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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경수
드라마 야인시대를 통해서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나이 중후한?) 건달(조직폭력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 역시 대형병원 응급센터에서 근무하며 조폭들을 많이 상대하며, 친해진 조폭도
있었습니다. 현실의 조폭은 영화에서처럼 외제차 굴리고 다니며, 자금력 빵빵하게 호화생활에, 호텔 사우나에서 몸푸는건 상위 1%도 안되는 보스정도만 할 수 있고. 그밑으로는 지하 단칸 빌라에 몇십명이 합숙하며 끼니도 제대로 못먹으며, 야구방방이로 80대 맞고 피멍들며 고된 생활을 하다가 다치거나 죽거나 할수도 있는 불행한 운명을 살고 있습니다.
해방후 협객을 자처한 전국구 내놓으라하는 주먹들이 안개정국의 시대에 자유당을 끼고
정치깡패(정치적 목적이용된 행동파 깡패들)의 탄생에 이어 사보이호텔사건의 조양은시대에 사시미칼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조폭이란 용어로 조직간 혈투때 사시미 칼을 주무기로 영역 다툼이 치열해지며, 예전의 협객시대는 전설이 되어버립니다. 현재의 조폭은 돈만 된다면 어떤 이권에도 개입합니다.
즉, 돈 몇억만 있으면 조직도 통째로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만틈 의리를 숭상하는 협객의 시대
에서 돈을위해 조직원도 과감히 살해 할 수 있는 잔혹한 현대사회가 배경이 됩니다.
일수(대부업)깡패. 카드깡패. 건설깡패, 도박깡패,정치깡패, 인신매매 깡패. 장기밀매 깡패등등 서민생활 깊숙히 파고들어 기생하며 민폐를 자행하는 형태로 기업형 조폭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우리는 조폭의 원조와 맥락을 이해하고 범죄사건 관련된 조폭의 움직임. 행동강령 및 동기를 이해하기에 올려보았습니다.
------------------------------ 여기서부터는 인터넷 자료 -----------------------
야인시대 실제 주먹들의 사진과 최후- 구마적.신마적.쌍칼.김두한.시라소니.이정재.유지광.임화수
고희경(일명구마적)
통속적으로는 구마적이라 불리었던 본명 고희경은 종로 우미관극장 무대로해서 주먹으로
주름잡던 주먹깡패로써 신마적 엄동욱.김기환등과 함께 활동한 건달잡배였다
당시에 고희경은 힘이 무척쎄서 자동차도 두손으로 들었다는 풍문도 있다 힘이좋은것을
무기삼아 종로일대에서 조선상인들의 상권보호명목으로 몇몇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무위도식했던 원조조폭의 발판이된 주인공이였다
자칭협객이라 하기도 했으며 강인하고 겁을 주는 명칭으로써 당시 만주화북 지방에서
말을 타고 약탈하던 악랄한 마적의 이름을 따서 마적이라고 했다한다 고희경의 출생의
정확한 사실이나 이후에 김두한이와 결투에서 패배한뒤 만주로 사라져간후 고희경의
행적을 자세히 파악된 자료는 없고 저나름데로쓴 미확인의 추측기록만 난무하는정도임
신마적 본명 [엄동욱]
1909년생 보성전문학교 출신으로 키가 육척장신에 괴력의 힘을 지녔다고한다
YMCA체육관을 운영하며 당시힘께나 쓴다는 조선학생그룹의 리더였다 엄동욱은 구마적이라는
고희경이 김두한에게 밀려 쇠퇴할무렵 엄동욱이 운영하던 체육관소속 학생조직들의 힘이
보태어지고 자연히 고희경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주먹판에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엄동욱이 신마적이란 이름으로 이름을 날리게된것은 당대의주먹 구마적인 고희경과
맞장을 뜨면서 그의이름이 신마적으로 붙게되고 그싸움결과는 각다른 증언이 다르기
때문에 알수는없다 다만 어떤자료에서는 신마적이 우세했다는걸로 쓰여있다
만주에서 활동할무렵에는 그가 동경유학시절 일군장교의 아들과 절친히 지낸것을
기화삼아 그일본장교가 화북지역 사령관으로 배치되어있을때 사령관의 양자행세를
