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설교본문 묵상.
빌립보서 4:4.
主 안에서 恒常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Gaudete in Domino semper : iterum dico gaudete.
Χαίρετε ἐν Κυρίῳ πάντοτε· πάλιν ἐρῶ, χαίρετε.
바울 사도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거듭 권면하는 이유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육신이 편안하고 걱정근심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즐겁고 기쁜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기쁨은 굳이 교회와 성도들이 아니더라도 세속인들도 마찬가지로 본성적으로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권면이 될 수 없다. 또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마치 아무일 없는 것처럼 억지로 웃음을 자아내고 쥐어짜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억지 기쁨은 단지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보다는 없는 것처럼 외면해버리려는 세속인들의 희망고문적인 자기방어기제에 불과하다. 바울 사도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한 권면의 의미는 교회와 성도가 복음의 원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여러 고난과 고통과 핍박해들을 당하게 될 때 그것들에 파묻혀서 절망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외면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직시하되 믿음의 눈으로 능히 견뎌내고 이겨낸다는 것과 그로 인해 주님께서 장차 큰 상급을 주시리라는 것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복음에 순종하는 신앙으로 인한 고난과 고통과 핍박해는 교회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면서 겪게 되는 것이나 어떤 외부적인 요인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도 이 범주에 들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도리어 그렇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어려운 상황은 교회 전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서 한결 수월하게 대응해 나갈 수 있다. 정작 성도의 기쁨을 가로막는 신앙의 난관은 역설적이게도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각자의 처지에서 겪게 되는 것들인데 대표적으로 가난과 질병이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가난과 질병은 성도들 뿐만 아니라 세속인들도 보편적으로 당하게 되는 어려움인데, 이에 대한 세속인들의 반응은 자기 처지를 비관하고 저주하거나 정반대로 사탄이 그리스도 여호와께 욥에 대해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고 항변한 바와 같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설령 그것이 불법적인 짓이라 하더라도 가난과 질병을 이겨내고자 하거나 아니면 그저 자기 처지가 운명과 숙명인 것처럼 아무 노력없이 오늘만 살고 죽을 것처럼 방탕하게 보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누구나 겪는 가난과 질병이라고 해서 세속인들처럼 대응해서는 안되고 그것을 믿음의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자신보다 부유하고 건강한 사람들을 보며 자학적인 비교에 빠져 절망과 저주와 신세한탄에 빠지기보다는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이 있다는 것과 잠시 잠깐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건강이 허락된 것에 믿음으로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난과 질병의 현실을 굳이 외면하고 부정하며 헛된 희망고문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가난과 질병의 정도를 명확히 알고 영을 새롭게 하는 신앙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어차피 나아지지 않을 가난과 질병이라고 해서 하루하루를 허랑방탕하게 보내기보다는 주님께서 인류에게 일반은총으로 내려주신 여러 문명의 제도와 의약학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되 주님의 섭리하심을 기대해 나가야 한다.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이 땅에서 거류민이 아니라 나그네와 같고 집주인이 아니라 세입자와 같으므로, 아무리 속해 있는 국가와 사회가 불안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불만을 공공연하게 표출하기 보다는, 믿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 국가와 사회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국가 지도자를 위해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