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출도(出道) ① 여명(黎明). 희미한 새벽빛이 작업실의 한쪽 귀퉁이에 난 창문 새로 스며들었 다. 아삼은 오랜 작업을 마치고 기지개를 켰다. "아함! 겨우 끝냈군." 잠시 잠이 들었던 엽천상이 눈을 번쩍 떴다. "다 되었느냐?" 그는 성큼성큼 작업대 앞으로 다가섰다. 그 위에는 여섯 개의 천 년인형설삼과 여섯 권의 천마신경이 놓여 있었다. "흠......." 엽천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여섯 뿌리의 천년인형설삼을 살폈다. 그것은 형상은 물론 기이한 광휘마저 똑같아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이어 여섯 권의 천마신경까지도 차례로 훑어본 그는 놀라움을 금 치 못했다. '이럴 수가!' 그의 시선이 아삼에게로 향해졌다. "네 모조 솜씨는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과찬이십니다." 아삼은 짐짓 겸양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삼이라고 했던가? 너는 그 신통한 기술을 어찌하여 올바른 일 에 사용하려 들지 않느냐? 이 정도의 손재주라면 능히 천하제일의 장인(匠人)이 되고도 남을 것을." 이 말에는 엽천상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아삼의 뛰어난 재 능을 정말로 아깝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아삼은 할 말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앞으로는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심중에서는 이런 말이 오가고 있었다. '젠장! 나 같은 놈에게 언제 그럴 기회가 주어졌어야지.' 그의 마음을 모르는 엽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어떤 것이 진품이냐?" 아삼은 한 뿌리의 천년인형설삼을 집어 들었다. "이것입니다. 모조품들은 삼 일이 못가서 변색되고 말 겁니다. 향 기도 사라지지요." "삼 일이라.......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다. 이 물건들을 탐내 는 자들을 따돌리기에는 말이다." "이것이 진짜 무서(武書) 올습니다." 아삼은 이번에는 천마신경 중 한 권을 집어 내밀었다. "모조품들은 군데군데 글자를 바꿔 놓았습지요." "음, 정말 수고 많았다." 엽천상은 품 속에서 자그마한 비단주머니를 꺼내더니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약속한 수고비다." "아... 아니올씨다." "사양말고 받아 두어라." "그, 그럼......." 아삼은 비단 주머니를 받고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부디 그 두 가지의 기보를 악도들의 손에서 지켜 유용하게 쓰시 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오냐, 나는 이만 가겠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엽천상은 아삼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열 개의 모조품들을 다섯 꾸 러미로 나누어 쌌다. 휙! 그의 신형이 바람소리를 내며 날렵하게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아 삼은 그 자리에 선 채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푸하하......!" 아삼은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대체 무엇이 그리 좋은지 그는 배를 움켜쥐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하하하하......!" 그는 눈물까지 쏟으며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그러다 문득 아삼은 벌떡 일어서서 작업대로 달려갔다. 그는 희열 에 들뜬 얼굴로 작업대 밑에 손을 넣었다. 이어 무엇인가를 움켜 쥐더니 천천히 밖으로 끌어당겼는데....... 놀랍게도 그의 수중에는 한 뿌리의 천년인형설삼과 한 권의 천마 신경이 쥐어져 있었다. "훗훗... 어리석은 엽천상 나으리! 진품은 여기에 있소이다. 당신 이 가지고 간 것은 전부 가짜였수다." 실로 기막힌 술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엽천상의 감시가 허술 한 틈을 타 모조품을 하나씩 더 만들어냈고, 진품을 숨긴 채 멀쩡 하게 모조품들만을 내주었던 것이다. 두 개의 기보를 품에 안은 아삼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것만 있으면... 이것만 있으면 나도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다. 남에게 짓밟히지도, 남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어엿한 강자가 될 수 있단 말이다." 애초부터 그는 천년인형설삼의 지고한 효능과 천마신경의 가공할 위력에 대해 엽천상이 스스로 말하게끔 유도한 바 있었다.비록 천 마신경의 자세한 내력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엽천상의 기색으로 미 루어 그것이 무림 최강의 절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에게 찾아든 생애 최고의 행운을 어떻게 해서든지 차지하고 말리라고. 들키는 날에는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만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런 위험 부담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 자체가 한 판의 도박(賭博)이 아닌가? ② "가자! 