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
서울한양도성 순성길은 62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오며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뛰어난다. 세계적 유산인 타 도시 성벽과 비교하여도 한양도성만의 탁월성을 가진 건축물이다.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성곽을 한 바퀴 돌면서 변화하는 계절의 풍류를 즐기며 나름의 소원을 빌었다는 '순성놀이'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도성(都城)과 함께 우리의 소중한 역사와 문화이다. 시공을 넘나들며 살아 숨 쉬는 서울한양도성 순성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오롯이 보고 느끼는 역사탐방은 매우 의미 깊은 체험이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새 왕조의 초석을 견고히 다지고자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풍수지리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명당인 백악산 기슭에 새로운 궁궐 경복궁을 건설하였다. 맨 먼저 궁궐을 기준으로 좌측에 종묘를 우측에 사직을 지었다. 1396년도 한양도성을 쌓았는데, 전국에서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하여 98일 만에 완성하였다. 한양도성은 수도 한성부와 지방의 경계를 정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만들었다.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전체 길이가 9970보로 기록되어 있어 환산하면 18.6km이다. 걷기 동호회에서 GPS 등으로 실측한 거리는 27km 이상이라는 설이 있어, 그렇다고 치면 한양도성의 전 구간은 70리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 세종, 숙종과 순조 때 개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많이 훼손되었다.
한양도성은 514년간 조선왕조와 마지막까지 운명을 같이하였다.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도성 중 가장 오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양도성에는 구간별로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의 4대문과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 등의 4소문을 각각 설치하였다. 현재 돈의문과 소의문은 소실되었다. 도성 밖으로 물길을 원활하게 배수하기 위해 청계천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어 홍수 조절 등의 재해 방지에 힘썼다. 한양도성에는 우리 역사 전체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고대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축성기술과 성곽 기능을 지속할 수 있게 발전하고 계승하였다. 특히, 조선 시대의 성벽 축조의 변천 과정 및 보수 보강을 시대별로 보여주고 있어 성벽을 한 걸음 한 걸음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문화 체험이다.
많은 사람이 때때로 서울 내사산(內四山)을 산행하거나 도심을 부분적으로 걷는 경우가 있는데, 알게 모르게 서울한양도성의 일부 구간에 대해 한 번 이상 걸었을 것이다. 서울한양도성 걷기는 구간별 걷기를 제외하고 전 구간 완주는 이번이 네 번째이다. 역사 기행을 목적으로 진지하게 진행하면 머무는 기회가 잦고 중간중간 기행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양도성박물관 등에서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나 홀로 탐방하는 방식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다. 한양도성은 단순한 탐방으로 완주하면 보통 8~9시간 정도 소요된다. 다소 더디더라도 당일 대신 두 번에 걸쳐 진행하되, 미흡한 구간은 다시 답사하여 내실 있게 하도록 한다.
☆ 성북동 뒷골목에 숨어있는 역사 흔적(말바위안내-> 와룡공원-> 혜화문)
지하철 종각역에서 종로02 마을버스에 실려 안국역, 북촌한옥마을 입구를 거쳐 감사원에서 내린다. 삼청공원을 관통하여 말바위안내소에 이르러 서울한양도성 걷기가 시작된다. 삼청공원이 품고 있는 말바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전해온다. 백악의 끝자락에 있는 바위라서 말(末)바위라 하였다는 설과 산에 오르기 전에 타고 온 말을 이 바위에 매어 두어 말(馬)바위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 지역부터 갑자기 경사가 급해지는 점을 고려하면 말을 매어 두는 바위라는 후자의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수차에 걸친 한양도성 걷기 경험과 사전에 조사한 자료를 망라하여 말바위안내소에서 채비를 갖춘다. 시계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혜화문 쪽으로 향한다. 데크를 타고 월담하여 성곽 밖으로 나간다. 하늘과 나무 가릴 것 없이 죄다 초록으로 물든 세상에 포위되다시피 숲속으로 빠진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신록에 뿜어져 나온 싱그러운 자연 향기에 그만 취하고 만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성곽을 끼고 내리막과 오르막을 거친다. 1984년에 개원한 공원으로 '서울우수조망명소'인 와룡공원 안으로 들어간다.
와룡공원은 삼청공원과 북악산 도시자연공원과 인접해 있는 곳으로 용(龍)이 길게 누워있는 형상을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와룡공원은 인근 마을과 공간을 나눠 쓴다.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는 공원으로 변신하였으며 주민들이 참여하여 수목을 조성하였다. 공원에는 제철 만난 신록이 내려앉아 초록이 짙어가고 있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이다. 성곽을 다시 빠져나가면 '서울한양도성'에서 예쁘게 소개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던 심우장과 '성북동 비둘기'를 지은 김광섭 시인의 집이 있다는 북정마을이 평온하고 화목한 풍경으로 산자락에 걸쳐있다. 암문을 통해 다시 성곽 안으로 들어선다. 야자매트로 드리운 착한 길이 분위기를 띄우며 조용한 마을 어귀로 인도한다. 여름이 다 오기 전에 지나간 봄이 그려낸 초록 그늘을 걷는다. 짙고 향기로운 길에서 앞으로 길게 펼쳐질 여정을 상상으로 가늠한다. 보폭의 패턴이 다소 부자연스러운 넓은 너비의 계단을 내려간다.
곱게 이어지던 성곽이 예리한 칼로 밴 듯 동강이가 났다. 성곽을 차도가 횡단하면서 성곽의 일부를 도시의 기능으로 내주었기 때문이다. 골목을 돌고 돌아 들어가니 실종되었던 도성의 기초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경신중고등학교 담장 기초와 축대로 둔갑하였다. 사라진 도성은 다시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의 밑돌로 자리를 틀었다. 안타까운 현상이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가까운 주변에서 흔적이라도 남아있어 불행 중 다행이다. 불확실한 언젠가 도성 복원 공사를 대비하여 희미한 가능성의 실마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 한국의 몽마르트르 언덕 낙산 예술의 길 (혜화문-> 장수마을-> 낙산공원-> 한양도성박물관-> 흥인지문)
길바닥에 박힌 동판과 한양도성 순성길 표지판이 반복해서 사라지고 나타난다. 한양도성을 보물찾기 하듯 멈추고 살피며 길을 따라간다.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웠다는 혜화문(惠化門)이 나타난다. 한양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다. 소문 중에서 동대문과 북대문 사이에 있는 혜화문은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리를 거쳐 의정부와 양주로 이어졌다. 당시 북대문(숙정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와 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애초,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인 홍화문과 같다고 하여 1511년에 혜화문으로 바꿨다.
