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계기(契機) ① 쩌어억―! 벽력음과 함께 무덤이 좌우로 갈라졌다. 동시에 그 속으로부터 하 나의 시커먼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크크... 노부라면 능히 네 한을 풀어 줄 수 있다." 휘이이잉―!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 아삼을 덮쳐왔다. "헉!" 아삼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그는 누군가에 의해 꼼짝달싹도 못하도록 멱살을 잡혀 있었고, 덕분에 그의 간담은 콩 알만 하게 오그라들고 말았다. 왜 아니겠는가? 깊은 밤, 무덤 속에서 뛰쳐나온 괴인에게 졸지에 멱살을 내맡기게 된 그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귀... 귀신......!' 그래도 다행히 정신은 잃지 않아 그는 경황 중에도 눈을 떠 괴인 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괴인은 실로 꿈에 볼까 두려운 용모의 소유자였다. 우선 머리통이 보통 사람보다 최소한 두배는 컸으며 피부는 검다 못해 불에 탄 숯덩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함지박만한 입을 쩍 벌린 채 웃고 있었는데, 울퉁불퉁한 그 얼굴이란 한 마리의 흑두꺼비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역시 귀신이었어!' 단정을 지은 아삼은 절망에 휩싸여 중얼거렸다. '꼼짝없이 죽었군. 필경 저 큰 입으로 나를 잡아먹겠지.' 반면에 흑면괴인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덜덜 떨고 있는 그를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크크... 네놈의 근골은 꽤 쓸만한 편이구나. 하지만 보기보다 너 무 겁이 많아. 그래 가지고서는 이 하토살군(蝦土煞君)의 제자가 될 수 없다." '하토살군?' 아삼은 충격때문에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괴상한 이름을 듣자 얼 이 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것이 생전에 불리웠던... 노선생의 존함이오?" "뭣이?" 괴인 하토살군은 반문하더니 기소를 흘렸다. "크크... 그럼 내가 언제 죽기라도 했단 말이냐?" "다... 당신은 귀신이 아니었소......?" "형편없는 겁장이 녀석이로고! 그래서 겁을 집어 먹었더란 말이 냐? 내가 잡아먹을까봐 무서웠겠구나?" "그... 그야......!" 아삼은 상대의 생김새에 대해 말해 주려다가 참았다. 어찌 되었건 하토살군이 귀신이 아니라는 것과,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으 리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캑캑거리며 말했다. "우선 이 손... 좀 놓아 주시오." "쯧! 영 맘에 안드는군." 괴인은 혀를 차며 그를 홱 내동댕이쳤다. "아이쿠!" 아삼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그는 땅바닥을 한참이나 데 굴데굴 뒹굴고 나서야 간신히 일어설 수가 있었다. 하토살군이 아삼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어왔다. 괴이한 것은 체 구에 비해 그의 사지가 기형적으로 가늘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보며 아삼은 벌써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도망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나다. 저 늙은이 의 모습을 보아하니 열 걸음도 못뛰게 생겼군.' 그는 하토살군의 뒤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헉! 귀신... 뒤... 뒤에 또......!" 그의 사실적인 연기는 그대로 먹혀 들었다. 하토살군이 표정이 급 변해 고개를 홱 돌리는 순간이었다. 아삼은 악양성을 향해 죽어라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토 살군은 금세 속은 것을 깨닫고 노성을 발했다. "고이얀! 어린 놈이 벌써부터 사기성이 농후하군." 말과 함께 그는 어린아이의 손같이 가느다란 손을 앞으로 쭉 뻗었 다가 끌어당기는 시늉을 했다. 휘류류류륭―! 놀랍게도 그의 손에서는 막강한 흡인력이 파생되어 소용돌이를 일 으키며 주위의 돌덩이들까지도 마구 빨아들였다. "으아악―!" 아삼이라고 해서 별 수 없었다. 그는 공포에 찬 비명을 발하며 허 우적거렸으나 속절없이 괴인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의 귓전으로 하토살군의 괴소성이 들려왔다. "크크... 꼬마야. 싫어도 너는 노부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으으......! 어찌 이런 끔찍한 일이.......' 아삼은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사태는 기이한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갑자기 무엇을 느꼈 는지 하토살군이 안면을 굳히며 급히 손을 거두었다. "빌어먹을! 을목상군(乙木喪君), 그놈이 어느새 이곳까지 추적을 해 왔구나." 흡인기공이 소멸되자 아삼은 다시금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이쿠우......!" 그는 세차게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으나 아픔조차 느낄 겨를이 없 었다. 주위상계(走爲上計)라, 이럴 땐 그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 는 것만이 상책이었다.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전면으로 냅다 내달리기 시작했다. ② 한편. 하토살군은 도망치는 아삼을 힐끗 바라보더니 입맛을 쩍 다시며 무덤 속으로 도로 들어가고 있었다. 