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군웅대회(群雄大會)를 앞두고 ① 동백광장(冬柏廣場)의 곳곳에 세워진 등이 환히 밝혀졌다. 그에 따라 월영성궁으로 이르는 십 리 대로의 임시 점포들도 모두 등불 을 켜 그 일대는 불야성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밀려드는 인파로 소란스럽고 북적거리기까지 하 니 군웅대회라는 거창한 어휘가 비로소 실감이 났다. 목극렴은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쯧! 이건 완전히 장터 아닌가?" 그는 정자 안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녕 한심하군. 내 주공이 아니었다면 이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을텐데......." 하토살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사께서는 이런 분위기가 싫소이까?" "두꺼비, 자네같이 어린 시절에는 나도 안 그랬었다. 오히려 튀고 싶어 안달이었지." 하토살군은 고개를 돌리며 입맛을 쩍 다셨다. '젠장, 내 나이도 칠순을 바라보는데 어리다고?' 이때, 시끌벅적하던 광장이 조용해지며 인파의 한쪽이 좌악 갈라 졌다. 무인들은 포권지례를 취하며 외쳤다. "성후(聖后)를 뵈오이다." 인파가 갈라진 쪽의 끝에서 한 명의 중년미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월영성궁의 대총사인 은창무적(銀槍無敵) 관창이 무사 들을 대동한 채 그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대단한 신분인 듯한 중년미부는 가볍게 손을 들어 군 웅들의 예에 답했다. 그녀의 자태는 한 송이 국화처럼 소탈하면서 도 우아해 보였다. 가늘고 흰 그녀의 손목에는 열 개의 금환이 채 워져 있었다. 옥정성후(玉鼎聖后) 서매림(徐梅林). 그녀는 신주십대고수 중 일 인으로 암기에 관한 한 당대 제일로 평가되는 고수였다. 또한 그녀는 주안술을 익혀 여전히 아름다움 을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엉?" 목극렴은 그녀를 보자 눈을 크게 뜨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급히 계단을 내려가더니 서매림의 앞을 막아섰다. "허허... 놀랍소.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계시다니." 말은 제법 점잖게 하고 있으나 칠 척에 달하는 키에 비해 지나치 게 깡마른 체구나 흉신악살을 방불케 하는 그의 추악한 용모는 이 순간 차라리 희극으로 보였다. 하지만 서매림이 보는 관점은 확실히 달랐다. 그녀는 상대의 전신 에서 풍기는 폭발적인 기도에 압도당하는 자신을 느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자는 당대 최고의 고수라는 월영성궁주 월락대제를 능가할 만 한 인물이다.' 은창무적 관창이 안면에 노기를 띠며 그를 막아섰다. "어서 비키게!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목극렴은 민망해 하기는커녕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두꺼비, 자네가 맡아라." "넷! 노사." 하토살군은 즉시 달려 오더니 관창에게 일 장을 날렸다. "건방진! 감히 누구더러 무례하다는 거냐?" 콰르르르― 기습에 가까운 그 공세에 관창은 황망히 뒤로 물러났다. '음! 가히 십대고수와 버금가는 자다.' 그는 비로소 은창을 비껴들며 한마디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히히... 노부는 하토살군이라 한다. 너는 모르겠지만." '쯧! 정말 모르겠군.' 삼십여 년간 무림을 종횡하던 관창이었으나 실제로 하토살군이라 는 명호는 처음 들어보았던 것이다. 하토살군은 재차 공세를 전개했다. "넌 노사의 일에 끼어들 자격이 없으니 노부와 놀자꾸나." 이쯤 되자 관창도 월영성궁의 대총사라는 명예를 의식했는지 참고 있지만은 않았다. "은허류(銀虛流)!" 츠츠츠츳―! 은창이 번뜩이며 하토살군의 전신 열두 곳을 동시에 찔러왔다. 그 예리한 공세를 피해 그는 특유의 지둔술을 펼쳤다. 스슥....... 그의 신형은 삽시에 땅 속으로 꺼져버렸다. "아니, 이자가......!" 관창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어느 틈에 이동했는지 하토살군이 십 장 밖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그를 놀려댔다. "히히... 여기다, 여기!" "저런......!" 관창은 짙은 눈썹을 꿈틀 하더니 그에게로 쏘아져 갔다. 그 광경 을 지켜본 서매림이 입을 열었다. "대단한 수하를 두셨군요." 목극렴은 그녀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변변치 못하외다." 