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yu Su Young
'열여덟 스물아홉'의 귀여운 남자
Flying High
"예기치 않게 접어든 연기자의 길
스물일곱 남자의 솔직한 사랑 이야기"
두 번째 인터뷰. 3년의 터울을 두고
기자와 배우로 또 다시 마주 앉은 류수영은
훨씬 더 멋진 남자가 돼 있었다. 잘생긴
외모며 밝고 명랑한 성격은 그대로이지만,
마침내 자기 자리에 안착한 사람의 자신감
넘치는 여유가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KBS TV 미니시리즈 '열여덟 스물아홉'의
스물아홉 남편으로 첫 주연을 꿰찬
류수영과의 어느 봄날의 데이트.
그는 달변이다. 질문의 서두만 살짝 던져도 정확히 핵심을 짚어낼 뿐만 아니라 막힌 데 없이 대답도 술술이다. 그렇다고 공식화된 모범 답안은 아닌 것 같다. 다소 말하기 불편한 질문에도 망설임 하나 없고, 또 모르는 질문에는 그냥 솔직하게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넘어가는 걸 보면.
하긴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신인 시절에도 그는 신인 같지 않았다. 인터뷰 경험이 거의 없었을 때도 단답형 대답으로 일관하는 다른 초보 연기자들과 너무 대조적으로 유창한 말솜씨를 과시하곤 했다. 그뿐이랴.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 전혀 없이 마음의 빗장을 풀어버리는 그 특유의 친화력은 또 어떻고.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연기자로서의 위치. 조연에서 주연 못지않은 조연으로, 또 주연급 조연으로 미묘한 차이 만큼씩 앞서 나오더니 이제 주연 배우의 궤도에 제대로 올라섰다. KBS TV '열여덟 스물아홉'으로 당당히 투 톱 배우가 된 그. 흔히들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그에겐 해당 사항 없는 말이다. 기자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가 하면, 사진 촬영을 위한 장소 물색을 위해 매니져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니는 등 소위 '뜬' 배우들과 궤를 달리했다.
▶Play> 우여곡절 겪고 배역 결정, 밝고 사랑스런 캐릭터로 인기몰이
"학생들이 방송국에 견학을 왔는데 저를 보겠다고 점프를 하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그렇게까지는 안 했을 텐데(웃음). 진짜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팬들의 즉각적인 반응이야말로 인기의 바로미터. 부분기억상실증에 걸려 열여덟 살 시절의 기억 속에 사는 아내(박선영)를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며 다시 기억을 되찾아주는 남편 강상영으로 분한 그는 요즘 부쩍 달라진 팬들의 반응에 놀랍다. 이전 작품들을 통해 이미 이름과 얼굴을 알린 지 오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반응의 차이를 느낄 정도.
숱한 필모그라피 중 '명랑 소녀 성공기' '정'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 공교롭게도 악역으로 등장했던 드라마가 크게 히트를 치는 바람에 '악역 전문 배우'라는 꼬리표까지 달았던 터라 이번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응은 단순한 관심 이상으로 고맙고 반갑다.
"사실 악역 아닌 역할이 훨씬 더 많았어요. 그런데 악역으로 나왔던 게 다 잘되다보니 날카로운 면만 기억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러다간 앞으로 역할에 제약이 좀 있겠다 싶을 정도였죠. 그래도 나이가 어릴 때 했기 때문에 조금 더 지나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도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얘길 듣거든요. 남들이 갖지 못한 이미지를 하나 더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고요."
막상 떠올려보면 무턱대고 욕을 먹는 악역은 아니었다. 무조건 나쁘다기보다 그럴 만한 이유 있는 악역으로 어쩐지 측은함마저 들게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주연보다 비중이 적은 캐릭터로 주연 못지않은 유명세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 누가 해도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연기로 사랑을 받는 건 어렵지 않지만, 욕은 욕대로 먹으면서 애정 어린 관심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첫 주연이라는 의미만큼 밝고 따뜻한 캐릭터로의 회귀가 그에겐 큰 의미로 다가온다. 항상 굳은 표정에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어야 했던 악역과 달리 이번 역할은 언제든 웃고 싶을 때 환하게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그 부분을 좋아하세요. 아들이 웃는 걸 보니까 좋으신 거죠. 거기다 주변에서 드라마 잘 보고 있다고 인사들을 해오니까 흐뭇하신가 봐요. 이래저래 요즘은 기분 좋은 일뿐이에요. 일주일에 단 하루도 쉬지 못하는 강행군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행복합니다."
