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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별서 (서울 城北洞 別墅 : 명승 제118호) - 02
성북동 별서, 한국 3대 정원으로 불리는 까닭 < 문화 < 칼럼/에세이 < 기사본문 - 더칼럼니스트 (thecolumnist.kr)
다. 성북동 별서의 경관구조
지금 성북동 별서는 2005년에 작성된 <성락원 복원화 기본계획(설계)보고서>를 기본으로 60년대 이후 훼손된 부분을 일부 복구한 것이다. 이 복원을 완료한 후 2019년 일시적으로 제한 개방했다. 제일 많이 복구된 부분은 전면에서 자동차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도로를 없애고 계류를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성북동 별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두 물이 흐르는 신선계神仙界’라는 뜻의 ‘쌍류동천雙流洞天’이란 글이 새겨있는 입구 쪽의 계곡, 영벽지 주변, 그리고 송석정과 송석정 앞 연못, 그리고 성북동 별서에 물을 공급하는 연못이다. 현재 대문에서 들어와 오른쪽을 보면 바위에 ‘쌍류동천’있고 ‘용두가산’龍頭假山을 돌아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 언덕에 ‘장빙가’라고 이름 붙여진 본채인 한옥이 있고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넓은 공지가 나오고 그 뒤에 ‘영벽지影碧池’가 있다.
입구에 있는 ‘용두가산’은 이름 그대로 조성한 산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복구 전 사진을 보면 도로를 없애면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 ‘용두가산’은 성북동 별서 경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용두가산에 가려져 계곡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게 되면서 성북동 별서 경관에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현재 놓인 돌다리들은 복원 때 놓인 다리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좌측에 ‘장빙가’라 이름 붙여진 주인 살림집이 있다. 1997년 문화재 복원 때 이전에 있던 집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집인데 과거 집은 별서에 어울리지 않은 양옥도 있어 새로 지은 것이다. 새로 지은 한옥은 별서라는 개념에 맞는 집으로 지금 풍광과도 잘 어울린다. 이 집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넓은 터가 있고 그 위쪽에 영벽지가 있다.
영벽지 주변 바위에는 여러 글이 새겨졌다. 앞쪽에서 바라보이는 바위에 전서체로 ‘청산일조靑山壹條’가 있고 왼쪽 바위에는 아래로부터 ‘장빙가檣氷家’라는 글이 있고 그 옆에 ‘영벽지影碧池 해생海生’으로 시작하는 황윤명의 <춘파유고>에 있는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그 옆쪽에는 “明月松間照 靑泉石上流 靑山數疊 吾愛吾廬”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뜻은 다음과 같다. ‘소나무 사이로 밝은 달이 비추고, 맑은 샘이 바위 위로 흐르고, 푸른 산이 첩첩히 싸였으니 내 오두막을 사랑하리라’
<인수위소지>의 ‘百川會不流/여러 줄기 물을 모이게 하여 흐르지 못하게 하여 爲沼碧欄頭/푸른 난간머리의 연못을 만들었네.’라는 내용으로 보면 영벽지는 황윤명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영벽지 우측 바위 위에는 예전에 가산을 조성하기 위해 바위를 가공한 것이 있다. 96년에 발간된 <한국 전통의 원>에 나온 사진을 보면 가산만 보이고 아래 가산을 설치하기 위한 자리는 드러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수면 아래 있었던 것인데 영벽지 수면이 낮아지며 드러난 것이다. 예전 사진을 보면 이 가산을 위한 좌대는 수면 아래 있는 것이 맞을 듯하다.
영벽지 바위 위에는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들이 있다. <성락원 복원화 기본계획(설계) 보고서>에 있는 예전 사진을 보면 물이 직접 흐르지 않게 연지에서 나오는 배수구 앞에 벽을 쌓아 물길을 돌려 급류로 흐리지 않고 돌아 천천히 흐르게 한 것이 있었는데 이젠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청산대조’라는 글이 쓰인 바위 위쪽을 보면 만든 때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동그랗게 30㎝ 정도 원형으로 구멍을 내어 물이 고인 후 물길을 따라 흐르게 했다.
