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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묵상글 ( 연중 제14주일. - 두 가지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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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연중 제1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두 가지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
오늘 즈카르야서는 우리의 임금님께서 오시니 기뻐하고 환성 올리라 하는데
그 임금님이 어떻게 오시고 누구에게 오시는지
오늘 연중 제14주일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 임금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왜 그렇게 오시는지 의아해합니다.
그렇게 오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게 오시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오시면 많은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데 왜?
그것은 주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긴 하지만
낮은 곳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위에 군림하시고 당신을 과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아지려고 오시고 우리를 고통에서 구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에 대해서 필리비서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는 겸손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겸손의 사랑은 같아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기를 사랑하는 어미의 사랑 같습니다.
어미는 아기에게 눈을 맞추기 위해 키를 낮춥니다.
아이가 알아듣도록 아이의 말로 말하고 아이의 수준이 됩니다.
이렇게 낮추시고 우리와 같아지시니
우리는 주님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겸손으로 당신을 숨기십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당신을 숨기십니다.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에게 감추시고,
오히려 고생과 무거운 짐으로 한껏 낮춰진 사람에게만 보이십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같아지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은 진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라고 하시며 우리를 당신께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대하시는데 누가 이 초대에 응해 가겠습니까?
고생이나 무거운 짐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은 가지 않고,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만 가겠지요.
그렇지만 주님께 가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 간다고 해도 주님께서 짐을 내려주거나 덜어주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결코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에게서 짐을 지는 방식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짐 지시는 방식으로 우리도 지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겸손과 온유의 멍에로 무거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멍에는 배낭과 같이 짐을 싣기 편하도록 만든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멍에는 기본적으로는 불편한 것이고,
그나마 덜 불편한 멍에와 더 불편한 멍에가 있을 뿐인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멍에 곧 겸손과 온유의 멍에는 왜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왜 무거운 짐도 가볍습니까?
그것은 교만한 사람이 짐을 무겁게 지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예 아무런 짐도 지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작은 짐도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겸손한 사람은 짐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거운 짐을 질 각오도
되어 있기에 그에게는 어떤 짐도 늘 생각했던 것보다 가벼운 짐일 것입니다.
주님 친히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지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생각하며 내 십자가를 지면 짐이 가벼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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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연중 제1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완덕의 모델을 직접 드러내어 말씀해 주십니다.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 덕은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의 최종적으로 추구해야할 완덕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온유를 영적지도자, 영적 아버지가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온유 없이 절제와 금욕을 수행하는 것의 위험성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절제와 금욕은 육체만을 내리누르지만 온유는 지성을 개화시킵니다. 온유는 참된 관상을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컨트롤하지 않으며 들볶지 않으며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으면서 모욕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신앙 생활의 목적은 훌륭한 금욕자, 지구력 있는 금식가, 결단성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온유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게 하는 길입니다. 온유는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원천입니다. 성서를 많이 읽고 어려운 수행을 할지라도 온유가 없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끌어 당깁니다. 그의 온유함을 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그 분을 알아뵙게 됩니다. 온유와 자비는 참 영성을 알아보게 하는 기준입니다.
겸손의 목표는 모든 두려움을 추방하는 사랑입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누구이시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완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인간을 이끌어 줍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기 때문에 존경해 주지 않는다고 타인에게 분노할 수 없게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보호하려 하고 그 사람을 위해 책임을 지려하며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참아주려하고, 특히 그와 함께 행복과 불행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나와 다르고 낯선 사람을 위한 투신의 삶, 다른 사람의 힘든 처지를 받아들일 줄 아는 개방된 자세, 아무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의 삶을 긍정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겸손한 기도는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끕니다..
성실함이란 바로 겸손을 뜻합니다. 모욕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우리는 겸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겸손은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마주할 때 우리는 이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때로 겸손은 인간을 나약하고 줏대없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정반대다.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은 자만입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겸손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알고 자신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게 해 주는 덕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레고리오 성인도 ‘겸손없이 덕을 쌓는 것은 마치 바람속에 먼지를 나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겸손의 덕은 인내로써 완전해지며 인내가 없다면 참된 겸손이란 없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 중에서 가장 위대한 덕입니다.
