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아프간 여인의 눈동자
1985년 여름, 내쇼날 지오그래피 잡지에 실린 한 장의 아프간 소녀의 사진이 전 세계를 흔들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확대될 대로 확대된 두 눈은 그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공포와 경악과 자괴감에 빠져들게 하였다. 이 사진은 내쇼날 지오그래픽의 100대 사진에 뽑혔고, 잡지와 서적, 포스터, 브로우치, 카펫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에 실렸다.
그녀의 얼굴, 특히 눈을 통해서 고통과 희망, 강한 의지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이 되었으나 그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독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얼굴은 알았지만 그녀에 대하여는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이름까지도.
단지 “아프간 소녀(Afghan Girl)”라고 불리워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문의가 이어졌으나 잡지사는 물론 그녀를 촬영한 기자도 그녀의 이름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2002년 3월, 내쇼날 지오그래픽은 마지막으로 “아프간 소녀”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취재팀들이 파키스탄에 있는 나시르 바흐 난민 수용소에 찾아갔다. 그 곳은 샤베트가 최초로 사진을 찍혔던 곳이다.
그러나 난민 수용소는 이미 파괴되고 없었다.
수용소로부터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여러 마을을 탐문하던 취재팀은 마침내 맨 마지막 마을에 들어서서야 표지 사진 속의 소녀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서방 세계를 경악케 했던 신비의 아프간 소녀는 '샤벳 굴라'로 밝혀졌다.
그녀의 이름은 파슈툰 말로 ‘달콤한 수련꽃 같은 소녀’라는 뜻이다.
굴라라는 이름은 여자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다. 꽃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이랄까?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의 시골 구석에 남편과 세 딸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세계에 유명해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샤벳 굴라는 이슬람 전통에 따라 그녀의 가족이외의 외간 남자를 만날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을 통해서 마침내 그녀와 연결이 되었고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쇼날 지오그래픽은 여성 조연출을 보내서 샤벳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게 할 수밖에 없었다.
샤벳은 평생에 단지 두 번 사진을 찍었다. 한 번은 1984년 그리고 이번. 그러나 그녀 자신은 취재팀들이 전에 찍은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기 전까진 자신의 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두 번째로 사진을 찍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베일에 싸인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녀가 어렸을 때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고 폭격으로 부서져 버린 마을들이 골짜기 마다 즐비하였다. 그녀의 마을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녀가 6살 때 소련 비행기의 폭격으로 부모님을 잃었다. 공포로 가득찬 낮이 지나면 밤에는 주검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비행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들은 소련군의 만행을 피하여 마을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어디에서든지 나타나서 사람들을 죽였다.
그녀의 할머니의 보호아래 그녀의 오빠와 4명의 자매들은 파키스탄으로 도망쳤다. 꼬박 일주일을 담요하나만 걸친 채 눈에 덮인 산길을 걸어서. 부모님을 잃고 시작된 피난길은 맨발로 눈에 덮인 산을 넘어 결국은 난민 수용소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샤벳과 같이 시골에서 살던 사람들은 난민 수용소 같은 폐쇄된 공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곳에는 개인 사생활이란 생각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들의 동정속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의 원조를 통해서 삶을 영위하여야만 한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그녀와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다.
그녀는 28살 이나 29살 쯤 될 것이다. 아니 30살일 수도 있다. 아무도 심지어는 그녀 자신도 자신이 몇 살인지 알지 못한다.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이야기는 모래처럼 수시로 바뀐다.
그녀는 결혼하여 딸 넷을 낳았으나 하나는 어려서 잃었다. 그녀는 종교와 문화적 전통과 습속에 따라 세상을 등지고 살 수밖에 없었다.
시간과 고단한 삶은 그녀의 젊음을 앗아가 버렸다. 그녀의 피부는 동물의 가죽같았고 그녀의 날카로왔던 턱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다만 그녀의 눈동자는 아직까지도 불타고 있었고 조금도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녀가 파키스탄의 난민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랬다.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살아 온 길은 험난함 그 자체였다.
아프간 사람들의 이러한 고통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왔다. 25년간의 전쟁으로 150만이 죽고 35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침략과 저항 그리고 또 다른 외세의 침공, 그리고 내전, 언제 비극의 반복이 끝이 날 것인가? 매번 아프간 국민들은 그들의 지도자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친구나 원조국가를 자처하는 이웃나라로부터 배신당했다.
이것이 지난 4반세기 동안 아프가니스탄에 일어났던 이야기이다.
두 번째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그녀는 다시 무명의 칩거에 들어갔다고 한다. 최근의 그녀의 이름과 얼굴의 공개를 통하여 그녀는 다시 한 번 세계의 관심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놓았다. “그녀는 어떤 매체와도 인터뷰를 거부하였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녀의 가족은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하였고 다시 베일 속의 삶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그녀의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그녀의 슬픔과 공포가 가득하면서 무언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녹색 눈동자는 말없이 그녀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얼굴과 눈은 그러한 그녀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녀의 녹색의 바다같은 눈동자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깊은 혼란 속으로 빠지게 한다. 도저히 눈을 돌릴 수가 없게 한다.
그녀의 사진은 그녀가 처해 있던 난민 수용소의 비참한 환경을 설명하는 데 가장 상징적인 것이 되었고 단지 아프가니스탄 난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난민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그녀는 세상에 또 다른 문화와 그늘진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었고 아프가니스탄 여인과 소녀들에 대하여 세계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아프가니스탄 여성과 아동 돕기 위한 특별 재단을 설립하고 아프간 여성과 소녀들의 교육 기회를 늘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http://blog.chosun.com/soomch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