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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촐라체 북벽이 뭐길래 찾아 봤더니....헐 1,500m거리의 그냥 암벽이라네여....
그리고 이 암벽에 비박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상상이 안되어 봤더니..
이렇게 자는 거고~~헐~~
크레바스에 빠진 상황을 보니 이런 것이고~
그냥 허공에 대로대롱 매달리는 양상이었구만요...
독토 당일 날 발제자가 등산장비 좀 가져 와서 설명 좀 해 주시면 더 실감날 듯~~~
처음부터 읽어 나가는데 손에 땀이 나고 똥구멍이 쬴려서 간질거리고 오금이 저리는데요~~~
거의 책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촐라체 정상을 밟고 하산하는 중 조난을 당하고 극적으로 생환한다.
그리고 동상이 걸린 손가락을 자르게 된다. 더 이상 거벽등반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박정헌이 수술 후 상처가 빨리 회복되기 위해 산소치료를 받으며 바라 본 달력의 고봉사진을 보며 당신이 다음에 오를 산인 인도의 탈레이사가르 북벽(6,904m)을 생각한다. 그 북벽이 '정말 무섭도록 아름답고 매력적인 봉우리'(213쪽)로 표현하고 있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은 이해하겠는데 무섭도록이라니~~ 사진 한 번 올려 본다. 감상하시길..
< 독후감>
운명과 정체성
운명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케 하는 글이었다. 또한 나에게 산은 어떤 의미였는가를 되새김질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한번쯤은 산에 몰입했던 적이 있으니까.
운명은 역시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이 있다고 본다. 사람에게는 그 만의 기질과 성질이 있는 것이어서 이 에 맞는 일과 상황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일과 상황을 해내고 만드는데 있어 남들보다 수월하고 앞서나간다 하면 본인 스스로 더욱 더 개발해 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생각하면 아~그거 잘하는 친구~라고 이야기 한다. 그 사람하면 순간 떠 오르는 무엇이 그의 정체성일 것이다. 거벽등반 전문가인 박 정헌의 운명과 정체성은 그렇게 형성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기질과 성격에 맞고 남들보다 우월하게 잘 하는 일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거다. 일부는 성격에 안 맞는 일에 억지로 자신을 꿰어 맞추고 하루 하루를 감내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일부는 성격에 맞는 일이어도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아 그 수준에서 만족하며 사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한 방에 훅 가는 그런 운명은 믿지 않는다. 운명과 정체성은 하루 하루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성실히 해 나가면서 만들어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박정헌의 산에 대한 운명과 정체성은 산행에서 얻은 좌절과 고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셰르파의 추락사를 보고 포기하지 않고 신중해지며 다시 산에 접근했다는 대목에서 그의 운명과 정체성은 만들어진 것이라 믿는다.
촐라체 북벽 등반에서 조난과 큰 부상을 당하고 더 이상 등반을 못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의 고민과 인식은 등반인생을 넘어 삶 자체로 보편화되고 확장된다.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의미이고 평범한 삶에 진리가 있다는 한 등반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새롭게 다독인다. 등반이나 병원의 삶이나 나아가 우리네 모든 삶이 같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각 자의 선택이고 몫이 있는 것이다. 그의 인생에 빛이 있기를....
2. 생각 따라 가기
책 표지에 "히말라야는 내게서 여덟 손가락을 가져간 대신 진정한 자유를 주었다"고 쓰여 있다.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저자의 생각이 어떻게 전개해 왔는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저자는 조난 후 이번 등반을 후회를 넘어 저주를 퍼부었다.
"젠장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이 한심했다. 스스로에 대해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산에 미쳐 이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쯤 집에 있다면 편안하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다시는 산에 오지 말아야지. 살아 돌아간다면 산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리라(93쪽)"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산을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무엇을 찾아서 이토록 사지를 헤매고 다녔을까. 힘들게 올라간 정상 끝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했나.나는 왜 끝없이 오르기를 반복했을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것일까.(216쪽)"
그는 자신의 등정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등정의 위험성이 사회의 위험성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것은 선택이었으며,그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는 한 인격체의 운명이다(221쪽)라고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를 담담히 말한다.