서매림은 굳이 그와 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서매림이라고 합니다만 노협의 대명을 알고 싶군요." "목극렴이라 하오. 별호는 없소이다." "설마요?" "허허... 그깟게 무슨 필요가 있겠소?" 목극렴이 계속 시치미를 떼자 그녀의 소매가 펄럭였다. "용서하세요." 피잉―!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서매림의 소매 속에서 세 치 길이의 금빛 화살촉이 뻗어 나갔다. 그것은 신법과 무공을 통해 상대의 신분을 알아낼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목극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검지와 중지로 화살촉 을 잡아내 간단히 그녀의 의도를 무산시켜 버렸다. "여협의 솜씨로 노부를 움직이게 하기는 힘들 것이오. 같이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면 몰라도." "노협께선 농이 지나치시군요." 서매림은 이마를 찌푸리면서도 그의 정체에 대한 의혹을 떨칠 수 가 없어 끝내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군웅들은 그녀가 이처럼 희 롱을 당하자 분노했지만 아무도 나서지는 못했다. 누군가 목극렴의 등판을 툭툭 친 것은 그때였다. ② "그만 갑시다." "어떤 놈이 노부의 흥취를 깨......!" 목극렴은 튀어나오던 욕설을 제풀에 뚝 그쳤다. "주... 주공, 언제 오셨소?" 짐짓 미소까지 짓는 그를 용비운은 크게 꾸짖었다. "지금 목노는 내게 욕을 한 게요?" 목극렴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어찌 노신이 감히......? 모르고 저지른 죄올씨다." "되었소." 용비운은 잘라 말하고는 서매림에게 간단히 예를 취했다. "여협께는 본인이 수하를 대신해 사과드리겠소이다." 서매림은 크게 놀랐다. 그녀만이 아니라 군웅들도 가공할 고수를 수하로 두고 있는 이 청년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귀공은 누군가요?" 서매림의 물음에 용비운은 이렇게 대꾸했다. "천마공자라 불리우는 사람이외다. 아마도 내일 군웅대회에서 다 시 보실 수 있을 것이오." "음, 기억해 두겠어요. 그리고 아직 숙소를 정하지 않았으면 월영 성궁으로 가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어요." 서매림은 그의 별호도 그렇지만 애매한 언행때문에 그가 정(正)과 사(邪) 중 어느 쪽 인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궁에서 묵을 작정이었소이다. 잠시 후 군웅관을 통과해 들어가겠소." "귀공의 능력이라면 군웅관을 통과하지 않아도 될텐데?" "규칙은 따르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겠소이까?" 용비운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주었다. 서매림은 최소한 그가 악 인은 아니리라고 생각하며 저으기 안도했다. "그럼 안에서 만나기로 하지요." 그녀는 관창의 경호를 받으며 월영성궁으로 향했다. 목극렴은 그 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용비운이 물었다. "목노는 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그런 짓을 저질렀소?" 목극렴은 짓궂게 씨익 웃었다. "심심해서 그랬소. 그러다 재수 좋으면 엮어지는 게고." "맙소사! 정말 못말리겠구려." 곁에서 설잔화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③ 점차 어두워가는 하늘 한귀퉁이에는 잔양의 자취가 아직도 불그스 름하게 남아 있었다. 두두두두―! 어슴푸레한 야음을 뚫고 한 떼의 인마가 달려가고 있었다. 일천여 필에 달하는 준마들의 등에는 견고한 철갑이 둘러져 있었 다. 그 위에 타고 있는 무사들의 병기도 철제였다. 철기회(鐵騎會). 강북 무림을 주름잡는 삼회(三會) 중 일 파이다. 선두에는 체격이 당당하고 용맹해 보이는 호안(虎眼)의 노인이 준 마에 박차를 가하며 내달리고 있었다. 그가 철기회주인 철검탈혼 (鐵劍奪魂) 철무쌍(鐵無雙)이었다. 그는 강북삼기(江北三奇)의 일 인으로 검(劍)의 달인이었다. 또한 강직한 성격으로 이제껏 사마외도와는 한 번도 타협을 해 본 적이 없는 당세의 열협(烈俠)이었다. "서둘러라! 선하령(仙霞嶺)만 넘으면 바로 동백산이다." 그는 수하들을 독려하며 기세 좋게 질주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전면의 언덕 아래쪽으로는 진로가 막혀 있었다. 베어 넘어 진 수목으로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이었다. 철무쌍은 말고삐를 힘껏 잡아채며 외쳤다. "멈추어라!" 히히히힝―! 일천여 필의 철갑 준마들은 긴 울음소리와 함께 일제히 멈추어 섰 다. 