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요구에 의해 한국정부는 1964년 9월 최초로 1개의 의무단과 건설지원단을 파병시켰다.
전쟁으로 실의에 빠진 월남국민에게 따뜻한 우의로 파괴된 시설의 복구와
의료지원단의 활동성과가 큼을 통감한 월남정부는 다시 1966년 2월 전투병력 증파를
한국에 요청하였다.
월남정부의 요청을 받은 우리 정부에서는 전투병력을 증파하는데 대한 국내외 정세와
특히 우리나라의 안전보장 문제를 중심으로 제반 사항을 면밀히 검토하고
1966년 2월28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처 국회에 동의 요청을 하였다.
1966년 3월 10일 정부는 월남 증파 결의안을 제 55회 국회 제14차 본 회의에서
찬성 95, 반대 27, 기권 3으로 통과 전투부대를 파월하게 이르렀다.
한국군 월남참전 연병력 규모
년도별
1965년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총 계
인 원
21,031
41,809
42,743
45,729
43,408
42,349
42,602
33,177
312,853
주월사(주월 한국군 사령부) The Head quarters Republic of Korea forces in Vietnam
주월 한국군사령부(이하 주월사령부)는 1965년 9월 25일
국방부 일반 명령 제16호에 의거, 서울 필동 합동참모본부에서 창설,
초대 사령관에 채명신 육군소장(수도사단장 겸임),
부사령관 이훈섭 육군준장이 부임하였으며.
국방부 지령 제12호에 의거, 사령부 선발대 16명이 월남[사이공]으로 출발하였으며,
뒤를 이어 10월 20일 사령부 94명, 수도사단 지휘 본부 40명, 계 134명이
월남 [사이공]으로 이동하여 주월 사령부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당시의 예하부대로는 전투부대인 수도사단(맹호), 해병 제 2 여단(청룡)과
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 건설지원단(비둘기) 및 해상수송분대(백구)를
총지휘하게된다.
1966년 4월16일 수도사단의 보충부대로 보병 제 26연대가 증파 되었고,
뒤를 이어 6월1일 100군수사령부(십자성)를 창설하였고,
그리고 8월15일 전투부대의 효과적인 지휘와 연합군과의 밀접한 협조를 위하여
[나트랑]에 야전 사령부를 창설하였다.
66년 9월 5일 전투부대로서 보병 제9사단(백마)이 파월되었고,
1967년 4월10일 한국군 최초로 제11항공중대가 창설되어 7월 10일
사령부 및 직할부대가 증개편되어 공군 지원단(은마), 군악대가 창설되었고,
태권도 교관단 및 해병여단의 증강으로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총병력 4만 8천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주월한국군 사령부는
월남의 수도 사이공 한복판에서 '초롱'쪽으로 가는 길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트란ㆍ콕톤' 12번가에 7천평이 넘는 넓은 땅에 2천평의 5층 건물에는
월남전의 오늘과 내일을 주름잡는 한국군을 비롯하여 호주, 뉴질랜드, 월남
그리고 미국군을 망라한 작전 연락장교단이 함께 있다.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퀴논'사단본부에서 맹호부대가 상륙한 후 작전지휘를
직접 맡고 있음으로 사령부는 참모장 이훈섭준장이 거의 통솔하다시피 하고 있다.
부대창설 :
1965. 9. 25 .서울 필동 (채명신 소장)
참전기간 :
1965. 9. 25 - 1973. 3. 23
참전군인 :
13,133명 ( 4,064명, 사병 9,069명)
희 생 :
전사 45명 (장교 18명, 사병 27명) 부상 54명 (장교 9명, 사병 45명)
사 령 관 :
초대 중장 채명신 , 2대 중장 이세호
부대지휘 :
주월사를 비롯하여 3개 전투부대(맹호, 백마, 청룡)와 1개 군수 지원부대(십자성), 1개 군사원조단(비둘기), 2개 수송 전대(백마, 은마)등 8개
전 과 :
1964. 7. 18부터 1973. 3. 23까지 대부대 작전 1,174회와 소부대 작전 576,302회등 총 577,476회의 작전을 실시, 한국군 전술책임 지역 7,000평방Km를 평정하고 월남 난민 120만 여명에 대한 거주를 정착시켰다.
대민사업 :
진료 3,523,364명, 식량 19,640톤, 의류 461,764,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Km, 태권도 보급 902,060명,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공연 2,304회, 자매결연 3,364곳 등 끈끈한 정으로 평정사업과 대민사업을 병행실시, 진정한 우정을 심었던 결과로 월남국민들이 따이한을 믿고 따르며 잊지 못하게 했다.
