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 부처에 귀의한 남제
밤이 깊을수록 숙비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시름시름 앉아 있다가 대뜸 궁녀를 보고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디로 가셨느냐?"
"어머나 숙비님도 참……. 승상님께서 황제 폐하의 침궁에서 숙비님을 발견하고 혈도를 풀어 준 연후에 숙비님께서는 승상께 폐하의 행방을 알아 오라고 분부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황비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내가 그렇게 이르고도 깜빡 잊었구나."
숙비는 또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궁녀를 보고 대뜸 말했다.
"네가 가서 그 진짜배기와 가짜배기를 어서 불러 오너라. 내 긴히 할말이 있으니."
그러나 궁녀는 숙비를 힐끔 바라볼 뿐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그러자 숙비는 버럭 화를 냈다.
"들었느냐, 먹었느냐? 빨리 가지 못할까!"
"숙비님께 아룁니다. 그 두 사람은 궁내 연못에 빠져 죽었사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지 반 시진이나 지나서야 송장을 발견했사옵니다. 일각쯤 전에 황후마마께서는 사람을 시켜 송장을 건져 올리라고 영을 내리셨사옵니다."
그 말에 숙비의 얼굴빛은 삽시에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녀는 서둘러 궁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가슴이 두근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오락가락했다.
'이런 끔찍한 일이……. 폐하께서는 필시 나한테 무슨 벌을 줄 것인가 궁리하고 계실 것이다.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날에는 난 죽고 말겠지. 두 태감도 그 일을 누설할까 봐 폐하께서 자결하라고 시킨 것일 게야! 결코 나를 용서해 줄 리 없어. 조만간 나를 죽이고 말 거야……."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어댔다.
새로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했을 때 불현듯 풍경 소리가 왈강달강 울려 왔다. 그 소리에 숙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밖에 있는 궁녀에게 소리쳐 물었다.
"폐하께선 아직도 안 돌아오셨느냐?"
"숙비님께 아룁니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았사옵니다."
그녀는 한편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도무지 진정이 안 돼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보려고 궁녀를 불러들였다.
"이리 들어오너라. 나하고 좀 놀아 보자꾸나."
궁녀는 놀아 보자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하나 차제에 두 태감이 어떻게 죽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일단 방에 들어서기는 했으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숙…… 숙비님, 제발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제발……‥
숙비는 벌컥 화가 나서 매섭게 궁녀를 쏘아보면서 따져 물었다.
"평소에 내가 너를 어떻게 대해 주었느냐?"
궁녀는 나오는 말투가 벌써 상서롭지 못함을 느끼고는 방바닥에 꿇어 엎드려 애걸하기 시작했다.
"숙비님, 평소 이 미천한 것한테 베푸신 은혜는 실로 백골난망이옵니다. 하오나……."
숙비는 궁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손을 쓱 뻗쳐 궁녀의 귀를 있는 힘껏 잡아 비틀었다.
"어서 말해 봐! 내가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
귀가 떨어져 나가도록 비틀어 대니 궁녀는 숨이 꺽꺽 막힐 지경이었다. 너무 아파서 입을 딱딱 벌리는 궁녀를 내려다보면서 숙비는 싸늘하게 웃었다.
"호호호, 내 은혜에 백골난망이라니 됐다. 그런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을 수 있겠지? 그렇지? 어떠냐, 난 너하고 함께 죽으려 하는데 네 생각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궁녀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일순 귀가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그녀는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숙비님, 소인은 평소 숙비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사……."
궁녀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숙비는 쥐어뜯을 듯이 세게 한 번 귀를 비틀고는 그녀를 홱 밀쳐 버렸다. 궁녀는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그 꼴도 못 보겠는지 숙비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궁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쌀쌀맞게 웃었다. 꼭 실성한 사람 같았다.
"너는 어서 가서 다른 계집애들을 몽땅 불러 오너라!"
그리고는 그녀는 세차게 궁녀를 뒤로 밀어붙였다. 궁녀는 윽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얼마 후 궁녀들이 잠이 덜 깬 눈두덕을 연신 비비대면서 영문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와 숙비 앞에 대령했다. 숙비는 얼떨떨해 있는 궁녀들을 휙 둘러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얼마 후에는 죽고 말 것이다.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
숙비의 낯빛이 적이 심상치 않은지라 궁녀들은 무슨 날벼락이 떨어지려나 하고 잔뜩 가슴을 졸였다. 한참이나 아무도 대꾸가 없더니 이윽고 평소 아첨을 떨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궁녀 하나가 대뜸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폐하께서 숙비님을 그토록 총애하고 계시온데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아무 변고도 없을 것이니 숙비님께선 시름을 놓으십시오."
"그럴까? 그렇게 됐으면 오죽이나 좋겠느냐. 그렇담 이런 재수 없는 얘긴 그만두고…… 나한테 좋은 술이 있으니 오늘은 모두 시름을 잊어버리고 술이나 진탕 마셔 보자. 중원 땅에서 폐하한테 보내 온 술이노라. 어서 그 술을 가져 오너라!"
숙비의 궁녀가 냉큼 일어나 쪼르르 달려나갔다. 나머지 궁녀들은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저마다 속궁리를 하면서 숙비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눈치를 살펴봐도 대관절 무슨 심사로 술판을 벌이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상전이 하는 노릇을 언감생심 물어 볼 수도 없는지라 모두들 속앓이만 했다.
이윽고 술상이 차려졌다. 궁녀들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으나 감히 술잔을 들어올릴 염도 못 내고 숙비의 입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봐라, 어서 술들 마시잖고 뭐 하고 있는 게냐?"
숙비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너도 나도 천천히 술을 입에 갖다 댔다. 워낙 좋은 술이라 일단 혀끝에 닿자 향긋한 내음이 쏴하게 돌며 입에 착 감겨 왔다. 그러니 일단 한잔 마시고 나자 두 잔째부터는 술술 잘도 넘어갔다. 이내 얼큰하게 취기가 돌며 궁녀들은 그 무슨 불안감과 공포심도 없이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한 궁녀가 숙비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껏 아양을 떨어댔다.
"숙비님, 소인은 폐하께서 꼭 숙비님을 잘 대해 주시리라고 생각하옵니다. 황비 영고는 원래 폐하의 총애를 받았지만 종당에는 떠나 버리고 말았사옵니다. 귀비 치주 역시 폐하께서 그토록 아끼셨으나 결국은 죽고 말았지요. 총애가 유별한 황비님들 가운데서 지금까지 궁중에 계시는 분은 오로지 숙비님 한 분뿐이옵니다. 그러니 폐하의 은총은 자연 숙비님께서 독차지하게 될 게 아니옵니까?"
궁녀들은 다들 옳은 말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숙비는 그 궁녀를 쏘아보며 속으로 냉소를 쳤다. 자기 앞에서 발린 말들만 골라 하느라고 신경을 쓰고 있는 궁녀들이 가소롭기 그지 없었다.
술판은 이제 막 한창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쯤 되자 궁녀들은 모두 얼굴빛이 복사꽃처럼 발그스름해졌다. 궁녀들은 가슴이 갑자기 세차게 뛰고 숨결도 가빠지면서 서로를 흘끔흘끔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답답해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궁녀들은 저마다 저고리 앞자락을 움켜쥐고 마구 잡아들기 시작했다.