하면서 만주일대에서 마적소굴이나 암흑가를 휩쓸고 다녔다는 일화도있다
또한 일본유학시절 동경에서 건달들과 시비가 붙어 칼을맞아 창자가 나온것을 붙잡고
태연하게 병원으로 갔다는 자료를 볼때 그가 얼마나 독종인지를 엿볼수있다
엄동욱은 고희경 김기환등과 함께 3인은 종로일대의 조선족 주먹으로써 위상을 뻗쳐나간다
특히 엄동욱은 힘과 체력이 뛰어났으며 조선상인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일본 건달들과 대립에도
주저하지않았고 결투에서도 웬만한 일본 잡배건달은 엄동욱의 상대가 되지를 못하였다고한다
종로일대에서 주먹강자로써 독보적으로 위치를 굳히면서 이름이 알려지게될무렵
우미관패 김기환의 구속으로 등장한 김두한이와 자천이든 타천이든 결투에 나설수밖에
없었고 결국 비참한 패배를당하고 만다 이후 구마적에게도 김두한이와는 상대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만주로 사라져갔다고 한다
후일 고희경 구마적도 김두한이한테 패배하고 만주로 사라져가고 김기환이도 범죄로
교도소복역을 하면서 종로일대의 건달세계는 잠시무주공산이 된다
물론 그자리는 자연히 김두한이가 들어서게되고 패배자가된 엄동욱이는 이후에
김두한이 참모로 지냈다는 자료도 눈에띈다 이후 만주로가서 시라소니 이성순이를
만나 잠시 같이지냈다는설과 후일 평양에서도 생활했다는 미확인 자료가 보인다
만주로간 이후 엄동욱이의 이후행적에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으며 노후에
야인생활로 돌아가 1961년 병사했다는 자료만 나도는 정도이다
김기환(쌍칼)
초기 조폭건달의 발자취에서 김기환이는 빼놓을수가 없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나
그의 실제사진을 찿기위해 참고 문헌자료 웹사이트를 다뒤져도 찿을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아들(김영철)이 강원도 홍천에서 살고있으면서 부친인 김기환의 위상을
되돌려 놓기에 전심한다는 자료만 있을뿐이다 모방송 야인시대 극중에서도 김기환이를
비중없이 다루다보니 김기환의 주먹전력에 촛점이 흐려진것으로 보이며 쌍칼이라는
닉네임의 어휘만이 김기환이의 상징으로 남아있는듯하다
김기환이는 배움이 없는 YMCA소속의 권투실력자였으며 권투시합에서도 KO승만으로
승리를 했을정도로 막강 권투 실력자였다고한다 학벌이 없는 관계로 당시 엄동욱의 조직인
권투모임 학생패라는 주먹조직에 합류를 못하고 홀로 활동하다가
주먹실력은 당대에 쟁쟁한지라 그실력을 인정한 극장측의 배려로 동양극장 기도로
들어가 활약하다보니 주먹에 조직이 실리게된다
당시에 극장기도의 자리는 위압적이고 힘께나 쓰는 험악한 뉘앙스를 풍기는 스타일을
추대하는 풍조였었고 극장주변에는 온갖 시정잡배나 건달들이 얼씬대며 땡깡이를 부리는
무법이 횡행하는곳이라 당연히 이들을 제압할수있는 막강 주먹실력자가 배치될수밖에없었다
주먹께나쓰는 건달이 극장기도주임만 되어도 건달권좌에 오르는격이며 어중이떠중이들이
조아리며 받들게 됨으로써 자연적으로 조직의 대형으로 성장하게되는것이다
김기환이는 이후 우미관의 기도주임까지 승달하게되며 이때 종로거리 건달 잡배들이
그의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조직의힘이 커지며 자연히 김기환이도 위상이 높아지고
이를 시기한 일본조폭들이나 맞장한번 떠보겠다고 김기환이에게 도전한 무리들을
일격에 날려버린 일화들이 있었다
또한 자료를 보면 때로는 선심도 베푸는 오야봉으로써 당시 어려운 조직부하들을
잘 건사하는 인품였다고 한다 이무렵 김기환이의 휘하에 그유명한 김두한이가
들어오게되고 배고픈 김두한이를 거둬들였다한다
그러는 김기환 어느날 일본 순사를 다리에서 때려눞혀 그죄가로 감옥을 가게되고
조직을 관리할 힘을 잃게되자 자연적으로 김두한이가 조직관리를 대신하게 되면서부터
종로거리의 조직은 김두한에게 물려주는식으로 종로의 조폭의 역사는 바뀌게된다
후일김기환이는 구마적과 대결에서 패배한후 만주로 갔다는 미확인의 자료가있으며
1949년에 사망한 기록만 남아있다
(김두한 27세부터)
김두한은 1918년 서울 출신이며 교동보통학교 중퇴학력으로 10대에 김기환의 조직으로
