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그가 치를 결전의 의미 ① 하루... 이틀... 사흘....... 그처럼 열흘이란 기간이 물 흐르듯 지나가버렸다. 제일 연공실이다. 용비운은 석대 위에 앉아 무공구결을 터득해 가 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동안 공손찬의 성의있는 지도에 힘입어 그의 천마금강신공은 어 느덧 칠 성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그가 발출해낸 천마금강환의 위력은 한결 증폭되었지만 아 직 그 최고 경지인 무형(無形)의 단계에는 입문조차 하지 못했다. 이 갑자를 상회하는 그의 공력으로도 무형마강환(無形魔 環)의 성취는 영 불가능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천마신경 가운데 가장 막강한 위력을 지닌 장공(掌功) 을 수련하기로 작정하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천마무흔잠인(天魔無痕潛印). 이것은 가격된 물체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 내부만을 파 괴시키는 극마지학(極魔之學)이었다. 철포삼이나 금종조와 같은 외문강기도 이 마공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용비운은 범천패역진경 상의 기학도 펼쳐 들었다. 공손찬이 곁에 있어 범문의 해석은 벌써 끝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환혼사유술(還魂死幽術)과, 천면환용기환술(千面換容 奇幻術), 범천신수(梵天神袖) 등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 중 환혼 사유술과 천면환용기환술은 언뜻 사술(邪術) 같았다. 용비운은 그 두 가지가 너무도 신기하게 여겨져 과연 무학의 부류 에 해당되는지조차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르자면 환혼사유술은 한 줌의 진기로써 자신의 혼(魂)을 조종하 는 묘술이었다. 극한대까지 터득하게 되면 믿기 어려운 일이나 신 체와 혼을 따로 분리시킬 수도 있었다. 천면환용기환술은 서역의 밀학(密學)에서 유래된 변용술의 일종이 었다. 여기에는 신체의 수축과 이완을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용모 나 골격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묘용이 있었다. 극한의 경지에 이르면 풀포기, 혹은 돌덩이 등의 자연물로 변신하 여 일신을 완전무결하게 은폐시킬 수 있었다. 범천신수는 소위 백해천렬(白解天裂)의 무공으로 상대의 무학을 파해시키는 효용을 지니고 있었다. 도검(刀劍)의 공세는 물론이거니와 장력(掌力), 지력(指力)까지도 모두 흡수하거나 되튕겨내는 일이 가능했다. '아! 깊이 빠져들수록 신비하다. 무학의 세계란.......' 이것이 무공구결들을 독파하고 난 용비운의 소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의 화살은 다시 열흘이라는 기간도 꿰뚫어 버렸고 결 전의 날은 겨우 닷새를 남겨놓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천마신경과 범천패엽진경 상의 구결 습득을 마친 용 비운은 심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사형께선 왜 여태 돌아오시지 않는 걸까? 진귀한 약재를 구하러 나가신다더니." 그는 좌대에서 내려서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보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거지가 따로 없군." 이십 일이나 목욕은 고사하고 세수도 제대로 못하다보니 실제로 그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과 손등에는 때가 덕지덕지 끼었 으며 머리카락도 잡초처럼 뻣뻣해져 있었다. 또한 좌대에서 잠깐씩 눈을 붙인 게 고작인지라 수면부족으로 눈 은 움푹 꺼지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와중에도 그의 뇌리에는 두 여인의 영상이 교차되고 있었다. 한없이 아름다우면서도 청초한 분위기를 가진 엽완란과 천고의 절 증으로 하루하루 죽어 가면서도 메마른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 던 온주려....... 용비운은 차라리 툴툴 웃고 만다. "과연 내가 천각봉 결전에서 살아남아 그녀들과 다시 상면할 수 있을까?" 그는 굳이 생사에 연연해 하지는 않았다. 예전처럼 금마선을 빌어 타인을 기만하는 행동 따위도 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생전의 강호일정 용비운이 그러했듯 진정한 장부로서의 위엄 과 기개를 그녀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는 어깨를 펴며 제일 연공관을 둘러보았다. 팔각형의 석실은 전 체가 견고한 청강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념을 떨칠 겸 어디 나의 무공을 한 번 시험해 보자." 용비운은 천마진기를 끌어올려 쌍장에 주입시켰다. "천마무흔잠인(天魔無痕潛印)!" 한 소리 외침과 함께 그는 신형을 빙글 돌렸다. 콰르르르― 막대한 기류가 성난 파도처럼 팔각형 석실의 여덟 곳으로 동시에 뻗어 나갔다. 퍼퍼퍼펑―! 연이은 폭음이 울리며 석실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의 장인(掌印)이 적중된 팔 면의 석벽은 조 금도 손상되지 않고 멀쩡했다. "분명 강한 폭발력을 느꼈거늘, 아직 화후가 부족한 건가? 