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4일
경복궁과 청와대 일원 답산시 작성하여 참석하신 회원님께 배포한 자료입니다.
한국참풍수지리학회
작성자 : 수암 이정희
조선의 개국과 한양천도(遷都)
한양전도
⚬ 1392년 개경에서 건국한 조선이
1394년 10월 28일에 한양으로 천도한 후
518년간 조선의 수도 였으며,
⚬ 1910년 8월 22일 조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후
35년간 지속된 일제강점기에도
우리민족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수도였고,
⚬ 1945년 8월 15일 독립한 후
한양이라는 명칭이 서울로 바뀌기는 하였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수도다.
1. 계룡산 하 신도안 천도주장
1392년 7월 17일에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500년 도읍지이면서 고려의 권문세족이 정치, 문화 경제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잡기 위해 천도를 결정하였지만 공론만 무성할 뿐 시간만 허비하고 있어, 남은(南誾)과 풍수지리에 통달한 태실고증사(胎室考證使) 권중화(權仲和)에게 도읍지로 적당한 명당을 찾아 볼 것을 명하였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은 권중화는 천도할 곳을 물색하던 중 옹산(翁山,계룡산의 옛 이름)의 지형도를 그려 바쳤고, 이에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친히 신도안을 찾아 살펴본 후 무학대사는 천황봉에서 쌀개봉과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상이고, 천황봉에서 향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비룡승천(飛龍昇天)하는 형상의 명당이라고 주장을 하였고, 계룡산 하 신도안(지금의 계룡대)이 길지라는 권중화와 무학대사의 주장에 따라 태조 이성계는 급한 마음에 신도안을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하고 공사를 명하여 왕궁을 조성하기 시작한지 약 10개월이 지난 후
개국공신이었던 경기도 관찰사 하륜이 계룡산 하 신도안에 지금 짓고 있는 궁궐은 남쪽으로 너무 치우쳐있고, 산은 서북방(乾坐)에서 뻗어 왔는데, 물은 동남방(巽破)으로 흘러가니 이는 곧 수파장생쇄패립지(水破長生衰破立地, 포태법으로 쇠향)니 새 도읍지로 부적합하고, 더구나 신도안은 국토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치우쳐 북쪽의 여진족을 막아내기 어렵고, 내륙이라 바다하고 거리가 멀어 서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물리치기 어렵다는 주장에 공사는 중단이 되었고, 신도안 천도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도안의 현재 모습)
(신도안의 주초석)
신도안에 있는 주초석은 충남지방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계룡대 내에 있어 일반인은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1) 계룡산 하 신도안에 대한 견해
계룡산 하 신도안은 현재 계룡대가 들어서면서 예전의 형상을 살펴볼 수가 없어서 예전의 궁궐지가 혈이 맺혀 있는 명당길지 인지 여부는 판단이 불가능 합니다.
대둔산에서 바랑산과 천호봉을 거쳐 계룡산으로 오르는 금남정맥과 계룡산을 세운 후 동쪽으로 진출한 용맥이 백운봉을 세우고, 백운봉에서 다시 남쪽으로 뻗어 내려서 조개봉을 세우는 용맥 사이에 보국이 형성되어 있는 안정처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 신도안 입니다.
전체적인 국세(局勢)가 넉넉하게 잡아도 약 600만평에 밖에 되지 않아 일국의 수도 입지로는 그 면적이 부족하다는 의견에 공감이 가고,
많은 사람이 집단으로 거주하려면 물이 풍부해야 하는데, 신도안 주변은 깊은 골이 없어 큰 물줄기가 없음으로 도읍의 주민이 사용할 수 있는 물이 부족한 것에도 공감이 갑니다.
삼남에서 생산 된 곡물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운송수단이 육로 보다는 배에 의존하던 시절이기에 금강과 거리가 멀어 곡물의 수송에도 어려움이 많다는 하륜의 주장에도 공감이 됩니다.