십자성부대(제100군수 사령부) The 100th Logistic Command
최초 파월 전투부대인 맹호사단과 청룡부대가 파월됨에 따라
이들 전투부대에 대한 효과적인 군수지원을 위하여 국본 일반명령(육) 제31호에 의거,
1965년 9월1일부로 강원도 흥천에서 수도사단 예하부대로서
군수지원사령부를 창설하고 초대 사령관에 이범준 준장이 부임하였다.
파월이후 백마사단을 비롯한 추가부대가 증파됨에 따라
국본 일반명령(육)제22호에 의거, 1966년 6월1일부로 군수지원사령부를
100군수사령부로 개편, 수도사단으로부터 예속해제, 육군본부에 예속과 동시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배속하게 되었다.
임무 :
기능 :
1. 주월 한국군에 대한 군수 및 행정 지원
2. 평정 및 개발사업의 적극적 지원
3. 전술 책임지역에 대한 자체방어
1. 보급품의 획득 및 저장분배
2. 3~4단계 정비 지원
3. 입원 및 후송
4. 인쇄 및 영현 업무
5. 대민 지원
※ 십자성의 의료활동
파 월 :
1965. 10. 12 여의도 광장에서 맹호부대와 같이 출범 1965. 10. 16 부산항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퀴논에 상륙, 맹호부대 사령부와 같이 퀴논 인접지역에 주둔. 출국 당시에는 군수지원 사령부였으나 1966. 6. 1 퀴논에서 부대명칭을 100군수 사령부로 개정. 1966. 8. 20 십자성 부대가 나트랑으로 이동하였다.
사 령 관 :
초대 이범준 사령관에 이어 유학성, 이영일, 이창복, 김종달, 신유정 준장이 사령관을 맡아 부대를 지휘했다.
참전기간 :
1965. 9. 25 - 1973. 3. 23
참전군인 :
희 생 :
전사 213명(장교 26명, 사병 187명) 부상 439명(장교 27명, 사병 412명)
전 투 :
106,665대의 차량수송과 396,019명의 병력수송 및 233,669동의 군수등 수송작전을 치루었다. 군수업무를 수행하면서 민사 심리전으로 베트공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환자 진료와 구호품을 전달하여, 전쟁의 적은 있어도 인류의 적은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평소에 십자성 사령부를 위협하던 지역내 혼톰산 일대에 1969. 3.1~ 3.11일간에 걸쳐 십자성 3호 작전(일명 올개미 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116공병대대, 237수송대대, 경비중대로서 적 사살 : 4명, 포로:1명, 용의자:6명, 소화기:5정, 문서:8점, 취사기구등 150여점을 노획했다.
대민사업 :
사찰, 교회, 교량, 유치원 등을 설치해 주고 농사짓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어 한국의 혼을 심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한국군이 빛나는 전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적기 적소에 군수 지원을 원활히 수행한 지대한 공로로 평가한다. 그러므로 파월 한국군 부대의 동맥과 젖줄로 그 소임을 다해 온 십자성 부대는 어머니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비둘기부대(건설 지원단) The Construction Support Group
한국군 부대로써는 최초로 파월된 비둘기 부대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의료진과 건설 공병으로 구성된 평화의 사도 전사부대이다.
건설 지원단은 국방부 명령(육)제2호에 의거 서울에서 장교 16명, 사병8명으로
파월 편성을 위한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였으며
(초대단장 조문환 준장) 예하 부대로서 육군 제127공병대대 제1이동 경비대대,
제8이송중대, 해병 제1독립 공병 중대를 핵심으로 부대편성을 하였다.
1965년 2월5일 보병 제6사단 지역인 경기도 현리에서 국방부 장관 임석하에
주월한국군 군사 원조단 결단식을 갖게 되었으며,
2월13일 파월 제1진으로 선발대가 출발하여 2월 24일에 월남 사이공 도착하고,
3월 16일에는 전부대가 숙영지 도착과 동시에 불명확한 적정과 지형조건하에
자체 능력으로 경계 및 수색활동을 전개하면서
도로 및 교량보수에 착수 하였으며, 파월이래 처음으로 베트콩의 기습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파월 초창기의 여려운 환경속에서 건설 지원단은
도로 신설공사를 비롯하여 교량,학교, 진료소 공사와 태권도 지도 및 심리전 활동등
한국군의 개척자로써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다.
놀이터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공부할 교실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아담한 교실을 지어 주었다.
전쟁의 초연 속에 맥풀린 어린 동심에 꿈을 심어 주었고
이곳 '디안'의 면모는 비둘기들이 월남에 날아온 이후 면목이 일신되었다.
비좁은 시골 길이 대로로 바뀌어 훤히 트이고 먼지 투성이 도로가 다듬어지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졌다.
