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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동머리와 찔뚝머리
이 홍사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띨릴리!
메시지 알림소리가 울리며 메시지가 들어오는 그 시간 나는 빈 사무실 전기난로 앞 소파에서 외투를 뒤집어쓰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것은 아니고 몽롱한 가수면 상태였다.
조금 있다가 확인하지.
몽롱함에서 깨어나기 싫었다. 이제야 감기가 좀 옅어지는 모양이다. 흐르던 콧물이 약기운 때문인지 멈추었다. 약기운이 퍼져 정신은 더욱 몽롱하고 몸은 나른하며 착 가라지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찾아올 사람도 없고 전화가 올 곳도 없다. 이 시간에 오는 문자라면 스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을 쓰라는 대출 안내 문자가 요즘 들어 엄청 날아온다. 지우기 귀찮을 정도로 날아온다.
연 이틀을 누워 있었더니 후덥지근한 방이 어지간히 갑갑해 사무실로 내려왔다. 확실히 몸이 옛날 같지 않다. 감기가 걸려도 가뿐하게 뚝 떨어지지 않고 혹독한 몸살을 동반하여 지루한 기간 동안 사람을 휘둘러 놓고서야 떨어진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다. 마음만 청춘이지 몸은 아닌 모양이다.
몸이 착 가라지며 정신은 더욱 몽롱하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초원에서 하얀 염소가 새끼를 데리고 풀을 뜯고 있다. 초원이 아니라 골프장의 그린인 것 같다. 잘 다듬어진 초원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참 평화로운 풍경이다. 저러다가 골프장 관리인이 오면 쫓겨날 터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염소가 갑자기 비둘기로 변하는 것이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다. 비둘기 떼가 초원에 내려앉아 풀잎의 이슬을 쪼고 있다. 염소는 어디 갔을까? 초원을 둘러보아도 염소는 없다.
띨릴리!
또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후딱 정신을 차린다. 비둘기도 염소도 보이지 않는다. 뒤집어쓴 외투를 걷어내고 벽시계를 보니, 어라? 한 시간 반이나 지나 정오가 훌쩍 넘었다. 가수면 상태로 있었던 게 아니라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염소와 비둘기 꿈은 너무도 선명했다.
외투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검색했다. 나중에 온 것부터 먼저 검색했다. 첫 번째 검색한 메시지는 대출 안내문이다. 무슨 저축은행인데 신용불량자도 된다며 금리가 연 최저14%에서 최고28%란다.
이자가 참 얌통머리 없이 높다. 자세히 읽지도 않고 삭제했다.
그 다음에 읽은 메시지는 청첩이다. 보낸 이는 고등학교 동기인데 얼굴 기억조차 희미하다. 아들 장가를 보낸다는 청첩인데 날짜를 가만히 보니 바로 오늘이다. 시간은 열두 시, 지금 열두 시가 넘었다.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확인 해보니 열 시 사십 분이다. 예식을 겨우 한 시간 이십 분 남겨두고 보낸 메시지다. 아마도 잊고 있다가 예식장으로 가면서 생각이 나서 날린 메시지가 분명한데, 받고 보니 이거 참 혼란스럽다. 차라리 전화를 하지. 계좌번호도 같이 날리든가.
-이 친구, 이거 참 짬동머리 없구먼, 괜히 빚지는 기분이 드네.
짬동머리.
요즘은 쓰지 않는 말인데 갑자기 떠오른 말이다.
그 여편네 짬동머리가 없다. 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무슨 일을 그르치면 어김없이 그 말을 쓰셨다.
푼수가 없고 융통성이 없다는 말인데 경상도 사투리로 짬동머리가 없다고 한다.
짬동머리!
풀이하자면 짬은 틈을 지칭하는 우리말이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도 미세한 틈이 있다. 그 틈을 짬이라고 한다. 시간과 공간에는 분명 짬이 있다. 짬동머리란 짬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있는 여력을 얘기하는 것인데 국한혼용체로 쓰이는 우리말이다. 경상도 말에는 찔뚝머리라는 말도 있다. 짬동머리와는 약간의 의미 차이가 있는 말이다. 칠칠찮다는 얘기인즉, 깔끔하게 잘 챙기지 못하고 질질 흘리고 다니는 작자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참 오래 전에 널리 쓰였던 말인데 잊혀져가고 있다.
