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천마종사(天魔宗師)의 고뇌 ① 울창한 송림(松林)이 방대한 계곡 사이로 펼쳐져 있었다. 이 곳은 인적이 닿지 않는 천연의 오지(奧地)였다. 송림 위로는 사시사철 뿌연 운무가 덮혀 있어 그 속에 무엇이 있 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이는 바로 곤륜산(崑崙山)의 서쪽 끝에 위치한 야황곡(野荒谷)에 관한 얘기다. 중원에서 본다면 이 부근은 변황과의 경계선이 되며, 각종의 야수 들이 도처에 서식하기 때문에 곤륜산을 무대로 하는 사냥꾼들에게 는 이른바 보고(寶庫)와도 같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름난 사냥꾼들도 야황곡의 입구를 넘으려 하지는 않는 다. 그것은 곡내의 울창한 송림이 오랜 세월에 걸쳐 무수한 생명 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따라서 그 소나무숲은 통상 사유림(死幽林)이라 불리운다. 문자 그대로 운무가 자욱한 사유림에는 의례 귀기(鬼氣)가 서려 있다. 그 근처에만 이르러도 머리털이 쭈뼛하고 곤두서서 금시라 도 어디선가 귀신이 툭 튀어나올 듯하다. 하지만 그 귀기가 인위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즉 사유림은 일천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귀역(鬼域)으로서 세인들 의 발길을 거부하며 신비를 지켜왔다. 그런 야황곡의 입구에 난데없이 세 인영이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용비운과 잔화, 칠척 장신의 목극렴 등이었다. "아! 백 년만에 이곳에 오게 되니 감회가 새롭소." 목극렴의 말에 용비운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몰랐소, 패왕에게도 그런 감상이 있을 줄은." 곡내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 다. 이들 삼 인은 극락원을 나온 즉시 버젓하게 옷을 갖추어 입고 이곳 곤륜산의 야황곡까지 이르러 있었다. 목극렴은 독설가(毒舌家)인 상전에게 다시 말했다. "종사께서는 항시 노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시는구려." "괘념치 마시오. 본인도 감상 따위에는 백지니까." "쯧! 그러시면서 무얼......?" "그래도 패왕처럼 실수를 하여 일을 그르치지는 않소." 이는 감미령을 죽인 사건을 뜻하는 말이었다. "어이쿠! 종사, 제발 그 얘기는 그만 좀 합시다." 목극렴은 앓는 소리를 내더니 빠르게 사유림 쪽으로 달려갔다. 용 비운은 내심 쿡쿡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내가 절대패왕과 이렇듯 농담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알면 세인들은 아마도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잠시 후. 삼 인은 음산한 귀기가 서린 사유림의 앞에 이르렀다. "종사, 바로 여기외다." "흠, 백 년이나 지났는데 저들이 패왕을 알아볼른지?" 목극렴은 자존심이 상해 고개를 힘차게 가로저었다. "적어도 노신의 마누라는 눈이 똑바로 박혀있을 것이오." "좋소, 어서 들어가 봅시다." "그런데 그것이......." 목극렴이 사유림 안쪽을 살피며 미간을 구겼다. "왜 그러시오?" "이 진세는 일명 천마혈송귀역진(天魔血松鬼域陣)이라는 것인 데... 어째 예전보다 더 복잡해진 듯하오." 용비운도 그를 따라 사유림을 주욱 훑어보며 말했다. "패왕은 좀 솔직해지도록 하시오. 진세가 복잡해진 게 아니라 그 대가 백 년 사이에 진입방법을 잊은 건 아니오?" "종사는 또 노신을......!" "너무 과소평가한다 이 말이오?" 목극렴은 할 말이 없어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 는 용비운에 대한 악감정은 전혀 없었다. 이틀 동안 함께 오며 목극렴은 내내 용비운으로 인해 즐거울 수 있었다. 천마의 후예로서 위엄이 모자란 것은 아쉬웠지만 그로서 는 무엇보다 상대에게 심적 부담이 없어 좋았다. "허어! 난감하구나. 자신의 거처도 찾아가지 못하는 인물을 대체 어찌 평가하면 좋을고?" 용비운의 비아냥에 목극렴은 짐짓 화를 벌컥 냈다. "쓰헐! 이건 노신의 마누라가 너무 똑똑한 탓이오. 난해한 절진을 설치해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게 그녀의 취미외다." 곁에서 잔화는 미소를 띤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자님께선 정말 짓궂으셔. 나도 극락원으로 끌려가기 전에 강호 일정 용비운 소협에 대해서 익히 들었지만 소문과는 너무도 판이 한 분이야.' ② 사유림 내의 광활한 지역에는 거대한 고성(古城)이 우뚝 서 있었 다. 얼마나 오래 전에 축조되었는지 그 양식이 당금의 건축물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십 장 높이의 성곽 위로 옛스러워 보이는 묵색의 전각들이 상층부 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성루에는 커다란 금빛 현판이 햇살 아래 번쩍이고 있었다. <불사천황성(不死天皇城)> 천 년 전 천단에 의해 붕괴된 것으로 알려진 불사천황성이 놀랍게 도 사유림의 한곳에서 존속되어 왔던 것이다. 그들은 마도무림의 본류(本流)로서 이처럼 천하의 누구도 알지 못 하는 가운데 천마의 후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문이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공지 위에는 이십여 명의 어린아이 들이 좌우로 나뉘어 도열해 있었고, 그들 사이로는 세 명의 중년 인이 거목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중년인들은 한결같이 안광이 예리했고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 또한 강렬하기 그지 없었다. 