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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상의 정적 충격과 정서의 미적 울림
- 최숙미의 수필세계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1. 열며
소풍가기 좋은 날 까치울역으로 가족 나들이 어떠세요. 들녘 같은 무릉도원이 큰 품으로 맞아 줄 겁니다. 꽃길 사이로 종종 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에도 반할 테고요. 이 순간이 행복이라고 환호성을 올리며 찜하실 듯해요. 하루가 꽃숲에서 유영하느라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게 갈 것입니다. 실내 식물원엔 코너마다 어르신들의 해박한 해설이 또 한몫합니다. 눈으로 훑고 지나치는 구경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시니어 일자리 창출이 아주 훌륭해 보였습니다.
-최숙미 <까치울역>에서
문학의 존재 이유가 인간과 삶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면 그 목적에 가장 근접한 것이 수필이다. 수필가가 적극적으로 인간 사회를 치유하는 주체가 될 때 인간 사회는 타락의 속도를 늦추게 되고 자정 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고, 인권이 실용성에 밀려나도록 작가는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란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무차별적인 위협이 위험 수위에 와있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작가는 나름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그 실천이 수필집 발간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작가의 현실인식과 문학적 형상화가 빛나는 수필집에 해설을 쓰게 되어 영광스럽다. 본질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통찰, 그 통찰 결과를 미적 울림으로 나타내기 위한 구조화, 그리고 그것을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시켜 표달하기 위한 수사전략적 상호작용이란 수필미학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사흘 전>을 포함한 최숙미의 수필은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녀가 미적 직관의 셔트를 누를 때면 신비로운 빛살이 굴절한다. 그녀는 참신하게 반짝이는 활어 디자이너인 동시에 수필의 조각가임에 틀림이 없다.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난 마음 밭에 “나는 신인이다”라는 자숙의 문구가 어른거린다.’라고 쓴 수필 <가뭄>에는 문학에 대한 겸허한 작가의 자세가 드러나 감동을 주고, <꽃밤의 멘쿵>은 작업남의 유혹 멘트에 거리두기를 하며 자신의 순결성을 지켜낸 사연이, <남성 스포츠 마사지>는 퇴폐업소의 폐해로부터 남편을 보호하려는 조강지처의 심리가 재밌게 드러나 있다. 종신 청지기로 의미화된 <포구나무>란 수필은 향토성을 띤 한국적 수필로서 토포필리아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의암의 당부는 내 안에서 바위처럼 단단해져 간다.’고 쓴 논개의 호국충정에 관한 수필, <의암>으로 조국애를 드러내었는가 하면, 인연과 추억 등 다양한 제재를 다루고 있어서 최숙미 수필은 접근성 또한 높다. 문장과 수사전략의 측면에서도 모범적이다. 이 수필집은 한 작가가 최고로 도달할 수 있는 사상과 정서를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수필의 맛과 품격을 격조있게 보여 준다고 하겠다.
작가 최숙미는 2010년 유네스코 선정 우수잡지 계간 <에세이문예>로 등단하여 한국문단에 나왔다. 그 후 불과 십년도 안 되는 경력에도 불구하고, 수필집 <칼 가는 남자>로 제3회 풀꽃수필문학상을 받았다. 예리한 관찰력과 문학적 형상력을 기반으로 풍경의 미세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묘사해서 페르시아 융단을 짜듯 한 편의 수필을 직조하는, 최숙미는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일 어둠을 밝히고자 등불을 들고, 때로는 횃불을 들고, 어떤 때는 수레를 밀고 언덕을 오르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들어 그녀는 좋은 작품을 출산하기 위해 한 삼 개월만 잠적할 수 있었으면 하는 그런 꿈을 꾸는 작가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자의식이 강해, 가게 일을 소홀히 해서, 재산상 손해를 끼치고, 남편에게 타박을 받기 일쑤다.
