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이생진(李生珍,1929~)>
다니다 보면...
그런 섬이 있다.
언젠가 와 본 듯, 언젠가 느껴본 듯
익숙하고 편안한 섬.
그런 섬을 만나면
아무 생각없이
한달포 그냥
그 섬에서 살아보고 싶다.
모처럼 그런 섬을 만났다.
여수 앞바다에서...
섬에서는 항상 육지와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섬은 그 어휘에서부터 색다른 향기가 난다.
그래서 섬은 언제나 내게 각별하다.
의미로운 섬 사도(沙島)에서 불유쾌한 불면의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서둘러 찾은 섬 아랫꽃섬, 하화도(下花島),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땅은 설렘이다.
우리나라 최다의 섬 보유군(郡)인 신안군은 천사의 섬에다 애써
촛점을 맞추기 위해서 굳이 섬의 정원을 1004개에다 맞추고
나머지 섬들은 대열에서 슬며시 제외시켰다는데,
이 곳 여수시는 소속된 섬들을 묶어 생일섬, 일년섬으로 이름 붙이고
모자라는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물 밑에 가라앉은 섬까지 불러내어 365개라고 우긴단다.
하화도도 그렇게 명명된 생일섬의 당당한 한 섬이다.
전남 여수시 화정면 하화리.
여수에서 직선거리 21km, 면적 0.71㎢의 가소롭도록 작은 섬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부분만 그렇다는 것이다.
이름 자체가 꽃섬이다.
그 주인공은 겨울 동백과 봄 진달래,
하지만 지금은 그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하지만 섬 하화도는 조금 특별하다.
골목길에도 물고기가 놀고 텃밭에서도 바다가 춤춘다.
꽃 섬에 꽃 질 때를 대비해서 약간의 애교를 섞었다.
알고 있다.
굳이 뒤를 보지 않아도 내 뒤에는 바다가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렇게 그림속의 바다를 등을 돌려 다시 확인하는 것은
섬이 나그네에게 던지는 깨알 같은 웃음이다.
여기는 하화도 아랫꽃섬, 그렇다면 웃꽃섬(上花島)도 있어야 말이 된다.
지척 거리인 상화도와 하화도는 면적도 사람수도 비슷하단다.
하화도는 38가구 60여명의 이웃들이 어깨를 붙이고 산다.
섬은 작아도 최소한의 인프라는 다 구축되어 있다.
친절한 매점도 있다.
보건소도, 발전소도, 심지어 교회도 있다.
이렇듯 매점에서는
안되는 것 빼고 없는 것 빼고 다 된다.
섬님(섬놈) 마음대로 팔고 멋대로 주인 노릇을 하지만
이웃 섬과는 달리 풍성하고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간밤에 묵었던 사도의 민박집에서는 단체 점심식사 주문 때문에
아침 밥을 해주기 곤란하다고 하여 뒤늦게 받아든 하화도의 아침 식사.
사도에서 먹었던 8,000원 짜리 그것에 비하여
6,000원 짜리 하화도의 질량이 오히려 낫다.
하화도의 자랑 하모(갯장어)탕에는 아침 댓바람부터 에너지가 넘친다.
조황과 물때만 제대로 맞춘다면 하화도에서는
갯장어 회와 갯장어 탕, 그리고 문어를 반드시 먹어 볼 일이다.
하화도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둘레길을 자랑한다.
총 둘레 5.7km에 달하는 이름하여 꽃섬길,
도란도란 에둘러가도 세시간이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가볍게 섬 한바퀴를 둘러볼 수 있는 그야말로 힐링의 길이다.
섬의 지형이 누구는 구두를 닮았다고도하고
누구는 옛날 어르신들의 곰방대를 닮았다고도 하고 혹자는 골프채를 닮았다고도 하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국자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는...
하화도는...
남쪽 해안(사진의 윗쪽)은 깎아지른 해식애가 발달하여 아찔한 절경을 이루고
북쪽 해안은 수심이 얕아서 이미 마을과 선착장이 들어섰고
그리고 해수욕을 하기에 알맞은 수심을 자랑한다.
봄볕 들판에는 며느리 내 보내고 가을볕에는 딸 보낸다고 했으니
얼굴 한가득 가을 볕을 담으며 차분히 고도를 높여본다.
