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받는 모세(출 3장 1-8절) 230903 주일설교
비행착각 - 인생의 사명이 필요한 이유 항공기 조종사들이 조종 훈련을 겪다가 보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겪게 되는 현상이 있다. ‘비행 착각’(Spatial Disorientation) 혹은 ‘버티고’(Vertigo)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은, 비행 중 작용하는 여러 가속도로 인해 인체 평형 기관의 왜곡된 감각을 그대로 받아들여 착각하게 되는 현상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바다 위를 비행할 때, 비행기의 자세를 혼동해서 실제로는 항공기가 뒤 집혀서 바다를 향해 가고 있음에도 자신은 하늘을 날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
비행 착각 현상이 치명적인 이유는, 설령 지금 기체가 뒤집혀 있고 하늘이 아닌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종사의 모든 감각은 지금 상태가 ‘정상’이라고 느낀다는 것.
자신의 감각만을 믿고 조종하다가 결국 바다에 추락하는 일이 있기도.때문에 조종사들은 계기판에서 보여주는 내용과 자신의 감각이 서로 다를 때는, 무조건 계기판을 따라서 조종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설령 아무리 자신의 감각이 옳다고 느껴지더라도, 직관을 버리고 계기판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궁극적으로 안전하게 비행을 마칠 수 있는 길. 결국 계기판은 항공기 조종사에게 있어서는 생명을 지켜주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
우리 인생에도 이 이야기를 적용해볼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 길인지, 어떤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 때로는 살면서 목표가 희미해지고 가야할 방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었는지 불분명해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될 때도 많다. 또 우리는 착각하기도 합니다. 분명 하락하는 길이고 실패하는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지금 나는 잘 가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가 자신의 판단과 감각만 믿고 결정한다면, 우리 인생의 ‘비행착각’을 경험할 것이다.
사명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계기판과 같은 것이다. 인생의 분명한 사명이 있다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최근 오펜하이머가 흥행 1위다. 이 영화는 핵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양자역학의 대가 오펜하이머를 다룬 영화다. 그의 공로로 나치보다 일찍 핵폭탄을 만들어 미국의 국민영웅이 되었지만,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의 윤리 딜레마와 죄책감들로 인해 정신 상태가 매우 불안정해진다. 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독일 나치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전체 국가 체제 속에서 극악무도한 악을 행하게 된다는 ‘악의 평범성’ 이론의 모델이 되는 인물이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던 자신의 행위는 국가의 명령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을 한다. 그리고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반성 하나 없이 “독일 만세!”를 외치고 죽는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투하가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생명을 앗아간 것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식을 가지고 괴로워하다가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다가 소련의 스파이 의혹을 받다가 정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토사구팽 격으로 내팽겨진 오펜하이머는 이에 대해 좌절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악을 거부하고 과학적 윤리에 관한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펼쳐 나간다.
“세상이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웃었고, 어떤 사람들은 울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슈누 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다 되었도다.’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며 자신의 한 일들에 대해 후회는 물론 자신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개발했지만 이 때문에 윤리적인 면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오펜하이머, 정부로부터 선택과 부름을 받았지만 이내 외면과 버림을 받았던 그의 인생 속에는 과학과 윤리 정치 등의 다양한 부분이 극적으로 얽히고 설켜 있다. 그는 인류 역사를 바꿀 과학 기술의 만드는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 누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발명이 인간의 생명과 인류 미래에 대해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해 이를 경계, 피해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소명의식을 엿볼 수 있는 영화다.
자신의 생명을 사용한다는 한자 의미를 담고 있는 사명(使命, mission)은 개인의 경우 삶의 목적 내지는 존재 이유로서 ‘나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뜻한다. 사명 (使命)의 사전적 의미 : 1 맡겨진 임무. 2 사신이나 사절이 받은 명령.
사람에게는 영원한 가치를 사모하는 마음이 각인되어 있으며, 이 영원한 가치는 자신의 사명을 기쁘게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게 된다. 또한 시련을 이겨내는 힘은 신념에서 나오며 굳건한 신념은 사명감에서 솟아남을 생각할 때 인생에 있어서 사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스위스 사상가 칼 힐티는 저서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에서 “인간 생애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라고 말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그의 나이 22세 때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7년 2월 17일 발표한 ‘한국 국민의 건강행태와 정신적 습관의 현황과 정책대응’ 보고서에 의하면, 12세 이상 일반 국민 1만명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자신을 가치 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 사고’ 응답비율이 60.1%,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무망’ 응답비율이 47.6%로 나타났다면서 정신건강을 위한 정신적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바른 정신적 습관 형성을 위해 명확한 사명과 비전이 영혼과 마음의 중심축으로 굳게 자리잡아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사명이 없는 자는 불행하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 S. 루이스는 “제일 중요한 것을 먼저 하면 두 번째 것이 저절로 따라오지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을 먼저 하면 첫 번째 것과 두 번째 것을 모두 잃는다.”라고 삶의 우선순위를 강조하였다. 사명이 중요하다.
