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천마공자(天魔公子)로 ① 쿠르르르― 쿠쿠쿠쿠― 거대한 두 줄기의 폭포가 일대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높은 벼랑에 서 떨어져내리는 양대 폭포수는 중도에서 만나 어마어마한 물기둥 을 이루기도 했다. 이름하여 쌍룡폭(雙龍瀑). 위치는 촉산 쌍룡협이었다. 폭포수가 모이는 용담(龍潭)가에 십이 인이 사뿐히 내려섰다. 용비운 일행이었다. "고죽군은?" 용비운이 묻자 해령령은 손가락으로 두 줄기의 폭포수가 만나는 지점을 가리켰다. "그의 거처는... 저 뒤에 있어요." "물기둥을 뚫고 들어가야 한단 말이오?"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는 항상... 저곳에서 나왔으니까요. 물기 둥 뒤에 수동(水洞)이 있는 것 같아요." 해령령의 음성이 다소 떨려 나왔다. 뿐만 아니라 물기둥을 올려다 보는 그녀의 눈에는 애증(愛憎)이 서려 있었다. "불러보시오." "저... 저는......." 그녀가 멈칫거리자 네 마군이 동시에 외쳤다. "환우천자!" 그들의 심후한 내공이 실린 외침은 폭포의 굉음을 뚫고 쌍룡협을 진동시켰다. 그 메아리에 그들 자신을 포함한 십이 인 모두가 한 동안 고막을 봉쇄해야 했다. 용비운은 그러고도 잠시 기다렸다가 물었다. "그는 이내 나왔소?" "네, 언제고 메아리가 사라지기 전에 나왔는데......." 해령령도 불길한 예감이 든 듯 안면을 굳혔다. "안되겠군. 우리가 들어가 보아야겠소." 용비운은 신형을 뽑아올리는가 싶자 이십여 장을 솟구치더니 허공 을 평지처럼 밟고 섰다. 그 광경에 해령령과 네 마군은 경악을 금 치 못했다. '오오! 천마의 마등비(魔騰飛)라도 저 정도는 아니리라.' 그것은 목극렴도 알지 못하는 천단의 경공 절학이었다. 용비운은 허공에 뜬 채 우수를 치켜올렸다. 츄아아아악― 그의 손아귀에서 핏빛 투명한 검형이 뻗어나갔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불사마검이었다. "천마종폭(天魔縱暴)!" 그는 재도약하며 불사마검을 내리그었다. 천마의 검학인 천마개벽 칠세(天魔開闢七勢) 중 제일초였다. 파츠읏―! 일시지간 사위가 암흑으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한 줄기 핏빛 섬광이 내리꽂혔다. 콰아아아― 양대 폭포수가 합쳐진 물기둥이 환상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동시 에 그 사이로 물이끼가 뒤덮인 석벽이 드러났는데, 과연 그 중앙 부에는 하나의 동구(洞口)가 뻥 뚫려 있었다. "차앗!" 용비운은 불사마검을 체내로 거둬들이며 수동 안으로 쏘아져 들어 갔다. 목극렴과 해령령을 비롯한 오행마군도 그와 함께였으나 오 대금사는 기회를 잃어 들어가지 못했다. 갈라졌던 물기둥은 급격히 합쳐졌고, 사대마군과의 격돌시에 내상 을 입은 오대금사는 신법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뒤처지게 되었던 것이다. ② 수동은 그리 깊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용비운은 반대편에서 스며 드는 밝은 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자연광(自然光)인데, 그럼 외부로 통해 있나 보군.' 일행은 빠른 걸음으로 전진하여 수동의 외부로 나섰다. 그곳은 전체적으로 화산의 분화구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는 지 역이었다. 말하자면 사방이 막힌 깊은 절곡으로 경사가 급한 사면 에는 울창한 수림이 뒤덮혀 있었다. 그래도 바닥만은 꽤 넓고 평탄했다. 아마 전에는 잔디가 깔려 있 고 기화요초로 아름답게 꾸며진 곳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온통 파헤쳐져 꽃이고, 잔디고 할 것 없이 붕괴된 암석이나 흙더미 등과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었다. '아뿔싸! 불행히도 예감이 적중되고 말았군.' 용비운은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부르짖었다. "이게 대체... 대체 어찌된 일이죠?" 해령령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몸을 떨었다. 용비운은 대밀종천 의 비밀을 입에 담을 수가 없어 대강 둘러댔다. "침입자가 있었던 듯하오. 그것도 엄청난 무공을 지닌." 그는 목극렴과 함께 주변을 빠르게 수색했다. '고죽군의 무공은 어느 정도나 될까?' 용비운은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다. '공손 사형께서는 천단의 네 제자 중에서 당신의 무공이 가장 약 하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무공 수준은 불사천황 성의 천극사패왕에 버금갈 정도였지.' 