일보다 문학이 우위라고 여기는 최숙미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저산본격수필창작특임연구학교에서 본격수필론을 공부했다. 등단 이후 2011년도에는 수필문학 발전에 대한 공로와 훌륭한 작품성으로 한국에세이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한국본격수필가협회 중부지회 지회장을 맡고 있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한국크리스쳔문학가협회, 부천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에는 ‘한국수필진흥연구회’가 펴낸 <평설로 읽는 대표수필> 4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수필쓰기가 자기체험에 대한 변증법적 혹은 자기 성찰적 깨달음의 과정이라면, 그 깨달음 속에서 되찾은 한국적 정의 미학은 최숙미 수필집의 가치와 위상을 드높여 줄 것으로 기대한다.
1. 형상화의 미학적 울림
최숙미의 수필집을 읽으면, 누구나 감동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풍부한 예술성과 철학성을 함유한 수필 텍스트를 창조했다는 데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엉컹퀴>는 해석에서부터 형상화까지의 과정에서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이 잘 구축된 작품이다. 최숙미의 작품이 성공적으로 평가받는 데에는 적절한 형상화가 뒷받침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일보다 문학이 우선이라고 쓴 <말풍선문학>이란 수필에서 작가는 ‘일은 하는데 또 나를 채우고 또 나를 잠기게 하는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문학이다. 남편이 문학보다 일에 더 신경 쓰라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일보다 문학이 더 우선순위다. 문학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 생활 속에서 구상과 구성을 중시하는 것은 바로 문학이 우리 삶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오는지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엉컹퀴>는 ‘허울 좋은 부잣집 맏며느리의 시부시집살이’에 비유했기에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이다. 해석만 있고 형상화가 없으면 관념적인 글이 되고 말지만 <엉컹퀴>처럼, 해석과 형상화가 함께 어우러지기에 감동이 배가 된다. 최숙미의 작품은 모두 이런 구성적 비유 과정을 거치고 있다. 따라서 해석과 형상화의 프로세스는 이 수필집이 갖추고 있는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 하겠다.
또한 최숙미 수필은 멋과 맛 그리고 향기라는 다양한 미의식이 입체적으로 깔려 중층적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세 가지 미감은 모두 형상적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실감의 유리와 보수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연상과 상상을 확보하고, 형상적으로 미적 쾌감을 주는 그것이 진정한 문학적 감동이고 문학적 성취이기 때문이다.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을 주는 것이 예술의 기본적 기능이라 할 때, 최숙미의 수필, <까치울역>처럼 수필도 “들녘 같은 무릉도원이 큰 품으로 맞아 주어야 할 것이고, 꽃길 사이로 종종 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을 반하게 해야 하고, 이 순간이 행복이라고 환호성을 올리게 하고, 꽃숲에서 유영하느라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게 하루가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최숙미 수필은 재미라는 접근성과 예술이라는 창조성을 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인식 구도로서 문학성도, 미적 구도로서 문학성도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
까치울역은 부천 도심에서 서울 도심을 잇는 오작교 같은 역입니다. 까치가 실제로 있느냐고 물으시렵니까.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길한 손님 대접은 받고 오곤 합니다. 행복한 날, 궂은 날, 우울한 날에도 까치울역 문은 열릴 겁니다. 모시처럼 올올이 결 고은 까치울 햇살에 온몸을 맡겨 보시지요. 도심에서 스멀거리던 고충들이 쌀벌레들처럼 빠져 나갈 겁니다. 눅눅했던 삶의 헌 옷들도 뽀송뽀송 마를 테고요. 헌데엔 새살이 돋아 팔랑대는 까치같이 날 수 있을 겁니다. 까치울 바람을 실어 다시 돛을 올리시지요. 어느 쪽으로 가든 길한 손님 대접을 받을 겁니다.