비둘기부대의 노고에 따뜻한 월남 사람들의 인정어린 보답이 뒤따랐다.
비둘기부대 병영 앞에 '디안'의 마을 사람들이 정장한 수녀들을 앞세우고
정문 가까이 다가오는 시위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둘기부대 장병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선의의 시위였던 것이다.
또한 펀펀한 황무지에서 소를 모는 목녀가 그들 허리에 찬 소중한 물통을
한국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는 광경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름 아닌
인정의 교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깜은 꼬', 깜은 비둘기 '비둘기 고마워요'라는 이 월남말은
한국의 장병들에게 익숙하게 되었고,
월남인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감사의 표현이 되었다.
비둘기의 주변에도 평화로운 풍경만이 전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쳐 '베트콩'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철저한
경비태세로 전투능력을 강화하고 부대 둘레에 철조망과 지뢰지대를 구축하여
5중방위선을 펴고 요새화된 자체경비로 장병들은 안전도를 높혀가고 있었다.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The 2nd Marine Brigade
1965년 6월28일 국방부 지령 8호에 의하여 해병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해병 제2여단을 편성하였으며 초대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이 임명되었다.
65년 9월20일 경북 포항에 위치한 해병기지에서 제 2여단 결단식을 거행되고,
65년 10월9일 파월 전투부대로써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65년 12월16일 투아호아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1966년 8월17일에는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
67년 12월22일에는 호아안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여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병 제2여단은 한국군 최초 전투부대로 파월된 다음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수많은 대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중 주요작전으로는 Tuy Hoa에서 청룡작전을,
Chu Lai지역에서는 Tra Binh Dong 전투를, 그리고 Hoi An 지역에서는 괴룡작전,
승룡작전, 황룡 작전을 수행하면서 지역내에서 암약,출몰하는 적을 섬멸하여
Quang Nam 성 지역들을 평정하였다.
파 월 :
1965. 9. 20 경북 포항에서 출범, 1965. 10. 3 한국을 떠나 1965. 10. 9 캄란에 상륙. 1967. 12. 12부터는 호이안에 주둔.
사 령 관 :
이봉출 여단장의 뒤를 이어 김연상, 이동호, 이동용, 허홍 준장
참전기간 :
1965. 10. 9 - 1972. 2. 24
참전군인 :
37,340명 (장교 2,166명, 사병 35,174명)
희 생 :
전사 1,202명 (장교 42명, 사병 1,160명) 부상 2,904명 (장교 99명, 사병 2,805명)
전 투 :
151,522회 (대부대 전투 175회, 소부대 전투 151,347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으로써 귀신잡는 해병의 맹위를 베트남에서 보여 주었다.
1967년 2월14일 밤부터 15일까지 사투를 벌인 짜빈동 전투는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화중에 신화로써 한국 해병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큰 몫을 했다.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따이한로라고 불리는 다낭에서 호이안간의 도로건설과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실시하여 한월간 친선을 도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맹호부대(수도사단) The Capital Division (Tiger)
수도사단은 비둘기부대 파월에 뒤이어
1965년 6월14일과 6월26일 2차에 걸친 월남공화국 수상의 전투부대지원 요청에
의거, 65년 8월13일 제 52회 임시국회 제 11차 본회의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역사상 최초로 전투 부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4주간에 걸친 교육훈련을 마치고
1965년 10월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결단 및 환송식을 거행,
1965년10월 22일 맹호부대가 최초로 월남 퀴논에 상륙하였다.
맹호사단은 1965년 11월15일부로 미101공수여단 및 미해병 7연대로부터
1,200평방km의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고 거점을 확보하였다.
1965년 10월29일 풍손부락에서 최초로 서전을 장식한 이래
중대수색작전, 대대규모 및 연대규모의 작전을 실시하던중
1966. 3. 23 ~ 3. 26일간에 "고보이" 지역에서 1연대와 기갑 연대를 투입,
최초의 사단규모작전인 맹호5호작전을 실시하였다.
맹호 5호작전이 끝나자 10여년간 이 지역을 지배하여 오던 베트콩을 소탕하고
사단전술 책임지역을 1,400평방 킬로미터로 확장시켰다.
1966년 4월6일부터 16일간에 맹호26연대가 증파됨으로서 사단편제 부대를
유지하게 되었다. 1966년 7월7일부터 8월22일간에 푸레이크지구 미군 합동작전인
파울리비아 작전에 기갑연대 1개대대가 참전하였다.
특히 9중대는 캄보디아 국경부근인 둑코지구에서 8월 9일 야간에 증강된
월맹군 1개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6시간의 격전끝에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격퇴시켜 대승하였으며 전술적인 면에서 중대 전술기지 개념의 우수성을 입증하였다.