역사와 패션문화가 만나는 낙산 - 장충체육관 구간으로 가기 위해 대로변에서 위쪽으로 물러나 있는 혜화문을 빠져나와 도로변 건널목에서 교통 신호를 기다린다. '사람 중심 명품 도시 종로구입니다.'라는 환영 배너(banner)가 행정구역이 성북구에서 종로구로 비로소 들어왔다는 걸 알게 해준다. 행정구역은 바뀌었어도 한양도성을 인도하는 이정표와 바닥에 박힌 동판은 도로, 골목 그리고 건널목을 가리지 않고 통일된 규격으로 일관되게 설치되어 있다. 서울 지리에 관해 최소한의 방향 감각만 있으면 초보자라 할지라도 혼자 한양도성을 탐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뒤 계단으로 올라 성곽을 마주한다. 단조로운 성벽이 이어지지만, 시대별로 다양한 성 돌의 구성을 헤아리면 무료함이 해갈된다. 중간마다 성곽을 쌓으면서 동원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 시공 실명제 목적으로 새겨진 각자성석(刻子城石)이 눈에 띈다. 각자성석은 공사 및 석수의 총괄자, 구간별 공사 관계자 및 석수로 세분하였다. 세계 어는 성곽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문화 자산이다. 평양직할시 중구역 평천구역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유물인 평양성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왼쪽 언덕으로 한성대학교 캠퍼스와 조선의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 청사의 중심이 되는 총무당의 집채가 걷는 위치와 같은 높이에 걸려있다. 순성길은 순전히 밖으로만 나 있는 대신 한양도성의 여타 코스보다 너른 폭을 유지한다. 군데군데 역사 해설 안내판 설치와 제철 화해를 조성하고 야간 산책을 위해 분위기 잡은 조명시설까지 배려해 놓았다.
'한양도성을 아껴주세요'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한양도성은 사적 제10호로 우리 조상들의 얼이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이란다. 후손들에게 길이 물려줄 유산을 손상하거나 훼손하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한양도성에 낙서 등의 성 돌을 손상하는 행위가 적발될 경우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1억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경고성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다.
알알이 뭉쳐진 포도송이처럼 오밀조밀 정감있게 지붕을 맞댄 채 군락을 이루며 주민들이 장수하기를 바란다는 삼선동 '장수마을'이 길가에 펼쳐진다. 이곳은 한국전행 전후하여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이 비탈진 낙산 기슭에 움막집이나 판잣집을 지으면서 형성되었다. 일반 주택가처럼 일정한 패턴 대신 삐뚤삐뚤하게 뚫린 골목이 새로운 정서로 자리 잡았다. 요즘 인지도가 높은 마을로 뜨는 중이단다. '장수마을' 명칭은 60세 이상이 주축을 이룬 주민들의 투표를 거쳐 재개발을 반대함에 따라 2008년에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장수마을을 지나면 고도가 높아지면서 서울 시가지 모습이 점차 넓게 보인다. 비교적 높지 않은 산꼭대기에 조성된 낙산공원에 이른다.
낙산(駱山)공원은 조선의 한양을 구성하는 내사산(內四山)의 하나이다. 주산(主山)인 백악산(북악산)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낙산의 자연환경과 역사적 문화환경을 복원함으로써 서울시민들에게 쾌적한 공원경관을 제공한다. 자연 탐방을 통해 역사와 문화 교육의 장을 제공할 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곳곳에 역사 이야기가 얽혀있다. 홍수동(紅樹洞)은 주변에 이화장(梨花莊) 등의 유적과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만 둘러싸여 있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 자지동천(紫芝洞泉)은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서 귀양살이할 때 왕비가 저고리 깃, 댕기 등에 자줏빛 물을 들이기 위해 사용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 이수광이 외조부의 집을 손질하며 '겨우 비만 가릴 수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당호를 붙인 게 비우당이다.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어 이름 붙여진 오형제 우물터, 오부 학당 가운데 하나인 동부학당 터 등의 유물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낙산은 주변에 동숭동 대학로가 자리 잡은 관계로 요즘 들어 젊은 층이 많이 찾아온다. 특히, 석양이 붉게 물든 낙조 때에 즈음하여 가족과 연인들로 러쉬아워를 이루며 밤까지 이어진다. 낙산이 자리한 이화동은 대부분이 오랜 기간 주택이 노후한 채로 변화를 거부하며 저소득층이 거주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몽마르트르 언덕이라 불리며 적산가옥을 리모데링하거나 낙산공원 주변의 좁은 골목 곳곳에 대학생들의 자원봉사로 그려진 벽화로 치장을 하고 젊은 층 눈높이의 카페, 갤러리가 즐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볼거리 즐길 거리를 갖춘 이색 마을로 변신하였다.
이화 마을을 벗어나 왼쪽 도성 밖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빼곡히 들어서 있는 독특한 풍경의 창신동 마을이 점점 화려해지는 반대편의 도심과 대조를 이룬다. 창신동은 궁궐에서 퇴직한 궁녀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1960년대부터 동대문 시장에 납품하는 의류 하청업체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끝에 봉제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좌우를 번갈아 보며 걷고 멈춤의 조절이 자유롭게 오롯이 여행에 집중한다. 언덕 위를 스처 가는 바람과 녹음이 더해져 안락함이 충분히 느껴진다. 한가하지만 나태할 수 없고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났더라도 역사적 감성만은 유지하며 오늘의 의미에 충실한다.
멋지고 찬란하지 않아도 산뜻한 기분은 넘쳐난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한양도성을 현상이 아닌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한양도성박물관에 이른다. 박물관에는 방문객들에게 한양도성의 역사와 가치를 알려준다. 순성길 정보를 제공하며 한양도성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비탈면에 축조한 박물관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내려가는 방향이라서 접근이 용이한 3층 상설전시실로 들어간다. 이어서 2층 도성정보센터와 학습실 및 1층 기획전시실 등의 역순으로 훏어간다. 애초 이곳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동대문병원이 자리 잡았던 옛터이다.
☆ 긴 잠에서 깨어난 도시와 패션의 만남(흥인지문-> 동대문역사관-> 광희문-> 장충체육관-> 남소문 터)
동대문성곽 공원을 끝으로 흥인지문 교차로를 횡단하여 서울 4대문 가운데 하나로 보물 제1호이며 일반인에게는 '동대문'으로 더 익숙한 흥인지문으로 입성한다.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완성하였다가 1453년 단종 원년에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2층 규모의 건물로서 바깥쪽으로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성문 앞을 가리고 반원 모양으로 빙 둘러 축조한 옹성(甕城)을 쌓았다. 이 형식은 도성의 8개 성문중 유일하다고 한다. 첫 번째 한양도성걷기 스탬프 투어 인증 안내소에서 스탬프 인증을 받으며 단절된 한양도성 구간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1897년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선포한 이후 1899년 돈의문 - 청량리 간의 최초 전차가 개통되었다. 선로가 종로를 관통하면서 한양도성의 성문 기능이 축소됨과 동시에 전통적인 한양의 모습이 서구식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전차의 개통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한양도성박물관 자료에 의하면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양옆 성벽이 철거되었다. 성문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다. 1915년 돈의문은 건축 자재로 매각되었으며 광희문의 문루는 붕괴하였다.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과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을 지을 때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 돌을 석재로 썼다. 민간에서도 성벽에 인접하여 집을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도로, 주택, 공공건물, 학교 등을 지으면서 담장의 경계로 사용되는 등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한양도성은 2014년 말 기준 전 구간 중에서 70%가 남아있거나 중건되었다 한다. 도성의 성문 가운데에 숙정문, 광희문과 혜화문은 원형에 가깝게 중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희문과 혜화문은 대로와 간섭이 되어 그나마 인근으로 옮겨졌다. 형체가 사라진 돈의문과 소의문은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국가적인 역량과 지혜를 모아야 하며, 축성 기술 등 무형의 자산을 제대로 발굴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양도성이 단절된 곳에 오래전부터 큰 터를 잡은 패션의 최첨단기지이며 대한민국 쇼핑의 메카인 동대문시장을 관통한다. 우리나라 최초 민영(民營) 도시 상설시장은 1905년에 개장한 광장시장이다. 한국전쟁 이후 광장시장을 기점으로 동쪽으로 확장이 거듭되었다. 현재는 청계천을 따라 광장시장, 방산시장, 동대문종합시장, 평화시장 등이 들어서며 동대문시장 권역을 형성함에 따라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관광 명소로 이름을 날리는 등 거대한 시장 권역은 세계적인 의류와 패션 산업의 허브로 자리 잡았다.