짬동머리와 찔뚝머리를 얘기하니 얌통머리라는 말이 또 떠오른다. 메시지로 날아온 저축은행의 고금리는 참으로 얌통머리가 없다. 그런 방법으로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게 아닌가,
얌통머리 없는 놈.
이 말은 어지간히 염치가 없는 작자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낯짝에 철판을 깔았다는 말이다. 짬동머리 없고 얌통머리마저도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거 사람이 짬동머리가 없으면 얌통머리라도 있어야지........
역시 아버지께서 자주 쓰시던 말이다. 경우에 어긋난 일을 당하면 하시는 말씀인즉, 얌통머리는 염치를 얘기하는 것이다. 얌통머리를 더듬으니 체통머리도 생각이 난다. 체통머리는 체면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못하고 체면치레를 못하는 인간을 두고 체통머리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말 할 나위도 없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둘러보면 제 나이나 분수를 모르는 체통머리 없는 인간이 엄청 많다.
가만히 생각하니 나 역시 그런 용어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객관적인 시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일은 분명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둘러보아야지. 체통머리를 생각하니 불쑥 떠오르는 양반이 있다. 이웃 동네에 사는 영감이다.
중절모에 가죽가방!
그 양반의 기억을 더듬으면 항상 먼저 떠오르는 낱말이다
빈가방영감.
어른들이 쉽게 불렀던 그 양반의 별명이다. 나는 그 양반의 성도 이름도 모르지만 이웃동네 배내에 산다고 들었다. 그 양반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려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를 처음 본 건 아마도 취학 전에 동네로 넘어오는 언덕배기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동네로 들어오는 신작로가 생기기 전이었으니 그 언덕배기가 동네 초입이라 해야 마땅하다. 온 동네가 초가집일색이었던 우리 동네에 부잣집만 기와집이고 또 한집은 함석지붕이었다. 기와집을 두고 부잣집이라고 불렀고 함석집을 양철집이라고 따로 불렀던 시절이다.
그 양반의 기억을 짚어보자.
육십 년대 중반,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기억이 희미하다. 유난히 얼굴이 새까맣고 깡마른 나는 누구와 놀고 있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그를 처음 보고도 단박에 누구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중절모에 모시두루마기, 가죽가방을 들고 언덕길을 올라오는 그 양반을 보고 첫 눈에 감을 잡았다. 아마도 여름이었던 모양이다. 그 영감은 언덕길을 올라오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중절모를 벗고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았으니까.
아, 빈가방이구나.
할머니와 아버지께서 밥상머리에서 하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었기에 알 수가 있었다. 빈가방이 고갯마루에 우물이 없는 초가집에 사는 꼽추할머니의 딸, 눈이 먼 노처녀에게 씨받이를 요청했다는 말도 들었고, 그 집에서 얼마를 받고 수락했다는 말도 들었고, 빈가방영감이 자신의 집으로 들이지 않고 빈가방이 오기로 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예닐곱 살쯤이었지만 눈치가 빤한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감 잡고 있었다.
그 눈 먼 노처녀는 당시에 마흔이 넘은 걸로 알고 있다.
빈가방이라는 별칭 뒤에 영감이라는 말이 붙었으니 당시 나이로는 환갑이 넘었을 게다. 어린나이에 생각해도 돈에 팔린 눈먼 처녀가 가련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환갑이라도 염색을 하면 젊은이 축에 들지만 당시는 아니었다. 상노인 반열에 드는 것이다.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어 개성을 존중하니 빈 가방을 메고 다니든, 도수 없는 안경을 끼고 다니든 남의 입에 오르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모두들 들판에서 일을 하는데 중절모에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가죽가방을 들고 길을 나서면 불특정 다수의 눈총을 받게 된다. 게다가 들고 다니는 가방이 멋으로 들고 다니는 빈 가방이라면 단박에 빈축을 사게 되는 것이다. 그 영감은 일철이든 아니든 외출이 잦았기에 면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날 언덕배기에서 놀면서 눈길은 빈가방영감을 따라 다녔다.