그들은 허리에 두 줄의 황금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신분의 표시인 듯했다. 개중 두 중년인은 각기 어린아이를 한 명씩 물건처럼 집어들고 있 었다. 십 장 밖에 두 개의 거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아마도 그쪽으 로 아이들을 내던지려는 모양이었다. "자! 준비해라." 그 말에 따라 두 아이는 새처럼 양팔을 벌리며 비상할 자세를 취 했다. 불과 칠, 팔 세 정도밖에 안되어 보이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두려움이라곤 조금도 엿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들은 오히려 이 상황을 몹시도 즐기는 눈치였다. 이윽고 두 중년인은 그들을 힘껏 내던졌다. "가랏!" "지는 놈은 천마전사(天魔戰士)가 될 자격이 없다." 두 소년은 쌍수를 합쳐 머리 앞으로 내밀더니 거석을 향해 그대로 돌진해 갔다. 꽝! 퍼엉―! 요란한 폭음과 함께 거석들을 관통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고도 두 소년은 의외로 멀쩡했을 뿐더러 허공에서 한 바퀴 선 회하더니 다시 제 자리로 날아들었다. 그중 먼저 당도한 것은 얼 굴이 온통 주근깨투성이인 소년이었다. 세 중년인 가운데 혈척을 등에 꽂은 중년인이 말했다. "잘 했다, 악상(岳相). 너는 저쪽으로 가 대기해라." "넷! 척병원주(斥兵院主)님." 보무도 당당하게 그의 우측으로 걸음을 옮기는 주근깨 소년에 비 해 함께 던져졌던 다른 소년은 유난히 좁은 이마에 참담한 그늘을 드리우며 그 반대편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그쪽은 물론 중년인들의 좌측으로, 거기에 둥그렇게 모여 있는 소 년들은 모두 예의 소년처럼 패배자들이었다. 척병원주는 패배한 소년들을 향해 냉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무공수련을 게을리 한 죄로 백일 동안 암흑연공실로 들 어가야 한다. 그후에 천마전사에 재도전할 기회가 주어지기는 한 다만 그때도 패한 녀석들은 평생을 노예로 지내야 한다. 알겠느 냐?" "네엣―!" 패배한 소년들의 눈에서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무서운 투지가 타올 랐다. 잔인한 교육방식에 철저히 길들여진 듯. 불사천황성은 이렇게 강자만을 제자로 받아들여 고금제일이라는 천마(天魔) 일맥으로서의 긍지를 천 년 동안 지켜왔다. 이때, 느닷없이 사유림 전체가 크게 진동했다. 우르르르르....... "흐음?" 척병원주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 옆에서 폭풍혈번(暴風血幡)을 비 껴쥔 폭혈원주가 긴장된 어조로 부르짖었다. "설마 침입자가......?" 철극을 어깨에 메고 있던 사극원주(死極院主)도 안면을 굳혔다. 척병원주는 패배한 열 명의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가라! 어떤 놈이든 들어오는 대로 죽여라. 공을 세우면 너희들에 게도 천마전사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겠다." "복명(復命)!" 아이들은 꺼려하는 기색은커녕 가벼운 흥분까지 내비치며 사유림 곳곳으로 흩어져 갔다. 그들을 응시하던 사극원주가 철극의 자루 를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 반도들이 아닐까?" 폭혈원주는 픽 웃으며 폭풍혈번을 말아쥐었다.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제발로 기어들어 오겠는가?" 척병원주는 세모꼴의 눈을 가늘게 떴다. "내 가서 대마후께 보고하고 대비책을 여쭈어 보겠네. 자네들은 가급적이면 놈들을 생포하도록 하게. 어쩌면 놈들을 통해 이곳 사 유림의 출입로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는 말을 마치자 고색창연한 성곽을 향해 날아갔다. 콰콰콰콰― 진동파는 그 사이에 더욱 심해졌다. 사극원주는 철극을 빙글빙글 돌리며 음산하게 말했다. "기(氣)의 유동으로 보아 침입자는 필시 엄청난 공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어쩌면 천극사패왕에 버금갈지도 모르겠군." 폭혈원주가 폭풍혈번을 휘저으며 그 말을 받았다. "흐흐... 간만에 몸 좀 풀게 생겼군." ③ 사유림을 돌파하려던 목극렴은 그 속에서 도로 튕겨져 나왔다. 그 의 흉험한 얼굴은 더욱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빌어먹을! 반탄지기가 예상보다 막강하오, 종사." 용비운은 그가 좌충우돌 진세에 부딪쳐 가는 동안 그 파해법에 골 몰해 있었다. 비록 기문기관학에 정통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진법 에 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흠, 이건 철저한 반천역행진(反天逆行陣)이로군." 목극렴은 듬성듬성한 눈썹을 꿈틀 했다. "종사께서 이 진세를 알고 계시오?" "패왕은 나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군." "끙!" 목극렴은 괴상한 신음을 발하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를 향해 용비운은 짐짓 가슴을 쭉 펴며 설명해 나갔다. "본래 이곳의 진세는 은천둔형진(隱天遁形陣)이었소." "그건... 맞소이다." "당신은 듣기나 하시오." "네." "그러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십수 년 전에 그 진은 반천역행진으로 변화되고 말았소." 사실 목극렴은 진법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다. "그럼 종사께서는 이 진세를 파해하실 수도 있겠구려?" 