들어감으로써 조폭에 입문했다 또한 그의출생에 관하여 설왕설래 갖은 추측이 난무한다
독립군 김좌진 아들이라는설과 아니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짧게 객관적으로 언급해본다면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시작은 김두한 자신이
감방에서나 주위사람들에게 자기가 김좌진의 아들이다는 과시성으로 나왔으나 그후
동아방송에서 자신의 회고록을 말할때 출생적 언급에 있어 김좌진의 행적과 기록적사실과
앞뒤가 안맞는 횡설수설적으로 신빙성이 없는것으로 회고가 되었다는것이다
또한 김두한이 말하는 그의모친 박상궁의딸 박계숙은 후일 생전증언에서도 이런 친자사실을
강하게 부정했으며 사실관계도 확인했다는 자료가보인다
상궁이 처소를떠나 밖에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다는것도 있을수없는것이며
이는 김두한의 친모친인 김계숙이 기생출신이란것을 덮으려는 발상에서 상궁의딸로
변질하려 했던자작연출의 넌센스였다는식으로 폄하된 주장이 설득력있게 보이기도한다
(김좌진 장군과 김두한 닮고 안닮고는 독자판단)
김좌진도 35세때 갑자기 암살당하는 바람에 그의 유고록이나 회고록에도 김두한이의출생에
대하여 어떻한 언급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증빙할만한 증인도
없다는것이다 또한 1920년에 김좌진이 암살당한 그해와 김두한이1918년생으로서 김두한
회고록에서 말한것이 시대적사실이 안맞다는점이 후일 관심학자들이 지적해놓고있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설이 확대된것은 당시 조선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김좌진과 김두한이 관련없는것을 픽션연출을 만들어 당시조선총독부가 저들의 음모적 시국상황에 따른
보도였다는것인데 이후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도 덩달아 입맛을 맞춰어 보도하는 바람에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설로 세간에 퍼진것이라고 이런주장들이 설득력있게 쓰여있다
(1930년3월13일 조선일보에실린 김두한과 그에생모 김계월)
아무튼 김두한씨의 출생에관한 정설은 각다르게 의견집합이 안되는점이다 오직유일한 해법은
유전적 DNA로 의구심을 풀수있는 방법이나 지금의 직계유족들이 이를 거부했다는 기사를
찿아볼수있다 본인은 김두한씨의 출생에관하여 단적으로 집합하여 어떤 결론을 쓰고싶지않다
다만 그의 출생비밀에 관하여 많은 추측성 자료나 논평이 난무하고 모두가 미확인 자료라서
참고로 나름의 정리만 해볼뿐이다
김두한은 그가 청소년 성장기시절에는 곤궁하였으나 쌈질에는 특출한 자질이 있는지라
당시 의지할수있는곳인 주먹패가 우글대는 우미관극장 김기환의 조직에 가담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주먹패로 성장하게된다
그에 특기인 걷어차기와 공중점프의 위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무적의 주먹패의 쌈꾼으로
위세를 떨치게되고 후일 김기환이의 수감으로 종로 우미관일대 주먹깡패들을 평정하면서
절대쌈꾼에서 지존으로 자리잡게된다
또한 그당시 조선인들의 눈에 가시처럼 객기부리던 왜인건달 조폭들이나 그오야봉들을
제압하는 그통쾌함에 많은 조선인들이 김두한으로부터 대리만족을 느꼈고 자연히
그를 추앙하는 종로일대의 주먹건달들이 김두한을 옹립하게되고 오야봉으로 등극하면서
주먹세계의 추앙적주먹대부로 김두한은 우미관거리의 전설적인 주먹패의 오야봉으로 군림한다
하지만은 그의 야심적인 처신에 있어 좌익(조선공산당의주먹조직인.조선청년전위대)과
우익을 넘나들며 동족 희생자를낸 몇몇사건(예.좌익성향2000여명집단처형사건.철도파업
습격처형사건.여운형암살사건)에 그가 직간접으로 개입되어 어떤사건에서는 주도적으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였노라고 그의 회고록에 자랑스럽게 기록해놓은것을 볼수있다