역시나 예상대로 꼽추할머니의 쓰러져가는 초가집 작은 방으로 헛기침을 하고 들어가는 걸 보았다. 어린 눈에도 그게 결코 멋스럽게 보이지는 않았고 체통머리 없이 보였다. 빈가방영감이 방을 들어가자 뒤이어 꼽추할머니가 세숫대야에 물을 떠서 방으로 들여보내는 게 보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눈 먼 딸 뒷물하라고 수발을 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씨받이, 눈 먼 딸의 수발을 드는 꼽추할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빈가방영감에게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눈 먼 딸 씨받이를 시켜도 꼽추할머니의 살림은 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해인가 다음해인가 정원 대보름날 꼽추할머니가 찰밥을 얻으러 동네에 다녔다. 당시에는 정월 대보름이면 오곡을 넣은 찰밥을 집집마다 푸짐하게 했다. 겨울이니 상할 일이 없어 찬 곳에 두고 몇날며칠을 먹던 시절이었다. 꼽추할머니가 큰 양동이를 들고 그렇게 다니면 마다하는 기색 없이 집집마다 한 주걱씩 퍼주곤 했다. 보름날뿐만 아니라 동짓날도 마찬가지였다. 꼽추할머니는 팥죽을 얻으러 다녔다. 그러면 한 국자씩 퍼주던 시절이었다. 동짓날인지 대보름날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니 기억이 희미하다. 아무튼, 팥죽인지 찰밥인지는 모르겠지만 꼽추할머니는 우리 집에도 거르지 않고 왔다.
어머니는 한 주걱 주면 인정이 상한다고하며 반 주걱을 더 퍼주었다. 찰밥인지 팥죽인지 받아서 나가는 꼽추할머니에게 나는 궁금한 것을 기어이 물었다.
-꼽추할머니! 빈가방 애기 낳았나요?
되바라진 내 물음을 들은 꼽추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다가 돌아보지 않고 삽짝을 나갔고 나는 어머니에게 등짝을 오지게 맞았다.
빈가방영감이 아들을 낳았는지 못 낳았는지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다. 그해인가 다음해인가 눈이 내리던 날 동산에서 놀다가 빈가방영감이 눈 먼 처녀에게 당시에는 귀한 선글라스를 끼운 채 팔짱을 끼고 조심스레 미끄러운 언덕길을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어디를 가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때도 가죽으로 된 빈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게 빈가방영감을 마지막 본 날이지 싶다.
또래의 친구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빈가방영감은 눈 먼 처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꼽추할머니의 남편 친구가 된다고 했다. 죽은 꼽추할머니의 남편은 근방 삼면三面에서 알아주는 목수였다고 했다. 친구인 빈가방영감의 소개로 이웃마을인 배내의 마을 앞 동제나무를 베어서 상여를 만들다가 목신木神이 노해서 미쳤고, 미쳐서 자살을 했고 가세가 기울었다는 소문을 아이들 입을 통해서 들었지만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고 정확한 소식통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그 말을 들으며 친구의 눈 먼 딸을 씨받이로 청했다면 빈가방영감은 체통머리에 얌통머리까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빈가방영감이 꼽추할머니 집을 들락거리던 그 무렵 꼽추할머니는 눈 먼 딸을 데리고 어디론가 이사를 하고 그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꼽추 할머니가 버리고 간 오두막은 목신이 붙어서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며 우리들은 그곳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지금 돌이키니 빈가방영감이 씨받이를 얻어 아들을 낳았는지 사뭇 궁금해지고 정말로 친구의 딸인지 친구의 딸을 씨받이로 청했는지, 그 목신이 노해서 미쳤다는 꼽추할머니의 남편이 빈가방영감의 절친한 친구인지 저어기 궁금하지만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다. 빈가방영감의 당시 나이와 눈 먼 딸의 나이로 추정하건데 꼽추할머니의 남편, 목수였다는 그 양반은 빈가방영감보다 나이가 많을 것으로 추측되니 아이들 말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건 오로지 아련한 기억에만 존재하는 다 지나간 남의 일이고,
뒤늦게 문자를 받은 친구의 결혼식은 어떻게 해야 짬동머리와 얌통머리, 그리고 체통머리를 유지할 수가 있겠는가?