세계전사에 새 모습을 드러낸 한국군 고유의 중대 전술기지 운용개념을 확고히 입증한
둑코전투 승리는 월남전의 기적으로써 한국군의 용맹성을 세계만방에 떨쳤다.
월남전에 주둔하고 있는 자유우방의 각나라 군부대 전숫전략 전문가와 지휘관들이
한국군 부대를 직접 방문하여 중대단위 전술기지 운용과 대민사업 활동사항 등을
답습해 가서 교훈을 삼아「무서운 한국군」이란 대명사가 되었고
밀림(정글)의 왕자로서 맹호의 위용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월남 중동부 해안 Qui Nhon 에 위치한 수도사단은 한국군 전투부대의 핵심부대로서
이곳에 침투하고 있는 월맹군 제 18연대를 중심으로한 지방 VC부대들을 섬멸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간 많은 작전중 둑코(Duc Co) 전투, 맹호 6 호 작전,
오작교 작전, 맹호 12 호 작전, 혜산진 9호 작전, 비호 23호 작전, 창군기념작전,
월계작전, An Khe Pass 작전등은 맹호 부대가 남긴 혁혁한 작전으로
상승 한국군의 기백을 널리 과시한 것이다.
파 월 :
1965. 10.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월남 퀴논에 상륙
참전기간 :
1965. 10. 22 - 1973. 3. 7
참전군인 :
114,902명 (장교 7,652명, 사병 107,340명)
희 생 :
전사 2,111명 (장교 186명, 사병 1,925명) 부상 4,474명(장교 246명, 사병 4,228명) 전 투 : 175,107회 (대부대 전투 521회,소부대전투 14,586회)
대민사업 :
퀴논 지역에 문화센터, 학교건물, 공원 팔각정을 건축하는 등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벌였으며, 1972. 4. 18부터 5. 15까지 약 한달동안 파월 한국군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안케패스전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전사 1,328명 (장교 78명, 사병 1,250명) 부상 2,410명 (장교 160명, 사병 2,250명)
전 투 :
211, 714회 (대부대 전투 478회, 소부대 전투 211,236회) 1967. 1. 29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 작전을 비롯하여, 1967. 3. 8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를 개통한 오작교 작전과 1967. 7. 9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남북을 관통하는 국도 1번도로 개통은 이제까지 월남군과 연합군이 공격기도를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구역이었으나 1967. 3. 8부터 맹호부대와 백마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자유월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완전개통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낼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대민사업 :
대민농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백구부대(해군 수송전대)-바다의 제왕 The Naval Transport Group
주월 한국군 파월초기부터 해상수송 임무를 맡은 해군의 활약은
지상군들의 눈부신 전과를 올리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사이공에서 다낭까지 800마일 해상항로를 따라 탄약과 중장비 등의 해상수송임무와
의료및 대민지원사업 및 민사심리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1965년 3월4일 한국함대로부터 LST 1척 812함이 파월되어
비둘기 부대에 편입된 후 해상수송임무를 개시하였다.
1966년 3월15일 LST 2척,LSM 2척을 증파하면서
해군 수송전대 백구부대로 개칭하고, 비둘기부대에서 배속 해제됨과 동시에
주월한국군 사령부 직할대로 승격되어 해상 수송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1969년 8월29일 월남 해군본부로부터 쿠롱(CUULONG)기지로 이동하였다.
은마부대(공군 지원단)-하늘의 보라매 The Aerial support Group
1967년 7월 1일 탄손누트 공항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은마부대는 4대의 C54기를 주축으로 월남전에서
공중수송의 지원활동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결단식를 가졌다.
창설경위 : 주월한국군사령부 공군지원단은
자유세계 안전과 보호를 위한 자유우방군의 일원으로
월남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주월한국군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1966년 6월1일 야전사령부에 전술 항공지원대를 설치하여 수행하던
전술 항공지원 업무와 주월한국군 사령부에서 담당하던 항공수송 지원업무를
1967년 7월1일 C-46 미 항공기 파월을 계기로 보다 효율적인 작전지원과
부대운영을 위하여 분산되어있는 모든 기능을 통합운영코져 공군지원단이 창설되었다.
이동외과병원 Medical support
한국 육군 제1이동외과병원은
'사이공'에서 멀지않은 해안 가까운 '봉타우'라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군으로써는 최초로 월남에 온 이 인술부대는
그동안 온갖 정성과 기술을 발휘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
전란속에서 시달려 보건 따위를 돌볼 겨를도 없는 월남 사람들의 건강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온 이들에겐 이제 '따이한 박시'라는 호칭과 더불?br> ?봉타우'에 없어서는 아니될 일급 유지의 서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요구에 의해 한국정부는 1964년 9월 최초로 1개의 의무단과 건설지원단을 파병시켰다.