옆으로는 따로 물길을 내 ‘청산일조’란 글 우측으로 물이 떨어져 동그랗게 판 구멍을 따라 물이 흐르도록 해놓았다. 계곡에 물이 많을 경우 현재 있는 작은 폭포 옆에 있는 물길을 따라 새로운 물줄기가 만들어지도록 한 것이다. ‘청산일조’ 아래 넓은 바위에는 바위를 파서 계단을 만들어 사람들이 영벽지 물가로 다가갈 수 있게 했다. ‘청산일조’라 쓰인 벽 뒤쪽 위로 석축이 보인다. 이 석축은 현재 기법이 아니다. 아마도 영벽지를 조성하던 비슷한 시기에 연지蓮池를 만들면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석축 너머 연지에 면한 부분은 콘크리트로 벽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60년대 유원지로 조성할 때 수위를 높이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억지로 높게 만들다 보니 영벽지에서 바라보는 경관이나 송석정에서 바라보는 경관이나 벽으로 막힌 듯해 답답하다. 연지 오른쪽에 전면 7칸의 ‘ㅑ’형 평면을 한 송석정이 있다. 현재 송석정은 예전에 있었던 규모로 다시 지은 것이다. 전체적인 배치로 보면 송석정 있는 곳에는 창덕궁의 부용정 정도 규모의 정자가 어울린다. 성북동 별서의 물은 위쪽에 있는 저류지에서 나와 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송석정 측면을 지나 ‘송석松石’이라 새겨진 바위 앞을 지나 연못에 이른다.
물 흐름의 구성을 보면 연못에서 발원하여 흐르다가 작은 폭포를 만들고 다시 흘러, 바위 위에서 여러 갈래로 흘러내린다. 여러 갈래로 흐르도록 바위를 가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관은 성북동 별서를 이루는 여러 경관요소 중 어쩌면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공간이다. 정자는 이 물길과 ‘송석’이라는 글까지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그 경관을 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는 2칸 정도 물러있어야 한다. 지금 송석정은 너무 물길 쪽으로 붙어있어 이런 경관을 볼 수 없다. 그리고 송석정을 보면 부지 환경에 비해 규모가 크다.
송석정은 대지경계에 바짝 붙어있어 담 너머가 도로다. 지금 송석정은 1961년(또는1954년)에 지어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주변부지 전체가 성북동 별서 소유였다. 그러므로 송석정을 지을 때 지금과 같이 될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뒷부분이 지금처럼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휴양지 개발사업이 무산된 후 부지를 분할하여 매각하면서 도로를 송석정에 최대한 붙여 개설한 것이다. 송석정을 짓기 전에도 이곳에는 연지 경관을 보기 위한 정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 정자 위치와 규모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모습은 어떠했을까?
성북동 별서를 돌아보며 경관에서의 물의 가치를 새삼 느낀다. 물이 없는 계류溪流의 가치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북한산을 자주 오르지만 물이 흐르지 않는 북한산 계곡은 삭막하다. 물과 물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풍광이 진정한 계곡의 풍광이다. 성북동 별서를 방문한 때는 오랜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계곡에 물이 그치지 않았다. 이 물은 80m쯤 위쪽에 있는 연못에서 공급되는 물이다. 그런 점에서 위쪽에 있는 연못을 확보한 것은 경관보전이란 관점에서 신의 한수가 아닐까한다.
복원화 보고서에 나온 이전의 송석정은 소나무가 건물 내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지금은 소나무가 없다. 현재 송석정에 소나무가 없는 상황과 건물 부재 등을 살펴보면 1961년 즈음 위락시설을 위해 지었던 송석정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지은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이다. 솜씨로 보면 목수 한사람이 별채와 송석정 모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 예전 소나무가 관통한 송석정은 그 이름에 걸맞았는데 사라진 것이 아쉽다.
성북동 별서에서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것은 영벽지 옆 언덕에 있는 바위다. 바위는 폭 90㎝, 깊이 30㎝ 정도로 ‘凹’형태로 파있고 도로처럼 평평하게 다듬어 놓았다. 마치 사람이나 바퀴달린 것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길을 낸 것 같다. 이 끝에서 약간만 경사를 줘 목재로 만든 다리나 석축을 쌓으면 자연스럽게 연지를 조성하기 위해 만든 둑에 이른다. 조선시대 양반 중에는 가마를 타고 산을 올랐다. 혹시 그렇게 다니려고 바위를 파 길을 만든 것은 아닐까? 이런 전제로 보면 영벽지 아래 있는 평평하고 넓은 공간은 해방 후가 아닌 영벽지와 연지를 만들면서 어느 정도 조성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성북동 별서에 있는 별채를 이야기해 보자. 별채는 아래는 1층은 콘크리트와 조적조이고 2층은 순수한 한옥으로 지어졌다. 일단 목재와 치목솜씨를 보면 대단히 능력이 있는 목수가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송석정을 다시 지은 목수가 별채도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2층은 다목적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2층에서 바라보이는 경관이 좋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정자로써 활용할 수 있다. 거기에 1층을 전시공간 등으로 활용한다면 성북동 별서 경관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활용 가능한 건물이다. 어쨌든 전체적인 성북동 별서 복원 사업의 관점에서 별채 활용여부를 결정하게 되겠지만 충분히 활용가능한 건물이 아닌가 한다.