옛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전통 건축물과 유적 및 유물, 최첨단 복합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들어간다. 공원 내에는 문화재발굴조사를 통해 서울성곽의 한 부분을 차지한 이간수문과 치성 등이 드러났다. 하도감터를 비롯하여 조선백자와 분청사기 등의 주요 유물 다수가 출토되었다. 한양도성이 단절된 구간에는 시민을 위한 휴식 공연, 이벤트 등 문화행사가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되었다. ‘과거와 미래의 만남’, ‘회복과 창조’라는 주요 컨셉으로 역사문화 도시 서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지만, 왜 그런지 모르게 현대적인 첨단 문화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한편에서 주위에 아무것도 없을 때 오는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성곽이 멸실되었으나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의 역사문화 유적에 대한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도성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는 시가지를 10여 분 걸어 중구 신당동에 자리한 광희문(光熙門)과 더불어 끊겼던 도성의 실체가 잠시나마 드러난다. 퇴계로변에서 한적한 주택가 쪽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는 광희문은 흔히 수구문으로 불렀다. 광희문은 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 내의 장례행렬이 동쪽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광희문과 관련된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은 1624년 인조 2년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갔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이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현재의 광희문은 1975년 도성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길은 큰길에서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간다. 도성 흔적을 도무지 가늠하기 곤란한 상황이다. 한양도성의 표식을 찾고자 시선을 아래위 가리지 않고 갈 바를 몰라 이리저리 헤매다가 오르막 길바닥에 박힌 '한양도성'이라 새긴 노랑 금속판을 발견한다. 사라졌던 도성이 어쩌다 마주친 모습은 혜화동 골목에서 보여주었던 주택가 담장이나 축대의 밑돌과 같은 모습뿐이다. 나이 먹은 역사를 기억하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길은 또 다른 새끼를 치며 미로 찾기 개임을 강요한다. 오래된 골목은 옛 추억 속으로 나래를 펴고 회상의 무대를 만들기 마련이다. 분위기가 조용할수록 생각의 시간은 더 과거로 정처 없이 흘러 들어간다. 신당동성당을 넘자 밝은 빛이 확 쏟아지며 데시벨 강한 자동차 소음과 함께 196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개장한 장충체육관 모습이 드러낸 대로에 다다른다.
장충체육관 부근 일부 구간의 내부 순성길이 최근에 복원함에 따라 도로를 횡단하자마자 서울신라호텔 울타리와 접한 도성 내부로 진입한다. 성 돌의 크기가 메주만 한 것으로 보아 세종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을 끼고 오솔길같이 좁다랗게 개설한 내부 순성길에는 화려한 초록이 조용하게 내려앉았다. 꽃길을 걷는 마음으로 걷는 동안 길은 향기를 발산하고 길에서 쌓인 여정의 피로가 위안을 받는다. 잠시 멈추고 뒤돌아보면 서울의 전경이 넓게 펼쳐진다. 이곳은 TV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 까닭인지 서울의 건축물이 모두 아름답게 그려진다는 품평이 높다. 남산의 배경이 신라호텔에서 반얀트리호텔로 바뀔 무렵 추억이 서린 다산팔각정에서 쉬어가기로 한다. 2층에 '성곽마루'로 이름 붙여진 정자에 오르면 남산 소나무 숲과 이어지는 성벽들이 확연하게 드러낸다. 애국가 가사에 나오는 남산 위의 늘 푸른 소나무처럼 묵묵히 서울을 지켜온 서울한양도성에서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 비경과 풍류가 흐르던 남촌의 향기 (남소문 터-> 목면산봉수터-> 백범광장-> 숭례문)
옛 서울의 도성(都城)에 있던 남소문 터(南小門) 표석이 GPS 검색 결과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 호텔 뒤쪽에 있다는 안내에 따라 빈틈없이 찾아다녔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추후 별도의 일정을 잡아 샅샅이 탐색한 결과 장충단로에서 국립극장 교차로를 지나 서울 용산구 경계 직전, 왼쪽 인도에서 발견함 ) 남소문을 축조한 연대는 나타나 있지 않다고 한다. 남소문을 낸 뒤에 세종의 첫 손자이자 세조의 장자이며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었다는 말이 나돌아 그해에 문을 철거해버렸다. 동남쪽에 문을 내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음양가(陰陽家)의 주장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한편, 일부에서 광희문을 남소문과 같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편견이라 한다.
반얀트리호텔 안을 가로질러 전통예술을 동시대적 예술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나라 공연예술 역사를 함께 온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마주 보며 서울의 대표 산인 남산으로 진입한다. 남산(南山)은 북악산(北岳山), 낙산(駱山),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왕도의 위곽(圍郭)을 이루며 그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은 산이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하며 서울에서 가장 넓은 공원이자 시민공원이다. 1910년 최초 공원 표지로 세웠던 ‘한양공원(漢陽公園)’이란 고종 친필로 쓴 석비(石碑)가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다.
남산공원길 입구에서 좌측으로 두 번을 틀고 몇걸음을 더 걸어가면 반얀트리호텔에서 끊겼던 성곽이 출현한다. 성곽 따라 이어진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탄다. 예전의 남산 근처는 '남촌'이라 불렀다. 이는 고관대작들이 모여 살던 '북촌'과 상대하여 지어진 지명이라서 남촌의 선비들은 벼슬을 얻지 못한 살림살이가 궁핍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며칠 굶으면서도 양반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며 학문 정진에는 게으름이 없었다. 다 떨어진 갓에 허름한 옷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신을 신발이 없어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었는데, 나막신 소리 때문에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별명도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우리는 가파른 이 오르막을 나무 계단도 모자라 편안한 등산화를 신고서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그윽한 정취를 느끼는데, 그 옛날 청빈 낙도의 삶을 영위한 '남산골 딸깍발이' 선비들은 나막신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어떻게 받아드렸을까. 실리만을 따지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흑갈색 성벽이 숲을 가르며 남산 꼭대기를 향해 구불구불하게 높은 장벽을 친다. 목제 데크가 그 옆에서 보조를 맞추며 나란하게 줄을 댄다. 여행자에게 이 시간만은 산객으로 돌아가 산을 오르듯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내뿜는 이산화탄소는 저녁을 향해 치닫는 햇살과 함께 탄소동화작용을 거쳐 숲에 양분으로 제공하고 숲은 인간에게 신선한 산소로 보답한다. 이렇듯 인간과 숲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흙내음, 풀 내음과 눈앞에서 일렁이는 산 내음을 맡는다. 계단의 형상에 따라 생긴 방향으로 걷고 오르기를 반복한다.