숙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뜻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내가 폐하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이다. 난 더는 참아 낼 수가 없어. 너희들이 평소 서로 어떤 짓들을 해 왔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남의 눈을 피해 사내들을 홀려서는 온갖 재미들을 다 보았지? 하지만 나만 재수 없게 폐하한테 들켰단 말이다. 오늘 너희들은 내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해. 그래야 난 너희들을 용서해 주겠어."
뺨이 홧홧 달아오르고 앞가슴이 툭툭 뛰어 정신없이 얼굴과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궁녀들은 그제야 숙비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희들한테 솔직히 알려 준다마는, 난 너희들이 방금 마신 술에다 미약을 타 넣었다. 사내 생각을 하게 하는 춘약(春藥) 말이다.
너희들 몸에 해롭지는 않지만, 정욕을 풀지 못하면 결코 좋지 못할 게야!"
궁녀들은 너나없이 오늘 큰 봉변을 당하게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숙비의 표독스러움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도 개중 담이 좀 큰 궁녀가 숙비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다가 대뜸 말했다.
"폐하께서 계시지도 않으신데, 저희들은 숙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정성껏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태감들을 불러 올까요?"
"그으래? 눈치 하난 빠르군. 그래 태감들은 다 어딜 간 게냐?"
숙비가 사뭇 쌀쌀하게 내쏘자 한 궁녀가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다……다들 후원에……."
"내가 또 보잘까 봐 알아서 후원에 나가 있으라 한 게야, 응? 내가 그따위 반편 같은 사내놈들을 또 보잘까 봐?"
숙비가 버럭 역정을 내자 모두들 감히 말을 못하고 굽실 머리를 조아렸다.
"내 말을 거역했다간 다 죽게 된다는 걸 명심하거라. 하나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르면 내 너그러이 용서해 주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녀들은 일제히 방바닥에 꿇어 엎드려 분부를 기다렸다.
'죽기밖에 더 하겠어. 저녁나절에 이 숙비와 두 태감 놈이 어설픈 재미를 보다가 폐하한테 발각당해 혼쭐이 났었다. 그래 두 태감놈은 그 죄가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닌가. 오늘 우리들이 이 숙비의 말을 거역해도 죽음이요, 고분고분 듣는다 해도 역시 저 숙비가 우리들 일을 다 불어 버려 한 동아리로 끌고 죽음으로 들어가려 할 테니 엎어치나 메치나 매한가지다. 그럴 거면 이왕에 재미나 보고 죽자.'
한 궁녀는 마침내 작심을 하고는 선뜻 입을 열었다.
"달갑게 분부를 따르겠사온즉, 어서 분부를 내리십시오."
그러자 숙비는 냉소를 치면서 손짓을 했다. 어서 태감을 불러들이라는 뜻이었다. 궁녀 몇이 냉큼 뛰어나가 눈에 띄는 대로 태감들을 꼬드겨서는 얼른 데리고 돌아왔다.
태감들이 들어오자 분위기는 적이 어색하기만 했다.
궁녀와 태감들은 서로 마주선 채 힐끔힐끔 곁눈질이나 할 뿐 누구 하나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평소에는 서로 하나씩 짝을 맞추어 재미를 보느라고 야단들이었으되 오늘은 숙비가 보는 데서 그 짓들을 하자니 자못 불안스러웠던 것이다.
'보아하니 저 숙비는 억울하다고 생각하여 폐하한테 보복을 하자는 것임에 틀림없어. 그러니 이 일이 폐하한테만 발각되지 않으면 만사대길이나 만의 하나 발각되는 날에는 다들 끝장이다.'
다들 멀뚱멀뚱 서서 눈만 꿈뻑거리는데 누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숙비님께서 정 원하신다면, 멋들어지게 한번 놀아 보십시다."
그 말에 모두들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고도 너나없이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는데 일순 태감 하나가 쓱 앞으로 나서며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졌다. 그는 이내 벌거숭이 알몸이 되었다. 그러자 앞을 다투어 궁녀들과 태감들이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 숙비의 침궁 침실 안에서는 몇 쌍의 태감과 궁녀들이 모두 발그레 상기 돼서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마주앉았다. 숙비는 상좌에 높직하니 올라앉아 이들을 굽어보았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추상같이 명을 내렸다.
"태감들은 듣거라. 너희들은 모두 사내라고 할 수 없는 종자들이니 별로 구경할 만한 거리도 안 된다. 그러니 네 놈들은 각자 계집 하나씩을 맡아 성심성의를 다하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멋진 구경거리를 만들어 내란 말이다. 저 계집들의 아래고 위고 죄다 물이 축축하게 배어 나오게 하란 말이야."
그리고는 숙비는 흥을 잔뜩 돋워 놓으려고 태감들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 아무리 영이 지엄하다 해도 제정신으로야 할 수 없는 짓 아닌가. 한 순배, 두 순배, 술이 돌자 태감들은 차차 술 기운이 돌아 게슴츠레하니 궁녀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일순 한 사내가 계집에게 후딱 달려들자 저마다 와락와락 계집들한테 달려들었다. 벌거숭이 남녀들은 이내 한데 어우러져 서로 애무를 하고 입을 맞추고 샅을 만지작거리며 바야흐로 사뭇 음란한 정경을 자아냈다.
숙비는 눈 한 번 깜빡 않고 이 남녀들의 정사를 흡족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혼자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폐하, 당신의 이 황궁을 좀 보소서. 이 천첩만 사내와 놀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옵니다. 심지어 태감들마저 계집이라면 오금을 못 쓰지 않사옵니까."
숙비는 쓴웃음을 짓더니 불현듯 어깨를 들까불며 간드러지게 웃어젖혔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춘정이 동해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을 쏟아 부으며 한데 얽히고설키며 돌아쳤던 태감과 궁녀들은 얼굴에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일순 서로를 마주보았다. 급기야 코에서 단내가 확확 나고 큰 바위 덩이에 짓눌린 듯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듯 갑갑하여 시원히 소리라도 질러보려 했으나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손도, 팔도, 다리도, 온몸이 뻣뻣하니 굳어지며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윽고 미약 독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진 것이었다. 그들은 혹은 부둥켜안고, 혹은 드러누운 채 숙비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숙비는 의미심장하니 이 남녀들을 쏘아보다가 싸늘히 웃으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혼자만이 그런 게 아니옵니다, 폐하! 어디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시옵소서! 폐하는 후회하고야 말 겁니다. 한평생 이 광경을 뇌리에 담아 두게 될 겁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태감과 궁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잽싸게 손을 놀리며 더한층 음탕해 보이도록 궁녀들과 태감들의 자세를 이리저리 돌려놓았다. 어느 누가 보아도 화끈 달아오르게 만들어 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녀의 이마에도 송글송글 땀방울이 내배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은지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쭉 휘둘러보더니 일순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꼭 미친년처럼 주절거렸다.
"폐하께서는 나를 죽이려 해. 그러니 너희들은 모두 내가 저승길로 갈 때 나를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나를 탓하진 말아라. 이 모든 것은 폐하가 부덕한 소치이니라."