그의 시선은 무너져내린 석벽으로 옮겨졌다. '그렇다면 대제자인 고죽군 사형은 목극렴 이상일테니 범패륵과 막상막하의 격전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다 그는 석벽 깊숙이 새겨진 거대한 장인을 보게 되었다. 그 장인의 크기는 범인(凡人)의 세 배는 될 성 싶었다. '범황대수천인! 틀림없군. 이곳에 온 자는 범패륵이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누구일까? 범패륵을 이용해 고죽군 사형을 공격하게 만든 인물 은? 필경 그자는 양측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리라.' 용비운은 천단의 제자가 네 명임을 상기해 냈다. '고죽군을 대사형이라 간주한다면 이사형은 공공천야, 막내는 죽 은 용비운, 셋째 제자만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천단의 셋째 제자도 용의 선상에 올려 놓았다. 아직 심증일 뿐인지라 단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용비운은 잿더미 위에 뒤덮힌 돌무더기를 응시했다. '흉수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곳에 불을 지르고 암석으로 묻어 버렸다. 이 잿더미 속에서 대사형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일단 살해당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사대마군 중 금륜패왕이 옆으로 다가섰다. "주공, 이 암석들을 치워 드릴까요?" "음, 그래 주시오." 용비운은 그의 우람한 체구를 통해 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 니나 다를까? 금륜패왕은 암석더미에 뛰어오르더니 집채만한 암석 들을 조약돌 던지듯 사방으로 집어던졌다. 쿠콰콰쾅―! 이윽고 드러난 것은 수북한 잿더미였다. 적융염왕이 재를 한 줌 쥐어 면밀히 살펴보고는 말했다. "주공, 이것은 삼매진화(三昧眞火)에 의한 재가 틀림없습니다. 만 일 이자가 화공(火功)을 별도로 수련하지 않고 순수한 내공만으로 이러한 재를 만들어냈다면 그의 공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수 준일 것입니다." 불에 관한 그의 깊은 조예가 입증되고 있을 때, 하토살군이 지면 에 관한 수색을 마치고 용비운의 앞으로 다가섰다. "주공, 바닥에는 두 사람의 족인이 찍혀 있습니다. 하지만 소신의 관찰에 의하면 한 사람이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흐음!" "그 미세한 흔적은 여인의 것인 듯합니다." "여인......?" 용비운은 뜻밖의 보고를 받게 되자 머리 속이 혼란해져 잠시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해령령이 다소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주공, 이것이 어찌된 일이죠? 누가 그분의 처소를 공격한 것입니 까, 또 여인의 흔적이라니요?" 용비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소,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공께서는 분명 무엇인가를 알고 계세요. 그러면서 왜 저에게 숨기시는 거예요?" 그녀는 마침내 감정이 폭발해 버린 듯 미친 듯이 외쳐대고 있었 다. 목극렴이 그런 그녀를 얌전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닥쳐라! 감히 주공께 그따위 언사를 쓰다니. 하극상의 죄가 얼마 나 큰 줄을 모른단 말이냐? 주공께서 말씀하실 만한 일이라면 어 찌 숨기셨겠느냐?" 해령령은 일이 커지자 오히려 더 길길이 뛰었다. "내게 주인 따위는 필요치 않다! 오직 고죽군, 그분의 생사만이 중요할 뿐이란 말이다." 목극렴은 대노했다. "이 계집이 실성을 했구나!" 콰르르르― 급기야 그의 붕천마권이 작렬했다. 경황 중에도 해령령은 본능적 으로 몸을 피하며 수렴빙강을 펼쳤다. 펑! "흑!" 해령령은 외마디 신음을 토하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그녀가 아무 리 오행천군도주로서 자질이 뛰어나다 해도 오행마공을 제외하면 목극렴에게는 능력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건방진 계집! 너같은 반도가 있다는 것은 천마일맥의 수치다. 어 디 사내가 없어 하필 천 년 숙적인 천단의 후레자식에게 홀랑 빠 진단 말이냐?" 목극렴의 일 권이 다시 뻗어나갔다. 그러나 을목상군이 그들 사이에 유령처럼 내려섰다. 그는 전신이 나무껍질처럼 변해 있었다. 을목청갑(乙木靑甲)이라는 독문의 호 신강기를 펼친 것이다. ③ 쾅! 폭음이 울리자 을목상군은 휘청했다. 그는 가슴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 자리를 비킬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노사, 차라리 속하를 죽여 주시오." 목극렴은 안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못난 놈! 