지금도 바쁘신지요. 두 도시가 생기를 다 뺏어가 버리기 전에 까치울역에서 돛을 손질해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무엇보다도 이 수필에는 작가의 토포필리아적 신념과 가치가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까치울역이 내뿜는 강렬한 의미의 파동과 그 속에서 감지되는 감성적인 유혹이 행간 곳곳에 빛나기 때문이다. 문학이 담당해야 할 일은 우리의 주변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일에 바쁘다 보니 챙겨야 할 곳들을 내버려둔 채 살아왔다. 그러나 최숙미는 익숙한 것에 대한 회의를 통해 잊혀져 가는 것들과 낯선 것에 대해 가치 설정을 새롭게 모색하하고자 한다. 향토애의 정신이 빛나고 있는 수필 <까치울역>은 통념의 벽을 허무는 작업이기에, 특별히 주목을 받는다. 인간은 현실의 모든 모습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때로는 그 반대의 모습을 연출하면서 애정어린 모습을 통해 진실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면, 표제 글 <까치울역>은 특히 인간성의 모습과 인간애의 정신을 주제 지향성으로 내세우고 있는 작품으로써 작가의 삶터에 대한 인식을 잘 구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 인식이 ‘돛’을 통해 객관적 상관물로 문예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향토애에 대한 가치 있는 체험이 작품 속에 용해되어 일독의 대상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2. 현실에 대한 긍정미학
모든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그러하듯 최숙미 수필은 끊임없는 깨달음을 이루어 가고, 감춰진 사실들을 밝혀내며, 그를 수용하는 과정이다. <가시거리 안의 절규>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바람이 스치면 물결이 일렁이듯 인간도 어떤 사물을 접할 때, 물결이 일 듯 감정이 인다. 그녀의 글에는 푸른 깃발을 꽂고자 하는 저항정신이 번득인다. 여기에 자기를 묻는다는 것, 어떤 사물에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수필적 자아다. 수필은 성찰의 문학이다. 순간순간 여러 현실과 부딪히면서 바람직한 삶을 향한 '느낌'을 엮어내지 못하면, 미래도 발전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개구리>에서와 같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 자신을 반성대 위에 올려놓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니트 입은 남자의 목덜미를 그리워하는 나의 눈빛도 수필스럽지 않은지. 시월의 마지막 밤은 또 한 계절을 넘겨주는 계절의 남자가 되어 깊어갔다.’라고 쓴 <계절남자>는 숨겨진 자기 내면을 응시하는 글이라서 감동을 준다. 수필 감상의 진정한 맛은 작가의 내면 풍경을 읽어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최숙미는 누구보다도 감성이 풍부한 수필가다. 이 수필집을 읽으면, 가슴 속에 반성적 성찰이 물결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응시를 통한 깨달음이 그 자체로서 흥건한 정을 자아내게 한다. 이는 자기 감정이 최대한 억제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여과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브허리>의 마지막 두 줄은 긍정미학의 극치를 이룬다. ‘뇌는 나의 좋은 뜻을 받아들여 유전자에게 명령하겠지. 허리에 좋은 알파파를 빨리 내보내도록 말이야.’ 긍정으로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사유의 세계가 독자에게 깨달음의 교훈으로 전해져오는 수필이다. <비가 내리네>에는 인식으로 편견을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고, 그것을 ‘전환점’으로 삼아 삶을 희망으로 수놓는 작가의 마음이 곱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앞 구절에 사람이 늘 더러움에 뒹군다고 했더군요. 저는 이 말씀에서 윤동주의 ‘서시’를 떠올렸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했지요. 시인은 얼마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봤으면 이런 시구가 나왔을까요. 이에 저는 소심해졌습니다.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간구한다는 문구에 엎드려졌습니다. 저는 한 순간도 부끄러움에서 놓여날 수가 없으니 긍휼히 여겨 주십사 하는 거였지요. 그분의 긍휼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지 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습니다.
<비가 내리네>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신앙인의 고백이 담긴 글이다. 이런 작가의 사상은 반성적 성찰의 결과이며, 늘 바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염원의 기도라 하겠다.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간구한다는 문구에 엎드려졌습니다.’라는 표현은 반성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제재통찰이 들어있는 담론 부분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인간이 아름답게 보일 때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보다 더 아픈 다른 누구를 더 걱정할 때다. 최숙미는 일상의 모든 사실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관심을 표명하는 작가다. 그녀는 어떠한 경우이든 작가로서 방관자로 남기를 거부한다. 무관심하고, 외면함으로써 홀가분하기를 소망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비가 내리네>라는 수필은 그녀가 남달리 정이 많은 사람임을 증명해준다고 하겠다.
