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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의 일기' 가운데 하양본당과 관련된 내용을 발췌했습니다.
1911년 4월 대구교구장으로 부임하신 드망즈 주교님은 선종하시기 몇달전인 1938년까지 교구내의 여러가지 사정을 꼼꼼히 적고 있습니다.
마침 오늘 주보에 드망즈 주교님의 이야기가 언급됐습니다. 대구교구 구석구석(초창기 대구교구는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를 관할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사목 사목활동에 진력한 드망즈 주교님의 병환은, 당시 프랑스 본국에서 치료를 받으면 나으실 수 있는 병환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드망주 주교님은 "대구는 나의 제1의 고향이다. 만약 프랑스에 돌아가 그곳에 묻힌다면 더큰 한으로 남을 것"이라며, 끝내 당신의 뜻대로 대구에서 선종하셨습니다.
하양본당과 관련된 내용이 의외로 주교님 일기에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본당 설정 이전부터 드망즈 주교님이 하양에 큰 관심을 기울이셨다는 증좌이기도 합니다.
*본당설정 이전, 즉 일기의 초기 내용 가운데 용평본당, 구룡공소, 신광공소 등 하양본당과 관련된 내용도 일부 발췌.
<드망즈 주교의 일기>
<1912년>
1월5일 금요일
경상도 지방 사목방문을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김요셉(金紋玉) 신부와 함께 영천으로 떠났고, 무세 신부와 줄리앙 신부가 10리길까지 우리와 동행했다. 쾌적한 50리 기마여행을 한 후 우리는 하양의 한 교우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상당히 멀리서부터 많은 사람의 행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후 교우들은 바깥 천막에서 조명과 연설 등을 겸한 학교 축제를 마련했다.
1월6일 토요일
나는 김 아오스딩(金承淵) 신부가 용평(龍坪)에 건축한 성당을 강복했다. 이 성당은 간소하지만 그러나 아주 어울린다. 성당 주보는 예수 성심이다. 미사 후에 강복이 있었다. 오전에는 견진자들의 찰고가 있었고, 점심식사 후에는 견진성사와 성체강복이 있었다.
1월8일 월요일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와 차가운 바람 속에 김요셉(김문옥)신부와 함께 대구로 돌아왔다. 무세 신부는 자전거를 타고 하양까지 와 있었다.
<1916년>
2월9일 수요일
9시에 대구에서 말을 타고 출발하여 하양의 한 교우 집에 잠시 들리고, 5시에 영천에 도착했다. 굉장히 추웠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마중 나온 많은 교우들은 얼어붙은 강을 세 번이나 걸어서 건너야 했다. 6시30분에 나는 회장 피정의 시작 강론을 하고, 성체강복을 했다.
2월13일 일요일
피정 종결 미사를 드리고 나서 성체강복을 했고, 39명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 오후는 휴식시간이었으나 지루했다. 왜냐하면 너무 추워서 외출할 수도 없었고, 신부의 도서실에도 볼만한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2월14일 월요일
날씨가 굉장히 추운가운데 9시에 출발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안내인을 딸려보내는 것을 잊어버렸고, 그래서 내 마부는 길을 몰라 우리는 길을 잃고 오래 우회한 후에야 자전거를 타고 다른 길로 오는 소세 신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떤 교우 집에서 술 한 잔을 마신 후, 3시에 점심을 들기 위해 지일(芝日)에 도착해서 즉시 성사집행을 시작했다.
2월16일
성요셉에게 봉헌된 지일성당을 축성하고 다음 작은 종의 간단한 축성, 14처의 설치, 견진성사, 성체강복이 있었다. 오후에는 교우들이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었다.
2월17일
하양으로 돌아와 그곳 주막에서 점심을 먹었다. 춥기는 했지만 바람이 없는 맑은 날씨에 나는 80리를 걸어 해질 무렵에 주교관에 도착했다.
<1918년>
1월15일
나는 오늘 아침에 김 아오스딩 신부를 당가 겸 교수로 임명하고 그를 취임시키기 위해 신학교에 갔다. 소세 신부가 와서 점심을 들고 내게 이달 말에 모이게 될 대구와 영천의 회장 피정에서 강론을 부탁하기에 수락했다.