철무쌍은 오랜 강호경험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수목더미 위에 혈의를 입은 한 명의 꼽추노인 이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그는 볼은 움푹 들어가고 광대 뼈가 불룩 튀어나온 추면(醜面)의 소유자였다. "철무쌍,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의 음성은 알아듣기 어려우리 만큼 탁했다. 이어 그가 고개를 돌리자 세모꼴인 그의 사안(蛇眼)에서 흡사 인광(燐光)과도 같은 섬뜩한 청광이 뿜어져 나왔다. "크크... 너는 그렇게도 빨리 저승으로 가고 싶으냐?" '음! 예감이 좋지 않더니.......' 철무쌍은 상대에게서 음산한 죽음의 기운을 느끼게 되자 경각심을 한층 더 높일 뿐 응대하지 않았다. 철기회의 총관인 도산철부(屠 山鐵斧)가 앞으로 나섰다. "요망한 늙은이! 네 의도가 무엇이냐?" 그는 거대한 철부를 번쩍 치켜들었다. 혈의노인은 쓰러진 수목에 서 한 웅큼의 잎사귀를 뜯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희의 몰살(沒殺)!" 그의 수중에서 한 장의 잎사귀가 날았다. 핑―! "어딜!" 도산철부는 냉소하며 철부를 휘둘러 비엽도(飛葉刀)를 막으려 했 다. 하지만 우습게 여겼던 비엽도는 그의 방어가 채 이루어지기 전에 그의 미간 사이로 깊이 박혀 버렸다. 퍽! 그의 콧등을 타고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총관!" 철무쌍이 놀라 부르짖었다.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수하가 그토록 허무하게 죽어갈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기에. 혈의노인이 허공을 밟으며 사신(死神)처럼 다가섰다. "혼자 보내기 딱하면 너도 같이 가거라." 피이잉―! 또 한 장의 비엽도가 철무쌍의 미간으로 날아들었지만 그의 패도 지검이 쾌속하게 발출되어 그것을 막아냈다. 팍! 그러나 그는 무엇을 느꼈는지 일신을 가늘게 떨었다. "혈명사엽(血冥死葉)! 그럼......?" 혈의노인이 쇠를 긁는 듯한 탁음으로 대꾸했다. "그렇다. 노부는 심마(心魔) 만도통해(萬圖通解)다." 노인의 정체는 십이대천마 중 가장 지혜로운 자로서 전면전보다는 계략에 의한 싸움을 즐긴다는 인물이었다. "죽어랏!" 철무쌍은 마상에서 솟구치며 철검을 무섭게 휘둘렀다. 파츠츠츠츳―! 그의 절학 중 최강인 축천철명의 초식이 발휘된 것이었다. 만도통해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구부정한 몸을 훌쩍 뒤집더 니 다섯 개의 혈명사엽을 날렸다. 파파파팍! 철무쌍의 맹렬한 검초는 그로 인해 모두 차단되어 무위로 돌아가 고 말았다. 스스슷! 한 인영이 환상과도 같은 신법으로 그 앞에 내려섰다. "음, 혈명사엽을 감당해내다니 과연 철검탈혼이구려." 철무쌍은 백의를 입은 그 인물을 보자 반색을 했다. "오, 당신은......!" 그는 백의인을 잘 아는 듯했다. 백의인의 손등에는 한 마리 금응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금응이 날아오르는 순간, 그의 일수가 가볍게 허공을 그었다. 퍽! 무형수강(無形手 )은 그대로 철무쌍의 두개골을 바수어 놓았다. 뒤로 넘어가는 그의 눈에는 불신과 회의가 가득 했다. "크으으... 당신이... 왜......?" 쿵! 철무쌍은 눈을 부릅뜬 채 최후를 마쳤다. 졸지에 회주를 잃게된 철기회의 제자들은 당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회주의 복수를......! 심마 만도통해를 죽여라!" "저 흉수를 죽이자! 우우우......." 일천 철기대(鐵騎隊)가 노도처럼 두 사람을 덮쳐갔다. 두두두두―!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크핫핫핫핫......!" 고막을 울리는 광소성과 함께 이번에는 한 거인이 일천 철기대 앞 에 내려섰다. 그는 철투구와 철린갑의 노인이었다. ④ 거인은 수중의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광오하게 외쳤다. "오라! 천하에서 나를 당할 자가 누구더냐?" 그는 허공으로 치솟으며 방천화극을 비스듬히 그었다. 팟― 츠츠츠― 극광이 번뜩이자 무수한 핏줄기가 부챗살처럼 피어올랐다. "크아아아악―!" 일천 천기대의 선두가 처절한 비명과 더불어 짚단처럼 무너졌다. 그중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철마(鐵魔) 광혈인도(狂血人屠)......!" 그 한마디에 철마대의 기세는 주춤해지고 말았다. 철마 광혈인도는 인간 백정이나 다름 없는 살마였다. 그는 십이대 천마 중에서도 가장 살육을 즐긴다. "키히히... 여기도 있다." 청발청면의 노인이 귀기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장내로 뛰어들었다. 그는 독마(毒魔) 팔위폐황(八位廢皇)이었다. 팔위폐황은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양소매를 떨쳤다. 우우우우웅......! 