한 남자가 멈춰 버린 공장을 끌어안고 울고 있단다. 얼마 전엔 암도 앓았다고. 마음은 어느덧 그 남자가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다다른다.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우면 혼자서 울까. 저 고통의 백지장을 함께 들어줄 누군가는 없는 것일까. 그 남자의 울음이 내 남자의 것인 것 같고, 내 아들의 것인 것 같고 내 아버지의 것인 것 같아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 아는 체 할 수 없는 구경꾼인 내가 아무 짓도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희망은 어머니 같이 살갑다. 비록 현실이 절망적일지라도 누구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좌우 어디서든 촘촘히 박혀 대기하고 있는 희망을 살가운 내 어머니를 부르듯 불러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 <오늘만>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보다 더 큰 절망을 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유독 크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작가는 생각을 바꾸는 인식의 전환으로 애써 지난 과거를 합리화한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현실의 처지나 입장을 자기의 것과 함께 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기운도 움트지 않는다. 오직 을씨년스럽고 황량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본래의 자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긍정, ‘여기와 현재’를 사랑한다면, 무거운 짐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는 수필의 교훈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비록 현실이 절망적일지라도 누구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좌우 어디서든 촘촘히 박혀 대기하고 있는 희망을 살가운 내 어머니를 부르듯 불러보아야 하지 않을까.’에서 우리는 최숙미의 문학적 기량을 감지할 수 있다.
3. 화룡점정의 마무리 기법
최숙미는 누구보다도 폭발적인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중부권 베스트 작가 중의 한 명이다. 본격수필을 공부해서인지 그의 글은 재치와 유머가 빛난다. 한 편의 수필을 쓸 때마다 산문가적 감수성의 섬세한 공명에도 주의를 기울인 탓일 것이다. 견고한 문학적 수사 장치와 비유를 동반하면서 비판의 ‘거침’을 ‘풍자’와 ‘해학’으로 버무려 ‘순화’시키는 솜씨는 최숙미의 문학적 저력을 확인하게 해준다. 수필 쓰기의 알파와 오메가는 마지막 문장 쓰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마무리를 잘 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학의 멋과 묘미는 치환에 있다. 최숙미 수필의 쾌미는 수필을 ‘종결의 문학’으로 각인시키는 데 있다. 최숙미 수필은 결말부에 승부를 거는 화룡점정의 기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문학의 본질이 ‘이것’을 ‘저것’으로 변환하여 생성시키는 데 있다는 것과 한국인의 사유구조가 귀납적이라는 것을 최숙미 작가가 잘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남양주 두물머리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몽돌들이 늘려 있다. 그냥 몽돌인 채로는 아니다. 채색된 몽돌들이 방글거린다. 그림도구가 준비돼 있어서 관광객들이 나름으로 채색을 하고 글씨를 쓴다. 길가에 즐비한 몽돌들은 채송화가 핀 듯하다. 오색의 몽돌들이 그곳을 다녀간 많은 이들의 얘깃거리를 들려준다. 쪼그리고 앉아 찬찬히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연인들의 고백이 실린 몽돌에선 사과 꽃향기가 나는 듯하다. 나도 몽돌에 몇 글자를 썼다. ‘순간마다 행복 하세요’ 누군가는 내 몽돌에 미소 지으며 그 순간을 행복해하지 않을까.
이 수필 <남자와 돌멩이> 역시 재미가 있다. 머리도 즐겁게 하고, 가슴도 즐겁게 해준다. 이 수필을 읽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몽테뉴의 말이었다. ‘나는 단지 재미를 보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수필을 읽는 목적은 다양하다. 그러나 한 가지 독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 읽는 수필이 재미있었으면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 독서를 해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재미가 있어야 금상 첨화다. 수필 <남자와 돌멩이>는 어느 한 주취자의 손에 들린 돌멩이를 통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주폭’에 경각심을 갖게 하는 수필이다. 훌륭한 수필가는 구경꾼이요, 방랑자라 한 것처럼, 그녀는 멋진 구경꾼의 위치에서 세상을 탐색한다. 세월의 비평 속에서도 남을 작품을 쓰기 위해 일상적 사건을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시키는 데 열중한다. 술 취한 사람의 손에 들린 돌멩이를 재밌게 풀어내어 문학의 쾌락성을 충족시키고 있다. 이처럼 최숙미 수필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을 허심탄회하게 풀어갈 수 있는 여유 위에 쾌락성을 더하고 있기에 독자를 끌어당긴다.