일단 문자를 받았으니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바로 전화를 하기에는 짬동머리가 없는 노릇이다. 지금 시간이면 결혼식은 마쳤을 것이고 피로연 중일 것인데 전화 받을 짬이 없을 것이다. 내일쯤 전화를 해서 사정을 사실대로 얘기하고 계좌번호를 묻는 것이 체통머리를 지키는 것일 터이다. 얼굴도 못보고 꼭 축의금을 보내야 체통머리를 지키는 것인가? 그 친구가 축의금 때문에 문자를 날린 것인가? 그것 또한 생각해볼 문제다. 언제 짬을 내어 일삼아 찾아가서 대포나 한잔하며 빚진 기분을 상쇄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생각을 해보자.
지켜야할 머리가 체통머리뿐이 아니다. 체통머리를 거론하니 주변머리 없다는 말도 있고 소갈머리 없다는 말도 있고 버르장머리 없다는 말도 있다. 우리말에는 지켜야할 머리가 왜 이리 많아? 그걸 다 지키고 살려면 머리가 아프겠다. 짬동머리, 찔뚝머리, 얌통머리, 체통머리, 소갈머리, 주변머리, 버르장머리 이걸 각각 다르게, 적확한 의미를 지닌 영어나 불어로 번역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이 만큼 다양성과 발전성을 지닌 언어는 우리말 밖에 없을 것이고 외국의 번역가들이 한국어번역은 그래서 골치가 아프다고들 하는 모양이다.
몽골에서 일을 할 때였다.
데리고 있던 매니저 친바트라, 라는 녀석이 말했다. 한국의 존댓말은 엄청 헷갈린다고. 녀석은 한국에서 칠 년간 불법채류하면서 배운 우리말에 유창하다. 이 녀석은 한국 남자는 대가리가 둘이고 한국여자는 아가리가 둘이라는 농담까지 할 정도인데 어느 날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존댓말을 까딱 잘못 쓰면 상대에게 존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해주는 사물에게 존대하는 것이 된다며 나라에서 법으로 정해서 존댓말을 폐지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먹어. 먹어라. 처먹어. 드세요. 잡수세요. 식사하세요. 진지 드세요. 드시지요. 드시옵소서. 잡수시지요. 처먹어라. 이게 뭐에요? 그냥, 먹어! 로 통일하면 되지. 나라에서 법으로 그렇게 정하면 되잖아요.
그 말에 나는 녀석의 대가리를 툭 쳤다.
-아, 바른 소리하는데 머리는 왜 때려요?
-머리를 때린 게 아니라 대가리를 쳤다, 인마!
녀석의 말도 일리가 있다. 우리나라 아이들조차도 존대가 헷갈리는 모양이다. 음식점이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은 가끔 그런 말에 실수를 한다. 집에서 부모에게 존대를 쓰지 않으니 그런 모양이다. 그런 아이들은 앞에서 거론한, 다양하게 지켜야할 머리를 다 지키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언젠가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어느 후배가 술자리에서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이기적이며 버르장머리가 없다며 선생은 있어도 스승도 없고 어른은 있어도 어르신도 없으며 아빠는 있어도 아버지는 없다고 했다. 공부를 잘하는 놈도 까뒤집어 보면 대가리에 똥만 들었다며 선생이 된 게 후회스럽다고 푸념을 했다.
그때 나는 취기가 살짝 있었다.
-대가리에 똥만 들어가지고.......
마주앉아 같이 마셨으니 당연히 취기가 있는 그 후배의 말에 나는 적절한 대꾸를 달지 못하고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선생이 이래 체통머리가 없으니까 그렇지.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곳이 돼지국밥집이었는데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듣도록 일어서서 큰소리로 말했다.