태감과 궁녀들은 몸뚱이는 비록 뻣뻣이 굳었을지언정 정신만은 또렷하였다. 그들은 숙비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정을 봐서 용서해 달라는 뜻이 분명했다. 숙비는 궁녀와 태감들을 둘러보다가 일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나더러 용서하라구? 그럼 나는 누가 용서해 준단 말이냐?"
숙비는 일순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오락가락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나보다 더 가련한 줄은 내 익히 알고 있노라. 어쨌든 난 한때 폐하에게 은총을 받았다 할 수 있으니……. 하지만 너희들은 죄다 가짜배기들하고만 어설프게 놀아난 게 아니더냐. 그러다가 오늘날 이 꼬락서니들이 됐으니 이 얼마나 처량한 신세인가. 실로 너희들은 오명을 뒤집어쓰기에는 너무 너무 억울한 것이야."
숙비는 짐짓 침울하니 늘어놓더니 또 한바탕 미친 듯 웃어댔다.
세상일을 모르는 듯 밤은 무정하게 깊어만 갔다. 새로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황궁 안으로 은은히 울려 퍼졌다. 숙비는 문득 넋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렸다
"폐하, 천첩은 폐하한테 이 장면을 보이겠어요. 때로는 폐하의 궁중에서 사는 사람들도 모두 아주 음충한 짓을 하고 싶어한답니다. 폐하는 정녕 이걸 막아낼 수 있나요?"
밤이 깊도록 숙비는 울고 또 울었다. 그녀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자책을 하며 연신 주워섬겼다.
"너는 폐하께 아들을 낳아 줄 수도 있었어. 그러면 더는 숙비가 아니라 황후마마가 되어 이 세상에서는 더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지 누가 알아! 그래, 그럴 수도 있었어."
그녀는 짐짓 눈물을 훔치며 태감과 궁녀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또 중얼거렸다.
"오늘 밤 일은 참말 잘됐어. 내일 날이 밝으면 폐하께서 돌아오실지도 모르지. 그러면 나는 보기 싫어도 너희들을 보러라도 이곳에 오실 게 아니냐? 하지만 너희들의 이 꼬락서니들을 보시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진노하실 게야!"
숙비는 갑자기 술주전자를 집어 들더니 입에다 콸콸 들이부으면서 비칠비칠 태감과 궁녀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이 한 쌍은 영 틀렸어. 맘에 안 들어. 죽은 송장도 아닌데 이따위 자세로는 재미를 본다 할 수 없지 않아?……이 한 쌍은 참 멋지구나! 폐하께서도 보시면 아마 칭찬할 거야. 웃는 맵시 역시 일품이다. 그리고 이 한 쌍은……."
그녀는 주절주절거리더니 천천히 상좌로 올라가 앉았다. 그리고는 옷을 훌렁훌렁 벗어젖혔다. 그렇게 알몸이 된 채로 궁녀와 태감들을 게슴츠레 바라보며 다시 술주전자를 들었다. 바로 태감과 궁녀들이 마신 그 술이었다. 그녀는 주둥이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다리를 쩍 벌려 자기의 옥문에다가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옥문에서 술이 철철 흐르자 그녀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코끼리 떼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진 밖에 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제일 앞서가는 코끼리 잔등 위에 단지흥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대리의 사대 시위들은 대번에 소리를 내질렀다.
"그만두지 못할까! 어서! 폐하를 내놓아랏!"
동주 처녀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단지흥에게 외쳤다.
"저 사람들을 물러나라고 하세요. 다시 싸움이 붙으면 피차에 재미 없어요."
그러자 단지흥은 고개를 끄덕이며 똑바로 선비를 바라보았다.
"여보게 승상, 자네들한테 한 말은 모두 내 진심이노라. 그러니 자네들 넷은 급히 황궁으로 돌아가 내 아우 단지방을 잘 보필하게. 단지방은 필히 성군이 될 것인즉!"
선비가 다급히 외치려는데 라마 중이 한 발 앞으로 내달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단황님, 사나이의 의리를 지켜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시는군요. 이전에는 단황 나으리의 위인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알고 보니 실로 탄복하옵니다. 살아서 숙녀동에서 돌아오신다면 꼭 한 번 무예를 겨루어 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
말을 마치자마자 라마 중은 홱 몸을 돌려 표연히 사라져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라마 중이 가 버리자 앓던 이 하나가 빠져 버린 듯 속이 시원했다. 보살은 기분이 좋아서 우쭐대며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선비 놈아, 네 놈은 네 상전이 붙잡혀 가는데도 그냥 이 어르신과 까불어댈 거냐? 넌 네 상전도 구해 주지 않으려느냐?"
"대환희 보살, 안 그래도 오늘 황제 폐하의 엄한 영도 있으니 네 년을 필히 죽이려던 참이다. 네 년은 그렇게도 죽고 싶으냐?"
선비는 대갈일성을 내지르고는 다른 세 시위와 함께 일제히 손을 썼다. 천룡사 스님들도 그와 동시에 나섰으므로 보살네 허다한 뚱뚱보 여인들을 삽시에 제압해 버렸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노기충천하여 달려들었다.
"이 놈들! 난 네 놈들과 끝까지 해 볼 테다! 네 놈이 우리 애들을 죽였으니 내가 너희 대리국의 모든 씨를 말리지 않으면 대환희 보살이 아니야!"
"하동(河東)에 울부짖는 사자가 있다더니 하서(河西)에도 울부짖는 사자가 하나 있었군?"
선비는 한껏 비아냥거리며 보살을 노려보았다.
"먼저 네 놈 승상 놈부터 없애야겠다! 자, 재주가 있으면 피해 보아랏!"
대환희 보살은 선비 앞으로 바싹 덮쳐 들었다.
'흐흐흐…… 나한테 미인(媚人)이란 독약이 있다는 걸 모를 테지……. 너희들은 아직 그 맛을 몰라. 이 독약을 처음으로 안겨야 할 놈은 아무래도 이 선비 놈이야.'
대환희 보살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독약 가루가 담긴 봉지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찰나, 고선 장로가 소리쳤다.
"나무아미타불! 대환희 보살은 허울좋게 보살이란 이름만 썼을 뿐 보살의 마음은 갖추지 못했군. 그 독약 가루를 뿌려 사람을 죽일 작정이냐?"
대환희 보살은 피식 웃으며 코방귀를 뀌었다.
"그으래? 그렇게도 남이 고통받는 게 가슴이 아프냐? 그럼 어디 네 놈부터 먼저 쓴맛을 한번 보아 봐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독약 봉지는 고선 장로를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조심하십시오!"
선비는 고함을 지르며 중간에서 독약 봉지를 가로채려고 홱 몸을 솟구쳤다. 그 순간 곁에 서 있던 천룡사 고승이 그를 제어했다.
고선 장로는 꼼짝도 않고 그 독약 봉지가 자기한테로 날아오는 것을 똑바로 노려 보면서 장탄식을 했다.
"대환희 보살, 어찌 이리 무고한 중생을 해치려고 못된 궁리만 하는 게냐?"