라. 나가며
‘성북동 별서’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은 고증부실과 훼손이다. 고증부실은 문화재청이 다시 연구해서 해결됐다. 그런데 훼손문제는 아직도 논란 중이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성북동 별서’의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논란은 우리 근대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도 관련 있다. 지금 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구분 때문에 근‧현대에서 이뤄진 변화에 대한 가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두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첫째가 일제강점기에 대한 반감이고 둘째가 가난하고 험난했던 현대사에 대한 자신감 부족이다. 이것 모두 일본 식민지가 됐다는 자기 비하에서 출발한다. 어쨌든 우리 뇌리에는 일제 강점기 이후 문화에 대해서는 가치가 없다는 인식이 있다. 그런 것이 ‘성북동 별서’ 문화재 지정에 반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북동 별서’를 포함한 성북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 즐겼던 곳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과거 성북동 풍광은 다 사라지고 그나마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이곳 ‘성북동 별서’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보전할 가치는 충분하다.
일단 성북동 별서는 별서로써의 기본은 갖췄다. 과거 모습을 다시 찾는 것이 원칙이라면 조금 더 손을 봐야 할 것이고, 가장 손이 많이 갈 곳은 송석정 주변이다. 송석정 주변은 가장 많이 훼손된 곳이고, 송석정도 해방 후에 지어진 것이다. 그러려면 송석정도 헐어야 한다. 그런데 과거 성북동 별서에 대한 시설물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맞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별서들 역시 당대 사람들이 조성한 공간이다. 그런 관점에서 송석정과 별채의 존속 결정은 두 건물이 경관과 어울리는 것인가에 있다.
어쨌든 주변이 주택가로 바뀌며 먼 경관에 대한 조망 경관은 망가졌지만 계곡과 물 그리고 수목이 만들어 내는 아기자기한 내부경관은 ‘석파정’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부 훼손된 곳은 연구에 따라서는 최소한 일제 강점기 때 모습까지는 원상복구가 가능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얼마 전 본인이 방문했을 때 2019년 임시 개방을 위해 정비한 상황에서 많이 훼손됐다. 지금보다 더 훼손되게 방치하는 것은 문제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만큼 지금이라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소유주와 협의하여 경관 보전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 한국전통의 원/정재훈/도서출판 조경/1996.10.
- 성락원 복원화 기본계획(설계) 보고서/(주)한인건축사사무소/성북구/2005.12.21
- 서울역사답사기 4 (인왕산‧북한산‧낙산 일대)/석울역사편찬원/2020.12.04
- 園林 복원을 위한 전통공간 조성기법 연구/국립문화재연구소/2017
-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이해경/유아이북스/2023.04
- 명승 별서정원 역사성 검토/성균관대학교 산학협력단/문화재청/2020.12
- 성북동, 성락원, 장빙가/류성룡,이동준/성북구청문화체육과/2009
- 조선시대 성북동 누정들/조성진/
http://dh.aks.ac.kr/~red/wiki/index.php/SKLDC(2022)Research2
- '성락원'의 원래 주인은 의친왕 아닌 '고종의 내시'였다(오마이뉴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4561
- '조선의 비밀정원' 성락원? 문화재적 가치 거의 없다(NEWSTOF)
https://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544
- [반론] '명승 문화재' 성락원은 경관적 가치가 충분하다(NESTOF)
https://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0
- "성락원 바위글씨는 '나만의 집(장외가)'…누군가 추사 코스프레했다"(경향신문)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9021344001#c2b
- 명승 제35호 성락원(城樂園)의 정원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이원호/Journal of Korean Institute of Traditional Landscape Architecture 제10권/2012
- 성락원(명승 제35호) 주변지역 필지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 -성북동 문화재 주변을 중심으로 /이원호, 이세미/한국전통조경학회지 제31권 제2호/2013
- 성락원 영벽지의 원형 파악을 위한 3D 스캔기술 연구/이원호, 박동진, 김동현, 김재웅/한국 전통조경학회/한국전통조경학회지 제31권 제3호/2013
- 명승 제35호 『성락원』 지정 해제/문화재청보도자료/2020.06.24.
- 고전번역원사이트 : https://www.itkc.or.kr/main.do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https://www.nl.go.kr/newspaper/
참고자료
- 2019년에 개방한 성락원 모습
https://www.youtube.com/watch?v=dw5uLgeja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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