콰쾅! 어떻게 했는지 그가 들어가자 무덤은 원래대로 합쳐졌다. 스스스....... 그 자리에는 음풍과 함께 다른 한 인영이 나타났다. 훤칠한 키에 깡마른 노인으로 그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더 구나 이마에도 상건(喪巾)을 대신한 듯 새끼줄을 묶고 있어 그가 보여주는 음산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한쪽 어깨에 시신이 들어 있음직한 기다 란 청목관(靑木棺)을 둘러메고 있기도 했다. 노인은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에서 푸른 섬광을 발하며 주위를 살 폈다. 그의 입에서 듣기 거북한 탁성이 흘러나왔다. "분명 이곳에서 토귀의 음성이 들렸었는데......?" 그의 눈에 곧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나무조각과 흙덩이등이 투영되었다. "이것은 하토묵살공(蝦土墨煞功)! 역시 이곳에 있었다." 노인의 예리한 시선이 무덤에 고정되었다.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크게 외쳤다. "토귀! 나와라." 그의 손이 허리춤의 목검(木劒)에 가 닿았다. 취릿―! 일섬의 검광이 천지를 가를 듯 기세를 발한다 싶은 순간이다. 예 의 무덤이 잘 익은 수박 갈라지듯 쩌억 벌어졌다. 하지만 무덤 속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비열한 두꺼비놈! 그 새 쥐새끼처럼 달아나 버렸군." 노인의 눈은 와중에도 무덤 속에 뚫려 있는 하나의 구멍을 발견해 내고 있었다. 그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장탄식했다. "배은망덕한 것들......! 사부께서 우리를 어떻게 키워 주셨는데, 사매가 죽어가도록 내버려둔단 말인가?" 그는 어깨에 멘 청목관을 소중한 보물처럼 어루만지며 그답지 않 게 눈물을 글썽였다. "사매... 당신을 끝내 되살릴 수 없단 말이오? 사매......." 괴기스러운 용모와는 달리 그의 창백한 안면에는 잔잔한 애수가 어리고 있었다. 그는 고목나무껍질 같이 주름진 얼굴을 목관에 마 구 비벼댔다. 그의 넋두리는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진정 아니되는 것인가? 사매의 향기로운 미소를 다시는 대할 수 가 없단 말인가?" 그는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봄밤의 달빛이 으스름한 잔광(殘光)을 그의 마른 등에 뿌렸다. 몹 시도 외롭고 공허해 보이는 그의 긴 그림자가 천천히 달빛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③ '으으으.......' 아삼은 혼백이 반쯤 달아난 채 악양으로 달려갔다. 그는 성내로 들어가서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라 행인들에게 좌충우돌 부딪치면서도 무작정 내달리고 있었다. 그가 막 번화한 거리의 한 모퉁이를 도는 순간, 화려한 교자의 행 렬과 정통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달리 까닭이 있 어서가 아니라 그만치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행렬의 선두에서 한 사람이 훌쩍 뛰어내렸다. 그자는 백마(白馬) 위에 타고 있던 청년으로 아삼의 앞을 가로막더니 대번에 서슬퍼 런 장검을 뽑아 들었다. "웬놈이 진로를 방해하는 것이냐?" 벽력 같은 호통도 그랬지만 번개처럼 빠른 출수로 아삼의 목에 칼 을 들이댄 그의 솜씨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헉!' 아삼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살아야겠다는 본능적 의지에 힘입어 급급히 신형을 멈추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 을 깨닫고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었다. 실상 그는 검끝에 목이 닿을까 말까하는 위치에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정지시킨 상태였다. 단 한 치라도 오차가 발생했다면 필시 목에 구멍이 뚫리는 사태를 맞이했으리라. 아삼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일신에 백의를 입은 청년이 그에게 검을 겨눈 채 다시 호통을 쳤다. "네놈은 아무래도 죽으려고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아! 그러고 보니 이자는.......' 아삼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구나! 분천상검(分天上劍) 신준(申 俊)... 이자로 말하자면 악양지부(岳陽支部)의 제일고수이자 성품 이 깐깐하기로 이름 높은 위인이 아닌가?' 그는 이래저래 오늘 일진이 최악이라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하지 만 어떻게든 위기는 모면해야 했다. "그... 저... 귀... 귀신......!" 아삼은 일부러 과장되게 더듬거리며 전신을 떨었다. 퍽! 그의 얼굴로 인정사정 없는 신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컥!" 아삼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미친 놈! 어디서 헛것을 보고와 헛소리냐?" 아삼은 몇 번 버둥거리다가 힘겹게 일어났다. 그의 입과 코로는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정말입니다. 소인은 귀... 귀신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준은 변명이 통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날 카로운 눈빛을 본 순간, 아삼은 가슴 한 귀퉁이가 써늘해지는 것 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신준의 눈짓에 곁에 있던 네 명의 위사(衛士)들이 나섰다. 