괴이한 파공음과 함께 비릿한 청무(靑霧)가 사위를 뒤덮어갔다. 그의 독공 중 갈혈천독공(蝎血天毒功)이 전개된 것이다. "크으으으......!" 미처 방비하지 못한 철기대의 무사들 다수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마상에서 곤두박칠 쳤다. 그 상황에서도 어찌된 영문인지 철갑마 들은 길게 울음만 토할 뿐 멀쩡했다. 아무튼 철기대는 급히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들은 삼 대로 나뉘어 각기 심마와 철마, 독마를 공략해 갔다. 띵― 띠잉― 띵― 고막을 찢어발길 듯 날카로운 금음(琴音)이 야천에 울려퍼진 것은 그 때였다. "크ㅋ! 나를 빼놓으면 섭섭하지." 한 노인이 칠현금을 품에 안고 내려섰다. 그는 여타의 천마들과는 달리 용모가 청수한 편이었는데, 입가에 서린 미소만은 잔혹한 그 의 심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금마(琴魔) 일성토혈(一聲吐血)이었다. 막강한 내공을 싣고 이어진 그의 겁천일성(劫天一聲)에 철기회 무사 이십여 명이 피를 토하며 마상에서 굴러떨어졌다. "우우... 이럴 수가! 사마(四魔)가 동시에 출현하다니......." 철기대는 마침내 크게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회주와 총관, 두 수뇌를 잃고 보니 그들은 적당한 대비책 이 없어 제 위력을 평소의 십분지 일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들의 철제병기들은 쉴새 없이 허공을 가르기는 했지만 사마의 털끝 하 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결국 팔백여 철기대는 병기를 거꾸로 둘러 멘 채 속속 근처의 수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모두들 일단은 피신 을 한 연후에 대책을 강구해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멸(自滅)로 이르는 길이었다. 츠츠츠― 쐐애애액― 이미 어둠이 두텁게 내려앉은 수림 속에서 무수한 살광이 폭출되 었다. 일신에 검은 장의를 두른 일천여의 귀영(鬼影)들이 수풀 속 이나 나무등걸 아래, 바위 뒤 등에서 쏟아져나오며 철기대의 무사 들을 도륙해 갔던 것이다.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며 야천에 메아리쳤다. 철기대의 무사들 은 계산된 함정에 걸려 그렇게 차례로 죽어갔다. 이른바 귀역(鬼域). 이는 수림 속에 은신했던 귀영들이 소속되어 있는 단체의 이름이 다. 귀역은 암흑십세의 하나로 잠입과 기습에 능한 살인집단이었 다. 개개인의 능력으로는 살인정에 미치지 못했지만 방대한 세력 으로 살인정의 전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들에 의해 처참한 지옥도가 수림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잇 달은 단말마의 비명과 야공을 뒤덮는 피보라 속에서 사해에 위용 을 떨치던 철기회는 속절없이 괴멸되고 있었다. ⑤ "제일 태상호법!" 백의인이 손등에 내려앉은 금응을 쓰다듬으며 불렀다. "넷, 천주(天主)." 심마 만도통해는 가뜩이나 굽은 등을 아래로 더 숙였다. "다른 두 곳의 상황은 어떠한가?" "세 명의 태상호법이 투입되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계획 대로 월영성궁 내에 잠입해 있을 것입니다." "훗훗... 내일 군웅대회가 기대되는군." 백의인은 금응을 날리며 허공으로 솟구쳐올랐다. "제이계(二計)를 시행토록 하시오." "복명!" 그로부터 잠시 후. 대로변의 즐비한 시체들이 수림 속으로 전부 치워졌다. 귀역의 살수들은 철기대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철갑보마 위에 올랐다. 감쪽 같은 바꿔치기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가자!" 철기회주로 변장한 귀역주 귀면잔심(鬼面殘心)이 철검을 높이 치 켜들며 외쳤다. 두두두두두―! 그들 일천 철기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월영성궁을 향해 질주해 가기 시작했다. "허억!" "하아아아......." 어둠으로 뒤덮힌 숲속에서 연신 가쁜 숨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뭇 가지 사이로 소리없이 스며든 달빛이 벌거벗은 채 뒤엉켜 있는 두 남녀를 적나라하게 비춰 주었다. 사내는 여인을 깔아뭉갤 듯 힘차게 율동했고, 여인은 배암처럼 사 지로 사내의 몸을 휘어감고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절세적 용모도 그렇거니와 희고 매끄러운 육 체도 사내에게 짓눌릴 때마다 이지러지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탄 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지닌 조건상 마음 먹기에 따라 희대의 요녀(妖女)가 될 법도 한 그 여인은 옥봉(玉鳳), 녹월서시 사옥교였다. 