용비운은 금마선을 촤악 펼쳐들더니 천천히 저었다. "물론이오. 반천역행진은 안에서는 빠져나올 수가 없지만 외부에 서 들어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소." 그는 목극렴에게 자신이 알아낸 파해법을 일러 주었다. 목극렴은 그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더니 내심 중얼거렸다. '쯧! 가끔 이런 순간이 있어 내가 꼼짝도 못한단 말야.' 용비운은 백의를 입어 더욱 연약하게 보이는 잔화를 스스럼없이 번쩍 안아 들었다. "자! 패왕이 앞장 서시오. 천극사패왕(天極四覇王)의 일 인이었다 는 당신의 능력을 한 번 믿어 보겠소." "그럼... 노신을 따라오시오." 목극렴은 비로소 자신있는 표정이 되어 진세로 뛰어들었다. 파파파팍―! 그는 밀려드는 광풍의 소용돌이를 헤치며 반천역행진을 부수어 나 갔다. 분명 방금 전의 무모한 돌진보다는 한결 수월해졌으나 역시 전진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용비운에게 당하게 될 힐책을 의식하고는 자존심으로 밀어붙여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천마혈옥수!" 그의 쌍수가 핏빛 광휘를 발하며 진세의 압력을 와해시켰다. 그의 뒤에서 용비운은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후후... 계속 수고하시오. 나는 쉬운 길로 먼저 갈테니.' 용비운은 즉시 방향을 틀어 목극렴과 갈라졌다. 그의 의도를 알 리 없는 목극렴은 이후로도 고전을 면치 못하며 진세를 무너뜨리 기에 여념이 없었다. 퍼퍼퍼펑―! 용비운. 그는 유유히 반천역행진을 뚫으며 전진해 가고 있었다. 잔화가 의 아한 표정으로 그의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 공자님, 왜 패왕과 갈라져 나오셨나요? 용비운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신경쓰지 마라. 누가 먼저 들어가나 시합을 하기로 했 으니 말이다." 잔화는 그가 또 목극렴을 골탕 먹이려는 것을 눈치채고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용비운은 목극렴과의 상하관계를 탈피하려는 의 도에서 가끔씩 이렇게 장난을 벌이곤 했다. 그는 향후로 목극렴과 더불어 강호로 뛰어들 생각이되 엄격한 종 사로서 다가가기보다는 인간적인 유대를 더 원했다. '후후... 다행이야. 패왕도 백 년 동안 외롭게 지내다가 나를 만 난 탓인지 내게 정(情)을 느끼는 것 같으니.' ④ 잠시 후. 용비운은 마침내 진세를 벗어나 사유림 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대규모의 성곽이었다. '호오! 대단하군. 저것이 불사천황성인가?' 이때, 두 명의 소년이 그의 좌우를 노리며 낮게 날아왔다. "죽어랏!" 비록 나이는 어리다지만 그들의 과감한 육탄공세는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무서운 위력을 담고 있었다. "어딜!" 용비운은 공공태허보를 펼쳐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기습에 실패한 소년들은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이내 기세를 회복 하여 그에게 각기 장(掌)과 지(指)를 날렸다. 그 위력도 강호의 일류고수 못지 않았다. '과연 천마일맥의 제자들답군.' 용비운은 감탄을 금치 못하는 한편, 그들과 맞겨루고 싶지가 않아 계속 피하기만 했다. 그런 처지는 목극렴도 다를 바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그도 겨우 사유림 안으로 들어서기는 했으나 그 즉시 어린 소년들의 기습적 인 공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목극렴으로서는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그는 소년들의 대사조(大師祖)가 되고도 남았다. 더구나 백 년 만의 귀 향에 이런 대접을 받게 되자 그는 격노했다. "요 젖비린내 나는 놈들이 감히 뉘를 공격하는 것이냐?" 그는 소년들의 뺨을 한 대씩 갈겨 주었다. "악! 크윽......!" 소년들은 제각기 얼굴을 감싸쥔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어 목극렴은 사위를 둘러보다가 네 소년들에게 합공을 당하고 있는 용비운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것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종사를 몰라보고......!' 그는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천마행공으로 날아 용비운의 옆에 내 려섰다. "물러가라!" 그의 소맷자락이 한 번 펄럭이자 소년들은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런 연후, 목극렴은 용비운의 기색을 살폈다. "종사, 어디 다치신 데는 없소?" 용비운은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쯧! 위계질서가 엉망이로군. 명색이 천마종사인 나를 이렇게 밖 에 대접할 수가 없단 말인가?" "그... 그게... 종사의 현신을 몰랐던지라........" 목극렴은 자신이 대신 나서서 극구 사죄했다. 혹시라도 용비운이 노하여 불사천황성을 붕괴시키라는 명령이라도 내리면 그는 속절 없이 그 명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종사, 일전에도 모르고 저지른 일은 죄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노여움을 푸시오. 뒷일은 노신이 알아서 처리하겠소." 용비운은 잔화를 내려놓으며 짐짓 차갑게 응수해 갔다. "어디 패왕의 위엄을 한 번 지켜 보겠소." "감사하오, 종사." 목극렴은 몸을 홱 틀더니 성문을 등지고 운집해 있는 제자들을 둘 러보았다. 