계집은 감싸줄수록 콧대를 세운다고 내 누누이 말했건 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느냐?" "노사, 부디 사매를 용서하소서." 을목상군은 만면에 고통을 드러내면서도 애원했다. 해령령이 그를 향해 싸늘하게 외쳤다. "흥! 이런다고 내가 사형을 좋아할 줄 알아? 난 지금도 네 사형 모두를 인간 이하로 생각하고 있는 걸." 그녀는 피를 토하듯 외치고는 동부로 뛰어들었다. "저런 못된 계집!" 목극렴이 눈에서 살광을 번뜩이며 그녀를 쫓으려 했다. "놔두시오, 목노." 용비운은 그를 제지시킨 후, 을목상군에게 명했다. "그대는 뭘 하고 있소? 어서 따라가시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포 기란 있을 수 없소. 평생 한이 될 테니까." "감사합니다, 주공!" 을목상군은 감격하여 부르짖더니 해령령을 쫓아 신형을 날렸다. 용비운은 적융염왕과 금륜패왕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은 오행천군도로 복귀하시오." "주공......?" "그곳에는 제자들이 몇 명이나 있소?" 적융염왕이 그의 의도를 알고는 굳어진 안색을 풀었다. "네, 겨우 백여 명에 불과합니다만 무공만은 개개인 모두가 일류 급입니다." "음, 좋소. 그들을 전부 중원으로 데리고 오시오. 가급적 빠른 시 일 내로 월영성궁에 당도해 있도록 하시오." "복명!" 이대마군은 부복배례 하더니 동부쪽으로 날아갔다. "주공, 소신은... 어찌 하오리까?" 하토살군의 물음에 용비운은 빙긋 웃었다. "그대는 나를 보좌해 주오." "아! 감사합니다, 주공." 목극렴은 기뻐하는 하토살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두꺼비! 이제부터 자네는 주공의 명이라면 불 속에라도 뛰어 들어야 한다. 알겠는가?" "네, 노사!" 용비운은 공공천야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초파일 군웅대회는 사형께서 주최하셔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런 데 신주십대고수 중에서도 육 인이나 참여하건만 사형께서는 어찌 하여 잠자코 계시는 것일까?' 그는 방향을 돌려 항산행을 결정했다. "목노, 당신은 살군과 오대금사를 대동하고 먼저 동백산 월영성궁 으로 가시오." 목극렴은 하토살군을 어르고 있다가 펄쩍 뛰었다. "아니, 주공! 어찌 노신과 따로......." "군웅대회는 오 일밖에 남지 않았소. 항산에 들렀다 가기에는 시 간이 너무 촉박하오. 나 혼자 움직여 보겠소." "그까짓 군웅대회야 참여하지 않으면 또 어떻소?"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오." 용비운은 빠르게 동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마 공손 사형께 무슨 재난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④ 항산 은한림(隱閑林), 그 울창한 송백림 너머에 신비의 천단(天檀)이 있다. 천단의 지하광장이다. 용비운은 촉산에서 항산으로 이르는 육천 리 길을 이틀 만에 주파 해 왔다. 그는 연공실 옆인 공손찬의 거처로 향했다. '은한림 내에는 안 계시던데......?' 석실도 썰렁하게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용비운은 새삼 그 내 부를 둘러보았다. "기물들이 내가 떠날 때 그대로인 것으로 미루어 사형께서는 내가 천각봉으로 간 즉시 이곳을 뜨셨나보구나." 그러다 그는 석실 중앙의 원탁에 놓인 한 통의 서찰을 보게 되었 다. 서찰 위에는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흠, 먼지의 두께로 보아 떠나실 때 남기신 것이 분명하다." 그는 봉투를 열고 서찰을 꺼내 들었다. <소사제(少師弟) 전. 너를 떠나보내고 점괘를 뽑아보니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괘가 나 왔다. 그것은 천각봉 결투에서 네가 화(禍)를 입는다는 뜻이니 상 대는 우려했던 대로 범패륵이리라. 하지만 어떤 액운이 닥치더라도 이내 길(吉)하게 되어 있어 이 사 형은 안심할 수 있었다.......> "사형께서는 과연 현자(賢者)십니다. 어떻게 타인의 앞날에 대해 그리도 정확하게 꿰뚫어보실 수가 있습니까?" 용비운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계속 서찰을 읽어갔다. <......네가 이 서찰을 읽을 때면 이 사형은 곤경에 처해 있을 것 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 유언(遺言)이 될지도 모르지. 네가 주고 간 혈지도를 해독하는 순간, 나는 무림에 전설로만 내 려오던 저주(詛呪)가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혈지도가 가리킨 곳으로 가려 한다. 이 한 목숨 바쳐서라도 악마(惡魔)의 예언, 즉 구마혈정의 저주를 영원히 소멸시킬 수만 있다면 피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 이게 무슨 소린지......?" 