또한 신도안 라운드를 벗어난 동쪽의 분지는 신도안에서 약 16km, 남서쪽 분지는 약 20km에 달해 도보 외에는 별도의 교통수단이 없던 그 시절에 걸어서 왕래하기에는 다소 멀어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 주변의 분지를 위성도시로 정했다 한들 많은 사람이 거주하기는 역시 부족하고 불편한 점이 있어 도읍지로 위상을 갖추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도안은 마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와 같아서 축성을 쌓아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2. 무악산 하 천도주장
계룡산 하 신도안이 새로운 도읍지로 불가함을 주장한 하륜은 새로운 도읍지로 한양을 적극 주장하였는데,
한양의 중심에는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내명당수(청계천)가 흐르고, 그 바깥에는 동출서류(東出西流)하는 한수가 흐르고 있는데, 그 형상이 수태극(水太極)를 이뤄 서로 흐름이 반대임으로 내명당의 기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막아주는 형세이며,
한양은 바다와 지척에 불과해 삼남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해상을 통해서 수송하기도 편리하고, 내륙으로 수송하기도 편리하며, 한양은 서북쪽 지대가 높아서 겨울에 서북에서 불어오는 강한 계절풍을 막아줄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이라고 주장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륜이 정작 궁궐지로 주장한 곳은 무악산(지금의 안산) 하(지금의 연회동과 신촌 일대)인데 하륜의 주장에 따라 태조 이성계는 친히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서운관 등과 무악산(안산)에 올라 살펴보게 한 뒤 의견을 물은 바 무악산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약하고 도성으로서 부지가 좁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무악산(안산) 하 도읍지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10년 후인 1404년에 무악이 다시 도읍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경복궁에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벌이며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정도전을 참살한 태종 이방원은 경복궁으로 다시 들어가기가 싫어 새로운 곳으로 궁궐을 옮기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악산(안산) 하가 다시 유력한 후보지로 재거론 된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태종 이방원은 1404년에 무악산(안산) 서쪽에 100칸이 채 못 되는 별궁을 지어 서이궁(西離宮)이라 불렀다가 연희궁(延禧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1) 연희동 일대에 대한 의견
무악산(안산) 서쪽에 이궁을 지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정설인 것으로 보입니다.
연희동에서 서대문구청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대궐재이고, 이궁을 무악산(안산) 서쪽에 지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정도전, 서원관 등이 안산에 올라 입지가 좁고 용호사가 약하다고 주장한 것을 봤을 때, 도읍지로서 입지가 좁다는 의견에는 동의를 하지만, 위의 위성사진에 표시한 바와 같이 용호사가 약하다는 의견에는 동의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연희궁의 입지가 무악산(안산)의 정서방(지금의 연희동)일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도성 밖 15리 양주에 있다는 궁궐지(宮闕志)의 기록을 참고해서 그 지점을 예측해 봤을 때 지금은 산자락을 자르고 차가 왕래할 수 있는 도로를 개설해서 거리가 많이 단축이 되었지만 그 시절만 하더라도 산자락과 산자락 사이에 개천을 따라 대부분 도로가 나고 그 도로를 따라서 왕래를 하였기 때문에 그런 지형을 감안하면 지금의 연회동은 광화문에서 약 이십 오리에 가까운 거리로 궁궐지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2) 신촌 일대에 대한 의견
문화재청에서 연희궁 터로 인정하는 곳이 연세대학교 정문 우측인데,
이 지형을 잘 살펴보면, 북악산에서 급락한 후 질단과협(跌斷過峽)을 형성하고, 다시 돈기(頓機)하여 인왕산을 기봉한 용맥이 남쪽에 범바위를 거쳐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다시 과협을 놓고 일어서 무악산(안산)을 세웠는데, 이 무악산(안산)이 지금의 연세대학교의 주산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악산(안산)에서 정방(丁方)으로 힘차게 뻗어 내린 용맥 진처에는 현재 연세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좌우에는 좌청룡과 우백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속에 좌청룡과 우백호가 감추어져 있겠지만 위 위성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즉 주택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낮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정도전, 서원관 등이 무악(안산)에 올라 용호사가 약하다는 주장을 한 것과 일치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륜은 삼도에서 생산된 곡식을 도성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양화진이 가깝다고 주장하였는데, 양화진도 지척에 있는 점 등을 감안 했을 때, 문화재청이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3. 한양천도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정도전, 서원관 등이 무악산(안산)에 올라 아래를 둘러보고, 도읍지로 삼기에 부족하다는 의견을 교환하고 최종적으로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면서 북악산을 현무로 삼고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 목면산(남산)을 안으로 삼아야 한다는 정도전의 주장과, 인왕산을 현무로 북악산을 좌청룡, 목면산(남산)을 우백호 낙산을 안으로 삼아야 한다는 무학대사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는데,
중국의 모든 궁전과 고려의 궁전도 남쪽을 지향하였고, 임금도 남면하는 것이 유학의 덕목이라는 정도전의 주장과 조선의 억불승유정책(排佛崇儒政策)이 상통하여 무학대사의 주장이 힘을 잃게 되고, 무학대사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정도전의 주장이 받아 드려져 결국 현재의 경복궁 입지에 궁궐을 짓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 경복궁 입지에 대한 의견
(1) 주산현무인 백악산과 내룡
경복궁의 주산현무에 해당하는 백악산과 경복궁으로 입수하는 내룡의 형상을 살펴보면, 백악산 정상에서 경복궁으로 입수하기 전에 뻗어 내리는 내룡이 불과 1km에 불과 한데, 백악산은 화강암과 화강암이 풍화되어 생성된 마사토로 이우러져 있어서 풍화작용과 빗물에 씻겨 골이 깊게 파이고 갈라져 그 형상이 흉하기 까지 합니다.