그녀는 자세를 바꾸어 사내의 복부에 올라타더니 광란하듯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둥그런 두 개의 육봉이 달빛 아 래 진한 살내음을 풍기며 파도처럼 출렁였다. "흐으으... 그만......!" 사내는 쾌감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기력이 딸리는 듯 항복(?)을 선언했다. 그는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 중에서 제법 명성을 떨치고 있는 탐화공자(探花公子) 악비(嶽飛)였다. 별호가 말해주듯 여인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는 그였으 나 사옥교의 끝없는 욕구에는 지고 만 것이었다. "왜 벌써......?" "크ㅋ! 벌써라니, 족히 두 시진은 즐긴 것 같은데." "쳇!" 사옥교는 악비의 말에 몸짓을 멈추기는 했으나 영 미련을 떨치지 못한 표정으로 그의 몸에서 내려왔다. "당신, 정말 대단하오." 악비는 손을 뻗어 그녀의 육봉을 거머쥐려 했다. "흥! 집어치워요." 사옥교는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곱 게 개어 놓았던 녹의를 걸쳐 입고는 머리를 매만졌다. 악비가 입맛을 쩍 다시더니 누운 채로 물었다. "옥봉, 당신 담화린과는 어떠한 사이요?" 사옥교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손빗질을 계속 했다. 그녀는 얼굴에 분칠까지 마치고 나서야 악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라." "흐음?" 악비는 그녀의 눈에 어린 살기를 감지하고 튕기듯 몸을 벌떡 일으 켰다. 그러나 사옥교의 예리한 지공(指功)이 그의 삼대사혈을 찍 어 그를 도로 눕혔다. "큭!" 탐화공자 악비는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절명했다. "형편없는 놈! 무엇이 그리 궁금하단 거야?" 사옥교는 냉소를 치며 수림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런데 욕구가 다 채워지지 않아서일까? 그녀는 방금 전의 일은 깨끗이 잊고 담 화린을 만날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때 음양화합을 통해 나를 살린 자는 누구일까? 비록 혼몽 중이 었지만 그런 만족감은 처음 느꼈어. 아! 담랑이 그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 중얼거렸다. '정말 억울해! 그자는 나를 아는데 난 그를 모르니.' 사옥교는 입술을 질겅 씹더니 애써 생각을 동백광장의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 담화린에게로 옮겨갔다. '담랑은 간혹 며칠씩 어디론가 간다. 말로는 사부의 문안을 간다 지만 왠지 석연치 않아. 하긴 그가 무슨 짓을 하던 상관은 없지 만, 그는 왜 나와 동침하려 하지 않는 걸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이르렀다. 아직 담화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 각했다. 자신이 늦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느니 이 편이 훨씬 낫 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담화린은 그녀에게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당대 제일을 다투는 후기지수를 정인으로 둠으로써 그녀는 무림에서 위치가 격상된 것 은 물론 천하 제여협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요컨대 사옥교는 다른 사내를 통해 마음껏 욕정을 채우는 한편, 담화린이라는 후광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때, 대로 저편에서 달려오는 담화린의 모습이 보였다. 두 자루 흑백쌍검(黑白雙劍)을 허리에 찬 채 백의를 휘날리며 날아오는 그 의 모습은 과연 당세 제일의 미공자다웠다. "늦어서 미안하오, 옥교." "흥!" 사옥교는 짐짓 토라지는 시늉을 했다. 이에 담화린은 극구 사죄했 고, 한참 후에야 그녀는 못이기는 척 표정을 풀었다. "난 일찍부터 와서 당신을 기다렸단 말이에요." 담화린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사과만으로는 모자랄 듯하여 당신에게 줄 선물을 하나 마련했소." 그는 품 속에서 작고 네모난 옥갑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사옥교는 반색을 하며 옥갑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푸른 광휘가 비쳐나와 그녀로 하여금 눈이 부시게 했다. 