옥수수, 양념 닭다리 등을 사먹는 것은 횡단철도 여행의 재미 중의 하나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역에 한국산 ‘도시락라면’이 진열돼 있는데, 러시아에서 아주 인기가 좋다고 한다. 가격이 비싼 편이라 어린이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 온 가족이 큰맘 먹고 도시락라면으로 파티를 열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정차역에서 잠시 하차했을 때에는 열차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열차의 출발 안내는 러시아어로만 방송되며, 수신호나 기타 어떤 신호도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2001년 여행할 때 바이칼 호숫가의 슬루지앙카역에서 독일 여행객이 열차를 놓친 일이 있었다. 여권과 지갑까지 객실 안에 두고 반바지 차림으로 사진 찍는 데 정신을 팔다가 열차를 놓친 이 독일인은 다행히 350km 떨어진 다음 정차역에서 다시 열차에 올랐다.
한편 열차 안에서 같은 객실을 쓰던 영국인의 신고로 이 손님이 열차를 놓친 것을 알게 됐다. 열차에 함께 탄 철도경찰이 즉시 출동해서 그 손님의 트렁크와 여권, 지갑 등 각종 소지품들을 조사하고, 인근 역에 연락을 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열차로 돌아온 그 독일인은 러시아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자기가 손짓 발짓으로 마을 사람의 자동차를 얻어 타고 오면서 겪은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는 “그 와중에도 자동차를 얻어 타는 데 300달러 달라는 것을 150달러로 깎았다”며 으스댔다.
러시아철도공사는 최근 시베리아 횡단노선에 운임이 1000만원이 넘는 초특급 관광열차를 도입했다. 하지만 비행기 요금의 7분의 1 수준의 저렴한 열차가 많이 있기 때문에 러시아 국민들에게 철도는 생활의 일부이며, 말 그대로 ‘서민의 발’이다.
외국인들에게는 여행객 차지가 부과되어 보통 150달러에서 요금이 시작된다. 창구에서 티켓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행사를 통해 구입하는 것이 편하다.
또 한 가지 ‘스릴’은 나 홀로 여행자는 열차의 객실을 누구와 함께 쓰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객실번호는 국적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컴퓨터가 배정한다. 실제로 생면부지의 남녀가 우연히 같은 방을 배정받아 무릎이 맞닿을 듯 좁은 공간에서 며칠씩 함께 보내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2001년 필자가 횡단열차를 탔을 때에도 우리 일행이 홀수라서 한 사람은 다른 방에서 낯 모르는 사람과 같은 방을 써야 했다. 말이 통할 것이라는 이유로 통역 담당이던 유학생이 그 방에 낙점됐는데, 예카테린부르그역에서 젊고 아리따운 러시아 금발 미녀가 룸메이트로 나타나 부러움을 산 적이 있다.
2박3일 동안 우리 일행과 함께했던 그 아가씨는 알고 보니 친정을 다녀오던 고려인의 아내였다. 2007년부터는 여성전용실 또는 남성전용실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아쉽게도(?) 오랜 전통의 이런 스릴은 사라지게 됐다.
러시아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해 처음에는 낯을 가리지만, 쉽게 마음을 여는 편이다. 까탈스러운 유럽 사람들처럼 음식 냄새에 민감하지도 않고, 집에서 싸온 음식을 서로 권하는 모습이 우리네와 비슷하다. 국산 초코파이나 컵라면은 초면의 러시아 사람들과 말문을 트게 하는 특효약이다.
시베리아 횡단노선의 일부인 모스크바~이르쿠츠크~베이징(北京) 노선에는 중국의 국제열차들도 운행되기 때문에 러시아 열차와 비교되곤 한다.
중국 열차들은 독일제 차량으로 2인실에 샤워실까지 갖추는 등 더 고급스럽기로 정평이 났다. 최근 러시아 철도공사도 超高價(초고가)의 럭셔리 관광열차를 도입하는 등 열차의 고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일반 정기열차 설비도 대체로 좋은 편이다. 아무리 추운 겨울 날씨에도 열차 내 난방은 땀이 날 정도로 잘된다. 섭씨 영상 30℃를 넘는 여름에는 객실의 냉방장치는 잘되는 편이지만, 소위 차륜냉방식이라서 열차가 운행되어야만 냉방이 되는 것이 흠이다. 여름에 열차가 정차역에 30분 정도 서 있으면 객실 안이 찜통이 될 수 있다.