전쟁으로 실의에 빠진 월남국민에게 따뜻한 우의로 파괴된 시설의 복구와
의료지원단의 활동성과가 큼을 통감한 월남정부는 다시 1966년 2월 전투병력 증파를
한국에 요청하였다.
월남정부의 요청을 받은 우리 정부에서는 전투병력을 증파하는데 대한 국내외 정세와
특히 우리나라의 안전보장 문제를 중심으로 제반 사항을 면밀히 검토하고
1966년 2월28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처 국회에 동의 요청을 하였다.
1966년 3월 10일 정부는 월남 증파 결의안을 제 55회 국회 제14차 본 회의에서
찬성 95, 반대 27, 기권 3으로 통과 전투부대를 파월하게 이르렀다.
한국군 월남참전 연병력 규모
년도별
1965년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총 계
인 원
21,031
41,809
42,743
45,729
43,408
42,349
42,602
33,177
312,853
주월사(주월 한국군 사령부) The Head quarters Republic of Korea forces in Vietnam
주월 한국군사령부(이하 주월사령부)는 1965년 9월 25일
국방부 일반 명령 제16호에 의거, 서울 필동 합동참모본부에서 창설,
초대 사령관에 채명신 육군소장(수도사단장 겸임),
부사령관 이훈섭 육군준장이 부임하였으며.
국방부 지령 제12호에 의거, 사령부 선발대 16명이 월남[사이공]으로 출발하였으며,
뒤를 이어 10월 20일 사령부 94명, 수도사단 지휘 본부 40명, 계 134명이
월남 [사이공]으로 이동하여 주월 사령부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당시의 예하부대로는 전투부대인 수도사단(맹호), 해병 제 2 여단(청룡)과
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 건설지원단(비둘기) 및 해상수송분대(백구)를
총지휘하게된다.
1966년 4월16일 수도사단의 보충부대로 보병 제 26연대가 증파 되었고,
뒤를 이어 6월1일 100군수사령부(십자성)를 창설하였고,
그리고 8월15일 전투부대의 효과적인 지휘와 연합군과의 밀접한 협조를 위하여
[나트랑]에 야전 사령부를 창설하였다.
66년 9월 5일 전투부대로서 보병 제9사단(백마)이 파월되었고,
1967년 4월10일 한국군 최초로 제11항공중대가 창설되어 7월 10일
사령부 및 직할부대가 증개편되어 공군 지원단(은마), 군악대가 창설되었고,
태권도 교관단 및 해병여단의 증강으로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총병력 4만 8천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주월한국군 사령부는
월남의 수도 사이공 한복판에서 '초롱'쪽으로 가는 길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트란ㆍ콕톤' 12번가에 7천평이 넘는 넓은 땅에 2천평의 5층 건물에는
월남전의 오늘과 내일을 주름잡는 한국군을 비롯하여 호주, 뉴질랜드, 월남
그리고 미국군을 망라한 작전 연락장교단이 함께 있다.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퀴논'사단본부에서 맹호부대가 상륙한 후 작전지휘를
직접 맡고 있음으로 사령부는 참모장 이훈섭준장이 거의 통솔하다시피 하고 있다.
부대창설 :
1965. 9. 25 .서울 필동 (채명신 소장)
참전기간 :
1965. 9. 25 - 1973. 3. 23
참전군인 :
13,133명 ( 4,064명, 사병 9,069명)
희 생 :
전사 45명 (장교 18명, 사병 27명) 부상 54명 (장교 9명, 사병 45명)
사 령 관 :
초대 중장 채명신 , 2대 중장 이세호
부대지휘 :
주월사를 비롯하여 3개 전투부대(맹호, 백마, 청룡)와 1개 군수 지원부대(십자성), 1개 군사원조단(비둘기), 2개 수송 전대(백마, 은마)등 8개
전 과 :
1964. 7. 18부터 1973. 3. 23까지 대부대 작전 1,174회와 소부대 작전 576,302회등 총 577,476회의 작전을 실시, 한국군 전술책임 지역 7,000평방Km를 평정하고 월남 난민 120만 여명에 대한 거주를 정착시켰다.
대민사업 :
진료 3,523,364명, 식량 19,640톤, 의류 461,764,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Km, 태권도 보급 902,060명,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공연 2,304회, 자매결연 3,364곳 등 끈끈한 정으로 평정사업과 대민사업을 병행실시, 진정한 우정을 심었던 결과로 월남국민들이 따이한을 믿고 따르며 잊지 못하게 했다.