"손가락을 잃음으로서 나는 내가 가족들과 나누어야할 사랑의 마음을 얻었다. 혼자 오르는 정상이 아닌, 온 가족이 손을 잡고 함께 올라가야 할 인생을 보았다."(225쪽)
"산은 내게서 여덟 손가락을 가져가는 대신 내가 해야 할 더 큰 일을 예비해 놓았다. 그건 산을 포함한 히말라야와 그 곳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225쪽)
저자의 시선은 등정의 삶에서 가정과 사회적 삶으로 이전된다. 그의 등정에 대한 성찰은 삶의 보편적 가치로 나아간다.
" 우리는 왜 사는가? 결국 그에 대한 답은 보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등반도 마찬가지다. 더 가치있는 것을 향해 끝없이 오르는 행위가 등반이다. 그것이 때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일지라도 그런 면에 있어서 우리가 산을 오르는 행위나 인생을 살아가는 행위는 크게 다르지 않다."(234족)
3. 저자 박정헌의 정체성은? 알피니스트. 그가 이룬 업적
94년 안나푸르나 남벽 한국인 최초 등정
9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세계 4번째 등정
00년 K2(히말라야 절대 군주) 무산소 등정
02년 시샤팡마 한국인 최초 신루트 개척. 명명 korea highway
04년 가셔브룸II봉 패러글라이더 비행
- 알피니스트 전환의 계기: 19세 초오유 등정때 세르파의 추락사를 보고 신중하게 등반을 하게 되었고, '오로지 결과만을 따지고 산의 높이와 등반한 봉우리 숫자를 셈하는 경쟁을 위한 등반이 아닌,등반자체를 위한 등반을 하겠다는 마음을 품는다(172쪽)
4. 왜 산을 오르는가? 책 속에는 저자의 끊임없는 자가 질문이 나온다.
1. 조난이후 필사의 하산을 하는 도중 급경사에서 50미터 정도 추락하고 난 후
젠장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이 한심했다. 스스로에 대해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산에 미쳐 이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쯤 집에 있다면 편안하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다시는 산에 오지 말아야지. 살아 돌아간다면 산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리라(93쪽)
2. 살아 돌아와 귀국후 경희의료원에 입원 후,통증과 싸우면서,
통증이 몸을 엄습할 때마다 나는 살아 돌아온 걸 저주했고 히말라야와 그 산들을 증오했다.(150쪽)
3. 손가락 절단이라는 수술을 결정해야 할 시기에
그동안 산과 인연을 맺으며 나는 늘 그것을 필연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이후에는 그 모든 것이 악연이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156쪽)
4. 수술후 마음이 안정되면서,
나는 아직 사고를 당한 촐라체 원정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단지 운이 없어 사고를 당했던 것일까?..한때 동상으로 시꺼멓게 부은 손가락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산과 산을 알게 해 준 사람들을 저주했다..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어쩌면 촐라체 원정이 나에게 가장 운이 좋은 원정이었는지 모른다.다 죽어 가던 목숨이 살아나지 않았던가(199쪽)
5. 손가락 절단에 대한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강식을 생각하며
차라리 애초부터 강식과 인연을 맺지 않았다면,...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일은 지난 일 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된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두 손과 발을 내어줌으로써 큰 사고를 방지했을지도 모른다.(203쪽)
6. 수술후 절단 손가락의 산소치료를 받으면서
무엇 때문에 그동안 미친 듯 산을 올랐을까? 무슨 가치를 찾기 위해서 였을까. 그리고 그대가는 지금 어떠한가. 붕대에 친친 감긴 손가락을 내려다 보며 나는 쓸슬히 입술을 깨문다. 화두처럼 그런 질문을 끌어안아 보지만 많은 산악인이 그러했듯, 그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핼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무도 없다. 나 자신가지도(212쪽)