열차 내에서 침대 시트나 수건은 알아서 교체해 준다. 차장에게 1~2달러만 주면 어느 때라도 새 것을 내준다.
아무래도 긴 철도여행에서 가장 불편한 사항은 화장실과 샤워 문제일 것이다. 러시아의 정규 열차에는 샤워 시설이 없고, 화장실은 객차마다 하나씩 있다.
화장실 안에 있는 세면대는 찬물만 나온다. 시골의 호텔들도 그런 곳이 많다. 수도꼭지를 누르고 있는 상태에서만 물이 나오는데, 배수구 막음 장치가 없어 한 손으로 고양이 세수를 해야 한다. 그런데 골프공이 세면대 배수구에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골프공 하나로 긴 여행길이 한결 편해질 수 있다니, 사소한 데서 얻는 행복이다. 열차화장실은 다음 정차역에 도착하기 30분 전에 폐쇄되는 것도 알아둘 일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운임에 식사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미리 준비해 가거나 식당차에서 사 먹어야 한다.
러시아의 식당차 서비스는 훌륭한 편이다. 무전기로 재료를 주문하고 다음 정차역에서 받는 방법으로 매일 두세 차례 신선한 재료를 공급받아, 모든 음식을 열차 내에서 직접 조리한다.
캐비어를 올린 흑빵 등 러시아의 대표메뉴가 제공된다. 잘 식지 않는 옹기그릇에 담겨 나오는 보르쉬라는 수프는 육개장과 비슷해서 우리 입맛에도 맞는 편이다. 지역 특산 메뉴도 나오는데, 이르쿠츠크 구간에선 바이칼 호수에서만 잡힌다는 ‘오물’이라는 생선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후식으로는 너무 진한 커피보다는 맛있기로 정평난 러시아제 아이스크림을 권할 만하다.
그런데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며칠씩 가다 보면 식사시간이 뒤죽박죽되기 일쑤다. 러시아 철도의 규칙에 따라 객차 안에 게시된 열차시각표는 모스크바 시간으로만 표기되어 있는데, 모스크바 시간이 현지시간과 큰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오후 1시(모스크바 시간)에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 10시에 저녁식사를 하는 식이다. 물론 이럴 때는 배꼽시계를 따르면 된다.
제2의 르네상스 준비하는 러시아 철도
러시아는 철도 총 연장이 8만5155km (사할린 1116km 포함)에 달하는 세계 2위의 철도 大國(대국)이다. 철도공사 직원 수는 120만명(2007년 통계)에 달한다. 철도기술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로 이용되는 복선화율(43.5%), 전철화율(50.4%), CTC율(72.9%)도 러시아 철도의 선진성을 보여준다. 총 영업연장이 3250km에 불과한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이다.
교통시장에서 철도의 경쟁력을 말해 주는 수송분담률은 여객 40%, 화물 42.5%에 달한다. 러시아철도공사가 운영하는 물류창고 등을 거쳐가는 화물들까지 포함하면 철도공사는 러시아에서 발생하는 총 화물의 83% 이상을 취급한다.
철도이용 여객 수는 연인원 13억명으로 일본·인도에 이어 세계 3위, 화물수송량도 중국·미국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다.
러시아 철도는 1997년 이래 흑자를 기록 중이다. 러시아철도공사의 예산규모는 러시아 GDP의 4%를 차지한다. 2007년 매출액은 9756억 루블(약 39조원)로 매출액 순위로 러시아 4위의 기업이다. 전체 수입의 77%를 차지하는 화물분야 덕분에 러시아철도공사는 여객분야의 손실을 보전하고도 2007년 845억 루블(약 3조4000억원)의 순이익을 실현했다.
교통부장관 및 차관, 재무장관, 철도공사 사장 등 11명으로 구성된 철도공사 이사회의 위원장은 주코프 연방정부 수석부총리가 맡고 있다.
철도공사는 블라디미르 야쿠닌 사장 밑에 수석부사장 1명, 차석부사장 2명, 그리고 10명의 부사장이 각각 책임사업부를 지휘한다. 야쿠닌 사장은 2000년 푸틴 대통령 취임 직후 철도부 수석차관에 임명돼 철도개혁 작업을 추진한 후, 2005년 6월 사장으로 취임했다.
