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인 박영규는 강남대군 언지(신라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의 아들이다.그는 견훤의 사위였지만 고려 태조를 도와 나라를 개국하는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올라 삼중대광좌승으로 승주(순천의 옛지명)군(君)에 봉해졌다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대제학(보문각의 종2품 벼슬)을 지낸 숙정을 일세조(一世組)로 하고, 본관을 순천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숙정의 손자 천상이 공민왕때 문하시중으로 평양부원군에 봉해졌고, 그의 손자인 석명은 태종 때 좌명공신3등에 올라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유학자로유명한 중림은 목사를 지낸 안생의 아들로 세종때 문과에 올라 집현전이 서맃되자 천거되었으며, 그의 ㅁ누하에서 성삼문 , 하위지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특히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문종이 세자로 있을대 작은 실수라도 극간하였고, 뒤에 이조판서에 이르러 단종 복위운동에 아들 팽년과 함께 참여 했다가 거사전에 누설되어 참형을 당했다.
조선 의 이름난 학자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팽년은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학살가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아 사가독서를 했다.
세조가 즉위하자 외직인 충청도 관찰사로 나간 그는 강계문(벼슬아치가 감사나 또는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되어 민정을 살핀 결과를 서면으로 임금에게 보고함)에도 자신을 신(臣)이라고칭하지 않아, 세조가 자신에게 보낸 서한을 살피다가 신(臣)자로 알았떤 글자가 모두 거(巨)자 였기에 깜짝 놀랐따고 한다.
1456년 형조 참판으로 성삼문,하위지,유응부,이개,유성원등과 더불어 단조으이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국문(임금이 중대한 죄인을 국청에서 신문하던 일)을 받을때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만일 네가 나늘 섬기면 살려주겠다"라고 회유하자 그는 "나는 상왕(단종을 지칭)의 신하이지 당신의 신하는 아니오"라며
거절하여 아버지인 중림과 아우 인년, 기년,대년,영년, 아들 헌 등 일가족이 참화를 입었다.
그가 옥중에 있을 때의 일로, 김 질 이 세조의 명을 바고 술을 가지고 가서 태조의 하여가로 넌지시 마음을 떠보려 하니 그 대답으로 그의 굽힘이 없는 지조를 아래와 같이 나타냈다.
가마귀 눈비맞아 희는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그칠줄이 이시랴"
한편 그에게 남은 많은 후일담중 하나는, 그가 의절하던 무렵 그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가 임신중으로 경북 하빈면 사동으로 내려갔다.
조정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 하였는데, 얼마후 아들을 낳아 마차미 여종이 낳은 딸과 서로 바꿔 아기는 종의 품에서 박비(朴婢)라는이름으로 자라났다.
장성한 후에 성종에게 팽년의 자손임을 고하자 성종은 기뻐하면서 마침내 특사령을 내렸고, 이름을 일산으로 고쳐 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가문은 멸족을 면하게 되었고, 그 후손이 오늘날의 묫골박씨이다.
한편 무과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원종(元宗)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품으로, 연산군을 몰아내는데 앞장을 서 중종반정의 주역이 되어 무장의 용기로 부패한 왕권에 조전한 가문의 인물이었다.
이장(而章)은 광해군 때 대사간(사간원의 으뜸 벼슬로 정3품)을 지냈고, 광일(光一)은 숙종때 왕자의 스승으로 당대의 석학공구(효종임금의 스승)와 함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외 벽오(碧梧)와 기정(基正)은 팽년의 후손으로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왕명으로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완성하여 이름났다.
이렇게 순천 박씨의 수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흐름속에 크고 작은 사건마다 개입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명문의 긍지를 살려 가문을 빛냈다.
출처 ; 순천박씨 형제회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