7. 입원후 3개월 째 접어들면서
산을 오르는 일은 육체와 정신이 갖는 한계를 견디는 작업이다. 병원에서 병마와 사우는 일은 인생의 한 부분에서 갑자기 닥쳐온 육체적 고통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다. 운명과 맞선다는 점에서 알파니스트와 환자들은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지금 오르고 있는 길의 끝에 무엇이 안배되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묵묵히 자신이 처한 환경을 견디는 것이다.(215쪽)
나는 무엇을 찾아서 이토록 사지를 헤매고 다녔을까. 힘들게 올라간 정상 끝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했나.나는 왜 끝없이 오르기를 반복했을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것일까.(216쪽)
8. 자식이 등반가의 삶을 산다면,
등반 인생 전체를 막지는 않겠다. 등반이 특별히 위험하지 않다. 물론 등반하다가 죽는 사람이 있지만 세속의 삶도 그러하다. 교통사고로 죽는 비율이나 등반 사고사나 비슷하다. 다만 죽음의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죽음을 두려워 하면 아무 것도 못 한다. 사회적인 위험이나 산의 위험은 결과적으로 같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한 인간의 자유의지이며 얻어지는 결과는 한 인격체의 운명일 뿐이다.(221쪽)
9. 에필로그에서
사람들이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인생은 보다 가치 있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생각만이 나왔을 뿐이다. 어저면 등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 가치있는 것을 향해 끝없이 오르는 행위가 등반이다. 그것이 때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일지라도 그런면에 있어서는 우리가 산을 오르는 행위나 인생을 살아가는 해우이는 크게 다르지 안핟.(234쪽)
5.책 속에 인용되는 산악인들
조지 말로리: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말을 함. 1924년 에베레스트 정상 직전에서 제트기류 속으로 사라짐.
앨리스 하그리브스: 스코틀랜드 출신의 위대한 여성 알피니스트.95년 세르파의 도움 없이 무산소 단독 에베레스트 등정
월터 보나티: 이탈리아 등반가. 19세 시작. 34세 은퇴.15년간의 거벽 등반가 활동을 중단. 이유: 삶의 진실이 평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218쪽)
라인홀트 매스너: 정상이란 산의 꼭대기가 아니다. 정상은 하나의 종점이고 모든 선이 모여드는 곳이며 만물이 생성하고 모습을 바꾸는 지점이다. 종국에는 세계가 '무'로 바뀌는 곳이며 모든 것이 완결되는 끝이다.(230쪽)
6. 용어들
알피니스트: 등산하는 것 자체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며 산에 도전하는 사람들.
알파인 스타일: 세르파와 고정 로프 없이 1~3명이 베이스 캠프에서 정상가지 바로 올라가는 방법
거벽의 정의: 5,000m 이상의 산,1,000m이상의 등반고를 가지고 60도 이상의 벽을 기어오르는 것.
등정주의
등로주의(머메리즘):
피치(pitch):자일 길이만큼의 구간마다 전진을 멈추고 후등자가 확보하는 구간)
하켄(Haken):바위의 갈라진 틈에 박는 암벽 등반용 못)
슬링(sling): 하켄이나 스크루에 연결해 자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추락시 충격을 흡수해 주는 확보용 끈
자일파티: 등산시 서로의 몸을 자일로 연결하는데 그 연결된 두 사람을 지칭. 생명을 같이 한다는 뜻
히말라야의 3대 남벽: 안나푸르나 남벽,로체 남벽,에베레스트 남서벽.
7. 히말라야
1.히말라야의 어원: hima(눈雪)+ alaya(보금자리): 눈의 보금자리.
2, 위치: 인도 대륙과 중국 티베트 고원 사이에 형성된 거대 산맥.
거리: 2,500km. 낭가파르바트(서쪽,8,125m)~남차바르와(동쪽,7,756m)
7,000m급 고봉: 200여 개.