천마무 흔잠인이 팔 성까지는 연성되었으리라 여겼건만." 용비운은 실망한 나머지 입술을 질겅 씹었다. 지난 이십 일에 걸 쳐 심력을 소모해 가며 구결을 암기하고 틈틈이 연습도 해왔건만 그의 성취는 너무도 기대에 못미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푸스스스....... 팔면의 석벽에서 난데없이 먼지가 흘러내리는가 싶더니 믿을 수 없게도 천정이 균열을 일으키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쩌저적― 쿠르르르― "맙소사!" 용비운은 대경하여 쏟아져내리는 바윗덩이들 사이로 신형을 날렸 다. 그리고는 황급히 외부로 피신을 했는데 다행히도 붕괴사건(?) 은 제일 연공실이었던 석실 하나로 그쳤다. "휴우! 하마터면 내 무공에 내가 죽을 뻔했군." 그는 붕괴의 잔해인 돌무더기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편, 기쁨에 겨워 몸을 가늘게 떨었다. "무슨 일이냐? 소사제." 때마침 지하동부의 입구 쪽으로부터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용 비운은 큰 죄라도 지은 양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공공천야 공손찬이었다. 먼 길을 다녀온 듯 그의 의복은 온통 먼 지로 뒤덮혀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진귀한 자한죽(紫漢竹)으로 만 들어진 망태기를 들고 있었다. "이... 이제 오십니까? 사형." "음, 동정호엘 갔었지." 공손찬은 천천히 걸어 그에게로 다가섰다. "어째서 제일 연공실이 이 꼴이냐?" 용비운은 고개를 푹 떨구며 대답했다. "네, 실은 소제가 아무 생각도 없이 경솔하게 천마무흔잠인을 시 험하는 바람에 저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 공손찬은 백미를 치켜올리며 무너진 석실을 면밀히 살폈다. 곧 그 는 천정 부위를 제외하고는 석벽이 모두 미세한 분말로 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오! 정녕 놀라운 진전이다. 혹여 성취가 더딜까 하여 천신만고 끝에 만년화리(萬年火鯉)를 구해 왔는데.' 용비운은 호된 질책이라도 떨어질 줄 알았다가 의외로 아무 소리 가 없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왜 소제를 꾸짖지 않으십니까?" "허허... 앞으로는 무공을 펼치려거든 밖에서 하도록 해라. 이러 다간 천단이 남아나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용서... 해 주시는 겁니까?" "처음 있는 일이니 어쩌겠느냐? 어서 가서 목욕을 하고 제이 연공 실로 오너라. 내 너를 위해 잉어탕을 끓여 놓겠다." "감사합니다, 사형!" 용비운은 크게 외쳐 말하고는 곧장 천단수(天檀水)가 흐르는 청하 연(靑霞淵)으로 달려갔다. 공손찬은 지그시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 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저 모습은 마치 생전의 용사제를 보는 것 같군. 그래, 그는 그릇 된 일을 저질렀을 땐 항상 먼저 벌을 청하곤 했었지.' 그는 죽은 강호일정 용비운에게 생각이 미치자 가슴 한구석이 황 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되고. 소사 제는 소사제대로 그 나름의 삶을 향유해야 하니까.' ② 제이 연공실이다. 용비운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잉어탕을 먹고 있었다. 그 광경을 공 손찬은 흐뭇한 미소와 더불어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그동안 건량으로 허기를 때워온 용비운으로서는 이 한 사발의 잉 어탕이 천하제일의 진미로 여겨졌다. 이윽고 그는 그릇을 밑바닥 이 드러나도록 싹 비우고는 배를 쓰다듬었다. "사형, 정말 잘 먹었습니다. 탕(湯)이 워낙 뜨거워서인지 전신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것 같군요." 그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맷자락으로 문지르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공손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소사제가 먹은 잉어탕은 태양의 정기를 지녔다는 만년 화리를 푹 고은 것이다." "네엣?" 용비운은 크게 놀랐다. 만년화리라면 사상(四象)의 영약 중에서도 최고로 꼽는 천고의 영약이기 때문이었다. 일만 년 동안 매일 아침 일출 시에 정기를 흡수한다는 만년화리는 아무데서나 흔히 구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형......!" 용비운은 감격한 나머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향해 공손찬은 그저 빙그레 웃어보일 따름이었다. "소사제, 속히 운공조식을 하도록 해라. 너는 앞서 달의 정기가 담긴 천년인형설삼을 복용했으니 만년화리의 화기를 쉽게 내공으 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용비운은 대답 대신 시키는 대로 따르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 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사형, 소제는 알고 있습니다. 