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는 이유 중에 필수적인 세 가지가 먹자·놀자·하자 란다.
짓궂은 스님이 가끔씩 오가면서 퉁박을 주듯 한마디씩 던지곤 했다.
"아, 우리가 머리 긴 사람들처럼 놀 수가 있습니까? 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먹는 것밖에 제대로 할 일도 없는 데, 허구한 날 맛도 없는 생쌀가루나 씹으며 무슨 재미로 삽니까?"
그 스님인들 일찍이 한 때나마 해 보시지 않은 일도 아니니, 오랜만에 만난 탓에 걸쭉하게 늘어놓는 인사치레로 여기고 말 일이긴 하다.
그처럼 번번이 퉁박부터 먹이던 스님이 어느 날인가 느닷없이,
"수행자는 생식하는 게 최고겠어!"하면서 계면쩍은 듯이 씩 웃는다. 뭔 소리로 이어질지 몰라서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노라니 애가 다는 일이 생긴 모양인 듯 싶다.
"아무리 공양주를 구하려 해도 도통 구할 수가 없어요, 그저 머리 깎고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생식하는 것이 그만이겠어요. 그러면 공양주 걱정 하나는 확실히 덜고 살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아닌게 아니라 내게도 그것이 무시 못할 일이었다. 공양주는 하늘에서 수호천사가 끼니때마다 내려와 해주는 게 아니니 말이다. 가만히 앉아서 얻어먹으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다달이 나가야할 월급은 고사하고 내 입맛대로만 살 수 없을 것도 뻔한 일이다. 누구를 위한 것이건 간에 이것저것 찬거리라도 준비하려면 동냥이라도 해야할 처지로 급전직하 할 수 있다. 또 비닐 천막을 치더라도 칸막이가 필요할 게 분명하다. 이렇게 대충 따져봐도 밥 한술 얻어먹는 대가 치곤 그 번잡함이 예사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혼자 사는 명분으로 들어선 길이긴 하나 나중에라도 공양주 신세지고픈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런 것 때문에 뭔가에 돌연 묶이게 될 일에 대해선 꿈속에서조차 그려본 적이 없다. 오히려 아예 큰절에 얹혀 살 때부터 세 때를 한 끼로 줄여놨고, 그나마도 기어코 생식으로 돌려놓았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남들에겐 한없이 옹졸하게만 비쳐질지 모를 일이긴 하다. 하지만 덕분에 아직까지 이슬 피할 곳이 마땅치 않거나 누구 땜에 처소가 비좁아 걱정 해본 일은 기억에 없다.
그러고 보면, 내 딴엔 아무런 변명거리도 없는 것은 아니나 늘 묵묵부답이다. 왜냐하면 구구절절이 대꾸하다가 결국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는 되물음엔 마땅한 대답이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어 한참 전전긍긍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어서다.
「왜 사니?」
아닌게 아니라 한동안은 바로 이 물음이 나의 간절한 화두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왜 사는지 또 무엇 때문에 사는 지부터 먼저 묻고싶어 안달을 하곤 했다. 연세 지긋한 노인네라면 '그럼 죽으라는 말이냐?'고 역정부터 버럭 내실 일이지만 말이다.
2
지금도 가끔씩은 대뜸 '왜 사는지'부터 묻고픈 사람들을 보게 될 때가 있다. 헌데, 스스로도 왜 그토록 모진 목숨을 이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자진해서 털어놓는 바람에, 한 노파의 기구한 일생을 본의 아니게 얻어들은 적이 있었다.
연세가 이미 80 줄이라는 그 할머니는 거동도 여의치 못했다. 당장 오갈 곳이 없다며 선처를 바라니 방 하나를 비워 거처토록 주지스님은 배려했다. 사실 그런 노파를 곁에 계시게 한다는 자체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긴 하다. 그러나 비록 연세는 드셨더라도 외모와 말씨에는 어딘지 모르게 남다른 기품이 배어 있었다. 사내들만이 버글대는 곳이어서 노파에겐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풍모에 부담스러운 생각을 쉬 떨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날이 지나서 눈인사 정도 나눌 즈음, 노파는 지난 한평생의 일들을 맺힌 응어리라도 풀려는 듯이 드문드문 들려주었던 것이다.