이제 공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일들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 천하를 지배하는 제왕(帝王)이 되어 화려한 저택에 기름진 음식, 게다가 신나는 도박까지... 와우!" 아삼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의 뇌리에는 어느덧 환상 에 지나지 않았던 영상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엽소저......! 그대도 더 이상은 그저 바라보아야만 하는 구름 위의 선녀(仙女)가 아니다. 내가 강자가 되면 그대를 나의 아내로 맞이하겠다. 기필코......." 그렇다고 그가 마냥 꿈에만 젖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주위 를 한 번 돌아보더니 안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 이럴 때가 아니지. 엽천상이 눈치를 채고 돌아오기 전에 속히 이곳을 떠나야 한다." 아삼은 황급히 계단으로 올라섰다. 엽천상이 준 주머니가 있은즉 액수가 얼마인지는 모르나 노자도 마련된 셈이니까. "우선은 무공이라는 것을 수련할 심산유곡을 찾아가야겠지. 대충 시일을 얼마나 잡으면 될까?" 그는 발꿈치를 들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만품예헌의 뒷 문으로 향했다. "일 년? 어휴, 그건 너무 길어. 그동안 엽소저가 누군가와 결혼을 해버릴지도 모르잖아?" 그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을 거듭했다. "한 반 년쯤이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그것도 지루해." 아삼은 짧은 철사 조각을 이용해 커다란 자물쇠를 손쉽게 열었다. 그의 손재주는 이 방면에도 미쳐 세상에서 그가 열지 못하는 자물 쇠란 없었다. "그래, 나의 자질과 근골이 뛰어나다 하니 이, 삼 개월이면 능히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을 거야." 아삼은 희망에 부푼 채 제멋대로 중얼거리며 문을 나섰다. 아직 이른 시각인지라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떠난다, 악양이여! 내가 다시 돌아올 때, 너는 환호하며 나 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좁다란 골목길을 냅다 달려갔다. 모조품들을 만드느라 지난 밤을 꼬박 새웠지만 그는 펄펄 날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도 그는 단지 희망에 부풀어 있을 뿐 짐작도 하지 못했 다. 세상일이 자신의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앞에 펼쳐진 고난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또르르....... 영롱한 이슬방울이 풀잎을 타고 굴러내린다. "헉헉......!" 아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산길을 내닫고 있었다. 두 시 진을 쉬지 않고 달렸건만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악양 성내가 멀 리로 보이고 있었으나 그의 다리는 멈출 줄 몰랐다. '앞으로 백 리는 더 달아나야 마음을 놓을 수 있으리라. 자칫하면 이 호기(好機)를 놓치고 개죽음을 당할 테니까.' 그는 힘을 내자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며 산능선까지 내처 달려 올라갔다.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간간이 땀을 시원하 게 식혀 주었다. 아삼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대양(大洋)처럼 보이는 동정호가 그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 끝없는 수평선을 응시하며 그는 불 끈 솟구치는 웅지(雄志)를 느꼈다. "내 맹세컨대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 되리라!" 그러다 문득 그는 맞은편의 능선에서 질풍처럼 날아오는 한 인영 을 보게 되었다. 그자가 펼치고 있는 경공술은 실로 경이적인 수 준의 것이었다. '혹시!' 아삼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상대가 너무도 빠르게 접근 해 오는지라 그로서는 감히 달아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계산해 보건대 도망해봐야 소용이 없을 터이므로. '분명 엽천상은 아닌 듯한데 혹시 그를 추격해 오던 악도들 중 한 명이 아닐까?' 그는 품 속의 천년인형설삼과 천마신경이 처음으로 부담스러워졌 다. 상대가 그것들을 노리고 왔다면 그 간의 정황으로 미루어 목 숨을 부지하기란 영 틀린 일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지.' 아삼은 일단 배짱으로 밀고 나가볼 심산이었다. 그는 상대와 맞부 딪치지 않기 위해 동정호를 응시하며 딴청을 부렸다. '이대로 아무일 없이 지나가다오, 제발......!' 휘익! 날카로운 파공성이 엄습해 오자 아삼은 두려움에 어깨를 잔뜩 움 츠렸다. 그런데 간절한 기원 때문이었을까? 괴인영은 빠른 속도로 그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 버렸다. '휴우!' 아삼은 지옥에서 살아나온 듯 들리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그러나 상황은 끝내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크하핫... 내가 눈이 멀었었군." 탁한 음성과 함께 괴인영은 그에게로 다시 날아오고 있었다. 아삼 은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괴인영은 일신에 혈의를 걸친 한 노인이었다. '아! 저자가 과연 인간인가?' 아삼은 노인의 모습을 보게 되자 대뜸 그렇게 중얼거렸다. 상대는 안면이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어 절 로 이빨이 딱딱 마주쳐질 정도로 공포감을 유발시켰다. 