동족에게 살인적 피해를준 사실이나 난봉기질등등 이런 김두한의 행적에서 양아치근성에
주먹오야지근성까지 곁들인 기회주의적인 야심가라는 평가로 그를 바라보는 글도 팽배하다
또한 하야시라는 왜인조직깡패 우두머리와 의형제를 맺어 이권을 취한 이중적인
처신이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이율배반적인 행태였으며 이런과오들이 김두한이에 대한
절대평가에 있어서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기도한다
김두한이도 나이도 들어가면서 그의 위세도 쇠약해지고 후배인 이정재가 권력과 결탁하며
막강한 조직으로 성장하고 또한 절대쌈꾼실력자 이성순를 제압할수없는 주먹패의 한계에서
김두한은 변신의 기회를 갖는다
해방직후라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말초까지 어필되는 시기에 김두한은 장군의 아들이라는
자천이든 타천이든 그자신이 업그레이드 되어있는 시류에 편승 정치에 눈을 돌린다
이후 그의 정치적 야욕의 시발점은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암살사건에 관련하여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밀약성호출을 계기로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발을 딛게되고 장군의 아들이라는 뇌관이 김두한이를 무소속-자유당-한국독립당의
국회의원에 당선를 하는 영예를 얻게된다 일개 배움없는 양아치출신에다 주먹패로 성장한
김두한이가 3번의 국회의원에 당선된것은 그가 장군의 아들이라는점이 부각되었다는점은
부인할수없는 사실이다
군사정권 박정희와는 서로의 필요에의해서 한때 이해관계로 유지도 했지만 이후 박정희와는
정치적으로는 거리를 두고 정치행보를 한다 결국 박정희 정권에 의해 김두한은 정치적
종말과 함께 그자신의 인생도 치명적인 나락으로 떨어져간다
1966년9월22일 S모재벌의 한국비료 사카린밀수사건을 국회에서 대정부질문중에 미리준비한
요강에다 모공원 공중화장실에서 퍼담은 인분을 들고 단상에 올라가
[똥이나 쳐먹어라 이개새끼들아!하고] 국무원석에 똥을 투척한다 이사건에서 보여준 김두한의
담대하고 무소불위의 독불장군적 성격을 알수있다 좋게말하면 정치인으로써 소신을 담대하고
뚝심있게 표출한 의분의 행동이라고 평가하는 후평과 또다른면에서는 주먹으로 성장한 그의
이성이 불발된 객기성과 함께 영웅심의 돌출행위였다고 평가하는 자료도 눈에띈다
(김두한의 국회의원활동시 국무총리가 바로옆에 있어도
두주먹을 제스쳐써가며 할말은 하는 어떻게보면 지금의
거수기노릇이나하는 국회의원보다는 시대의영웅이었다)
김두한은 이사건으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고 구속되었으며 정치를 떠나 박정희정권에
맞서면서 재기도 노렸으나 1966년에 내란음모.국가보안법.현정부전복기도죄.이후에도
폭력죄.반공법등으로 수감생활로 그의 풍운아적 인생은 서서히 닻을 내리게된다
이무렵 전국회의장을 지낸 L모씨의 증언에의하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이로부터 모진고문을 당하고 교도소를 나온 김두한이는
쭉지꺾인 새처럼 신체가 나약해지고 풀이죽고 패기도 사라졌으며 이때의 고문으로
골병이들어 젊은나이에 일찍 사망하게된 원인이 되었다는 자료도 찿아볼수있다
아이러니한일은 김두한의딸 탈랜트 김모씨가 박정희의딸이 주도하는 정당에붙어
국회의원에 낙천받아 활약하고 있다는것이다 김두한의 일대기를 읽어보면 박정희와
김두한이는 후일 어떤관계였는가? 현재의 두딸들의 밀착된 정치적관계를 우리가
모르는 또다른 어떤연유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주관적인 더이상의 언급은
피하고 싶다
한편 교도소를 출감한 김두한이는 이후에 이것저것 사업을 했으나 사업도 실패를 하고
주먹세계에서 한때는 무적의 황제처럼 군림하든 그가 정치판에 뛰어들어 주먹세계와
정치판을 조화롭게 적응하지못하고 정치적 객기를 부렸지않나싶다 결국 그의말년에는
감옥을 안방처럼 드나드는 얼룩진 비참한 인생의 말로였다