주님을 본받아 온유하고 겸손한 신앙인이 되이 완덕의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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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연중 제1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오늘은 연중 14 주일 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독서>(즈카 9,9-10)는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기 전에, 군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마태 21,5;요한 12,15)을 미리 보여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로마 8,13)라고 말합니다. 곧 온유와 겸손으로 성령의 법에 따라 살아가면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의 마음’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아들의 전폭적인 승복과 지지, 감사와 찬양으로 드러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먼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우주의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과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 이루어짐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에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요, 전폭적인 지지를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에 승복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바로 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이 참 오묘합니다.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말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오히려 나를 몰라주어도 좋을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며 귀찮게 여겨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해야 할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할 일입니다. 아들에게는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쁨이요 감사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아버지의 뜻”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 5,18)
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온유”라는 말은 본래 길들인 야생마를 묘사하는 사용되었던 용어라고 합니다. 곧 난폭한 야생마를 길들이게 되면, 그 말은 본래의 힘과 열정을 간직하면서도 고삐를 쥔 주인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힘을 거슬러 주인에게 순종하고 봉사하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온유함”리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온유함”이란 약함의 덕이 아니라 강함의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온유한 자가 진정 강한 자입니다. 그러기에 온유(부드러움)가 강함을 이깁니다(이솝우화: 해와 바람의 대결). 그리고 여기에는 “겸손”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이는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기꺼이 둘러멥니다. “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과 함께 메기에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습니다.
참된 ‘제자의 도’, ‘온유와 겸손의 도’, 그것은 스승과 함께 가며, 모든 것을 스승에게서 배우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길”자체이시며, 단지 모범을 보여주는 스승이신 것이 아니라, 제자와 함께 걸으시고 일치를 이루시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그분의 마음은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시기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양순하고 겸손하신 당신의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품게 됩니다’(필립 2,5 참조).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 됨”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어 예수님의 마음”이 되는 것, 곧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양순하고 겸손하신 마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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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연중 제1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압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보증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기꺼이 당신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앞서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 냉대받고 따돌림받으며 죄인 취급받는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하셨고 그들을 당신께 부르시며 편히 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있었는데 첫 번째는 가난에 지치고 억눌리고 고된 일상생활의 짐입니다.
두 번째는 율법의 해석으로 생겨난 견딜 수 없는 규정들의 짐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계명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계명을 다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 시키셨으며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고 선언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율법을 가르치시고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헌신과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1요한5,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평생을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헌신하신 부모님을 바라보면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식은 혹시 부모를 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모는 자식을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제시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내 뜻’, ‘내 욕심’, ‘내 자존심’을 버리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아버지의 계획’, ‘아버지의 영광’을 추구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를 낮추셨으며 하느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완전한 순종으로 행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하느님나라에 대한 전권, 구원전권)을 맡겨주셨지만(“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마태11,27),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배운다면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무 일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은 쉼이 아니라 고역입니다.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참된 보람이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고생과 짐이라는 생각 자체는 내 뜻에 집착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아버지 하느님의 뜻 곧 ‘멍에’를 지려는 태도를 취하면, 그 결과는 아버지의 소관이니 ‘안식’을 누리게 마련입니다”(홍승모).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내 뜻이 먼저인 것은 무엇이건 무겁습니다. 내 꿈, 내 계획, 내 사업, 내 스케줄...‘잘 되어야 할 텐데’ 라는 근심은 중압감을 줍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먼저가 되면 무엇이건 가볍습니다. 아버지의 계획, 아버지의 시간표, 아버지의 방법 등등 다 가볍습니다. 아버지의 것이니 아버지께 어련히 알아서 하시랴! 