80세에 소명을 받는 모세 - 본문은 모세가 호렙 산에서 이스라엘 민족 해방의 지도자로 소명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보여 준다. 때는 모세가 40년 애굽 궁중 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를 자처하다가 자신의 민족들에게 거절당한 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다시 40년간을 양치는 목자로 살던 어느 날이었다.
무디 목사님은 모세의 일생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1단계는 애굽 궁중에서의 왕자 모세가 ‘굉장한 존재로 자신을 착각한 시절’(He was somebody)이었고, 2단계는 미디안 사막의 목자 모세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시절’(He was nobody)이었으며, 3단계는 이제 출애굽의 사명을 위해 부름 받는 지도자 모세를 가리켜서는 ‘하나님께만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는 시절’(He was God’s buddy)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하나님은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그를 부르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인 동시에 의아심이 생기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오랜 기간 기다리셨는가? 하나님은 왜 모세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를 부르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왜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곧 그의 전성기에 그를 부르지 않으셨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르침이 있다면, 하나님은 모세가 외형적으로 가장 강하고 열정적이었던 때에 그를 부르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독특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일이 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그는 ‘광야의 학교’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필수 과목을 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다림’과 ‘인내’라는 과목이었다. 이 모든 세월은 그에게 인내를 가르쳤다. 그리고 이 모든 세월은 그에게 광야의 길들, 광야의 방식들을 가르쳤다.
저주받은 지파도 사용하신다 – 신득일(고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소명을 받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인데, 레위 지파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는 저주받은 지파이기 때문(창 49:5-7). 저주받은 지파 사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소명은 자기가 자기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모세가 자기 스스로 자기 민족을 구해 보려 시도했다(출 2:11~14; 행 7:25 참고). 자기 스스로 의로운 일을 하려고 했던 모세는 반대로 범죄자가 되어 쫓기는 형편이 되었다(출 2:15). 하나님의 소명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판단대로 그리고 자기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구해 보려 했던 모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자기 민족에 대한 관심, 즉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들을 그 곤경에서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모세와 같이 소명자는 특별 소명을 받기 이전에 이미 그 마음에 그리고 그 영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무언가 헌신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명은 자기가 자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르셔야 하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해하고 추구하는 과정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소명이라는 시각에서 성경을 본다면, 그 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부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고,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세상에서 선택한 사람들의 무리, 곧 교회를 자기에게로 부르신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오라는 이 부르심은 믿음과 계속적인 헌신의 삶으로 응답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한다. 구원의 부르심을 일반적 소명(general calling)이라고 한다면, 한 특정 개인을 불러서 특정 사명을 위임하는 것은 특별 소명(special calling)에 해당한다. 이 특별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선택되지 않고, 대부분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선택된다.
총신의 교훈 5가지 예로부터 학교마다 교훈(校訓), 즉 학교의 이념을 간명하게 표현한 지도방침이 있다. 총신(總神)의 교훈이 된 〈신자(信者)가 되라. 학자(學者)가 되라. 성자(聖者)가 되라. 전도자(傳道者)가 되라. 목자(牧者)가 되라.〉는 말은 1948년 6월 9일 장로회신학교 특별기도회에서 열왕기하 6장 1~7절을 가지고 ‘선지학교의 중건’이란 제목으로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설교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신자가 되라”는 항목은 원래 “경영자가 되라”이었는데 박형룡 박사가 1953년 총신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신자가 되라”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이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학자가 되라”는 것은 교문을 나설 때 성경과 신학을 바로 알고 지켜 나아가야 할 것을, “성자가 되라”는 것은 신학교에서 성자를 배출시켜야 한다는 강한 소망을 말한 것이다. 또 “전도자가 되라”는 것은 가는 곳곳마다 새로 믿는 자를 얻으며 새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슴 뜨거운 전도자가 되라는 의미요, “목자가 되라”는 것은 요한복음 10장 11절의 선한목자를 염두한 것이다(총신대학교100년사 화보집 11쪽). 해마다 졸업식 때 교장인 박형룡 박사는 훈사(訓辭) 말미에 5가지 교훈을 말했는데 그 때마다 졸업생이나 내빈이나 모두가 큰 은혜를 받았다. 결국 목회자의 소명을 말하고 있는 것.
