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6일 총동문회 집행임원회에서 ‘백농선생 묘소를 참배’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송영소 총동문회장은 이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참배 일을 5월 9일(토)로 정하면서 참배에 드는 모든 비용은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축문과 절차는 67회 이명학 동문이, 제수 장만은 69회 김노수 동문(용수산 대표)이 맡기로 하였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참배 일인 5월 9일이다.
오전 8시 20분 중동고 정문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24명의 총동문회 임원과 기별회장들이 시간에 맞추어 모였다. 후배들은 타고 갈 금성관광버스 옆면에 ‘中東學校 設立者 白儂 崔奎東先生任 省墓團(중동학교 설립자 백농 최규동선생님 성묘단)’이라는 플래카드를 붙이느라 야단이었다.
뭐 저리 ‘극성’들인가 싶기도 하다가 그 ‘마음씀’과 ‘열정’에 뿌듯해진다. 선배들은 ‘先生任(선생님)’의 ‘任(님)’은 한자로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참견이고, 한 편에서는 한자로 쓰면 누가 알아보겠느냐고 타박이다.
총동문회장기 축구대회 진행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동문들(68회 오형택, 69회 이강열, 73회 김일한, 74회 조영상)도 나와 아쉬워하며 배웅을 해주었다. 보아하니 약방의 감초 68회 오형택 사무차장이 제일 아쉬움이 큰 것 같다.
시간에 맞추어 버스는 출발하였다.
잠시 후 버스 안에서 참가한 동문들을 소개하였다.
48회 고광환, 조영걸(사회자가 가수 조영남의 친형이라 한다), 49회 이용선, 50회 조종효(제10대총동문회장), 윤척호, 노영수 선배를 소개하였다. 일흔 노구에도 다들 건강하시고 단단해 보인다. 61회 송영소, M60 박소강, 64회 민병조, 정세용, 66회 한기열, 67회 이명학, 68회 김성록, 허경완, 69회 이영식, 김노수, 김근호, 71회 최용국, 이지호, 73회 조영욱, 74회 이홍재, 75회 고상일, 76회 김동현, 83회 서성열 동문을 차례로 소개하였다.
차 안에는 동문회에서 미리 준비한 읽을거리가 있었다.
‘아버님(최규동)을 생각한다’와 ‘백농선생 신도비’가 곱게 묶여있었다. ‘아버님을 생각한다’는 백농선생의 자제 최성장선생이 쓴 글로 6∙25전쟁 중 백농선생이 납북되어 돌아가시기까지의 일과 자제들이 평양까지 가서 유해를 겨우 찾아 온 이야기였다. 이 글을 읽으면서 백농선생께서 감옥에서 겪으신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왔다. 주위를 돌아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듯했다. 어느 후배는 효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이라 한다.
‘백농선생 신도비’는 1968년 월탄 박종화선생이 백농선생의 인간됨과 업적을 쓴 것이다.
간결한 필치에 백농선생에 대한 월탄선생의 존경심이 우러나 보인다.
버스는 중부고속도로를 거쳐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중부내륙고속도로에 접어든다. 3시간 쯤 지나자 성주IC로 빠져나간다.
근처 ‘성재네 시골밥상’이라는 식당에서, 부탁해 놓은 짐을 싣고 15분쯤 가자 백농선생 생가에 도착하였다.
보통 생가는 한적한 마을 안에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도착해 보니 찻길 가에 있어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안으로 들어가니 옛날 기와집이 세 채가 있었다. 우리를 맞아준 분은 ‘한옥선’이라는 분이었는데, 최성장선생과는 10촌쯤 되는 분의 부인이라 했다. 남편 이름을 물어보자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셨는지 ‘최성운인가?’ 하며 하도 오래되어 남편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다. 하긴 옛날 분들이 ‘아무개 아버지’라 불렀지 남편 이름을 쓰고 부를 기회가 있었겠나.
세 채 한옥 가운데 좌측에 있는 집이 백농선생께서 태어나신 곳이라 한다. 겉은 유리 창문을 덧대어 안에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다들 유리창에 손을 대고 안을 들여다본다. 단촐한 방과 마루가 깨끗하게 보존이 되어 있었다.