십자성부대(제100군수 사령부) The 100th Logistic Command
최초 파월 전투부대인 맹호사단과 청룡부대가 파월됨에 따라
이들 전투부대에 대한 효과적인 군수지원을 위하여 국본 일반명령(육) 제31호에 의거,
1965년 9월1일부로 강원도 흥천에서 수도사단 예하부대로서
군수지원사령부를 창설하고 초대 사령관에 이범준 준장이 부임하였다.
파월이후 백마사단을 비롯한 추가부대가 증파됨에 따라
국본 일반명령(육)제22호에 의거, 1966년 6월1일부로 군수지원사령부를
100군수사령부로 개편, 수도사단으로부터 예속해제, 육군본부에 예속과 동시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배속하게 되었다.
임무 :
기능 :
1. 주월 한국군에 대한 군수 및 행정 지원
2. 평정 및 개발사업의 적극적 지원
3. 전술 책임지역에 대한 자체방어
1. 보급품의 획득 및 저장분배
2. 3~4단계 정비 지원
3. 입원 및 후송
4. 인쇄 및 영현 업무
5. 대민 지원
※ 십자성의 의료활동
파 월 :
1965. 10. 12 여의도 광장에서 맹호부대와 같이 출범 1965. 10. 16 부산항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퀴논에 상륙, 맹호부대 사령부와 같이 퀴논 인접지역에 주둔. 출국 당시에는 군수지원 사령부였으나 1966. 6. 1 퀴논에서 부대명칭을 100군수 사령부로 개정. 1966. 8. 20 십자성 부대가 나트랑으로 이동하였다.
사 령 관 :
초대 이범준 사령관에 이어 유학성, 이영일, 이창복, 김종달, 신유정 준장이 사령관을 맡아 부대를 지휘했다.
참전기간 :
1965. 9. 25 - 1973. 3. 23
참전군인 :
희 생 :
전사 213명(장교 26명, 사병 187명) 부상 439명(장교 27명, 사병 412명)
전 투 :
106,665대의 차량수송과 396,019명의 병력수송 및 233,669동의 군수등 수송작전을 치루었다. 군수업무를 수행하면서 민사 심리전으로 베트공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환자 진료와 구호품을 전달하여, 전쟁의 적은 있어도 인류의 적은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평소에 십자성 사령부를 위협하던 지역내 혼톰산 일대에 1969. 3.1~ 3.11일간에 걸쳐 십자성 3호 작전(일명 올개미 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116공병대대, 237수송대대, 경비중대로서 적 사살 : 4명, 포로:1명, 용의자:6명, 소화기:5정, 문서:8점, 취사기구등 150여점을 노획했다.
대민사업 :
사찰, 교회, 교량, 유치원 등을 설치해 주고 농사짓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어 한국의 혼을 심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한국군이 빛나는 전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적기 적소에 군수 지원을 원활히 수행한 지대한 공로로 평가한다. 그러므로 파월 한국군 부대의 동맥과 젖줄로 그 소임을 다해 온 십자성 부대는 어머니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비둘기부대(건설 지원단) The Construction Support Group
한국군 부대로써는 최초로 파월된 비둘기 부대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의료진과 건설 공병으로 구성된 평화의 사도 전사부대이다.
건설 지원단은 국방부 명령(육)제2호에 의거 서울에서 장교 16명, 사병8명으로
파월 편성을 위한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였으며
(초대단장 조문환 준장) 예하 부대로서 육군 제127공병대대 제1이동 경비대대,
제8이송중대, 해병 제1독립 공병 중대를 핵심으로 부대편성을 하였다.
1965년 2월5일 보병 제6사단 지역인 경기도 현리에서 국방부 장관 임석하에
주월한국군 군사 원조단 결단식을 갖게 되었으며,
2월13일 파월 제1진으로 선발대가 출발하여 2월 24일에 월남 사이공 도착하고,
3월 16일에는 전부대가 숙영지 도착과 동시에 불명확한 적정과 지형조건하에
자체 능력으로 경계 및 수색활동을 전개하면서
도로 및 교량보수에 착수 하였으며, 파월이래 처음으로 베트콩의 기습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파월 초창기의 여려운 환경속에서 건설 지원단은
도로 신설공사를 비롯하여 교량,학교, 진료소 공사와 태권도 지도 및 심리전 활동등
한국군의 개척자로써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다.
놀이터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공부할 교실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아담한 교실을 지어 주었다.
전쟁의 초연 속에 맥풀린 어린 동심에 꿈을 심어 주었고
이곳 '디안'의 면모는 비둘기들이 월남에 날아온 이후 면목이 일신되었다.
비좁은 시골 길이 대로로 바뀌어 훤히 트이고 먼지 투성이 도로가 다듬어지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졌다.