오스 기니스는 소명이란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함으로써 자신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직업과 소명 신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입학 조건은 ‘소명’(召命)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적이나 품행 이상으로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소명 없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명은 소위 성직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직업이 사실상 소명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을 영어로는 ‘vocation’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 ‘vocatio’에서 온 것으로, ‘부르심’, 곧 소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소명 없이도 우리는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고 그 직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보람찬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부르심이 아닌 경제적 동기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국군의 이념과 사명 –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제5조 중에서
1. 국군의 이념 : 국군은 국민의 군대로서 국가를 방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조국의 통일에 이바지함을 그 이념으로 한다.
2. 국군의 사명 : 국군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고 국토를 방위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아가 국제평화의 유지에 이바지함을 그 사명으로 한다.
경찰의 사명 – 경찰공무원 복무규정 제3조(기본강령) 중에서
1. 경찰사명 : 경찰공무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과 봉사를 다하며, 국민의 생명ㆍ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고,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함을 그 사명으로 한다.
2. 경찰정신 : 경찰공무원은 국민의 수임자로서 일상의 직무수행에 있어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호국ㆍ봉사ㆍ정의의 정신을 그 바탕으로 삼는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책임을 감당한다는 것 – 김진명(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미켈란젤로(1475~1564)의 모세 상은 매우 강건한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넓은 가슴과 어깨, 근육질의 팔과 다리는 보디빌더의 굳건해 보이는 신체를 연상케 한다. 모세의 굳은 얼굴 표정과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는 눈길과 앉아 있는 듯하면서도 단순히 정적이지 않은 그의 자세는, 지금 곧바로 다음 행동을 실천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조각가가 나타내려고 한 모세의 이미지는 대제국 파라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비참한 노예 상태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했던 비범한 영웅이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모세의 조각을 마치고 그 생명력이 느껴지는 조각상에 스스로 감동하여 모세의 오른쪽 다리를 치면서 “이제 말하시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오른쪽 손에는 십계명의 돌판이 들려 있는데 여기에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던 상황을 기록한 출애굽기 32~34장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인상이 심각한 이유는 시내산 아래서 벌어진 우상숭배 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모세는 분명히 노여움으로 인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다.
민수기 12장은 모세에 관해 매우 인상적인 평가를 남겨놓았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여기서 “온유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브’는 단순히 얌전하고 온화한 성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할 줄 아는 겸손을 뜻하는데, 이런 점에서 모세의 온유함은 인간관계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매우 신실했음을 표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의 행적을 살펴봐도 이 해석에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커진다.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았을 때 모세는 적어도 세 차례 이상 거절했다. 그의 ‘소명 거부’는 소심한 늙은이의 심약함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동시에 자기 삶에 대한 만족감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때 이집트 왕자의 옷을 입고 왕족의 궁전에서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살 수 있었던 모세, 그는 미디안 광야의 목동이라는 막다른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우선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줄 아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기에 그 생활에 충실할 수 있었으며 목동에 걸맞는 조심스러움과 스스로를 낮추는 가난한 마음을 갖고 40년 세월을 살아올 수 있었다.
그랬던 모세에게 지도자로서의 소명과 삶의 방식과 언행의 유형을 받아들이는 일은 막막하고 두려운 도전과 모험이 되었다. 그래서 모세는 익숙하고 만족스러운 현재의 삶으로부터 변화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했다. 모세는 일단 이집트의 파라오 앞에 서게 되자 결코 물러섬이 없었고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생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한, 하나님 앞에서의 성실함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뢰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에서 표현된 그 강인함의 느낌은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람 앞에서 담대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의 이미지를 표면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강함은 현실의 익숙함을 넘어서, 하늘의 소명 앞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던 그의 내면의 힘 가운데 내포돼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그의 머리에 솟아 있는 뿔이다.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했던 구약의 필사본은 모음 없이 자음으로 돼 있기 때문에 때로 동일한 어근을 가진 단어들이 잘못 읽히고 해석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뿔’이라는 뜻의 ‘케렌’과 ‘빛나다’라는 뜻의 ‘카란’이 한 예다. 미켈란젤로가 참고했던 라틴어역 성경 불가타(Vulgate)는 ‘얼굴에 광채가 있었다’는 말을 ‘뿔이 있었다’로 오역했다(출 34:29~30). 그래서 이 번역본 성경을 사용한 조각가도 ‘뿔’을 모세의 머리 위에 조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모세의 얼굴에 빛이 있든지, 뿔이 있든지 이 특징은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구약의 민수기와 신명기는 모세가 마치 친구와 대화를 나누듯이 그렇게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눴으며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이전과 이후로도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었음에도 신이신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할 수 있었던 사람 모세.