내룡이 세분화 돼서 수없이 갈라지면 용맥이 내포하고 있는 지기가 누설(漏泄)되기 쉽기 때문에 주산현무의 정신과 그 성정을 용진처 까지 온전하게 유통하기 용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형상만 살펴보았을 때 한 나라의 정사를 주관하고, 임금이 숙면을 취할 입지의 현무와 내룡으로 적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2) 좌우균형
위의 위성사진을 살펴보면, 근정전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주산인 백악산에서 창덕궁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뻗어 내리는 낮은 구릉을 형성하고 있는 용맥이 있고, 우측으로는 인왕산과 인왕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리는 용맥이 있습니다.
근정전에서 창덕궁이 자리 잡고 있는 좌청룡이 1.4km, 우백호인 인왕산 자락이 1.2km로 거리만 봐서는 좌우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별다른 흠이 없어 보입니다만 좌청룡은 낮은 구릉에 불과하고, 우백호는 높고 강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곳에 궁궐의 입지를 정할 때 좌측으로 2.8km떨어져 있는 낙산을 좌청룡으로 보았는데, 낙산은 혜화문에서 흥인지문(동대문) 쪽으로 뻗어 내리는 용맥을 말하는데, 좌청룡인 낙산은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서 두 배 이상 멀고 기세도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우측에 있는 인왕산에서 한 줄기가 길게 빠져 경복궁 정면을 가로 질러 목면산(남산)을 기봉한 후 동북쪽으로 뻗은 일맥은 하왕십리에 무학봉을 세운 후 사근동까지 뻗어나가고 다른 한줄기는 동남으로 진출하면서 큰매봉과 응봉산을 세우는데, 전체적으로 빈약한 좌청룡에 비해서 지나치게 그 세력이 강한 것이 흠으로 보입니다.
왕조국가에서 왕이 권위를 세우고 왕권을 굳건하게 하려면 청룡이 백호에 비해서 그 세력이 월등하게 강하고 활발해야 하는데, 경복궁의 입지는 청룡이 빈약한 반면에 백호는 지나치게 강하고 활발한 형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입지에 궁궐을 짓게 되면 왕이 권위가 서지 않고, 신하가 왕을 위협하거나 업신여기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 왕이 신하에게 끌려가거나 굴복하는 사례가 종종 일어나게 되거나 외부 세력이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경복의 입지는
군주는 최고의 통치권을 갖고 전국의 토지와 민을 지배하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재상(宰相)이 갖는 재상중심 체제를 지향 했던 정도전의 이성과 맞아 떨어지는 입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청와대 입지에 대한 평에서 다시 거론하겠습니다.
명당수가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형세에서 물이 흘러오는 서쪽은 높고, 물이 빠져 나가는 우측이 낮거나 먼 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3) 궁궐배치
경복궁 뒤편에 산의 형상을 하고 있는 부분이 위 위성사진에서 향원정 옆 부분인데, 산의 형상을 하고 있는 곳에서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을 거쳐 근정전까지 약 440m 달하는데, 그 사이에는 이렇다 할 용맥의 모습도 산의 형상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즉 주산현무인 백악산에서 낙맥한 입수룡이 청와대 좌청룡 부분에서 구릉을 이루는 부분이 약 200m에 달하고,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구릉에서 경복궁의 주 건물인 근정전까지 약 440m에 달하므로 총 640m정도 뒤편에 높은 산이 없다는 뜻입니다.