고선 장로는 일순 손을 앞으로 뻗쳐 손가락을 가볍게 한번 톡 퉁겼다. 그러자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면서 독약 봉지는 도로 대환희 보살이 서 있는 쪽으로 밀려가는 것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원래 독약 봉지가 터져 고선 장로가 독약 가루를 옴팡 뒤집어쓰지는 못할 지라도 티끌만치는 그의 몸에 묻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만 돼도 고선 장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른 중들도 부득이 장로를 살려 보려고 달려들 테니 이들을 굴복시키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으로 고선 장로가 그저 손가락을 한번 통기니 독약 봉지는 엉뚱하게도 자기한테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보살은 기겁을 하며 부랴부랴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로 껑충 뛰어 몇 길 밖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그 독약 봉지는 마치 눈이 달려 있기라도 한 듯 묘하게도 그녀를 쫓아 정통으로 날아왔다. 그녀는 다급히 내공을 모아 두 손바닥을 확 펴서 내밀었다. 그러나 날아오는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되레 독약 봉지에 맞아 비칠비칠 뒤로 물러났다. 뿐
더러 바로 그 순간, 독약 봉지가 툭 터지며 삽시에 온몸에 독약 가루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눈으로 코로 독약 가루는 풀풀 날아들었다.
독약 가루가 눈에 들어가자 대환희 보살은 불에 덴 듯 눈이 따끔 따끔하여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면서 부랴부랴 품속을 더듬었다.
그러나 너무나 당황하여 순식간에 서너 봉지나 꺼냈으나 해독약 봉지는 그중에 없었다. 다급할수록 그녀는 손이 점점 굳어지고 비명소리만 각일각 높게 떠올랐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눈 장작할 새에 대환희 보살의 뚱뚱한 몸집은 빼빼 마른 장작개비처럼 변하더니 키도 점점 작아지고 급기야는 어른 허리춤에나 닿을까말까 하게 작은 난쟁이가 돼 버리지 않는가.
사람 몸뚱이가 작아지느라고 뼈다귀들이 아드득아드득 부서지는 소리가 수림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한결같이 치를 떨면서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이 끔찍한 광경에 아연실색하니 입이 딱 벌어졌다. 고선 장로 역시 이 독약 가루가 이처럼 무서운 것인 줄은 미처 몰랐던 터라 할말을 잃고 말았다.
단지흥은 코끼리 잔등 위에 앉아서 땅바닥에서 발발 기어 다니는 난쟁이 대환희 보살을 굽어보다가 힘없이 고선 장로에게 말했다.
"고선 장로님, 저 여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순간,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대환희 보살을 굽어보고 있자니 치주가 눈앞에 어른거려 그는 고개를 툭 떨군 채 외면해 버렸다. 세상만사가 죄다 암담하게만 생각되었다.
동주 처녀는 단지흥의 기색을 살피고는 언뜻 물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갑자기 대환희 보살이 불쌍해지기라도 하셨나요?"
단지흥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대환희 보살은 운남에서 그 악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저런 악인이 어찌 불쌍하겠는가. 난 단지 대환희 보살 손에 저 지경이 됐던 내 귀비 하나를 떠올리고 있노라."
단지흥은 몹시 비장해 보였다. 동주 처녀는 일순 호기심이 일어 눈을 반짝이며 그 후일담을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단지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르르주르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와 더듬어 보니 치주야말로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했고 자기도 그 어느 황비들보다 치주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는 치주야말로 자기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어야 할 여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치주였지. 그 여자는 죽었어. 너무나 작아져서 밤에 침대 위에서 가슴 설레는 그런 쾌락을 나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을 못내 애달파하다가 그만 자살하고 말았어……."
단지흥의 목소리는 적이 침통했다. 동주 처녀는 그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보아하니 이 사내는 정이 많은 사내야. 그런 사내가 아니라면 그 여인 치주가 왜 자살까지 했겠는가? 그런데 이처럼 다정다감한 사내가 영고하고는 왜 정분이 끊어졌을까? 이들 둘 사이에는 필시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처연히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대환희 보살은 참을 수 없이 혹독한 고통에 온몸이 옥죄인 채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손끝, 발끝으로 고통이 밀려 나가면서 웬지 몸이 가뿐해 짐을 느꼈다. 보살은 간신히 제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눈을 치떴다.
그 순간, 보살은 그만 눈앞의 광경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거대하게 보이고 사람들이 갑자기 키가 다섯 자는 더 자란 듯해 보였으며 까마득히 먼 곳에 괴물 같은 코끼리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실 그때껏 혼비백산하여 의식을 잃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이 차츰차츰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독약 봉지가 손바닥에 맞아 터지면서 그녀는 바로 자기가 뿌린 미약에 자기가 중독된 것이었다.
그녀는 일순 전율을 느끼며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렇게 사느니 자살하는 것이 백번 천번 나을 터였다. 그녀는 정신없이 뱅뱅 돌아치다가 언뜻 칼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와락 달려들어 칼자루를 손에 쥐었으나 애석하게도 이제는 칼 한 자루 들어올릴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바락바락 안간힘을 쓰면서 두 손으로 칼을 들어올렸지만 번번이 무릎 위까지도 올리지 못하고 떨어뜨리고 말았다.
대환희 보살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 놈들아! 날 죽여 다오! 어서 날 죽여 다오!……."
그러다가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독약 가루가 흩어져 있는 곳을 찾아서 벌벌 기어갔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널린 독약 가루를 한줌이나 와락 움켜잡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난 죽어야 해! 죽어야 해!……."
대환희 보살은 독약 가루를 주먹째 입 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더니 즉시로 땅바닥에 나뒹굴며 비명을 질러댔다. 삽시에 그녀의 몸뚱어리는 점점 더 점점 더 작아지더니 급기야는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쪼그러 들었다가 이윽고 한 덩어리의 고깃덩이로 변하고 종당에는 사람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때 운남 땅에서 내로라하던 대환희 보살은 순식간에 뼈다귀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얼빠진 사람마냥 한결같이 넋을 놓고 멍하니 서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니……. 그 광경을 굽어보고 있던 단지흥은 개탄을 금치 못했다.
"빨리 이곳을 떠나자, 세상만사 진토와 같다 했거니 이런 꼴들을 더는 보구 싶지 않다!"
단지흥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동주 처녀가 휘파람을 불자 코끼리는 다시금 천천히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선비는 크게 낙담하여 황황히 코끼리 떼 앞을 막아 나서면서 소리쳤다.
"잠깐 멈춰라!"
"승상님, 당신도 들으셨겠지만 황제 폐하 스스로 숙녀동으로 가겠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가 억지로 끌고 가는 게 아니에요."
동주 처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단지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보게 승상, 길을 비키게! 더는 다른 말 말고 제발 내 말대로 하게나!"
선비는 단지흥이 이렇게 떠나 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눈앞이 캄캄하여 부복을 하고는 간곡하게 말했다.
"폐하, 소신의 소견으로도 단지방 어른께서 즉위하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하오나 의당 절차가 필요한 것이옵니다. 지금 황궁에는 폐하께서 채 처리하시지 않은 국사가 가득하옵니다. 이런 나라 대사들을 제때 제때 처리하시지 않으면 기필코 중도이폐하게 되옵니다. 소신이 보건대 폐하께서 숙녀동 사람들한테 무슨 약속하신 일이 있으시더라도 먼저 황궁으로 돌아가 국사들을 처리하신 뒤에 가세도 늦지는 않으실 것이옵니다. 그때 가서는 우리 시위들이
직접 폐하를 모시고 숙녀동으로 가겠나이다."