노파는 구한말 만석꾼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단다. 마냥 곱게만 자라서 그 지방 토호의 자제에게 시집을 가게되었다. 새신랑은 일찍이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젊은 나이에 지방 군수로 발탁된 수재였다. 그런데 자식 중에 작은 것이 걸음도 제대로 못 뗄 즈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다. 남편이 만연하던 역질에 걸려 홀연히 세상을 등지게 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을 일이다. 허나 더욱 가슴 저몄던 일은 애들 아버지가 죽자 시집에서는 며느리는 물론이고 장손인 손자까지 모른 채 하는 처사였다. 백리 안팎에서 누구네 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집이어서 궁한 탓으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며느리가 너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지라 수절치 못하고 언젠가는 재가 할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단지 한푼이라도 굳히려는 심사 때문이었다.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할 판에 이르자 눈앞이 정말 아득 하드란다. 친정도 내노라하는 갑부여서 도움만 청하면 세 식구 사는 걱정이야 다시 할 바도 없을 일이긴 하다. 그러나 너무 황당한 자신의 신세가 부끄럽기도 하고, 그 모진 팔자가 친정부모님 가슴 한복판에서 내내 응어리 틀게될 것을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더란다.
먹고사는 일이 가장 다급하여 돈 될만한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나갔다. 우선 약간의 돈을 장만하여서라도 보따리 장사라도 해야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두 집안이나 먼 일가, 이웃들의 눈에 띄지 않을 곳으로 옮겨 앉아 그때부터 산간벽지로 다리품을 팔아가며 시작한 것이 보따리 옷장사였다.
하여간, 그 고생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덕분에 자식 둘을 모두 유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 그 남매는 마치 누구 보란 듯이 성공을 일궈내어 교포 사회에서도 제법 유명인사 대접을 받기까지 한다고 했다.
좌중에서 그 때 누가 대뜸 "그런데 왜 할머니는 자식들과 함께 사시지 않고 이렇게 홀로 지내시냐?"고 물었다. 노파는 한숨부터 길게 뿜고는 "같이 살자고 해야 가지요. 내일을 장담 못할 이 나이에 저라고 자식 옆에 살고 싶지 않고 손주들을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하며 눈가를 훔쳤다.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가끔 제 처지를 생각하다 보면, 내가 과연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팔자가 이리 기구한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생에 남에게 해꼬지를 하거나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이 살아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궁리궁리 하다보면, 심지어 미어진 남편 버선 기울려고 시어머니 반짇고리에서 헝겊조각 두어 장을 몰래 갖고 나왔던 새색시 시절의 일까지 머리에 떠오르지 뭡니까?"하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행스럽게 몇몇 신도가 알아보는 이들이 있어서, 고적한 산중이었지만 노파는 심심하지 않게 몇 년을 지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봐둔 일인데, 어느덧 환갑 줄에 들어섰다는 그 야속한 자식들은 그 동안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다. 짐작컨대 아예 다녀가지조차 않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들리던 말에 의하면 남들 눈을 피해서 살며시 상봉하고는 특히 스님들께는 비밀로 하자는 당부를 하면서 매번 되돌아갔단다. 아마도 자기 모친을 다시 떼 맡길까봐 겁이 나서였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스스로도 떳떳하게 생각되지 못한 면이 있어서였든지 간에 말이다. 정말 한번 만나보게 되면 왜 사냐고 꼭 물어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3
어디에 대단한 성자가 출현하였다. 그런데 이 성자는 세상은 더 이상 머무를 곳이 못되는 아주 흉악하고 추한 곳이라고 목청 높여 외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지체하지 않고 한시바삐 용감하게 스스로 죽는 일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보람되고 바람직한 일이 된다고 가르치는 자살예찬론자였다.
이 나라 저 나라의 방방곡곡으로 그 가르침을 펴며 다녔는데, 드디어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자가 설교를 하며 지나간 마을 곳곳에서는 과연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일은 세월이 제법 흐르도록 본인은 정작 죽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궁금증이 돋은 제자가 드디어 작심하고 물었다.
"스승이시여! 스승께서는 남들에겐 항상 죽는 일만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스승께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신 듯 하니 어인 일이옵니까?"