342m에 달하는 백악산을 주산현무로 삼았지만 경복궁의 주 건물인 근정전이 서있는 뒤편 약 600m 사이가 공허하기 때문에 백악산이 주산현무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위 궁궐의 배치도를 살펴보면, 왕비의 침궁인 교태전(사대부가의 안채), 왕의 침궁인 강녕전(사대부가의 사랑채), 근정전과 함께 대신들과 정사를 논했던 사정전, 경복궁의 주 건물인 근정전이 일직선으로 배치가 되어 있는데,
맥로(脈路)을 추적해본 결과 위 위성사진에 빨간색 화살표로 표시한 바와 같이 교태전과 강녕전, 사정전을 통과한 기맥이 경복궁의 주 건물인 근정전 뒤쪽 왕이 정좌하는 곳에 혈이 맺혀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혈이 맺혀 있는 꼭짓점에
일국의 정사를 논하는 주 건물의 주석에 맞추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대로 제왕을 생산하는 자리,
왕비의 침궁인 교태전이 현재 근정전 뒤쪽 약 140m 지점 과룡처에 지어져 있는데, 교태전의 입지가 합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모름지기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였음으로 일국을 경영하는 왕을 생산하는 왕비의 침궁은 반드시 혈이 맺혀 있는 명당길지에 입지를 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할 일일 것입니다.
경복궁은 일국의 제왕을 생산하는 교태전을 과룡처에 배치함으로써 조선의 왕들은 대대로 혈이 맺혀 있는 명당길지에서 발산하는 산천의 정기(精氣)를 온전하게 받고 태어나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고택의 입지를 살펴보았을 때 약 80%이상이 혈이 맺혀 있는 명당길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되었는데, 혈이 맺혀 있는 명당길지에서 발산하는 산천이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들이 대부분 고관대작이 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왕손이라는 이유로 대대로 국가를 경영해야 할 왕위에 오른 왕들이 혈이 맺혀 있는 명당길지에서 산천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대신들을 인도하면서 자주적으로 한 나라를 온전하게 경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교태전은 반드시 산천의 정기가 응결되어 있는 명당길지에 그 입지를 정해야만 명당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왕들이 신하들을 인도하면서 국가를 원활하게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조선의 역사도 달리 쓰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 인왕산 주산현무론(무학대사 주장)
한양천도가 결정되고 태조 이성계로부터 궁궐의 입지를 찾아 달라는 부탁 받은 무학대사가 동야(東野, 지금의 왕십리)에서 지세를 살피고 있을 때 밭을 갈고 있던 노인이 “미련하기는 마치 무학 같은 소야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는 구나”라고 소를 꾸짓자 깜짝 놀란 무학대사가 노인에게 묻기를 “지금 소한테 무학같이 미련하다고 하셨는데 내가 무학이요. 내 생각에는 이곳이 도읍지로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디 더 좋은 곳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그 노인이 채찍으로 서쪽을 가리키면서 “여기서 십리만 더 들어가 보시오”했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데, 하왕십리에는 실제로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무학봉이라는 산봉이 있고,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학대사가 서쪽으로 10리를 더 가서 찾은 궁궐의 입지가 현재 경복궁이라는 설도 있지만, 무학대사가 인왕산 주산현무 론을 주장한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통 주산현무는 용진처에 혈이 맺혀 있는 곳을 기준으로 삼아 혈이 맺힌 지점으로 뻗어 내리는 용맥의 근본이 되는 산봉을 주산현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경복궁 위치에 왕궁을 건립을 하되 방향만 동쪽으로 돌려서 짓자는 주장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학대사가 주장한 인왕산 하 입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인왕산 하의 지세를 살펴보았을 때 대략 배화여고 밑 부분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입니다.