3. 산계(山界): 3개로 구분
- 외히말라야(최남단), 소히말라야(북쪽),대히말라야(산맥의 등뼈,네팔 영토내 세계 최고봉
포함지역)
4. 5개의 그룹으로 구분
- 펀자브 히말라야: 수틀레지강과 인더스강사이 지역. 낭가파르바트가 있다.
- 가르왈 히말라야: 네팔 서부 국경인 칼리강과 인더스강의 지류 수틀레지강 사이 지역
- 네팔 히말라야: 전체의 1/3지역. 에베레스트(8,850m),로체(8,501m),마칼루(8,463m),다울라
기리(8,167m),초오유(8,153m),마나슬루(8,156m),안나푸르나(8,091m)포함
- 시킴 히말라야: 칸첸중가(8,598m)를 품고 있는 지역
-동쪽: 아샘 히말라야:네팔과 부탄사이.
#카라코룸 히말라야: K2(8,611m)을 포함한 8,000m급 고봉 4개를 거느리고 있는 인더스강
북쪽 지역. 검은 바위를 의미.
8.히말라야에 대한 탐사
- 1850년대 부터 시작.인도의 측량국장 조지 에베레스트가 약 30년에 걸쳐 정밀 측량.1852
년 세계 최고봉 선언,
- 윌리엄 그레험(영국): 1883년 두나기리(7,066m) 시험 등반
- 1892년: 영국의 콘웨이 원정대 등반
- 1895년: 영국의 머메리 낭가파르파트 등반
-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뉴질랜드 에드먼드 힐러리.에베레스트 초등. 이후 라인
홀트 메스너의 세계 최초 14좌 완등등 수 많은 기록 생산.
9. 다른 책 인용
1. 등반가들의 독백
- 끈: 조난이후 필사의 하산을 하는 도중 급경사에서 50미터 정도 추락하고 난 후
젠장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이 한심했다. 스스로에 대해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산에 미쳐 이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쯤 집에 있다면 편안하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다시는 산에 오지 말아야지. 살아 돌아간다면 산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리라(93쪽)
- 안나여,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우에무라 나오미)
몇 번이나 이 여행을 중단하려 했던가? 그때마다 하루만 더,하루만 더 참고 가보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순간순간을 어떻게든 견디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여기까지 왔다...(319쪽)
- 영광의 북벽(정광식)
동상과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하강하면서 나는 북벽을 저주했고 나의 생의 전부라고 항상 자신있게 이야기하던 클라이밍이라는 것을 증오하기 시작했다.(208쪽)
2. 등반가들의 운명
-영광의 북벽
다시는 클라이밍을 안 하리라고 이를 악문 지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나는 아이스 해머를 끌어당겨 녹을 딱아내기 시작했다.우리의 다음 원정은 어디로 할가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내가 갈 곳이라곤 산 밖에 없으므로...(209쪽)
-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
끝났다 안나.너에게는 이제 길고 긴 휴식이 있을 뿐이야
그런데 나는? 나에게도 그렇게 긴 휴식이 있을까. 아마 그럴 일은 없으리라는 예감이 어렴풋이 들었다. 나에게 마지막이란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321쪽)
3. 평론가들의 평가
- 안나여,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의 해제를 쓴 고 도원.