이 섬에서 최고점의 고도를 높여봐야 고작 118m.
든든히 채운 뱃속, 높은 하늘, 싱그러운 해조음, 감칠맛 도는 갯내음...
나그네는 이럴 때 마냥 행복하다.
대부분의 섬들이 그렇듯 이 곳 하화도의 땅놀림도 치열하다.
하화도 농업의 대종은 콩, 마늘, 그리고 여기처럼 고구마 농사이다.
십년만 어려도 줄기 속에 슬며시 손을 넣어 한 뿌리 서리를 해 볼 텐데...
그런데...
사진으로만 보던...
고구마꽃이다.
행운의 전령이라는...
내 이름 석자에도 꽃이 들어있다.
내 아이디에도 꽃이 들었고(바람타고 떠난 꽃 한송이)
그리고 여기는 오래 전부터 명실상부하게 꽃섬이 아니던가.
꽃이 꽃의 섬을 만나 백년만에 온다는 행운의 꽃(춘원 이광수의 말)을 만났으니
이건 하늘이 내린 운명임에 틀림 없어~!
구석구석 곳곳에 꽃이 널렸다.
어디 꽃섬이라는 이름을 달게 해준 동백과 진달래만 꽃이던가.
여기 꽃섬길에는 그들 말고도 꽃이 지천이다.
나도 꽃,
철부지 너희들도 여기서는 당연히 꽃.
내 곁을 지키는 친구야, 너도 오늘만큼은 특별히 꽃으로 허락할게.
어느 순간 구절초가 섬을 덮었다.
섬바람에 구절초도 나부끼고 그 향에 취한 아이들도 나부낀다.
나도 덩달아 대책없이 나부끼고...
말로만 듣던 천상의 화원이 바로 여기 였던가.
음력 9월 9일에 줄기가 아홉 마디로 자라나서 꽃을 피운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구절초...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은 줄기채 캐어말려 부인병 치료제로 썼다는...
윤9월이 들어 9월이 두 번이나 든 올해는
특별히 더 오래 피어있을까...
꽃과 바다와 하늘과 숲 그리고 나그네는 저절로 한 몸이 된다.
이런 섬 분위기 도대체 얼마만에 느껴보는 거야?
친구야, 우리 지금 너무 행복하지 않니?
길 곳곳에 섬세한 배려로 나그네들의 안위를 살폈다.
길은 너무나 곱고 가을 볕은 너무나 화목하다.
이 느낌 이 공기를 더 먼 추억의 숲으로 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화도에는 넘들이 많다.
이 넘 저 넘, 넘은 넘어가는 고개라는 말이란다.
그래서 깻넘은 깨밭을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이란다.
앞서 구절초가 낭자했던 곳은 순넘밭넘,
순이네 밭너머라는 의미라고.
실바람에 약속이라도 한 듯 바다도 숨을 죽였다.
온통 출렁이고 나부끼고 넘실대는 것은 나그네의 심장박동 뿐.
바위틈을 알뜰히 메운 푸르름도 대견하다.
1월의 월평균 기온이 영상 1도 이상인 하화도는 그야말로 부동(不凍)의 섬이다.
그래서 어느 계절, 어느 세월에도 꽃을 볼 수 있는 섬이다.
한 발자국만 나가면...
작은 섬이지만 다양한 얼굴로 나그네를 다스린다.
심장을 얼렸다 녹였다...
간밤에 숙면을 반납한 사도와 그의 이웃 섬들이 지척이다.
그 뒤로 고흥반도와 나로호 발사대도 가물거리고.
이즈음의 일몰은 고흥반도 위로 떨어지고.
불과 1km남짓 서쪽, 둘이 같이 있어야 서로 말이 되는 상화도.
다음이 기약 된다면 상/하화도를 같이 도모해보는 것도 의미로울 터...
이래서 나그네는 다니면 다닐수록 그 욕심의 보따리는 더 커지게 마련.
섬에 가면 항상 뭍이 그리워지게 마련인데 오늘은 다르다.
수심으로 격리된 섬, 그 뭍으로부터의 이탈이 오늘은 좋다.
이 섬이 안락하고 익숙하다는 의미이다.
이 섬의 최고봉 전망대, 해발고도 118m.