(1)인왕산 하에 입지를 정했을 때 전체적인 국세
인왕산 하에 왕궁을 지었을 때 위 위성사진에 표시한 바와 같이 좌측에 있는 백악산에서 뻗어 내린 여러 용맥들이 대부분 앞으로 도래하여 안을 형성하게 되고, 인왕산에서 우측으로 길게 진출한 용맥은 약간 내려앉았다가 다시 일어서 목면산(남산)을 기봉한 후 다시 동북으로 진출하여 하왕십리에 있는 무학봉까지 뻗어 나가면서 북쪽으로 분지한 여러 줄기의 용맥들이 뻗어 내리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왕산 하에서 수세를 살펴보면, 백악산 하에서 발원한 물이 좌수도우(左水到右)한 후 방향을 바꿔서 좌청룡에서 뻗어 내린 지엽(枝葉)과 우백호에서 뻗어 내린 지엽(枝葉) 사이를 뚫고 앞으로 길게 소수(消水)가 되는 형세를 이루고 있는데, 풍수지리에서 물이 혈 앞으로 길게 빠져나가는 형세를 꺼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무학대사가 주장한 인왕산 하에서 앞을 봤을 때 좌측에 있는 백악산에서 뻗어 내린 지엽들이 앞으로 도래하여 층층이 높아지는 형세를 이루고 있음으로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청계천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즉 백악산 하에서 발원한 청계천은 인왕산 하를 지난 후 인왕산에서 뻗어 내려간 후 경회궁과 덕수궁을 거쳐서 남산으로 오르는 용맥을 따라 남으로 흐르다가 경회궁 근처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음으로 인왕산 하의 지기가 청계천을 통해서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물의 영향을 받아서 설기(洩氣) 될 우려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인왕산 하에 입지를 기준으로 용호사의 기세
인왕산 하에 궁궐의 입지를 정했을 때 좌우용호사의 기세를 견주어 보면, 좌청룡에 해당하는 백악산은 높고 가까우며 백악산에서 뻗어 내린 후 인왕산 하 앞으로 길게 늘어지는 여러 줄기 지엽의 기세가 등등한 반면,
인왕산에서 우측으로 빠진 후 낮아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남산을 기봉은 하였지만 남산은 거리가 멀고 가까운 곳은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기세가 약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좌청룡은 강하고, 우백호는 약한 형세로
군주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외풍이 적은 이상적인 형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주산현무로서의 인왕산
인왕산도 백악산과 같은 화강암과 화강암이 풍화되어 생성 된 마사토로 이루어진 산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 위성사진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인왕산은 서북을 등지고 있어서 백악산에 비해서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형상이고, 빗물의 씻김에 의한 갈라짐이 백악산에 비해서 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백악산과 인왕산이 같은 토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주산현무인 인왕산 하로 뻗어 내리는 용맥은 그 형태를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음으로 주산현무인 인왕산이 품고 있는 성정과 정신을 용진처까지 온전하게 유통하는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므로 인왕산은 주산현무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인왕산 하 입지에 대한 총론
무학대사가 주장한 인왕산 하 입지는 위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인왕산이 주산현무로 손색이 없고,
용호사의 기세를 견주어 봤을 때
좌청룡은 강하고, 우백호는 약한 형세로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고,
좌청룡에서 뻗어 내린 지엽들이 왕궁 앞으로 도래하여 층층이 높아지는 형세를 이룸으로써 사세(四勢)를 두루 갖춘 입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궁궐의 주인은 주인으로써 면모를 갖추고 권위를 세울 수 있음으로 빈객은 주인(왕)에게 순종하는 지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정사를 논함에 있어 대신들을 제압하면서 소신을 갖고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고, 왕과 대신들의 융화를 이루기만 한다면 무궁(無窮)한 발전과 영화가 기약되는 입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해석도 청와대 입지에 대한 평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습니다.