김두한의 평가에 있어서는 더가까이 그를 이해할수있는 또다른 한편의 여운도 남았고
그의 일대기을 탐구해볼수록 김두한이란 인간매력과 한편의 공감적인면이
작금의 정치후진난세에 어필되어지기도한다
1972년 갑작스런 뇌출혈로 55세나이에 恨많은 삶을 마감한다
이성순(시라소니)
시라소니 본명 [이성순] 1914년 신의주출신으로 일정시절 만주를 무대삼아 주먹과 박치기가
특기인 주먹건달로써 해방이되자 귀국하여 명동일대에서 식객(밥이나얻어먹는건달)으로
전전하는 야인생활로 떠돌았으나 타고난 쌈실력으로 이성순이의 존재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종로패나 동대문일대의 주먹들을 일격으로 날려버리는 뚝심과 뱃짱이 일본조폭 오야지 하야시나
헌병대장과의 주저없는 맞장뜨기 결투를 벌이기도 한다
그의 활극적인 무용담을 읽어보면 만주봉천에서 주먹건달 40명과 대결하여 박살냈다는 일화가 있고
사람 9명을 세워놓고 뛰어넘는 순발력으로 구경꾼들의 입을 벌어지게하는등의 타고난 순발력의
소유자였다 특히 그는 양팔꿈치나 양발 양주먹을 이용한 싸움재능은 당대의 최강으로 바라보는
당시의 논평가들이 인정하는 글을 자료에서 읽어볼수있다
이성순의 별명이 왜?시라소니라고 붙혀졌는지를 알고자 그의 일대기를 몇번읽어봐도 정확한
자료가 노출되지않는다 다만 시리소니라는 어휘는 귀가검은 고양이란 뜻으로 고양이과에
속하는 시라소니는 먹이사냥을 위해 2~3M의 나무높이를 뛰어 원숭이를 즐겨 잡아먹는다고
한다 아마 이런 시라소니를 빗대어 이성순이가 탁월한 공중점프로 싸움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붙혀진 이름이아닌가 하고 나름데로 추정을해본다
그의 싸움실력은 특출하고 담대한지라 당시 김두한이나 신마적 상하이박등도 이성순이와
대결을 피했을정도이고 김두한이도 무릎을 꿇고 큰형님이라 불렀다는것이다 후일
임화수도 이성순이를 존경하고 모시는 정도였으며 유지광이도 그의 자서전에 시라소니는
당시 조선 최고의 주먹였다고 평가해놓은것을 볼수있다
김두한이가 이끄는 동대문파도 이성순이가 몸담고있는 서북청년단의 명동파를 평정하지
못한 이유도 이성순이가 버티고 있었기때문이었다
김두한.이정재.이성순 최고3인방의 주먹들이 한시대 전성기를 이루는 시기였다
후일 자금력이 떨어진 이성순이가 이정재한테 돈을 달라고 귀찮게 한다고해서 이정재의
조직들이 이성순을 불러들여 린치를 가하고 죽도록 패서 거의 패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성순이가 이정재의 본거지로 겁없이 혼자 찾아간것도 그만의 뚝심과
자신만만의 판단였지만 결과적으로 대책없는 착오였다 이사건을 기점으로 이성순이는
주먹세계에서 영원히 손을 씻게되고 그의 인생도 전환점을 맞게된다
이정재로부터 치욕을 당한 그는 이정재가 혁명정부에 검거되어 재판할때 오히려 이정재를
감싸주는 증언을 했다는 자료도 보인다 주먹세계와 거리를 멀리한 이성순이는 당시
조봉암 국회의원의 보디가드로 활동하면서 정치적 입성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하게되고
모종교에서 신앙생활을하다가 1983년에 사망
(정치깡패 이정재의 모습과 사형집행 직전의 모습)
이정재 1917년 경기도 이천출신으로 부유한집안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부도 잘했다 하며 씨름선수로써 전국씨름대회에서 3연패를 할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전쟁 징용을 피하기위해 김두한이가 조직한 주먹패단체인 반도의용정신대에 가입활동하면서
주먹건달조직으로 변질하는 동기가된다
이후 반민특위에서 활동했으며 한때는 동대문에서 광목장사를 하기도했다
6.25전쟁이 끝나자 동대문상인연합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본격적인 조폭의길로 들어서면서
동대문 알카포네라는 별명을 들을정도로 조직을 이용한 막강한 자금을 확보한다
이무렵에 돈구걸로 귀찮게하던 박치기대장 이성순이도 이정재부하 이석재등이 린치를 가하고
두드려패서 패인되게 하여 천하의 싸움꾼 시라소니 이성순이를 주먹인생에서 종지부를
찍게하는등의 무소불위의 보스로써 거칠것없었다 또한 당대의 주먹일인자이며 한때는