라는 내맡김은 근심을 몰아내고 평안을 줍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하신 예수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말씀에 힘입어 끝까지 희망을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약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한 삶을 장하게 보아주십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부족해 보이고 결점이 많은 사람도 주님에게 예외 없이 사랑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의 죄스럽고 못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길 원하듯 이웃에게도 그런 자비가 베풀어지기를 희망하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위로하고 격려할 때 힘든 것은 편하고 가벼운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보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을 빌면,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해야 할 일,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셨는데 오늘 나는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성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다른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선물임을 받아들이고, 그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그들의 말을 정중하게 경청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들의 짐이 가벼워지고 그들의 멍에가 편해지기를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의 무게와 멍에도 살펴주시고 은총으로 감싸주시기를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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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연중 제1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의 인사이동은 1년에 2번 있습니다. 2월과 8월에 있습니다. 인사이동은 기다려지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정들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아쉬움과 설렘이 있습니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원하면 ‘안식년’을 신청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2018년에 안식년을 신청하였습니다. 안식년 중에 제주도 엠마오 연수를 다녀왔고, 동창 신부님 성당에서 지내기도 했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인사이동의 끝은 ‘성사 전담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구는 70세가 되면 ‘성사 전담 사제’로 인사이동을 하게 됩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신청을 하면 70세가 되지 않았어도 ‘성사 전담 사제’가 되기도 합니다. 성사 전담 사제는 ‘은퇴 사제’입니다. 교구에서는 성사 전담 사제들을 위한 공동 사제관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저도 성사 전담 사제가 되는 그날까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치 성사 전담 사제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로마는 강력한 군대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로마의 문화와 로마의 제도는 로마가 지배하는 모든 지역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이스라엘도 로마의 총독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인에게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에 따라서 살기보다는 성령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새로운 기준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로마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고, 성령의 뜻에 따라 사는 신앙이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로마라는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로마가 받아들인 성령의 뜻, 교회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빛이 되고 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봉성체를 다녔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요양 병원에 계신 분들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성체를 모시면서 기뻐하셨고, 제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에게 주님은 위로가 되셨고, 용기를 주셨고, 희망이 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다. 청량리 성 바오로 병원으로 봉성체를 갔을 때입니다. 수술을 기다리는 자매님께서 기도를 청하셨고, 성체를 모시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고,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 큰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매님께서는 아무런 두려움과 걱정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다 잘 될 거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기준으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이정표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과 계명은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단죄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돌아온 탕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탕자를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시하신 새로운 기준은 ‘온유함과 겸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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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연중 제1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기도, 배움, 평화-
참 사람되기 힘듭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평생 공부가 참 사람되는 공부입니다. 하루 이틀 몇날에 끝나는 공부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평생 공부가 참 사람되는 공부입니다. 이래서 제가 즐겨 쓰는 인사말이 “성화되십시오”입니다. 그래서 인생광야여정 셋중 하나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 되느냐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이나 괴물이 되느냐 셋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또 주님 앞에 갔을 때도 주님은 우리 얼굴을, 마음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참나의 얼굴인지 하는가입니다. 어제 가톨릭신문에서 이색적인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대로 일부 인용합니다. 311일 1만km 거리 완주하여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난 마라토너 원불교 신자 강명구(66)씨에 대한 기사입니다.
“지난 6월28일(현지시간)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씨가 교황청을 방문하여 프란치스코 교화을 알현하고 판문점에서 미사집전을 요청했다. 그가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만나기까지 뛴 거리는 1만km 총 311일이 걸린 그의 여정에는 평화를 염원한 전 세계인의 염원이 함께 했다.
지난해 8월21일 제주에서 출발한 강씨는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인도등 아시아 대륙을 거쳐 유럽 대륙과 바티칸까지 총 16개국을 달렸다. ‘One World, One Korea, One Peace’라 적힌 티셔츠를 입고 태극기를 단 수레를 끌고 300여일을 쉬지 않고 달렸던 것이다.
30년전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했던 그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남북한의 평화를 염원한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황해도 송림이 고향이셨던 아버지는 늘 고향을 그리워하셨고, 이런 아버지의 외로움을 보고 자랐기에 분단은 그에게 큰 아픔이자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것이다.
2017년 9월 ‘평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첫 여정, 네델란드에서 시작해 중국과 신의주를 넘어 판문점에 들어올 계획이었지만 북한의 허가를 받지 못해 중국 단동에서 마라톤을 마무리했던 그는 포기하지 않고 6년만에 다시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마라톤을 시작해 프란치스코 교황님 알현이란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놀라운 열정, 한결같은 투혼의 열정이요 평화에 대한 초인적 염원에 갈망입니다. 정말 참 사람되기 위한 우선적 조건이 이런 한결같은, 끊임없는 갈망에 열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닮은 참된 참나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오늘 말씀에서 저는 예수님을 닮은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한 세 요소를 찾아냈습니다.
첫째, “기도의 사람”입니다.
제가 볼 때, 종파를 초월하여 위 강영구씨 기도의 사람입니다. 1만km 311일 말그대로 기도의 여정이었습니다. 삶자체가 몸자체가 기도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성령의 힘, 기도의 힘, 영혼의 힘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때 비로소 성령의 힘, 영적 힘, 내적 힘입니다.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하나뿐인 찬양기도이자 감사기도입니다. 무려 복음에 아버지란 호칭이 8회 나옵니다. 보통 우리는 어머니를 많이 부르는데 예수님은 아버지란 호칭을 즐겨 부르셨던 듯 합니다. 원래는 아람어로 우리에게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아빠!”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아빠와 깊은 친교와 일치 관계에 있던 예수님인지 감지됩니다. 하느님 아빠와는 거리가 없이 하나였던 부자관계임을 봅니다. 정말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기도하기가 소원입니다.