"아, 이 사람아! 내가 죽어버리면 누가 이 법을 가르치겠는가? 나는 오래오래 살아야지 이 법을 널리 펼 수 있을 것 아닌가?" 하드란다.
자랑거리가 별로 많지 않던 시절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말이, 우리 나라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이 땅에도 호랑이가 담배를 피워대던 어느 땐가, 힘없는 노인들은 깊은 산 속에 내다버려야 하는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 그 시절이라면, 아마도 환갑 줄에 들어섰다는 노파의 자제들도 이미 고려장 감인지 모를 일이다. 설사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게 인륜을 거스르면서 구차하고 떳떳치 못하게 살 바에야 바로 그의 자식과 또 남들의 이목도 있고 하니, 그 성자의 말 맞다나 한시바삐 서둘러 가는 것이 남 보기에도 좋고 더 현명한 일이 될 듯도 싶다.
4
곰곰이 냉정하게 따져 보면, 인류의 역사란 것이 온통 스스로의 생존에 당위성과 합리화를 부여하기 위한 수작들의 잔재였다고 여겨진다. 문명이란 것 역시 그 과정 중에서 파생된 지저분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도 자연스럽게 대두된다.
누구 혹은 어떤 현상 하나만을 유독 거론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럴 까닭은 정녕 없겠건만 온갖 미사여구와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존재이유를 설명하고 변호하더라도, 선뜻 공감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와 같아서다.
너무 직설적일지 모르겠으나, 이 순간 스스로의 사회적 신분과 위치, 사명과 책임이 어떠하건, 겨우 밥 한술 더 떠서 입에 넣어 삭이고 숨 한번 더 쉬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듯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듯해서 하는 말이다. 어느 누구건 자신만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고 꼭 있어야 할 존재라고 주장하고 싶을지라도 설득력이 모호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겨냥해 조롱하고 말고 할 것도 없으며 또한 탓할 입장도 못된다는 점 역시 엄연한 현실적 일이다.
이를 한마디로 간단히 축약시킨 말이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이다. 일체의 분별되는 현상이란 것이 나의 인식에서 기인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실제로는 자기가 인식하고 분별해서 집착하는 것들의 존재이유로 인해, 한낱 스스로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질 뿐이니, 착시현상과 같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메시지가 다분히 내포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고보면 이를 바로 알지 못하는 까닭에 찰라 간에도 온갖 번뇌와 망상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헤어나려는 의지조차 갖지 못하며 심지어 그런 일에 대한 궁리도 하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없기까지 하다.
5
가끔 공개적인 자리에서 마치 전장에서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자신의 성공담을 의기양양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게된다. 그때마다 늘 얻어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인생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의 몫이라고 부르짖듯 이구동성으로 말한다는 점이다. 마치 자기가 그것의 표본이고 증거라도 되는 양 말이다.
하늘을 나는 화살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도 의미심장한 것이다.
삶이란, 한 커트 사진 속의 행복한 웃음처럼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니듯이, 실제의 인생에 있어선 해피엔딩의 영화 스토리 같은 완결편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아야 한다.
하늘을 유쾌히 나르는 새도 언젠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상의 나뭇가지에 내려앉아야 한다. 또 고속 셔터에 잡힌 사진 속의 화살은 항상 창공을 가르며 날기만 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 즉시 어딘가에 처박히고 만 것은 현실이니 말이다.
결코 흘러가고 있는 같은 강물에 다시금 발을 적실 수 없듯이 인생은 온갖 우여곡절의 물결을 따라 유전한다. 지금은 설혹 자신의 성공담을 패기 있게 호기까지 부려가며 마냥 자랑하고 싶은지 몰라도, 변화무쌍한 시절인연의 흐름은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 바로 그 입에서 비탄에 젖은 신음소리를 흘리게 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관 뚜껑에 못이 박히기 전까지는 비상(飛上)과 추락(墜落) 즉 성공과 좌절은 두고두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치뤄내야할 행사인 줄 잠시라도 까맣게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6
인도라는 나라가 진리를 궁구하는 이들이나 여러 수행자들에게 성지처럼 여겨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부처님 당시의 기록에도 보이는 일이니 까마득할 적부터의 일이지 싶은데, 그 나라 사람들은 일생을 네 시기로 나누어 의미있고 보람찬 삶이 되고자 노력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다. 즉 태어나서 열 살까지의 유년기에는 가정에서 양육되다가 그 후부터 부모의 슬하를 떠나 스무 살까지는 스승 밑에서 학문을 연마한다. 그 기간을 마치면 다시 생가로 돌아와 결혼을 해서 일가를 이루어 가문을 이어 생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의 자식도 학문을 마치고 자신처럼 대를 잇게 될 즈음이면 모든 일을 일임하고 오직 구도의 일념으로 홀연히 수행길에 나선다는 사실이다. 글이나 그림, 화면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이와 같은 일들이,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변함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전 세계인이 경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새삼스레 들먹거릴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뭔가를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처에서 끊임없이 찾아드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이에 대한 경이로운 시선도 한 몫을 하겠지만, 그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라 여겨진다.