그러나 체면상 어린아이들을 추궁할 수는 없었던지 손 가락을 까닥거리며 사극원주와 폭혈원주를 불렀다. "너희 두 명, 이리 오너라." 두 원주는 방약무인한 그 태도에 대노했지만 그의 전신에 실린 흉 험한 기도에 눌려 일단 관망하기로 했다. "이리 오라지 않았느냐?" 목극렴의 음성이 한층 고조되었다. 그는 위엄이 통하지 않자 양 손으로 허공을 거머쥐었고, 그 동작에 따라 두 원주는 가공할 홉 인력에 이끌려 그의 앞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괴물(怪物)! 이자는 인간도 아니다.' '대마후께서 나선다 해도 이자를 감당하지는 못하리라.' 그들은 이런 생각과 더불어 흡인력의 기세를 타고 제각기 병기를 휘둘렀다. "폭풍광혈무(暴風狂血霧)!" "철극탈혼(鐵極奪魂)!" 폭풍혈번과 철극이 펼쳐내는 살벌한 공세가 삽시에 목극렴의 전신 을 휘감아버렸다. 쐐애애액―! 하지만 목극렴이 누구인가? 그는 천마혈옥수를 전개해 그들의 병 기를 맨손으로 튕겨낸 후, 여유있게 다시 손을 날렸다. 철썩, 철썩......! 두 원주는 각기 따귀를 두 대씩 얻어맞고 나동그라졌다. 목극렴은 그들의 허리에 둘러져 있는 두 줄의 황금띠를 보며 자못 사나운 기색으로 으르렁거렸다. "겨우 원주급에 불과한 것들이 천극사패왕의 일 인인 노부를 공격 하다니. 네놈들은 백 년 동안 하극상만 배웠더냐?" 경황중에도 두 원주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당신이......?" "그... 그렇다면 백 년 전에 외부로 나가셨던......!" 목극렴은 헛기침과 함께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험! 맞다. 노부가 바로 광천패왕(狂天覇王) 목극렴이다." 두 원주는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부복했다. "대... 대사존을 뵈오이다." "치죄를......!" 그들의 반응이 그러하자 이십여 명의 소년들도 모두 두려운 기색 으로 머리를 조아리기에 이르렀다. 목극렴은 고개를 돌려 용비운 을 응시하며 씨익 웃었다. "다행히도 이 어린 것들이 노신을 알고 있소이다, 종사." "음, 대단히 보기 좋구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의 위명을 기억하고 존중해 주니 말이오." 용비운도 이때 만큼은 농담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제자들 앞에서 목극렴의 체면을 깎아놓을 의사는 없었으므로. '웬일이야? 종사의 험구(險口)가 매끄러운 말을......!' 목극렴의 안면에 스르르 미소가 번졌다. 불현듯 성곽 위로부터 무수한 인영들이 허공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들었다. 족히 일천 명은 됨직한 그들은 지면에 이르자 질서정 연하게 사대(四隊)로 나누어 섰다. 그들의 신법은 한결같이 상승의 경지를 보이고 있었다. 그 앞에 수뇌로 보이는 십구 인이 내려섰다. 붉은 투구를 쓴 열 명의 청년이 뒷열에 섰고, 한 명의 화의여인(花衣女人)을 중심으 로 여덟 명의 거한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화의여인은 노파인지 중년의 여인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머리 는 호호백발이었지만 얼굴은 아직 윤곽이 선명하고 주름도 없어 중년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인상이 날카로워 매우 신경질적으로 보였는데 그녀는 한 손 에 혈죽(血竹)으로 된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폭혈 원주와 사극원주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대마후를 뵈옵니다." "저자들은 누구냐? 어떻게 절진을 뚫고 들어왔지?" 화의여인은 눈에서 회광(灰光)을 발하며 물었다. "네, 광천패왕께서 현신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사존께서 백 년만에 돌아오셨습니다." "뭣이?" 두 원주의 말에 화의여인은 안색이 대변했다. 그녀는 한 차례 몸 을 격렬하게 떨더니 목극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⑤ 목극렴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를... 이 목극렴을 알아보겠소? 화군(花君). 당신은... 그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려." 화의여인은 꽃바구니를 손에서 툭 떨어뜨렸다. "정녕... 목랑, 당신인가요?"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 듯 자꾸만 눈을 깜빡였다. "그렇소, 이제야 당신 앞에 나타난......." 목극렴이 바로 코앞에 이르자 그녀는 비로소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아무래도 오랜 풍상을 거친 탓에 상대의 얼굴에서 예전 윤곽을 금세 알아보기는 어려웠던 듯했다. 그녀의 회안에 눈물이 차 올랐다. "그렇군요, 목랑. 틀림없는 당신이에요." "화군!" 목극렴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실 그들은 부부(夫婦)로서 백 년만에 기적적인 해후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 노부부는 중인들의 이목도 개의치 않 고 서로 얼싸안은 채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 광경을 보며 용비운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들의 기분은 대충 상상이 간다. 백 년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반 가울까? 살아있기를 기대하기도 힘들었을텐데.' 그러나 화의여인은 곧 목극렴을 거칠게 밀쳤다. "이 영감탱이가 정말로 예전의 준수했던 목랑이란 말인가?" "화... 