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해운대성당 60년사(史)를 쓰다
해운대 최초로 설립된 유아교육기관 '해성유치원'
해운대 지역에서 처음으로 미사가 봉헌된 것은 언제일까?
1959년 11월 8일 중동 1394번지에 위치한 어촌 바닷가에 있던 목조건물 2층 호수다방에서 정수길(요셉) 신부의 집전으로 이루어졌다.
이듬해 공소 건물을 확보하고 1963년 설립, 부산교구 소속 18번째 본당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해운대성당은 1959년 수영 성당(현 광안성당)에서 분가하여 그동안 예정출 가브리엘 신부(해초33회) 외 적지 않은 수의 사제와 수도자를 배출한 것은 물론 우동성당, 좌동성당, 성가정성당, 달맞이 성당을 분가시킨 명실상부한 해운대 지역 복음 선교의 중심이다.
해운대성당은 7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기쁨의 해 ‘안식년’이 일곱 번이 거듭된 후 50주년이 되는 해 ‘희년’을 맞이하고 10년이 지난 올해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운대성당의 초대 김유재(그레고리오) 신부는 재임하면서 성전 완공과 본당의 정초를 닦고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초기 교회의 온갖 여려움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에 주력하여 교세 확장과 초기 교회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병들었으나 병원에 가지 못하는 형편의 교우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입원시키는 등 가난하고 병든 교우들에게 세심한 사목적 배려를 하였다.
그리고 1966년 3월에 해운대 지역의 유아교육기관인 해성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유아 신앙 교육 및 전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해성유치원은 해운대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유아교육기관이었다. 초대 원감 수녀로 방베드로 수녀가 부임하였으며 당시 원아 수는 43명이었다.
한국의 천주교회 어떻게 세워졌나?
세계 천주교회의 역사가 2천 년인 데 비하여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2백 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유럽 교회가 선교사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한국 교회는 자력으로 신앙이 싹텄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할 당시 조선이 철저한 쇄국 정책을 실시하여 외부 세계의 문화가 전파될 수 없었다. 유일하게 외부 세계의 문화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은 매년 중국으로 갔던 사신 일행이었다. 북경은 우리가 서양인과 접촉하고 또한 그들을 통해 서양의 지식과 문화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 북경에서 서양 선교사와 접촉은 서양 문명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그 문화적 영향을 받게 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북경의 선교사들은 조선의 사신들에게 그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서적들을 수시로 선물함으로써 서학서가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그중에는 천주 교리에 관한 서적도 끼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천주실의>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서학서들은 남인학자들이 먼저 받아들이고 연구하였다. 그들은 정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정치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오히려 학문에 전념하던 이들이 많았다. 특히 성호 이익의 제자로서 권철신이 주도했던 신서파 남인들인 정약전, 이벽 등 당대의 수재를 들 수 있다. 이벽은 1779년부터 1783년 무렵까지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였다. 자신이 접할 수 있던 천주교 서적이 한정되었므로 진리라고 생각했던 교리 이해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의문을 풀 유일한 방법을 생각하던 차 1783년 10월 동지사 일행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부친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간 이승훈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승훈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한국 최초의 영세 입교자가 된 이승훈은 서양의 천문, 수학, 기하학 서적들과 교회 서적을 들여오게 되었다. 이승훈은 이벽을 만나 세례성사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었고 이벽(요한), 정약용(요한), 권철신(프란시스코 사베리오) 등이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천주교는 100년 동안 박해받아 가며 뿌리를 깊이 내렸다. 그 과정에서 1만 명의 천주교인들이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하였다. 결국 천주교에 허용된 신앙의 자유도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여겨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 신해박해(1791) =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윤리강상 죄인으로 처분하여 전주 남문 밖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윤지충 권상연 순교).
◇ 신유박해 (순조1년, 1801) =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며 당쟁으로 몰살된 가족의 원한을 서학금지령을 내려 남인시파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 신자들에게 박해를 가했다.
◇ 기해박해 (헌종5년, 1839) = 전국적인 박해로써 노론 시파(안동김씨)와 노론 벽파(풍양조씨) 간의 세도정치에 의한 외국 순교사와 정하상 등 100여 명 지도자급 신자들이 순교.
◇ 병오박해 (헌종12년, 1846) = 프랑스 군함이 순교한 성직자를 죽인 책임을 묻자 흉흉한 민심을 달래고자 김대건 신부와 교우들 처형.
◇ 병인박해 (고종3년, 1866) = 전국적이며 가장 피해가 큰 박해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오랫동안 계속된 병인박해는 끝을 맺었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