크든 작든 이번 드라마가 그의 배우 인생에 영향력을 끼친 것은 맞지만, 인생의 전환점이니 터닝 포인트니 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적잖이 부담되는 게 사실이다. 주연이라는 자리도 예전에 비해 출연 분량이 많아졌다는 것뿐, 스스로는 전과 다름없는 자세로 연기에 임하고 있기 때문.
"처음엔 스트레스가 좀 있더라고요. 누가 중압감을 주는 건 아닌데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 제가 등장하기 때문에 내가 잘못하면 드라마 질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꼈죠. 그런데 오히려 방송이 시작되고 나니까 가능한 풀어질수록 좋은 연기가 나오더라고요. 지금은 아예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찍고 있어요."
그 흔하디 흔한 해외 로케 한 번 없고 조촐한 출연진만으로 2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데는 그의 능청스런 연기가 단단히 한몫하는 게 사실. 직업이 연예인으로 밖에 나가서는 완벽한 남자이지만 아내 앞에서는 망가지기 일쑤인 그의 코믹 연기에도 시청자들은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 역할을 맡기까지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드라마 기획 단계에서 가장 먼저 강상역 역할 제의를 받았지만 이후 김민종, 김호진, 신현준 등 쟁쟁한 남자 탤런트들이 물망에 올랐던 것. 거의 포기한 채 시골에 내려가 있었던 그는 촬영 시작 이틀을 앞두고 캐스팅 소식을 전해 들었다.
"솔직히 마음을 다잡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요. 처음에 흐지부지되는 것 같아 아예 안 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거든요. 모든 드라마의 캐스팅 영순위인 대 스타가 아니고서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진 않아요. 물론 기분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제작진의 입장을 이해는 해요."
◀◀Rew> '살찐 정우성'으로 유명했던 시절, 첫 영화 '썸머타임'의 기억
누구누구처럼 한 작품으로 대박을 터뜨려서 톱스타 반열에 오르는 초고속 에리베이터를 탈 기회는 없었는지 모르지만, 데뷔 후 거의 무명 시절이 없었고 출연작 중 상당수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행운아이다. 당당한 주연 자리에 서기까지 걸린 5년의 시간도 결코 긴 시간이라곤 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연기자의 꿈을 꾸어본 적도 없고, 연기자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해본 적은 더더욱 없고, 우연한 기회에 방송에 입문해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아 데뷔한 케이스이기 때문.
방송과의 인연은 98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전통무에 동아리에 가입해 쌍절곤 돌리기, 불 뿜기, 머리로 돌 깨기 등 각종 엽기적인 묘기를 익힌 그는 '캠퍼스 영상가요'에 출연, 당당히 1등의 영광을 안았다. 그리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마침 방송작가인 동아리 선배와의 친분으로 '최고의 밥상'이라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 2연승을 올리며 3주 연속 방송에 얼굴을 내비치게 됐다.
"저를 포함해 세 명이 참가했는데 3연승을 하면 유럽에 보내준다고 해서 여행 갈 욕심으로 합숙까지 했어요. 3연승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여행의 꿈은 멀어졌지만 오늘날 저를 있게 한 운명의 순간이었죠."
조금씩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한 것은 '진실게임'에 아마추어 출연자로 참여했을 때였다. '최고의 밥상' 제작팀이 만든 새 프로그램이 바로 '진실게임' '40kg을 감량한 남자는 누구인가' 편에 가짜로 출연했던 그는 능청스러운 연기로 단 한 명의 지목도 받지 않는 쾌거를 이뤘다. 연기력이지만 '살찐 정우성'이라는 닉네임처럼 잘생긴 외모 또한 주목을 받았던 요소.
"그 후에 방송국, 매니지먼트 회사, 프로덕션에서 연락이 많이 왔어요. 그런데 막상 쉽게 결정을 못 했어요. 평소에 연예인을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6개월 정도 고민을 하다가 일단 시작해 보기로 했죠. 대학생 때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잖아요. 그 사이 '깁스 가족'이라는 시트콤에 단역 비슷하게 출연하며 즐거웠던 기억도 결정에 도움이 됐죠."
스스로 고민의 벽을 넘고 나니 부모님을 설득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의 부친인 서경대 경영학과 어윤소 교수는 아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학자의 길을 가주기를 바랐다. 그가 경영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것도 부친의 영향.
"적극적으로 부모님을 설득하지도 않았어요. 다만 나도 정확한 판단을 못 했으니 하라, 마라는 강요만 하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부모님은 제 의사를 존중해 주셨죠.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 번도 안 듣고 자랐을 만큼 당신들 생각을 주입하는 분들이 아니세요. 3년 정도만 해보고, 그때도 아니면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오게됐네요."