바로 옆채로 들어가니 이곳은 백농선생께서 쓰시던 서재였는데 서울에 살던 자제 분들이 가끔 내려와 머물던 곳이라 한다. 마루에는 앉으시던 의자와 테이블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천으로 덮어놓았다. 방문 위쪽에 백농선생 사진과 최성장 선생 초상화가 양 편에 나란히 걸려있다. 언제 뵈어도 단아한 모습과 잔잔한 미소가 자상하다. 세 개 방에는 백농선생의 손때가 묻은 한문 고서가 서가마다 가득 들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중동학교에 있던 ‘中東文庫(중동문고)’가 경성제국대학 다음으로 책이 많았다고 하더니 이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쭉 돌아보고 우선 책의 양에 놀라고 보관 상태가 안 좋아 눅눅해져 있는 고서에 또 다시 걱정이 앞선다. 이러다가는 책을 영 못 쓰게 될 것 같다. 옛날 분들은 일 년에 한 번 씩 ‘曝曬(폭쇄)’라고 해서 책을 밖에 내다놓고 햇볕을 쏘이는 일을 하였는데 아마 몇 년째 하지 못한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중동고등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여 영구히 잘 보관하면 어떨까 한다. 이 길이 최선이 아닌가 한다. 우선 시간이 나면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가서 책 목록이라도 정리해야겠다. 아마 사나흘은 족히 걸릴 것 같다.
한옥선 여사 말이 4년 전 도둑이 들어 백농선생께서 소장하셨던 귀중한 골동품과 그림을 훔쳐갔다고 한다. ‘운동화를 신은 놈’과 ‘앞이 갈라진 신발을 신은 놈’들이 집을 지키던 개들도 죽였다고 분개하면서 말씀한다.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면 그것을 다 기억하겠나. 이러니 더 마음이 급해지고 걱정이 앞선다.
생가를 둘러보고 수국이 곱게 핀 생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하얗게 핀 수국만큼이나 동문들의 얼굴이 곱다.
떠나기 전 ‘중동 100년사’를 생가에 드린다. 후손 분들과 소원하다보니 이리 된 것 같다.
다시 버스에 올라 5분쯤 시멘트로 포장 된 논길로 가자 백농선생 묘소 어귀다. 버스 한 대 겨우 다닐만한 좁은 길이다. 차에서 내려 100미터쯤 가자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서울에서 준비해온 제수 용품을 하나 씩 나누어 들고 산길을 오른다. 비교적 경사지고 좁은 길이다. 오늘따라 날은 어찌 이리 더운지 다들 땀으로 범벅이다. 잠시 ‘백농선생 신도비’ 앞에 모여 신도비도 둘러보고 한 숨 돌린다. 우리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일흔 노구의 선배님들이 어떠신지 걱정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멀쩡하시다. 대단하신 분들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좁은 산길을 오른다. 오르는 길 왼 편에 최성장 선생 묘가 있었다. 5분 쯤 가파른 계단과 길을 오르자 멀리 백농선생 묘소가 빼곰히 모습을 드러낸다. 마음이 묘해진다. 단 한 번 뵌 적도 없고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는데 왜 이리 가슴이 벅차오는 것일까? 다 들 그런 표정들이다. 특히 선배님들은 더 하신 것 같았다.
묘소를 둘러보니 올해는 벌초를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마음이 한결 놓인다. 묘소 앞에서 준비해온 제수를 진설하고 묘제 준비로 분주하다. 69회 김노수 동문이 장만해 온 제수가 정갈하다. 정성이 눈에 보인다. 원래는 간단하고 조촐하게 하자했는데 상자를 여니 제기에 과일에 포에 누가 탓할 수 없는 제대로 된 제수였다.
묘소 왼편에는 배너에 ‘義 - 正義, 信義, 大義(의 - 정의, 신의, 대의)’를 걸고, 오른 편에는 ‘백농선생님 묘소 참배’와 ‘백농선생 사진’을 세워 놓았다. 격식과는 거리가 멀게 사는 우리들이 이리 정성어린 격식을 차리다니 감격스럽고 고마울 뿐이다.