화군, 갑자기 망녕이 났소? 그 무슨 소리를......." "닥쳐!" 화의여인은 꽃바구니를 집어들더니 그를 마구 때렸다. "그래, 난 망녕이 났다. 꽃다운 시절은 다 날려버리고 어디서 송 장 같은 몰골로 나타난 너, 철천지 원수인 너때문에!" "잘못 했소, 화군. 내 다시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소." 목극렴은 싹싹 빌며 애원했다. 당세의 초강자였던 그도 강한 기질 을 가진 아내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화의여인의 기세는 점입가경이었다. "그래, 지금까지 혼자 지냈단 소린 못하겠지? 대체 어떤 계집과 놀아나다 이제야 돌아온 거야?" 목극렴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계집이라니 말도 안되오. 내 어찌 당신을 두고......." 그는 다급했던지 용비운을 핑계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천마종사께 예를 올리지 않고." 그가 일천의 마인(魔人)들을 둘러보며 사납게 외쳐대자 사태는 삽 시에 흐름을 달리 했다. 마인들은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 되어 용 비운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목랑, 천마종사라니요......?" 발작증세를 보이던 화의여인도 일말의 두려움을 내비치며 물었다. 목극렴은 미끄러지듯 용비운에게 다가섰다. "이분이 바로 본성의 영광을 재현시켜 주실 천마종사이시다. 어서 알현의 예를 갖추도록 하라." 용비운은 마인들의 미심쩍어 하는 기미를 읽어내고는 아무 말도 않고 천마금강신공을 끌어올렸다. 슈슈슈슈― 천마금강환이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무수히 떠올랐다. 또한 그것 은 발출되기가 무섭게 일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삼십 장 밖의 노 송을 향해 뻗어 나갔다. 휘리리링―! 펑! 한 차례 폭음과 함께 노송은 세차게 진동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 으로 노송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마인들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들보다 더욱 놀란 인물은 다름 아닌 목극렴이었다. '허어! 지금은 장난 칠 때가 아닌데? 첫 대면에 종사로서의 위엄 을 보이지 않으면 제자들의 추종을 얻기가 힘들거늘.' 그의 조바심은 기우에 불과했다. 푸스스스....... 높이가 무려 십 장에 달하는 노송이 밑둥에서부터 서서히 가루가 되어 주저앉았던 것이다. "저... 저럴 수가......!" 일천 명의 마인들은 대경하는 한편, 용비운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용비운이 우수를 치켜올리며 그들을 향해 외쳤다. "고금제일(古今第一) 천마재현(天魔再現)!" 사위를 진동시키는 그의 강력한 천마후(天魔吼)에 일천 마인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부복했다. "천마종사를 알현하오이다!" 용비운은 그들의 경배를 받으며 주체하기 힘든 희열을 느꼈다. 그 것은 그 자신이 생각하기로도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겠지? 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출신이 비천해 각처를 떠돌아야 했던 내가 천단과 버금가는 천마일맥의 종사가 되다니......!' 반면에 그는 양어깨가 더욱 무거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나에게는 이들을 다스려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과연 내가 그 일을 무리없이 해나갈 수 있을지?'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덕분에 불사천황성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는데, 이는 천마종사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백 년 전에 출성하여 실종되었던 대사존 절대패왕 목극렴까지 귀 환을 했고 보니 경사가 겹친 셈이었다. 성내의 대광장(大廣場). 백여 개의 모닥불에서 피어오르는 화염으로 인해 밤은 하늘 높이 밀려났다. 기분 좋게 술에 취한 마인들은 제각기 병기를 들고 나 와 춤을 추었고, 간간이 소년소녀들의 희한한 묘기들이 박수갈채 속에서 전개되기도 했다. 상좌(上座)에는 이십 명의 수뇌들이 푸짐한 상을 가운데 놓고 둘 러앉아 있었다. 용비운은 그 거마(巨魔)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며 환담했으며, 목극렴에게도 여느 때와는 달리 깍듯이 대해 주었다. 간혹 목극렴을 제외한 천극사패왕이 술잔을 넘기는 척 하고 그의 공력을 시험해보려 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용비운은 술잔을 가볍 게 받아쥐어 오히려 그들을 놀라게 했다. 잔화는 줄곧 그의 뒤에 시립한 채 시중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용 비운의 곁이라 여겨서 그런지 살벌한 마인들의 연회 장소에서도 시종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용비운은 수뇌들의 성격을 일일이 뇌리에 담아 두었다. ⑥ 천극사패왕. 그들은 불사천황성의 수호신으로 불리우는 만큼 고강한 마공의 소 유자들로 모두 천마칠패공(天魔七覇功) 가운데 한 가지씩을 극한 의 경지까지 익히고 있었다. 천마십대금사(天魔十大禁師). 이들은 천마종사의 시위에 해당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과 동급의 수뇌들로는 사대각주(四大閣主)가 있다. 