푸틴의 최측근 인사로 알려져 있는 그는 한때 푸틴 전 대통령(현 총리)의 후임으로 거론될 정도로 러시아 政街(정가)의 실세 중 하나다. 러시아에서는 철도가 흑자사업으로 경제적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중요한 안보 시설로 간주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철도 首長(수장)은 상당한 실력자들이 임명된다.
야쿠닌 사장은 최근 1~2년 사이에 서유럽국가 중심의 국제철도클럽인 UIC총회 유치, 파리~모스크바 간 국제열차 운행, 독일철도물류회사의 지분 확보 등 전방위적 글로벌 비즈니스를 통해 러시아 철도의 활동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TSR, 2002년 전철화 마무리
1990년대 초 구 소련이 해체된 후, 신생 러시아는 19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정도로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빵가게 앞에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멈춰 선 열차와 썩어가는 야채 상자들이 즐비한 기차역이 세계 각국 TV에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경제위기도 문제지만, 철도의 마비가 서민 경제의 마비로 직결됐던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집권 이후 철도분야에 대한 투자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 결과 10여 년 동안 러시아 철도는 기술적·경영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유라시아 대륙연결 교통로인 TSR은 2002년 12월 25일 전철화사업을 마무리했다. 貨主(화주)에게 화물수송경로추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TSR 전 구간에 광섬유케이블을 설치하는 등 시설현대화 작업도 마쳤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속도는 평균 시속 60km 수준이지만, 옴스크~노보시비르스크 구간처럼 직선에 가까운 평지 구간에서는 시속 100~120km로 질주한다.
또 전체 노선의 45% 정도가 長大(장대)레일화되어 있어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다. 레일 한 개의 길이는 25m인데, 이런 레일을 8개까지 이어서 하나의 레일로 만든 것을 장대레일이라고 한다. 시베리아처럼 연교차가 거의 100℃에 가까운 지역에 장대레일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음새 용접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TSR의 마케팅에도 힘을 쏟고 있다. 1998년 러시아 철도부는 ESCAP(유엔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와 공동으로 TSR 컨테이너 운송 시범을 실시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동유럽 구간을 9일 만에 주파함으로써 TSR의 속도 경쟁력을 입증했다.
열차 이름으로 살아 있는 레닌·스탈린
러시아에서는 증기기관차·디젤기관차·전기기관차가 운행되고 있다. 러시아 철도연장의 절반 가까이가 전철화된 지금은 전기기관차가 주력을 이룬다.
기관차의 모델명은 구 소련 시절 정치가들의 이니셜을 따 지어졌다. 초기에 제작된 증기기관차는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KGB(국가보안위원회) 창설자인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이니셜인 FD 시리즈로 명명됐다. 1930년대 제작된 증기기관차들은 모두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니셜을 따서 IS 시리즈로 불렸다. 전기기관차의 모델명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따 VL 시리즈로 명명됐다. 레닌은 전기기관차를, 스탈린은 증기기관차를 상징하는 셈이다.
러시아는 1973년까지 디젤 기관차 1만량 이상을 제작한 세계 최대의 디젤 기관차 생산국이다. 1990년 제작된 디젤 기관차 TE P80은 최고속도 271km를 주파하여 세계에서 가장 빠른 디젤기관차로 기록됐다. TE는 러시아어로 ‘디젤차량’이라는 의미다.
1997년 7월 최고속도 200km인 고속철도 차량 소콜(‘매’라는 뜻)이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간 약 700km에서 운행을 개시했다. 올해 말부터 러시아철도공사는 독일 지멘스사가 제작한 최고시속 250km의 고속철도차량을 투입하고, 2020년까지 고속新線(신선)을 18개 노선에 약 2500km로 확대할 계획이다.
2007년 푸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제1차 러시아 철도포럼에서 야쿠닌 사장은 ‘2030 철도발전전략’을 공표했다.
2015년까지의 1차계획과 2030년까지의 2차계획으로 구성된 2030전략이 계획대로 진전되면 2030년 러시아 철도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첨단화·선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계획에 의하면 2030년까지 철도부문에 총 13조 루블(520조원)이 투자된다. 투자재원은 연방정부·지방정부·러시아철도공사가 분담하는데, 특히 국제 컨소시엄을 통한 해외자본 유치 및 민관 합작을 적극 활용한다는 내용이다.