“아빠,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빠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빠! 아빠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를 아빠로 바꿔 써봤습니다. 대지大智가 대우大愚입니다. 참으로 아빠 하느님을 사랑할 때 철부지들이, 거룩한 바보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계시되는 하늘나라의 신비입니다. 아빠와 예수님의 관계가 가히 독보적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날로 닮아갈 때 아빠와의 이런 독보적 관계임을 체험할 것입니다.
“나의 아빠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 그래서 아빠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아빠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외에는 아무도 아빠를 알지 못한다.”
문득 제 어린시절이 생각납니다. 가정형편상 거의 아버지란 호칭을 불러 보지 못했기에 아버지란 호칭이 참 저에게 낯설었고 어색했는데 사제가 되고부터는 매일 미사중 미사경문을 통해 원없이 불러보는 아버지란 호칭입니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강론쓰는 이 시간에, 정말 하느님 아빠를 닮은 아버지도 한 번 되어보고 싶다는 뜬금 없는 생각도 불끈 드네요. 평생 아버지란 호칭을, 어머니란 호칭을 들어보지 못한 독신의 남녀도 참 많을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아버지란, 어머니란 호칭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격도 참 크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마침 어제 어느 자매가 사위가 교회의 5주간의 “아버지 학교”를 잘 수료하게 해달라 미사를 신청했는데 아버지 학교는 5주간이 아니라 평생이란 생각이 듭니다. 자녀의 아버지인 이상 평생 아버지 학교에서 아버지되는 공부이니 평생 하느님 아빠로부터 너그럽고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는 공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둘째, “배움의 사람”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은 평생 배움의 여정에 충실한 겸손과 순종의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지닌 사람이 정말 참사람입니다. 삶은 사랑의 학교, 섬김의 학교, 겸손의 학교등 끝이 없습니다. 배움을 중단하면 괴물도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선택-훈련-습관이라 했으니 바로 인생 학교에서 이뤄지는 학습과정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자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했습니다. 인생학교는 졸업이 없습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학인이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예수님 역시 평생 배움터에서 자기 멍에를 메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자기를 배우라 하십니다. 당신 배움터의 학교로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모두가 무상교육에 초대 대상입니다. 입학만 있고 졸업이 없는 평생학교에서 평생학인의 삶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참 안식은 주님의 공동체 학교에서 평생학인이 되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때입니다. 무지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제 멍에와 제 짐으로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날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가면서 점차 내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내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바뀔 것이며, 주님을 닮은 참나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변화요 기적입니다.
셋째, “평화의 사람”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평화에 대한 염원이 원불교 신자 강영구씨를 초인적 마라토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즈카르야 예언은 마침내 우리의 평화,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딸 시온이, 딸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평화를 갈망하는, 추구하는 우리들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리라.”
평화와 기쁨이 한 세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 평화와 기쁨의 사람입니다. 아 이런 주님을 닮은 참 평화의 지도자를, 대통령을 보고 싶습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무차별 살상무기 접속탄을 지원하기로 했다 합니다. 조 바이던 대통령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참 평화를 사랑하는 용기있고 지혜로운 실천력 있는 지도자들의 탄생을 기도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참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지칠줄 모르는 기도의 사람, 배움의 사람, 평화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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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연중 제1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제일 눈길을 끄는 단어는 ‘멍에’입니다. 소가 평생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멍에였습니다. 다시 말해 소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쓰는 말이 바로 ‘멍에’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입니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을 보면 그리 가벼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태어날 때 따스한 집 한 칸 없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살면서도 떠돌이로 사셨습니다. 돌팔매질 당하기가 일쑤였고, 비난당하며 살았습니다. 반대자들에게 모함당했고, 그래서 아무 죄 없으면서도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몸 누일 곳도 없어서 남의 무덤을 빌려 누우셨습니다.
이것이 가벼운 것입니까? 그럼 우리는 지금 얼마나 가벼이 사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멍에가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즉 가벼울 수 있는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나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을 하느님께서 보상해 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에 지금의 고통이 가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사막이 지나며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평온의 땅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멍에를 지고 살아갑니다. 아기도, 학생도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하루는 하느님께 내 근심 걱정을 다 맡기고, 또 고통 또한 봉헌하고 사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가슴에 품다.