게다가 핏 빛 안광을 발하는 눈매는 왜 그리도 살벌한가? 어쨌거나 파면(破面)의 노인은 아삼을 몇 번이고 훑어보더니 급기 야 광소를 터뜨렸다. "카하하하... 좋아, 아주 훌륭하다. 그만하면 우리 잔결구지살(殘 缺九地煞)의 공동 전인(傳人)이 될 자격이 있다." 그는 아삼의 의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달려들더니 덥석 안 아 자신의 옆구리에 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아삼은 그의 옆구리에 매달린 채 죽어라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파면노인은 웃을 뿐 놓아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크흐흐... 염려 마라. 네게도 손해날 일은 없으니. 우리 형제가 너를 천하제일의 고수(高手)로 만들어 주겠다. 너 정도의 근골이 라면 여덟 형님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삼은 한탄을 금치 못했다. '빌어먹을! 뼈다귀가 잘난 것도 죄란 말인가? 내가 어쩌다 재수없 이 이런 귀신 같은 작자들의 눈을 끌게 되었지?' 휘이익―! 파면노인의 몸놀림은 빛살과도 같았다. 덕분에 아삼은 귓전을 쌩 쌩 스쳐가는 바람소리에 호흡이 턱턱 막혀왔다. 물론 그 와중에도 머리를 굴리는 일만은 잊지 않았다. '이자의 무공 수준은 무림에서 어느 정도나 될까? 나도 무공을 수 련하면 이렇게 날아다닐 수 있을지?' ③ 낡은 사찰(寺刹)이다. 오래 전에 목탁 소리가 그쳐버린 그곳의 풍경은 흉가(凶家)인 양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었다. 사찰 앞의 넓은 공지에는 도합 십육 인의 인물이 둥그렇게 둘러서 있었다. 개중 여덟 명은 노인으로 일신에 혈의를 걸쳤는데 어찌된 셈인지 하나같이 불구자들이었다. 꼽추에 외팔이, 장님, 외다리 등 종류도 실로 다양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불구라해서 가볍게 볼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도는 오히려 정상인 사람들 이 밀릴 만큼 섬뜩한 기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앞에는 각기 한 명씩의 멀쩡한 청년들이 겁을 먹은 듯 사색이 된 채 벌벌 떨고 서 있었다. 장님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쩐 일이냐? 막내가 여태 오지 않으니. 혹시 십이대천마(十二大 天魔)를 만난 것이 아니냐?" 그 말에 꼽추노인이 공손하게 대꾸했다. "대형(大兄)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오. 막내의 경 공은 우리 중 가장 뛰어나오. 설사 십이대천마를 만났다 해도 환 마(幻魔) 구천섬표(九天閃飄)와 정면으로 부딪치지만 않는다면 능 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외다." 옆에 서 있던 외팔이 노인이 투덜거렸다. "대형, 공공천야(空空天爺) 공손찬(公孫贊)의 천둔패역진(天遁覇 逆陣)은 불파(不破)의 절진이라 하지 않았소? 그래서 공공천야와 힘을 합쳐 십이대천마를 가두었거늘......." 장님노인이 침중하게 그 말을 받았다. "어째서 놈들이 천둔패역진에서 탈출했느냔 말이겠지?" "그렇소이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외팔이 노인의 안면이 마구 씰룩였다. "대체 어떤 놈이 그 악마를 탈출시켰단 말이오? 내 그 놈이 누구 인지만 알게 되면 당장에......!"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철장(鐵杖)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쾅! 요란한 음향과 함께 바닥에는 단번에 무려 일 장 깊이의 구덩이가 패였다. 장님노인이 손을 저어 그를 제지시켰다. "가만, 좀 조용히 해보게." 장님노인은 잠시 귀를 세우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음! 막내가 오고 있군." 그는 일찍이 시력을 잃은 탓에 일행 중 청력이 으뜸이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인물이 장내에 내려섰다. 그 자는 옆구리에 아삼을 끼고 온 파면노인이었다. "좀 늦었소이다." 그는 아삼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휙 내던졌다. '아이쿠!' 아삼은 너무도 긴장했던 나머지 감히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 는 바닥에서 발딱 일어서며 재빠르게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 에 여덟 명의 청년들이 우선적으로 들어왔다. '아마 이자들도 나와 같은 목적으로 잡혀 왔겠지.' 눈치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삼은 장내의 살풍경을 대하자 마자 대뜸 상황판단을 마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자신에게 모아진 여러 쌍의 눈길을 의식하게 되자 심 장이 오그라붙는 듯한 공포를 느껴야 했다. 반면에 장님 노인을 제외한 일곱 노인은 아삼을 주시하며 만족스 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주 좋아! 최상의 근골이다." "크크크... 막내가 큰 공을 세웠구나." 그들의 치하에 파면노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형님들이 마음에 들어하시니 다행이오. 내 이놈을 찾아 가지고 오느라고 고생을 좀 하기는 했지만." "수고했다. 클클......." 장님 노인이 아삼에게로 다가섰다. 그는 기실 청력만이 아니라 오 감(五感)이 놀랍도록 발달해 있는 위인이었다. 스슥! 그는 정확하게 아삼의 면전에 이르더니 갈고리 같은 손을 뻗어 어 깨로부터 사지를 더듬어 만지기 시작했다. 