‘2030 발전전략’에는 우리나라와 관련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작년 12월 한국철도대학이 주최한 유라시아 국립철도대학교 포럼에 참석했던 러시아 연방교통부의 페트라코프 철도차관에 따르면, 나진~하산 간 철도연결사업은 올해 말 완공 예정이고, 2015년까지의 1차계획에는 사할린~러시아 본토 간(7km) 교량건설사업이 포함되어 있으며, 2030년까지는 사할린과 일본 홋카이도 간 47km를 해저터널로 연결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일본과 유라시아 대륙이 우리나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물류산업에도 상당한 타격이 올 수 있는 만큼 하루빨리 남북철도 연결사업을 진척시켜야 한다.
러시아철도공사의 의욕적인 ‘2030 철도발전전략’에 대해 일부에서는 비판적인 의견도 있다. 우선 ‘영원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중국과 비교하면 투자 규모면에서 한참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중국은 막대한 규모의 철도 SOC 투자를 통해 철도산업을 국가성장동력으로 육성한다는 ‘로코모션 이코노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철도부 발표에 따르면 2008년 철도분야에 우리 돈으로 70조원이 투자됐고, 올해부터 향후 3년간 700조원을 철도건설에 투자한다고 한다. 러시아의 ‘2030 철도발전전략’은 일단 투자규모면에서 중국에 한참 뒤떨어져 있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수많은 계획을 세웠지만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전력이 있는데다가, 계획기간이 지나치게 장기적이고 재원의 상당부분을 민간투자에 의존하고 있어, ‘2030 철도발전전략’의 성공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러시아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보시비르스크, 하바로프스크 등 전국에 11개의 철도부 산하 국립철도대학을 두고 철도전문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철도대학의 입시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우리나라의 과학고등학교와 비슷한 철도영재학교도 있는데, 이 학교를 거친 청소년들에게 우선적으로 철도대학 입학허가가 주어진다.
대학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석·박사 과정이 개설되어 있으며 학생 3만명, 교직원 1000명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교육시설도 뛰어나지만, 기숙사 시설, 공연장을 비롯한 동아리활동실 등 학생복지시설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지난 2001년부터 한국철도대학과 교류협력관계를 맺어온 노보시비르스크 소재 국립시베리아교통대학교(STU)의 경우 교내에 대형 실내수영장과 학생·교직원 전용 병원과 물리치료실까지 갖추고 있다.
이 대학에는 2002년부터 평양철도대학생 30여 명이 유학했다. 2001년 김정일이 모스크바 방문길에 이 대학에 들렀을 때 즉석에서 유학생 파견을 결정했다고 한다.
필자는 이 대학에서 개최된 국제세미나 등에서 전열 평양철도대학교 총장, 이명철 부총장을 만난 적이 있다. 전열 총장은 동독 드레스덴 공대에 유학한 전기공학자이고, 이명철 부총장은 모스크바 대학 출신의 철도차량 전문가다. 두 사람은 “유학생 지도를 위해 방학 때마다 노보시비르스크를 방문한다”고 말했다. 작년 여름 북한 유학생들은 모두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지난 2007년 한국철도대학이 중심이 되어 유라시아 대륙의 국립철도대학교 간 국제포럼이 결성됐다. 러시아의 3개 철도대, 중국 3개 철도대와 몽골 철도대, 카자흐스탄 철도대 및 베트남 호찌민교통대 등 5개국 11개 대학이 참여해 정례적인 국제세미나 개최와 상호방문을 통해 학술교류를 강화하고 있다.
광복 전 우리나라에는 6개의 對(대)중국 노선과 1개의 對(대)러시아 노선이 운행됐었다. 현재 북·중 간에는 신의주~단둥을 비롯한 3개의 노선이, 그리고 북·러 간에는 TSR과 연결되는 두만강~하산 간 1개 노선이 있다. 신의주~단둥 노선은 주 3회, 평양~모스크바(1만214㎞) 간 국제 여객열차는 주 1회 운행되고 있다. 남북철도만 연결되면 우리도 곧바로 대륙철도망에 편입될 수 있는 상황이다.
남북철도 연결사업은 다양한 측면에서 유·무형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인천~남포 간 해상운송에 의존하는 남북 간 물동량이 철도로 전환되면 운임은 4분의 1 이하로, 1주일 걸리던 수송기간은 1~2일로 단축되어 연간 2500억원의 물류비 절감효과가 있다. 더 나아가 남북철도 연결은 동북아 및 유라시아 대륙철도망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남북철도와 대륙철도 연결사업에서 기술적 문제는 그리 크지 않다. 예컨대 가장 큰 문제인 궤간의 차이도 換積(환적)을 하거나, 대차 교환방식으로 해결하면 된다. 최근에는 가변형 대차시스템이 장착된 열차가 개발되어 운행되고 있다.