그 빛은 진귀한 남만 산 묘안석 반지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아!" 사옥교가 탄성을 발하자 담화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변변치 않소." "아니에요, 이렇게 귀한 것을.......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주위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담화린의 품에 안겼다. 그는 난감한 표정이었으되 그렇다고 피하지는 않았다. "옥교......!" 그 근처를 빈번하게 오가던 무인들은 두 사람의 신분을 생각해서 모른 체하고 지나가 주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외양만 보고 그들 을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옥교의 추문을 접한 인물들이야 예외였지만. ⑥ 월영성궁(月影聖宮). 성곽의 둘레만도 무려 십여 리에 달한다. 게다가 그 내부에 세워 져 있는 화려한 전각들이 위엄을 더해 주고 있다. 월영성궁이 창건된 시기는 십팔 년 전이다. 원래 월락대제는 만년에 이르자 동백산 기슭에 아담한 규모의 동 백산장(桐栢山莊)을 세우고 그곳에 안주하고자 했었다. 그런데 그의 호탕한 성품과 기개를 흠모한 무림인들이 늘상 구름 처럼 몰려들었고, 그들의 열화 같은 요청에 의해 동백산장은 지금 의 월영성궁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후로 월영성궁은 하나의 문파로 자리잡더니 일로 세력을 확장하 여 천하제일문으로 발돋움 했으며, 오랜 전통을 지닌 구파일방을 젖히고 백도무림을 주관하기에 이르렀다. 세태의 흐름 탓인지 구파일방도 월영성궁을 전적으로 지지해 종내 백도무림 사상 최강의 성세를 구축하게 되었다. 군웅관(群雄關). 월영성궁의 정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마련된 관문이다. 이는 초 대되지 않은 무림고수들을 위해 개설되었다. 사실 월영성궁이 방대하다고는 하나 수만 명의 외부인들을 한꺼번 에 수용할 정도는 못 되어, 불가피하게 태양천과의 대결시 큰 역 할을 해줄 일류고수들만 머물 수 있도록 정했다. 따라서 금번에 개최될 군웅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초대를 받지 않은 한 누구라도 필히 군웅관을 통과해야만 했다. 군웅관은 모두 삼관(三關)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제일관은 내공 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 여기서는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철 필(鐵筆)의 붓대는 드물게도 천하에서 가장 무겁다는 만년청강(萬 年靑剛)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청강필을 들어 이름을 기재하려면 적어도 삼십 년 이상의 공력이 필요하다. 그런즉 공력이 부족한 인물들은 이름을 기재하지 못해 실격 판정을 받게 된다. 용비운과 목극렴, 하토살군 등은 제일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설잔화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벌써 십대금사를 대동한 채 첫번째 관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저놈들이 총상인 나를 늙었다고 따돌리는군." 목극렴은 사뭇 흥분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그것은 자신을 따르던 십대금사가 설잔화와 어울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었다. "후후.... 목노가 배가 좀 아픈 모양인데 참으시구려. 내가 저들 을 묶어 놓았으니 말이오." 사실이었다. 용비운은 설잔화를 공히 봉황령기주(鳳凰靈旗)로 임 명했으며, 십대금사에게도 구파일방의 절학들을 각기 하나씩 수련 하게 하여 상호 연계를 갖도록 했던 것이다. "어디 꼭 배가 아파서만 이러는 것이오? 앞으로 주공의 신변에 불 상사가 생겨도 노신은 나서지 않겠소." 목극렴이 말한 불상사란 다름이 아니라 설잔화로 인해 발생하게 될지도 모를 제반의 문제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개 노비가 일약 봉황령기주로 급부상한 점도 못마땅거니와 말을 못하는 그녀가 어떻게 그렇듯 높은 지위에 앉아 용비운을 보 좌해나갈지 지극히 의심스러웠다. 하토살군이 눈치없이 끼어 들었다. "노사, 소신이 있지 않소이까?" 목극렴은 시답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내뱉았다. "두꺼비, 자네는 자신의 문제나 걱정하게." "알겠소이다." 