그는 냉막한 기세로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이 훈계하라. 놈은 아가씨를 놀라게 한 죄인이다." "넷!" 위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대답하며 아삼을 향해 다가갔다. 아삼도 이때만큼은 어쩔 수 없이 겁이 덜컥 났다. 위사들에게 걸 렸다 하면 보나마나 성한 몸을 보존하기는 틀린 일이기에. "멈춰요." 한 가닥 그윽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동시에 행렬의 한 가운데 있던 교자의 구슬 주렴이 양옆으로 젖혀졌다. 그 사이로 한 쌍의 당혜가 사뿐히 내려지는가 싶더니 꽃무늬가 새 겨진 그 신발의 주인도 교자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백의궁장을 한 미녀였다. '아!'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본 아삼은 넋을 잃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궁 장미녀의 자태란 흡사 선녀를 방불케 했다. 버들잎처럼 휘어진 아미는 그린 듯 고왔으며 추수인 양 맑은 눈동 자는 빨려들 것만 같은 마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오똑한 콧날과 석류빛의 도톰한 입술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그녀에 게는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아삼이 느낀 궁장미녀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만물을 포용 할 듯한 부드러움에 있었다. 그런 면이야말로 그가 인간에게서 구 하고자 했으나 늘상 실패했던 부분이었기에. 미녀는 잠시 말없이 아삼을 응시했는데, 그 아름다운 눈가에 는 은은한 연민지심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피범벅이 되어 있는 아 삼에게서 눈길을 돌려 신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신위장,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요?" 준엄한 힐책이 깃든 그 말에 신준은 황망히 변명했다. "소저, 저런 녀석은 본시 엄하게 다스려야 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경 소저의 존체에 누를 끼칠 테니까요." 궁장미녀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당신은 마치 나를 세상물정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취급 하는군요?" "그... 그게 아니라......!" "그럼 가당치 않은 소린 관두세요. 누가 되었건 악양에 사는 한 모두 아버님께서 다스리시는 사람들이에요. 더구나 저 사람은 연 유는 몰라도 본의 아니게 실수를 저지른 듯 한데 어째서 필요 이 상의 중벌을 내리려 하는 거죠?" 말을 마치자 그녀는 서슴없이 아삼에게로 다가갔다. 아삼은 그녀를 가까이 접하게 되자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훈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쉽사리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음! 이 여인이 바로 악양지부대인의 장중보옥(掌中寶玉)이라는 악양일미(岳陽一美) 엽완란(葉婉蘭) 소저이겠군.' 비록 초면이기는 하되 악양일미 엽완란이라면 결코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재색을 겸비한 그녀의 명성은 일찍부터 악양뿐만이 아 니라 호북(湖北) 일대에 두루 알려져 있었다. 멀리 황실에서까지 그녀에게 청혼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악양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터였다. ④ 엽완란은 품 속에서 하얀 비단 손수건을 꺼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예, 예... 소인... 아삼(阿三)이라고......." 아삼은 그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음성 이 떨려나오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미안하게 되었어요. 내가 신위장을 대신해서 사과할께요." '아아!' 아삼은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을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그로서는 엽완란 같은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자신에게 공대를 해올 줄은 꿈 에도 몰랐던 것이다. 엽완란이 손수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자, 이것으로 피를 닦아요." 아삼은 향기나는 손수건을 받아들기는 했으되 감히 피를 닦을 엄 두도 못낸 채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쥐었다. "아가씨......." 그런 그에게 엽완란은 생긋 웃어 보이더니 다시 교자에 올랐다. 그녀를 태운 교자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삼. 그는 교자의 행렬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엽완란이 건네준 비 단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엽완란 소저....... 저 여인이야말로 선녀다.'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는 그의 가슴은 이 순간 뜨겁게 요동치고 있 었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항시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아왔던 그 가 인정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아삼은 엽완란의 곱고 청순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 특유의 습관인 몽상에 잠겨 들어갔다. '아아... 