몇 년 전 TV프로 중에 노인들이 퀴즈를 맞히는 장면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우리 사이를 뭐라고 하지” 했더니 “웬수”라고 답했다. 정답이 아니었던지 할아버지가 네 글자라며 힌트를 줬다. 할머니는 너무도 명쾌하게 “평생 웬수”라고 답해서 모두를 폭소케 했다. 할아버지가 요구한 답은 천생연분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삶이 어떠했는지가 확연히 드러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인생에 천생연분과 ‘평생 웬수’는 동의어쯤 되었던 걸까. 할머니가 평생 웬수라고 답하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라 해야 할까. 부부싸움도 엄포도 통하지 않았기에 체념에서 나오는 웃음인지도 모를 일이다. 가부장적인 사고에 길들여져 살아온 우리 할머니들의 인생에 여자는 짧고 아내는 오죽이나 길었을까. 할아버지들의 남자이고 싶은 욕망이 할머니들에겐 없을 것이라 여겼을까. ‘평생 웬수’가 천생연분으로 치유되지 못한 노부부의 결단이 ‘평생 웬수’인 채로 황혼이혼을 부르는 게 아닐까.
<애기똥풀꽃>에 나오는 에피소드 한 토막 역시 수필의 맛을 흥건하게 느끼게 한다. 러. 콕 스테판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최숙미의 날카로운 인식이 빛나는 해학은 인생에 돋아나 있는 천태 만상의 부조리를 웃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숙미 수필은 단순한 생활의 반성이나 느낌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하는 인생의 본질, 시대정신 등을 관통하고 있기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필에는 세상의 모순을 깊은 통찰을 통해 바라보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제재통찰의 깊이와 철학적 본질 차원의 측면에서 어느 다른 수필들과도 차별화된다. 쉽게 말해 인생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다양한 풍경을 지성인의 눈으로 보고 적은 글이라서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정서적 감화까지 맛보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수필의 가치는 빛난다. 황혼이혼의 배경을 탐색한 화룡점정의 마무리 기법도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한 예다.
4. 선택을 통한 실존적 삶
수필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가치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가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의 추구에 있고, 그러한 삶의 추구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정신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 자세를 바로잡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작가는 이런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한 탈북자를 돕는 선교사의 이야기를 수필화한다. 선교사의 거룩한 정신과 자신의 소아적 태도의 비교를 통해 실존적 삶의 핵심인 ‘선택’이란 주제의 구체화를 이루는 작가의 솜씨가 빛난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일 것이다. 그리고 수필가는 이 같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와 명제의 해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미적 형상화 차원으로 고양되지 못하면 신변잡사에서 맴돌게 된다. 이 점은 작품을 직접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최숙미는 이런 삶의 문제를 실존의 문제와 오버랩시켜서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다. 반성적 성찰을 통해 주제의식을 공감으로 이끌어가는 면에서 인성적 통찰력이 돋보이고, 작가 자신의 태도를 실존적 삶의 수준까지 보여준 점에서는 그녀의 제재통찰이 본질 차원의 단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천 선교사의 ‘두리하나’ 선교회 주관으로 거행되는 ‘탈북동포의 날’이 10주년을 맞았을 때의 일이다. 교회 여러 단체들과 탈북에 힘을 싣는 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탈북자들과의 만남과 북한 정부를 향한 성명서가 선포되었다. 천선교사를 유태인을 구출해 낸 쉰들러 같은 선각자라고 소개했다. 쉰들러와 천 선교사의 행적이 교차되는 중에 작아지는 나를 발견했다. 교회에서 커피 한 잔을 사는 것도 탈북자를 위한 일인데 그 작은 일에도 무관심하지 않았던가. 기념예배가 끝나고 틈을 내서 탈북 소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 소녀에 대해서 아는 건 없지만 신앙 안에서 밝게 살아가는 모습이 기특하고 또 미안해서 깊이 안아 줬다. 저들과는 자주 얼굴을 대하지만 정작 친숙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그러한 관계가 서운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성큼 다가서지 못한다.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라고 해명하기에는 내가 가진 사랑이 작아서가 아닐까.