비둘기부대의 노고에 따뜻한 월남 사람들의 인정어린 보답이 뒤따랐다.
비둘기부대 병영 앞에 '디안'의 마을 사람들이 정장한 수녀들을 앞세우고
정문 가까이 다가오는 시위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둘기부대 장병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선의의 시위였던 것이다.
또한 펀펀한 황무지에서 소를 모는 목녀가 그들 허리에 찬 소중한 물통을
한국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는 광경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름 아닌
인정의 교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깜은 꼬', 깜은 비둘기 '비둘기 고마워요'라는 이 월남말은
한국의 장병들에게 익숙하게 되었고,
월남인들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감사의 표현이 되었다.
비둘기의 주변에도 평화로운 풍경만이 전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쳐 '베트콩'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철저한
경비태세로 전투능력을 강화하고 부대 둘레에 철조망과 지뢰지대를 구축하여
5중방위선을 펴고 요새화된 자체경비로 장병들은 안전도를 높혀가고 있었다.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The 2nd Marine Brigade
1965년 6월28일 국방부 지령 8호에 의하여 해병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해병 제2여단을 편성하였으며 초대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이 임명되었다.
65년 9월20일 경북 포항에 위치한 해병기지에서 제 2여단 결단식을 거행되고,
65년 10월9일 파월 전투부대로써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65년 12월16일 투아호아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1966년 8월17일에는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
67년 12월22일에는 호아안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여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병 제2여단은 한국군 최초 전투부대로 파월된 다음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수많은 대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중 주요작전으로는 Tuy Hoa에서 청룡작전을,
Chu Lai지역에서는 Tra Binh Dong 전투를, 그리고 Hoi An 지역에서는 괴룡작전,
승룡작전, 황룡 작전을 수행하면서 지역내에서 암약,출몰하는 적을 섬멸하여
Quang Nam 성 지역들을 평정하였다.
파 월 :
1965. 9. 20 경북 포항에서 출범, 1965. 10. 3 한국을 떠나 1965. 10. 9 캄란에 상륙. 1967. 12. 12부터는 호이안에 주둔.
사 령 관 :
이봉출 여단장의 뒤를 이어 김연상, 이동호, 이동용, 허홍 준장
참전기간 :
1965. 10. 9 - 1972. 2. 24
참전군인 :
37,340명 (장교 2,166명, 사병 35,174명)
희 생 :
전사 1,202명 (장교 42명, 사병 1,160명) 부상 2,904명 (장교 99명, 사병 2,805명)
전 투 :
151,522회 (대부대 전투 175회, 소부대 전투 151,347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으로써 귀신잡는 해병의 맹위를 베트남에서 보여 주었다.
1967년 2월14일 밤부터 15일까지 사투를 벌인 짜빈동 전투는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화중에 신화로써 한국 해병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큰 몫을 했다.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따이한로라고 불리는 다낭에서 호이안간의 도로건설과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실시하여 한월간 친선을 도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맹호부대(수도사단) The Capital Division (Tiger)
수도사단은 비둘기부대 파월에 뒤이어
1965년 6월14일과 6월26일 2차에 걸친 월남공화국 수상의 전투부대지원 요청에
의거, 65년 8월13일 제 52회 임시국회 제 11차 본회의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역사상 최초로 전투 부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4주간에 걸친 교육훈련을 마치고
1965년 10월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결단 및 환송식을 거행,
1965년10월 22일 맹호부대가 최초로 월남 퀴논에 상륙하였다.
맹호사단은 1965년 11월15일부로 미101공수여단 및 미해병 7연대로부터
1,200평방km의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고 거점을 확보하였다.
1965년 10월29일 풍손부락에서 최초로 서전을 장식한 이래
중대수색작전, 대대규모 및 연대규모의 작전을 실시하던중
1966. 3. 23 ~ 3. 26일간에 "고보이" 지역에서 1연대와 기갑 연대를 투입,
최초의 사단규모작전인 맹호5호작전을 실시하였다.
맹호 5호작전이 끝나자 10여년간 이 지역을 지배하여 오던 베트콩을 소탕하고
사단전술 책임지역을 1,400평방 킬로미터로 확장시켰다.
1966년 4월6일부터 16일간에 맹호26연대가 증파됨으로서 사단편제 부대를
유지하게 되었다. 1966년 7월7일부터 8월22일간에 푸레이크지구 미군 합동작전인
파울리비아 작전에 기갑연대 1개대대가 참전하였다.
특히 9중대는 캄보디아 국경부근인 둑코지구에서 8월 9일 야간에 증강된
월맹군 1개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6시간의 격전끝에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격퇴시켜 대승하였으며 전술적인 면에서 중대 전술기지 개념의 우수성을 입증하였다.
