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현장을 가다] (7)붕괴사고 20년 서울 성수대교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2.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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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현장을 가다] (7)붕괴사고 20년 서울 성수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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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9. 17:08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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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현장을 가다] (7)붕괴사고 20년 서울 성수대교
성수대교 붕괴 20년… 여전히 악몽 꾸는 '생존자'
김지은 기자
한국일보 수정: 2014.10.11 04:40 등록: 2014.10.11 04:40
이경재씨 "아직도 다리 지날 때 악몽...
정부가 대형사고 후유증 책임져야"
1994년 경찰의 날 賞받으러 가는 길
승합차 양옆 아스팔트 하늘로 치솟아
꼬꾸라진 버스에선 비명.
..아비규환
차 막히면 고통... 집은 1,2층만 고집...
천운에 살았지만 갈수록 후유증 더해
"아스팔트 위 세월호 유족들이 걱정"
성수대교 붕괴사고 생존자인 이경재(41)씨는 “성수대교는 당시 의경으로 복무하면서 이틀에 한 번 꼴로 운전하며 오갔던 다리”라며 “사고 때를 생각하면 주뼛주뼛 머리칼이 선다”고 말했다. 이씨가 성수대교 북단 아래서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hk.co.kr
“나는 캡~이었어. 그저 시킨 대로 하지만 그건 난 아냐~”
라디오에선 신나는 가요가 흘러나왔다. 김진우의 노래였다. 날은 흐렸다. 그래도 기분 나쁠 일 없는 아침이었다. 서울경찰청 제3기동대 40중대 소속 수경으로서 표창을 받으러 가는 길. 잘 다리고 닦은 기동복과 군화도 갖췄다. 49주년 경찰의 날, 좋다면 좋은 시작이었다. 함께 표창을 받으러 가는 차 안의 동료 10명도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렀다.
승
합차는 성수대교를 달리고 있었다. 장안동에 있는 중대에서 개포동에 있는 대대까지 가려면 건너야 하는 다리다. 운전병인 내겐 아주 익숙했다. 입대 이래 2년 간 이틀에 한번은 차를 몰고 건넜으니까. 오늘은 표창 수상자라고 운전대를 잡지 않은 게 다행인 걸까.
오전 7시 38분 무렵, 다리 가운데쯤 이르렀을 때다.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브레이크 잡아!!”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차 양 옆의 아스팔트가 하늘로 치솟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하는 찰나, 정신을 잃었다.
깼을 때 주위는 적막했다. 눈을 떴는데도 꿈인 것 같았다.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차 옆에 왜 물이 보이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 앞에 있었다. 알고 보니, 땅이 솟은 게 아니라 차가 꺼진 거였다. 다리 상판 조각과 함께. 머리 위에 흉물스럽게 찢겨 속살을 드러낸 성수대교가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승합차 밖으로 나왔을 땐 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앞에 16번 버스가 고꾸라져 있었다. 뒷자리 차창 밖으로 여성 세 명의 머리칼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구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을 끄집어내고 건졌다. 부상자들의 저체온증이 걱정됐다. 차 안에서 꺼낼 수 있는 헝겊이란 헝겊은 다 동원해 덮었다. 어느새 우리도 속옷만 입은 채였다. 정신 없는 아비규환의 시간이 흐르고, 멀리서 119보트와 경찰 구조선이 보였다.
이날 살아남은 사람은 사고를 당한 49명 중 17명뿐. 이마에 상처만 낸 채 생존한 내겐 너무도 다행인 날이지만 가장 기억하기 싫기도 한 날, 바로 1994년 10월 21일이다.
이경재(41ㆍ위자드LED 대표)씨가 기억하는 성수대교 붕괴사고다. 그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머리가 주뼛주뼛 선다”고 했다.
겉으로 보면 말짱하다고, 천운이라고 하겠지만 그의 속은 전혀 아니다. 처음 얼마간은 이씨도 스스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고 후 5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며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이며 이겨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생각하지 못한 후유증이 밀려왔다. 키 187.5㎝에 건장한 체격의 이씨는 다리건 건물이건 높은 곳에 잘 가지 못한다. 사고 후 겪는 가장 힘든 일이다.
“차로 다리 건널 때가 가장 고통스러워요. 만약 어쩔 수 없이 건너야 하면, 가급적 바깥 차로를 택합니다. 가운데 차로일수록 완충 때문에 다리가 흔들거리는 느낌이 강하거든요. 다리 위에서 차가 막힐 때가 가장 괴로워요. 차를 돌려서 반대편으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집도 고층은 피한다. 어느 새 그는 늘 1층 또는 2층에만 산다. 지금 사는 곳도 1층이다. 사고 이후 놀이기구를 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조명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터라 때론 높은 곳에 올라가 작업 현장을 봐야 하는 일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다.
“생각해보세요. 누가 ‘내가 지금 건너는 다리가 무너진다, 살고 있는 집이 주저 앉을 거다’라고 상상하겠어요? 그런데 그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고, 겪은 거죠. 처음에는 이 정도로 후유증이 점점 커질 줄 몰랐습니다.”
