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漆黑)/안숭범-
병원을 지났다, 누구는 지금도 아파할 것이다, 좀처럼 하지 않는 표정을 생각해
냈다, 반쯤 내려진 제과점 셔터가 주인을 두 동강 냈다, 살아남은 빵들만 냄새로
다녀갔다, 휴대폰이 오른손으로 기어 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했으므로,
누구와는 아무 숫자도 교환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구름은 또 거기서 서성
였다, 오늘 하루만도 수없이 저 길을 오갔다, 당신도 알 것이다, 그렇게 오는 밤
은 구름의 망설임을 머금는다, 버스가 멀리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다, 멀어지
는 것들 사이에 남은 건, 매연이거나, 사랑이거나, 매연 같은 사랑이다, 그런 식
으로 침침한 채 버스와 사람은, 서울역과 우체통은, 하수도와 전선은 곧잘 닮아
간다,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모든 불투명은 떠나기 위해 모인다, 기억을 능
욕했던 매서운 문장들까지, 문장 안에 가득 찬 너의 형식까지, 단지 병원과 제과
점과 버스 정류장을 지났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