내가 만일 명문가의 자제라면.......'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달콤한 몽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 소 리 벽력 같은 호통이 그의 꿈을 산산조각내어 버렸다. "이 더러운 놈! 어서 소저의 손수건을 내놓아라." '이 무슨......!' 아삼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어느 틈엔지 자신의 눈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한 명의 위사를 볼 수 있었다. "아... 안되오......!" 아삼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위사는 개의 치 않고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같은 버러지가 소저의 물건을 지닌다는 것은 소저의 영명에 오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아삼은 급히 손수건을 품 속에 쑤셔 넣었다. "그... 그렇지만 이것은 소저께서 주신......." "시끄럽다! 경을 치기 전에 속히 내놓아라." "아... 안돼!" 아삼은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쯧! 말로 해서는 안될 놈이군." 위사는 입맛을 다시더니 빠른 몸놀림으로 그를 막아섰다. 휙! 아삼은 그자와 다시 맞닥뜨리게 되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 지 갑자기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차라리 나를 베시오." "웃기고 자빠졌군." 위사는 같잖다는 듯 검집채로 그를 후려쳤다. 퍽! "크억!" 아삼은 옆구리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 다. 그의 몸 위로 위사의 욕설과 발길질이 난무했다. "쓰레기 같은 종자! 내놓으라면 순순히 내놓을 일이지, 네 따위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발버둥을 치느냐?" 퍽! 퍼퍽......! 격타음이 계속해서 이어지며 아삼을 종전보다 더욱 비참한 몰골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삽시에 핏물과 흙으로 뒤범벅이 된 채 개처럼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상대의 말에 꺾이지는 않았다. 평생을 통해 자신 의 의지를 관철시켜 본 적이라곤 없는 그가 한낱 손수건 한 장 때 문에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맞는 것이다. 이는 평소 아삼 같아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교활 하고 영악하기 이를데 없어 손해나는 짓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그에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확실히 아삼은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 순간 그는 예의 손수건 이 자신의 생명보다 귀중하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ㅌ! 지독한 놈." 마침내 위사는 때리기도 지쳤던지 침을 뱉으며 몸을 돌렸다. 그자가 사라진 후, 아삼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피 칠을 한 것은 물론 멋대로 이지러져 제 형태를 잃고 있었다. 그러 나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중얼거렸다. "흐흐... 어림없다. 내게서 소중한 보물을 빼앗아가려 하다니. 나 는 누구에게도 이것을 내줄 수가 없다." 아삼은 휘청거리며 만품예헌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그는 손으로 품 속의 손수건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⑤ 금곽은 만품예헌의 지하작업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삼, 어제 말한 물건은 만들어 놓았느냐?" 묻다 말고 그의 살찐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그것은 아삼이 일은 않고 작업대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잘 아는 금곽은 내심 중얼거렸다. '한심한 놈! 또 공상에 빠져 있군.' 그는 아삼에게 가까이 다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삼! 너 설마 일을 끝내 놓지 못한 건 아니겠지?" 그제서야 아삼은 내뱉듯 툭 한마디 했다. "오늘은 제발 나를 그냥 놔두어 주십시오." 말과 동시에 그는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켜 보였다. 뒤쪽의 탁자를 본 금곽의 얼굴이 비로소 풀어졌다. 탁자 위에는 당문채기 하나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수고했다." 금곽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풀어 보았다. 그 속에서는 놀랍게도 곁에 놓인 것과 똑같은 또 하나의 당문채기가 나왔다. 그는 감탄 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거 참! 내가 보아도 기가 막히군. 이것은 진품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마저 어렸다. 그는 두 개의 도기를 품 에 안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돌아섰다. '흐흐... 