전륜마각(轉輪魔閣), 혈예마각(血藝魔閣), 천강마각(天 魔閣), 붕천마각(崩天魔閣), 이 사대각에 일천 명의 마인들이 고루 나뉘 어 종속되어 있다. 또한 일각(一閣)은 다시 삼원(三院)으로 분리되어 있기도 했으나 총체적으로 이르자면 불사천황성은 사각(四閣) 십이원(十二院)으 로 구성되어 있었다. 용비운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대마후 설화군(雪花君)과도 여러 방면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일백 년 전 전륜마각의 각주였다. 그러다 경륜이 쌓이자 불사천황성을 총괄하는 대마후의 신분에까지 올랐다. "성주께 본성의 내력에 대해 말씀드리겠어요." 설화군은 해골 형상의 술잔을 비우며 입을 열었다. "일천 년 전, 천단의 기습으로 사실상 본성은 궤멸되었지요. 불사 천황께서도 저들의 합공에 패하신 후 실종되셨어요." "흐음!" "다행히 총상(總相)이신 혈황마제(血荒魔帝)께서 생존해 계셨기에 본성은 이곳 사유림에 재건될 수 있었지요." 목극렴도 그녀의 뒤를 이어 한마디 거들었다. "지금의 성곽은 애초의 규모에 비해 십분지 일밖에 안된다고 하 오. 형편없이 축소된 것이외다." 용비운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여보였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그 위세를 짐작할만 하다. 이곳의 규모만 해도 일개 성으로는 무 림 최대라 할 수 있거늘, 까마득한 일천 년 전에 이보다 십 배나 되는 방대한 성이 세워졌었다니.' 설화군이 목극렴을 향해 매섭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 겨우 범패륵에게 패해 일백 년간이나 땅 속에 처박혀 있었던 주제에 어딜 나서요?" "알았소." 목극렴은 목을 움츠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설화군은 용비운을 응 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후로 본성은 내내 사문의 금제로 갇혀 지내며 천마종사의 탄생 만을 기다려야 했어요. 총상 혈황마제께서 숙적인 천단(天檀)이 출현하거나 천마종사의 현신이 있기 전에는 절대 무림 활동을 해 서는 안된다는 유명을 남기셨지요." "그분의 판단은 현명했소." 용비운은 그렇게 운을 뗀 뒤 덧붙여 말했다. "천단은 본성이 최강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을 때에도 막강한 잠재 력을 보유하고 있었소. 본성이 천하독패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무림에 재등장했더라면 아마 현재의 세력조차 남아나지 못했을 것 이오." 설화군의 회안이 일순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성주께서는 천단을 너무 높이 보시는군요." "그렇다면 지금 그 말은 마후의 능력이 과거의 천마보다 뛰어나다 는 뜻이 되겠구려?" 용비운이 걸고 넘어진 것은 그녀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서였다. 과 연 그의 공박에 설화군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소리없 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향해 말했다. "본좌는 불사천황의 진전을 이으며 천단을 상대할 방책을 강구해 놓았소. 천황께서 남기신 혈지도의 비밀만 풀면 천단쯤은 걱정하 지 않아도 될 것이오." "혈지도라면......?" 설화군이 조심스레 물었으나 용비운은 차갑게 응수했다. "성주인 내가 마후에게 그것까지 보고해야 하오?" 그 한마디는 좌중의 공기를 삽시에 냉각시켰다. 내내 좌불안석이 던 목극렴은 급기야 설화군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이 노파가 성주께 불손하군. 어서 나오지 못해?" 설화군은 질질 끌려나가면서도 앙칼지게 외쳤다. "영감탱이야, 이 손 놓지 못하겠느냐?" "시끄럽다!" 목극렴은 발버둥치는 그녀를 제압해 어깨에 둘러메더니 빈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⑦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십대금사 중 수갑(首甲)이라는 인물이 용비 운을 향해 공손히 말을 건넸다. "성주께서는 부디 진노를 푸십시오. 본성에 대해 의문점이 있으시 면 속하가 무엇이든 말씀 올리겠소이다." 천 년 이래 숱한 십대금사가 존속해왔지만 제대로 주인을 갖게 된 십대금사는 오직 이들뿐이었다. 때문에 십대금사는 용비운에게 유 달리 신경을 쓰고 있는 터였다. 용비운은 흥겹게 노는 마인들을 주욱 훑어보며 물었다. "본성은 연혁에 비한다면 인원이 너무 적은 것 같은데, 혹시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었소?" "그동안 본성에서는 교육을 시켜보아 자질이나 오성이 딸리는 아 이들은 모두 제거해 버렸소이다. 그래서......." 용비운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잔인한 짓을! 정녕 마(魔)의 본맥답구나.' 그는 잔화가 따라준 술잔을 받으며 물었다. "벌써 백 년이 지난 일이기는 하오만 신임 총상은 어찌하여 그 때 사문의 금규를 어기고 강호로 나간 게요?" 신임 총상은 목극렴으로, 용비운에 의해 임명되었다. "당시 천극사패왕이셨던 총상께서는 앉아서 천마종사의 현신을 기 다릴 게 아니라 나가서 찾아보자고 하셨소. 그분의 뜻은 강경했고 제자들도 동조했기 때문에 당년의 총상이셨던 혼극대제께서도 종 내에는 승낙을 하신 것이외다." "흠! 어쨌든 본성의 금규를 어긴 것만은 확실하군." 용비운은 그렇게 맞장구를 치면서도 수갑의 눈에 어린 교활한 빛 을 읽어내고 냉소를 머금었다. '후후... 당신에게는 총상이 된 패왕이 눈엣가시겠지? 그를 밀어 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을 테니까. 