선비의 말은 구구절절이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많은 국사들을 아직 매듭짓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주 처녀를 바라보았다.
"이보오, 동주. 만일 이 단지흥의 사람됨을 믿는다면 먼저 대리로 돌려보내 주게나. 열흘이나 이십 일 말미만 주면 되이. 그때 가서 내 꼭 숙녀동으로 찾아가겠어. 만일 정 믿기지 않는다면 나한테 독약을 줘. 먹은 후 열흘이나 이십 일 후에 죽는 그런 독약을!"
동주 처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또박또박 말문을 열었다.
"안 돼요! 우리가 어찌 당신을 믿겠어요? 우리 할머님께선 폐하 하나만 믿고 이 숙녀동을 떠나가셨는데 폐하는 우리 할머님에게 어찌하셨지요? 구박하다 구박하다 못해 우리 할머니 아기까지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할진대 어찌 폐하를 믿을 수 있겠나요?"
동주 처녀는 적아 단호했다. 숙녀동의 다른 처녀들도 모두 똑바로 단지흥을 노려보았다. 하나하나의 눈빛에는 불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선비는 동주 처녀를 쏘아보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뭐지요? 왜 웃는 거예요?"
동주 처녀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네 숙녀동 사람들이 너무나 우스워서 그러오. 나는 당신들이 왜 폐하에게 그렇게 막무가내로 트집을 잡는지 정말 모르겠소. 폐하께서 황비님을 구박했다고 그렇게 일심으로 떠들고 있지만…… 좋아요, 그 말대로 폐하가 황비님을 구박했다고 칩시다. 그렇담 그렇게 구박을 당하면서도 황비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몇 년간이나 계속 황궁에서 계셨겠소? 진작에 도망치시지 않고? 당신들도 황비님의 성미를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오. 그래 황비님 성미로 그렇게까지 견디셨
겠나 말이오! 칼부림이 나도 벌써 났지!"
그러자 동주 처녀는 고개를 반짝 쳐들고 쏘아붙였다.
"당신네 황제는 천하 5대 고수 중 한 분이에요. 그런데 하물며 우리 할머니께서 어찌 단황의 적수가 될 수 있어요. 일국의 승상이라는 사람이 너무 억지를 부리는군요."
"황비님께서 폐하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건 한치도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폐하가 황비님을 구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셈이오. 정박을 하려 들었다면 황제께선 진작에 손을 썼고 그럼 황비님은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지 않았겠소?"
선비는 조목조목 근거를 들이댔다. 그러자 숙녀동의 처녀들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들은 다들 속으로 곰곰이 생각을 굴렸다.
'저 사람 말에 일리가 있어……. 한데 참말 믿어도 될까? 하지만 저 선비는 대리에서 제일 총명한 사람이라고들 하니 그 언변에 따를 자가 없을 게야. 그러니 번지르르하게 말을 발라 놓으면 감쪽 같이 속아넘어간단 말이야. 저 정도 되면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둘러 붙일 수도 있겠어……. 아, 정말 저 사람 말을 믿어야 할까?'
동주 처녀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자 선비는 그녀가 필시 동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또 설복을 했다.
"아무리 명관(明官)이라도 집안 시비는 가르지 못한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내 보기엔 기실 집안 시비란 뭐 그리 가르기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소. 남자들이란 으레 밖의 일을 주관하므로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게 되고 그래서 자연 시비를 가리기 어렵게 되는 거라오. 황비님과 황제 사이에 알력이 있고 두 분이 불화하신 것은 아마 당신들이 본 게 과히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되오. 그렇지 않으면 황비님께서 왜 황궁에서 도망치셨겠소? 그러나 두 분
께서 왜 화목하지 못하셨는가, 이는 대관절 누구의 과실인가 하는 것들에 대해선 아마도 여러분들께서는 그 내막을 잘 모르시는 것 같소이다. 그 내막을 잘 모르면서 당신들이 어떻게 황제의 잘잘못을 가리겠다고 나설 수 있소? 그리고 폐하를 숙녀동에 모시고 간들 또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하물며 단황 나으리는 일국의 황제이시니 대리국에서도 당신네들이 이렇게 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게요. 그러니 당신네들이 폐하를 숙녀동으로 끌고 가는 것은 그야말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 아니고 뭐겠소?"
동주 처녀는 선비의 일장설화가 끝날 때까지 입을 꾹 닫아 붙인 채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한참 만에야 그녀는 단지흥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폐하, 저도 폐하가 한 나라의 황제이신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 명고의 일에 대해서 만큼은 우리 숙녀동 사람들한테 똑똑히 알려 주어야만 폐하를 믿을 수 있겠어요. 이십 일 후 저는 숙녀동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녀는 또박또박 말을 꺼내 놓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휙 손짓을 했다. 그러자 처녀들은 즉시로 피리를 불어 독수리들을 부르고 큰소리로 코끼리들을 몰면서 떠날 차비들을 했다. 코끼리 떼는 천천히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우지끈우지끈 나뭇가지들이 밟혀서 부러지는 소리, 어린 나무들이 끊어지는 소리가 요란스레 진동했다.
단지흥은 그 소리가 끊길 때까지 잠자코 서 있다가 이윽고 숙녀동 여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천룡사 여덟 고승, 사대 시위들과 더불어 대리로 돌아왔다.
황궁에 닿자마자 그는 사대 시위에게 천룡사 고승들을 극진히 대접하라고 분부하고는 곧장 지난 2년여간 영고가 묵었던 냉궁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헐망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냉궁은 오늘따라 더 적막하고 황량해 보였다. 사위를 둘러봐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방안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단 이틀 사이에 벌써 이 지경이 되었구나. 하긴 사람의 인생이란 따져 보면 필시 이 모양으로 짧으면서도 허무한 것 아닌가? 설사 영고와 밤낮으로 마주앉아 금실 좋게 지냈다고 해도 그런 행복한 나날 역시 인생에서는 점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울적한 마음 달랠 길 없어 그저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가만히 영고의 침대로 다가가 앉았다.
황궁은 쥐죽은듯 고요했다. 그는 조용히 묵상에 잠겨 들었다.
'역대 단씨 조상들이 삼천번뇌사(三千煩惱絲)를 깎고 천룡사에 들어가 무예를 연마하고 불학의 묘경에 심취하게 된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원래 제왕 노릇을 한다는 것도 따져 보면 눈앞에 흘러가는 뜬구름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한순간, 문득 인기척이 들리며 궁녀 하나가 들어왔다.
"폐하, 황후마마 침궁에 있는 궁녀이옵니다. 승상께서 이리로 납시셨다 하시기에……. 황후마마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단지흥은 얼핏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파이인 황후는 종래로 무슨 일로 자기를 부른 적이 없었다. 황후는 아주 얌전한 여자로 종래로 자분자분했고 그 무슨 사단을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슨 큰일이 있지 않고서야 황후가 이렇게 친히 부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급급히 황후의 침궁으로 향했다.