이때에 아삼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두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무엇 보다 품 속에 있는 물건들이 의식되어서였다. '큰일이다! 내가 천년인형설삼과 천마신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필시 이들은......!' 그러나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장님노인은 끝까지 아삼의 품 속을 뒤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으음, 좋다! 이 아이로 결정하겠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며 나직이 말했고, 이 순간을 기해 실로 상상 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여덟 명의 노인이 각자 데리고 온 여덟 명 청년의 천령개를 후려친 것이었다. 퍽! 퍼퍼퍽―! 비명도 없었다. 여덟 명의 청년들은 속절없이 머리가 으깨어져 피 와 뇌수를 쏟아내며 절명하고 말았다. '우우... 어찌 이럴 수가......!' 아삼은 일시지간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살 인(殺人)을 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들의 독랄한 심성이 그로 하여금 극단의 공포감을 갖게 만들었으므로. "이 아이가 우리 잔결구지살의 무공을 모두 터득하게 된다면 더 이상 십이대천마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장님노인은 무표정하게 한마디 던지더니 손을 뻗어 아삼의 맥문을 거머쥐었다. "너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느냐?" "모... 모릅니다." "우리는......." 콰콰콰쾅―! 그의 말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폭음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그것은 수림의 한켠이 붕괴되면서 난 소리였다. 폭음을 뚫고 한 가닥 광소가 들려왔다. "크하하하핫......!" 아삼은 그 소성 때문에 기혈이 뒤집히는 충격을 입었다. 만일 장 님노인이 그 즉시 공력을 주입시켜 주지 않았다면 그는 피를 토하 며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대체... 무림이라는 곳에는 얼마나 많은 초강자들이 존재했었단 말인가?' 아삼은 그제서야 자신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던가를 뼈저리게 느끼 며 경황중에도 고소를 지어야 했다. 휙! 휘익! 불구의 노인들 중 세 명이 소성이 들려온 곳으로 날아갔다. 나머지 여섯 명의 노인들은 한결같이 긴장된 표정으로 세 형제가 사라져 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무림의 일에 대해서는 알 지 못했지만 아삼도 분위기로 미루어 그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 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잠시 후였다. ④ 츄아악―! 펑! 요란한 음향과 함께 핏빛 광채가 하늘을 뒤덮었다. "검마(劍魔) 십지천세(十地天勢)!" 여섯 노인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래도 대형답게 장님노인이 가장 먼저 굳건한 기색을 회복했다. "음! 우리가 늦은 모양이구나." 그는 파면노인을 향해 비장함이 어린 음성으로 명했다. "구살(九煞), 이 아이를 숨겨 놓아라. 우리가 살아나게 된다면 이 아이로써 놈들을 처단하게 될 테니까." "예, 대형!" 파면노인은 아삼을 안고 사찰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 직후, 그를 제외한 다섯 명의 노인은 쏜살같이 자신들의 형제 중 세 명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끼기기긱......! 파면노인은 한곳의 문을 열고 아삼을 내던졌다. 그곳은 내부가 장 방형을 이룬 석실이었다.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야 한다." 그는 육중한 철문을 가볍게 움직여 다시 입구를 봉쇄하고는 밖으 로 나가버렸다. 아삼은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돌바닥의 차 디찬 느낌 외에는 암울한 어둠만이 그와 함께였다. '저 노괴들도 의리 하난 대단하군. 형제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 릅쓰고 달려가고 있으니.' 그는 중얼거리며 품 속을 더듬어 보았다. 그때까지도 천년인형설 삼과 천마신경은 그대로 있는 상태였다. 아삼은 저으기 만족해 하며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하지만 워낙 밀폐된 장소라 그런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불안한 심경이 되어 읊조렸다. '만일 그 아홉 노괴들이 싸우다 죽기라도 한다면 나도 이곳에서 영영 빠져나갈 수 없을 게 아닌가?' 아삼은 몸을 일으켜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다. 손끝에 차가운 무 쇠의 감촉이 느껴지자 그는 철문을 두드려 보았다. 턱, 턱! 아삼은 낙심하여 고개를 저었다. 철문은 얼마나 견고한지 울리는 음향이라야 지극히 절망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포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잇!" 아삼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죽을 힘을 다해 철문을 밀어 보았다. 내심으론 어림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릴 수가 없어 기를 써 본 것이었다. 과연 효과가 나타난 것일까? 