-대한민국의 중고교 선생님들 대단히 수고 많으십니다. 대가리에 똥만 들은 놈을 가르치시느라고, 그래 가르쳐서 뭐에 씁니까? 인성교육을 시키세요. 인성교육! 빈가방이 되지 않게. 이 자리에 혹시 현직에 계시는 선생님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선생님으로서의 존재감이나 성취감이 노력에 못 미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을 겁니다. 인성교육을 시키지 않고서는.
그 후배나 다른 손님들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빈가방을 들먹였다. 말을 마치자 다른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이 박수를 쳤다. 공감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공감을 해도 집에 가면 제 자식들 하는 꼴을 제 눈으로는 얌통머리가 있는지 짬동머리가 있는지 버르장머리가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사물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아야 객관적인 시각이 생기는 법이다. 그 사물을 눈 안에 넣어두거나 너무 가까이서 보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자식들을 보는 안목 역시 마찬가지다. 헌데 요즘은 자식들을 모두가 애지중지 눈 안에 넣고 산다. 핵가족화 되어 아파트 문만 쿵하고 닫으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버르장머리가 없는 일이 오가는지 알 길이 없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이틀 동안 지독한 감기몸살로 누워있었는데 아들 녀석의 얼굴을 본 게 딱 두 번이다. 녀석이 집에 없었던 게 아니다. 제 방에 틀어박혀 낮에는 자고 밤에는 새벽까지 컴퓨터게임만 했던 녀석이다. 녀석이 아버지 좀 어떠시냐고 문을 열어서 본 게 아니라 밥상머리에서 두 번 마주쳤는데, 아버지 골골거리지 말고 병원에 가서 혈관주사나 한 대 맞으라고 핀잔만 주던 녀석이다.
-야, 인마! 남의 걱정은 하지 말고 제발 게임 그만하고 나가서 참한 아가씨나 하나 낚아채라. 장가 안 갈래? 아버지는 네 나이에.......
얘기가 거기까지 가자 밥상머리에 앉은 아내의 눈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뒷이야기는 안 들어도 다 알고 있으니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라는 눈치였다.
-야! 아가씨 낚아채려면 젖이 좀 예쁜 아가씨를 낚아채라. 아버지 젖 좀 만지게.
-아버지가 왜 며느리 젖을 만져요?
-너는 어려서 내 마누라 젖을 안 만졌냐? 빚 갚아야지.
-그래요. 많이 만지세요.
아내의 눈치에 분위기를 와해시킨다고 한 말이다. 얌통머리 없이 우리가 지켜야할 머리를 까발리지만 우리 집도 까놓고 남에게 보이면 객관적으로 어떻게 평가를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 자식을 짬동머리 지닌 놈으로 만들고 싶은데, 햐! 미치겠다. 뜻대로 안되는 게 자식농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해봤어?
특별할 것도 없는데 유명하게 되어버린 이 말이 갑자기, 불쑥 생각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어느 재벌 총수가 한 말인데 중역회의에서 임원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면 반드시 이 말로 임원들의 주둥이를 쳤다고 들었다. 참으로 뼈대가 있는 평범한 말이다.
해봤어? 해봤냐구?
그 양반 젊은 시절에 집에 소를 끌고 가출해서 짬동머리 하나로 신화를 창조한 인물이다. 그 양반에 비하면 나는 한없이 초라한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어린 시절에 집에 있는 소를 끌고 가출할 만큼 간덩이가 크질 못했다.
신화창조.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나도 명함에 신화창조 팀이라고 써놓았고 팀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자식농사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자 그 양반이 나에게, 해봤어? 하고 묻는 것 같다. 그렇다. 해보자. 내 뜻대로 되게 가르쳐보자. 무엇보다 짬동머리를 지닌 놈으로 만들어 보자. 짬동머리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가르쳐야하는 품목이다. 당장 올라가서 녀석을 꿇어앉히고 싶지만 지금은 감기로 인하여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뿐더러 녀석과 실랑이를 벌이기가 귀찮은 지경이다. 녀석을 꿇어앉혀놓고 소를 끌고 가출하라고 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집에는 소가 없다. 그럼 집문서와 인감도장이라도 들고 가출하라고 할까?