성곽을 구성하는 돌의 규격이 불규칙하고 다른 구간에 비해 잔돌의 혼합이 두드러진 양상이다. 축조 당시 채석하는 과정에서 가까운 장소에 마땅한 석재원이 없거나 경사진 이곳까지 운반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거라는 짐작이 드는 대목이다. 남산 내부로 우회하는 길이 성곽 밖에서 안으로 월담하는 육교가 설치되었고, 꼭대기에 너른 전망대가 마련되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성곽 마루를 전통 옥개석(屋蓋石) 대신 콘크리트로 덧칠한 모습이 너무나 민망할 정도로 허접하다. 구조역학적으로 불안정한 작은 돌을 고정하기 위해 궁한 나머지 생각하다 못하여 짜낸 계책으로 보인다. 공학 전문가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기왕이면 전통을 가미하고 경관을 고려하여 보다 과학적인 공법으로 보완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들 수 있는 광경이다.
다시 숲속을 가로지른 산길로 접어든다.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나타나며 산행 버전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남산의 허리를 굵게 휘감아 도는 순환도로에 익숙한 사람에게 숲 안에 꼭꼭 숨겨놓은 은둔의 길은 걷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듯한 환상에 젖어 들 수 있다. 특히, 나뭇가지가 헐벗은 앙상한 계절보다 신록이 우거지는 이 시절에 향기 그윽한 분위기에 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수북이 쏟아져 있는 계절의 향기를 주어 담으며 가다가 하늘로 퍼져나가는 산새 소리를 받아드린다. 한적한 숲속에서 길이 좁은 만큼 자연의 소리에 더 집중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산을 걷는 동안 행복감이 밀려온다. 이런 길이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
두 번째 남산순환도로와 접속한다. 사람과 차량으로 뒤엉킨 순환도로는 넓은 폭만큼 각종 소음으로 가득 찼다. 우리만이 누렸던 남산에 언제부터인지 서울을 찾아오는 외국 관광객의 필수 코스가 되어버렸다. 남산에 오면 늘 느끼는 게 있다. 걸어 올라오면 쾌적한 길을 매캐한 매연을 풍기고 고집을 부려가며 구태여 자동차를 이용하는 방식은 외국 관광객에 대한 배려라 할지라도 깊이있게 재고(再考)되어야 한다. 도시가 지치고 남산이 몸살을 앓으면서 남산 소나무에 솔방울이 많이 열린다고 한다. 환경에 오염되면 나무들은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종족 보존에 충실하기 마련인데, 소나무의 경우 솔방울을 지나치게 많이 열린 까닭에 나무의 성장에 지장을 주며 서서히 도태될 수 있다고 한다. 애국가 2절 첫 소절에 나오는 철갑을 두른 남산의 소나무가 오염되지 않고 늘 푸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순환도로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삼거리 정류장은 많은 인파로 혼잡을 이룬다. 순환도로에서 우측으로 벗어나 성곽을 옆에 끼고 걷는다. 관광객 인파에 휩싸여 머리를 높이 쳐든 남산 꼭대기를 향해 고도를 높여간다. 다국적 사람들과 더불어 걸어서 세계 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서울의 랜드마크이자 대표적인 관광 명소인 서울남산타워가 자리한 정상부에 이른다. 남산타워의 정식 명칭은 'YTN서울타워'인데, 애초에는 방송국 전파를 송출하는 종합 전파탑 목적으로 세웠다. 정상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는 '우남정'을 지었으나 이듬해인 1960년 4.19혁명 때 철폐되었다가 1968년 다시 건립된 남산팔각정이 남산봉수대와 함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봉수대는 과거 주요 통신수단이었다. 남산봉수대는 각 지방의 경보(警報)를 중앙에 전달하는 국방상 중대한 임무를 전담하는 곳으로 다른 곳과 달리 봉수대가 다섯 개나 설치되어 있다.
오늘의 여정을 고려하여 이만 하산하여야 한다. 왼쪽으로는 600년 한양도성이, 오른쪽에는 현대 과학의 산물인 케이블카가 태생을 달리하며 동시대에 공존한다. 산 서쪽 봉우리에 누에머리를 닮았다 하여 예부터 잠두봉이라 불렸다는 인기 포토존이 보인다. 이곳에 서면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의 야경을 멋지게 답을 수 있는 장소로도 유명하여 밤에 찾아오면 한참을 머물다 간 장소로 알려졌다. 잠두봉 포토존을 비롯하여 남산에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멋진 명소가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까닭에 남산의 높은 인기도는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남산에는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돌아볼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이 곳곳에 자리하며 자연을 느끼고 여유로운 트래킹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가팔랐던 내리막 경사도 차츰 누그러떠러진다. 남산 끝자락이 보일 무렵 널따란 평지 한편에 안중근기념관이 자리한다. 안중근기념관은 후손과 후학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자랑스러운 민족 지도자를 두었다는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산 교육의 마당이다. 백범광장부터 성곽은 조금 더 이어지다가 도시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저만치 보였던 찬란한 국보 제1호 숭례문의 모습이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다. 숭례문관리사무소 귀퉁이에 설치한 한양도성 돌기 두 번째 스탬프 투어 인증함으로 이동한다.
☆ 조선의 물류 종착지 칠패를 기억하다. (숭례문-> 칠패시장 터-> 서울상공회의소 성벽-> 소의문 터)
숭례문은 조선 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다. 1398년 태조 7년에 완성한 숭례문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木造建物)이다. 2008.2.10에 발생한 방화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화재 이후 수습 복구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전통 기와를 새로 올리고, 일제강점기 때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약 3년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2013.5.4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일반인에게는 서울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대문'으로 더 알려졌다. 주변의 관공서나 시장, 건물, 교회 등의 여러 곳에서 명칭 앞에 '남대문'이라는 수식어를 가져다 쓰고 있을 만큼 남대문은 우리 생활 속에서 깊게 뿌리를 박고 있다.
숭례문 지척에서 남대문과 마주하는 남대문시장은 서울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시장인데, 조선 후기에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민간 상인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매점매석을 통해 자본력을 키우고 상권을 장악해가면서 발전을 해왔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하며 수천 종의 판매 물건과 다양한 먹을거리를 찾아 국내는 물론 외국 관광객까지 매일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서울에서는 칠패시장과 이현시장이 유명했는데 칠패시장이 훗날 남대문시장으로, 이현시장이 동대문시장으로 각각 발전했다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칠패시장은 남대문시장과 별도의 장소에서 18세기경에 생겨났다고 한다. 개항 이후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들이 경쟁적으로 칠패시장의 상권을 다투었을 정도란다. 칠패시장의 위치는 중구 봉래동 1가 48번지 일대가 어영3청의 7패(牌) 관할구역이라는 기록이 전해오는 점, 실제로 봉래동 1가와 접해있는 도로가 '칠패로'로 불리는 점을 각각 고려하면 후자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숭례문에서 다음 여정지로 가는 길목에 세종대로가 가로막았다. 서울역 방향의 건널목을 건넌 다음 칠패시장터인 봉래동에서 대한상공회의소로 향하고자 칠패로를 횡단한다. 대한상공회의소 옆을 끼고 서소문로와 맞닿은 방향으로 들어간다. 대한상공회의소 경계 이후에는 일정 높이까지 복원한 성곽이 곳곳에 나타난다. 옛 돌과 새 돌이 뒤섞인 성 돌의 구조가 품격을 갖추며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빌딩 외곽 경계를 옛 도성 형태의 큼직한 돌로 쌓았지만, 현대의 건축구조와 잘 어울리게 조화를 이룬 지혜가 너무나 기특하다. 숭례문, 소의문터, 돈의문 터와 경희궁이 있는 월암공원까지 구간은 장충동 구간과 마찬가지로 성곽의 훼손이 가장 심한 곳이다. 이렇게 온전하게 성벽을 따라 걸을 수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한양도성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고 싶은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점은 매우 본받을 만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 대한제국의 살아있는 역사 공간 정동길 (소의문 터->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정동교회->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돈의문 터)
진행 경로에서 다소 벗어나 조선 시대 사소문의 하나였던 소의문(昭義門)의 표지석이 있는 곳으로 잠깐의 이동을 보탠다. 소의문은 '옳은 것을 밝힌다.' 또는 '덕과 의를 숭상한다.'라는 뜻으로 다른 이름으로 서소문(西小門)이라고도 하며, 1396년에 한양도성 축조 당시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함께 창건하였다. 소의문은 도성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강화, 인천 방향과 개성, 평양의 서북방으로 직결되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소의문은 광희문과 더불어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 역할을 해왔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 및 경의선 철도 개설 명분으로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된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네 줄에 불과한 사연이 담긴 조그만 표지석이 서소문고가교로 진입하는 차량 소음을 바라보며 중앙일보 주차장 모퉁이 밖에서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서있다.