나에게 산을 오른다는 것은 단지 수직의 선을 타고 걸음걸음을 참아가며 올라가야 하는 힘겨운 고행일 뿐이었다. 삶 자체가 산을 오르는 것 이상의 고행이라 여겼던 나에게 산은 '해소의 장소'가 아니라 고생을 더하기만 하는 '고행의 장소'였던 것이다. 피 끓는 20대 청춘에게는 산을 오르는 묵묵한 끈기보다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열정과 가슴 안에 품은 불화살 같은 꿈이 더 뜨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 마운틴 오디세이의 저자 심산
저자가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인물에 아인슈타인을 보고 이의 제기를 한다. 그가 제안하는 20세기 대표 인물은 라인홀트 메스너. 저자는 그를 '인간에 대한 인류의 정의 자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확장시켜 버린 인물입니다'라고 그 이유를 대변한다. 그는 8,000미터 봉 14좌를 모두 오른 최초의 산악인다. 1970년 낭가파르바트를 시작으로 1986년 로체를 끝으로 16년의 세월에 거쳐 이룬 쾌거라 한다. 그가 위대한 것은 높은 산을 남 보다 먼저 올랐다는 사실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올랐다는 것이다. 개척등반,동계등반,단독등반,무산소등반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스폰서를 받고 산 정상에 국기를 뒤흔드는 행위를 경멸했다고 한다. 그는 산행과정에서 내면을 깊이 성찰하여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메스너가 극한의 상황 속으로 자신의 육체를 밀어 넣어 마침내 쟁취해 낸 위대한 정신의 기록이다. 한마디로 인간실존의 지평을 고통스럽게 확장해 놓은 결과이다.'(262쪽)
4. 마운틴 오디세이에 나오는 등반가들의 어록
- 인간은 들판을 옥토로 만들 수도 있고, 강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산은 불요불굴한 자연력의 상징이다. 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왜소함과 삶의 덧없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은 산을 숭배하게 된다(레슬리 스티븐,29쪽)
- 19세기초 동반자나 로프를 사용하지 않는 죽음을 무릎쓴 단독등반이 유행했다. 그들은 현세를 부정하고 혐오했다. 그들은 인간이란 더 나은 존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위대한 목표에도달 할 수 만 있다면 죽음의 공포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서야 할 그 무엇으로 여겼다.(니체편에서 저자가,44쪽)
-설령 낭가파르바트에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 거대한 봉우리를 보고 훈자와 러시아 국경 저편에 있는 위대한 산들을 바라보았으니 후회는 없소.(머메리 57쪽)
- 세르파들에게는 등정은 명예니 뭐니가 아니라 단지 생계를 위한, 비즈니스적인 것 뿐이다.(마티아스 추르브리겐편에서 저자가 59쪽)
- 등산보다는 삶이 중요하다.산보다는 인간이 먼저다. 하지만 인간도 삶도 대자연 앞에서는 한낱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지오바니 세간티니 70쪽)
- 반드시 올라야 할 필요 따위는 없는 바위의 정상을 향해 우리가 벌이는 통쾌한 모험은 이성적으로건 도덕적으로건 정당화 될 수 없다. 다만, 전시에 부상으로 수족을 잃고 무기력증에 빠진 숱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외다리 제프리 윈스럽 영,84쪽)
- 나는 국가의 위신을 위하여 등반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등반할 뿐이다. 알피니즘을 정의하려는 나의 기도가 헛된 결말밖에 남기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객관적인 알피니즘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등반은 속박과 한계에 저항하여 영혼의 자유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또한 그것은 육체적 건가오가 정신적 에너지,우아한 행동 스타일,계산된 무모함이 주는 쾌감일 수도 있다.(주스토 제르바수티124쪽)
- 별을 보며 새벽에 떠났다. 초라한 장비,남한테 빌린 배낭..필사적으로 높은 곳을 바라보던 광기,처음으로 정상에 섰을 때의 환희, 이것이 나의 생애의 결정적인 갈림길이었다. 절대로 고칠 수 없는 산병의 시작이었다.(리카르도 카신 128쪽)
- 거미의 눈사태는 우리들을 암벽으로부터 팽개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눈사태는 최후까지 남아 있던 것,곧 개인적 허영심과 이기적인 야심을 말끔히 씻어 버렸던 것이다. 이제 이 암벽에서는 오직 우정만이 영속된다.(아이거북벽 초등 1938년. 하인리히 하러 136쪽)
- 다행이다.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인간이 오를 수 없는 산도 있어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현지인들의 믿음을 받아들인다. 마차푸차레의 정상에는 여신이 산다. 인간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곳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윌프리드 노이스, 148쪽)
- 누가 먼저 그 산에 올랐느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애드문드 힐러리 157쪽)
등산은 자기 과시가 아니며,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이며 자연에 대한 가장 순수하고 가혹하며 신중한 도전이다.(리오넬 테레이,162쪽)
- 내게는 추위를 막을 비바크색도, 추락을 에방해 주는 확보용 자일도 없었으나 앞으로 다가올 밤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모든 일이 그저 당연하기만 했다.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헤르만 불, 176쪽)
- 마지막 볼트를 설치하고 정상에 올라섰을 때, 내가 앨캡을 정복했는지 엘캡이 나를 정복했는지 확신할 수 가 없었다.(워렌 하딩 183쪽)