하토살군은 쓴 입맛을 다시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용비운이 나직 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목노, 지나친 노파심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시오. 누 구고 지위가 주어지면 감당하게 되어 있소." "주공께선 어찌 그걸 장담하시오?" "실은 내 경험담이외다." "끙!" 목극렴은 끝내 내키지 않는 듯 괴상한 신음으로써 말을 대신 했 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용비운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 점은 용비운도 모르지 않았다. 하토살군이 또 나섰다. "주공의 말씀이 백 번 옳으시오. 소신도 경험이......." "입 닥치라지 않았나? 자네에겐 묻지 않았다." 용비운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살군을 너무 핍박하지 마시오. 눈치는 좀 모자라도 무 덤을 파는 재주 하난 일품이니까." 하토살군은 움찔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주공께선 내가 도굴한 사실을 어떻게 알고 계시지?' 성궁의 정문 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안되오, 노협! 이것은 규칙이외다. 초대장이 없으면 누구라도 군 웅관을 통과해야 하오." 열 명의 경비무사들이 길을 막아선 채 음성을 높이고 있었다. 월 영성궁의 경비는 팔대전(八大殿)이 관리하는데 옥정성후 서매림을 안내하느라 우두머리들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⑦ "이놈들아! 분명 있었단 말이다." 경비무사들과 맞서 외치는 인물은 키가 불과 사 척밖에 안되어 보 이는 난쟁이 노인이었다. 얼굴까지 동안(童顔)이라 긴 수염만 없 다면 영락없이 어린애로 보여질 정도였다. 노인은 등에 자신의 체구보다 큰 보따리를 메고 있었는데 언뜻 보 기에도 그것은 무척 무거울 듯했다. 그는 한 손으로 보따리를 받 치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계속 품을 뒤적였다. "이게 어디로 사라졌지? 분명 잘 넣어 두었었는데." 경비무사들은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인 줄 아오? 어쨌든 우리도 도리가 없 으니 어서 군웅관을 통과할 생각이나 하시오." 크게 예의에 어긋나는 바는 없으나 그 말투에서는 상대가 볼품없 는 난쟁이여서인지 경시하는 느낌이 다분히 풍겼다. 노인은 짐짓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에잉!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그는 보따리가 무거운지 낑낑거리며 군웅관으로 향했다. '기인(奇人)이군. 일부러 장난을 치는 것이다.' 용비운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노인은 군웅관 앞에 보따리를 내려 놓았다. 쿵! 마치 거대한 암석이 떨어진 듯 둔중한 음향이 울렸다. 그 뒤로 군 웅관 위사들이 그를 방명대로 안내했다. "노협께서는 이 청강필로 대명을 기재해 주십시오." 그들의 대접은 한결 깍듯했으나 노인은 난색을 지었다. "이럴 땐 어찌하면 좋겠느냐? 노부는 글을 모르는데." 위사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들은 노인이 자신들을 우롱한다고 생각하고는 다소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뭐라도 표기는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어이구, 글을 모르니 붓만 보면 몸이 떨려서......." 위사장이 인상을 쓰며 청강필을 노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쓰시오. 그렇지 않으면 통과할 수......!" 그는 말을 멈춘 대신 구겨졌던 안면을 풀었다. 놀랍게도 노인이 백 근도 넘는 청강필을 잡더니 뚝 부러뜨렸던 것이다. '오오! 실로 가공할 내공이다.' 군웅관 안에서 한 명의 홍의녀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오만해 보이는 인상이 흠이긴 해도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녀였다. 키도 늘씬했고 몸매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홍의녀는 말채찍으로 손바닥을 탁탁 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위사장과 위사들은 그녀를 보자 허리를 굽혔다. "소궁주를 뵈오이다." 홍의녀는 단봉(丹鳳), 여의상아(如意嫦娥) 희비연이었다. 그녀는 난쟁이 노인을 보더니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한쪽에 놓인 그의 보따리로 옮겨졌다. "노협, 그 안의 물건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노인은 펄쩍 뛰었다. "안된다! 