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가 상당히 이국적이세요."
허스키한 목소리에 나는 입을 잠시 다물었다.
흔히 듣는 멘트에 불과했지만 뭐라 대꾸하면 좋을지 몰라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놀란 것은 그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일반적인 아저씨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그 독특한 음성이란 매우 갑작스러웠다.
어두컴컴한 바에 앉은 그는 선이 또렷한 얼굴과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두터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윽고 J&B JET를 시키고 내가 세팅을 하는 동안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 할아버지가 미국 분이세요..."
잠시 후 내 말을 들은 그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아 저도 순수 한국인은 아니에요."
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외모는 일반적인 한국 사람과 약간 달랐다.
계속해서 그는 다소 어눌한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같은 사람을 가리켜 뭐라고 하죠?"
바에 놓여 있는 양초가 희뿌연 빛을 내며 타들어갈 무렵 덤덤하게 설명해주었다.
"쿼터라고 하죠."
그는 내 말을 듣고 이제야 알겠다는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을 했다.
"아아, 그렇군요."
그는 한때 뮤직바의 사장이었고, 지금은 다른 일을 하며 취미로 록 밴드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할 때 그는 화사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고, 나는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하다 말았죠?"
신나게 썰을 풀던 그는 중간중간 이렇게 말했고, 나는 그때마다 이런 이야기까지 했다고 말해주었다.
술집 사장 출신이어서 그런가? 꽤 많이 마셨는데도 그는 취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록 밴드에서 노래를 했다는 그는 자신이 예전에 레코딩했던 가녹음 상태의 음원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함 들어보세요."
그가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윽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잔잔한 모던락 풍의 곡이었는데 전주가 엄청 길었다.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거의 사랑한다고 할 정도로.
그러나 아무 음악이든 상관없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느낌을 주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드디어 보컬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스며들었다.
"아련하게 젖은..."
2,3 년 전 일이다.
해리 빅 버튼의 콘서트에 갔다가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락커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성수는 하늘이 내려준 락커이다.
그때 그 클럽에서, 그의 목소리는 용암이 솟구치는 화산 같았다.
나는 그에게서 샘솟는 노래가 내 귀가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락커는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았다.
만약 나에게 해리 빅 버튼의 가창력 내지 영혼이 존재한다면, 직업적으로 음악을 하든 안 하든 나는 락커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서 집에서도 곧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왜 그런지 목소리가 너무 불안해서 그건 들어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보이스 코칭을 받았고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도 성악을 전공했고, 이후 수많은 소리를 내보았지만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음악이 바로 락이었다.
해리 빅 버튼은 내가 실제로 본 최초의 락커였고 그의 목소리는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이후 처음 만난 락커가 바로 그였다.
"아련하게 젖은 도시의 끝에서..."
이렇게 시작하는 그의 노래는 나의 마음에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에휴... 하루에 담배 한 두 갑은 피우시는 것 같아요."
비록 이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나는 그 허스키하면서도 다소 가는 유니크한 목소리에 흠뻑 취해버렸다.
단지 첫 소절을 듣는 것 만으로...
능수버들 같은 허리, 라는 말이 있다.
여자의 가늘고 나긋나긋한 허리를 표현한 말이다.
모든 여자들은 이런 허리를 동경한다.
그의 음색은 능수버들 같은 목소리였다.
목소리 자체는 엄청 허스키했지만 음색은 결코 굵지 않았고 오히려 가늘고 나긋나긋한 쪽에 가까웠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니 그는 원래 타고난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음역보다 키를 의도적으로 낮추고 본래의 음색을 인위적으로 굵게 변형시켜 부르고 있었다.
허스키한 음색만 제외한다면 목소리 자체는 오히려 비강을 섬세하게 활용하는 미성 쪽에 가까웠다.
음악에 심취한 나를 바라보며 문득 그가 말을 던졌다.
"혹시 가사는 잘 들리나요?"
나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주 잘 들려요."
그의 음색은 어떤 영화 보다도 뚜렷하고 또랑또랑하게 들렸다.
"이젠 더 아쉬워하지 마?
모든 걸 잊어버려...
가사 죽인다.
며칠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 생각나네 ㅋㅋㅋ"
곧은 심지가 느껴지는 그의 가련한 목소리는 단연 허리가 능수버들 같은 여자를 연상시켰다.
이런 여자는 남자가 한 팔로 끌어안기에 딱 좋으며,
설령 나이가 들어도 다소 요염한 느낌이 있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을 듯한 느낌,
'서로 바라는 마음에... 너와 나...
이젠 꿈에서 깨어... 돌아가...'
중간에 나이브한 기타 솔로가 끝나고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흡사 물이 솟아나는 샘 같았다.
그건 해리 빅 버튼의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용암이 뜨겁게 분출하는 화산이 아니라 거실 한가운데에서 새어 나와 세포 하나하나에 촉촉이 스며드는 잔비를 연상시켰다.
그의 음색은 해리 빅 버튼이랑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똑같은 허스키인데도 이렇게 다르구나...'
발성학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스킬은 결코 훌륭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다가온 그의 노래는 흡사 땅에서 양분을 끌어올려 탐스러운 꽃을 피운 식물처럼 천천히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요.
그리고 노래 좋아요.
해리 빅 버튼이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네요."
그는 나의 마음을 듣고 흡족한 듯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살짝 바라보며 나는 그가 어지럽힌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첫댓글 GRRRR~!!! ^^ 화랑님과 나잇썬님의 운명적인 조우가 무척 흥미롭네요...^^
예전에 물의를 일으켰던 글이구나요~ 문제의 소지가 될 부분은 삭제하셨네요... 멋지긔~ ㅎㅎ;; ^^
원래 글이 짜릿했는데 아쉽다~~~!!!
다시 읽어도 재미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