사형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강호일정 용비운만큼 뛰어난 인물이 되는 것임을.' 이때, 공손찬이 다가와 뒤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그의 명문혈 에 장심을 밀착시켰다. "소사제, 천마금강신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라." 그 말에 용비운은 조금도 지체없이 칠 성의 경지까지 터득한 천마 금강신공을 최대한 운기했다. 사실 그는 육 성에 이른 후부터는 신공의 진전이 둔화되어 고심 중이었다. 마치 거기까지가 한계지점인 듯 그간에 보여왔던 지속 적인 증진이 정지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공손찬이 만년화리를 구해온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용비운은 상승무학을 익히기에는 늦은 데다가 전 무학을 속성으로 연성해야 했으므로 막대한 공력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내공의 기초가 부실한 그로서는 당연히 어느 선에 이르자 성취를 이루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용비운은 공손찬의 장심에서 밀려드는 태극천단진기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만년화리의 약효를 진기로 흡수해 갔다. 그러자 전신 사지백해로 스며드는 충일감에 그는 형용키 어려운 희열을 느꼈다. 그것은 새가 알을 깨고 자유롭게 날아오를 때의 느낌과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이십 년은 고련을 해야 이룰 수 있는 내공의 기초 단계 를 불과 이십 일만에 견실히 다지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의 천마 금강신공은 마침내 구 성의 경지에 도달했다. 용비운. 그는 전신 진기를 삼십육 주천 하고는 눈을 떴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신광이 폭사되었다. 이어 그가 진기를 거두어 단전으로 되돌리자 눈에서 쏟아져 나오 던 광채는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아! 몸이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 충만한 기 력이라니... 이것이었나, 무학 성취의 기쁨이란......?' 용비운은 내심 희열에 차 부르짖으며 몸을 일으켰다. 반대로 공손찬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운공조식을 하고 있었다. 용 비운을 위해 막대한 진기가 소모된지라 그의 모습은 언뜻 보아도 이전과 비교가 될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③ "사형......." 기쁨에 젖었던 용비운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 올랐다. 잠시 후. 공손찬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의 앞에 용비운은 무릎을 꿇었다. "소제, 사형께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공손찬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용비운의 손을 잡았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소사제가 아니라 이 사형이다. 천하의 운명 을 떠맡길 인재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사형......!" "기왕이면 천마금강신공을 대성시켜 불사금강지체(不死金剛之體) 를 이루어주려 했지만 능력이 모자라 그건 실패했구나." "아닙니다. 소제는 이 정도로도 몸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솔직 히 저에게 오늘과 같은 날이 있을 줄은......." "허허... 그래서 세상이 공평하다는 것이겠지." "예전에는 그 말을 회의했었지만... 지금은 믿습니다. 사형께서 는... 비단 소제의 무공 증진을 도와주신 것만이 아니라 저의 인 생 자체를 밝혀 주셨습니다." 용비운의 음성은 격정으로 인해 몹시도 떨려 나왔다. 공손찬이 손 을 뻗어 그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모쪼록 천각봉의 일전에서 승리하기를 빌겠다. 상대가 범패륵(梵 覇勒)만 아니면 이길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범패륵이 누구입니까?" 공손찬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대단한 위인이지. 백 년 전 변황제일인(邊荒第一人)으로 추앙되 던 고수로서 대밀종천의 대법왕이기도 했다." "그가... 직접 나올까요?" "그것을 잘 모르겠구나. 그는 변황 사상 최강이라는 자부심에 들 떠 한때는 중원 무림을 굴복시키려 했던 야심가였지." "으음!" "물론 범패륵의 야심은 좌초되었다. 중원 무림에도 그에 필적할 만한 고수는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를 상대했던 인물은 여태까지 도 내력 불명이며 심지어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도 당금 무림 을 통틀어 불과 몇 명밖에 안 된다." "그분은 또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자칭 절대패왕(絶代覇王)이라던 자다." 용비운은 다소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했다. "스스로 절대패왕이라니 너무 광오한 것 아닙니까?" "그런 일면이 그로 하여금 범패륵을 찾아가게 했는지도 모르지. 