가짜는 진가 늙은이에게 주어 보내고 진품은 어디 멀리 나가서 고가로 팔아야지.' 금곽은 문을 반쯤 열고 선 채 물었다. "아삼, 방금 전에 오송 녀석이 어제 깨뜨린 도자기 대신 다른 것 을 하나 새로 갖다 놓았는데, 혹시 그 물건이 너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주인님께선 하룻밤 사이에 도자기를 두 개씩이나 위조해낼 수도 있습니까?" "흠, 하긴......." 금곽은 어색한 투로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계단을 밟 아 올라가며 염두를 굴렸다. '그렇다면 오송 놈이 가져온 것은 필시 진품일텐데 진열해 놓을 필요가 없지. 그것도 아삼에게 부탁해 가짜를 하나 더 제작해 놓 으라고 해야겠다. 진짜는 팔아버리고........' 그는 어제와 오늘, 양일에 걸쳐 재수가 무척 좋다고 생각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두 개의 골동품을 거저 얻다시피 했으니. '흐흐... 이제 내 재력에 관해서라면 누구도 얕보지 못하리라. 적 어도 악양에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 그럴 리가......!" 다시 찾아온 진노인은 사색이 되어 부르짖었다. 그를 상대로 금곽 이 도기를 되돌려주며 가짜라고 말했던 것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금곽은 호통을 치기에 이르렀다. "어서 썩 나가지 못하겠느냐? 사기꾼 같으니. 내가 사람이 좋아서 그렇지, 다른 가게의 주인 같았으면 너 같은 작자는 벌써 지부에 넘겨 치도곤을 내리게 했을 것이다." 진노인은 넋이 빠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금곽의 술 수나 말재간을 따를 재주라곤 도통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도기가 싸인 보퉁이를 안은 채 만품예헌을 등졌다. 그 광경을 지켜본 점원들은 노인의 처지를 동정해 마지 않았다. 그들도 하나같이 오송이 알고 있었듯 금곽의 술책에 대해 어느 정 도는 눈치를 채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그들은 이번 일에 아삼이 개입되었으리라는 것도 모르지 않 았다. 후환이 두려워 그저 함구하고 있을 뿐. 어쨌든 진노인을 그런 식으로 쫓아버린 금곽은 회계대에 앉아 주 판알을 튕겼다. 그의 얼굴에는 희색이 번들거렸다. '흠, 당문채기는 어디에고 내다 팔면 못받아도 은자 삼천 냥은 받 을 수 있다. 거기다 모조품을 다섯 개 정도 만들면 그것도 개당 이천 냥씩은 받을 수 있을테니, 이게 도합 얼마냐?' 그는 즐거운 공상으로 인해 혼자서 연신 히죽거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오후가 되었을 때였다. 아침에 눈물을 떨구며 사라졌던 진노인이 뜻밖에도 환한 얼굴로 금곽을 찾아왔다. 그는 회계대에 앉아 있는 금곽에게로 다가가 공 손히 한 덩이의 은자를 건넸다. "받으십시오, 금대인. 이건 어제 받은 것이올씨다." "엉?" 어리둥절해 있는 금곽에게 진노인은 설명했다. "아마 금대인께서 감정을 잘못하셨나 봅니다. 천예고축에 갔더니 틀림없는 진품이라면서 은자 이 천냥을 선뜻 내주지 뭡니까? 그래 서 금대인께 빚을 갚으러 이렇게 들른 것입니다." 진노인은 용무를 마치자 허리굽혀 절을 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점 포를 나갔다. 금곽의 안면이 마구 씰룩였다. '어찌 이런 일이.......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이 일대에서는 가짜가 그렇게 쉽게 팔릴 리 없는데......?' 그의 뇌리에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삼! 이 녀석의 짓이로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금곽은 구르다시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하작업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행태를 바라보는 점원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개중 오송만이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확실히 아삼형은 소문처럼 나쁜 사람이 아니야. 결과적으로 나나 진노인을 도와주고 있잖아." 오송은 오늘 아침 아삼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전신을 천으로 동 여매고 나와 금곽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 어제 도기를 깬 사건을 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저를 마구 때려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밤으로 아버님께서 는 친척집을 다 뒤져 이 도기를 뺏아 오셨습니다. 주인님께서 보 시면 만족해 하실 만한 물건이라며....... 평소 의심이 많은 금곽도 그 연극에는 홀딱 넘어갔다. 오송의 몸 에 생겨난 멍자국도 그렇지만 그가 가져온 진품(?) 도기를 보자 단번에 생각이 달라졌던 것이다. ⑥ "아삼, 내 이 놈을 그냥......!" 금곽은 씩씩거리며 작업실 문을 거칠게 열어제꼈다. 그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한창 공상에 빠져 있는 아삼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졸지에 변을 당하게 된 아삼은 눈을 크게 휩떴다. "왜... 왜 이러십니까?" 금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호통을 쳤다. "네 이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네놈이 이제는 감히 나까지 속여 먹으려 든단 말이냐?" 아삼은 말도 안된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연유나 알아야......!" "시끄럽다, 잡놈! 