하기사 인간의 삶과 그 형태가 피부색이나 동, 서간의 차이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므로 철모를 적 일이야 굳이 거론할 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생에 한 두 번쯤은 자신의 삶과 인생 역정에 회의를 느끼기도 하고 지난날들의 일들을 한번 정도 진지하게 반추해보는 때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나 일상에 대해 권태감을 느끼면서 그토록 들떠있던 열정과 의욕도 식어버리기 시작한다는 갱년기현상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짐작컨대, 그 땅의 그들 조상들은 남다르게 이런 인간 근본의 문제를 일찍부터 자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연유로 인생 즉 삶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그 깊은 통찰의 정신을 후손에게 길이 대물림 해올 수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로 말미암아 그들 낱낱의 삶 깊숙한 곳까지 숭고한 전통으로 짙게 배게끔 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7
이미 나이가 삼십이나 된 청년이 밥이나 얻어먹고 지낼 심산으로 절 집에 찾아들었다. 몇 해를 두고 보다가, 이왕 세상살이에 관심이 없고 특별한 욕심마저 없다면 출가하기를 권해 보았다. 청년은 뜻밖의 말에 깜짝 놀라며 겁부터 집어먹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완전 무지렁이였기 때문이었다.
하기사, 그럴 만도 하다. 곁눈으로라도 봤을 일이지만 절 집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 둘이어야지 말이다. 당장 법당에서 아침저녁으로 십여 분씩 하는 예불만 따라하려도 최소한 수백 자의 글을 익혀야 한다. 또 사찰의 대소사와 사무적인 일은 젖혀놓더라도 우선 천수경과 초발심자경문 정도는 들여다봐야, 옹색하게나마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은 이의 행색을 겨우 흉내 낼만 하게 된다.
사정을 알고 보니 그것도 여간 딱한 노릇이 아니었다. 얼마나 더 절밥을 얻어먹고 있을지 모를 일이긴 하나, 마을로 돌아가더라도 갑갑증이나 덜어주게 할 요량으로 한글이나 깨우쳐 줄 생각을 했다. 과연 생전 처음 마주 대하는 글자와 심지어 필기도구는 여간 껄끄럽게 여겨지는 것이 아닌 듯, 며칠을 두고 어색해 하면서 안절부절 못해하기에 최후통첩을 하였다.
"절에 계속 머무르고 싶으면 작심하고 글을 배우던지, 아니면 떠나라."
청년은 여러 날을 얼굴마저 벌개진 채로 좌불안석하더니 배우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하루 한 시간 정도씩 한글의 자, 모음부터 가르치기 시작하여, 석 달만에 수천 자의 한문으로 된 초발심자경문을 끝마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때도 산너머 이십여 리 남짓한 곳에 부모 형제들이 어엿이 있는 이였다. 무슨 팔자를 타고났는지 아장대며 걸을 나이인 댓 살부터 가출하기 시작하여, 그 나이가 되도록 부모 슬하에 진득이 있었던 날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스스로 말하길, 훤히 뚫린 신작로만 보면 그저 길 따라 마냥 걷고팠단다. 먼 타지에 출행하셨던 동네 어른들의 눈에 띄면 다시 이끌려 돌아오기까지, 배고프면 개밥이라도 주워먹고 해 저물면 이슬정도 피할만한 곳에서 웅크려 자며 나이를 먹었던 것이다. 당연히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닐 겨를이 없었고, 가정의 예절과 법도도 익힌 바가 없이 자라온 셈이었다. 그러니 늘 연로하신 부모님이나 고향 친지의 근심거리가 되었던 듯 싶다. 설사 절 집일지라도 스님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늘 오고가는 곳이니, 남에게 부담스럽지 않으려면 글을 배우는 김에 우선 스님들의 예절이라도 익히면 날 듯하여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치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한문이 만만한 글이 아니긴 하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도 한문 이야기만 나오면 상종조차 하기 싫은 듯이 한자무용론과 폐지론부터 들먹이기 일쑤이니 말이다.