용비운은 충격을 받은 듯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 말은 천마의 봉인서(封印書)에도 있지 않았는가? 너무 허황되 게 느껴져 잊고 접어 두었었거늘, 저주의 전설은 결국 진실이었단 말인가?" 그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무저동(無底洞)에 던져졌다는 구마혈정 의 존재를 떠올리며 입술을 질겅 씹었다. '어쨌든 안된다, 사형께서 그렇게 희생되어서는......!' <...... 소사제는 그 전설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 그 일은 진위여부를 떠나 내가 책임질테니 너는 부디 천(天)이라 는 단체로부터 무림을 지켜주기 바란다. 그것이 본 천단의 후예로 서 짊어져야 할 가장 막중한 소임이다. 혹여 도중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 촉산 쌍룡협에 은거해 계신 대 사형을 찾아가 나와 인연을 맺게 된 얘기를 하고 도움을 청해라. 그분은 환우천자 고죽군이라는 분이시다.......> "으음......." 용비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추측은 들어맞았으되 고죽군은 생사불명인 채 실종된 상태였으므로. <...... 천하에서 그분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분의 무공은 당대 최강이라 할 수 있으니 그분이 나서주기만 한다 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소사제, 이제 너에게 당대에 이르러 자랑스럽지 못하게 된 본단 십육 대 제자들의 내력을 얘기 하겠다. 대사형 고죽군은 무공이 초절할 뿐 아니라 정의감도 투철했다. 그 분은 천단신서를 개방해 무림정기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호 활동을 통제하시는 선사(先師)와 맞섰다. 그것은 무려 오십 년 전의 일로 끝내 선사와 대사형 간에 일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까지 빚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대사형은 사문에서 축출되는 불명예를 안고 본단을 떠났 고, 그 후로는 쌍룡협에 파묻혀 참회의 나날을 보냈다. 선사께서도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시어 내게만은 강호활동을 제 한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는 천하를 주유하며 공공천야라는 명 호를 얻게 되었지만 학문과 기예에 치중한 나머지 무공의 성취는 너도 알다시피 극히 낮았다. 선사께서는 이를 크게 우려하셨다. 천마가 현신해 불사천황성이 재준동하면 그것을 막지 못하리라고 판단하신 것이다. 그 결과로 선사께서는 한 명의 제자를 새로 거두셨다. 본단으로서 는 드물게 여제자였지.......> "흠, 이런 일이......." 용비운은 의혹이 하나씩 걷혀나가는 기분이었다. <...... 그녀의 자질은 지극히 출중했고 오성도 이사형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름은 화옥미(花玉眉)라 하며 지금쯤 이십사 세가 되 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본단을 떠나버렸고 십오 년이 되도록 소식이 없으 니 이 일도 불미스러운 과거사의 한 부분이다. 선사께서는 그녀 외에도 또 한 명의 제자를 거두셨다. 그가 바로 너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이자 막내 사제인 용비운이다. 막내 사제의 성취는 실로 인간을 초월한 경이적인 것이었다. 이십 여 년 전 갓난아기로 입문하여 막바로 세수정공을 거친 그는 다섯 살때 이미 상승무학의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 당시 아홉 살이던 사매는 그때문에 본 단을 떠나버렸다. 본시 호승심이 강하고 기질이 드세 막내 사 제만을 총애하신다며 선사를 경원했던 것이지. 이로써 제자를 두 명이나 잃게 된 선사께서는 큰 충격을 입으셨 다. 그 분은 자신의 부덕(不德)을 한탄하시더니 종내 당신의 전 공력을 막내 사제에게 물려 주시고 입적하셨다. 소사제, 진즉 얘기해 주고 싶었다만 너는 더 이상 강호일정 용비 운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고, 너는 너다. 본단의 제자가 되는 일도 네 스스로 결정하여 대사형과 상의해라. 단, 무림에서 용사제의 죽음만은 끝까지 비밀로 해다오. 떠날 시간이 되었다. 불과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이었지만 너와는 무척 정이 든 것 같다. 너에게는 완벽을 구가하던 용사제도 가지 지 못한 소탈함과 다정(多情)이 있었다. 그럼 무운을 빌겠다. 공공천야 이사형(二師兄) 절필(絶筆).> 용비운은 서찰을 가슴에 부여안았다. "소제가 천단의 제자가 되든, 아니되든 사형께서는 언제까지나 저 의 사형이십니다. 