그 두 사람의 일전은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하니까." "싸움에서는 그분이 이겼겠지요?" 공손찬은 자엽차를 들고 와 그에게 건넸다. "그 일전의 결과는 모른다. 절대패왕과 변황천불(邊荒天佛) 범패 륵은 그후로 모두 종적을 감추어 버렸지." "동귀어진 내지는 양패구상을 했기가 쉽겠군요." 용비운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름대로 의견을 피력했고, 공손찬도 거기에는 동의를 표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쨌든 절대패왕은 가볍게 논할 인물은 아 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본단의 선사께서 중원을 지키기 위해 범패륵과 일전을 벌이셨을 게야." 그는 말을 마치자 연공실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곳 항산에서 대파산 천각봉까지는 삼천 리도 넘는다. 적어도 하루 전에는 나서야 할테니 그렇게 따지면 정확히 너에게는 사 일 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는 셈이다." 용비운도 그를 따라 연공실 중앙으로 갔다. "이 사형은 너에게 천단신서의 무학 중 경공과 선법(扇法)을 전수 해 주겠다." "그 천하제일의 경공을 말씀입니까?" "허허... 세상에는 무수한 기인이사들이 있거늘 어찌 나 같은 사 람을 놓고 천하제일 운운할 수가 있겠느냐?" 공손찬은 풍성한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말을 이었다. "경공은 크게 보법(步法), 신법(身法), 비행술(飛行術)로 나뉘어 지는데 네 수준의 공력이라면 모두 쉽게 연성할 수 있다." 그는 선 채로 신형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소사제, 나를 한 번 잡아 보아라." "네!" 용비운은 빠르게 다가서며 그의 소매를 낚아챘다. 그런데 뜻밖에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공손찬의 신형은 거짓말처 럼 슬며시 증발해 버렸다. "이럴 수가......!" 공손찬의 음성이 등뒤에서 들려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허허... 소사제, 왜 허공을 젓고 있느냐?" 용비운은 몸을 빙글 돌리며 탄성을 발했다. "아! 정녕 사형의 신법은 명불허전이로군요." "이것은 일명 분형환위(分形幻位)라 한다. 분신을 놔두고 먼저 본 신을 움직여 상대의 이목을 속이는 신법 중 하나이지." "소제도 배우고 싶습니다." 그가 열의를 보이자 공손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쳐 주겠다. 그리고 용사제가 구사했던 천단금마선법(天檀禁 魔扇法)도 이젠 네 소유가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형." "그 선법은 천단신서의 최고절학 중 하나이다. 모두 십이 초로 되 어 있는데 이 사형도 구 초밖에 연성하지 못했다." 공손찬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용사제는 십이 초까지 완벽하게 수련했지. 특히 후(後) 사 초식 은 앞의 팔 초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가공할 위력을 담고 있다. 그러나 탄자사식(彈字四式)과 기자사식(奇字四式)만 터득해 도 천하에 적수가 드물 것이다." 용비운이 문득 씁쓸한 음성으로 물었다. "소제는 앞의 팔 초식으로 만족해야 합니까?" 그 말에 공손찬은 흠칫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은 아니다, 소사제. 탄자사식과 기자사식을 연성하기 전 에는 파자사식(破字四式) 중 한 초식도 시전할 수 없기에 한 말일 뿐이다. 너에게는 그것을 다 익힐 시간도 없고." 이는 진심이었으되 상대에게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었다. "알겠습니다." 용비운은 수긍을 하기는 했지만 내심 이렇게 읊조렸다. '강호일정 용비운, 내 천각봉 전투에서 살아난다면 기필코 각고의 노력으로 자네를 능가하는 인물이 되겠다. 그때부터는 내가 자네 의 성명을 빌린 게 아니라 자네가 내 능력을 빌린 바 되도록 해 주리라.' 그는 진정한 자존심에도 눈을 떠 가고 있었다. ④ 은한림(銀漢林)의 입구. 정갈한 금삼으로 갈아입은 용비운이 공손찬을 향해 공손히 포권지 례를 취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공손찬은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여부가 있겠느냐? 부디 목숨을 아껴야 하느니, 그래야 도탄에 빠 진 무림을 구할 게 아니겠느냐?" "천단의 명예를 걸고 분전하겠습니다." 용비운은 힘주어 대답한 후, 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 물건은 아무래도 사형께 맡겨야 할 듯하군요." 그것은 한 장의 혈지도였다. "무엇이냐?" 공손찬이 혈지도를 받아들고 그에게 물었다. "모릅니다. 기관도해 같은데 소제가 그 방면에 어두워서요. 천마 신경의 표지에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던 것입니다." "알겠네." "그럼 소제 이만 물러갑니다." 용비운은 재차 포권하고 나서 계곡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휘익―! 그가 사라지고 나자 공손찬은 혈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오오, 이것은......!" 