잠시 후 동문들이 자리를 하고 ‘중동 100년사’ 한 질도 올려놓고 묘제가 시작이 되었다. 목청 좋은 김성록 사무총장이 집례를 한다. 총동문회장이 분향을 하고 다들 두 번 절을 올린다[參神(참신)]. 총동문회장이 잔을 올리고[初獻(초헌)] 무릎을 꿇고 앉고 67회 이명학 동문이 축문을 읽는다[讀祝(독축)].
“2009년 5월 9일 저희들은 中東學校(중동학교) 전 동문을 대표하여 선생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뜻을 기리며 인사를 올립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오로지 민족 교육에 뜻을 두시고 온갖 고난을 겪으시면서 우리 中東學校(중동학교)에서 인재 양성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신 선생님의 은덕에 머리 숙여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아울러 ‘대의’와 ‘신의’ 그리고 ‘의리’로 일깨워주신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저희들은 선생님의 숭고한 정신이 이 땅에 오롯이 구현될 수 있도록 마음을 가다듬고 성실히 살아가겠습니다.
저희가 정성껏 마련한 소찬을 마음껏 드시고, 선생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굽어 살피시고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維歲次(유세차).....’로 시작하는 것 보다 간결하고 알아듣기 쉽단다.
이어 최고참 48회 고광환 동기회장이 잔을 올리고[亞獻(아헌)] 50회 조종효 제10대총동문회장도 잔을 올린다[終獻(종헌)]. 가장 막내 83회 서성열 동기회장과 49회 이용선 동기회장이 첨잔을 한[添酌(첨작)] 후 다들 마지막으로 절을 올린다[辭神(사신)].
경건한 의식 속에 정적이 흐르는데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가 그 고요함을 더 해준다.
묘제를 마치고 음복을 한다. 얼마 되지 않은 술이라 서로 조금씩 나누어 든다.
뭔지 모르겠으나 술은 달고 마음은 뿌듯해 온다.
하산 길에 최성장 선생 묘소에 들러 참배를 한다. 어느 선배님은 학창시절 최성장선생과의 악연을 말하다가 절을 드리면서 ‘이제 없었던 걸로 하시지요.’라고 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날이 무척 덥다. 많이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버스에 올라 늦은 점심을 들기 위해 ‘성재네 시골밥상’ 집으로 간다. 벌써 2시 10분이다. 가는 길에 가천면사무소에 들러 ‘중동 100년사’ 한 질을 기증한다. 가천면에 이런 훌륭한 분이 계셨다는 것을 알렸으면 한 것이다. ‘성재네 시골밥상’은 지난 4월 김성록, 오형택, 조영욱 동문이 사전 답사를 왔다가 예약을 해둔 집이다. 시골 음식점 치고는 너르고 깨끗하다. 불고기 백반과 된장찌개로 늦은 점심을 먹으며 소주와 맥주로 반주를 한다. 선후배가 잔을 돌리며 오늘 참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조종효 제10대총동문회장은 “역대 총동문회에서 늘 추진해오던 일인데 오늘 15대총동문회에서 실행에 옮겨 고맙고, 아마 백농선생께서도 지하에서 굉장히 기뻐하고 계실 것이라”한다.
점심을 마치고 3시 30분이 돼서야 버스에 오른다. 이른 아침, 더운 날씨, 늦은 점심에 휴식을 취하느라 버스 안이 조용하다. 한 시간쯤 갔을까 속리산휴게소에 도착한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이 참 좋다. 김성록 사무총장이 곶감 선물세트를 사서 선배님들께 감사의 뜻으로 드린다. 마음씀이 너그럽고 아름답다. 백농께서 늘 강조하신 선후배 간의 정이 이런 것인가 싶다.