막산은 이 섬의 마지막 봉우리라는 말.
여름철 백패킹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텐트 공간확보가 치열한 곳이다.
해발 118m의 정상도 명색이 정상,
정상에서의 막걸리는 우리의 필수 아이템.
태평양을 굽어보며 내 이름을 달고 있는 섬의 정상에서의 한 잔,
루이 13세 블랙펄이 부럽지 않은 순간이다.
제대로 맛이 든 무김치는 하화도 마을 회관에 계시는
할머니께서 손 큰 인심으로 듬뿍 싸주신 것.
짜지도 않고 무자체의 단 맛이 감미로왔던 훌륭한 안주였음을...
그 맛은...
지금도 입에 군침이 한 가득...
개도 막걸리는 인근 섬 개도에서 만든 생막걸리로
전라도 인근에서는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낚싯군들에겐 일찌기 대물 명당터로 명성이 자자한 무인도인 장구도,
섬의 형태가 전통 악기인 장구를 닮았다고하여 이름이 된 장구도는
조만간 출렁다리로 연결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약 1.4km의 훌륭한 산책로가 새로 생긴다고.
낚시 채비해서 다시 찾아야할 명분이 생겼다.
하산한다.
무려 해발 118m에서...
고도가 낮아지면서 구절초들이 다시 꽃섬의 자태를 회복한다.
이만큼 화사한 꽃길이라면...
남해 용궁의 아들만 불러내고 면사포만 쓰면 딱인데...
이 향기를 맡으며
이 가을 구절초 꽃길을 걸어본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저들은 이미 행복에 겨웠다.
손을 맞잡는 것도 아쉬워 이미 한 몸이 되었다.
저들의 탓이 아니다.
다 가을 꽃섬 탓이다.
눈으로 향기로 피부로 이미 이 가을은 질식을 한다.
나그네는 그 가운데서 뜻밖의 포식을 한다.
이 세상에 모든 가을이 여기서 여물고 있는 중이다.
어쩌란 말이냐, 가련한 이 나그네는...
내일의 일상이 뭍에서 빨리 오라고 맹렬하게 손짓을 하는데
날 어쩌란 말이더냐,
꽃길을 힘들여 벗고보니 이번엔 바다가 품을 벌린다.
언제 부터인가 바다에서도 꽃 향기가 나기시작한다.
큰 일이다. 이러다가 이 섬을 떠날 수는 있을까.
하화도는 백패킹 마니아들에게는 천국이다.
야영지도 훌륭하게 조성되어 있고 화장실 샤워실
그리고 섬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수도 시설까지 마을에서 제공한다.
많을 때는 이 길의 대부분이 캠핑족들이 차지하고
바로 앞 바다는 당연히 그들의 수영장으로 바뀐다.
하지만 철지난 바다는 한적함 그 자체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구절초들이 바닷가까지 따라나와 나그네의 발길을 잡는다.
저멀리 오늘 나그네가 당도해야 할 백야도가 아쉬움처럼 떠 있고.
길이 끝나는 곳까지 꽃섬의 이름값을 더하고 있다.
두고 떠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섬.
하화도의 공정여행을 실천하는 곳.
마을회관.
섬 어르신들이 울력을 모아 나그네들의 편익과 그에 편승하여
주민들 소득도 올리고 서로를 주고 받는 공간.
배시간이 아무리 급해도 절대로 이런 장면을 비껴가지 않는 게
나그네의 불문율.
아울러 막간을 이용하여 승선권도 끊고...
하화도에서의 승선권은 이장 할아버지의 절대 권한,
오늘 이 분 눈 밖에 나면 주구장창 섬에서 살아야 한다.
고구마나 캐고 마늘이나 심으면서...
이장 할아버지는 뿐만아니라 민박도 같이 하신단다.
이 번에는 하화도 꽃섬길 5.7km를 완주한 명분을 섞어서 새로이 한 병,
배 떠나기 전에 하화도와 송별잔을 나눈다.
불현듯 친구가 묻는다.
산 막걸리와 섬 막갈리...
어느게 더 맛 있느냐고...
친구야~
한 번만 더 그런 수준 낮은 질문하면...
나한테 맞는다~!
부추전...
5,000원...
