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임의 이름 엠비는 'Boys, be ambitious'라는 클라크 박사의 말에서 따왔다. 40여년 전 모임이름을 정할 때 澹愚齋의 제안이 채택되어 한때는 '야심가들'이라는 뜻으로 'The Ambitious'로 부르다가, 결국엔 줄임말로 '엠비'라고 부르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어느 분의 MB라는 영문 이니셜과 같아서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였지만, '엠비'의 명칭은 우리가 원조에 가깝다.
지금 일본 홋카이도 대학의 표어(Motto)는 "Boys, be ambitious"이다. 윌리엄 클라크 박사가 한 명언이지만, 사실 영미권에선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말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만 유명한 영어 명언이다. 19세기 삿포로 농업학교 초대 부학장으로 있던 윌리엄 클라크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말이 일본 영문법 참고서를 거쳐 한국에 넘어온 것이다. 옛적에 한국 영문법 참고서가 얼마나 일본 책을 베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William Smith Clark 1826. 7. 31~1886. 3. 9)
신앙심이 깊었었던 클라크 박사는 이른바 외국인 초빙교사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건너왔다. 일본에서는 클라크 박사로 알려져 있다. 식물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일반을 영어로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세에 있어서도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고 한다. 선생이나 교사가 아니라 스승이었다고 할만 하다.
클라크에 대하여 북해도대학의 홈페이지에 실린 글을 살펴보자. 명치유신(明治維新) 초기, 일본이 새 나라로 탈바꿈하려던 시기에, 멀리 미국에서 클라크 선생이, 1876년 8월에 와서 삽뽀로 농학교(札幌農学校)를 개교하여, 겨우 9개월 동안 가르쳤다. 삽뽀로 농학교를 창시한 클라크 선생은, 1877년 4월 16일에 귀국할 때, 전별하러 나온 10여명의 제자들에게 마상(馬上)에서, ‘Boys, be Ambitious, (for Christ)!’라고 송별 인사를 한 다음, 눈길을 헤치고 달려갔다고 한다.
이 때, 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사람들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만약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클라크 선생에게서 직접 교육을 받은 삽뽀로 농학교 제1기생 오오시마 마사다께(大島正健)가, 마음에 깊이 새겨진 이 말을 기억을 더듬어 널리 전하고, 책으로 써 놓지 않았더라면, 이 말은 사라졌을 것이다. 클라크 선생에게 매료된 오오시마는, 그 후 모교의 교수가 되어 후배들을 가르쳤다. - 오오시마 著「클라크 선생과 그의 제자들」 ( 大島正建 著「クラーク先生とその弟子たち」(教文館)
▲클라크 박사 기념우표와 포플라 우표
▲윌리엄 클라크 박사 동상
누가 북한의 윌리엄 클라크 될까 <중앙일보, 중앙시평> 2015년 4월 9일
*글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일본 삿포로에 있는 홋카이도대학의 전신은 삿포로농업대학이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도약하고자 한 일본은 관료와 학자를 외국에 파견해 서양 문물을 수입함과 동시에 서양의 전문가를 일본에 초빙해 발전을 도모했다. 그 일환으로 일본 정부는 미국의 명문 리버럴아츠 칼리지인 애머스트대학을 졸업하고 매사추세츠농업대학(현재 매사추세츠대학교, 애머스트)의 총장이었던 윌리엄 클라크를 초빙해 삿포로농업대학의 설립을 준비시켰다.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금전이나 이기심의 증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야망이 아니라 지식과 의로움, 그리고 공동체의 고양을 위한 야망을 품어라”라는 유명한 연설은 바로 윌리엄 클라크가 1876년 개교한 그 대학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홋카이도대학의 박물관에는 윌리엄 클라크와 학생들이 겨울 산으로 야외 실습을 나갔던 일화가 소개돼 있다. 나무 꼭대기에 새로운 이끼가 보이자 클라크는 땅에 손을 짚고 엎드려 한 학생에게 자신의 등에 올라가서 그 이끼를 채집하라고 말했다. 학장의 등을 밟고 서는 것을 주저하며 신발을 벗으려는 학생에게 신을 신은 채로 올라가라고 재촉해 결국 그 이끼를 채집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읽는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때 50세였던 클라크는 이역만리에 와서 낮은 자세의 섬김을 통해 일본의 인재를 양육한 것이었다. 그의 감화를 받은 삿포로농업대학의 인재 중 한 명이 일본의 평화주의자이자 저명한 기독교 저술가인 우치무라 간조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북한 동포에게 다가갈까? 북한이 열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북한에 들어갈까? 어떤 이는 사업을 위해 북한에 갈 것이다. 기업을 세워 일자리를 만들고 돈을 벌려고 할 것이다. 현재 북한의 인건비는 베트남이나 미얀마 임금 수준의 3분의 2 정도이므로 일정 기간 동안 북한 진출 기업은 저렴한 인건비를 통해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한 개발을 위한 인프라 수요가 급증하면서 건설·토목 산업에 종사하는 다수의 근로자가 북한에 파견돼야 할 것이다. 북한의 금융산업은 거의 백지 수준이어서 한국의 금융기관과 인력의 북한 진출이 매우 활발해질 것이다. 다른 산업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북한 경제의 저개발 상태는 높은 자본 수익률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북한으로의 거대한 자본 흐름이 발생할 것이며 이에 따라 다수의 일자리가 북한 지역에 창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중 많은 일자리에서 남한 출신 근로자가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경제통합을 넘어 남북 주민의 마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윌리엄 클라크의 정신을 품고 북한에 가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가진 것과 우리가 먼저 배우고 익힌 것을 나눔으로써 북한 주민의 공감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북한 개발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의 역량을 강화시켜 이들이 개발을 주도하고 우리는 조력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래야 북한 주민들은 자신의 손으로 이룬 발전에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며 남북의 사회통합도 한결 수월할 것이다.
통일은 경제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남한에 대박이기 때문에 통일하자는 계산적 이해만으로는 통일의 추동력도 충분하지 않고 통일되더라도 상당한 후유증이 발생할 것이다. 통일은 남북 주민의 마음의 통합에서 비롯되고 완성된다. 그리고 마음의 통합에 있어 핵심은 상대적으로 더 가지고 더 많이 배운 남한 주민의 포용과 배려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의 통일 준비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북한 주민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통일을 위해 무엇이든 나누려는 의식이 우리 가운데 희박하기 때문이다. 2014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로 ‘북한 주민의 삶의 개선’을 선택한 사람은 불과 3.8%로 같은 민족이기 때문(42.4%), 전쟁 위협 해소(26.9%), 선진국 도약(17.6%)보다 훨씬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통일은 북한 주민에게 우리의 등과 어깨를 내어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북한 주민이 우리의 등과 어깨를 딛고 올라가 경제를 성장시키고 세계 시민의 당당한 일원이 되며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의 재능과 기술, 물질과 시간을 북한 주민과 탈북민을 위해 사용하려는 마음이 넘쳐날 때 통일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에도 축복이 될 것이다. 우리 인생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행복해지는 정도에 달려 있다. 그러기에 통일은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북한 주민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고상한 고민의 시작이 진정한 통일 준비다. |
첫댓글 젊은 시절 품었던 야망을 실현하셨습니까?
내가 야망이나 품었었나? 까마득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