청년에게는 처음 일주일 남짓한 시간동안 한글부터 익히게 하였다. 어차피 골치 아플 맞춤법과는 상관없이, 읽고 쓰기에 아쉬움이 없을 만하여 대뜸 초발심자경문을 펼쳐놓았다. 한동안 말귀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흰 바탕에 검은 줄이 한가히 오락가락한 정도의 한글에 비하면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보였을 한자였을 것이다.
가령 바다 해(海)자나 마음 심(心)자를 가르쳐도, 한글을 금방 익혔던 탓에 '海'나 '心'자가 글자는 한 자 밖에 되지 않는데, 어째서 '바다 해'와 '마음 심'이라고 세 마디로 읽어야 하는지를 이해 못해 하였다. 또 海와 心의 무엇이 '바'자와 '마'자에 해당하고 어디부터가 '다'와 '음'자가 되어 '바다'와 '마음'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 하다가, 나중에는 어째서 '해'와 '심'으로 읽는 것이 옳은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니 글자와 뜻을 연관지어 생각하거나 음과 의미를 나누어 이해하길 바란다는 것이 도리어 공연한 기대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수없이 같은 얘기를 거듭하길 제법하고 나서야 어느 날인가 문득 말뜻을 아련하게나마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학습에 일취월장의 진전이 있어 바깥일이 없는 한가한 시간 짬짬이 익힌 것이 수 천자 한문으로만 된 초발심자경문 글이었다.
8
수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제법 오래된 한 청년이 대학입시 수능시험에서 최고득점자의 영예를 차지하게 된 일이 있었다. 마침 시험 점수가 발표되던 날에도 생계를 위해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현장까지 찾아간 기자들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었다고 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대체로 매해마다 치러지는 대입수능시험 때 고득점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딱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판에 박힌 듯한 대답은, 남들처럼 고액과외를 받거나 학원을 하루에도 몇 군데씩 옮겨다니며 수험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참고서를 쌓아 놓고 공부하지도 않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는 점이다. 또 학교의 수업시간에 늘 충실했고, 교과서로만 공부를 했다고 한다는 점에서도 대개 일치한다.
자식의 학업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학부모들에게는 한없이 부러울 이야기임엔 틀림없을 일이다. 더구나 여느 사람들이 생각도 못하고 꿈도 못 꿀 엄청난 과외비를 지출하며, 오직 자식의 학업성적이 향상되기를 막무가내로 학수고대하여도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걱정이 늘어진 학부모에게는 하품이 나올 이야기일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더 언짢게 들리겠으나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부모의 머리가 그것밖에 안 된다면 자식만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본디 천재와 둔재는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안 된다는 격언이 있다. 천재에게는 오직 99 %의 노력이 있을 뿐이라는 말의 의미를 놓고 생각해 본다면, 천재성은 각자의 노력이 크게 좌우할 뿐 선천적인 것이 근본요인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할만하다.
아닌게 아니라 그런 탓 때문인지, 부모들로부터 수없이 공부하란 소리밖에 듣는 말이 없는 녀석 치고 학업성적이 우수한 아이가 별로 없는 것은 두말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늘 책상에만 매달려 있다고 걱정하는 부모의 자식들 치고 공부 못하는 아이가 없는 것을 보면, 본인 스스로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할 만하다.
그런데 노력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일도 세상사에는 비일비재이니, 참 묘한 면이 공존한다는 점도 부정 못할 현실이다. 실제로 제아무리 실력 있는 선생에게 맡겨놔도 도무지 성적이 밑바닥에서 꼼짝도 않는 아이도 있으니 하는 말이다.