그런 의미에서 모세의 진정한 강인함과 위대함은 그의 근육질 몸매가 아닌, 그의 얼굴의 광채 혹은 뿔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모세의 강함은 시대의 변화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아를 포기하고 변신할 줄 아는 마음의 힘에 있었으며, 그의 위대함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일어난 변화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과도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평범한 일상을 잃어버리고 수건을 써야 했던 그의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책임을 감당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외로운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그 수고로 인해 다른 이들은 그 그늘과 품 안에서 안식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무언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며, 주어진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소명과 사명
소명은 회피할 수 없는, 긴급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 명령을 받은 자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소명은 또한 위임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곧 보냄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명의 핵심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명에는 사명이 따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사명과 임무를 맡겨 보내시기 위해서다. 모세의 경우와는 달리,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시도함으로써 실패한 적이 없다. 오히려 여호수아는 모세 가까이에서 수종자로 섬기는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일찍부터 소명자 훈련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여호수아는 모든 일에 믿음으로 행했으며 성실했고 정직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 중 흠을 찾아보기 힘든 소수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의 사명과 일생이 끝나 갈 무렵,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으실 것을 모세에게 명령하셨고(민 27:18~23), 그에 따라 여호수아는 모세의 안수를 받았다(신 34:9). 그러나 여호수아가 실제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의 사명에 관한 명령을 직접 들은 것은 모세가 죽은 후였다(수 1:1). 성취해야 할 사명이 없는 소명은 엄밀한 의미에서 소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소명에는 반드시 위임(commission), 즉 사명이 따른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심판과 구원하는 일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그의 종들을 부르실 때 심심해서 그냥 부르시는 일은 없다. 그가 그의 종들을 불러내실 때는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사명 없는 소명은 없다. 이 사실을 잘 표현하는 고전적 구절이 아모스 3:7이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모세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고통의 절규’라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나는 애굽에 있는 나의 백성들의 비참함을 두 눈으로 보았다.” “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나는 그들의 고난과 고통들을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구출하려고 내려왔다.” “자,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이제 왜 그런지 알 것이다. 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기 위해서다.”
X인이 된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 고통의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 찬 이 세상 안에서 G의 귀가 된다는 것. 그러한 고통을 완화하고 통증을 가라앉혀 주는 일에 도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고통들에 대해 관심 갖고 그 고통들에 대해 응답할 때 비로소 X인으로서 그러한 부르심에 부응하는 삶을 사는 것. 그러한 고통들에 대해 관심갖고 그 고통들에 대해 응답할 때 G의 손안에서 유용한 도구들이다. “만일 어려운 가운데 있는 형제나 자매를 보고, 또한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형편이나 처지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등을 돌려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G의 부르심을 무시한 것입니다!”(류호준, 백석대학원 구약학 교수)
우리 모두 가정에서는 남편이나 아내로서, 혹 부모나 자녀로서의 사명 받았다. 직장에서는 여러 가지 맡은 분야에서의 사명 받았고, 교회에서 각양의 사명 받은 자이다.
사도 : 일정한 사명을 위임받아 파견된 자. 헬 ‘아포스톨로스’(apostolos)로 ‘보냄 받은 자’란 뜻. 사도와 비슷한 뜻의 히 ‘샬리하’(shalicha)는 ‘G의 대리인’이란 의미로 쓰여 모세, 엘리야, 엘리사, 에스겔에게 사용(출 6:11; 왕상 18:1) J도 자신이 G에게 보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시며(막 9:37; 요 13:20) 히 기자도 J을 사도라고 칭했다(히 3:1).
좁은 의미 J께 선택받아 복음 전했던 12명 제자들만 제한하는 말. 이들은 J께 부름받아 J과 함께 하며, 권위를 받아 부활하신 J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들이었다(행 1:21-26).
후에 바울도 자신을 사도라 칭했는데(고전 9:1)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J을 만난 뒤(고전 15:8)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부름받아 일했기 때문(고전 9:7-15). 바울은 자신이 증거하는 복음의 권위를 위해 자신을 사도로 칭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외에도 J의 형제 야고보(갈 1:19) 바나바(행 14:14)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 등도 사도라 이들 모두 부활하신 J의 명령에(마 28:18-20) 복음 전파자들. 이런 의미에서 넓은 의미에서 사도는 X의 전권대사로 복음 전하고 가르치며, 전 세계적인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포괄적 사명(마 28:19; 눅 24:48; 고전 1:17; 고후 5:20; 엡 6:20)자들을 말한다.