잠시 휴식 후 버스에 오른다. 갑자기 76회 김동현 동문이 소주를 들고 83회 서성열 동문이 안주를 들고 버스 안을 누빈다. 앞뒤를 돌고 또 돈다. 이리 마시는 소주는 맛도 좋다. 잔이 몇 번 돌자 김동현 동문이 ‘중동노래방’을 하자 한다. 요즈음 버스는 노래방 시설이 최신식이다. 먼저 48회 조영걸 선배가 마이크를 잡더니 동생 조영남의 노래를 제쳐두고 나훈아의 ‘고향역’을 부른다. 50회 윤척호 선배는 ‘만남’을 부르는데 박자와 음정하고는 영 친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끝머리에 가사를 “사랑해 중동을, 중동을 사랑해”라고 바꾸어 부르자 버스 안 분위기가 돌변하여 대 환호를 받는다. 우리는 이렇게 ‘중동’이라는 단어에도 열광한다. 순수하고 열정적이다.
오늘은 총동문회장기 축구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각 기수 별 대항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버스 안 동문들에게 각 동문들이 상황을 알려온다. 67회와 69회 대항전은 시시각각 결과를 알려온다. 결과를 듣고 일희일비하며 떠들썩하다. 69회가 이겼다는 소식이 오자 목소리 큰 69회 이영식 동문이 가장 좋단다. 68회 소식도 들려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효창구장에서 열리고 있는 ‘2009년 대교눈높이컵 축구대회 서울시 동부리그’에서 중동고가 수도공고를 1:0으로 이겼다는 소식도 온다. 총동문회장이 오늘 저녁 승리를 자축하는 생맥주를 사겠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 ‘홀인원’한 사실을 이야기하며 기념타올도 준비하셨단다. ‘홀인원’을 하면 ‘3년 간 재수있다’는 속설도 이야기하며 우리 동문회가 잘 될 것이라 덕담도 한다. 자신의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人之常情(인지상정)인데 동문회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총동문회장의 말씀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이제는 도착하는 일만 남았다.
길은 막혔다 뚫렸다 한다. 안성쯤에 오니 6시 40여분이 되었다.
이영식 동문과 김성록 동문이 심심한가 보다. 도착 시간을 두고 내기를 한단다. 7시 13분에서 15분 사이에 도착하면 이영식 동문이 이기는 것으로 하고 만원씩 건다. 경건한 행사를 마치고 오면서 이 무슨 ‘야바위(?)’인가? 아무튼 격의 없고 재미있다. 도착 내내 막히면 막히는 대로, 뚫리면 뚫리는 대로 시끌벅적하다 누군가 이영식인데.....
지루하지 않게 웃으면서 왔다. 7시 12분에 도착했다. 이영식의 패배다.
버스에서 내려 선후배 간에 작별 인사를 나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한데 얼굴은 모두들 맑고 맑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인근 생맥주집으로 갔다. 그리고 오늘 수도공고를 이긴 김종부 축구감독(76회)을 오라하여 총동문회장이 100만원의 격려금도 주었다. 모두 기쁜 일만 있었던 좋은 날이다.
<論語(논어)>에 ‘愼終追遠, 民德歸厚矣(신종추원, 민덕귀후의)’라 했다. ‘상례를 신중히 하고 먼 조상을 정성껏 제사지내면 (그 감화로) 백성들의 덕성이 돈후해질 것이다’라는 것이다. 누군가 정성스레 조상을 모시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도타워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음미해 볼 좋은 말이다.
(주)클럽리치항공 대표인 75회 고상일 동문이 매 달 첫 번째 토요일에 백농묘소 참배를 원하는 동문들에게 무료로 차량과 점심을 제공한단다. 敦厚(돈후)한 마음이 아닌가? 많은 동문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여 말로 하는 중동 사랑을 백농선생 묘소에서 가다듬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특히 내년은 백농선생께서 서거하신지 60주기가 되는 해이다.
오늘 하루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 벅찬 날이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우리 모두에게 ‘백농’과 ‘중동’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 기분 좋은 하루였다.
(총동문회 학술∙문화위원장 67회 이 명학 씀)
첫댓글 좋은 글 잘일고 퍼갑니다.
잊혀지는 중동의 義로움이 가슴에 들어와 슬피우네요. 부끄럽습니다.지키지 못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