충격을 받은 듯 공손찬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안면 역시도 마구 씰룩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전설로 내려오던 악마의 예언(豫言)이 실존했었단 말 인가? 그 저주의 구마혈정(九魔血井)이......?" 그의 부르짖음은 넋이 나간 자의 그것과 같았다. ⑤ 바야흐로 유월 보름이 되자 대파산 천각봉(天角峰)의 기슭에는 수 만에 이르는 군웅들이 운집했다. 운무에 휩싸인 봉우리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흑도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사망총, 지옥루, 살인정, 요화궁(妖花宮) 등 암 흑십세의 고수들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흥미로운 볼 거 리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반면에 우측의 백도 인물들은 하나같이 긴장상태였다. 백도 최대 의 거파인 월영성궁(月影聖宮)을 비롯하여 구대문파, 사문(四門), 삼회(三會), 일방(一幇)이 전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이번 싸움을 도저히 흥미롭게 관찰할 입장이 못되었다. 강 호일정 용비운과 서역 대밀종천의 일전은 차후로 중원무림의 정세 에 일대 변수를 가져올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용비운이 승리한다면 백도 무림은 의기를 높이고 흑도 세 력의 창궐을 저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중원 무림에 위협 을 줄 대밀종천만은 더 이상 경계하지 않아도 되므로. 반대로 용비운이 패한다면 중원 무림은 내외(內外)로 동시에 적을 맞이해야 하는 절대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밖으로는 대밀종천의 중원 진출을 방비해야 하고, 안으로는 신비 단체의 조종하에 급속히 무림 전역으로 확대되어 가는 흑도의 세 력을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백도의 인물들 가운데는 천지성검(天地聖劍)이라 불리우는 옥면공 자(玉面公子) 담화린(潭華燐)의 모습도 보였다. 그의 옆에는 옥봉(玉鳳) 녹월서시(綠月西施) 사옥교(舍玉橋)가 바 싹 붙어 있었는데, 그녀는 여보란 듯이 온갖 아양을 떨며 담화린 과의 관계를 겉으로 드러내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담화린은 얼굴이 은은히 붉어진 채 주위의 시선을 피할 뿐 그녀를 밀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도의 여협들이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담화린으로 이르자면 출도 일 년만에 용비운에 버금가는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특히 온화한 성품으로 인해 세인들과의 친숙도 면 에서는 용비운보다 한 수 위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옥봉 사옥교에게 발목을 내준 바 되었으니 평소 그를 흠모하던 여협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호호... 담랑(潭郞), 이 싸움의 결과는 어찌될 것 같나요?" 사옥교는 일부러 큰 소리로 묻고 있었으며, 담화린은 운무 속의 거봉을 응시하면서도 응대는 해주었다. "그야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나도 이곳에 모인 군웅들처럼 용소협이 승리를 거두었으면 하는 바램이오." 그 말을 들은 군웅들은 사심이라곤 없는 그의 성품에 새삼 찬사를 보냈다. 용비운만 없으면 담화린은 중원제일 후기지수의 명예를 획득할 수 있었다. 용비운의 존재란 그에게 있어 넘지 못할 벽과 도 같은 경쟁자였으니까. 그처럼 개인적인 명예보다 천하 무림의 안녕을 먼저 생각하는 그 를 향해 사옥교는 입술을 삐죽였다. 다만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여 대놓고 반박하지 못할 따름이었다. '흥! 용비운은 죽어야 해. 그래야 담랑이 신진고수 중 제일인자가 될 테고, 나도 화문사봉 중 으뜸이 될 게 아냐?' 한편. 백도의 수뇌부들이 모여 있는 동백림 옆에는 일남일녀(一男一女) 가 굳은 기색으로 서 있었다. 그들은 당금 무림의 제환팔대명인 (制還八大名人) 중 한 명인 백천신검(白天神劍) 엽천상과 챙이 넓 은 방갓을 쓴 여인이었다. 체격이 호리호리한 여인은 비파를 안고 있었다. 방갓에 가려져 용 모는 알 수 없지만 새하얀 옥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일신에 백의를 걸친 그녀가 나직한 옥음으로 물었다. "숙부님, 용공자가 이리로 올까요?" "물론이다. 명예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전 차라리... 그분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듣자하니 대 밀종천 측에서는 전대의 법왕이 나온다던데......." 한숨을 짓는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악양일미 엽완란이었다. 그녀는 원래부터 규방이나 지키고 있지는 않았다. 당대의 기인인 보타성니(菩陀聖尼)의 진전을 이어받아 신비 가운데 활동해온 무 림여협이었다. 그랬기에 같은 무인으로서 용비운을 보자마자 호감 을 느꼈는지도 모르지만. 이때, 한 줄기 홍영(紅影)이 장내로 뛰어들었다. "아이쿠! 