호암아트홀을 거쳐 서소문역사공원 앞 교차로에서 횡단한다. 다시 거슬러 평안교회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한양도성의 흔적이 오리무중인 상황에서 하찮은 끄나풀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길마저 삐뚤삐뚤 제멋대로라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앰한 유관순기념관과 러시아대사관이 시선을 사로잡지만 이내 내려놓는다. 한양도성을 차례로 경유하는 과정에서 성곽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있는 곳은 비교적 무난한 탐방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에서 초행이라면 도성 지도를 살펴서 치밀한 사전 계획이 필요하다. 필자가 한양도성 걷기가 네 번째인데, 모두 지금과 정반대인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어졌었다. 이전에는 인솔자 뒤를 따라서 간 관계로 대체로 무난한 진행이었다. 더군다나 서울상공회의소에서 정동길 구간은 성곽 위에 건물이 눌러앉은 관계로 한양도성 성곽의 훼손이 가장 심한 곳이다.
시행착오 끝에 평안교회 갈림길에서 2시 방향의 좁은 길로 들어간다. 아펜젤러기념공원을 경유하여 활엽수가 무성한 배재어린이공원으로 진입한다. 배재공원 끝자락의 하얀 시계탑 뒤로 한양도성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소나무 한그루를 어설프게 가림막 삼은 채 나뭇가지 사이로 발그스레한 벽돌 건물의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한양도성의 역사와 배재학당의 나이테를 함께 기억하며 고풍스럽게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가까스로 찾는 듯했으나 모퉁이만 돌면 건물 전체가 싱겁게 확 드러나며 들통이 나고말았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배재학당에서 학습하였던 교육과정과 아펜젤러의 교육 이념 그리고 우리나라 근대기에 이루어진 교육, 종교, 문화, 정치, 외교 및 사상 등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에 앞서 설립된 배재학당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 기관이다. 설립 때부터 영어를 비롯하여 전인 교육을 실천하였다. 이승만과 김소월, 주시경, 나도향 등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한 신교육의 발상지이자 신문화의 요람이다. 지금은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로 재단을 확대하여 배재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과 이어지는 너무나 익숙한 정동길 로터리가 나타난다. 정동길로 들어서자마자 1898년에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교회당인 정동제일교회가 빛바랜 모습으로 역사의 뒤안길을 비추고 있다. 정동교회의 내부는 평천장에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은 석조에다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벽돌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설립 초기부터 가까운 곳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주축이 되고 담임목사가 배재학당장을 겸임하고 있었던 관계로 교회 활동을 물론이고 개화운동의 한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정동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독립협회의 전위대를 만들었다. 3.1운동 이후 야간학교 개설 등을 통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동교회와 바로 인접하여 두루뭉술한 호박돌 크기로 치장한 담장 안으로 이화여자고등학교가 보인다. 교정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15년 미국인 사라 J. 심슨이 위탁한 기금으로 세워진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이 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외벽은 붉은 벽돌로 마감한 근대 건물로 서양 건축양식을 도입하였다. 한국전쟁 때 붕괴하였다가 남쪽 외관은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뒷부분은 현대적인 외관으로 처리하였다. 현재는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편,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에 조선 한성부 정동에 건평 200평 규모의 한식 기와집으로 설립된 근대 중등교육기관으로 한국 초기의 여성 교육 기관의 하나다. 이화 학교의 교명은 대한제국 고종에게서 받은 이화학당에서 유래하며,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이다.
정동길 주변은 서구 열강의 패권 다툼이 치열하게 격동하는 구한말에 나라의 운명이 소용돌이치며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동북아의 기득권 헤게모니 차지를 위해 덕수궁을 중심으로 열강들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던 역사의 중심축이었다. 역사적 정취와 낭만이 일렁이는 곧바른 정동길을 유유자적한다. 이 구간에서 유일한 한양도성 흔적은 창덕여자중학교 담장인데 교정 안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1915년 일제 강점기에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해 철거된 돈의문(敦義門) 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별도의 일정을 잡아 학교 교정이 아닌 곳을 한참 에둘러 농협박물관 뒤에서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아래 두 단만 남아있는 한양도성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안팎에는 2019.6.26까지 '정동지역한양도성순성길연공사'을 완성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안내와 함께 소의문 터에서 돈의문 터까지 한양도성이 지나가는 평면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 숨겨진 옛 골목에서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다. (돈의문 터-> 월암근린공원-> 인왕산-> 치마바위-> 창의문-> 창의문안내소)
보통 서울의 서쪽 문을 서대문(西大問)이라고 부른다. 최초 서울 성곽의 서쪽 문은 1396년 사직단 부근에 세워진 서전문이었으나 지금도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한다. 세종 때 도성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문의 위치를 남쪽으로 옮겨 이 지점에 돈의문(敦義門)을 세웠다. 돈의문은 새로 세운 문이라 하여 새 문 또는 신 문이라고도 하였다. 현재에도 광화문에서 서대문으로 통하는 도로명이 신문로, 새문안로 칭한다.
상해임시정부라는 낯선 타국의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민족 선구자의 길을 걸어온 백범 김구께서 8.15 광복과 함께 환국하여 거처한 경교장이 한양도성 지근에서 자리한다. 경교장은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김구의 임정 요인들의 숙소이고 비서진의 활동 공간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경교장 입구에서 세 번째 스탬프 투어 인증을 마친다. 내친김에 인왕산과 북악산을 넘어 한양도성 전 구간을 완주하고 싶지만, 땅거미가 서서히 짙어질 무렵이라서 서울한양도성 순성길에 대한 첫날 일정을 모두 갈무리하여야 한다.
20여 일이 지난 다음 미세먼지가 말끔히 쾌청한 토요일이다. '과거와 현대의 공존, 인왕산 자락에서 숨 쉬다.'라는 구간이 시작되는 경교장 입구서(강북삼성병원)부터 잠시 접어두었던 서울한양도성 순성길이 다시 열린다. 돈의문박물관마을과 서울특별시교육청을 지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반드시 들려 차 한 잔 시켜놓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꽃 화분 카페가 생뚱맞게 나타난다. 갈 길이 열려있는 길손에게 혼란스러운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한적한 주택가에 차 없는 도로를 인도가 차지하는 길은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며 이방인을 편하게 맞이해준다.