소를 끌고 가출한다고 다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 소를 사서 고삐를 쥐어주고 가출 안 시킬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 양반 짬동머리와 운수가 어지간히 작용을 했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 소고삐를 쥐어주고 가출 시키면 석 달이 안 되어 빈손으로 돌아올 것이다.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승승장구한 걸 보면 그 양반 팔자에 재물운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하니 그 양반 평생에 실패한 건 딱 한번이다. 대통령 후보가 되어 출마에서 낙선했다. 재물운수는 있었지만 권력에 대한 운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 양반 출마에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정계가 제계 위에서 군림하며 어지간히 쥐고 흔들었다는 다수의 목소리가 있었고 나 역시 그 점에는 공감하는 바이다. 그 양반 선거결과가 발표되어 낙선이자 바로 미국으로 줄행랑을 치면서 자신은 일군 그룹을 거론하면서 그 그룹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시사하고 있는 의미가 더 컸다. 분명히 가해질 정치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리라.
짬동머리를 거론하다가. 정말 짬동머리에 얌통머리까지 없는 정치얘기가 거론 되었다. 일단 정치얘기라면 나도 닭살이고 밥맛이다. 텔레비전에서 정치뉴스와 정치에 대한 좌담은 보지 않을뿐더러 술자리에서 정치얘기가 나와 누가 열을 올리면 술값을 계산을 하고 슬그머니 빠진다.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듣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신문도 정치면보다는 사회면이나 문화면을 먼저 읽는다. 정치면을 읽다가보면 참으로 얌통머리 없는 말들이 오간다. 그걸 다 삭이려면 열 받아 죽는다. 만수무강에 지장을 초래하는 정치얘기는 그만하자. 다시 감기가 도질라.
재작년인가 나에게는 하나뿐인 당숙어른께서 돌아가셨다.
찔뚝머리를 생각하니 당숙어른의 장례식, 그 날이 느닷없이 떠오른다.
당숙은 아흔하나, 천수를 누린 것이니 호상이라 하겠다. 당숙은 딸 넷에 느지막하게 아들 하나를 두셨는데 하나있는 그 육촌 동생이 영일이다. 이영일, 하나뿐인 육촌 동생이다. 언젠가 이 녀석이 사인을 하는데 보니 단순하게 %라고 휘갈겨 쓰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는 0이 두 개, 1이 한 개, 201, 이영일이 아니냐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아무튼, 고인인 당숙의 사위이고 나와 영일에게는 매형으로 불리는 위인은 많지만 옳은 상주는 영일뿐이었다. 그 매형들도 모두 서울촌놈들이라 이 지방의 장례 절차도 모를뿐더러 연세가 있어 팔짱을 끼고 있었으니 본의 아니게 내가 장례집행위원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사흘간 빈소를 지키며 장지부터 음식까지 하나하나 다 검토하고 챙겨야만 했다. 영일은 슬하에 남매를 두었으니 영일이아들 준이가 삼대독자가 되는 셈이다. 발인을 하는 날 아침 아침을 일찌감치 먹고 발인제를 지내고 운구를 하는데 영정사진을 들고 선도차량을 탈 준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빈소를 거두면서 내가 영정사진을 들고, 사진을 모시고 앞장 설 준이를 찾자 육촌 제수씨가 나섰다.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울컥, 속에서 단단한 솜뭉치처럼 생긴 것이 올라와 울대 밑을 막는 듯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따로 없었다. 울대를 막고 있는 솜뭉치를 삼키고 가까스로 물었다
-아니, 제수씨! 할아버지 발인하는데 장손을 학교에 보내요?
-고삼인데 어떻게 해요?
제수씨는 아주 찰진 목소리로 낭창하게 되받았다. 그 소리에 손이 떨려 하마터면 들고 있던 액자를 떨어트릴 뻔했다.