사명을 이루었는가? - 서정오(동숭교회 담임)
어머니가 요리 하다가 마침 소금이 떨어져고 어린 딸에게 심부름 시켰다. “얘, 옆 가게에 가 소금 한 통 사와라.” 어린 딸은 돈 가지고 동네 구멍가게에 갔다. 가게에 들어서자 평소에 그렇게 먹고 싶었던 각종 과자들과 수많은 물건들이 눈에 띄자 엄마의 심부름은 잊고 좋아하는 과자들만 실컷 사 집으로 돌아왔다. 그 어머니의 실망이 어떠하겠는가? 자기 딴에는 수많은 물건을 사왔다 하더라도 정작 해야 할 심부름은 못하고 만 것이다.
한사람을 세상에 보내실 때, G은 그를 통해 이루실 일이 있어 보내신다. 그렇게 G께서 이루라고 명하여 보내신 일을 가리켜서 ‘사명’이고,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룰 때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았다고 할 수 있음에도 G께서 명하신 사명은 잊은 채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일들, 자기 것만 찾는 듯. 소금 사러 보낸 딸이 엄마의 심정이 꼭 G 아버지의 심정 아닐까?
눅 4장 43절 J은 당신을 떠나시지 못하도록 붙잡고 만류하는 군중들을 뿌리치시고 다른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가시면서 말씀.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G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J이 오신 목적을 위해 잠시 쉬지 않으셨던 J의 모습.
뭘 위해 사는가? 무엇 때문에 바쁜가? 정말 나는 나를 보내신 그분의 의도를 따라 일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구미에 맞는 취미생활로 세월들을 낭비하고 있지 않는가? 얼마나 많이 일했는가보다 얼마나 내가 해야 할 사명을 이루었는가가 중요하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6절)”
‘크니이까’의 ‘크다’는 원어 ‘메가’는 위대한, 크나큰, 장엄한, 무거운 등의 뜻. ‘계명’의 원어 ‘엔토레’는 안에 ‘엔’과 끝 ‘티로스’가 합해진 낱말로, 뜻 ‘결론적으로 중요한 말’이라는 뜻. 반면, ‘율법’-‘노모스’는 나누다, 분배하다의 ‘네모’에서 유래된 관습, 율법의 의미. 즉 결론적 인생 삶의 지침이 ‘계명’ 계명 나누고 쪼개어 세부적인 조항으로 만든 것 ‘율법’.
G께서는 친히 택한 IS유대 민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사람답게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사는 삶의 큰 지침으로 열 가지 계명 곧 십계명을 주셨다. 유대인들은 그 계명을 나누고 쪼개어 세부 조항으로 만들고 거기다 역사와 사건 따라 예언자들을 통해 주신 생활 지침에다 더 세부적인 내용을 추가하여 J당시에는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조항이 248개, ‘하지 말라’가 365개, 합하여 무려 613가지의 율법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아무리 견딜 수 없게 이가 아파도 이를 빼서는 안 되고 다만 식초만 발라야 한다 했으니 이를 빼는 것은 치료 행위이고 식초 바르기는 임시 조처이기에 괜찮다”는 것.
J을 뒤따르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J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시비. 밀 이삭을 끊었으니 추수 한 것 손바닥으로 비빈 것은 탈곡이니 결국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 당시 IS사람들이 613가지 율법 지키는 것은 불가능, 율법의 멍에를 메고 신음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렇게 많은 율법 조항을 다 지키는 양 거들먹거리던 저들이 내세우는 첫째 계명 G사랑을 J도 그러한지 시험한 것다. 이에 J께서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G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7~40).”
무슨 계명이 가장 크냐는 물음에 G사랑이라 “둘째도 그와 같다” 대답. 땅 없는 하늘, 다른 한 면 없는 동전이 있을 수 없듯 이웃 사랑 없는 G사랑을 말 하겠느냐는 뜻이다.
J은 ‘G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데, 강령 원어 ‘크레마타’는 매달다라는 뜻 ‘크렘’에서 온 말. 한자 ‘강령’은 의복에서 옷깃처럼 아주 요긴하다는 의미이고, 벼리는 “그물코가 3,000개라도 벼리가 으뜸이라”는 말에 쓰이는 벼리다.
둘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나인 ‘G 사랑, 이웃 사랑’은 수많은 그물코 끝부분을 매달아 한 손에 쥐어 주며 그물을 오므렸다 폈다 잡아당길 수 있게 버텨 주는 동아줄 벼리같다는 의미.