자기의 보스였든 김두한이도 유지광이와 함께 국회로 찾아가 짓밟아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정도로 이정재는 조직과 자금력 권력비호와 함께 최강의 시절을 보낸다
또한 그는 고집과 뚝심 맷집이 쎈걸로 유명하고 누구든지 이정재한테 한번 찍히면 끝까지
찿아내어 복수를 하였다고 한다 사실 이정재는 한때 김두한이나 시라소니로부터
큰도움을 받은 은혜도 입었지만 김두한이와 이성순 이두사람을 주먹인생에서 사실상
힘을 못쓰도록 제거한것을 보면 이정재의 비정하고 냉혈적인 면면을 읽을수있다
물론 그의뒤에는 고향선배인 경무대 경찰서장인 곽영주(사형)가 배경으로 돌봐주고 있었다
주먹패 조직의 리더로서 일명 권력빽이라는 두개의 칼날을쥔 그의 위세는 당대에
거칠것없는 한국판 무시무시한 알카포네였다
곽영주의 후원으로 자유당정권과 더 밀착해진 이정재는 야당정치인 테러의 주동자로
악명중에 악명을 떨친 정치테러 주동자로 활약한다 그댓가로 자유당 감찰부차장이라는
직함을 달았으며 이후자유당을 반대하는 정치인을 테러하는 주동자로서 악랄함이 극에달한다
그의 주먹대부이며 대형인 김두한이도 이시절에는 이정재한테 협박이나 위협.수모을 당해도
이정재와 맞서지 못할정도였으니 새삼 이정재의 위력과 위세를 가늠해볼수있다
이후 부통령 이기봉과 국회의원 출마문제로 마찰을 빗다가 결국 국회의원 출마지를
이기봉에게 내주면서 조직도 임화수에게 물러주고 잠시 자유당정권에서 물러앉는다
한때 북악산 흉가에서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허정 과도정부에서 체포되고
장면 2공화국에서 또다시 체포되어 사형은 면하였으나 군사혁명정부에서 다시검거
재판에 넘겨지게된다
화랑동지회라는 범죄조직의 내용이 재판중 임화수의 폭로로 그의죄가
가중되었고 군사혁명재판에서 임화수.유지광(후일사형집행은 면함).곽영주.최인규.
신정식.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는다 믿었던 심복부하한테 배신을 당한것이며
임화수는 저살기위해 이정재를 희생양으로 씌울려는 골육지책의 폭로를 한것이다
1961년 10월19일 그에나이 44세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유지광 그리고 그가쓴 자전적 소설 (대명) 전편과 속편 책표지)
유지광은 1927년 이천출신으로 단국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한 배움이 있는 군장교출신으로써
이정재와 사돈간이면서 이정재의 1급주먹참모로써 삼우회 화랑동지회라는 깡패조직을만들어
이정재 임화수와 함께 자유당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를 테러하는등 소위1957년 장충단공원
정치인테러및 고려대 대모학생을 습격하는등 진두지휘 리더로써 이정재의 심복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유지광이나 임화수는 주먹으로 평가할수없는 주먹졸개에 불과하며 이정재라는
막강한 조직의 힘을업고 날뛰었던것이다 이정재의 조직에 그는 다식한 머리로 편승해서
자유당정권의 정적제거나 정권유지의 부정한 하수인으로써 방패로 활약한것이다
물론 정치권력의 야심도 작용했을거란 논평도있다
주먹힘도없는 유지광이 이정재와 함께 국회에 뛰어들어가 당시 주먹계의 대형격인
김두한이를 보고 야! 이곰보새끼야 하고 김두한이를 겁없이 내려친 일화가 유명하다
또는 자유당반대 학생데모대를 흉기로 찌르는등의 정치 깡패로변신 이정재와 함께 악명을
떨쳤다고한다 그후 혁명정부에 검거되어 사형만은 면하는 행운도 얻어 기사회생하였으며
말년에 그가 쓴 자전적소설 (대명)이 드라마로 방영되기도했다 1988년 63세로 사망
(임화수 재판정에서 오른쪽 사진은 역시 사형집행 직전 모습)
임화수 1921년생으로 경기도 여주출신으로 본명은 권중각이다 어머니가 개가한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임화수로 개명하였다 건달깡패출신으로 전과자의 전력이었지만
그는 극장매표원으로 출발하여 비상한 수완으로 돈을 벌게된다
임화수는 부산 피난시절에 당시 부산의거부 손종록를 도박판에서 알게되면서
