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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북면 소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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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변 수려한 경관을 따라 37번 국도를 달리다보면 도로변에 위치한 4개의 자연마을을 만날 수 있다. 옥천읍과 안내면의 중간 지점에서. 군북면 국원리를 지나면 바로 4반인 문밖골. 한 구비 더 가서 소태골이 마을뒷산을 배경으로 아늑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소태골에서 한구비 더 가야 2반인 바깥말을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 조금 더 가야 1반인 안말이다.
47세대가 국도를 따라 4개 자연마을로 분리되어 있어 어느 한곳만을 가리켜 소정리의 전체라 부르기도 어렵고 소정리 전체가구가 담긴 단 한장의 사진을 찍기도 불가능하다. 현재의 소정리는 대청댐이 생기기 이전의 아름답고 물맑던 이미지와는 크게 달라져 있다.
80년대 이전의 소정리는 그야말로 물맑고 경치좋은 금강변의 아름다운 마을 그대로였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레저붐이 요즘과 같지 않았다 해도 해마다 여름이면 맑은 강변에 위치한 소정리를 찾는 행락객들이 제법 많았다. 이때 74세대가 대청댐이 건설된 후 수치상으로 27세대가 정든 고향을 떠난 셈. 고향을 떠난 수몰민들이 많았던 만큼 수몰로 인한 직.간접적 피해가 매우컸다.
우선 마을에서 가장 좋은 농경지라 불렸던 약 60% 가량의 좋은 농지가 물에 잠겼고 농지가 물에 잠겨 옛부터 농사를 지으려면 다녀야 했던 농로가 끊겼다. 때문에 물건너 농경지를 가지고 있는 10여세대는 8천여평의 농경지로 가기 위해 농선을 타거나 한참을 돌아서 걸어가야 하는 불편이 생겼다.이러한 직접적인 불편사항이나 피해와 더불어 남은 농지가 거의 비탈밭이거나 산골짝의 다랭이논으로 남아 있어 수확량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개일수가 많아져 농작물이 냉해를 입는 것은 물론 농작물에 필요한 일조시간이 짧아진 것은 기상에 있어서의 큰 변화로 역시 간접적인 피해의 한가지이다.
수몰당시 마을에 거주하던 주민들 가운데는 아직도 풀리지 못한 경제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수몰로 인해 가옥이 침수된 경우 한해 지원되었던 국민주택 융자금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국민주택 융자금은 수몰민에 대한 특별지원금 형식으로 3백만원씩 소정리 5가구에 지원되었으나 처음부터 빌리고 싶어서 빌렸던 자금도 아닌데다 그동안 몇번씩 행해졌던 부채탕감에도 해당되지 않아 지금은 이자가 원금보다 몇배 늘어난 채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주민들은 수몰로 인해 발생한 문제임에도 모두를 주민들의 피해로만 돌리려는 것은 부당하다며 이자 탕감 등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최근들어 산비탈밭 등을 이용, 5세대가 포도재배에 참여하고 있으며 참외도 4세대가 재배하고 있다. 이곳에서 재배된 참외 등 과수는 종종 국도변 공터를 이용해 지은 노변 원두막에서 지나는 관광객들에게 산지판매 되기도 한다.
이 37번 국도가 속리산과 장계국민관광단지 등 관광지로 향하는 도로임을 착안한 주민들의 소득증대책이다. 이웃 마을인 국원리에 참외.메론 직판장이 건립되어 과수가 생산될 철이면 산지판매로 큰 소득을 올리는 것을 본 마을주민들이 적극 주장하는 것도 역시 수몰로 인한 피해를 많이 받은 지역인 소정리에도 과수직판장을 설치해 달라는 것이다. 현재 문밖골에서 3집, 안말에서 2집, 바깥말에 2집 등 모두 7세대가 이같은 도로변 과수직판에 참여하고 있는데 군에서 정식으로 직판장을 건립, 과수의 산지판매를 장려할 경우 참여가구수가 크게 늘어나리란 전망이다.
대청댐 수몰 이전 석호리에 위치해 있으면서 학생수만도 6~7백명에 달했던 군북초교는 이제 33명의 어린이가 다니는 소규모 분교로 축소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소정리를 외부에 알릴 수 있을만한 사업이 계획되고 준비되고 있다. 다름아니라 소정리가 군내에서 관광 및 전통공예의 명소로 서서히 발돋움하고 있는 것.
농어촌구조개선 10개년사업의 일환으로 신청되어 있는 관광공예단지 육성사업은 이 마을에 4년 전부터 이주해와 기반을 착실히 닦고 있는 3명의 젊은공예가들에 의해 기반이 마련되었다. 4년전 저녁무렵 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앞 대청호의 물빛이 아름다워 3명중 처음으로 이곳으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박종덕씨가 전통공예를 하고 있다면 박씨보다 조금늦게 마을에 들어온 박기호씨는 관광공예를, 그후에 이주해온 조영문씨는 ㄱ자상 등을 제작하는 기능을 갖춰 그야말로 다양한 상품이 제작되는 단지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반이 닦아졌다.
이 공예단지가 조성되면 마을주민들도 농사를 지으면서 부업으로 농외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박하진.민성기씨 부부의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과 더불어 차남으로서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박종근씨 부부, 부모께 말대꾸 한번 안하며 가정을 잘 이끌어가는 손동식씨 등이 마을에선 모범가정으로 꼽힌다.
옛부터 연일정씨의 터전으로 꼽혀왔듯 국회의장을 지낸 고 정구영씨의 묘소가 이곳에 있고, 이종완(대전 영진건설 대표)씨와 박영하(보사부 근무)씨 등이 대표적으로 꼽히는 출향인이며, 이원면에 근무하는 이문성씨도 이 마을 출신이다. 가축을 마음놓고 기를수 있도록 공동정화조를 설치하는 것은 이 마을의 주요 주민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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