억!" "누가 이 복잡한 곳에 말을 몰고 와......!"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들은 막상 적토 마를 탄 홍의녀를 보자 언제 떠들었냐는 듯 잠잠해졌다. 그녀는 단봉, 여의상아 희비연이었다. 그녀의 명성과 후광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주지의 사실이고, 그때문에 대개의 사람들은 골 치덩이인 그녀를 내놓고 회피하는 실정이었다. 희비연은 군웅들 사이로 적풍을 몰아가다 우뚝 멈추어 섰다. 담화 린에게 달라붙어 조잘거리는 사옥교를 보았던 것이다. 본시 희비연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여인들의 애교다. 이 여장부가 그런 작태를 그냥 보아넘길 리 만무였다. "후후... 못봐주겠군!" 그녀는 말채찍으로 손바닥을 치며 아무렇게나 내뱉았고, 옥봉 사 옥교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홱 돌아다보았다. "누구ㄴ?" 그러나 희비연의 싸늘한 눈빛과 정통으로 마주하게 되자 그녀는 일단 노기를 삭여야 했다. 그것은 희비연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후광에 대한 경각심 때문 이었다. "난 또... 누군가 했더니 단봉이었군요?" 사옥교는 짐짓 멀쩡한 기색으로 담화린을 소개했다. "인사 나누시죠. 이분은 천지성검 옥면공자세요." 그녀는 희비연의 놀라움과 부러움이 깃든 표정을 상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희비연은 담화린을 한 번 힐끗 쳐다보았을 뿐 거의 무반응이었다. 대신 조소를 날리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흥! 그러고 보니 믿는 바가 있어 거들먹거렸군." 이쯤 되자 사옥교도 폭발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단봉!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너야말로 더 당하기 싫으면 암내 피우지 마라." 희비연은 차갑게 잘라 말하고는 말머리를 돌려 백도의 수뇌부 쪽 으로 향했다. 뒤에 남은 사옥교는 격분하여 치를 떨었다. "우우... 못된 계집......!" 그녀는 멀뚱히 서 있는 담화린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너무하세요! 담랑은 소녀가 이렇게 핍박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죠? 월영성궁이 두려워서인가요?" 그 말에 담화린은 쓰게 웃었다. "그럼 날더러 여인을 상대로 입다툼을 하란 말이오?" 사옥교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을 뿐 더 이상 뭐라 말하지 못했다. 그래봐야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음! 이건 아직 담랑을 내 손에 쥐지 못한 탓이야. 잠자리만 같이 하게 되면 내 치마폭에 휘어감을 수 있을 텐데.' ⑥ 단봉 희비연. 적풍을 몰고 가던 그녀는 멈칫하더니 그대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 것은 엽천상의 옆에 서 있는 엽완란을 보고나서였다. 엽완란은 그녀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공연한 시 비에 휘말릴까 우려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희비연은 말채찍을 어깨에 걸친 채 대뜸 물어왔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은 비봉(秘鳳) 비파섬수(琵琶閃手) 가 분명해요. 아닌가요?" 그 말에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여인에게 모아졌다. 엽완란은 뭐라 답해야 할지를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런 그녀에게 희비연의 싸늘한 음성이 떨어졌다. "흥! 나는 신비를 가장하는 인물은 오히려 경멸하지. 그래서 무엇 을 얻겠다는 건지 모르겠거든?" 엽천상이 곁에서 난색을 지으며 나섰다. "그만 두시게, 희여협. 신비를 가장하자는 게 아니라......" 그의 변명은 희비연에 의해 중도에서 잘렸다. "호오! 고명하신 백천신검 엽대협께서 대신 말씀을 해주시다니, 비파섬수는 벙어리였나요?" 마침내 엽완란이 방갓을 치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뇨. 전 벙어리가 아니랍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밝힌 셈이었다. 주위에 서 있던 군웅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봉 비파섬수라면 화문사봉 중 가장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녀는 악인들을 개심(改心)하게 만드는 비파성과 그들을 직접적 으로 징계하는 섬수(閃手)의 소유자라는 것 외에는 일체 알려진 바가 없다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희비연은 그녀의 청초한 자태에 본능적으로 질투를 느꼈다. 화려함으로 말하자면 사옥교가 제일이었지만 그쪽은 늘상 추문이 따라다녀 비교 대상에서 제외시킨 지 오래였다. 그런데 엽완란을 대하자 희비연은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아름다운 거야 피차에 정평이 나 있으니 그렇다 치고,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면들이 엿보였다. 그 나긋함은 물 론 섬세한 여인 특유의 자상함 등....... 