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년도 : 2024년
제43회 수상자 : 은종일
수상 작품집 : 『스케치북 펼치다』
대표 작품 : 길을 보다
길을 보다
길을 걸으며 길을 본다. 본디 길이란 인류의 생존 역사와 그 궤를 함께하였을 것이다. 계곡의 굴에 터를 잡고서 먹을 것을 구하고, 물을 떠다 나르며 생긴 것이 길의 첫 모습이었을 것이다. 필시 이것이 인구와 물류의 증가로 소로, 중로, 대로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의식과 주거 사이를 연결하는 공간적 선형으로서의 길이다. 이제 거미줄같이 얽혀지는 도로 건설이나 운영을 위해서 복잡한 관계 법령까지 두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현재진행형 길의 진화일 터이다.
길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생긴 통로를 연상하지만, 도로라 하면 일부러 닦아 건설한 큰 규격의 길을 떠올리게 된다. 한자어의 대표적 길의 이름이 경(徑)·도(道)·노(路)이다. 『주례(周禮)』의 주석에 따르면 “경(徑)은 우마를 수용하고, 진(軫)은 대거(大車)를 수용하고, 도(途)는 승거(乘車) 한 대를 수용하고, 도(道)는 두 대를 수용하고, 노(路)는 세 대를 수용한다.”라고 하였다. 이를 참작하건대 경(徑)은 우리의 오솔길이나 소로길에, 도(道)는 그보다 좀 나은 길에, 노(路)는 가장 큰길에 해당할 것 같다.
길은 순수 우리말이다. 길 이름에는 넓은 길보다 좁은 길, 쉬운 길보다 험한 길, 질러가는 길보다 에둘러 가는 길의 이름이 많다. 우리 민족사의 일면을 보는 듯도 싶다. 마을에는 집 뒤편의 뒤안길, 질퍽질퍽한 진창길, 자갈 많은 자갈길, 좁은 골목 고샅길, 폭넓은 한길이 있다. 들에 나가면 논밭으로 이어진 들길, 논두렁 위의 논틀길, 거친 잡풀이 무성한 푸서리길,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 위의 숫눈길을 만난다. 산에는 좁고 호젓한 오솔길, 휘어진 후밋길, 낮은 산비탈의 자드락길, 인적이 없는 자욱길, 돌이 무더기로 깔린 돌더덜길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강이나 바다에도 벼랑의 위험천만한 벼룻길이 곡예를 즐기고 있다. 어디 땅에만 길이 있겠는가. 땅 밑으로 다니는 지하길, 배가 다니는 바닷길, 비행기가 다니는 하늘길이 있다.
길의 기의는 역사적이고 철학적이며 중의적이다. 길은 교통수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 안에도 길이 있다. 나의 길이 있고, 인생의 길이 있다. 길은 삶의 방법을 의미하거나 삶 그 자체다. 또 길엔 공맹지도(孔孟之道)이니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이니 하는 유불(儒佛) 사상의 실천적 규범인 도(道)라고 일컫는 길이 있다. 선비의 길, 군인의 길, 부모의 길, 스승의 길이 그것들이다. 이처럼 통행수단으로서의 길, 방도를 나타내는 길,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이다.
‘길’이란 말은 단어 자체만으로도 ‘도로’나 ‘거리’라는 말보다 대단히 문학적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는 길」에서 ‘훗날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숲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더라고’, 하면서 삶은 선택의 길이라고 읊고 있다.
‘갈래갈래 갈린 길/길이라도/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라고 했던 김소월의 「길」, ‘내가 사는 것은, 다만,/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라고 했던 윤동주의 「길」은 둘 다 식민지 현실에서 올바른 삶의 길을 탐색하고 있다. 두 「길」은 끊임없이 자신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아 성찰과 탐색의 공간으로서의 인생 그 자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처럼 개인의 길이 있는가 하면, 김소월, 윤동주의 두 「길」처럼 나라의 길이 있다. 나아가 보편적 가치를 실현해 나갈 인류의 길도 있기 마련이리라.
우리네 인생은 곧 길이요, 여정의 발길이 곧 삶이다. 우리는 삶의 길에서 길을 물으며 살아간다. 출세해서 이름을 드높일 길이거나, 득도를 위한 수도자의 길이거나, 구원을 갈구하는 고행의 길이거나, 장삼이사의 생업의 길이거나 모두가 길 위에서 길과의 만남이다.
세상에 똑같은 길은 없다. 유형의 통로는 말할 것도 없이 삶의 길도 각기 다른 저마다의 길만 있을 뿐이다. 순탄한 길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갈피를 못 잡아 헤매고, 누군가는 선택을 잘 못해서 버거워하고, 누군가는 잘 못 들어 어려움을 겪는다. 오르막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이 있고, 툭 터진 뚫린 길이 있는가 하면 막다른 길이 있다.
그렇다. 지름길이 있는가 하면 에움길이 있고, 순로가 있는가 하면 험로가 있다. 인생은 결국 방향과 속도의 문제다. 지름길 에움길에도, 순로 험로에도 각기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인생길엔 정답은 없고, 해답을 찾는 선택만 있을 뿐이리라.