고삼이라 학교에 보냈다?
찔뚝머리하고는.......
그 말을 뱉지 못해 더 숨통이 막혔다. 형수나 누나 같았으면 그 소리를 하며 난리를 낼 터이지만 제수씨라 그렇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학교에 간 놈을 불러올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는 영정사진을 모실만한 위인을 찾았다. 다행히 군복무 중인 고인의 외손자 한 녀석이 휴가를 나와서 뒷전에 얼쩡거리고 있었다. 그 녀석을 불러 군복을 입은 녀석에게 영정사진을 들게 하고 장지로 향했다.
조부님 돌아가셨는데 장손이 되는 녀석이 학교에 갔다? 그날 학교에 가서도 공부가 제대로 될까만 그렇게 공부해서 뭐하나? 고삼이면 가례에 면책이 되는 벼슬인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보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배울 게 더 많다는 게 내 지론이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제수씨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그렇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갔는지 소식을 듣지 못해 나는 알지 못한다. 당숙어른이 돌아가시고 명정 차례나 제사를 따로 모시게 되었으니 그 제수씨를 못 본 지도 오래 되었다.
몸이 나른한 게 착 가라진다.
의자에 등을 더 깊숙이 묻지만 몽롱한 게 구름 위에 올라앉은 기분이다.
몸을 놀리지 않고 웅크리고 있으니 내 사유는 마치 무논에 첨벙거리며 다니는 소다리처럼 옛날기억 여기저기를 첨벙거린다.
찔뚝머리와 외손자, 그리고 장례식을 운운하니 문득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르며 지금은 어디에 근무하는지 모르는 김 대리가 생각난다. 그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실없이 나온다. 당시에는 은근히 화도 나고 황당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우습다.
몇 년 전의 일인데 그 사건을 두고 짬동머리가 없다고 해야 할지 찔뚝머리가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황당했던 건 사실이다.
거래처의 토목대리가 할머니 상을 당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나는 그 현장 사무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들었다. 내 소유의 중기를 직접 배차하는 담당이라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화환을 보내기 위해 빈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안동의 무슨 병원이라고 시답잖게 대꾸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던 일이란 인부와 장비의 그날의 작업일지를 챙기는 잡무였다.
-김 대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빨리 가야지.
-요것만 마치고요.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꾸물거리고 있었다. 현장소장이 빨리 가라고 해도 커피를 마시며 할 짓을 다하고 있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 다음날 작업계획서까지 소장에게 제출하고서 늦은 저녁에 떠났다. 김 대리가 떠나고 소장과 현장의 동료 그리고 내가 다음날 단체로 문상을 가기로 하고 화환만은 그날 저녁에 보내기로 했다. 고인의 이름을 알 수가 없으므로 김 대리에게 들은 안동의 어느 병원이라고 장례식장만 일러주고 상주인 손자의 김 대리 이름으로 보냈다. 우리나라의 화환배달은 무슨 시스템인지 가공할 정도로 빠르다. 김 대리가 나가고 곧바로 소장이 보는 앞에서 전화를 해서 배달을 시켰으니 전화내용을 들은 현장소장은 아마도 김 대리보다 빨리 화환이 빈소에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저녁 무렵에 현장 사무실에 들러 김 대리 동료직원인 유 차장을 태우고 안동으로 향했다. 현장소장은 대구의 본사에 들렀다가 안동으로 바로 온다고 했다. 구미에서 안동까지는 두 시간 정도 소요되니 행정구역상 같은 경북이지만 결코 가깝다고 할 수는 없다.
유 차장과 두 시간 가량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달려서 김 대리가 말한 병원의 장례식장은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빈소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장례식장 입구에 내 이름이 적힌, 내가 보낸 화환이 통로 가운데 외로이 서 있었다. 화환이 있을 자리가 아닌데....... 뭔가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 화환이 왜 여기 서 있지?
-글쎄요, 이상하네.