수필은 태생적으로 사색의 편린이어서 종국에는 자기 성찰과 관조에 머물게 된다. 특히 반성의 문학으로 불리어지기도 하는 수필은 자아를 찾는 작업인 것이다. 자기 성찰은 바로 자기 내면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기도 하다. 수필은 체험의 이야기이지만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사색의 기쁨을 주는 여유와 멋이 담긴 문학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 그래서 작가는 탈북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쯤 되면 왜 작가가 자신의 부끄러운 내면을 고백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반성’은 ‘감동’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속주제의 내면화에 있다. 결국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적이면서 표리부동한 사람들이 즐비한 세상에 이런 인간성을 희구하는 수필가의 마음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쓸모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우리들 정신의 심부에 쾌감을 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에서 보이는 인생관은 ‘비움’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무소유’의 정신이다. 탈북자를 도우며 비움을 위한 길을 떠나고자 다짐하는 선교사의 삶을 통해 작가가 바라는 삶의 모습은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일 것이다. 적당히 차면 비우려는 마음 자세는 욕심이 없는 사람임을 뜻한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고자 하는 작가의 자세는 윤리적 삶의 철학을 보여준다. 이 글을 읽어 가면 인생이란 스스로 선택하기에 따라 행복하고 멋지고 아름다워질 수도 있다는 그녀의 인생철학이 읽힌다.
5. 모성적 그리움의 삶터
인간이 공동체 생활에서 전통적인 생활공간을 파괴당하거나 잃어버릴 때, 고향은 실향의 개념을 갖는다. 이때 인간은 공간적이고 지정학적인 고향상실 뿐만 아니라, 근원적인 삶의 공간으로서의 자기 동질성과 존재 근원성의 파괴와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현상학자들은 유동적인 사회구조와 문화, 시간의 흐름, 인간의식과 삶의 형태 등의 변화로 인해 고향도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하이데거는 고향인 본래성의 회복이야말로 철학자의 과제이고 또 인간의 근본적인 지향목표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의 고향은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귀향의 대상으로서 본향을 지시한다. 최숙미 작가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짐이 나이테>는 달의 나이테를 세며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를 사모하며 모친의 건강을 축원하는 글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숙미 수필의 한 특성은 한마디로 내출혈의 독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가의 시선은 자신의 내면에 머문다.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물결의 무늬를 그려내는 일에 몰두한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리움'이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산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수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지짐이'와 '달'이다. 이런 문학적 장치로부터 수필은 맛을 낸다. 작가는 ‘지짐이’로부터 ‘사랑’을, ‘달’로부터 ‘그리움’을 건져낸다. 지짐이와 달은 그녀에게 ‘어머니’를 상상하게 하는 매게체다.
다음 날, 어머니와의 이별이 수선스러웠다. 지짐이가 봉지봉지 담겼다. 꼭이 다음 명절을 기약하시던 어머니가 설날에 또 오겠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낮달 같은 미소만 지으신다. 단감 잎이 다 떨어지면 가시겠다던 예감에 당신을 맞추는 것일까. 삶과의 이별연습이 잦았지만 이번엔 달라 보인다. 아무래도 단감 잎이 다 떨어지면 지짐이의 나이테를 걷을 모양이다.
이른 추석이라 단감 잎이 푸르고 무성하다. 자손들은 눈앞에 보이는 푸른 잎에 위안을 삼고 또 약은 이별을 한다. 어머니는 또 남은 날 동안 밤마다 달의 나이테를 세며 다시 한 번 더 자손들을 볼 수 있기를 갈망할 것이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어서는 안 된다고 지짐이 봉지를 흔들어대며 우기고 싶다. 썰물 같은 이별에 엉거주춤한 어머니가 대문간에 섰다. 멀어지는 어머니의 손짓이 멈출 줄을 모른다. 생이별 같은 통증에 어머니의 손짓마저 놓치고 말았다. 지짐이 봉지를 끌어안으며 ‘제발’이라고 염원을 쏟았다. 시큰한 콧등 사이로 어머니의 오동 꽃내가 나는듯하다.