인생, 해답을 찾아가는 선택과 선택의 길이려니.
수상 소감 : 은종일
시와 평론을 오가며 수필의 근력을 키우려
일본 아소산에서 가진 저희 화요산우회 1,048차 주간 산행 중에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전갈을 받았습니다. 산행팀이 저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해외 행사여서 수상의 기쁨도 둥둥 산마루를 탔습니다.
수상 소식은 문학청년의 예비작가 사십 년, 이모작 등단 작가의 이십 년 문학 사랑을 떠올렸습니다.
2005년 《한국수필》로 등단하고서 십 년 동안 창작이라고 이것저것 써서 『거리』, 『재미와 의미 사이』, 『춘화의 춘화』 세 권의 수필집을 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써서 책을 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자문자답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쓰고 또 써도 뭔가 풀리지 않는 부족함에서 헤맸던 숱한 시간이 크로스오버crossover와 하이브리드hybrid 이름을 한 장르의 통섭과 융합의 바람을 만났습니다. 시와 평론을 오가며 수필의 근력을 키우려 애썼습니다. 저의 수필 제4집 『아린』과 수상 작품집 제5집 『스케치북 펼치다』는 시와 평론 공부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아직도 창작에 대한 문학적 갈증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번 한국수필문학상 수상이 늦깎이 작가 저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고, 문학 사랑과 창작 열의의 에너지가 되겠습니다. ‘문학에 몸을 묻는다’라는 옹골찬 다짐으로 『스케치북 펼치다』를 제43회 한국수필문학상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은종일
등단
2005 월간 《한국수필》 수필 신인상
2015 계간 《창작에세이》 평론 신인상
2017 계간 《문학시대》 시 신인상
2023 계간 《문장》 평론 신인상
경력
2006–현재 대구교대 평생교육원 수필과지성 창작아카데미 원장
2007–현재 계간 《문장》 편집, 기획, 자문위원
2007–2010 달구벌수필문학회 회장
2007–2014 대구수필가협회 이사
2012-현재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부회장
2012–2014 대구광역시문인협회 부회장
2013-2014 대구광역시동부교육지원청 문화예술 100인의 멘토
2014–2016 군위문인협회 창립회장
2015–2017 대구가톨릭문인회 부회장
2018–2020 대구광역시문인협회 감사
2018–현재 (사)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2018-현재 월간 《한국수필》 편집위원
2019–현재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2022-현재 여백문학회 회장
저서
2005. 수필집 『거리』
2010. 수필집 『재미와 의미 사이』
2014. 수필집 『춘화의 춘화』
2017. 시집 『사소한 자각』
2020. 시집 『허공 도장』
2020. 수필집 『아린芽鱗』
2022. 평론집 『현대수필의 창작과 비평』
2024. 에세이집 『스케치북 펼치다』
수상
2015 한국수필작가회문학상
2016 한전전우회 대경예술상
2020 박종화문학상
2020 대구문학상
심사평
문학적 성취를 축하하며
심사위원 : 장호병 ·최원현(글) · 권남희
제43회 한국수필문학상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 중 은종일 수필집 『스케치북 펼치다』와 이경선 수필집 『시선 끝에 마주친 곡선』을 심사위원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수상작에 선정했다.
『스케치북 펼치다』는 서정의 정한이 섬세한 묘사로 살아나는 수필이다. 은종일은 시간의 흐름을 삶의 숨결로 그려내며 그 속에 숨어있는 그리움을 열어 내는 글쓰기를 한다. 해서 지난 시절들조차 아름다운 추억으로 살아나게 한다 그런 글쓰기는 수필이 단연 체험적 이야기의 서술만이 아니라 문학적 창작이 수필에선 어떻게 살아나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길을 보다」에서는 만남을 해답을 찾아가는 선택으로 「그냥」에선 애정과 우정 그리고 여유를 사유로 끌어낸다. 「살맛」에선 상호 인정을 통한 함께 살기를 추구한다. 그런가 하면 「나팔꽃의 꿈」에서 나팔꽃 겨울나기를 형벌이 아닌 환희의 영어, 온전한 꿈의 수태로까지 본다. 이미 수필집 평론집 등 7권의 저서를 낸 작가의 눈은 그만큼의 깊이와 넓이를 더한 중후한 수필을 보여주고 있다. “스케치북 펼치면 유년이 살아나고, 소년적 순수가 샘솟”는다는 그만의 수필 샘이 만들어 내는 수필들이다. 『스케치북 펼치다』 전편에서 보여주는 이런 각양의 이야기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은종일 수필을 돋보인다.
은종일과 이경선 두 분의 문학적 성취에 찬사를 보내며 한국수필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더욱 빛나는 수필의 탑을 더 높이 더 빛나게 세워 주길 바란다. ㅡ 글 최원현 ㅡ
수상식, 심포지엄
한국수필가협회 | 제43회 한국수필 국내 심포지엄 · 제43회 한국수필문학상 시상식 개최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