나는 그저 네놈이 보자기에 싸 놓은 모조품을 진가 늙은이에게 내주었을 뿐이거늘, 어찌 그것이 중간에 진품으 로 둔갑을 한단 말이냐?" "에엑?" 아삼은 자지러지게 놀랐다. "주인님께선 어찌하여 그렇듯 어리석은 실수를......! 그 보자기 에 싸여 있던 것이 진품이었는데......." "뭐, 뭣이?" "소인이야 진품에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봐 모조품을 만든 즉시 보 자기로 잘 싸 두었습지요." "닥쳐라! 그 보자기가 진가 늙은이 것이었는데도 말이냐?" 이번에는 아삼이 화를 벌컥 냈다. "주인님이 언제 절더러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까요?" 그는 멱살을 잡힌 채 한 옆으로 침을 퉤 뱉았다. "이러시는 게 아닙니다요. 아무리 일이 잘못 되었기로서니 주인님 이야말로 지금 와서 소인을 막 보시겠다는 겁니까?" "이... 이놈이 어디서 감히......!" 금곽은 대노하여 주먹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러나 그 위협은 적 어도 아삼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얼굴을 들이밀며 금곽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어디 때리려면 때려 보십시오! 이후로 소인이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는 소인도 모르겠으니까요." "빌어먹을!" 아삼의 면전에 들이대었던 금곽의 주먹이 슬며시 내려졌다. 동시 에 멱살을 움켜 쥐었던 손도 스르르 풀렸다. 어쩌겠는가? 금곽은 아삼을 함부로 대하기에는 너무도 뒤가 구렸 으며 무엇보다 아삼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맥이 빠진 그의 귀로 아삼의 비양거림이 쏟아부어졌다. "주인님도 참....... 슬슬 은퇴하실 때가 되신 모양입니다. 보자 기로 싸여 있건, 아니건 곁에 모조품을 뻔히 놔두고 진짜를 내주 시다니요?" "끙!" 괴상한 신음을 발한 금곽은 제풀에 노성을 발했다. "좌우간 네놈 탓이다! 네놈의 모조기술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일 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느냐?" 그러면서도 그는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삼이 이 사건을 두고 내심으로 얼마나 재미있어 하는지. ⑦ 밤. 사위를 비추는 달빛이 더없이 신비로왔다. 천공을 수놓고 있는 별 들도 가세하여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아삼은 만품예헌의 다락방에 드러누운 채 창문을 통해 천공에 멍 하니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 다. 어젯밤 이래로 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 탓에 주위의 무엇에도 관심을 둘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는 도무지 한순간도 아삼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는 그 사이에 벌써 그녀를 향한 마음이 뜨거운 연정으 로 화해 식을 줄을 모른다는 얘기다. '엽완란 소저!' 입 속에서 맴도는 읊조림은 결국 긴 한숨으로 이어진다. "휴우......." 엽완란. 그녀는 꽃길을 걷고 있었다. 꽃향기에 도취된 그녀는 자신도 모르 게 위사들과 떨어져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꽃 속에 파묻혀 움직 이는 그녀의 모습은 꽃의 요정 같다. "흐흐흐......." 불현듯 어디선가 음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십여 명의 괴한이 나타나 엽완란을 둘러쌌다. "뭣... 뭣하는 사람들이죠? 당신들은.......?" 엽완란은 다급히 부르짖는다. 그런 불청객들의 의도란 대개 뻔하 다. 그녀의 미색에 홀린 나머지 능욕을 하려는 것이다. 엽완란에게는 그 색마들을 물리칠 만한 능력이 물론 없다. 또한 위사들을 부르려 해도 이미 늦은 후였다. 그녀는 불쌍하게도 몸을 떨면서 눈물을 뚝뚝 떨군다. 그럴수록 색 마들은 더욱 더 기세를 올리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급기야 엽완란은 체념에 가까운 심정이 되어 혀를 깨물고 자결하 려 마음 먹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이 사태를 어찌 알았는지 일신에 가공할 무학을 지닌 한 미남자가 장내에 출현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십 여 명의 색한들을 멋지게 때려 눕히고 만다. 이로써 엽완란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생명의 은인으로 부상한 그 미남자는 대번에 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얻게 된다. 아름다운 귀 공녀 엽완란과 아주 잘 어울리는 그의 이름은 아삼이다.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합쳐진다........ "엽소저." 아삼은 제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꿈과 현실의 엄연한 차이 를 인식하게 된 그의 귀로 경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도둑......?' 그는 벌떡 일어나 자신이 특별히 고안해낸 암기통(暗器筒)과 단검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는 일편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비 참한 심경이 되어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다. '어떤 놈이고 오기만 해봐라. 벌집을 만들어 줄테니.' 그는 소리없이 움직여 등불을 집어 들었다. ⑧ '억!' 