뜻밖에도 철문은 심하게 진동을 하는 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활짝 열렸다. '내가 이렇게 힘이 세어지다니......!' 아삼은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오 판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에구, 그러면 그렇지!' 철문은 그의 힘에 의해 열린 게 아니라 밖에서 혈의의 노인들이 연 것이었다. "크으으... 삼마(三魔)가 한꺼번에 왔을 줄이야......!" "대형, 검마 십지천세의 아수라파천검법(阿修羅破天劍法)이 전보 다 세 배는 강해진 듯하오이다." "우리 아홉 형제가 이토록 무참히 패하다니!" 석실로 들어선 노인들은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하나같이 전신에 참혹하리 만큼 부상을 입고 있었다. 아삼은 잔뜩 긴장한 채 도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장님과 꼽추, 그리고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파면인이로구나. 필 경 이들 외에 다른 노괴들은 죽었겠지.' 세 노인은 아삼을 끌어다 한가운데 두고 품자(品字) 형으로 둘러 앉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장님노인이 깊숙이 베어져 핏물이 흐르는 가슴을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삼이라고 합니다." "그래, 아삼. 본래 우리 잔결구지살은 너를 공동전인으로 삼아 십 이대천마와 대결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쿨룩......!" 그는 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놈들이 먼저 기습을 가해 왔다. 독마(毒魔) 팔위폐황 (八位廢荒)의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되지만 않았어도 우리 잔 결구지살이 이토록 허무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님노인은 말을 멈추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도 고통이 참 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모양이었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 이 뿜어져나오자 꼽추노인이 뒷말을 이었다. "나는 이살(二煞) 사심장타(死心葬駝)라고 한다. 우리와 십이대천 마와의 원한은 훗날 공공천야(空空天爺)라는 늙은이를 만나게 되 면 알게 될 것이다." 사심장타는 초조한 기색이 되어 빠른 어조로 덧붙였다. "우리는 곧 죽을 것이다. 아쉽지만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구나. 너는 이제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게 될 터인즉 반드시 십이대천마 를 죽여 우리의 복수를 해다오." "그러겠습니다." 아삼은 짐짓 숙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때에 그는 최소한 자신이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 있었고, 그로 인 해 어느 정도는 안심을 하고 있었다. 와중에서 그는 품 속의 천년인형설삼을 상기했다. '엽천상의 말에 의하면 이 영약은 기사회생의 효능을 지니고 있다 고 했는데.......' 아삼의 동정심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는 갈등 속에서도 끝내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그런 그에게 대살(大煞) 천맹일파(天盲逸 破)가 힘들여 가부좌를 틀면서 입을 떼었다. "우리는 공력을 모두 네게 전해줄 작정이다." '아!' "그렇게 되면 너는 임독양맥이 타통될테고 적어도 일백 년 이상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⑤ 무해(武海)로의 입문(入門). 아삼이 꿈에도 열망하던 그 일은 실로 공교롭게 이루어졌다. 잔결 구지살에게 강제로 납치되어 왔으되 그는 바야흐로 무림고수로서 의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삼살(三煞)의 공력을 한꺼번에 받아 들 였다. 대살 천맹일파는 아삼의 장심(掌心)을 통해, 이살 사심장타 는 명문혈(命門穴)을 통해, 구살 파면마흉(破面魔兇)은 백회혈(百 會穴)을 통해 각각 공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아삼은 내공 도인을 할 줄 몰라 그저 시키는 대로 부단히 정신만 을 집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우우... 이건 마치 불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군!' 그는 속속 밀려 들어오는 삼살의 양강지기(陽 之氣)에 전신이 타 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미리 주의를 받은 바 있는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살기 위해서인데 이 정도를 못 참을까?' 만일 현 상황이 목숨과 무관하다면 그는 벌써 고통을 이기지 못해 달아나고 말았으리라. 요컨대 그가 이처럼 참고 있는 것은 인내력 때문이 아니라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 탓이었다. 어쨌든 그의 경맥으로 흘러들어온 세 줄기의 진기는 하나로 합쳐 지며 무서운 힘으로 경맥을 타통시켜 갔다. 쿠쿠쿠... 콰쾅! '어억!' 기경팔맥이 모두 타통되는 순간, 그는 내심 비명을 발하면서도 허 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듯한 상쾌감을 느꼈다. 이어 그의 체내를 휘돌던 열양지기는 임독양맥으로 밀려갔다. 자고로 임독양맥의 타통이란 무림인들에게 있어서는 꿈에서라도 이루고자 하는 경지이다. 그러지 못하면 백 년을 고련한들 상승의 무학을 익힐 수가 없기에 무림인들은 그것을 일편 최대의 난관으 로 여기기도 한다. 