희비연은 왠지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툭 내뱉았다. "쳇! 역시 추녀는 아니었군. 그러면서 왜 숨어 다닌담?" 그녀와는 달리 엽완란의 어조는 잔잔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진 면목을 감출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란아, 너 어쩌려고......?" 듣고 있던 엽천상이 오히려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악양지부대인의 금지옥엽인 엽완란이 거친 무림에 뛰어든다는 것 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이 알려지게 되면 그로서는 형(兄)을 대할 면목이 없어지고 만다. 그에 반해 엽완란은 한결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숙부님, 소녀 금후로는 강호에서 살겠어요. 아버님께는 숙부님께 서 잘 말씀드려 주세요." "안된다! 너는 그런 결정을 단지 용소협 때문에......." 엽천상은 답답한 심정에 해서는 안되는 말까지 튀어나오게 되자 실수했다 싶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엽완란 은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요, 전 그분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녀는 다시 방갓을 내려썼다. "사부님께서도 제 마음을 아시고 만류하지 않으셨어요." 잠자코 있던 희비연이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그 용소협이란 강호일정 용비운 소협을 말하는 건가요?" "네, 맞아요." 엽완란은 얼굴을 붉혔으나 굳이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비봉은 용소협과 친한가요?" "그건... 제 임의로 말하기가 곤란하군요." 희비연은 픽 웃었다. "알고 보니 용비운, 그자는 바람둥이였군?" "지나쳐요. 그런 말은......." 엽완란은 그녀를 힐책하면서도 일순 가슴 속으로 한 줄기 찬 바람 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흥! 용소협과는 나도 친하다면 친한 사이에요. 물론 내 임의로 말할 바는 아니지만. 같이 멋지게 술 한 잔 나눴죠." 상황을 마구 꾸며댄 희비연은 위협적으로 덧붙였다. "비봉, 용소협은 포기하는 편이 나을 거예요. 이번 대밀종천과의 대결에서 승리한다면 나는 그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예정이니까요. 어때요, 이래도 나와 맞설 자신이 있나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몸을 날려 마상에 올랐다. "호호호호......!" 그녀는 한바탕 교소를 터뜨리고는 애초에 가던 방향으로 맹렬하게 쏘아져 갔다. 그녀가 남기고 간 공언은 엽완란으로 하여금 불안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용공자께 청혼을 하겠다고?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을 그녀가.......' 이쯤 되고 보니 엽완란도 마음을 다잡고 뭔가 방책을 강구해야 했 다. 그러지 않았다간 가문을 뛰쳐나온 보람도 없이 정인(情人)을 다른 여인에게 탈취당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⑦ 백도무림의 수뇌부에서는 줄곧 진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회의의 주재자는 월영성궁의 총사(總師)를 맡고 있는 은창무적 (銀槍無敵) 관창(關槍)이었다. 그는 과거 은창부(銀槍府)를 거느리는 일문의 종사였으나 월락대 제(月落大帝)에게 모종의 은전을 입은 후로는 자청하여 월영성궁 의 총사가 되어 있는 인물이다. 창술(槍術)의 달인으로서 일찍이 백천신검 엽천상과 마찬가지로 제환팔대명인에 포함되어 있는 그는 짙은 먹빛의 장미(長眉)를 찌 푸리며 입을 열었다. "성주께서는 신비세력의 등장과 십이대천마의 횡포를 이대로 방관 할 수만은 없다며 조만간 군웅대회를 개최하자고 하셨소. 이 시점 에서 강호일정 용비운 소협이 승리를 거두어 준다면야 더 바랄 나 위가 없으련만." 구대문파 장로들도 그 말에 동감을 표했다. "아미타불... 맞소이다. 월영성궁이 개최하는 군웅대회에는 본 사 도 적극 지원할 예정이오만, 용소협의 승패 여부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리라 여겨지오." 소림 달마원의 원주인 법정대사가 대표격으로 말하자 사문(四門) 과 삼회(三會)의 종주인 강남사절(江南四絶)과 강북삼기(江北三 奇) 측에서도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옳은 말씀이오. 여러분들의 지원이 있다면 군웅대회는 무림의 새 역사를 여는 계기가 될 것이오. 그러나 용비운 소협이 패한다면 크게 차질이 빚어질 것이외다. 하필 시기가 맞물려 자칫 백도의 의기가 상하는 쪽으로 비화될지도 모르오." 이때, 여의상아 희비연이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관총사, 용소협의 승리가 그 정도로 비중이 크다면 다른 방도도 한 번 강구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분명 이 자리에 끼일 만한 자격이 못되었으나 신분상 누군가 자리 를 내주었고, 그녀는 스스럼없이 거기에 가 앉았다. "편법이긴 하나 대밀종천의 대표를 미리 없애면 되잖아요?" 그 말에 관창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소궁주, 그것은 불가하네. 