기상청 별관에서 길을 따라 올라간다 서울자유시민대학을 지나자마자 오르막 시점에서 오늘의 첫 성곽 흔적이 나타난다. 그리고 월암근린공원 인근에 홍난파 가옥과 함께 우측으로 오르막 계단이 나 있다. 홍난파 가옥은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으로 유명한 작곡가 홍난파가 6년간 말년을 보낸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근대 건축물이다. 1930년에 독일 선교사가 지은 붉은색 벽돌 벽체에 기와를 얹은 서양식 건물로 현재 종로구청이 소유 및 관리하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시 불규칙한 주택가 골목을 헤집고 다니며 헤맨다. 잠깐의 생각이라도 허투루 여기면 지리적 여건이 헷갈리기에 마땅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 상황이지만 '딜쿠샤' 가옥을 지나칠 수 없다. 이 가옥은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외신으로 처음 보도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의 가옥이다. 딜쿠샤의 뜻은 인도의 딜쿠샤 궁전에서 따 온 것으로 힌디어로 ‘이상향, 기쁨’을 의미한다. 붉은 벽돌, 아치형 창문 등을 갖춘 양옥 중에서도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벽돌을 쌓은 방식이 매우 특이해 건축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물로 평가된다. 이어서 조선의 명장이며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 장군 집터를 지나면 비로소 인왕산 자락으로 들어간다.
인왕산 자락길을 횡단하여 계단으로 올라선다. 저 멀리 인왕사와 선바위로 짐작되는 바위가 보인다. 인왕산의 한양도성 외부 순성길로 진입한다. 나무계단에 이어 아늑한 야자매트가 그늘에서 한가롭게 펼쳐졌다. 다소 가파른 오르막이지만 딱딱한 콘크리트포장과 달리 야자 매트만의 폭신폭신한 감각이 발끝을 통하여 온몸으로 짜릿하게 퍼져나간다. 경사 심한 목제 데크로 고도를 끌어올린다. 길은 한양도성 내부 순성길 로 진입한다. 성곽을 끼고 쾌적한 산책길과 벤치가 있는 쉼터가 자리한다. 흙길이라 반갑다 했더니 길섶에서 깜찍한 벌개미취 닮은 야생화 하나가 삐쭉 얼굴을 내민다.
고도를 높인다. 소나무 사이를 뚫고 치솟은 거대한 바윗덩어리 능선은 산객을 태우고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러운 풍경으로 변신한다. 풍경이 사라지는 모퉁이에 북악산 방향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무량하게 불어온다. 착한 바람의 성화에 못 이겨 길가의 너른 바위에서 쉬어가기로 한다. 나무 사이로 청와대와 서촌이 들어오고 아카시아 향기가 그윽하게 분위기를 잡아준다. 바위 끝에 매달리다시피 한 소나무 가지가 송홧가루를 잔뜩 머금은 채 새순마다 일제히 높이 쳐든 모습이다. 금방이라도 엄청난 양의 꽃가루를 쏟아낼 태세이다.
해발 338m 인왕산(仁王山) 정상에 이른다. 인왕산은 해발 고도가 비교적 낮고 특별히 여타의 산에 버금가는 정상석 하나 갖추지 못하고 밋밋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의 명산이다.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경계를 각각 그어주며 함께 나눠 쓰는 정상부는 너른 공간을 확보하였다. 서울을 찾는 다국적 사람들이 저마다 방식으로 흔적을 남기며 추억을 담고 있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성곽의 옥개석이 용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댄다. 한양도성의 모든 내사산의 산세와 함께 그 안에 고스란히 담긴 서울의 모습이 한 장의 조감도처럼 다가온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인왕산이 일반인에게 개방되자 한 때 가보고 싶은 우선순위에서 첫 손으로 꼽혔던 인왕산이었다. 정상에서 푸른 지붕이 유난히 띄었던 청와대를 한눈에 알아보고 몇번을 반복해서 신기하듯 바라보았던 옛 기억이 새롭다.
정상을 받쳐주는 거대한 암반을 안고 휘감아 내려간다. 넓고 평평하게 드러낸 '치마바위'에 얽힌 애틋한 사연이 기다린다. 조선의 진성대군(晋城大君)이 형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중종으로 즉위하였다. 중종의 첫째 단경왕후가 친정아버지 신수근이 반정 때 피살됨에 따라 그녀 또한 반정 세력에 의해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 하며 인왕산 아래 옛 거처로 쫓겨났다. 중종은 조강지처인 단경왕후를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다. 단경왕후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간절한 뜻을 보였다 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봉건 왕조시대에 무소불위를 서슴하지 않았던 절대 권력자의 조강지처마저 자신의 의사에 반한 생이별에 대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환생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새로운 제도가 있는 하늘나라서나마 세상에서 못다 한 그들만의 애틋한 사랑이 꽃길로 승화되길 바랄 뿐이다.
고도가 뚝뚝 떨어질수록 인왕산 정상이 점점 멀어져간다. 성곽 보수를 위해 설치된 안전 가림막이 보기에는 허름하지만, 한양도성에 관한 탄탄한 이야기와 다양한 사진과 전통 그림들이 차고 넘치도록 바탕에다 그려놓았다. 태양의 기세가 서서히 수그러지는 오후 인왕산 자락을 오르내리는 사람들과 나누는 눈짓 인사에서 즐거움이 배어난다. 오늘이야말로 싱그럽게 퍼져나가는 푸릇한 계절의 향기를 맡으며 사뿐사뿐 발걸음을 내딛기에 딱 좋은 날이다. 한참을 내려오니 '한양도성 인왕산구간 군 초소 철거 및 성벽복원공사'라는 공사 안내판이 걸려있다. 청운공원 우회 길을 펴서 윤동주 문학관까지 직선화하는 공사가 진행 중인데, 일부 구간은 아직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조선 시대 봄과 여름 두 번에 걸쳐 도성의 안과 밖을 구경하는 이른바 '순성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성곽을 한 바퀴 돌면서 한양의 변화하는 계절의 풍류를 즐기며 나름의 소원을 빌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도성이 잘려나가고 파손되면서 순성놀이의 맥도 함께 사라졌다. 광복 이후에도 남산에는 미군과 정보기관이, 이곳 인왕산과 북악산에는 국군 수도방위사령부가 성곽 일대를 차지하면서 순성놀이가 어려웠다. 서울과 같이 외침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고 지방 도시와의 경계를 지은 성곽을 가진 나라는 많지만, 서울처럼 성곽 형태를 유지하는 도시는 많지 않다. 특히, 세계 최대 규모의 성곽을 자랑하며 620년 이상 제 모습을 유지하는 도시는 서울이 유일하다고 한다. 한양도성이 부분적으로 복원이 되고 예전의 순성놀이 맥을 찾고자 하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서울을 포근하게 감싸며 고즈넉한 성벽 위에서 옛사람들의 순성놀이 재현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 조선왕조 진산의 베일을 벗기다. (창의문안내소-> 백악마루-> 백악곡성-> 청운대)
산길의 고도가 바닥을 치며 인왕산 자락길과 교차하기 직전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 아래로 윤동주 시인의 문학작품과 자료를 전시하는 '윤동주문학관'이 자리한다. 곧이어 북악산으로 오르기 위해 자하문의 또 다른 이름인 창의문으로 들어간다. 창의문은 서울 한양도성의 북서쪽에 낸 사소문 중 하나로 1396년 조선 태조 5년에 다른 문들과 함께 축조되었다.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문이다. 1623년 인조반정 당시 거사에 가담한 군대가 이 문을 통하여 들어왔는데 그 사연과 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한 현판이 지금도 문루에 걸려 있다. 성문의 홍예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고 천장에도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이는 창의문 바깥 지형이 지네의 형상이라서 지네의 천적인 닭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봉황을 새기고 그려 넣은 것이라는 속설이 전한다. 창의문 밖으로 나가면 환기미술관, 백석동천과 백사실 계곡, 세검정, 대원군 별장이었던 석파정의 사랑채 건물, 탕춘대성의 홍지문, 보도각백불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휴게시설을 갖춘 한양도성 창의문안내소 너른 공간에 모여든 사람들이 여장을 풀어헤치고 분주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 창의문안내소에서 말바위 안내소까지는 1968.1.21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한에 침투한 이후 민간인의 출입이 완전히 통제된 적이 있었다. 2006년 신분증으로 신분을 확인한 다음 출입이 가능하였다가 2019.4.5 이후에는 신분마저 확인 없이 출입증만 발급하여 훨씬 자유롭게 개선하였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까지 거리가 짧아 초반부터 경사도가 가파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오전 10시와 오후 2시가 되면 사전 예약 없이 불특정 다수에게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문화해설사의 안내 목소리에도 거친 숨소리는 예외 없다. 한양도성에서 이곳 백악 구간은 형세가 수려하고 성곽의 보존이 가장 뛰어난 곳이라는 설명이 계속 이어지다가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관한 뒷이야기로 화제가 바뀐다. 한양도성은 조선의 도읍인 한양을 둘러싼 성곽으로 1396년 축조돼 62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건축물이다. 2017년 14명으로 구성된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패널 심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한양도성에 대해 등재 불가(Not to inscribe) 판정을 내려 결국 등재 신청을 철회하였다는 설명이다.