황후의 기색을 보니 당혹스러워하는 기미가 역력히 내비쳤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궁녀와 태감들에게 일렀다.
"폐하께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너희들은 잠시 물러가거라."
태감과 궁녀들이 다 물러가고 나자 황후는 단지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엔 얼핏 눈물이 고인 듯했다.
"폐하, 궁내에 큰 변고가 생겼사옵니다. 천첩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인을 모르겠사옵니다. 아마도 폐하께서 친히 가 보시고 처리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단지흥은 영문을 몰라 근심스러이 건너다보았다. 그러자 황후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숙비의 침궁에 가 보시면 다 아시게 될 것이옵니다."
단지흥은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숙비의 침궁으로 급히 발길을 옮겼다. 침궁 밖에서 파수를 보던 위사들은 황제를 보자 굽실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그는 그들에게 그대로 있으라 이르고 선뜻 침궁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굳어져 버렸다.
한 무리의 태감과 궁녀들이 모두 알몸으로, 그것도 한껏 음란한 자태로 쌍쌍이 부둥켜안은 채 돌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표정이며 눈빛을 보아하니 다들 죽을 임박까지도 음희에 빠져 있었음이 분명했다. 상좌에는 다름 아닌 숙비가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짐짓 비웃는 듯한, 적이 음란스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궁내에서 이렇듯 음희판을, 그것도 숨어서가 아니라 무리를 지어서 공공연히 벌였단 말인가. 일국의 법도가 땅에 떨어져도 유만부득이요, 하늘이 울고 땅이 통탄하고 천인공로할 짓거리가 아닌가. 그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자기 대에 이르러 대리 황궁이 이렇듯 문란의 극에 치닫다니, 모두 자기의 부덕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다시금 두 눈을 부릅뜨고 이 끔찍한 광경을 둘러보았다. 자기의 죄가 얼마나 크고 중한지 머리 속에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탁상 위에는 어지러이 술잔이 널려 있었다. 이들은 필시 독주를 마시고 죽었음에 틀림없었다. 이는 숙비가 시킨 짓일 터였다. 그는 음란하게 웃고 있는 숙비의 두 눈을 멍청하니 내려다보았다. 그 눈은 자기에게 분명 냉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죽음으로써 자기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기를 뼈에 사무치게 증오했
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녀와 이 궁녀, 태감들은 몰래몰래 숨어서 음희를 즐겼으며 이는 모두 황제가 부덕한 소치라는 것을…….
그는 도망치듯 비칠비칠 그곳을 빠져 나와 미친 듯이 서재로 달려갔다. 영고며, 치주며, 방금 전에 본 그 참혹한 광경이며 오만 가지 생각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숨이 턱에 닿도록 서재에 달려들어서는 허물어지듯 털버덕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알지 못할 것들이 많았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이래 줄곧 만사가 형통하고 나라일은 뜻대로 술술 풀려 나갔다. 하늘의 뜻인지 그 무슨 기상 이변도 없어 재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니
막중한 황제 자리에 앉아 있어도 언제나 마음은 편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기운이 점점 사라지더니 마음 편치 못한 일들만 겹겹이 들이닥쳤다. 맨 먼저 치주가 자결하고, 이어서 영고가 황궁을 떠나 버렸으며 오늘은 이런 일마저……. 그는 자책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모두 자기 탓이 아니겠는가. 일순 수십, 수백의 원망 서린 눈동자들이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아 그는 흡하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무엇에라도 놀란 사람마냥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멀거니 허공만 쳐다보았다.
한 순간,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황제를 떠나서 한 인간, 한 사내로서도 그의 그 짧은 생은 결코 원만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로서 그 어떤 여인도 온전히 다 차지하지 못했고 어떤 여인도 진정 어린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하진 않은 것만 같았다. 회한과 자책의 눈물이 조용히 그의 뺨을 적셨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시 한 구절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비단 짜는 틀에서 실북이 오락가락
짜 놓은 비단폭엔 원앙새 한 쌍 날으네
불쌍하구나, 늙기도 전에 머리가 세었으니
궁전의 앞뜰엔 봄 풀이 파릇파릇
꽃샘의 찬바람 이는 깊은 궁궐 속에서
그대와 마주앉아 녹의홍상 차려 입네.
단지흥은 참을 길 없이 마음이 쓰리고 아파 격하게 가슴을 쥐어 뜯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인기척이 들리며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으로 스며들었다. 단지흥은 정신마저 혼미해 지는 듯 몽롱한 눈길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뜻밖으로 라마중이 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라마 중은 대뜸 말을 꺼냈다.
"폐하, 저는 생각다 못해 되돌아왔습니다. 이곳 남방 대리까지 왔다가 폐하에게 진짜로 한 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떠난다면 설사 서역으로 돌아간다 해도 늘 유감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여 폐하와 꼭 무예를 한번 겨뤄 보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스님은 그만 돌아가십시오. 나는 지금 그 누구와도 무예를 겨룰 경황도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폐하, 무림 고수들은 자고로 생사에 괘념치 않는 법입니다. 비록 폐하께 큰 변고가 있으시더라도 이렇게 풀이 다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모든 것은 일장춘몽으로만 생각하십시오. 나는 너무나도 꿈을 많이 꾼 사람이었소."
단지흥은 여전히 아무 동요도 없이 사뭇 초연한 기색이었다.
"저는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옛날 고승이었던 구마습이 쓴 책을 말입니다. 그 고승은 자기가 무예를 연마하던 끝에 창안한 화염도에 대해 상세히 써 놓았지요. 저는 일심으로 이 화염도를 익혀 이렇게 중원에 찾아온 겁니다. 지금까지 저는 중원 종남산 전진교의 주백통이라는 사람을 내놓고는 적수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화산에서 무예를 겨룬 당신들 5대 고수 말고는……."
단지흥은 실로 탄식해 마지않았다. 보아하니 이 라마 중은 중원의 5대 고수들과 무예의 높고 낮음을 겨루기 전에는 서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스님, 나는 스님과 무예를 겨룰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당신도 보셨겠지만 대리국의 모든 것에 대해 나는 절망하고 비관합니다. 나는 그 누구와도 싸우고, 다투고, 겨루고 싶지 않습니다. 스님, 빨리 돌아가십시오."
"그렇게는 못하겠소. 이 회염도는 무림에서 오랫동안 실전되었던 것으로 나에 이르러 간신히 맥을 잇게 된 것이오. 하여 중원과 대리의 5대 고수들과 한번 무예를 겨루어 보기만 하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코끼리 진 안에서 비록 폐하께 은공을 입기는 했으나 난 꼭 폐하와 겨뤄야만 하겠소!"
"이보시오, 스님! 중원 무림에서 무예가 제일 높은 사람은 아마도 전진교 교주 왕중양일 겁니다. 그 사람은 문무를 겸비했을 뿐더러 무덕도 높은 분으로 누구도 당해 내지 못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무예를 겨루기를 원한다면 왜 왕중양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바로 눈앞에 당신 같은 고수가 있는데 하필 왕중양은 뭣 하러 찾습니까?"