4. 청와대
청와대는 정치하는 모든 사람들이 입주하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지금까지 청와대에 입주했던 사람들의 말로는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1) 청와대 터에 대한 역사
지금의 청와대 터에 처음 건물이 들어선 것은 고려 숙종 때 김재위란 풍수가가 천도를 주장하면서 1104년에 궁궐을 지었는데, 수도인 개경(開京), 평양에 설치된 서경(西京)과 함께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이었고,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고 현 경복궁의 입지에 궁궐을 지으면서 후원으로 사용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 사라진 후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고종대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청와대 터에도 네 개의 전각을 세워 과거장이나 연무, 권농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경무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조선총독부관저 부지로 선정하여 6대총독 미나미 지로를 비롯한 3명이 총독관저로 사용하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치하에서 미국 군정장관 존하지 중장이 관저로 사용을 하였고, 1948년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이 되면서 대통령관저로 사용이 된 후 이승만 대통령이 “깨우칠경” “힘쓸무”를 써서 경무대(警務臺)란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노태우대통령시절 청와대 구 본관을 헐고 2년 2개월간 공사 끝에 본관과 관저, 춘추관 등을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청와대 터에 역사는 카누핀을 참조하여 가필)
2) 청와대 주산현무로서의 백악산
백악산을 형성하고 있는 지질과 내룡에 대해서는 경복궁 입지에서 설명을 하였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3) 입수와 용호사
청와대로 입수하는 용맥은 직접 확인을 할 수 없기에 위성사진에 힘을 빌려서 그 모습을 살펴보면, 아래 위성사진에 녹색 선으로 표시한 바와 같이 청와대로 입수하는 용맥이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되고, 청색 선으로 표시한 부분으로 뻗어 내리는 청룡과 흰색 선으로 표시한 부분으로 뻗어 내리는 우백호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밖에서 청와대를 바라보았을 때 청와대가 공중에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그것은 청와대가 용호사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즉 밖에서 청와대를 살폈을 때 위성사진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용호사가 확실히 있는지도 의심이 들지만 설령 있다고 한들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산현무에 해당하는 백악산에서 급락한 후 인왕산으로 오르기 전 질단과협처(跌斷過峽處)에 해당하는 창의문을 넘어오는 서북풍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하는 지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오는 바람이 있으면 가는 바람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바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산허리 부분에 앉아 있는 청와대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이런 지형은 좌우로 유통되는 바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기(生氣)의 응집(凝集)이 어려워 혈이 맺힐 수 없는 지형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혈이 맺혀 있는 명당길지가 될 수 없는 입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청와대 입수맥의 행로
청와대로 입수한 용맥의 맥로를 살펴보면, 청와대를 통과한 기맥이 청와대 본관 앞마당과 경복궁 북쪽에 나 있는 신무문을 통과 한 후 태원전과 건천궁 사이를 가로질러 장고 뒤쪽으로 뻗어 내린 후 경회루 쪽으로 행도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경회루가 서 있는 곳은 못을 조성하였기에 기맥이 이곳까지 미쳤는지는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하지만 장고 뒤쪽으로 뻗어 내리는 용맥은 누구나 쉽게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청와대 본관을 통과 한 후 용맥이 형상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거리는 약 600m에 달합니다.
지금 용맥의 상태를 살펴봤을 때 옛날이나 지금이나 구릉(구릉)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구릉의 형상을 하고 있는 용맥이 청와대 본관에 혈이 맺은 후 약 600m를 뻗어 내려왔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장고 뒤편으로 뻗어 내리는 용맥의 형상이 지나치게 후부(厚富)하기 때문에 위쪽에 혈이 맺힌 후 뻗어 내린 전순의 형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청와대는 과룡처(過龍處)이거나 혈이 맺히지 않은 곳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경복궁으로 입수하는 용맥과 청와대로 입수하는 용맥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위 위성사진에서 확인을 할 수 있다시피 근정전으로 입수하는 용맥과 청와대를 통과한 후 뻗어 내리는 용맥 사이에는 개천이 하나 있는데, 이 개천이 두 용맥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청와대 입지에 대한 평
우선 주산현무에 해당하는 백악산과 청와대 입지를 살펴보면, 위 사진에 청색화살표로 표시한 바와 같이 주산현무인 백악산정에서 좌측으로 뻗은 용맥은 강하고 가깝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흰색화살표 방향으로 뻗은 용맥은 있는지 없는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이고 좌측으로 뻗은 사에 비해서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청와대의 입지를 기준으로 뒤편에 있는 백악산을 조명했을 때 우측 뒤편이 멀고 좌측 뒤편이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주산현무에 해당하는 백악산이 수두(垂頭)의 형상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약간 비껴 돌아서 있는 듯한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산현무에 해당하는 백악산이 청와대를 품에 안고 보살피는 듯한 형상이 아니라 한쪽 궁둥이로 밀어내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청와대 입지는 백악산이 주산현무의 역할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백악산정에서 좌우로 팔을 벌린 가운데에서 청와대로 낙맥하는 용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흠입니다.
백악산정에서 청와대로 입수하는 용맥이 어떻게 뻗어 내려서 입수가 되는지 그 형상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청와대로 입수하는 용맥의 근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을 했듯이 청와대 좌우로 뻗어 내리는 용호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외연을 감싸고 있는 인왕산이 우백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데, 높게 일어서 있는 인왕산에 대적할 만한 좌청룡이 없음으로 근정전과 같이 좌청룡은 약하고 우백호는 강한 형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재미로 읽어주세요.