<지짐이 나이테>는 사색적인 수필로서 자기 성찰이 그리움이란 그림자 형상과 만나 수필의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애정을 근간으로 한다. 작가는 마음이 우울하고 의지가 약해질 때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토로한다. 어머니의 화신으로 나타나는 ‘지짐이’는 가슴이 녹도록 물컹거리는 그리움을 전해준다.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연세가 들어 몸이 아픈 어머니를 보며, 달의 나이테를 모성으로 의미화하고, 잊으려 하면 나타나는 ‘지짐이’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묘사하는 대목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오동꽃내로 연결하여 마무리한 수필의 기법에 박수를 보낸다. 작가는 탄탄한 필력으로 ‘달’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자손들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오동꽃내라는 시각과 후각적 이미지로 그려보게 만든다.
도시 공원 한편에 자라는 청보리를 본 날 꿈을 꿨다. 허리가 허물어진 아버지를 업었다. 아버지 허리는 비에 젖어 퇴비가 될 즈음의 보릿단 같았다. 아버지를 내려놨는데도 여전히 내 허리를 감고 있는 듯 묵직했다. 횡격막을 뚫을 듯 울컥거리던 울음이 아버지의 허물어진 허리춤으로 흘려드는 것 같았다. 잠이 깼는데도 흐느낌이 남았다. 해몽이 어떨지는 몰라도 아버지와 내가 터놓지 못했던 해묵은 사랑이 터져 흐르는 것이라 여긴다. 이제는 청보리 피는 냄새가 나를 괴롭힐 것 같지는 않다.
인생이란 가변적 공간이다. 삶이란 중심에 서면, 그 일상은 때로 우리를 흔들리게 하고, 때로 절망하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허리가 허물어진 아버지의 꿈을 꾸고 속으로 하염없이 울고 있다. ‘아버지 허리는 비에 젖어 퇴비갈 될 즈음의 보릿단 같았다’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는 최숙미의 형상화 능력을 보여준다. '꿈'는 곧 그리움의 흔적이다. 이 수필의 성공 여부는 충분한 진술로 ‘지청구’가 아버지의 눈물이고, ‘청보리’가 아버지의 화신임을 증명하는 데 달려 있다. 이런 성실한 노력이 독자와의 공감대를 이끄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제목이 ‘청보리 피는 냄새’가 되었다. 작가는 서두에서부터 아버지를 잃은 자외선과 같은 섬세한 자식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방향 감각을 잃고 서 있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진솔하고, 자유분방하게 그려내고픈 욕구가 이 글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삼베 적삼에서 피던 청보리 피는 냄새를 나의 헤픈 사랑에서 맡았으면 좋겠다.’ 는 마지막 진술은 공감 확인을 위한 보증수표다.
6. 생의와 생취의 상쾌감
수필의 여러 특성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관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생활의 편익을 위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글이 추구하는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글이 아니며, 사실을 설명하거나 논리를 추구하는 학문적인 글이 아니라, 관조적 자세로 자아와 사물을 통찰하여 문학적 기능을 다하는 글이다. 이 수필집에서 가장 강하게 어필하는 부분은 ‘관조’를 통한 대상의 새로운 의미화다.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에 불과한 생활 소재이지만 이것이 한 편의 감동적 수필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삶에 대한 사랑과 예리한 관찰력의 결과로 보인다. 삶의 진정성과 건강성을 가지고 사람과의 접촉에서 각성을 이루는 그의 진지한 생활관은 본격수필을 순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건강한 정신으로부터 나온 수필의 주제의식은 생취의 쾌감을 준다.
우리가 문학을 가까이 접하는 이유를 찾으라면, 먼저 구원성을 들 수 있다. 수필을 씀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게 되고, 작가를 구원한 작품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의 품으로 달려간다. 피로에 지친 독자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어, 장르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수필은 딱 안성맞춤이다. 작가는 사흘 전의 의미를 캐며,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천착한다. 이 수필의 가장 큰 수확은 사흘 전의 의미를 자기만의 개성적 인식으로 비유하는 부분이다. 이런 문학적 수필이 가진 그 가공할 만한 힘 때문에 독자들은 두서너 페이지에 이르는 진실을 생명으로 하는 수필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말 그대로 살아 영동하는 운치에 감동한다.