그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때아니게 옆구리가 뜨끔하는 듯 하더 니 전신이 돌처럼 굳어져 꼼짝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의 인영이 유령처럼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해치지는 않을 것이니 두려워 마라." 아삼은 의외로 그 음성이 험악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다소나마 안도하게 된 그에게 침입자는 다시 말했다. "절대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알겠느냐?" "아... 예." 아삼은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어쨌든 그는 그제서야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자는 짙은 검미(劍眉)에 위엄있게 생긴 중년의 인물이었다. 신광이 번뜩이는 호안(虎眼)은 일세 영웅의 기도를 느끼게 했으 며, 등에는 보검을 메고 있어 일견하기에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인 듯했다. '결코 나를 해칠 인물은 아니다.' 아삼은 직감적으로 상대에 대해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 자는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어 그를 당혹케 하기도 했다. "부... 부상을 당하셨군요." 그 말에 청의를 입은 중년인은 대답도 없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삼에게 적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그다지 경 계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으음......." 고통스러운 듯 그의 입에서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삼은 경황중 에도 재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대야, 소인이 나가서 약을 구해 올까요?" 그것은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속셈에서 한 소리였다. 청의 중년 인은 외부의 동정을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 놈들은 이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고 있다. 너도 그 들에게 걸리면 필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아삼은 가슴이 써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큰일이다. 잘못하면 나까지 공연히 말려들게 생겼으니.' 중년인이 스스로 지혈을 시키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신세를 져야겠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악도들에게 쫓기고 있다." '끙! 그거야 내가 알게 뭐람?' 아삼은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향 해 중년인이 넌즈시 물었다. "혹시... 이곳에 지하밀실 같은 은밀한 장소는 없느냐?" 아삼은 얼른 작업실을 떠올렸지만 난색을 지었다. '이를 어쩐다? 그렇게 되면 골동품을 모조해온 사실이 발각나게 되는 셈인데.......' 그러나 우선은 살고 볼 일이었다. '혹시라도 여기서 이자와 함께 어물쩡거리다 그 악도(?)들에게 붙 들리기라도 한다면......?' 아삼은 한 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입을 열었다. "그... 그런 장소가 있기는 합지요만......." 중년인은 희색을 띠는가 싶더니 손을 들어 아삼의 입을 틀어 막았 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전음으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라!) 아삼은 전음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그는 적어도 모기 소리같이 가느다란 그 음성이 어떤 의미를 내포 하고 있는지는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직후에 아삼은 미세한 파공성이 지붕 위를 스 쳐지나가는 것을 느끼고는 재삼 몸을 떨어야 했다. 잠시 후. 중년인이 그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되었다, 가자." ⑨ 지하작업실. 청의중년인은 그곳을 둘러보고는 피식 웃었다. "꼬마가 보통이 아니군. 네가 골동품을 모조해 파느냐?" 아삼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올씨다. 주인이 시켜서......!" 중년인은 코웃음을 쳤다. "변명은 그만 두어라. 여느 때 같았으면 이런 비열한 행위들을 묵 과할 내가 아니다만 오늘은 도움을 받는 처지이니 조용히 참도록 하겠다." 그는 탁자 앞에 가 앉더니 품에서 금창약을 꺼내 상처에 발랐다. 아삼은 물끄러미 그의 행동을 바라보다 호기심이 치밀어 조심스럽 게 물었다. "저... 대야께서는 어째서 남에게 쫓기시는 것입니까?" 중년인은 아삼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그 대야(大爺)라는 호칭은 낯이 간지러워 사양하겠다. 내 이름은 엽천상(葉天霜)이라고 한다." '엽천상?' 아삼은 심중으로 되뇌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로서는 그 이름 을 알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아삼이 무림의 일에 대해 약간의 식견이라도 있었다면 필시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으리라. 엽천상으로 이르자면 통상 백천신검 (白天神劍)이라고 불리우는 인물로서 무림에서 이미 쟁쟁한 위명 을 떨치고 있었다. 