심사의 주안점은 진정성, 완전성, 보존관리계획을 비롯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 등이 검토되었다. 다른 요건은 충분하지만, 세계유산인 타 도시 성벽과의 비교 연구에서 한양도성이 갖는 탁월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것이 발목을 잡았다. 문화재청에 의하면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등재 불가로 결론이 나면 해당 유산의 재신청이 자체가 불가능해지므로 부득이하게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이다. 요즘은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추세에 따라 심사가 엄격해지고 있다. 이번 계기를 거울삼아 세계문화유산을 올릴 때 지적된 사항을 합리적으로 보완하여 보다 면밀하고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야 할 것이다.
성곽에게 손을 내밀어 체온을 나누며 한 걸음씩 계단을 밟아 오른다. 성곽 사이사이 일정하게 뚫려있는 빈 곳으로 비집고 실려 온 계절의 향기로 인해 오를수록 지치지 않고 신기한 경험이 채워진다. 성 돌이 옛것과 새 돌이 맞물려 화합하며 시대별 변천을 보여준다. 누구나 문화재 관련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조그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전문가다운 식견이 생기기 마련이고 문화재에 관한 관심을 증폭시켜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물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르막 계단 밖에서 쉼 없이 날아온 향기의 원천은 수양버들의 가지가 휘듯 알알이 박힌 아카시아꽃이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계단이 몸을 바짝 곧추세우며 힘겹게 통과의례를 치르도록 강요한다. 이내 자연은 눈부신 북한산의 풍경을 보상으로 내주며 산뜻한 기분으로 전환 시켜준다.
높이 342m로 내사산 중 가장 높은 한양의 진산 북악산 정상에 이른다. 백악마루 아래로 넓은 서울이 열린다. 경복궁 뒤쪽에 위치하며 남산과 상대하여 북쪽에 있다는 북악산은 백악(白岳), 면악(面岳), 공극산(拱極山)으로도 불렸다. 북악산은 멀리서 바라본 모습이 탐스럽고 죽순처럼 솟아오른 산봉우리가 마치 만개하기 시작하는 모란꽃 봉우리로 비쳤다. 옛 한양은 풍부한 수량이 가득한 한강을 끼고 있어 수운을 이용한 물류의 거점 도시였다. 한강 유역의 비옥한 옥토는 산업의 중심지 노른자인 까닭에 고대 시대부터 주변국들이 호시탐탐 뺏고 뺏겼던 쟁탈의 역사 현장이었다. 잦은 외침에 시달리는 동안 민심을 든든하게 지켜준 것이 바로 이곳 백악산을 주축으로 하는 산세였고 성곽이었다. 지금의 성곽은 왕조가 바뀌고 시대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수차례씩 보완하여 조선의 찬란한 한양도성으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목에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200년 수령의 소나무가 역사의 증인으로 서 있다. 1968.1.21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는 과정에서 우리 군경과 교전한 흔적이다. 사건 당시 유일하게 김신조만 생포되고 모두 사살되었다고 발표하였으나 한 명은 북으로 도주하여 넘어가 북한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한 조선인민군 대장인 박재경으로 밝혀졌다. 사건이 발생하고 50년이 더 흘렀지만. 역사적 사건을 일깨우고자 총탄 흔적에다 붉은 페이트로 색칠을 해 놓은 탓에 누구나 한눈에 알아보고 그때의 실상을 알 수 있다.
☆ 백악의 끝자락에서 하늘을 날다. (청운대-> 백악곡성-> 숙정문-> 말바위안내소)
정상 못지않게 조망을 자랑하는 청운대에 도착한다. 아카시아 향기가 바람 따라 도성 밖으로 실려 나간다. 오를 때 안에서 받았던 향기를 내려갈 때는 밖으로 내보내 것이다. 주거니 받거니 이들만의 상호주의식 인사법을 나눈 자연 현상이다. 따스한 바람이 세상을 어루만진다. 고요했던 아카시아 꽃잎이 수런거리며 향기를 내뿜는 한양도성길은 고즈넉한 정취 못지않게 그윽하다. 청운대에서 성 바깥을 바라보면 북한산과 백악 사이에 자리 잡은 평창동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평창동이라는 지명은 선혜청의 부속 창고인 평창(平倉)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도성 밖으로 길이 유도되고 높은 성벽이 드러난다. 각기 다른 성 돌의 모양과 크기 그리고 색깔이 시대별 대표 주자로 나선다. 크기가 다른 네모반듯 한 돌과 세월의 때를 잔뜩 입힌 다양하고 두루뭉술한 성 돌이 탄생 시기가 다른 채 시대와 화합하며 튼튼한 구조를 이룬다. 1396년 태조 때의 도성은 산지는 석성,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는데, 성 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하였다. 1422년 세종 때 이르러 평지의 토성을 매주만 한 크기의 석성으로 보강하였다. 1704년 이후의 숙종 때에 가면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례 복구하는 과정에서 성 돌 크기를 40~50cm로 이전보다 견고하게 보강하였다. 1800년 순조 때 이후에는 사방 60cm가량의 정사각형의 돌로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한양도성의 변천사를 써나갔다.