지난 5월에 이곳 갑곶순교성지에서 이콘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많은 작품이 저와 이곳을 방문하신 많은 분께 묵상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모든 작품이 기억에 남지만 특히 그중 제일 제 기억에 남는 작품은 일곱 개의 화살을 품고 계신 성모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일곱 개의 화살을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성모님의 모습이 아닌 그저 그 일곱 개의 화살을 의연하게 안고 계신 성모님의 모습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아프고 쓰리지만 그 상처를 의연하고 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성모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도,
우리고 성모님께 의지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 아닐까요?
동병상련, 이심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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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연중 제1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에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입니다.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한 시간을 내게 더 늘려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정적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잘 활용할지가 관건입니다. 문제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입에서는 바쁘다는 말이 습관적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운동할 시간이 없다고, 책보고 공부할 시간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딜 가봐도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을 보니 지금의 현대인은 하루 평균 2,600번씩 스마트폰을 터치한다고 하더군요. 결국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정작 다른 곳에 쓸 시간이 줄어든 것이 아닐까요?
언젠가 지인과 식사하러 식당에 갔는데, 한 아이가 울어대는 것입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너무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니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울음을 멈춥니다. 스마트폰의 중독성에 이 어린아이 역시 빠져있는 것이지요.
스마트폰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또 제대로 삶에 집중할 수도 없습니다. 시간만 그냥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다 보니, 이들 모두 하나같이 연락이 잘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은 가지고 있지만 무음으로 놓거나 꺼놔서 연결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보다는 세상의 것에 그냥 쓸데없이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당신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듯이, 어렵고 힘들 때 진정한 위로를 주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 뜻에 집중할수록 주님의 위로 안에서 힘을 내어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도 철부지들인 우리에게 하느님의 지혜가 드러난 사실(예수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닙니다)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어떤 일이든 상관없이 감사하면서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될 때, 분명 그분 안에서 커다란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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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라도 아날로그에 가까운 삶을 살아보며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지 찾을 필요가 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끄고 진정으로 우리 곁에 사람들을 발견하라(에릭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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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연중 제14주일. 키엣 대주교님.
침묵의 하느님
권세와 위엄을 지닌 하느님만을 떠올린다면 겸손하신 하느님은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올려다보는 높은 곳이 아닌 바로 내옆에, 아니 그 보다 더 낮은 곳에 계십니다.
드러내지 않으시는 하느님
세상 모든 권력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힘으로 누르고, 힘을 과시하기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눈치를 보고 피하며 말과 행동을 조심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얻은 권력은 자기 스스로 절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과 불의를 타협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겸손만이 가장 위대한 권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권세와 위엄만을 지닌 분이라면 지금처럼 편히 앉아 기도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불안에 떨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몸을 감추셨습니다. 인류에게 모든 세상을 내어 주셨지만 바로 내 옆에 계셔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계십니다. 우리가 찾아도 볼 수 없는 무형으로 존재하고 계신 하느님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언제나 침묵하시는 하느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라도 자신의 위엄을 드러냅니다. 세상이 평등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조직에서 하급자는 상급자의 말을 일방적으로 따라야하고 심지어 상급자는 자기 말만 하느라고 하급자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또 듣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아랫사람의 자리에 앉으셔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침묵하고 계십니다.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하느님은 가장 낮게, 가장 조용한 분이 되셨습니다.
겸손의 삶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내려가는 길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올라가는 길만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좀 더 높은 자리로, 지금보다 좀 더 성공해서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꿈입니다.
그러나 올라가는 길만을 찾는 사람은 영원히 하느님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올려다볼 그 곳이 아닌, 우리와 같은 아니 우리보다 더 낮은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신 하느님이시기에 겸손한 사람만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겸손함을 배우고 주님을 앎으로써 그분과 같이 깊고 깊은 겸손의 계단을 내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계단의 끝에는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계실 것입니다.
그 곳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하나되는 삶을 살 때, 인간의 모든 번뇌와 고통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주님! 저희도 겸손되이 주님의 삶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침묵할 수 있습니까?
2.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것과 자신을 통제하는 것 어느 것에 더 익숙합니까?
3. 겸손함을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의 겸손과 나의 겸손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드러내야하는 세상에서 양보하고 참는 것이 미덕인 세상은 이미 옛말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순간 한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꼭 그 순간에 그 말을 해야하는지? 아니면 나를 드러내기위해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가족과 직장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것 또한 주님의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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