당금 백도 무림에는 소위 제환팔대명인(制還八大名人)이라는 명숙 들이 존재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일파의 지존들에 버금가는 권 위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백천신검은 검(劍)의 달인이었으며 당당히 제환팔대명인의 대열에 드는 인물이었다. 또한 성품이 대쪽 같아 흑도인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대개 안색이 변해 줄행랑을 치곤 했다. 엽천상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너는 나를 추적해 온 지옥 삼사라는 자들도 역시 모르겠구나?" "네." 아삼이 대답하자 엽천상은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일단 추적대상이 정해지면 설사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기어이 잡고 만다는 독종들이다." 듣고 있던 아삼이 히죽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이번만큼은 그들도 실패했겠군요?" 엽천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모르긴 몰라도 놈들은 한동안 악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삼은 가슴이 뜨끔하여 입을 다물어 버렸다. "왜, 겁이 나느냐?" 그를 보며 피식 웃던 엽천상이 문득 눈을 빛냈다. "호오, 너는 이제 보니 제법 뛰어난 근골을 지녔구나? 게다가 간 교하니 필시 오성도 뒤지지 않을테고......?" '쳇! 칭찬이야, 욕이야?' 아삼은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눈 을 껌벅거렸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얼마 전 하토살군에게 겪었 던 일이 환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자도 역시 자신을 제자로 삼겠 노라고 억지를 부리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는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을 느끼며 혼자 생각을 굴렸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인지도 모른다. 혹시 알아? 이 사람에게 잘 보이면 무공이라는 것을 한 수 배우게 될른지.' 약삭빠른 계산으로 가슴이 부풀어가는 그에게 엽천상이 무엇을 생 각했는지 다시 물었다. "너 모조품을 만들 줄 안다고 했지?" 아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네, 주인님께 조금 배웠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시는지?" 엽천상은 처음으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럼 부탁 좀 하자꾸나. 너는 지금부터 두 가지 물건을 급히 모조해 다오. 대가는 섭섭치 않게 지불하겠다." 아삼은 눈을 반짝였다. "어떤 것들인지요?" "한 권의 고서(古書)와 영약이다." 엽천상은 소매 속에서 자그마한 비단 꾸러미를 꺼냈다. 아삼은 꾸러미를 받아 들고는 즉시 펼쳐 보았다. 그러자 이루 말 할 수 없이 청아한 향기가 실내에 가득히 퍼졌다. '아! 이것은.......' 그를 놀래킨 것은 하나의 설삼(雪蔘)이었다. 능히 한 자는 됨직한 그 설삼은 기이하게도 갓난 아기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향기도 그렇지만 눈이 부시도록 하얗고 투명한 몸체로 보아서도 한눈에 귀한 약재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물건은 천년인형설삼(千年人形雪蔘)이라는 것으로 전설적인 영약이다. 무림의 내가고수가 복용하면 일갑자에 이르는 공력을 단숨에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아삼이 물었다. "대협께서는 왜 이것을 복용하지 않으셨습니까?" "본시 천년인형설삼은 지독한 음한지기를 품고 있어 멋모르고 복 용했다간 경맥이 동결될 위험이 있지. 따라서 양기(陽氣)를 지닌 약재들과 함께 취해야 하는데, 악도들이 추격해 오는 바람에 그런 약재들을 구할 시간이 없었다." "으음, 그랬었군요." 아삼은 짐짓 무심을 가장하며 고개를 끄덕인 후, 이번에는 책자를 들어 살펴 보았다. 낡은 양피지로 된 책자는 무척 오래 전에 만들 어진 듯 전체적으로 색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표지에는 전자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천마신경(天魔神經)> 아삼은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여기 쓰여진 글씨는 처음 보는 것인데요?" 엽천상은 빙긋 웃었다. "그건 전자체라는 것으로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서체이지. 너 는 글씨를 어느 정도나 아느냐?" "그저 어깨너머로 조금 배웠을 뿐입니다." 그 말에 엽천상은 저으기 안도했다. '차라리 잘 되었군. 이렇게 되면 이 녀석이 천마신경을 모사한다 고 해도 내용을 잘 모를 테니 후환은 없겠어.' 그러나 아삼은 상대의 심중마저도 빠삭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책장을 몇 장 넘겨보고 나서 말했다. "별로 어렵지는 않겠는데요? 이 정도쯤은 한 시진이면 똑같이 베 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엽천상은 희색을 지었다. "오! 반가운 소리로구나. 그런데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개씩 모조해 내야 하니 어쩌지?" "그렇게나 많이요?" 아삼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 순간에도 그의 머리는 무섭도록 회전하고 있었다. 반면에 엽천상은 엽천상대로 다섯 개의 모조품을 이용해 추적자들 을 따돌릴 계획을 짜느라 부심하고 있었다. 철저한 동상이몽(同床異夢) 가운데 아삼은 분주히 움직여 작업에 착수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