단지흥은 멀거니 라마 중을 바라보더니 더는 말을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라마 중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리분별에 밝은 덕망 높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헛 보았군. 계속 이 핑계 저 핑계 들이대며 발뺌을 하는 걸 보니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라마중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곧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삽시에 손을 모로 세워 있는 힘껏 단지흥의 가슴을 내질렀다. 그것이 바로 백여 년 동안이나 무림에서 자취를 감췄던 화염도란 장법이었다. 단지흥은 대번에 동가슴을 얻어맞아 울컥 선지피를 토해 냈다. 그래도 그는 그냥 제자리에 앉은 채 라마중을 그윽이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자 라마중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 지금 3할밖에 쓰지 않았다. 내게 이만한 재간밖에 없는 줄 알고 여유를 부리는 모양이나 오산이다. 오산! 내가 당신을 죽이자면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야! 하지만 내가 너무나 쉽게 죽여 버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내가 계략을 부려 이겼는가 의심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입은 있으되 할말이 없게 되지 않겠는가.'
라마 중은 이빨을 사리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단황 나으리,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람 대접을 한다면 어서 내 요구에 응하시오. 그렇지 않고 이토록 끝까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면 난 당장에 당신을 죽여 버리겠소!"
"당신은 참말로 이상한 사람이군요. 이전에는 나 역시 당신처럼 하늘 넓고 땅 넓은 줄 모르는 인간이었소. 그때를 돌이켜보면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소. 남과 힘을 겨루고 사람 잡기나 겨루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이오? 참으로 우스운 일이요, 너무나도 할 짓이 없어서 하는 짓거리란 말입니다."
단지흥은 얼마만한 고행을 통해 이토록 철저한 깨달음에 달할 수 있었던가. 그러니 라마 중이 그것을 이해할 리 만무였다. 그는 그저 자기를 야유하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더욱 발끈 화를 냈다.
"좋다! 그럼 내 손에 한번 죽어 봐라! 할 짓이 없어서 하는 짓거린가 아닌가!"
라마 중은 또 한 장을 내갈겼다. 이 한 장은 더욱 위력이 컸다. 단지흥은 앉은걸음으로 수장이나 뒤로 밀려나고 다시금 선지피를 토해 냈다. 그런데 정작 선지피를 토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거뜬해지는 것이었다. 단지흥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 살점을 베어서 독수리에게 먹이셨다. 부처님께서 왜 자기 살점을 독수리한테 베어 주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독수리는 부처님과 달리 일생의 진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보아하니 이 라마 중도 사리를 모르는 자이니 나 역시 부처님께서 독수리 대하듯 이 중을 대해야 할 게 아니겠는가?'
단지흥은 침잠한 채 조용히 묵상하고는 길게 탄식했다.
"스님께서는 서역에서 오셨다니 구마습이라는 고승이 후에는 천하 《역경》을 집대성하셨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라마 중은 그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몰라 의아해하면서도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스님께서 보건대 구마습이란 고승이 후에 불경을 번역하신 게 옳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이전에 살인에 열중한 게 옳았다고 여기십니까?"
라마 중은 단지흥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이때에 왜 이따위 말만 늘어놓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구마습 스님은 무예가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이 대리에서도 보정제와 한번 겨루어 이긴 바 있습니다. 나 역시 내 무예로 천룡사 모든 고수들을 무릎 꿇릴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줄곧 품어 왔던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런즉, 당신의 그런 질문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소이다!"
단지흥은 정색을 하고 듣고 있더니 불현듯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웃기는 왜 웃소?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고 무엇이오?"
"당신은 불법을 모르는 중이로군요. 그러니 내가 왜 웃는지 의당 알 수 없을 테지……. 옛날의 구마습 같은 고승도 종당에는 불경을 해석하는 대사가 되지 않으셨소? 천룡사 스님들도 매일 그분이 번역한 불경을 읽고 계시오. 그분이 번역한 불경을 읽고 나서는 누구나 선행을 베풀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지요. 구마습 스님께서 천하 중생들에게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이오. 당신은 서역에서 오셨으면서도 그분의 선행은 본받지 않고 그 무슨 화염도
만 믿고 남들과 완력이나 겨루고자 하니 왜 웃음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라마 중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단지흥의 입가에 흘러내린 선지피를 보면서 딴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이 벌써 내상이라도 입은 게야? 왜 싸울 생각을 안 하느냔 말이야? 지금 이 사람을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때를 놓치게 된다?'
라마 중은 마음을 도사려 먹고는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단황, 당신이 입으로 연꽃을 토해낸다 해도 내 마음을 동요시키지 못할 것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즉시 두 손을 앞으로 쓱 뻗었다. 이 한 장이면 단지흥은 끝장이 나고야 말리라. 일순 천지를 진동하듯 요란한 소리가 두 사람을 뒤흔들더니 단지흥은 그만 그 힘에 비칠 자빠질 듯하다가 간신히 몸을 가누면서 호통을 쳤다.
"그따위 재간으로 나를 어쩔 테냐?"
간신히 몸을 추스르기는 했지만 단지흥은 또다시 선지피를 토해냈다. 라마 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옳다구나. 드디어 중상을 입은 게로군! 이자가 내력을 잃은 틈을 타서 일격에 죽여 버려야겠다! 그러면 내 손으로 천하 5대 고수 중 한 사람을 제거하게 되는 셈이다!'
라마 중은 급급히 손을 모로 세우고는 단지흥을 향하여 똑바로 내질렀다. 이번엔 단지흥은 살짝 몸을 피했다.
그때였다. 돌연 독경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더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라마 중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등뒤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백발 노승 고선 장로가 버티고 서 있었다.
고선 장로는 라마 중을 쏘아보면서 대뜸 호통을 쳤다.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으로서 이런 악행을 저지를 때에는 이미 악귀의 길에 들어선 것이나 진배없느니라. 일찍이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그 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라마 중은 붉으락푸르락하며 입을 못 뗐다. 고선 대사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듣자니 네 놈의 사부는 구마습 스님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이런 불초한 제자가 나타났을꼬?"
고선 대사가 서릿발같이 부르짖자 라마 중은 할말이 궁했는지라 고선 장로를 쏘아보면서 그저 소리만 질러댔다.
"흐흐흐, 고선 장로! 마침 잘 왔다. 네 놈과도 겨뤄 보려던 참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미 네 놈과 겨루지 않았느냐? 네 놈은 이미 졌어!"
라마 중은 코방귀를 뀌면서 냉소를 날렸다.
"내 이미 너희 그 잘난 황제에게 중상을 입혔거늘 그게 무슨 소리냐?"
고선 장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장탄식을 했다.
"불행한 일이로고! 구마습 대사께 이따위 개망나니 후예가 있다니……. 구마습 대사께서 살아 네 놈이 이따위 행실을 하고 다니는 걸 보셨다면 그 참괴감이 하늘을 찔렀겠다. 이 노옴! 네 놈은 벌써 세상만사 사리 이치에서 졌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한지고, 가련한지고!"
라마 중은 말귀를 알아들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뻐들뻐들하니 방약무인하게 외쳐댔다.