콜베르 사제의 일화 1941년 7월 어느 날 폴란드 태생 막시밀리안 콜베르 사제가 갇혀 있던 감방에서 한 사람이 탈출했고 그 때문에 한 방에 있던 수인 열 명이 굶겨 죽이는 형벌 감방에 보내졌습니다. 콜베르 사제는 그 명단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열 명중 한 사람이 자기는 부인과 아이들이 있으니 제발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사람들 틈새에서 평소에도 자기 몫의 빵을 남에게 양보하곤 했던 그 사람 콜베르 사제가 그 사나이를 대신해서 죽겠다고 나섰습니다. 마침내 명단에서 그 사람 번호가 지워지고 콜베르 사제의 16670번이 대신 적혔습니다. '지옥의 축소판'이라고까지 불리는 아사 감방에서 보름 동안 굶주린 후 끝내 독약 주사를 맞고 숨지기까지 그 사제는 한결같이 사랑으로 수인들을 돌보고 위로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환경 미화원 김영백 집사를 사람들은 ‘성자가 된 청소부’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돈도 없고 시간도 많지 않은 분으로 자신과 가족 챙기기도 힘드신 분이었습니다. 16평짜리의 시유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장남은 공장에서 기계를 수리하다 손가락 두개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촉망받던 실업 축구 선수였던 차남은 연습 도중에 허리를 다쳐 수술을 받고 계속 투병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다면 G을 원망 좌절했겠지만 김 집사는 환경미화원으로서 업무가 아침저녁 하루 두 차례 산꼭대기에 집에서 손수레 끌고 그 일대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파지와 병, 빈깡통 등 재활용품들을 수집. 어려운 살림 보태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돈으로 실로암 병원 통해 매월 한사람 개안수술비를 후원해 주다. 그 동안 49명의 앞 못보는 사람들이 광명을 찾았다. 지역 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위해 매년 50만원씩 4명에게 장학금을 준다. 무의탁 노인들에게 매년 겨울 내의 50벌 드린다.
왜? 제2의 인생 살기 때문이다. 86년 중동에서 3년간 근로자생활 마치고 귀국 허리의 통증으로 앓다 모아 두었던 모든 돈을 날리고 보증금 백만원에 월세 6만원의 사글세방 살았다. 거동조차 못하는 자신을 아내는 대소변 받아내며 우유배달과 파출부로 자녀를 길렀다. 부인은 남편 위해 40일 작정 새벽 기도회 새벽마다 아내를 바라보고 “소용없는 짓 말라”고 만류했는데 40일 작정기도 마지막날 주일 아침 아내가 쓰러져 꼼짝 못하고 교회에 데려달라고 애원. 하는 수 없이 목발 짚고 아내를 부축 간신히 교회에 가 그 날 예배 드리면서 김 집사는 한없이 울고 회개하였다. 그 후 병이 나아 그 은혜를 갚고 G께 영광돌리는 인생 살기로 결심 이렇게 산다고 얼마나 멋집니까? 어려울 때 좋을 때나 G께 영광 돌려야 한다.
송영욱 회장의 일화 미 '황색의 빌 게이츠'라는 시애틀의 한인 억만장자 한국인. 그는 미 애리스 사의 송영욱 회장. 27세에 부인과 함께 천 달러로 정보시스템 컨설팅회사 애리스 사를 서립. 10년도 못돼 직원 900명 연간 매출액 1억 1천만 달러(1320억)를 넘는 회사로 성장. 그는 성공한 이유를 그의 가족과 자신의 기도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교회 활동으로 자녀에게 매달릴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G이 키워 주기 기도하며 “미 사회 속에서 성공해 G과 한국의 이름을 빛내야 한다”고 강조. 그는 G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기 원했다. 그는 애리스 사를 돈보다 G의 영광 위해 만들었다. 꿈을 가진 사람들의 세상 책에 회사를 시작 가족들에게 “언젠가 세계 최대의 기업을 일궈 G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말했다고.
송 회장이 감동 주는 이유는 돈 많이 번 것, 열심히 기도한 것. 부모의 투철한 신앙 교육도, 미 생활에 성공도 아닌 평생 이룰 삶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 즉 사명이 분명 자신을 G께 드림. 많은 이들 앞에서 매스컴에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 있게 신앙의 인생을 산 것.