이것만은." 그는 얼른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멨다. 희비연은 한동안 그를 유심 히 살펴보더니 입을 떼었다. "혹시 노협께서는... 천종선옹(天鍾仙翁) 양천인(楊天引) 노선배 아니신가요?"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히죽 웃었다. "너는 희궁주의 그 망나니 여식인가 보구나. 고얀 녀석, 네가 내 정체를 밝히는 바람에 일이 재미없게 되어 버렸다." 천종선옹 양천인이라면 신주십대고수 중 일 인이다. 군웅관에 운 집해 있던 군웅들이 그를 향해 분분이 예를 올렸다. "선옹을 뵈오이다." 양천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계집애야, 어서 들어가자." "네, 양숙(楊叔). 질녀가 모시겠어요." 희비연은 대번에 양천인을 숙부로 만드는 넉살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위사장 등을 질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희들의 눈알은 도무지 쓸모가 없구나. 무림의 고인을 몰라 뵈 다니. 내 그 불필요한 것들을 말끔히 제거해 주겠다." "억!" 위사장과 위사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광경을 본 양천인이 재빨리 그녀를 잡아끌었다. "아이구, 계집애야! 네가 저들의 눈알을 빼버리면 그 후로 이 늙 은 숙부는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 희비연은 마지못한 듯 사면령을 내렸다. "내 숙부께서 만류하시니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하겠다. 그리고 그 인물이 나타나는 즉시 내게 알려라." "넷, 소궁주!" 위사장은 겨우 숨통이 트이는 듯 힘주어 대답했다. 잠시 뒤, 용비운 일행도 방명대로 다가섰다. 위사장은 한 번 혼쭐 이 나서인지 태도가 한층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 기명하시오." 용비운은 새로 마련된 청강필을 쥐었다. 한때 필체가 한(恨)이 되 기도 했던 그는 운익대서원에 있는 동안 열심히 가다듬어 버젓하 게 자신의 필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의 기명이 끝나자 목극렴과 하토살군도 차례로 청강필을 잡았 다. 하지만 그들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단지 목(木), 토(土)라 고만 썼을 따름이었다. 위사장은 방명록을 보다가 안색이 크게 변했다. <천마공자(天魔公子)> '소궁주께서 찾으신 인물이다!' 그는 죄과를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싶자 용비운을 앞질러 제 이관 으로 향했다. ⑧ 연못의 건너편까지는 거리가 오십여 장쯤 되었다. 수면에는 오 장 에 한 송이씩 연꽃이 둥실 떠 있었다. 이르자면 제이관은 경공술 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 희비연은 양천인과 함께 연못가를 지나고 있었다. "보따리 안에 든 건 양숙의 신물인 천종이죠?" "음, 맞다." "무게가 일천 근도 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힘들게 그것을 메고 다니세요?" 양천인은 보따리를 툭툭 쳤다. "괜찮다. 내 이 물건 덕에 남부럽지 않은 고수가 될 수 있었거늘, 이제 와서 어찌 아무곳에나 처박아 두겠느냐?" 이때, 위사장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소궁주, 천마공자라 기명한 인물이 나타났소이다.) 그의 전음에 희비연은 비로소 제이관으로 들어서는 세 사람을 돌 아보았다. (저들이 그 일행이냐?) 그녀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나란히 걷고 있는 목극렴과 용 비운, 하토살군 등의 세 사람을 차례로 훑었다. '으음, 필경 저 중간의 인물이 천마공자일 것이다. 그가 거느리고 다니는 수하들도 막강한 무공을 지녔다고 했지?' 그녀는 은봉 독고설과 옥정성후를 통해 천마공자에 대해 들은 바 가 있었다. 특히 음마 황음야도를 손쉽게 제거했다는 소리에 그녀 는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었다. '잠시 두고 보기로 하자.' 그녀는 양천인과 함께 한쪽으로 물러섰다. 용비운이 그녀의 옆을 스쳐지나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엉?' 희비연은 뜻밖의 추파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 저런 작자가 다 있지? 날 언제 봤다고.' - 다음 권에 계속 -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독 ㄳ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