인생의 내리막길이 보이기 사흘 전은 객기 한 번 부려 볼만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사흘 전이 흠칫 놀라려나. 희망은 사흘 전보다 한 발 앞섰으니 손 한번 뻗쳐 볼만도 하지 않을까. 어릴 적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아카시아 잎사귀를 뜯어내듯 꿈의 잎사귀를 잡고 가위 바위 보를 하는 중이다. 간절해서일까. 꿈을 입 밖으로 흘릴 수가 없다. 오아시스가 나타날까. 쓴 우물이 있을까. 침노만을 기다리는 사흘 전은 내 인생의 또 다른 다림줄이 되었다. 불안이 기대를 흔들어대는 바람에 숨 고르기가 쉽지는 않다. 과한 욕망이 헛기침을 해댈 때는 스스로 부끄러워도 한다. 온전한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후회는 않으리라. 사흘 전의 치열함을 꿈꾸었다는 것만으로 행복이라 여겨도 족하리. 그 때쯤엔 사흘 전의 도도함에 기꺼이 수긍도 하리라.
최숙미 수필의 가치인 미학성은 깨달음을 의미화하는 그의 수법에서 나온다. 드킨시의 말대로 훌륭한 문학 작품은 작가 자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하고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녀는 우선 자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수필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송두리 채 던지고자 하는 마음 비우기요, 삶의 겸허요, 진실한 삶의 접근법이다. 필자는 우선 그런 자세와 의지를 높게 평가한다. 내재된 주제의식을 제재를 통해 겨냥하기 위해, 최숙미는 ‘입상진의’의 시적 기법을 구사했다. 입상진의란 말로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동양의 전통적 시학이다. 평소 예의 관찰하는 습관을 기르는 일이 수필 창작에 있어 기본인데, 최숙미는 예술가적 자세로 새로운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제재와 쉽게 동화되어 물아일체를 이루고 거기서 한 편의 수필을 형상화시켜 독특한 미적 울림을 이끌어 내는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 근원은 다음의 진술, “과한 욕망이 헛기침을 해댈 때는 스스로 부끄러워도 한다. 온전한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후회는 않으리라.”에서 알 수 있다. 과한 욕망에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부족하나마 결실을 받아들려 껴안으려는 휴머니즘적 삶의 진정성에서 우리는 이 수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6. 닫으며
최숙미는 등단 10년 미만에 <칼 가는 남자>에 이어 두 번째 수필집을 상재했다. 다작 속에 수작이 나온다는 진리를 믿고 따랐음을 보여준다. 수필은 체험의 체계적인 변형과 보수에 의해 완성된다. 수필가에게 객관적으로 제시된 사물에 작가가 주관적으로 반응한 정신이 부가되어야 한다. 사실의 기록이어서는 안 된다. 평자는 최숙미의 두 번째 수필집에서 자신의 세계관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골라 긍정적인 측면에서 문학으로서의 작품적 가치를 조명해 보았다. 서평을 쓰면서 행복했다. 수필적 삶의 미학 속에 예리한 미적 내공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쓴 작품을 드높이 추겨 세우지 못할 때면, 평자의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이럴 때 수필을 비평한다는 것은 차라리 고통이다. 그것은 아득한 공중에서 외줄 타기다. 시퍼런 칼날 위에서 작두를 타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행히 이번에는 좋은 작품들만 읽다보니, 고통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산다는 것은 표현하는 일이다. 돈도 되지 않는 수필,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수필을 우리는 써야만 한다. 그것은 돈도 되지 않는 아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아이를 낳은 임산부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수필은 자기가 낳은 아이와 같은 자신의 분신이다. 분신이므로 소중한 것이다. 수필을 쓴다는 것은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과 같다. 좋은 아이를 낳으려고 작가는 태교도 하고, 갓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모유를 먹일 것인가 우유를 먹일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한 것 같다. 그래서이지 싶다. 최숙미의 수필들은 하나같이 순도 높은 삶의 진실을 들려주고 있다. 수필 쓰기는 창작이면서 동시에 수필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따라서 최숙미 수필집 <까치울역입니다>는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을 실증해 보인 흔치 않는 본격수필의 전범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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