<1921년>
12월5일 월요일
11시30분에 하양 행 열차를 탔다. 우리는 하양에서 점심을 들고 말을 타고 용평에 갔다.(경북 영천군 화산면 용평동. 본래는 1907년 5월 이곳에 본당이 설립됐는데 전교활동의 중심지가 못된다는 이유로 1936년에 폐지되고 영천읍으로 본당이 이전됐다. 영천천주교회 편) 30리 길에 2시간이 걸렸다.
12월6일 화요일
다두라는 이름으로 용평의 종을 강복했다. 활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첨례였다.
12월7일 수요일
추위 때문에 고생하며 55리나 되는 먼길을 왔다. 도중에 금호에서 점심을 들고 용광(Yengkoang)(위치상으로 영천군 대창면과 북안면 부근인 듯하나 이러한 지명은 없다. 다만 다음의 일기에서 드망즈 주교가 5년 전에 성당을 강복했다는 사실이 있음에서 신광(新光) 공소-1916년 일기 참조-를 지칭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12월8일 목요일, 9일 금요일
용평은 좋은 공소다. 회장이 종교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는 내가 5년 전에 강복한 성당에 올라갔다. 그곳에는 성광을 포함한 모든 제의와 축성된 그릇들이 있어서 성체강복을 드릴 수 있었다.
12월10일 토요일
한시간 반동안 산을 올라 산꼭대기와 구룡(九龍)(경북 청도군 운문면 정상동)에 도착했다. 이곳은 내가 부산 선교사였을 때, 나에게 속한 지역이었다. 회장은 여전히 그 사람이었는데 그는 22년 전 이 마을의 모든 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살아온 그 극심한 가난에서, 결코 부자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주님을 잊지 않았다. 내가 내일 강복할 작은 성당도 있고 신부를 위한 아주 알맞은 집도 있다.
12월11일 일요일 장림 제3주
아침에 성모설지전을 주보로 구룡의 성당을 강복했다. 그리고 오전에는 14처를 건립했다.
12월12일 월요일
산에서 20리 길을 다시 내려와 용수(경북 영천시 괴연동 용소곡을 용수골, 용연이라고도 했다. 영천 괴연공소) 특별한 공소 집이 마을 밖에 있어서 신자들을 모으는데 큰 불편이 있었다. 신자들은 환영회 준비를 아주 지나치다 싶게 잘 해놓았으며, 내게 하루 더 있으라고 했다. 지금도 너무 늦었고, 게다가 다음 날 하루 전체를 할애할 만큼 고해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12월13일 화요일
5시에 일어나 완행열차의 출발 한 시간 반 전에 영천역에 닿았다. 기차는 11시35분에 출발했다. 김 신부와 나는 1시30분에 대구에 도착해서 2시에 주교관으로 돌아왔다.
<1926년>
12월13일 월요일
아침에 눈이 내려 출발엔 나쁜 날씨가 될 것 같다. 다행히도 사정이 예상했던 것 보다는 낫다. 일부러 세를 낸 자동차가 나를 작은 시장으로 데리러 와서 하양 공소의 집에 3시30분에 데려다 주었다. 거기서 유 안드레아(류흥모), 이 야고버(이기수) 신부를 만났다. 이곳은 특히 예비자들로 구성된 새 공소이고, 따라서 아주 소란하다. 그러나 의욕에 차 있다. 한번에 미사가 한 대밖에 없어서 꽤 바쁘다.
12월14일
30리 말을 타고 1시 30분에 용평에 도착, 신자들이 축사와 축가로 성대한 영접을 했다.
12월15일
용평에서의 찰고는 먼저 본당들보다 나았다.
12월16일 목요일
말을 타고 10시부터 4시까지 여행하고 도중에 여관에서 점심을 들고 신광(지일)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서 벨라도(서정식) 신부가 우리를 맞았다.
<1927년>
6월28일 화요일
김 발라바(김필곤, 하양본당 초대주임) 신부의 침을 분석케 했다. 그는 며칠 전에 쇠약해져서 여기로 왔다. 침 속에는 많은 결핵균이 있었고, 곧 주사 치료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7월22일 금요일
간 밤에 김 발라바 신부가 각혈을 해서 오늘 아침에 의사가 왔다. 그러나 실제로 병이 악화된 것 같지는 않다.