연기자의 길에 일단 들어서기로 결심한 후 주변인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어남선이라는 본명 대신 지금의 예명을 쓰게 됐다. 그의 본명을 들은 방송 관계자들이 "네가 무슨 배냐? 아니면 경부선, 호남선, 어남선이냐?"며 예명을 만들라고 했기 때문.
본격적인 데뷔작은 영화 '썸머타임'. 룰라의 전 멤버였던 김지현의 상대역으로 2001년 개봉 당시 정사신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는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같으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그때는 벗는 연기 자체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을 때라 스스로 고민한 것은 물론 부모님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아직도 케이블 TV에서 하더라고요. 솔직히 지금 와선 그때 그 영화를 안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후회하지 않으려고 해요. 포르노를 찍은 것도 아니잖아요. 촬영할 때는 정말 진지했는데 홍보하면서 기획 의도와 다르게 전해진 부분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속상한 점도 있지만, 그 영화를 하고 난 후 연기 외적으로 겁날 게 없어졌죠."
과연 그랬다. 이미지를 고려해 남들이 악역을 마다할 때도 그는 악역과 선한 역에 관계없이 대사 한마디에 필일 꽂혀 배역에 도전할 만큼 열정이 있었고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부모님 또한 지금은 최고의 후원자이자 팬이 되어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FF> 사랑은 현재진행형, 배우로서의 인생 목표
의지가 결과를 만들어낸 것일까. 짧다면 짧은 연기 경력이지만 이렇다할 슬럼프도 없었고 크게 겪어본 적도 다행히 없었다.
"극중 강상영은 다 망해서 연극을 하는데 저는 그만큼 타격을 입은 경험이 없어요. 사실 그렇게 큰 절망을 겪으려면 높이 올라가야 하는데 전 아직 멀었잖아요. 아직 고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이륙을 하기는 했나?"
연기의 단맛 쓴맛을 논하기에는 사실 아직 역부족이지만, 3년만 해보겠다며 시작한 연기를 업으로 삼고 있으니 분명 성과는 있는 셈. 연기자가 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니 이만하면 천직이라고 말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재미있을 때까지만 연기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재미있을 때까지만 하자는 게 변하지 않는 철칙이에요. 스스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연기를 하고, 기계적으로 이번 드라마가 끝났으니 또 다른 드라마를 해야한다면 직업 자체가 끔찍할 것 같아요. 다행히 지금까지는 재미있고, 또 그 재미가 평생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스스로 재미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죠."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연기력을 갈고 딱아야 하는 게 필수. 어떤 연기자도 본인 연기에 만족하지 않겠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다. 남들은 잘한다고 칭찬하는데 자구 어설프고 잘못한 것들만 눈에 띄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느 순간 보면 나아진 모습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잘 모르겠어요. 가끔 예전에 출연했던 드라마를 다시 봐요. 오히려 연기가 뭔지 몰랐을 때 더 좋았던 부분이 분명 있거든요. 그때의 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몇 년 사이에 제 피부색이며 웃는 모습이며 인상 쓰는 표정까지 많이 달라진 게 보여요."
누구라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것. 단순한 변화든 아니면 발전이든. 그러나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대하는 자세만큼은 변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 사람 별로잖아요. 다행히 제 친구들은 저를 보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그래요. 그럴 때면 내가 아직 이상해지지 않았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죠. 친구들은 저를 연예인 류수영이 아닌 친구 남선이로 보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이 되죠."
이제 스물일곱. 사랑을 하기 딱 좋은 나이에 그의 사랑은 어떤 상태일까. 전작들에서는 번번이 사랑을 뺏기거나 막연히 바라보는 등 쟁취와는 거리와 멀었던 그가 이번 드라마에서는 일찌감치 짝 있는 유부남으로 나왔으니 실제로도 어떤 변화가 있지 않을까.
"연예인이 된 후에 만나 여자친구가 있어요. 스케줄 때문에 자주는 못 만나지만 존재감만으로 힘이 되죠. 실제 저는 표현을 잘하는 스타일이고 표현하는 걸 좋아해요."
연기뿐만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도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그. 데부 초 '지킬 것은 지킨다'라는 카피로도 유명했던 박카스CF에서 보야줬던 믿음직한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식사를 겸한 인터뷰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느라 기자가 제대로 숟가락을 들지 못했을 정도로 유창한 언변에 타고난 유머 감각, 거기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빵이며 쿠키를 만들어 먹었을 정도로 요리 실력까지 출중하다니 이 정도면 1등 신랑감.
두 번째 만남, 데뷔에서 현재진행형인 연애까지 끊임없는 대화가 오갔지만 마지막 인사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야기를 더할수록 류수영이라는 배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만나면 만날수록 알고 싶어지는 사람, 그가 그런 남자다.
취재 박진영기자 사진 조명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