제발 무사하십시오. 소제의 성장한 모습을 보셔 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진심으로 공손찬의 안위를 기원하며 읊조렸다. "군웅대회가 끝나는 대로 사형을 찾아봐야겠다. 사형이 계시지 않 았다면 지금의 내가 어찌 있었겠는가?" ⑤ 낙조(落照). 잔양에 물든 신록들은 만추의 홍엽을 보는 듯했다. 멀리 동백산이 바라다보이는 소로(小路)다. 스스슥―! 한 가닥 은영이 빠른 속도로 숲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넘실대는 장발이 유난히 눈에 띄는 미녀였다. 눈매가 날카롭기는 했지만 윤곽이 또렷한 이목구비가 모두 아름다웠다. 몸매는 날렵하면서도 나올 데와 들어갈 데가 분명해 육감적으로 보였다. 그 외에도 특징이라면 온통 은색 일색으로, 등에 멘 은도 (銀刀)에서도 은색의 수실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불쾌한 일이 있는지 툴툴 내뱉았다. "흥! 하나 있는 오라비가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니, 잠깐 기다리면 어때서 그 여주귀(女酒鬼)를 따라갔단 말인가?" 싸늘해 보이는 용모가 분노 탓인지 더욱 매섭게 느껴졌다. 그 덕 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선명하게 돋보였다. 은봉(銀鳳) 빙안초선 독고설(獨孤雪). 그녀는 화문사봉의 일 인으로 철담마도(鐵膽魔刀) 독고성(獨孤星) 의 누이였으며 이들 남매는 도제(刀帝) 불승불패도(不勝不敗刀)의 의발전인이었다. 은봉의 도법은 쾌도(快刀)로 쾌도식에 관한한 당금 무림에서 적수 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성격이 차가운 만큼 손속이 지독해 그녀 의 비위를 건드리고 사지가 성한 자는 드물었다. "어디 마주치기만 해봐! 그 멋지다는 구레나룻을 모조리 밀어버릴 테니까." 독고설은 앵두 같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뇌까렸다. 땡땡땡....... 전면에서 문득 음산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독고설은 흠칫하여 신형을 늦추었다. 곧 커다란 동백나무의 한쪽 에 걸린 핏빛 옥종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아미가 홱 치켜 올려졌다. "극락혈종!" 자그마한 혈옥종, 그 겉면에는 추잡스런 음화(淫畵)가 새겨져 있 었다. 이로 미루어 그것은 틀림없이 음마(淫魔) 황음야도(荒淫夜 道)의 신물인 극락혈종이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그녀였지만 십이대천마의 존재에 대해서 는 항상 경각심을 가져왔던 터였다. "크흐흐흐... 알아주니 고맙군." 괴소와 함께 동백나무 위에서 하나의 혈영이 유령처럼 내려섰다. 전신에 털이 북실북실하게 난 괴인은 십이대천마 중에서도 유독 음악한 행위만을 저질러온 음마 황음야도였다. 그는 독고설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다가섰다. "노부가 수고롭게 손을 써야겠느냐, 네 스스로 벗겠느냐?" 독고설은 주춤 물러서며 은도를 움켜 쥐었다. "더러운 작자! 가까이 오면 네 목이 성치 못할 것이다." 황음야도는 그녀의 위협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서라, 그러다 다칠라. 계집의 할 일이란 그저 사내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지." 그는 벌써 욕구가 동했는지 쩌억 입맛을 다셨다. 독고설은 심히 불쾌한 가운데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나의 무공으로는 이자의 십초지적도 못된다. 오라버니만 있었어 도 한 번 겨뤄볼만 한데.' 그녀는 힐끗 주위를 살폈지만 그녀의 오라비인 독고성이 나타나주 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한 기대에 불과했다. '할 수 없다. 일 초의 쾌도식에 운명을 걸밖에.' 그녀는 은도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좋아요. 내 스스로 벗겠어요." 황금야도는 의외인 듯 미간을 좁히더니 괴소를 흘렸다. "크흐흐... 딴 마음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죽어도 네 몸뚱 이는 제대로 보존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어차피 반항을 한들 결과는 마찬가지일테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 다는 거예요." 독고설은 짐짓 체념한 듯 말했다. 황음야도는 동백림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숲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곳으로 가자. 내 미리 보아둔 곳이 있지. 