그가 사고 후 받은 조치로 기억하는 건 경찰병원 입원 치료와 7~10일쯤의 휴가가 전부다. 보상금도 받지 못했다. 그러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이씨는 “심리치료나 상담은 들어보지도 못했다”며 “사고 후 어떻게든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괜찮다’고 되뇌었는데 이겨낸 게 아니었고 혼자선 이겨낼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생존자가 유달리 걱정이 되는 건 그래서다. 이씨는 “수년 간에 걸친 장기적인 치료를 정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금 사고를 겪은 당사자나 가족은 치료를 거부하거나 ‘이젠 됐다’며 기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을 설득해서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게 해야 합니다. 그것도 정부가 할 일이죠.”
자신이 그런 사후 조치를 받지 못했고, 후유증을 겪고 있는 터라 그의 말은 더 절절하다.
그런데 지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심리 치료는커녕 사고 원인을 제대로 밝힐 법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느라 아스팔트에 서는 일이 더 많다. 이씨는 “정부가 가족들의 의견을 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고 후 또 하나 크게 달라진 게 있다. 바로 가치관이다.
“운명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사고 전에는 늘 미래를 꿈꿨어요. ‘나중에 뭘 해야겠다’는. 그런데 사고 후에는 현재에 집중해요. 지금 이 순간을 재미있게 잘 살자는 생각이지요.”
여학생 등 32명 앗아간 사고… 이어진 판박이 참사, 20년 세월이 무색하다
"알맹이 없는 성장 재확인만"
‘다리가 무너질 수도 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국민의 뇌리를 때린 충격은 이것이다. 사고는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께 일어났다. 출근길 직장인, 등굣길 학생들이 탄 차가 쉴새 없이 지나던 시간이었다.
성수대교 5, 6번 교각 사이 상부 골조 구조물인 트러스가 주저 앉았다. 이 지점을 달리던 경찰 승합차 1대와 승용차 2대가 트러스와 함께 떨어졌다. 붕괴 경계에 걸쳐있던 승용차 2대는 물 속에 빠졌다. 16번 서울 시내버스 역시 경계선을 달리다 떨어지면서 뒤집혀 추락했다. 떨어진 차량 6대에 타고 있던 시민은 49명. 이 중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에는 강을 건너 등교하던 무학여중ㆍ고 학생 9명이 포함돼있었다.
국민이 더욱 크게 분노한 건, 사고가 인재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미 1년 6개월 전 성수대교를 시급히 보수해야 한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서울시 윗선은 묵살했다.
게다가 동아건설이 시공할 당시부터 부실하게 지어졌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다리 상판을 떠받치는 트러스 수직재의 용접부위가 불량해 차량의 하중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박형주 가천대 교수(건축공학)는 “시설물 붕괴 재난의 본격적인 효시 격인 사고”라며 “시공할 때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지관리, 보수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는 산업화의 폐단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화학부)는 “성장 위주의 건설 속도전이 만든 ‘한강의 기적’이 실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증명한 중대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성수대교 붕괴 이후 온갖 재난이 이어졌다. 이듬해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4월 28일)와 삼풍백화점 붕괴(6월 29일)가, 이후로도 씨랜드 화재 참사(1999년 6월 30일),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2003년 2월 18일) 등이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돌이켜보면, 당시 잇단 사고에도 우리 사회는 그리고 정부는 배운 게 없었다. 판박이 같은 인재가 되풀이 됐지만, 재발을 막는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조치는 늘 구호에 그쳤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정부가 치유와 복구, 재발 방지를 하기보다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거나, 얼른 사고가 국민 뇌리에서 잊히는 사회적 망각 만을 바라온 듯 하다”고 말했다.
그 대가는 지금도 치르고 있다. 올해 역시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2월 17일), 세월호 침몰 참사(4월 16일)가 났고 국가의 신뢰도 함께 추락했다.
이택광 교수는 “우리 사회가 이룬 성장이 알맹이 없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는 재확인의 연속이었다”며 “동시에 정부에 대한 반감, 국가에 대한 불신,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도 낳았다”고 말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성수대교의 어제와 오늘
1979년 왕복 4차로 건설...사고 후에 재시공으로 8차로로
성수대교는 총길이 1,160.8m, 너비 19.4m의 왕복 4차로 다리로 1979년 10월 준공됐다.
사고 당시 하루 평균 통행량은 10만5,000여대였지만 많을 때는 하루 17만2,600여대로 교통량이 가장 많은 한강 다리 중 하나였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 다리가 무너지고 약 6분 뒤 성동소방서와 강남소방서에 사고가 접수됐지만 경찰 헬기는 사고 발생 52분 후, 특전사와 해군 해난구조단 등은 2시간 후 현장에 각각 도착해 늑장 구조라는 비판을 받았다.
서울시는 사고 이후 강교 철판을 기존 교량보다 30% 정도 두껍게 재시공해 1997년 7월 규모 5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다리로 재개통했다. 성수대교는 이후 왕복 8차로 다리로 확장됐다. 2013년 현재 하루 평균 통행량은 4만8,306대로 사고 당시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떨어졌다.
연다혜 인턴기자(경희대 언론정보학과 3년)
[출처] [현대사의 현장을 가다] (7)붕괴사고 20년 서울 성수대교|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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