좌우를 놓고 봤을 때 좌는 양(陽)에 해당하고, 우는 음(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좌청룡과 우백호를 음양으로 구분하면 좌청룡은 양(陽)이고, 우백호는 음(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청룡이 약하기 때문에 양의 성질은 약하고, 백호는 강하기 때문에 음의 성질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인과 빈객을 음양으로 구분하면, 주인은 양(陽)이라 할 수 있고, 빈객은 음(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경복궁과 청와대 입지를 견주어 보면, 청룡이 약하기 때문에 주인이 가지고 있는 양의 성질이 약하다고 할 수 있고, 백호는 강하기 때문에 객이 가지고 있는 음의 성질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남자(양)가 주인(양)이 되면 양이 양과 합을 이루는 태양(太陽)이 되고,
남자(양)가 각료(객.음)가 되면 양이 음으로 바뀌는 소음(少陰)이 되며,
여자(음)가 주인(양)이 되면 음이 양으로 바뀌는 소양(少陽)이 되고,
여자(음)가 각료(객.음)가 되면 음이 음과 합을 이루는 태음(太陰)이 되어
사상(四象)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음의 성질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은 음과 합을 이루고, 음은 양과 합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이는 남자가 여자와 합을 이루고, 여자는 남자와 합을 이루고 싶어 하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같은 성질끼리는 서로 밀어내고, 다른 성질끼리는 서로 끌어당기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좌청룡(양)의 세력이 약하고, 우백호(음)의 세력이 강한 경복궁과 청와대 입지는
남자(양)가 주인(대통령.양)이 되면 순양으로 태양(太陽)이 되더라도 양의 성질이 약하다고 할 수 있음으로 강력한 우백호(강한음.각료와 외부세력)가 끊임없이 주인(대통령.약한태양)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위협하고 농락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례로 이기붕(객,강한소음)은 이승만 대통령(주인,약한태양)을 등에 없고 국정을 혼란에 빠트려 국민(강한태음)이 들고일어나 대통령(약한태양)이 하야를 했고, 구테타(외부세력.강한태음)로 청와대 주인(약한태양)이 두 번 바뀌었고, 정보부장(객,강한소음)이 대통령(주인,약한태양)을 시해하는 사건도 발생했고, 대통령의 친인척(객,강한소음)이 대통령(주인,약한태양)을 빙자해서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키는 예도 많았습니다.
그러면 우백호(음)가 강한 입지에서 여자(음)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조건을 충족한 것이 아닌가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자(음)인 박근혜가 대통령(주인.양)이 되는 것은 음이 양으로 바뀌는 형상으로 소양(少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속에는 음의 성질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료(客.陰)와 비서실(客.陰)은 주로 남자(陽)가 대부분 장악을 하는데, 양이 음으로 바뀌는 소음(少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각료도 음의 성질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양(박근혜대통령)과 소음(각료)은 서로 음과 양을 혼재하고 있지만 상호 음의 성질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음으로 서로 밀어내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과 각료는 서로 멀리하고 배척하여 소원해질 수밖에 없음으로 불통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부(객.강한음)에 있는 여자(음) 최순실은 음이 음과 합을 이룬 순음 즉 태음(강한太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양이지만 음의 성질이 강한 박근혜대통령과 태음인 최순실도 서로 배척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음으로 대통령과 밖에 있는 최순실은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배척하는 두 사람이 합을 이뤄 작품을 만든다면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양의 성질보다 음의 성질이 강한 박근혜대통령(소양)에게 외부(음)의 많은 군중(태풍같은태음)이 모여들어 부딪치면, 태풍 같은 강한 군중(음)이 음의 성질이 강한 박근혜대통령을 강하게 밀어서 튕겨져 나갈 수밖에 없음으로 주인(대통령.양)의 지위를 잃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현재의 청와대를 계속해서 국정을 운영하는 주체로 사용을 한다면, 강한 외세(미국,중국,일본.강한음)에 눌려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들의 외압에 지속해서 휘둘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견이 됩니다.
청와대에 입주해서 근무하는 사람들(강한소음)은 방자해질 수밖에 없고, 외부 사람이 대통령(주인.약한태양)을 빙자해서 분란을 야기하는 일도 끊임없이 발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경복궁은 혈이 맺힌 꼭짓점에 주 건물인 근정전을 지었지만 청와대 본관은 과룡처에 해당합니다.