도성과 어깨동무하듯 다정한 간격으로 역사의 징검다리를 걷는 이 길을 포함하여 도성 안팎에는 군사들이 순찰을 하는 순성길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의 세 군문(軍門)이 각각 8패씩을 내어 도성 주변을 순찰하였다고 전해진다. 예전의 군사들이 긴장감 도는 직업의식을 안고 돌았던 순성길을 너무나 아늑하게 걷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솟아오른다. 두리번대는 생각에 치여 정작 꺼내지 못했던 마음을 산바람이 덥석 물고 날아간다. 산에 오르면 바쁘고 복잡한 일상도 정리되며 생각이 맑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세속의 탐욕마저 저 하늘로 날려 보낼 수 있다면 누구나 신선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이곳에 눌러앉을 것이다.
성곽 밖에 성곽을 경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2의 철조망이 잡스럽고 허름한 모습으로 설치되어 있다. 예전의 군문(軍門)이 아닌 이 시대 군부대만의 철문(鐵問)이 조선 시대 어영청, 금위영과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던 순라군(巡邏軍)이 순찰했던 것처럼 군에 복무하는 군인들이 근무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민족의 영원한 역사적 문화자료이다. 언젠가는 걷어 치여야 하는 철조망은 이념의 갈등으로 조장된 장벽의 산물이기에 달갑지 아니하고 조금 언짢은 마음으로 바라본다. 가슴을 저미며 짓눌리는 심정은 철문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다가온다.
길은 암문을 통해 순성길 내부로 들어오자 시원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불어대며 길마저 부드럽다. 한참을 일정한 풍경으로 보여주다가 갈림길 이정표에서 곡장(曲墻)으로 유도되어 위로 올라채고 전망대 끝에 선다. 곡장은 성곽 밖의 관찰이 용이하고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곽의 연장선에 해당하며, 방어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성곽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을 말한다. 인왕산 곡성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상황 파악이 곤란하지만, 백악 곡장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또한, 표고까지 높은 관계로 북악산과 인왕산의 성곽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여 곡장의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고개만 돌리면 산 아래에 차분하게 내려앉은 부암동이 자리한다. 선명하게 색칠한 하늘의 자리가 깔끔하게 하늘과 산의 경계를 그어준다.
성곽 모퉁이를 돌 때마다 서울의 풍경이 다가왔다가 멀어지며 변화무쌍한 장면을 연출한다. 오후로 떨어지는 시각은 태양이 서쪽으로 기운 탓에 온기가 식어간 숲속에 그늘이 아늑하게 퍼져있다. 숲과 산길을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헤집고 설치한 목제 데크가 산과 일심동체가 되어 한적하게 드러낸다. 시장 같이 북적대며 문정약시를 이뤘던 창의문 안내소와 대조를 이룬 분위기를 나만의 공간으로 접수한다. 언덕 아래에서 숲의 체취를 담고 넘어온 산들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지나온 여정을 꼼꼼히 정리한다. 시간을 물처럼 써가며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것을 다듬어 채운다. 그럭거럭 안성맞춤의 시간을 요긴하게 메꾼 다음 지근 거리의 숙정문으로 향한다.
한양도성을 구성하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 격인 숙정문이다. 1396년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과 더불어 세워졌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다가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존 도성문 중에서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숙정문이 유일하다. 1976년에는 문루를 새로 지었다.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길에 소나무를 심은 뒤 문을 폐쇄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문을 열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문을 닫아 음기를 막았다.
원점으로의 회귀를 앞두고 여정을 정리하는 단계이다. 길 분위기 또한 아늑하게 이어지며 지금까지의 과정들이 조용히 머리속으로 밀려온다. 한양도성 걷기는 어떤 길보다 이야기 구성을 위해 많은 준비를 거처야 했다. 내용 정립이 안 된 구간은 시일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었더라도 재차 현장 확인을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서울한양도성은 특별히 애정이 더 느껴진다.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만들어 간다. 오롯이 나를 찾아 나서는 길은 드디어 말바위안내소에 안착하여 공식 일정을 마무리한다.
장미 꽃잎이 부풀어 부드러운 향기를 전하며 녹음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역사 탐방의 일환으로 수려한 자연과 문화적 요소가 융합되어 자연유산을 만들어낸 한양도성의 역사 걷기가 비로소 갈무리되었다. 마음이 후련하고 밀린 숙원을 해결한 듯하다. 나날이 푸르러 가는 하늘을 달려 녹음을 스쳐 오는 상큼하고 향내 짙은 바람결이 진동한다. 6월의 신록을 바라보면 눈을 씻어주고 머리를 씻어주며 가슴을 씻어준다. 신록을 좋아할수록 신록은 조금씩 더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이런 신록에 결코 곁눈을 팔 수 없는 까닭이다.
불과 몇해 전만 해도 일상의 칠분의 일을 산행에 쏟아부었다. 이제는 산행하면서 다져진 튼튼한 걸음을 밑천 삼아 평소 궁금해하는 역사적 사연이 깃든 현지를 직접 찾아가는 재미도 쏠쏠하게 자리가 잡혀간다. 한양도성 걷기를 계기 삼아 역사를 탐방하며 걷는 여행자의 본능으로 한 걸음 더 성숙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첫댓글 <에필로그>
620년 넘게 서울을 품어온 서울한양도성 순성길을 찾아 6차례 답사하는 등 계절의 경계를 초월하며 달포에 걸쳐 옛사람들이 걸었던 마음으로 기행문을 수필로 담았습니다.
애초에는 4구간으로 나눌 계획이었으나 조사 범위가 넓어지고 깊이가 더해졌습니다. 나아가 현지에서 느껴지는 정취까지 보태는 바람에 분량이 늘어나 소제목을 붙여 10단락으로 나누었습니다.
글 속에서 현장감을 주고자 '대한민국이 엄선한 100대 명산 '지도를 만든 전문가에게 나만의 한양도성 지도 제작을 발주하였습니다. 내년 상반기 목표로 이미 작성한 10편 남짓의 작품을 아우르는 수필집을 발간할 계획입니다. (가제목: 나를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대단하십니다. 한양도성 순성길을 수차례 답사를 하면서 옛 선인들의 그 느낌을 수필로 집대성하였군요. 한번 읽어봤지만 두세번 더 읽어 봐야겠습니다. 기행문을 쓰신 산바다님의 마음을 다시한번 더 느껴 보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내년에 발간할 수필집이 기대됩니다.
두려움이나 송구함을 무릅쓰고 올렸습니다. 격려해주시니 힘이나고 용기가 솟습니다. 과정이 진척되면 그때마다 소개하겠습니다.
사진속의 걷던 길들이 어제인듯 한눈에 모두 들어와 박힙니다
바람결 따라 때로는 잔잔한 물결따라 걷고 또 걷고
산바다님의 필명에서도 느길수 있는 ......
발간 하시게 될 수필집 많이 많이 궁금 해져요 ..
뭔가가 ...책으로 나오기까지 ...탐방 하며 공부하며 많은 시간과 노력의 결실이라
할까요 ...기대 됩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시간 여행 ..멋져요 ....
마음껏 걷는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 여기고 주말의 하루는 걷기 위주로 작정하였습니다.
저는 2일동안 후딱 걸었습니다.집사람하고 함께요
학자의 자세보다는 그냥 걷기꾼으로 말이죠.
굉장히 심오하네요
저는 그냥 읽는것 만으로 만족해야 겠어요
여름철에는 한 번에 완주하에는 무리입니다. 두 번에서 세 번에 걸쳐 걷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성길을 네번이나~~~
같이(?)걸었더니 다리가 무척 아프요^^
역사탐방은 공부를 해야해서 자칫 딱딱한데 발품이라 그런지 진솔하네요
산바다님의 노고와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