노부는 적어도 분위 기 하나만은 중시하는 위인이다." 독고설은 눈을 내리깔며 그가 가리킨 숲속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심중에서는 이런 읊조림이 일고 있었다. '일 장 이내의 거리에만 들어오면 네놈은 끝장이다.' 무성한 나뭇가지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그는 자의를 걸친 청년으로 안색은 창백했지만 체격만은 미끈했 다. 바로 천마공자로서 무림에 재등장한 용비운이었다. 용비운은 항산을 떠나 군웅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 동백산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월영성궁 밖에서 잔화와 목극렴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뜻밖에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생겼군. 행색으로 보아 저 여인은 화문사봉 중 가장 독하다는 은봉 같은데.' 그는 공공태허번약의 신법으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후후... 어떻게 음마 황음야도를 상대하나 보자.' ⑥ 숲속의 공지(空地). 무릎까지 올라오는 초록의 잔디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다 왔다. 흐흐... 어서 벗어라." 황음야도는 팔짱을 낀 채 그녀의 뒤에 가 섰다. 그는 줄곧 그녀와 이 장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작자가 눈치를 챈 것인가?' 독고설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나는 아직 남자 경험이 없어요." "그렇다면 별 재미는 없겠지만 살살 다뤄주겠다." 독고설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앞섶을 열었다. 그에 따라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황음야도도 윗도리를 벗어제꼈다. 짐승처럼 털이 수북한 그의 가 슴이 욕정으로 인해 심한 기복을 일으키고 있었다. "숫처녀라는 계집이 어찌 젖가리개도 하지 않고 다니느냐? 그런 용기라면 능히 사내에게 안겼을만도 한데." "오해 말아요, 난 거추장스러운 것이 싫을 뿐이에요." 독고설은 허리띠를 풀어 한쪽으로 던졌다. 그 바람에 은색 치마가 흘러내리며 짧은 단의와 매끄러운 허벅지, 날씬한 종아리 등을 차 례로 드러냈다. "우우......!" 황음야도가 욕구를 참느라 짐승 같은 신음을 발하는 사이, 치마는 어느덧 그녀의 발목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호호... 어때요, 이만하면 괜찮나요?" 독고설은 치마에서 발을 빼며 몇 걸음 다가섰다. 그것은 황음야도 와의 거리를 대강 일 장쯤 남겨둔 위치였다. "흐으, 기가 막히구나!" 그는 탄성을 발하며 자신의 허리춤을 잡았다. 독고설은 등에 멘 은도와 함께 상의를 벗었다. 희고 매끄러운 피 부가 노을빛에 젖어 더욱 염색적으로 보이는 순간이다. 그녀는 상의를 벗어 황음야도의 얼굴로 내던지며 은도의 손잡이를 불끈 쥐었다. "죽어랏! 음적." 쐐애액―! 은빛 섬광이 일시지간 허공을 무섭게 갈랐다. 그것은 그녀의 독문 쾌식인 은한섬류(銀漢閃流)였다. 독고설은 승리를 확신했다. 아무리 상대가 공포의 십이대천마중 한 명인 황음야도라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자신의 쾌도식을 막아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판단은 빗나가고 말았다. 황음야도가 어느 틈엔지 허리춤에서 미인혈루편(美人血淚鞭)을 풀어 그녀의 쾌도식을 대번 에 해소시켜버린 것이었다. 파앗―! 독고설의 은도는 무력하게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어리석은 계집!" 황음야도는 미인혈루편을 앞으로 쭉 뻗었다. "악!" 채찍은 그대로 독고설의 흰 목을 휘감아버렸다. "내 네가 은도를 미리 풀지 않고 수작을 부릴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었다. 자, 이리 오너라." 황음야도는 미인혈루편을 잡아당겼다. 독고설은 그에게로 딸려가 면서도 발길로 날쌔게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즉각 황음야도의 손에 잡혔다. "크흐흐... 발부터 쓰다듬어 달라는 말이냐?" 그의 털투성이 손이 그녀의 정강이를 더듬어 올라갔다. "으으......." 숨통이 조여진 독고설은 목을 움켜쥔 채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윽고 황음야도는 미인혈루편을 풀었다. 독고설은 기력이 탈진되 어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기대해라, 이제부터 너를 극락으로 보내줄테니." 그는 마침내 허리춤을 까내렸다. 쉬쉬쉭―! 세 가닥 지공이 그의 머리를 향해 섬전처럼 날아들었다. "헉!" 