"고선 장로, 그따위 허튼소리는 그만두시오. 만일 장로가 나를 이긴다면 그따위 소리도 순순히 다 받아들이지. 하나 장로가 진다면 천룡사 무예는 죄다 거짓말이 되는 것 아니겠소?"
"가련토다, 가련토다……. 기어코 한번 겨뤄 보겠다? 할 수 없군! 정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 보게. 자네가 화염도 초수로 내 앞가슴을 세 장 갈겨 보게. 만일 내가 내상을 입으면 자네가 대리국을 이긴 것으로 치고 대리국 단씨를 이긴 것으로 치지! 어때?"
라마 중은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저 늙다리 중이 드디어 나한테 속았구나. 내가 화염도를 한 절반쯤 익혔다고 하니 참말로 믿고 있잖아! 사실 나는 이미 6, 7할쯤은 익혔어. 평소에 허풍치기 싫어하는 성미라 그렇게 말했을 뿐인걸. 이 늙다리야, 넌 오늘 영락없이 내 손에 죽었다. 그리고 너희 대리 단씨도 내 이 서역 무예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해!'
"그럼 시작해 볼까요?"
라마 중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제자리에 선 채 급히 운기하여 기를 단전(丹田)에 몰아넣고는 라마 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라마 중은 고선 장로와 두 장 거리를 두고 서서 기를 안정시키고는 침짓 별 대수롭지 않게 자세를 잡았다. 고선 장로는 이전에 구마습도 바로 이런 초수로 일양지의 육맥신검을 제압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장로는 인자한 표정으로 라마 중을 노려보았다. 고선 장로는 라마
중이 지금 비록 태연하게 처신하고는 있지만 그의 화염장이 내리떨어지는 날에는 그 위력이 대단할 것이라 생각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가 손을 쓰기만 기다렸다.
일순 라마 중은 손을 치켜 올리더니 번개같이 장화도로 고선 장로의 앞가슴을 내리갈겼다. 고선 장로는 라마가 손을 휘두르는 순간부터 이 일격이 대단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라마 중의 손은 이미 보이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단지흥도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고선 장로는 뒤로 두 걸음 비칠 물러서서 라마 중을 쏘아보더니 한참 만에야 가까스로 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화염도는 이미 6할 이상의 위력을 가졌네. 그런데 왜 감추었지?"
고선 장로는 대뜸 꾸짖었다.
"당신들 중원 사람들은 늘 남한테 말할 전 언제나 여지를 남기라고 하지 않소? 참말 그른 데가 하나도 없는 말 아니오?"
라마 중은 한껏 이죽거리더니 호기롭게 웃어댔다. 단지흥은 고선 장로가 필시 내력이 많이 상했으리라 생각하고는 냉큼 그의 앞을 막아 나섰다.
"장로님, 내가 이 중 놈의 버릇을 좀 가르쳐 주겠습니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황황히 손을 내저어 단지흥을 물리고는 라마 중을 쏘아보았다.
"이보게, 인간이란 모름지기 일단 말했으면 말한 대로 해야 하는 법, 그 말을 지켜야 도리를 다하는 것이네. 자넨 분명 자네의 장화도가 세 번 내리친 후에도 내가 죽지 않으면 대리에서 떠나겠다고 말했으렷다!"
라마 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렇소이다! 세 번이면 세 번이지요!"
라마 중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또 한 장을 휙 내갈겼다. 이번엔 고선 장로는 몸을 슬쩍 피했지만 촌분이 늦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장화도에 가슴을 맞고 말았다. 하지만 고선 장로는 한걸음 뒤로 주춤 물러섰을 뿐 첫번보다는 한층 더 굳센 기색이었다. 그러자 당황하는 것은 되레 라마 중이었다. 그는 마치 귀신 대하기라도 하듯이 멍청하니 고선 대사를 바라볼 뿐, 더는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불길해! 내 이 장화도는 서역 땅에서는 서독 구양봉 외에는 누구도 당해 내지 못했어! 구양봉이라도 감히 내 장화도 한 장을 받아 내겠다고 장담을 못하는데, 이 늙다리는 내 장화도에 두 번이나 맞고도 끄떡하지 않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마 중의 이마에는 어느덧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고 마음은 적이 불안하여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때 고선 장로가 다시 우렁우렁하게 소리를 쳤다.
"이보게, 아직 한 번 남지 않았나? 다음 한 번에 나를 꺼꾸러뜨리지 못하면 자낸 두말 말고 대리를 떠나야 하네!"
그 목소리를 듣고 라마 중은 고선 장로에게 아직도 중기(中氣)가 가득하고 내장이 아무런 손상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라마 중은 이제 무서워서 더는 손을 쓰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승은 대사님 무예에 승복합니다. 지금 당장 서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한평생 다시는 이 대리 땅을 밟지 않겠습니다."
라마 중은 간신히 말을 마치고는 급급히 일어나 그 길로 몸을 솟구쳐 밖으로 뛰쳐나가 이내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라마 중이 도망치고 나자 고선 대사는 일순 무너져 내리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입가에서 언뜻 선지피가 비치더니 이윽고 꿀렁꿀렁 피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저 단아한 눈길로 단지흥을 쳐다볼 뿐, 고선 장로는 깊이 침잠하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진중하게 숨을 몰아 쉬고 나서야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말하기 시작했다.
"다, 단황, 이전에 단씨네 자손 중에는 우리 처, 천룡사에서 부처님께 귀의한 분들이 사, 상당히 많았습니다. 빈도의 뜻을 아, 알 만합니까?"
단지흥은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제, 제왕 노릇을 한 사람들은 모, 모두 욕망이 크,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욕망이 크고야, 야심이 많아야 제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지금 빈도가 보아하니 폐하께서는 이미 모든 욕망을 버리신 것 같……. 여자에 대해서도, 돈에 대해서도, 술에 대해서도……. 이렇게 되면 폐, 폐하께선 더 이상 제왕 노릇을 할 수 어, 없을 터……."
그제야 단지흥은 고선 장로의 말 속에 숨은 뜻을 깨달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고선 대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고선 장로는 여전히 피를 흘리면서도 들릴락말락 다시금 말을 이었다.
"자고로 저, 정이란 일단 끝나면 바,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이요, 인생은 살고 나면 하, 한바탕 꿈인 법이니라. 하루하루 속세의 버, 번거로움에 시달리기보다는 조용히 고독한 등잔불 심지를 도, 돋우는 편이 나으리……."
고선 장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한 손을 뻗쳐 단지흥의 머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돌연 머리가 뜨거워지더니 삽시에 단지흥의 검은 머리칼이 분분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지흥은 정중히 머리를 조아리면서 흐느끼듯 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이 제자를 받아 주십시오. 스님의 말씀대로 법호를 일등(一燈)이라 하여 주십시오."
그가 머리를 들었을 때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앉아 있는 고선 대사의 얼굴은 산 사람과 다를 바 없었으나 다가서니 이미 원적(圓寂)한 뒤였다. 단지흥은 다시 꿇어 엎드려 머리를 연신 땅바닥에 조아렸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머리를 들고 일어나 대전 쪽을 바라보면서 입 속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는 지금부터는 더는 단황이 아니옵니다. 소승은 일등, 하나의 자그마한 등잔불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