일가를 이루는 개인의 주택도 혈이 맺힌 명당길지를 가려서 안치해야 용맥을 따라서 유통되는 생기의 역량에 의한 긍정적인 영향을 기대할 수 있는데, 한 나라의 국정을 주관하는 청와대를 혈이 맺히지 않은 과룡처에 정한 것은 우리민족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분권의 시대이고, 세종시가 명실상부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시점에서 청와대의 이전과 차후 그 입지를 생각해 봤을 때 세종시 종합청사와 약 30km 거리에 있는 계룡대 내 예전의 궁궐지로 청와대를 이전하는 것이 어떤가 싶습니다.
북한의 240mm(M1991신형)방사정포 사정거리가 약 60km에 달하는데, 현재 수도로 사용하고 있는 서울과 안산, 성남, 춘천까지 모두 사정권 안에 포함되고 있는 실정에서 일시에 수천문의 방사정포로 일시에 공격을 가해온다면 국군통수권자가 있는 서울이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통수권자의 안전도 보장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국군 통수권자가 안정을 보장 받지 못해서 국군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다면 많은 착오와 그 대가를 온 국민이 치러야 할 것입니다.
예전의 궁궐지는 북한이 있는 북쪽을 계룡산이 높게 일어서 가로막고 있어 북한의 방사정포로부터 안전하고, 이미 국군을 통솔하는 모든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 계룡대와 공조도 잘 이뤄질 것으로 보이므로 남북통일이 되어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옛 신도안 옛 궁궐지를 대통령 궁으로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으로 보입니다.
신도안은 좌청룡(양)이 강하고, 우백호(음)가 약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고, 대통령(강한 태양)에 각료(약한 소음)이 순종할 수밖에 없고, 외세(약한 태음)도 대통령(강한 태양)이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입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별첨. 토속삼계탕
무학대사의 눈을 따라 인왕산 밑을 살피던 중.
위 위성사진에 표시한 바와 같이 인왕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서 남산 쪽으로 진출하는 용맥이 있고, 백악산 하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위 위성사진에 복개천이라고 표시한 부분 지하로 흘러서 광화문 앞에 있는 청계천과 합수를 이루는 것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무학대사는 어느 곳을 궁궐지로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일까요?
풍수에 입문하지가 꽤 오래 되었지만 무학대사의 눈을 따라잡을 수가 없으니 어디쯤일까 예상만 해볼 뿐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위성사진을 열심히 살펴보면서 무학대사라면 이정도 용맥을 밝으면서 혈이 맺힌 곳을 추적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곳을 지난 번 서울 나들이 길에 회원님들과 함께 용맥을 밝아 내려오던 중 우연하게 찾게 된 곳이 토속촌삼계탕 입니다.
제가 인왕산 하에서 눈여겨봤던 곳은 위 위성사진에 나타나 있는 형상입니다.
위 위성사진에 녹색 선으로 표시한 바와 같이 황학정 윗부분에서 동쪽으로 크게 분지가 되는 형상이 역역하고, 배화여고 윗부분에도 산 아래쪽으로 분명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점, 주황색 선으로 표시한 바와 같이 노란색 선으로 표시한 부분과 위에서 내려오는 용맥이 연계성이 있다는 점 등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노란색 선으로 표시한 부분에 나타나 있는 형상은 도심에 집들이 원래의 형상을 감추고는 있지만 상당히 역량 있는 용맥이 밑으로 내려갈 때 나타나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이곳을 통과해서 내려가는 용맥이 상당한 역량을 내포하고 있는 용맥이 틀림없다면 이 용맥의 진처에 혈이 맺힐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 위성사진에 주황색 선으로 표시한 부분에 서서 위쪽을 살펴보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 배화여고를 통과한 용맥이 내려오는 모습이 역역하고, 주황색 선으로 표시한 부분 중에서 동쪽으로 가장 배가 부른 만곡지점을 기준으로 좌우가 낮은 형상을 하고 있음으로 용맥 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였습니다.
또한 도로에 서 있는 지점보다 산 아래쪽이 더 높은 것을 보면 이곳이 마지막 기봉을 한 부분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상당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 용맥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용맥을 추적해서 내려가다 보니 줄을 길게 늘어선 진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점검을 해보니 혈처가 분명하였습니다.
첫댓글 어느새 작년이군요,작성 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긴 글..
다시 한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보니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난해 신년하례회 기념 답산에서 둘러본 기억을 되새겨 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한번 정리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