<1928년>
3월10일
늑막염 때문에 보름 가량 박 병원에서 지낸 김 발라바 신부가 오늘 돌아왔다.
4월14일 토요일
김 발라바 신부가 피정을 기다리기 위해 대미의 그의 가족한테로 갔다.
<1931년>
5월21일 목요일
아침에 자동차로 하양(경북 경산시하양읍 동서2동, 이후의 기록은 1915년에 설립된 하양공소가 이때에 이르러 본당으로 승격한 사실을 가리킨다)에 가서 성 미카엘 성당을 강복하고 성체강복을 한 뒤 4시30분에 돌아왔다.
10월10일 토요일
어제는 한가한 시간을 모두 공의회 텍스트에 바쳤으므로, 오늘 10시 반에 사절(무니Mooney 교황사절)과 그의 비서(허를리 신부), 그리고 무세 신부와 나는 점심식사를 위해 자동차로 하양에 갔다. 아몽신부(하양본당 제2대 주임사제)가 신축한 성당에서 교우들이 연회를 베풀었다. 2시에 귀환길에 올랐다. 4시에 공의회 서류들을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서명했다.(무니 교황사절 주교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축제일인 9월13일 참석차 방한, 서울 행사를 마치고 사절 일행은 10월8일 목요일 5시29분 기차로 대구 도착. 역 광장 군중에 강복하고 주교관에 갔다.)
10월11일 일요일
8시에 사절은 성 요셉 성당 단체들이 쓴 인사문과 치사를 받았다. 10시에는 대성당에서 성대한 사절 환영식과, 내가 통역을 한 사절의 영어 연설, 그리고 사절의 교황강복과 성체강복이 있었다. 정오에는 모든 성직자들이 모였다. 5시 29분 사절은 역에 이르러 곧 일본을 향해 떠났다.
10월20일 화요일
무세 신부와 함께 시장을 답례 방문했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통역관이 필요없었고, 그 편이 훨씬 더 수월했다. 돌아오는 길에 몹시 피로해 있는 아몽 신부를 찾아보았다.
10월28일 수요일
아몽 신부가 충분히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떠났다.
<1932년>
5월16일 월요일
아몽 신부만이 오늘 아침에 왔고, 다른 선교사들은 모두 어제 저녁에 왔다. 주교는 신학교에서 미사를 드렸고, 8시30분에 신학교에서 연회가 있었다. 계속해서 주교는 가장 젊은 선교사들을 위시해서 모든 선교사들을 개인적으로 접견했다. 그리고 5시에는 자동차를 타고 수녀원의 시설들을 보러 갔다. (전날 12시52분 파리외방전교회 총장인 게브리앙 주교와 그를 수행하고 온 후쿠오카 주교인 브르통 주교, 당가인 상송 신부 부산진의 뷜트 신부가 대구역에 도착함에 따라 대부분 선교사들이 전날인 15일 대구에 와서 오찬을 했다)
9월19일 월요일
후쿠오카의 외제 신부가 아몽 신부의 초청으로 하양과 영천에서 지팡이로 지하 수맥을 찾아내는 기술을 시행하기 위해 오늘 정오에 도착했다. 같은 교구의 돌레(Doller) 신부가 그를 수행하고 왔다.
9월22일 목요일
하양, 공주, 영천에서 돌아온 외제, 폴리(Polly) 신부들이 아몽 신부와 함께 점심 때 맞춰 왔다가 오늘 저녁에 일본으로 다시 떠났다. 지팡이로 지하수맥을 찾아 물을 발견했다.
12월3일 토요일
아몽 신부가 그의 회장을 보내 신부가 순회 성사집행 중에 어떤 한국인 경찰로부터 학대를 받았다고 알려왔다. 무세 신부가 저녁 식사 후에 나의 명함을 가지고 경찰서장의 사택으로 찾아갔다. 서장은 즉시 그 사건을 해결하라는 전보를 띄우겠다고 약속했다.