다만 무리하게 시도했다가는 주화입마(走火入魔)를 야기시켜 죽음 내지는 폐인이 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 그래서 임독양맥은 일명 생사현관(生死玄關)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것이다. 아삼은 진기가 임독양맥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자 일신의 피 란 피가 모조리 역행되는 듯한 고통에 빠지고 말았다. '으으윽......!' 진기는 재차 막강한 힘으로 임독양맥에 도전해 갔다. 아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굵은 땀방울이 비오듯 쏟아 져내렸다. 그것이야말로 주화입마의 현상이었다. 말마따나 무형지독에 중독된 데다가 극심한 부상마저 입은 삼살의 공력으로는 아무래도 아삼의 임독양맥을 타통시키는 일까지는 무 리인 모양이었다. 이에 삼살은 사력을 다해 세번째로 아삼의 임독양맥을 향해 진기 를 이끌어갔다. 그것은 바꾸어 말해 그들이 자신들의 진기를 최후 의 한 방울까지 모조리 쏟아부었다는 얘기다. 콰르르르......! 노도와도 같은 열양지기가 아삼의 전신 경맥을 일주천하며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콰콰쾅! 아삼은 자신의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폭발음을 들었다. 동시에 그 는 정신이 아찔하여 혼절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삼은 전신에 충만해 있는 기력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 순간을 기해 그의 눈에서는 전에 없던 한 가닥 신광(神光)이 폭사되었다. 이것은 현재 그의 몸에 잠재해 있는 백 년 이상의 내 공에 의한 현상이었다. 아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칠흑 같던 실내의 어둠도 이제는 그에 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덕분에 주변 경물을 환하게 꿰뚫 어 볼 수 있게 된 그는 나직한 신음성을 발했다. "아! 저들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부좌를 튼 채로 절명해 있는 삼살이었 다. 그들의 시신을 대하자 아삼도 어쩔 수 없이 미안한 생각이 들 었다. 그에게도 한 조각 양심은 남아 있었기에. 아무튼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 그는 몸을 일으켰다. 뜻밖에도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일 장이나 솟구쳐 올랐다. 단지 약간의 힘을 썼을 뿐이건만 그리된 것이다. "오오!" 아삼은 탄성을 발하며 사뿐히 바닥에 내려섰다. 무공에 문외한인 그도 그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있었으므로.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철문으로 다가섰다. "이얍!" 아삼은 기합성과 함께 철문을 밀어 보았다. 끼기기긱―! 철문은 쉽게 열렸고, 아삼은 어깨를 쭉 펴며 밖으로 나섰다. 그런 연후에야 그는 고개를 돌려 삼살을 똑바로 응시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당신들은 내 생애 최초로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들이오. 그 대가로 이 문을 닫아 당신들의 시신이 야수들의 밥이 되는 것을 면하게 해 드리겠소." 그는 선언이라도 하듯 덧붙여 말했다. "십이대천마인가 십이대악귀인가 하는 자들은 필히 내 손으로 응 징하겠소. 당신들의 요구도 접수해야 마땅할 테니까." 아삼은 한 손만을 움직여 철문을 도로 닫았다. 꽝! 그는 손을 툭툭 털며 돌아섰다. "이제 천마신경이라는 비급 상의 무공들만 터득하면 나는 공히 천 하제일인이 될 것이다. 후훗훗훗......!" 운명(運命)은 아삼을 묘하게 이끌어가고 있었다. ⑥ 콰르르릉― 높디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내리는 폭포수는 백룡(白龍)이 승천하 는 듯 힘차 보였다. 폭포수는 수천, 아니 수만 개의 포말로 부숴 지며 싱그러운 수향(水香)을 풍겨내고 있었다. 고동(古洞). 폭포 옆의 벼랑에는 하나의 석동이 무성한 칡넝쿨로 은밀하게 감 추어져 있었다. 그 입구로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아삼이었다. 그는 폭포수의 주변과 벼랑 아래를 쓰윽 훑어보고는 사뭇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됐어, 이곳으로 정하자. 이 이름없는 석동에서 미래의 천하제일 인이 탄생되는 것이다." 아삼은 석동의 입구에 털썩 주저앉더니 품 속을 더듬어 작은 보퉁 이를 꺼냈다. 그리고는 단단히 감싸인 천을 조심스럽게 풀어 천년 인형설삼과 천마신경을 꺼냈다. 천년인형설삼의 향긋한 내음에 아삼은 허기를 느꼈다. "쯧! 그러고 보니 여태 한 끼도 못 먹었군." 그는 그 영약을 손끝으로 쥐고 빙글빙글 돌렸다. "어디 조금만 먹어 볼까?" 백 년에 이르는 내공을 가지고부터 매사에 자신감이 팽배해 있는 그는 천년인형설삼의 뿌리 부분을 깨물어 보았다. 그런데 설삼은 기이하게도 타액이 닿자마자 그대로 녹으며 식도를 타고 모조리 그의 뱃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말았다. 반면에 아삼은 향기로운 냉채 정도를 먹은 듯한 느낌만을 받았을 뿐 별다른 이상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표 정으로 빈 손을 내려다 보았다. "흠, 괜찮은 걸 가지고 공연히 겁을 먹었잖아? 아마도 삼살의 내 공을 주입받아서 아무 문제도 없는가 보군." 아삼은 허기가 가시며 기력이 솟자 무척 기분이 좋았다. "엽천상이라는 작자도 참 어리석군. 이렇게 좋은 것을 미리 먹지 않고 나 같은 악당에게 얌전히 상납하다니." 킬킬거리던 그는 이내 안면을 굳혔다. 