들어가서 전광 안내판을 보니 빈소가 차려진 곳은 세 군데였다. 근데 이상한 것은 세 집 다 상주가 김 씨가 아니었다. 전광판에 적힌 상주의 이름은 권 아무개, 박 거시기, 최 누구였다. 아무리 훑어보아도 손자에 김 대리의 이름이 적힌 집은 없었다. 잠시 혼란이 일었다.
-김 대리가 병원을 잘못 알려준 거 아니야?
-일단 전화를 해보죠.
유 차장이 그 자리에서 김 대리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어느 병원이냐고 물으니 우리가 입구에 서 있는 그 병원 장례식장이라고 했다. 몇 호실이냐고 물으니 특실이라고 했다. 특실은 권 아무개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직 전광판 이름을 바꾸지 않은 모양이군. 거, 헷갈리게 만들어 놨네.
아무런 의심 없이 특실로 향했다. 빈소에 들어가니 우리가 들어서는 걸 본, 앉아서 담소를 나누던 상주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얼른 보아도 그 무리들 중에 김 대리는 없었다. 일단 빈소에 들어섰으니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유 차장과 나란히 서서 읍을 하고 내가 꿇어앉아 향을 하나 피워 올렸다. 그 때 얼핏 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김 대리가 상주들 옆에 섰다. 향을 롤리고 빈소에 예를 다하고 상주들과 맞절을 하고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김 대리를 가리키며 회사동료들이라고 하니 상주들이 저어기 놀라는 눈치였다.
외조모 상에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연세가 지긋한 상주가 했다. 외조모? 귀가 확 튀는 소리였다. 전광판의 안내문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김 대리는 상복과 두건은 고사하고 삼베완장도 하나 얻어 걸리지 못하는, 직계에 없는 촌수였다. 현장에서 떠날 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접빈실로 안내되어 상을 받았는데 마주 앉은 김 대리라는 녀석이 찔뚝머리 없게 보여서 그런지 앉은 자리가 어색했고 음식을 삼키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음료수 몇 모금 마시고 일찌감치 자리를 털었는데 김 대리가 장례식장 입구까지 따라 나왔다.
통로를 막고 있는, 내 이름이 적힌 화환을 보자 불현듯 발로 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가까스로 참고 김 대리보고 화환을 안으로 들여놓으라고 했다.
주차된 차에 타자 김 대리가 꾸벅 인사를 하고 화환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고 담배를 찾다가 조의금 봉투가 주머니에 그대로 있음을 알았다. 외손이라는 말에 놀라 부의함에 봉투를 넣는 걸 잊은 것이다.
-이거 어떻게 하지?
-그대로 갑시다. 누구에게 들어온 조의금인지도 모를 텐데.
유 차장도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놓고 있었다. 외할머니라는 말만 했어도 거기가지 가지 않고 적당하게 체면치레를 했을 터인데, 입맛이 썼다.
차를 돌려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유 차장의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내용으로 미루어 현장소장이 도착했느냐고 묻는 전화였다. 현장소장은 대구의 본사에서 이제 회의를 마쳤다고 했다. 유 차장은 김 대리가 외손이라는 말을 하고 못 갈 자리에 간 듯해 면구스러워 혼났다면서 차를 돌려 현장사무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저녁도 굶고 구미에 내려오니 상당히 늦은 저녁이었다. 현장사무실에 기다리고 있던 소장과 부근의 돼지국밥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반주로 소주를 마시며 찔뚝머리 없는 녀석에 대해 얘기했던 기억이 새롭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지녀야할 머리가 많다.
나는 그 머리를 다 지키고 있는가?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어떻게 보일지.
감기가 좀 옅어지는 모양이다. 실로 대단한 감기몸살이었다. 이틀간 누워만 있다가 일어났더니 첨벙첨벙, 내 사유는 짬동머리와 찔뚝머리 없는 기억에만 첨벙거리며 다녔다. 토요일이지만 현장을 돌아보아야한다. 중장비 차주라면 최소한 사흘에 한 번은 현장에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법인데 그러질 못했다. 돌아보아야할 현장은 많은데 몸이 착 가라지는 게 정신이 몽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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