<1933년>
5월1일 월요일
선교사들의 피정 시작됐고, 교구성직자회의의 제1주는 공동지도서 중 개두교구의 고유한 것을 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5월7일 일요일
선교사들의 피정이 끝났는데 이틀간 계속된 아몽 신부의 위기를 제외하면 잘 진행됐다.
9월16일 토요일
맥폴린 신부와 같이 아일랜드의 새 선교사들에 관해 협정을 했다. 그리고 그는 모레 중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와서 선교사들을 맞게 될 것이다. 나는 자동차로 하양에서 아몽 신부를 태우고 용평으로 갔다.
9월17일 일요일
용평에서 견진성사
9월18일 월요일
오전 10시에 유 안드레아(류흥모) 신부와 아몽 신부와 함께 신녕에서 출발. 오후에 견진성사와 신자들의 환영. 성당 앞에 있는 모든 논들이 지난 번 태풍으로 못쓰게 되었다.
9월19일 화요일
지난 밤에 또 태풍이 불어와서 온종일 계속됐다. 이 태풍이 신령성당의 강복(유흥모 신부는 신령면 매양동에 신령공소 목조건물을 건립. 천주교대구대교구 교구사연대표, 1984년 p64)을 방해했는데 나는 아침에 성 안드레아 사도를 주보로 그것을 강복했다. 자동차로 9시30분에 출발, 우산이 없어서 대성당으로 가게 했는데, 도착하자 마침 위독한 어린이에게 견진성사를 줄 수 있었다.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주교관으로 돌아왔다.
11월11일 토요일
자동차로 4시에 떠나서 하양에 도착했다. 아몽 신부와 같이 카닥스와 유 안드레아 신부가 와 있었다. 환영식, 그리고 저녁에는 강론.
11월12일 일요일
하양에서 성체강복 전에 견진성사.
11월13일 월요일
자동차로 하양에서 경주로 갔다.
12월31일 월요일
예년처럼 이 해를 마무리했다. 나병에 걸린 신부, 홍수, 정신이상이 된 선교사, 돈에 미친 한국인 신부, 첩을 둔 한국인 신부, 달아난 한국인 신부, 이것이 1934년의 시련의 전체이다. 마지막 두 달은 교구 탄생 23년 이래 미문의 사건들이었다. 그것은 한국인 교구의 설정을 목전에 두고 벌인 악마의 대공격이다. 기다려야지, 당장의 조처가 필요할지라도 부패한 육체의 자율에 협력하고 싶지 않아서 행동을 하지 않으련다. 이것은 하느님이 내게 제동을 걸려는 표시인가? 모르겠다. 무엇을 하게 될지, 아니면 결과적으로 이러한 일들의 쇄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어 그래도 전진을 해야 할지, 또 악마가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어야할 지, 막아야 할 지는 두고보자. 나는 냉담하게 또 고통스럽지만 확신을 갖고 조용히 기다리겠다. 신뢰하여라, 나는 세상을 이겼다.
<1937년>
4월23일 금요일
어제 아침에 보드뱅 신부와 함께 떠났던 로베르 신부가 그와 함께 오늘 저역에 돌아왔다. 로베르 신부는 도중에 하양을 보고, 용평에서 어제 정오에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영천과 경주를 들리고 송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하룻밤을 묵고 오늘 경주로 돌아왔다가 6시 조금 전에 돌아왔다.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신부로 4월17일 대구에 도착, 선교사 피정 참석차. 로베르 신부는 4월26일 서울로 떠남)
9월28일 화요일
4시에 자동차로 하양행.
9월29일 수요일
하양에서 견진성사를 주고 파이에 신부와 함께 저녁 때 대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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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70여년전의 하양과 관련된 주교님의 행적으로 하양본당을 조금이나마 알수 있는 정말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80여리를 걸어가기도 말을 타기도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한 당대의 대단한 지성과 권위를 갖춘 그들의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드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귀중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용평' 어릴적 기억이 납니다..
알퐁소국장님 멋집니다. 1912년부터 1937년까지 하양성당 관련 드망즈주교 일기 내용이 참으로 대단하네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놀라운 자료입니다. 100년 전이 눈에 보이는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알퐁소 국장님의 열정에 박수 짝짝짝!!! ~지금은 참으로 모든것들이 편리해졌는데..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