백도인들 중에서 그렇듯 떳떳하지 못 한 일에 나설 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네." 다른 인물들은 아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보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그들이 암계에 동조할 리 만무였다. 그들을 향해 희비연은 냉소했다. "흥! 무림대의를 위해서인데 무슨 짓은 못해요? 체면이나 차리다 가 무림이 도탄에 빠지면 그땐 누가 책임을 지죠? 짐작컨대 대밀 종천에서는 소수의 정예들이 올 거예요. 우리의 인원으로 능히 제 거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수뇌가 빠진 대밀종천은 향후로도 중원침공은 꿈도 꾸지 못할 테고요." 그녀는 공도를 벗어나는 비열한 계책도 서슴치 않고 말했다. "그뿐이 아니에요. 이 기회에 우리의 맞은편에 모여 있는 흑도의 무리들마저 쓸어버리면......." "뭐, 뭣이.....?" 그녀의 대담한 발언은 중인들 모두를 경악시켰다. 그 상태에서도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암흑십세의 세력은 절반 정도가 삭감될 것이고, 결국 신비세력도 꼬리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거예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것만이 천하를 구하는 최상책이에요." 듣다 못한 곤륜의 학성자(鶴星子)가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단봉 소저, 무릇 어떤 일에고 도의라는 게 있는 법 이오.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나선다면 흑도인들이나 다를 바가 무에 있겠소?" 때마침 두 가닥의 인영이 환영처럼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자네들, 저 망나니 같은 계집애의 되먹지 않은 소리에는 귀를 기 울일 필요도 없네." "누구냐?" 희비연은 아미를 홱 치켜올리며 벌떡 일어섰다. 그에 반해 이십여 명의 백도 수뇌들은 모두 일어서 예를 취했다. "노선배들을 뵈오이다." 나타난 두 인물은 누더기 옷을 걸친 데다가 딸기코에 졸린 눈을 하고 있는 천결신의 취몽성수, 그리고 새하얀 승모를 쓰고 있으되 우아한 자태의 보타성니였다. 이르자면 신주십대고수 중 이 인이 출현한 것이었다. 보타성니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떼었다. "예는 거북하니 다들 앉으세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는 자는 없었다. 그들 은 고명한 무림선배에 대한 예우로 천결신의와 보타성니가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야 하나 둘씩 착석했다. 천결신의, 즉 취몽성수가 술호로를 기울여 한 모금을 들이키더니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연아, 너는 서 있도록 해라." "네에?" "싫으면 나가도 좋다." "숙부......!" 희비연은 금시라도 폭발할 듯했으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곧 얼굴을 펴며 보타성니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소녀, 성니를 뵈옵니다. 그동안 존체무량하셨는지요?" 보타성니는 자신에게 보내온 구조신호(?)를 즉각 알아차리고는 입 가에 자애로운 미소를 담았다. "그래, 그만 앉거라. 성주께서도 안녕하시겠지?" 희비연은 자리에 앉으며 천결신의를 향해 혀를 쏙 내밀어보인 후, 짐짓 정중하게 아뢰었다. "네, 가부께서는 성니께서 언제고 한 번쯤 본궁을 방문해 주시기 를 바라고 계세요." "오냐, 어차피 이번 군웅대회 때에는 가게 될 것이야." 보타성니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면 대밀종천의 고수들이 당도할 거예요. 그대들은 절대 저들과 격돌해서는 안돼요. 이 일전은 용비운 소협이 약정한 것이 니 필히 그에게 맡겨야 해요." 취몽성수가 그 말에 덧붙여 희비연을 향해 이죽거렸다. "봐라, 계집애야. 네가 아무리 수작을 부리려 해도 성니께서는 이 미 뜻이 확고하시지 않느냐?" 희비연은 슬쩍 보타성니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좋아요.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할 수 없죠. 하지만 한 가지만은 소녀도 양보할 수 없어요. 전 이 싸움이 끝나는대로 용소협께 청혼할 작정이에요. 설마 그것마저도 안된다고 가로막지 는 않겠죠? 취숙(聚叔)." "아이쿠! 내 이래서 저 계집애만 보면 도망을 친다니까." 취몽성수는 죽는 소리를 하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 망아지 같은 계집애야, 혼인이 어디 너 혼자 하는 게냐? 그러 다 용소협이 거절하면 망신살은 어쩌려고?" 그녀의 대담성에는 취몽성수만이 아니라 좌중의 여러 인물들도 혀 를 내둘렀다. 보타성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미타불......! 저 애가 설치면 란아가 타격이 크겠구나.' 흑백 양 진영의 군웅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앗! 드디어 나타났다―" "대밀종천의 고수들이다!" 분분한 외침과 함께 그들 무림인들은 일제히 서편의 길을 트며 좌 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