세계전사에 새 모습을 드러낸 한국군 고유의 중대 전술기지 운용개념을 확고히 입증한
둑코전투 승리는 월남전의 기적으로써 한국군의 용맹성을 세계만방에 떨쳤다.
월남전에 주둔하고 있는 자유우방의 각나라 군부대 전숫전략 전문가와 지휘관들이
한국군 부대를 직접 방문하여 중대단위 전술기지 운용과 대민사업 활동사항 등을
답습해 가서 교훈을 삼아「무서운 한국군」이란 대명사가 되었고
밀림(정글)의 왕자로서 맹호의 위용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월남 중동부 해안 Qui Nhon 에 위치한 수도사단은 한국군 전투부대의 핵심부대로서
이곳에 침투하고 있는 월맹군 제 18연대를 중심으로한 지방 VC부대들을 섬멸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간 많은 작전중 둑코(Duc Co) 전투, 맹호 6 호 작전,
오작교 작전, 맹호 12 호 작전, 혜산진 9호 작전, 비호 23호 작전, 창군기념작전,
월계작전, An Khe Pass 작전등은 맹호 부대가 남긴 혁혁한 작전으로
상승 한국군의 기백을 널리 과시한 것이다.
파 월 :
1965. 10.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월남 퀴논에 상륙
참전기간 :
1965. 10. 22 - 1973. 3. 7
참전군인 :
114,902명 (장교 7,652명, 사병 107,340명)
희 생 :
전사 2,111명 (장교 186명, 사병 1,925명) 부상 4,474명(장교 246명, 사병 4,228명) 전 투 : 175,107회 (대부대 전투 521회,소부대전투 14,586회)
대민사업 :
퀴논 지역에 문화센터, 학교건물, 공원 팔각정을 건축하는 등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벌였으며, 1972. 4. 18부터 5. 15까지 약 한달동안 파월 한국군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안케패스전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전사 1,328명 (장교 78명, 사병 1,250명) 부상 2,410명 (장교 160명, 사병 2,250명)
전 투 :
211, 714회 (대부대 전투 478회, 소부대 전투 211,236회) 1967. 1. 29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 작전을 비롯하여, 1967. 3. 8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를 개통한 오작교 작전과 1967. 7. 9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남북을 관통하는 국도 1번도로 개통은 이제까지 월남군과 연합군이 공격기도를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구역이었으나 1967. 3. 8부터 맹호부대와 백마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자유월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완전개통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낼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대민사업 :
대민농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백구부대(해군 수송전대)-바다의 제왕 The Naval Transport Group
주월 한국군 파월초기부터 해상수송 임무를 맡은 해군의 활약은
지상군들의 눈부신 전과를 올리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사이공에서 다낭까지 800마일 해상항로를 따라 탄약과 중장비 등의 해상수송임무와
의료및 대민지원사업 및 민사심리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1965년 3월4일 한국함대로부터 LST 1척 812함이 파월되어
비둘기 부대에 편입된 후 해상수송임무를 개시하였다.
1966년 3월15일 LST 2척,LSM 2척을 증파하면서
해군 수송전대 백구부대로 개칭하고, 비둘기부대에서 배속 해제됨과 동시에
주월한국군 사령부 직할대로 승격되어 해상 수송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1969년 8월29일 월남 해군본부로부터 쿠롱(CUULONG)기지로 이동하였다.
은마부대(공군 지원단)-하늘의 보라매 The Aerial support Group
1967년 7월 1일 탄손누트 공항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은마부대는 4대의 C54기를 주축으로 월남전에서
공중수송의 지원활동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결단식를 가졌다.
창설경위 : 주월한국군사령부 공군지원단은
자유세계 안전과 보호를 위한 자유우방군의 일원으로
월남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주월한국군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1966년 6월1일 야전사령부에 전술 항공지원대를 설치하여 수행하던
전술 항공지원 업무와 주월한국군 사령부에서 담당하던 항공수송 지원업무를
1967년 7월1일 C-46 미 항공기 파월을 계기로 보다 효율적인 작전지원과
부대운영을 위하여 분산되어있는 모든 기능을 통합운영코져 공군지원단이 창설되었다.
이동외과병원 Medical support
한국 육군 제1이동외과병원은
'사이공'에서 멀지않은 해안 가까운 '봉타우'라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군으로써는 최초로 월남에 온 이 인술부대는
그동안 온갖 정성과 기술을 발휘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
전란속에서 시달려 보건 따위를 돌볼 겨를도 없는 월남 사람들의 건강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온 이들에겐 이제 '따이한 박시'라는 호칭과 더불?br> ?봉타우'에 없어서는 아니될 일급 유지의 서열에 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