그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게될 정도로 사교술이 능란했다한다 마침내는 거부의 조카사위가
되었고 그뒷심의 배경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당시 평화극장을 염가로 인수하는 수완을
발휘한다 극장주로써 기세등등해진 임화수는 이정재와 돈둑한 친교를 맺으며 이정재를
발판삼아 자유당 정치실세들과 어울리게되고 이승만을 찬양하는 영화나
자유당정권을 옹호하는 공보영화를 제작하면서 자유당정권의 나팔수로써 예술이라는
미명으로 예술계와 정치권을 줄타기하는 야욕의처사를 본격화한다
(임화수가 경무대 이승만을 찿아가 그의 하수인들과 인사를 하고있다 원내임화수)
당시 실세인 경무대 곽영주와 이정재를 등에업은 임화수는 기세가 득의만만해져 당시 영화계는
물론 연예계전반에서 막강한 실세로 군림을하게된다
임화수는 예술인총연합회 문화인총연맹 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유당독재정권의 입맛을 맞추는 공보하수인으로써 활동하면서 또한 연예주식회사라는 영화사도 설립하였다
(임화수의영화사가 제작한 한국최초 외국합작영화 이국정원)
당시 연예계의 황제.대부라고 할정도로 그는 영화나.연예계의 절대 위치를 굳히면서
배우나 연예인들이 임화수의 뜻에 따라야하는 악질독존 였다고 지금도 당시원로 연예인들이
회고한다 임화수는 연예인들한테 자기기획에 따르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무소불위로
폭력을 휘둘러댔는가하면 연예계활동에 제약을 가하고 폭압적횡포와 폭력으로써 당시
영화배우들이나 가수들을 손에 쥐고 떡주무르듯 했다고한다
주먹깡패에서 연예깡패로까지 만용을부리다가 정치깡패까지로 등극하여 부정한 야욕을
실행하는일에도 서슴치 않았든바 마침내 3.15부정선거에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쏱아넣는
부정선거 행동대장으로 감행하는 주역을 맡는다
임화수의 평가에 있어서 논란이 기운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일개 배움없는 주먹건달에서
영화제작업까지 진출하여 한시대의 예술계를 휘어잡고 위세를부린 인물이며 비상한
수완으로 자수성가하는 입지전적인 처세술이나 초기 한국영화 변화와 활약으로 남긴 업적도
만만치 않았다는 논평도 눈에띌정도다
다만 그과정에서 독선적이고 폭력폭압적인 문제와 부정의 하수인으로써 비켜갈수있었다면
정말 입지전적인 인물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권력없고 절대榮華없고 절대주먹없듯이
임화수 그도 결국 혁명정부에 검거되어 재판 과정에서 사형위기를 모면하고자 그를 돌봐주고
키워준 이정재를 까발리면서까지 목숨을 구걸했으나 1961년12월21일 서울 형무소형장에서
그의목에도 밧줄이 걸리게 되고 40초반 젊은나이에 파란만장한 최후를 맞는다
(고려대학생 대모대 피습현장)
1960년4월18일 (이정재.유지광.임화수) 3인이 직접주도하고 100여명의
깡패와건달을 동원하여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고려대생 대모대를 습격한다
무자비하게 흉기로써 폭력을 동원하여 난장판을 만들어놓는다
이사건으로 다음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후 자유당정권은
몰락하게 된다 아울러 부정한 권력에 편승하고 기생하려든 주먹의 야욕3인은
결국 철퇴를 맞고 영원한 어둠속으로 가게된다
이정재의 사형집행장면
그리고 이들은 결국 차디찬 시체로 돌아갔다 두번채가 임화수
인간은 누구나 욕망과 야망으로 성장하는것이며
그실행에 있어서는 이성적인 가치와 통제를 기준해서 판단하고 행동해야한다
젊은날 한때의 충동적인 객기는 평생을 후회로 남는다
어떻게 살것이며 살아야하는지는 우매한 범주의 질문이다
중요한것은 지금 어떻게 살고있느냐가 답을 줄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협하는 조직 폭력