그간의 경과에서 볼 수 있듯이, 남북철도 연결사업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적 변수다. 남북철도사업은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3대 경협사업의 하나로 추진됐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고작 경의선과 동해선에서 각각 20여 km 남짓한 단절구간을 잇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2007년 12월부터 문산역에서 개성 공단 내 봉동역까지 정규 화물열차가 매일 한 번씩 운행했지만 수송실적은 극히 미미했고, 그나마 작년 12월 중단됐다.
우리 철도와 대륙철도의 연결을 위해서는 북한철도의 현대화가 선결과제다. 북한은 철도연장이 한국의 1.5배가 넘는 등 겉보기에는 철도강국이지만, 실제로는 정상운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설이 노후됐기 때문이다.
나진~하산 간 철도연결사업에 관여하고 있는 러시아 극동철도대학교(하바로프스크 소재)의 발렐야예프 교수에 따르면, 50여 km 남짓한 나진~하산 구간에서만도 10개의 역과 3개의 터널, 40개의 교량을 사실상 신설해야 할 형편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북한철도망 개량비용은 낮춰 잡더라도 수십 조원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참여한 실사조사를 토대로 사업비를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 북한의 현물참여 유도, 적정한 수준의 개보수 등 비용절감 방안을 찾아야 한다.
북한철도 현대화사업에서는 일반적 경제성 분석 외에 특수한 상황들도 고려돼야 한다. 우선 한국은 이 사업을 통해 중국이나 러시아, 더 나아가 유럽으로 가는 통로를 얻게 된다. 1만5000여 km에 달하는 유라시아 철도연장에서 북한 통과구간은 500km가 안된다.
북한 교통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남북관계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며 통일에 대비한 先行(선행)투자의 성격이 있다.
철도는 기술종속성이 크기 때문에 북한 철도는 반드시 우리 기술에 의해, 우리 시스템으로 건설해야 한다. 도로·항만 등과 달리 철도는 북한이 독자운영하기 어려워 결국 한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남북 간 교통시스템의 일원화를 위해서도 우리나라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북한철도 현대화를 주도할 경우, 국가 정체성과 관련되는 철도를 넘겨준다는 자존심상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호환성 확보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북한철도 개량사업은 통일 전에 하는 것이 유리하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입증됐듯이, 통일 후에는 북한 내 토지보상 또는 소유권 반환 문제 등이 제기되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커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러시아와 중국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북철도 및 대륙철도 연결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왔고, 최근에는 구체적인 투자 제안이나 계획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는 2006년부터 북한과 합의한 나진~하산 간 철도 연결공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계획대로 올해 안에 완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최근 남북관계 경색으로 철도 부문에서의 남북한 교류협력은 중단된 상태다. 하지만 남북 및 대륙철도 연결사업은 어차피 장기적인 비전하에 추진돼야 한다. 남북 간 대화 중단으로 인한 공백기를 남북철도 및 대륙철도 연결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활용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런 공백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선 한강 이북의 선로용량 확보, 동해중부선 건설 등 시간과 투자를 요하는 국내 철도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북한·중국·러시아·유럽 철도와 기술적·운영적 호환성 확보를 위해 필요한 과제들을 발굴해 해결방안을 연구해야 한다.
북한철도 개량사업은 사업추진의 안정성, 막대한 투자비, 추후 운행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서도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국제 컨소시엄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충분한 검토와 준비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모델로 이해관계자들을 끌고 나가야만 실익 없이 돈만 대는 잘못을 피할 수 있다.
대륙으로 연결되는 우회로 개발에도 적극 노력해야 한다. 부산항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연결되는 해상 운송 노선이나, 서해안~중국 간 열차페리 등은 TKR(한반도 종단철도)·TSR이 연결되더라도 충분히 경제적 가치가 있는 루트다.
오늘날 철도는 전 세계적으로 녹색성장의 총아로 거듭나면서 제2의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남북철도가 연결되면 우리나라는 유라시아대륙 물류시스템의 시·종착지로서 물류허브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여건과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