시절이 하수상하여 갯장어도, 문어도 하화도에서 먹지 못했지만
부추전에 막걸리 한잔...
캬아~~~!
해조음과 갯내음으로 버무린 어르신표 김치 맛도 일품이었다.
바로 아침에 우리에게 싸 주신 그 무김치이다.
하화도에 상륙하여 불과 다섯 시간,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은 섬,
그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으니...
내 이름을 닮은 섬, 꽃섬,하화도...
그 곳에서 담아온 그 향기는 아무래도 이 가을의 끝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매혹적인 섬 하화도.
일상을 포기할 수 없다면,
그 섬에서의 한달은 어렵겠지?
그렇다면.
한 닷새만 살아도 좋을 그곳에서.
하화도에서 닷새를 살면...
하루는 햇살에 취하고
하루는 달빛에 취하고
그래도 이 섬에 체온이 남으면
하루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하루는 막걸리도 떠다놓고
그래도 이 섬에 미련이 남는다면
나머지 하루는 살면서 쌓아온
세상의 그리움을 지우면서 지새다가
시인처럼 뜬 눈으로 살아보자.
한 닷새만이라도
이 꽃섬에서....
-꽃섬에 취한 어느 나그네의 졸시-
그렇게 한 닷새만 살아도 그 섬은 아름다운 곳.
하화도~!
첫댓글 저 섬에서
평생을 살자
저 섬에서
평생을
두 눈 감고 살자
저 섬에서
평생을
정치하는 년놈들이 없어질 때까지
두 눈 두 귀 막고 살자
퉷~!
심기가 많이 불편해뵙니다그려...
마지막 문장은 꽤 과격하신듯요~ ㅎㅎㅎ
저도 혼자서 일주일만 마구마구 다녔으면 좋겠어요.
남편도 직장도 아이들도 다 놓고 딱 일주일만 여기저기
방랑시인처럼~~~ 김작가님 여행후기 볼때마다 점점
더 바램이 커가네요 ^^
아이 키우는 엄마들에겐 쉽지 않은 게 여행이지요.
하지만 엄마도 휴가가 필요해~ 하고 과감히 떠나보심도...
그 전에 아이가 몇 살인지 부터 여쭈어야 순서인가요? ㅎㅎ
@김작가 무박으로 가는건 허락을 해주는데 며칠 여행 하는건 허락을 안해주네요.
저희 첫째가 중1 둘째는 초2 셋째가 5살 아무래도 셋째 때문에 어렵답니다 ^^
@지구 아~ 엄마의 자유는 당분간 보류해둬야겠네요.
첫째가 막내를 케어할 수 있을 날이 머지 않은듯요! ^^
가는 방법은요? 정말 한 번쯤 꼭 텐트치고 푹 빠져보고 싶어요
어느계절에 가면 이것저것 다 느끼고 맛 보고 올 수 있을까요
가는 방법은 여수 백야도에서 배타고~^^
저는 가을에 가본 터라 다른 계절에 대해서는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봄 가을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이런 섬하나 갖고 싶네요.......
헐~ 밝은달님! 배포도 크셔라~ ㅎㅎㅎ
섬도 섬,꽃도 꽃이지만 작가님의 맛깔나는 글솜씨에 푹 빠져 감상하고 갑니다.
이 섬은 그냥 작가님의 글속에서만 만날려구요....
실제 가보면 지금 느꼈던 이 섬의 이미지가 변할랴 싶어서요~
노노~ 직접 가서 보면 훨씬 좋은 섬일 거예요. ^^
한국의 100대 명산 답사를 모두 끝내시면
우리 나라 3500개 섬 투어를 기획해보심이 어떠신지요? ㅎㅎㅎ
ㅎㅎㅎ
이름도 미소도 참 예쁘시네요~^^
김작가님 이름을 닮은 하화도!
첨 듣고 첨 보았지만 우리네 산천 어디쯤엔가 있을듯한 아름다운 섬이네요.
시간 내서 닷새만 살다오세요
좋은일만 있을것 같은데~
^^
한달이 아닌 닷새만 머물러도 좋을 곳!
예쁜글씨님께도 추천해드립니다.
힐링이 필요할 때, 제 이름을 닮은 그 섬, 하화도를 기억하세요~^^
@김작가 기억하리다^^