예전보다는 많이 사라졌다고 하나 우리주변에는 아직 조직폭력에 의한 피해가 만연하고 조직폭력배들도 기존의 갈취형, 지역형 조직에서 업종별로 지속적이고 안전정인 이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자영헙(기업형)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일요신문>
경찰은 서민의 삶을 위협하는 조직폭력에대한 피해를 방지하고자 민생침해 사범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단속을 하고 있습니다
조직폭력이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범죄를 범할 목적으로 구성된 단체 또는 집단에 의한 범죄를 말한다. 즉, 경제적 이득의 취득 목적하에 폭력을 주된 수단으로 하여 특정 다수인으로 구성되고 계층적 인적구조와 내부통솔체계를 갖춘 계속적인 집합체를 말한다. 조직폭력배의 특성으로는 목적성, 폭력성, 내부규율성 및 의형제적 체제, 활동무대의 존재, 계속성·상습성·계획성 등이 있다. 한편 조직폭력범죄는 범죄의 태양에 따라 일반폭력범죄, 지능폭력범죄, 도박범죄, 흉기범죄로, 생업·자금원·행동의 태양 등에 따라 조직폭력, 회사깡패, 폭력상습자 등으로 구분한다
– 경찰학사전 -
(출처 : SBS)
조직폭력은 일제시대 국내에 진출한 야쿠자에 대한 김두한 등의 대항조직이 해방 후 범죄조직으로 변질되면서 주로 유흥업소를 기반으로 영향력 확대하였고, 건국 직후 조직폭력배들의 발호는 국민생활의 안정을 해치고 사회기강을 훼손함으로써, 역대 정권은 출범시마다 민심 전화과 국가 기강 확립 차원에서 각종 특별조치 등을 통하여 강력하게 단속하여 왔습니다.
최근 조직 폭력은 공공연한 조직활동이나 집단폭력 행사를 가급적 자제하고 간부급은 유흥 업, 기업가, 건설업자 등으로 신분을 은폐하고 있고, 종래 갈취형, 지역형 조직에서 업종별로 지속적이고 안전정인 이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자영헙(기업형)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재개발, 재건출사업, 사채업 등 조직 자금원을 중심으로 조직이 재편성되고, 자금원이 유흥업소 등 기존 이권사업 이외에 아파트 재개발 사업, 금융사업(이른바 파이낸스) 등으로 무차별 확대되는 추세에 있으며 탈세나 불법영업이 가능한 사업,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을 요하지 않고 폭력이나 위력 과시가 필요한 사업, 인,허가 만으로 상당한 이권이 보장되는 사업 등에 주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
전국 조직폭력배의 수는 얼마나 될까??
경찰이 관리중인 국내 폭력조직은 지난 8월 기준 전국 216개파 5425명입니다
지역별로는 경기도가 31개파 893명으로 가장 많고, 서울 22개파 479명, 부산 22개파 384명, 경남 18개파 411명, 충남 17개파 288명, 전북 16개파 408명, 인천 13개파 312명, 경북 12개파 394명 순입니다
조직별로는 충북 파라다이스파가 76명으로 경찰 관리 대상 조직원이 가장 많고 대구 향촌동파 75명, 부산 칠성파 71명, 인천 부평신촌파·광주 국제PJ(65명), 충북 화성파(64명) 순입니다 (출처 : 경찰청)
민생안전 확립을 위해 조직폭력 척결을 선포한 경찰
경찰은 지난 11일부터 내년 1월29일까지 '연말·연시 민생안전 및 법질서 확립대책'을 집중 추진하고 있습니다
조직폭력배 불법행위와 기업형 퇴폐유흥업소, 불법 사행성 게임장 등에 대해서 기획수사를 전개할 예정이며 조직폭력배 뿐만 아니라 주요 범죄수배자 일제 정리 차원에서 '특별검거령'을 발령하고 집중 추적·검거에 나설 계획입니다.
또한 파밍과 스미싱 등 신종금융사기와 음란 도박사이트 등 날로 진화하는 사이버범죄에 대해 선제적으로 집중 단속하며 상습 정체를 유발하는 교차로 주변의 교통 무질서를 추방키로 했습니다
시민 여러분의 많은 제보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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