그래봐야 소용없다. 당신 은 그의 발끝에도 못미치는 위인이야.' 그는 짐짓 난색을 지었다. "그러나 어쩌겠소? 그 당시 총상의 인가를 받았다니 지금에 와서 죄를 물을 수도 없고. 게다가 신임 총상은 무림에서 자신이 천마 일맥임을 일체 드러내지 않은 걸로 알고 있소만?" 수갑의 눈가에 엷은 실망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쯧! 일이 잘 풀리려나 했더니.' 용비운은 문득 생각난 듯 화제를 돌렸다. "참, 사유림에 설치된 반천역행진은 어찌된 것이오? 누가 임의로 진세를 바꾸어 놓았소?" 수갑이 뭐라 답하려 할 때, 잠시 장내를 벗어났던 목극렴과 설화 군이 나란히 되돌아왔다. 그들 두 사람의 태도는 사라질 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 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목극렴은 무척이나 당당한 태도였고, 반대로 설화군은 전에 없이 아주 다소곳해진 데다가 안면에는 은 은한 홍조마저 어려 있었다. '후후... 총상이 당분간은 우위를 점하겠군.' 용비운은 짐작되는 바가 있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목극렴은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자리 에 앉았다. "험! 부인, 어서 술을 따르시오." "알았어요." 설화군은 눈을 살짝 흘기기는 했으나 순순히 그의 잔을 채워 주었 다. 그녀는 용비운에게도 한 잔 권했다. "성주께 방금 전의 무례를 사과 드리겠어요." "하하하... 사과는 무슨. 나도 실은 좀 격했소이다." 용비운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목극렴과 건배를 했다. 설화군 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어... 오다 들으니 성주께서는 사유림에 설치되어 있는 진세에 대해 의문을 가지신 것 같던데......?" "그렇소. 어찌된 영문인지 말해 주시오." "그건 이십 년 전 본성의 반도들에 의해 그리 되었지요." "반도?" 용비운이 반문하자 설화군은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십 년 전 본성의 십이원주가 한꺼번에 성을 빠져나갔어요. 그 중 전륜마각 소속인 혼문원주(混文院主)가 반천역행진을 펼쳐 놓 았지요." "음, 그런 일이 있었구려." "혼문원주는 지혜도 뛰어났었지만 기문진학 방면에서는 대가급이 었지요. 그자가 반도들끼리 뭉쳐 천하를 독패할 생각으로 본성을 외부와 차단시켜 버렸어요." 용비운은 술잔을 소리나게 탁 내려놓았다. "제법 머리를 썼구려. 아닌 게 아니라 진법으로 본성을 묶어 놓으 면 무림을 마구 휘젓고 다닌들 아무도 그자들의 마공을 감당해낼 만한 자가 없었을 것이오." 그의 눈이 일순 이채를 발했다. "본좌는 그들이 누구인지 대강 짐작이 가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일명 십이대천마(十二大天魔), 당금 무림에서 공포스러운 존재로 불리우는 그자들이 분명하오." 이어 용비운이 예전에 만났던 음마(淫魔), 도마(刀魔), 독마(毒 魔)의 생김새를 설명하자 설화군은 손뼉을 탁 쳤다. "맞아요! 그놈들이 반도예요." 용비운은 그 말에 비로소 그들이 천마금강신공을 보고 줄행랑을 놓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죄가 있으니 도망칠 만도 하지. 다만 걱정이다. 그들 십이 원주 의 출현만으로도 천하가 술렁였는데 이곳의 일천 마인이 모두 출 곡한다면 중원 무림은 대혈겁을 면치 못하리라.' 그는 재삼 다짐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불사천황성이 무림으로 밀고들어가는 것만은 막겠노라고. 용비운은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본좌를 보라!" 그의 천마후(天魔吼)에 장내의 소란은 일시에 멎었다. 그는 좌중 의 인물들을 쓸어보며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본좌는 천마의 후예로서 감히 공언하는 바이다. 차후 일 년 이래 로 천하는 본성의 발 아래 굴복하게 될 것이며, 숙적인 천단도 그 때에 궤멸시켜 버릴 것이다." "와아아아아―!" 일천 마인들은 일제히 환성을 터뜨렸다. 용비운은 손을 들어 그들 에게 잠잠하도록 명하고는 말을 이었다. "현재로선 시기상조다. 아직 본좌의 마공이 완성되지 못했을 뿐더 러 그대들의 무공도 천하를 제패하기에는 부족하다. 일 년의 시한 을 둔 것은 그래서이니 그때까지 각자 자숙하고 무공수련에 심혈 을 기울이기 바란다. 본좌는 그동안 일체의 전략과 계책을 수립해 두겠다." "우우우우... 천세(千歲) 불사천황성―!" 일천 명의 마인들은 금제에서 벗어나 중원 대륙을 질타할 수 있다 는 생각에 모두 흥분하여 부르짖었다. 용비운은 밤하늘을 진동시키는 그들의 함성에 감당하기 어려운 중 압감을 느껴야 했다. '향후 일 년간은 이들의 발호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뒤는 어 쩐다? 내가 반천역행진을 파해하고 이곳에 들어온 것이 혹 잘못된 일은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면 이들은 영원히 갇혀 있었을지도 모 르건만.......' ⑧ 욕실(浴室). 용비운은 대나무 침상에 엎드려 있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의 목욕 시중을 들고 있는 소녀는 잔화였다. 이곳 불사천황성에는 자색이 뛰어난 소녀들이 많이 있었지만 용비 운은 굳이 잔화를 선택했다. 그녀의 서글퍼 보이는 눈망울을 대하 면 왠지 아련한 회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그였다. 불우했던 과거지사는 항시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 은 화려하게 변신해 있는 지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등을 밀면서 잔화는 내내 기쁜 표정이었다. 