황음야도는 대경하여 튕기듯이 뒤로 물러섰다. 이토록 근접해 있 기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상대의 무공이 어 느 정도인지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웬놈이냐?" 그는 급히 바지를 추키고 미인혈루편을 집어들었다. ⑦ 스슷! 유령처럼 내려서 독고설을 막아선 자는 용비운이었다. '누가......?' 그녀는 의외의 구원자로 인해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지만 일 편으론 음마의 상대가 못될까봐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용비운이 입을 열었다. "황음야도, 너는 볼 때마다 이 모양이구나." 황음야도는 상대가 무명의 청년이라는 사실에 일단 안심했다. 그 는 늘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 중에서 자신과 겨룰만한 인물은 철담 마도와 천지성검 뿐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네놈은 누구냐? 언제 나를 보았다고 헛소리냐?" 용비운은 천천히 우수를 치켜올렸다. "음마 황음야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붕천마각(崩天魔閣)의 백 수원주(百獸院主)라 해야겠지." 황음야도의 안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네... 네가 어떻게......?" 그로서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과거 불사천황성의 십 이원주 중 백수원주였다는 사실을 아는 인물은 오직 불사천황성에 속해 있는 마인들 뿐이므로. 용비운은 더 말하지 않고 천마금강신공을 운기했다. 츠츠츠츠― 그의 팔을 타고 무수한 금환이 솟아올랐다. "천마금강력!" 황음야도는 흡사 벼락을 맞은 듯 무섭게 몸을 떨었다. "반도! 천마의 명예를 더럽힌 자는 용서하지 못한다." 용비운은 차갑게 부르짖으며 천마금강환을 발출시켰다. 휘리리링―! 황음야도는 경황중에도 미인혈루편을 휘둘러 이를 막았다. 퍼퍼펑! 요란한 폭음과 함께 그의 애병인 미인혈루편은 무참하리 만큼 토 막토막 끊겨져 나가고 말았다. 용비운은 이번에는 우수를 가볍게 말아쥐었다. 츄아아악― 그의 손아귀에서 핏빛의 투명한 불사마검이 솟아나왔다. 그것을 본 황음야도는 질린 듯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불사지력까지... 그렇다면 천마종사......?" 황음야도는 신형을 홱 돌리더니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나기 시작했 다. 그의 가공할 마공도 이 순간에는 무용했다. 상대는 그 마공의 원 류(源流)인 천마일맥의 종주가 아닌가? 용비운은 도망치는 그의 등을 향해 불사지검을 날렸다. "천마종폭(天魔縱爆)!" 츄아아아― 핏빛 섬전이 대기를 가르고 무려 십수 장을 날아 황음야도의 일신 을 쪼개어 갔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황음야도는 그대로 두 쪽이 나 바닥으로 쓰러 지고 말았다.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하던 인물답지 않게 그는 이렇 듯 너무도 간단히 죽어갔다. 용비운은 독고설에게로 신형을 돌렸다. 그녀는 현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망연히 그를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이럴 수가! 음마를 단 이 초만에 해치운 고수가 약관의 청년이었 다니. 게다가 고금최강이라는 천마의 후예라고......?' 용비운은 묘하게 웃으며 그녀의 알몸을 훑어 보았다. "후후... 아주 보기 좋소." 그제서야 독고설은 화들짝 놀라 두 팔로 젖가슴을 가렸다. 용비운 은 그녀의 옷을 허공섭물로 끌어들여 건네주었다. "나는 남들이 천마공자(天魔公子)라 부르오. 아마 군웅대회에서 만나게 될 듯 싶소만?" 스스스....... 그의 신형은 엷어지더니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여, 여봐요!" 독고설이 다급히 불렀으나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 다. 그녀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혹시 내가 꿈을 꾼 게 아닐까?' 월영성궁으로부터 십여 리 정도 떨어진 곳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임시로 세워진 점포들이 즐비했다. 그 점포들은 군웅대회가 개최됨에 따라 수만의 무림인들과 구경하 기 위한 인파가 모여들 것을 예상한 상인들이 장사를 하려고 급조 해 놓은 것이었다. 월영성궁 내에는 초대장을 받은 무림의 명숙들이나 일류고수들만 이 묵을 수가 있었다. 초대장을 받지 못한 자들은 군웅관(群雄關)을 통과해야 그와 동등 한 자격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월영성궁에서 묵지 못하는 자들은 밖에서 숙식을 해결 해야 했는데, 이들이 상인들의 고객이었다. 