조각상과 나귀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조각한 조각상을 실은 나귀가 동네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은 그 조각상을 보고 공손하게 절을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귀 앞에서 절을 하자 나귀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절하는 줄 알고 교만한 마음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두들 나를 이렇게 존경하여 절을 하고 있는데 나는 여태껏 내가 이렇게 위대한 존재인 줄 몰랐구나.”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나를 존경하는데 이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때 주인이 회초리로 나귀의 엉덩이를 세차게 때렸습니다. 꾸물거리고 있는 나귀에게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매였습니다. 그러자 약이 오른 나귀는 앞발을 들고 벌떡 곤두서면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고 뻗대었습니다. 나귀를 때리려던 주인은 왜 나귀가 꼼짝도 하지 않고 주인의 약을 올리는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더 굵은 몽둥이로 나귀를 후려치며 소리쳤습니다. “바보 같은 나귀 새끼야, 사람들이 너를 보고 절을 하는 줄 아느냐? 만약 네가 지금 싣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이처럼 잘난 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들어둬라. 너는 지금 훌륭하신 분의 상을 등에 싣고 있단 말이다!”
국악인 박동진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로 유명해진 국악인 박동진(1961-2003)은 교회 장로님이셨다. 그의 간증에 의하면 자신은 원래 불교인이었는데 성탄절에 기독교 방송국에 가서 ‘예수의 일생’을 판소리로 부르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 소리꾼’으로 변신하였다고. 그는 30년이 넘도록 판소리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도리를 다하고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노년에 공주에 있는 자신의 판소리 전수관 뒤에 마련해 놓은 밭 5백 여 평에 마을 주민을 위한 교회와 은퇴 선교사들이 노후를 보낼 수 있는 휴양소를 짓고 전수관에서 수련중인 문하생들이나 앞으로 그 교회에서 배출되는 일꾼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가르치고 싶다고 했었다.
사북 목사 일화 2022년 7월 월간 목회 사북에 목회하는 목사님 글. 사북 근처 정선에 카지노 특수 목회, 정선에 놀음하다 망해 폐인 된 이들 돌봄. 돈 잃고 폐인 노숙자 교회 그런 분들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자리 제공했다.
그런데 한 달 일자리 주고 돈 벌게 해줘도 월급 받는 순간 대부분 정선 카지노에 가 돈 다 잃는다. 목사님 고민. “이거 계속해야 되나?” 그런데 주님 “계속해야지.” 맘속의 울림 “우리 J이 그러셨잖아.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시고 끝까지 포기 않으셨잖아. 그러니 해야지.”
알렌 크라이더라, <초대교회에서 길을 묻다> 책에 <영적 능력과 생명을 주는 일탈> 챕터에서, 당시 초대교회는 10년에 40%씩 성장. 터툴리안 유명한 교부가 쓴 글에 그 성장의 원인을 두 가지 중 하나가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영적 일탈이 있었다.
로마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인들이 하는 일은 일탈 행위였다. 사회적인 관습과 맞지 않는 일탈 행위였는데 X인들이요 생명을 주는 일탈을 했다.
공동의 사명은 부부를 친밀하게 해 주는 강력한 도구다 - 게리 토마스, <사랑학교> 중
부부의 사명을 어떻게 알까? 한 가지 연습. 인생의 끝을 미리 내다보며 자문해 보라. “당신이 잠시 후 G을 대면한다면 G의 발치에 드리고 싶은 것은?” “G이 당신을 독특하게 지으실 때 뭘 하도록 지으셨나?” “바로 그 일을 하라고 현재 당신이 취하고 있는 조치가 있는가?”
부부가 그 일의 동업자인 경우 한 부부는 몇 년째 영화제작 위해 협력한다. 당신 쪽에서 그 비전의 조연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어쨌든 부부로서 헌신할 수 있는 일이면 된다.
거의 5백 년 전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읽기 쉬운 언어로 번역 이유로 화형. 가장 맹렬하게 대적한 사람은 영 왕. 박해 끝에 결국 투옥 죽일 때 그가 한 성직자에게 담대히 한 말. “G이 내 목숨 살려 주신다면 난 쟁기 모는 소년이 당신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할 것.”
성직자라면 마땅히 그런 말을 기뻐할 것 같지만 당시에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괘씸죄다 못해 사형에 처할 죄다. 비록 틴데일의 생은 단축되었지만 그가 가꾼 씨앗의 결실로 그의 사명은 성취. 읽기 쉬운 성경 역본들 오래지 않아 유럽 대륙을 가득했고 영 종교개혁의 기초가 됐다. 그 모두 하나의 사명으로 시작됐다. 그는 그것을 미리 보고 느꼈고 머릿속에 그렸다. 성경을 읽기 쉬운 언어로 옮기면 평범한 소년도 성경을 성직자만큼 알 수 있게 된다.