# 산에 대한 경외, 자기 성찰, 자신과 남에게 힘을 주기 위해. 정복욕,자기 능력 과시, 사람간의 관계- 우정등, 국가주의 대표선수(올림픽 국가대표와 같은~)
# 산사람이 글도 같이 쓰면 좋겠다.
#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느냐는 것을 결정하는 인자: 본성(특질과 성격), 직관,이성
# 알프스에서의 황금시대: 19세기 중엽. 1854년 앨프리드 윌스가 베터호른 초등,1865년 에드워드 웜퍼가 마터호른 초등시기.
4천미터급 고봉 60개 포함 149개의 알프스 봉우리가 초등됨.
알프스 3대 북벽의 초등경쟁, 에베레스트에 대한 영국의 집념,낭가파르바트에 대한 독일의 집념, 히말라야 14좌 초등 경쟁: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적 색채가 깃들여 있었다.
독토가 끝난 후 쓰는 비판적 독후감
모든 글은 소설적 요소가 있다는 말이 있다. 객관적 사실를 중요시하는 역사 기술도 그렇고, 개인적 체험에 기반한 글도 그렇다. 책은 누군가 읽는것을 전제로 나오는 거고 독자들에게 흥미를 끌게 하는 요소가 과장되게 들어갈 수 밖에 없다.이 책에도 과장과 교훈의 요소가 알맞춤하게 들어가 독자의 일독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글이 가지고 있는 기본 의의와 정신을 훼손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을 알고 균형적인 시선을 유지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전문산악인이나 그 곳에 관심을 가진 열혈 지지층들에게 물어 보면 동상이나 부상,사고는 충분히 예방 할 수 있다고 한다. 조금만 신경쓰면 사고를 막을 수 있으니 등반은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등산에 문외한인 우리는 책을 통해 암벽 등반이 목숨을 내 놓는 순교자적인 도전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른바 책을 통한 지식의 vias다.
두번째는 등반을 같이 한 두 분의 관계가 그리 아름답지 않고 해피앤딩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들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났고 엄혹한 상황에서 그들의 하나 하나 몸짓들이 서로에게 상처준 바도 클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그 끝을 아릿하게 애매하게 정리하기 보다는 끝까지 거칠게 몰아 야성의 그 끝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또한 마지막 성찰하고 정리하는 글들에는 저자의 순수한 글쓰기보다는 전문 작가의 개입이 의심되는 부분이 있었다. 등반에서 일반적 삶으로 일반적 삶에서 다시 등반의 철학으로 정리되는 문장은 중고등학생 대상 교훈용 책으로 만들었다는 의심을 갖기도 한다. 물론 이 문장들은 나에게도 좋은 성찰의 단서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저자에게 등반이란 삶이듯이 각 자 우리에게 삶의 등반이 있으니까. 어떤 자세로 어떤 가치를 부여하면서 자기 삶을 살아갈지를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등반의 거친 야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 결과도 끝까지 몰아 부쳐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산 속에서의 죽음을 상상하며 산 속에서 죽어간 산 사나이들의 삶을 생각하며 말이다.
끄
이 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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