역시 급조된 정자(亭子)에서 삼 인이 서성이고 있었다. 개중 난간 쪽에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황의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 는 절색의 용모는 아니었지만 갸름한 얼굴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특히 짙은 우수가 어린 눈망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하는 매력을 자아냈다. 설잔화(雪殘花). 이것이 그녀의 이름으로, 설(雪)이라는 성은 용비운이 붙여 주었 다. 그의 지극한 배려는 그녀를 당세의 고수로 성장시킨 것 외에 도 이처럼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설잔화는 초조한 눈으로 수많은 등(燈)이 세워져 있는 거리를 살 폈다. 그녀의 옆에는 목극렴과 하토살군이 함께 있었다. 목극렴이 입맛을 쩍 다시며 말했다. "왜 여태 안오시는 것이지? 이러다 눈이 빠지겠군." 설잔화는 생긋 웃으며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 여기 계세요, 제가 잠깐 나가보고 오겠어요. 목극렴은 이심전심인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흠, 한 보름 떨어져 있다 보니 너도 불안한가 보구나? 걱정 마 라. 천하의 누구도 주공을 다치게 하지는 못한다." 설잔화는 그 말이 맞다는 듯 다시금 미소지어 보였다. 목극렴은 난간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조심해야 한다. 공연히 주공께 심려끼쳐 드리지 말고." 설잔화는 응답으로 손을 들어보인 뒤 정자를 나섰다. 목극렴은 그 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확실히 주공께는 남다른 면이 있다. 볼품이라곤 없는 벙어리 계 집애를 데려다 저처럼 사람을 만들어 놓으셨구나.' 그러나 그의 해석만은 마도인다웠다. '저 아이는 향후로 크게 쓰일 것이다. 단순한 종복(從僕)에서 주 공의 가장 충성스러운 수하로 탈바꿈을 했으니.' ⑧ 동백림. 설잔화는 무성한 수림 사이로 나 있는 대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녀의 눈앞에서 술렁였다. 군웅대회를 겨우 하루 남겨 놓고 있다 보니 강북 무림의 모든 문 파에서 고수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던 것이다. 태양천에 의해 근거를 빼앗긴 강남 무림의 잔존 세력들도 이 기회 에 태양천을 쳐부수고 실지(失地)를 회복하고자 저마다 월영성궁 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설잔화는 대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미소 지었다. '이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두렵지 않아. 이건 모두 주공의 하늘 같은 은혜를 입은 덕분이야. 정말이지, 그분을 위해서라면 난 무 슨 일이든지 하겠어.' 이때,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자는 특징이라곤 창백한 안색이 전부인 자의청년이었다. "하하... 잔화, 나를 마중나왔느냐?" 그는 설잔화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 주공.......' 그녀는 음성을 통해 용모가 달라져 있어도 그가 용비운이라는 사 실을 대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잔화는 그의 손을 감싸쥐더니 자신의 볼에 갖다대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쯧! 반갑다는 인사가 고작 눈물이냐?" 용비운은 짐짓 혀를 차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 내 모습이 어때 보이느냐? 천마공자로 활동하기 위해서 환체 변용술로 용모를 바꾸었는데." 설잔화는 그의 손바닥에 썼다. - 아주 좋아요. 어떤 모습으로 계셔도....... 용비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너에게 물은 내가 잘못이지. 설사 내 몰골이 보기 흉한들 네가 어디 그렇다고 말하겠느냐?" 설잔화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나서 또 글씨를 썼다. - 어서 가세요, 총상과 십대금사가 기다리고 있어요. 총상께선 주 공을 기다리다 눈이 빠지겠다고 투덜거리셨어요. 용비운은 씩 웃었다. "그럼 그의 눈이 어찌 되었는지 한 번 가 볼까?" 그는 설잔화와 나란히 정자로 이르는 대로를 걸어갔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흡사 친오누이와도 같았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