그가 몰랐던 천년인형설삼 의 효능이 발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아삼은 뱃속에 퍼지는 싸늘한 한기로 인해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 전율스러운 한기는 금세 무섭게 확산되며 그의 몸을 마비시켰 고, 종내에는 피부마저 하얗게 변색시켰다. "으아아악!" 아삼은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그 상태에서 놀랍게도 그의 몸은 점차 새하얀 백 기(白氣)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슈슈슈슈......! 만년빙굴(萬年氷堀)에 든들 이러할까? 골수마저 잠식해 들어가는 한기는 기어이 아삼을 혼절로 몰아넣고 말았다. "으음......." 일대 변신(變身)이 혼몽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다. 천년인형설삼의 한음지기(寒陰之氣)는 너무도 강력하여 단번에 복 용하면 전신의 혈맥이 동결되는 화를 입게 된다. 때문에 백천신검 엽천상도 그것을 마음대로 복용하지 못했다. 앞서도 언급되었듯 천년인형설삼을 복용하려면 만년온옥배나 극양 의 성질을 띤 만년자령초(萬年紫靈草)와 같은 약재가 필요하다. 아니면 체내에 백 년 이상의 극양지기를 지니고 있어야만 빙인(氷 人)이 되는 악운(惡運)을 면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또한 운명의 안배인지 아삼의 체내에는 삼살로부터 주 입받은 백 년 수위의 열양지기가 잠재해 있었다. 따라서 그가 멋 모르고 저지른 실수는 다시 없는 행운으로 변했다. 천년인형설삼의 한음지기와 막대한 열양지기, 그 양극지기는 그의 체내에서 충돌하여 기막힌 음양의 조화를 형성했다. 으드드드득......! 그의 근골이 전후좌우로 뒤틀리며 새롭게 윤곽을 잡아가는가 하면 거친 모발이 우수수 빠지더니 놀라운 속도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 는 새 모발을 자라나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꾀죄죄하던 살갗마저도 뱀의 허물처럼 벗겨져나가 여인처럼 고운 백옥빛 피부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르자면 무림사에 있어 기문(奇聞)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탈태 환골(脫胎換骨)의 신비한 현상이 지금 아삼의 몸에서 실현되고 있 는 것이었다. .......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또다른 하루 가 의외의 역사를 창출하며 다시 사라져갔다. ⑦ 삼 일이 지났다. 석동 안에는 넝마나 다름없는 옷을 걸친 한 명의 청년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그는 의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균형잡힌 체격과 수려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바로 탈태환골을 거친 아삼이었다. 그의 실제 나이 십구 세, 이제야 그는 나이에 걸맞는 성장을 이룬 셈이었다.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움츠러들어 있던 그의 육신이 희대의 기연 들로 인해 비로소 본래의 면모를 찾았다고나 할까? 그것도 과거와 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장부가 되어 있었다. 이윽고 아삼은 스르르 눈을 떴다. "내가... 아직 살아있단 말인가?"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볼을 꼬집어 보았다. 그러자 눈물이 나도록 아팠으나 그의 입에서는 대소가 터져나왔다. "하하하... 분명 살아 있구나, 으하하핫......!" 아삼은 희열에 휩싸이는 한편, 자신의 드러난 팔을 바라보고는 눈 을 휘둥그렇게 떴다. "엉? 이게 어찌된 영문이지?" 그는 이어 몸을 두루 훑어보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스스로 생 각하기에도 마르고 왜소하여 애착이라고는 없었던 자신의 몰골이 변해도 너무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아! 내가... 내가 이렇게 달라져 있다니......." 아삼은 참기 어려운 격정이 가슴으로부터 치밀어올라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신이 나서 석동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건 틀림없이 천년인형설삼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예전의 그 초 라하고 볼품 없던 아삼이 아니다.' 그는 석동 밖으로 몸을 날리더니 칡넝쿨을 타고 벼랑 아래로 내려 갔다. 그리고는 폭포수의 가장자리로 가 명경처럼 맑은 수면에 자 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아! 이럴 수가......." 아삼의 입에서는 절로 경탄성이 비어져 나왔다. 수면에 비친 자신 의 모습이란 지금껏 보아온 어느 귀공자보다도 한층 더 준수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던 것이다. "아아, 아삼! 네가... 네가 진정 아삼이란 말이냐?" 그는 환희에 찬 나머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아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일진의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그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근자에 들어 여러 사람에게 자질이나 근골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었지만 시종 회의해마지 않던 그였다. 더구나 이렇듯 스스로 느끼기에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빼어난 외관 을 가지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아삼의 웃음소리는 한참 후에야 멈추어졌다. 