그 만학의 청년은,
"재학 시절에는 별로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그저 중간 수준에 불과했는데, 그럭저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일 저일 가릴 형편도 못되어 잡부로 전전하던 중에, 어느 날 고교 시절의 교과서를 무심히 들춰보다가 문득 그 내용이 재미있게 느껴지면서, 다시 공부를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시험 준비를 했던 결과였다."고 하였다.
9
부처님 당시의 일이다. 두 형제가 동시에 출가하였다. 형은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총명으로 수행에 빠른 진취가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여간 둔재가 아니어서 하나를 가르쳐주어도 그 하나마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앞의 것을 가르친 후 뒤의 것을 알려주면 앞의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앞의 것을 가르치는 사이에 또 뒤의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날 형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게 되었다. 도무지 희망이 없는 수행은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서러움이 복받쳐 문턱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마침 그 광경을 보시게된 부처님께서 자초지종을 들으시고, 느닷없이 빗자루 하나를 가져오게 하였다. 빗자루를 받아 드신 부처님께서 뜨락을 북북 쓰시면서 말씀하시길,
"너는 이제부터 이 빗자루를 들고 마당 구석구석을 쓸고 다니면서, 빗자루를 땅바닥에 댈 적에는 '빗자루로'를, 또 힘있게 쓸면선 '쓴다'를 늘 외우도록 해서 '빗자루로 쓴다.'만 잊지 않도록 해라. 반드시 뛰어난 도과(道果)를 쉬이 얻게 될 것이다."라고 일러주셨다.
이런 연유로 빗자루만 암송한 탓에 송추(頌 )비구란 이름도 얻게 되었는데, 드디어 형에 버금가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학문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겠지만, 사물의 이치를 알려는 일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일, 수행을 비롯하여 경전을 보고 깨우치는 따위의 모든 일이, 마치 송추비구가 문리가 터지듯이 문리가 열리지 않으면 어떤 일에서도 성취가 여의롭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학생들의 학업과정에서도 글에 문리(文理)가 열리면 순간적으로 전후가 확연히 달라지듯이, 불교 공부와 수행에 있어서도 어떤 계기로 말미암든 간에 이치를 꿰뚫는 문리가 먼저 열려야 답답증을 덜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경험이 전무한 채 하는 공부나 수행은 진전도 별로 없거니와 힘만 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10
부처님 스스로 누누이 강조하시길,
"나는 마치 환자의 병을 잘 다루는 어진 의사와 같고, 가야 할 길을 잘 알아 바르게 인도하는 안내자와 같아서, 나의 가르침 역시 증상에 따라 쓰여지는 약방문이나 길의 이정표, 막막한 황야를 지나는데 필요한 나침반과 흡사하다."고 하셨다.
부처님도 이미 설파하신 바처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진리 아닌 것이 없긴 하다. 고로 팔만대장경이란 것도 알고 보면 한낱 인생역정의 참고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놓인 교과서가 아무리 중요한 것이 담겼다 하더라도, 요점을 가려내는 지혜가 없다면 도리 없이 참고서에 의지해야 하듯이, 목전에 펼쳐진 온갖 현상과 이치에서 도리를 발견할 수 없다면 경전과 어록을 의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막상 경전을 마주 대하고 보면, 마치 은밀한 암호문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어서 딱한 마음이 문득 들기도 한다. 이런 경우 대개는 종교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와 그에 따른 욕심 따위가 혼란의 원인일 수도 있긴 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약간의 재미의 기미도 엿볼 수 없으면 그 무미건조함에 난감한 심정은 마치 철벽을 마주 대한 듯 막막할 뿐이다.
불교 글귀 중에는 '세상사에 재미가 전혀 없을 때가 바로 힘을 얻은 때'라는 구절이 도처에 등장한다. 즉 세상 어느 구석에서도 재미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을 때가 바로 가장 인간적인 성숙의 시기라는 뜻이다. 이를 빌미 삼아 하는 변명은 아니나 이 글은 아주 재미없는 글일 수 있다. 물론 재미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글이 아닌 까닭에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천하에 재미가 없음을 재미로 삼는 이들도 적지 않을 거라는 데 확신이 있음을 빙자하여, 외람되긴 하지만 바로 그런 이들에게 마냥 어설픈 이 글이 혹시라도 진리를 가늠하거나 수행을 바로 이해하는 데 미력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분수 넘치는 바램으로 졸저(拙著)를 감히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