실상 용비운의 시중을 드는 일은 그녀에게 있어 생애 최고의 낙이자 행복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생의 의미를 발견하곤 한다. 그녀의 이마와 콧등에서 솟은 땀방울이 갸름한 턱선을 타고 흘러 내렸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그녀는 얇은 나삼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는데 물기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자 그녀의 여윈 몸매를 그 대로 투영시켜 주었다. 용비운은 벽에 부착되어 있는 동경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며 일말 의 측은지심을 느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진한 체향에도 불구 하고 욕념 따위는 일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돌아눕자 잔화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과 어깨로 손을 옮겨갔다. "잔화, 살이 좀 붙으면 너도 무척 귀엽게 보일텐데 아쉽구나. 그 몹쓸 극락원에는 어떻게 해서 끌려가게 되었느냐?" 용비운이 묻자 잔화는 그의 손바닥 위에 썼다. - 소녀는 본래 병드신 할아버님을 모시고 주루와 객점을 찾아다니 며 노래를 팔아 연명했었답니다. 그러다 일 년 전, 밤길을 가던 중에 괴한에게 납치를 당했어요. 할아버님께서는 그때 그 자들의 칼에 쓰러지셨지요. 잔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은 곧 볼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그녀는 닦으려 하지도 않고 계속 글씨를 써 나갔다. - 괴한들은 소녀를 극락원으로 데려갔고, 이후로 전 그곳에서 향 화가 되었어요. 다른 순진한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으음......!" 용비운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소녀는 향화가 되던 그날밤 어떤 위사의 방으로 끌려갔어요. 그 리고 그자가 덤벼들기에 혀를 깨물었지만 죽지는 못했어요. 단지 말을 잃었을 뿐이지요. "그만! 되었다, 잔화." 용비운은 그녀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볼에 갖다대었다. 가슴에 차 오르는 비애를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잔화는 눈물 젖은 얼굴로 생긋 웃더니 슬며시 손을 빼내 다시 글 을 써가기 시작했다. -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소녀는 극락원주에 의해 되살아난 후로도 더럽혀지지 않았어요. 그녀는 소녀를 설득시키기 위해 음식도 제 대로 주지 않고 날마다 채찍질을 가했어요. 하지만 소녀는 끝내 굴하지 않고 버텨왔지요. 적어도 인간으로 난 이상 짐승처럼 살아 갈 수는 없기에....... "잔화, 네가 나보다 낫다." 용비운은 쓰디 쓰게 웃었다. 그것은 그녀의 내력을 전부 듣게 되 자 스스로가 몹시도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심중에서는 이런 읊조림이 일고 있었다. '이 소녀는 나처럼 불우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으면서도 나와는 정 반대다. 난 살기 위해서라면 여하한 술수나 기만도 불사했건만 잔 화는 인간답게 살고자 연약한 육신으로 그 모진 고통과 수난을 다 감수해 왔다.' 용비운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가 너를 만나게 된 건, 아마도 너를 바라보며 나 자신을 되돌 아보라는 운명의 안배인가 보구나." 그녀의 눈이 물었다. - 왜 그런 말씀을? 용비운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처절한 과거를 가진 사람은 대개 자신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 게 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뒷전이야. 그러다 우연을 빌어 화려한 변신이라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기고만장이지. 그것이 파멸로 이르는 첩경인지도 모르는 채......." 이는 어쩌면 그의 인생전반이 요약된 말인지도 몰랐다. 그는 잔화 를 정시하더니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잔화, 내 부탁하자꾸나. 너는 늘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혹여 내 가 그른 일을 하려 들면 그때마다 저지시켜 다오. 나란 인간은 어 리석어 판단기준이 모호하단다. 심지어 내가 악인(惡人)인지, 의 인(義人)인지조차 모를 때가 많구나." 잔화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비애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감격에 겨운 나머 지 내심 외치듯 부르짖고 있었다. '아아! 소녀는 더 바랄 나위가 없어요. 공자께서 이처럼 저를 믿 어 주시니. 금후로 소녀는 공자가 천하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웅이 되시도록 천지신명께 기원하겠어요.' 용비운은 그녀를 안으며 그 자신도 믿기 어려운 안도감을 느꼈다. 누구보다 먼저 그녀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기에.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독 ㄳ
잼 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