동시에 그는 어깨를 쭉 펴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만상을 둘러보았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신록으로 물든 산야(山野), 시원스럽게 흘 러가고 있는 계수 등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는 눈이 부셔 잠시 눈을 내리감아야 했다. "아삼... 그는 죽었다! 여기 있는 나는 그가 아니라 이 시각부로 새로 태어난 다른 인간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삼은 자신의 아름답지 못한 이름부터 바꾸고 싶었다. "무릇 대인(大人)이 되려면 이름이 걸맞아야 한다. 음, 어떤 이름 이 좋을까?" 그는 시선을 움직여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야에 창공을 흐르 는 한 덩이 구름이 들어왔다. "운(雲)......? 구름은 흐르는 거니까... 비운(飛雲)이 어떨까? 좋아, 비운으로 하자. 성(姓)은 어떤 걸로 하지?" 아삼은 무수한 성씨(姓氏)들을 뇌리에 떠올려 보았다. "노자(老子)의 노(老), 공자(孔子)의 공(孔), 맹자(孟子)의 맹 (孟)....... 아니지, 이런 분들은 성현들이시니까 향후로 무림을 주름잡게 될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아." 심각하여 미간을 구기고 있던 그는 한참만에야 손뼉을 짝 치며 쾌 재를 불렀다. "그거다! 천지간에 가장 신령스럽다는 용(龍),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어디 있을꼬? 그래, 내 성은 용씨로 하자." 아삼은 희희낙락하여 힘차게 외쳤다. "자! 세상이여, 고하노니 이제부터 그대가 받들게 될 나의 이름은 용비운(龍飛雲)이시다." 그는 알지 못했다. 멋지다고 여겨져 선택한 그 이름이 또다시 그 의 행로를 난국으로 몰고가게 될 줄은. ⑧ "젠장! 이렇게 힘들어서야......." 아삼, 아니 용비운은 천마신경을 한 귀절씩 읽어가며 계속 투덜거 렸다. 선문(禪文)처럼 난해한 그 무공귀절들은 학식이 얕은 그로 서는 쉽게 깨우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참을성이 없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진기를 운행시켜야 하는 내공심법의 훈련에 있어서는 채 반 시진을 넘기지 못한 채 지치곤 했다. 일신의 경맥에 무한한 잠력이 숨어 있으면 무엇하랴? 그는 수련에 열중하지 못해 그 잠력을 극히 일부분밖에는 진기로써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마금강신공(天魔金剛神功). 이것은 천 년 전 천하를 지배했던 천마(天魔) 불사천황(不死天皇) 의 독문무학이었다. 이 무공을 대성하게 된다면 인간의 한계를 벗 어나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희대의 마공도 주인을 제대로 만나야 빛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다. 용비운은 지겨움을 느끼며 겨우 한 달에 걸쳐 일 성 정도 의 성취를 얻는 데서 수련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래도 노력에 비해 성과는 지대하다 할 수 있었다. 삼살에게서 전해받은 일백 년의 열양진기와 천년인형설삼의 기적적인 효능이 있었기에 그 정도의 성취도 가능했으니까. 만춘(晩春). 용비운은 급기야 더는 못참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마신경을 모 조리 암기하는 것을 끝으로 석동의 한쪽에 피워 놓은 모닥불 속에 그것을 미련없이 던져버렸다. "이런 위험한 물건은 가지고 다닐 것이 못돼." 자기합리화까지 곁들인 그는 불길에 활활 타들어가는 천마신경을 바라보며 하나의 영상을 떠올렸다. 그것은 악양일미(岳陽一美) 엽 완란(葉婉蘭)의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엽소저, 당신은 나 용비운의 아내가 되어야 하오. 당신이 내게 손수건을 줄 때부터 우리의 인연은 맺어진 것이오." 그는 끈기라곤 없는데 반해 엽완란에 대한 집착만은 질기도록 강 했다. 그녀가 무심결에 내주었던, 한 귀퉁이에 란(蘭) 자가 새겨 진 백색의 비단 손수건을 여태도 간직하고 있으니....... '아아, 엽소저!' 용비운은 손수건을 자신의 뺨에 대고 마구 부벼댔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이 반짝 하고 이채를 발했다. "응?" 그는 잿더미로 변해가는 천마신경을 아무렇게나 발끝으로 걷어찼 다. 그러자 타버린 표지 사이로 하나의 얄팍한 혈지(血紙)가 드러 나 보였다. 용비운은 재를 털고 혈지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재질이 무엇인지 불길에도 전혀 손상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혈지를 유심히 살피다 미간을 찌푸렸다. '쯧! 웬 뜻도 모를 암호와 도형(圖形)들만 가득하구나.' 혈지란 한 장의 지도(地圖)였다. 거미줄 같이 복잡한 도형과 난해 한 암호문으로 이루어진. 하지만 기관도해(機關圖解)에 무지한 용 비운에게는 별반 흥미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내버릴까 하다가 천마신경 내에 은밀히 숨겨져 있던 물건이 라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뭔가 귀중한 가치가 있을 듯하여 손수건 과 함께 찢어진 옷틈에 갈무리 했다. '가자, 악양으로! 이 정도의 용모라면 엽소저도 그 전처럼 그저 무심하지는 못할 것이다.' 용비운은 한껏 꿈에 부풀어 있었다. 칡넝쿨을 타고 내려가는 그의 신법은 절정고수처럼 날렵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이렇게 출도(出道)했으되 이후로 전개될 파란만장한 사건들 에 대해서는 역시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