당신 부부는 틴데일의 말을 어떻게 끝맺는가? “G이 내 목숨을 살려 두신다면…” 당신은 문장의 뒷부분을 뭘로 채우겠는가? 당신이 가장 이루고 싶은 일은 뭔가? 그 답이 당신의 사명이 뭔지 보여 주는 좋은 지표다. 공동의 사명은 부부를 친밀하게 해 주는 강력한 도구다. 해보면 알겠지만, 목적 있는 영적 갈등이 많을수록 부부가 사소한 갈등에 곁길로 빠질 일은 그만큼 줄어든다. 예수께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다 이유가 있다. 당신도 시도해보면 안다.
G께서 기뻐하시는 부부 - 이한규 목사
부부는 마음도 함께 할 뿐 사명에서도 함께 해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 전할 때 부부의 집에서 일년 반 머물었는데, 이 일은 부부가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한다면 할 수 없다(행 18:2-3) 선교사라지만 누가 자기 집을 1년 반 동안 제공할까? 브리스길라 부부가 자기 집을 가정 교회로 제공은 그들 입장에서 헌신이다.
제가 미 있을 때 섬기던 교회 한 집사님은 목사님과 교회 식구들을 자주 초청 대접하고 싶다고 큰 집을 구하자 G이 그의 사업체를 축복 엄청 큰 집을 주셨다. 축복 받으려면 마음의 문을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문을 여는 것도 중요하다.
나아가 행 18장 18절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수리아로 떠날 때 이들 부부도 바울의 선교사역을 돕기 위해 바울과 같이 떠난다. 오늘날 섬기는 교회를 따라 집까지 이사한 것. 얼마나 복된 결정? 부부가 사명으로 하나 되지 못하면 그런 결정 내릴 수 없다. 아내 브리스길라의 역할이 매우 컸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에서 아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목숨 걸고 헌신했다. 4절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이 부분을 쓰면서 바울은 부부의 헌신을 생각하며 울먹였을 것. 선교와 목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성도도 위로가 필요하지만 목회자도 위로가 필요하다. 그 상황에서 부부가 이사해 사역에 도우니 바울에게 얼마나 힘이 됐을까?
‘호박죽으로 전한 19년의 사랑’ 노 목사 부부의 사명(노컷뉴스 2016.9.16.)
50대에 호박죽을 끓이기 시작한 목사와 사모는 어느덧 70줄에 들어섰다. 말기 암환자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 시작한 호박죽 봉사는 올해로 19년. 그동안 호박죽을 전달한 횟수는 최근 1000번에 이르렀고 목사 부부가 환자들에게 건넨 호박죽은 2만 컵에 달하고 있다.
전북 완주군 상관면 마치교회의 오진광(76) 목사와 이애순(70) 사모의 이야기다. 오 목사 부부는 1997년 10월부터 현재까지 매주 수요일 오전이면 어김없이 예수병원을 찾아가 환자들에게 호박죽을 전하고 있다.
19년 전 그날, 호스피스로 활동하던 사모 이 씨는 캔에 담긴 깨죽을 퍽퍽하게 마시는 환자를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집에서 호박죽을 쑤어 환자에게 가져다주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그 호박죽은 어느덧 부부의 사명이 됐다.
시작 무렵 죽통 2~3개 분량이던 호박죽은 이제 찾는 환자들이 많아 10~13개로 늘었다. 고된 일이지만 고생의 무게가 보람보다 크지는 않다. “둥근 호박을 보면 사람들이 포근함을 느끼잖아요. 몸에도 좋은 호박죽을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죠.” 왜 호박죽이냐는 질문에 대한 오 목사의 대답이다.
19년 세월동안 부부는 호박죽 봉사를 거르지 않았지만 오 목사가 두 차례 위암 수술을 받았을 때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부부의 사명을 도와주는 이들이 나타났다.“암에 걸린 남편이 입원 한 달 만에 숨을 거둔 부인이 있었어요. 남편이 먹은 호박죽에 감동을 받았는지 제가 아플 때 그분이 대신 호박죽을 쑤어 환자들에게 전했죠. 호박죽을 먹고 퇴원한 분들이 호박을 재배해 보내주기도 하고요.”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부부의 바람처럼, 사방으로 번지는 호박 줄기처럼 목사 부부의 호박죽은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수요일? “일주일 한 가운데라. 환자들이 가장 팍팍할 때가 아닌가 싶어서 그래요.” 사랑을 전하는 것 이상으로 받는 사람의 상황도 고려하는 목사 부부의 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